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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워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

열왕기하 조용기 목사............... 조회 수 2237 추천 수 0 2009.12.14 16:5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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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왕하6:14~17 
설교자 : 조용기 목사 
참고 : 2008. 4. 13. 주일설교말씀 
두려워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
<서론>
오늘은 "두려워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 이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열왕기하 6장 14절로 17절에 보면은 아람 왕 벤하닷이 이스라엘을 공격하여 점령하려고 무수히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군 작전을 짜고 난 다음에 보면 꼭 출정할 곳에 이스라엘 군대가 미리 알아 매복해 있어서 실패하곤 했습니다. 나중엔 왕이 가슴을 치고 통탄을 했습니다. 간부 회의에 모여서 "우리 가운데 스파이가 있다. 우리가 작전계획을 하기만 하면은 이스라엘 왕이 먼저 알아서 군대를 파견하여 매복시키니 이 왠일인가. 누가 스파이가 있는 것을 찾아내지 못할 것인가." 호통을 쳤습니다. 그러자 그들 장관 중 한 사람이 "왕이여, 이스라엘에는 엘리사라는 선지자가 있어서 왕이 침상에서 혼자 생각하는 것조차 다 알아서 이스라엘 왕에게 보고를 하나이다." "그러면 엘리사를 잡아라!" 보고가 들어오기를 엘리사가 도단성에 들어와서 하루 밤을 지낸다는 말을 듣자 전군을 동원해서 도단 성을 포위했습니다. 첩첩이 군대와 마병을 통해서 포위를 했습니다. 엘리사의 종이 아침 일찍 일어나서 밖에 나와서 기지개를 켜고 숨을 크게 들이쉬고 양편을 바라보니 안개가 자욱한 가운데 뭐가 번쩍번쩍하고 펄럭펄럭 깃발이 날리거든요. 가만히 살펴 보니까 온 천지가 아람군대의 깃발과 창검이라. 그는 혼비백산했습니다. 피가 모두다 아래로 쏟아졌습니다. 그는 벌벌 기어서 방안에 들어가서 "엘리사 선생이여, 큰일 났습니다. 아람 군대가 온 성을 첩첩히 둘러 쌓여서 쥐새끼 한 마리도 도망칠 수가 없습니다." 그러자 엘리사가 "가만히 가만히 있어. 앉아. 우리와 같이 계신 이가 저보다 같이 있는 것보다 많다." 어떻게 해요? 하나님이여 이 젊은이에게 눈을 뜨게 하사 실상을 보고 알게 하소서. 이 종이 기도하자 젊은 시종이 눈을 뜨고 보니까 아람군대와 엘리사 선지자 사이에 하늘의 불말과 불병거가 장벽을 치고 있었습니다. 감히 아람의 군대가 한사람도 엘리사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첩첩히 하늘의 불말과 불병거가 둘러쌓였습니다. 그 결과 엘리사는 아람군대를 모두다 포로로 잡아 다시는 벤하닷이 감히 이스라엘을 넘나보지 못하게 만들고 만 것입니다. 이 사실이 우리에게 굉장한 교훈을 주는 것입니다.

<본론>
1. 사방에서 우겨 싸는 죄의 유혹
왜냐하면 우리가 사는 인생길에는 사방에서 우리도 우겨 싸여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평안하게 살려고 해도 우리 주위에 영적인 아람군대가 첩첩히 둘러싸서 우리를 포위, 공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가장 무서운 것이 죄인 것입니다. 죄는 마음에 유혹을 가져와서 우리를 포위하고 우리를 끌어내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조차도 죄가 아담을 포위한 것입니다. 에덴에 있었던 유혹을 보면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는 먹지 말라. 내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나님 말씀하셨는데도 불구하고 마귀가 진을 치고 둘러 싸서 아담과 하와에게 꽸습니다.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창 3:4~5)고 유혹을 했습니다.
그들은 유혹에 둘러쌓여서 그것을 이겨내지 못하고 유혹의 포로가 되고 넘어지고 만 것입니다. 우리 제2의 인류 조상인 예수님도 유혹에 둘러쌓였습니다. 40주 40야 금식하시고 나오실 때 마귀가 예수님을 유혹한 것입니다. 물질적인 유혹, 명예적인 유혹, 부귀 권력적인 유혹을 예수님께 가한 것입니다. 물질적인 유혹으로는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마 4:3) 배가 고프니까 만사를 제켜 놓고 금강산도 식후경인데 돌덩이를 떡으로 만들어 놓고 난 다음에 무슨 일이든 하라고 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보다 식욕을 더 앞세우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이 세상에 살면서 육신의 정욕으로 포위되어 있는 것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육신의 정욕으로 부패하고 포위되어 있어서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는 163개의 율법을 가지고서 우리에게 이를 지키라고 하는 것입니다. 육신의 부패한 욕심이 얼마나 많기 때문에 163개의 율법으로 우리를 둘러 싸놓고 이를 지키라고 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남자에게는 227개의 율법을 주어서 우리의 육신의 정욕을 제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살면서 227개의 율법을 어떻게 지키며 163개의 율법을 어떻게 지킵니까? 그러므로 율법으로써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습니다. 도무지 인간은 좋은 행위를 해서 선한 행동으로 율법을 지켜서 구원 받을 도리가 결코 없을 만큼 육체가 부패로 포위되어 있고 육신이 정욕으로 포위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조차도 육신의 정욕으로 포위를 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라" (마 4:4)
그러자 예수님을 명예욕으로 또다시 유혹했습니다.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고 사뿐히 내리면 만인이 박수를 치고 네가 명예와 영광을 얻을 것이다. 오늘날 명예욕은 무섭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명예욕에 고통을 안 당하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어느 곳에 가나 남보다 내가 칭찬을 받고 인정을 받고 높아지기를 원하는 것은 인지상정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짓밟고 일어나서 하나님의 영광을 빼앗아서 자기 영광을 삼으라는 유혹에 떨어져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명예를 구하는 것은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신앙을 저버리고 명예를 취하면 그는 파멸하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마 4:7)고 명예욕을 거부했습니다. 그러자 부귀, 권력으로 그를 유혹한 것입니다.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마 4:8-9)
부귀, 영화 공명이 얼마나 좋습니까? 높은 지위를 얻고 부를 얻고 공명을 얻는 것 싫어할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모두 다 잘 먹고 잘 입고 잘살고 영화를 누리기를 다 원하지요. 그러나 그것이 나쁘다는 말은 아닌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앞세우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부귀, 영화, 공명은 독약이 되고 파멸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당장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마 4:10)
그래서 주님은 그를 둘러싼 유혹을 물리친 것입니다. 우리는 유혹의 오염 속에 살고 있습니다. 대기가 지금 배기가스로 오염되어 있지 않습니까? 강물이 오염되고, 호수가 오염되고, 공기가 오염된 것처럼 우리 주위에는 모든 도덕적인 오염으로 꽉 들어차 있는 것입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 세상 자랑이 오염되어서 우리에게 끊임없이 첩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2장 16절에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살면 우리를 답답하게 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제일 답답하게 하는 것이 가정의 부부 갈등인 것입니다. 부부간의 갈등이 생기면 해결할 수 없는 어려움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불화가 다가오고, 자녀의 방종, 경제적인 어려움 이러한 가슴을 답답하게 하고 아침에 일어나면 간이 턱턱 내려앉고 가슴이 철렁하는 일들이 항상 있습니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치고 답답한 일을 안당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사는 그 자체가 답답한 일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10장 35절로 36절에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원수가 집안 식구가 되어서 고통을 갖다 줄때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사회적인 갈등이 얼마나 많습니까?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의 갈등, 이웃 간의 의견 갈등, 정치적인 갈등, 노사 갈등, 빈부 갈등, 사상 갈등 등 사람 사는 그 자체가 갈등인 것입니다.
지난 4월 5일자 인터넷 신문에는 한국결혼문화연구소에서 이혼자 2천 2백 명을 대상으로 이혼사유와 결혼기간을 조사하여 발표했습니다. 일반적으로 결혼 초 4년 이내에는 가족의 갈등이 부부 이혼의 주요 원인이었습니다. 시아버지, 시어머니, 시집 식구들과의 갈등이 이혼의 중요 원인이었고, 결혼생활 어느 정도 한 이후에 약 8년 이상은 배우자의 부정이 이혼의 가장 큰 원인이라는 것입니다. 그 밖에 '60년대는 간통 이혼, 2000년대는 경제 이혼'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배우자의 경제적인 무능력이나 무절제한 소비생활 등으로 이혼하는 부부가 많았습니다. 그런가 하면 월간지인「아버지와 가족」에서 수도권에 거주하는 30대에서 40대의 기혼 남녀 204명을 대상으로 부부갈등에 대한 설문 조사를 했는데 부부의 75%가 의견충돌로 결혼생활에 위기를 느낀다는 것입니다. 서로 이해하고 동정하고 사랑하고 양보할 줄 모르고 자기 고집만 세웁니다. 남자는 남자, 아내는 아내, 자기 고집만 세워서 그 갈등이 위기를 초래한다는 것입니다. 부부의 갈등 원인으로 성격차이가 가장 높았는데 남자는 68%, 여자는 58% 그 다음 남편은 자녀교육 문제로 48%, 부인은 시부모 문제 32%가 갈등의 원인으로 지적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이혼율은 매우 높습니다. 자녀교육이나 경제적 문제, 부부갈등의 문제는 우리를 답답하게 하는 일들인 것입니다. 해결책이 없어요. 저에게도 부부갈등 문제로 끊임없이 신앙상담으로 오는데 두 분을 만나보면 한사람 한 사람 말은 다 옳아요. 남편 말 들어보면 남편 말이 옳고, 아내 말 들으면 아내 말이 옳고, 둘이 갖다 놓으면 둘이가 다 옳지 않고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많은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으면 또 예수 믿고 세상에 산다면 답답한 일은 천국인들은 핍박을 당하는 것입니다. 세상 문화와 그리스도인 문화가 다르기 때문에 갈등을 당합니다. 우리 한국에는 정초에 제사문제로 말미암아 갈등을 당하는 가정이 많지 않습니까? 사회생활에서 신앙문화와 우리한국의 고유문화와의 갈등으로 말미암아 가족 간의 대결을 할 때가 많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사람들이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예수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의 삶의 목적이 다릅니다. 세상 사람들은 부귀, 영화, 공명을 얻는 것이 목적이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목적인 것입니다. 저를 잘 아는 사람 한 사람이 나를 찾아와서 "조 목사, 큰 교회 목회하니까 은퇴하기 전에 한몫 잡고 은퇴하라! 어떤 회사도 회장이 은퇴하기 전에는 한몫 잡는데 아이 조용기 목사도 한몫 잡아서 우리도 좀 나누어 주고 참 잘살게 해줘!" 도무지 인생의 삶의 목적과 가치가 다릅니다. 내가 그 사람에게 "이 사람아, 예수 믿는 것이 있는 것 다 주님께 드리고 하나님 섬기고 손털고 떠나는 것이 그리스도의 신앙생활이다. 우리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늘나라가 임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그러니까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고 "당신 정신병 들린 것 아니냐? 무슨 말을 그런 말을 하느냐? 세상에 부귀, 영화, 공명을 누리는 것이 목적이지 하늘나라가 어디 있으며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그와 같은 말을 합니다. 삶의 목적이 다르기 때문에 생각이 다르고 말이 다르고 행동이 다른 것입니다. 삶의 가치가 완전히 다르지요. 우리의 가치는 주님을 영화롭게 하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영생복락을 누리는 것이 우리의 가치지만 세상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세상 일락을 가치로 삼습니다. 삶의 방식이 다르지요. 우리는 성수주일하고, 십일조 드리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희생하는 것을 즐겁게 여기지만 믿지 않는 사람은 주일날도 안 지키고 "십일조는 왜 주께 드려요? 있는 것조차도 다 빼앗아 가려고 하는데.." 그리고 사고방식이 틀려서 세상 육신이 중심으로 살고 있지 않습니까?
마태복음 5장 11절로 12절에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예수 믿는다고 해서 핍박당하는 생활이 끊임없이 많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 때문에 순교 당하는 일도 종종 있는 것을 봅니다. 지금 우리나라에는 과거 우리 선조들이 순교를 당했기 때문에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있지만 지금도 순교 당하는 성도들이 세상에는 많아요. 로마시대에는 10대 황제가 엄청나게 초대교회를 핍박해서 수많은 사람이 원형극장에서 횃불이 되어 불에 타죽고 사자에 찢겨 죽은 것입니다. 이와 같은 순교의 고통이 다가온 것입니다. 대원군시절에 우리 한국에 순교당한 숫자가 만여 명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일정 핍박시대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핍박을 당했으며 공산치하에서 교회가 공장으로 변하고 성도들이 노동수용소로 끌려가고 죽고 했지 않습니까?

2. 우리가 알아야 할 일
우리가 어찌해야 되겠습니까? 이 세상에 살면서 사방으로 죄가 우겨싸고 세상 문제가 가슴을 눌러 답답하고 우리가 핍박을 당하고 혹은 죽임을 당하는데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되겠습니까? 불안하고 초조하고 좌절하고 절망해야 되겠습니까? 아니면 우리가 담대하게 설수 있습니까? 우리가 어찌해야 될 것입니까?
열왕기하 6장 16절이 거기에 대한 대답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한번 다같이 6장 16절을 읽어 보십시다.
"대답하되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 하고"
우리가 환경을 바라보지 말고 우리 속을 바라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환경을 바라보면 원수가 끊임없이 둘러 진치고 원수의 창검과 깃발이 휘날리지만 엘리사가 기도한 것처럼 우리가 기도하면 우리 속에서 하나님이 마음속에 꿈과 환상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 한 자가 원수보다 많다는 것을 알게 되고 함께 한 내적인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하면 넉넉히 이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4장 4절에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
여러분 안에 누가 계십니까? 여러분 안에는 옛날에는 반역의 영, 원수 마귀가 들어와 있었습니다만 예수 믿고 난 다음 여러분 속에는 하나님의 성령이 와서 계시고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과 아버지가 와서 계신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 성전에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와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 눈을 밖으로 돌리지 말고 우리 마음속으로 돌려서 우리 속에 누가 계신지를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것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 들이고 하나님께 의지하고 나가면 우리가 이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의지할 자가 있으면 마음이 담대해지잖아요. 밤길을 걸어갈 때 어린아이라도 하나 손에 잡고 가면 마음이 든든해지는 것입니다. 하물며 우리 인생에 천지와 만물을 지으신 삼위일체 하나님이 우리 속에 같이 계셔서 동행하고 동거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면 마음이 든든해지고 믿음을 가질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염려하고 근심하면 우리는 자살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어느 심리학자는 염려를 '느린 형태의 자살'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염려를 하는 것은 자기 스스로 자살하는 것이다. 의사인 W. C. 알바레즈는 위장 장애의 80%는 염려와 두려움에서 온다고 말한 것입니다. 염려와 두려워하면 거의 위장병이 생기거든요. 우리 체험으로 심장도 뛰고 머리도 아프고 잠도 안오고요. 염려는 영어로 '워리'(worry)라고 말하는데, 독일 말에는 '위르겐'(wyrgan)이라고 말하는데서 유래되었습니다. 워르겐이란 말은 '목을 졸라 죽인다'라는 것입니다. 염려라는 것은 두려움으로 인한 염려는 목을 조이듯이 다가와 우리의 시각을 흐리게 만들고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이처럼 두려움과 염려는 삶에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일을 할 수 없게 만드는 것입니다. 더욱 염려는 영적 무력증을 일으켜서 영적 감각을 잃게 하여 무력감에 빠지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의 돌보심을 믿음으로 확신해야 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영적인 눈도 띄워지고 눈앞의 적병보다 더 많은 하나님의 불 말과 불 병거가 우리 마음속에 둘러 진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영적인 세계를 들여다 봐야지 물질적인 세계를 들여다봐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안믿는 사람은 영의 눈이 없기 때문에 영적인 세계를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사람은 물질적인 세계를 보는 육안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세계를 바라보는 영안이 열려 있는 것입니다. 영안을 통해서 하늘나라가 우리와 같이 계신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영적인 세계인 육신적인 세계를 정복하고 지배하고 다스리는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물질적인 세계는 3차원 세계지만 영적인 세계는 4차원의 세계로 차원이 높은 것입니다. 높은 차원이 낮은 차원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하지 말고 놀라지 말고 눈을 영적으로 향해서 믿음으로 서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느 곳에 가나 비교 우위에 서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물질적인 세계가 다가와도 우리키를 비교해 보면 우리가 키가 크다고요. 주먹을 물질세계가 주먹을 내밀면 우리가 믿음으로 주먹을 내밀면 우리 주먹이 크다고요. 물질적인 세계가 다가오면 우리가 비교해 보면 우리 등치가 더 크다고요. 물리적인 법칙으로도 큰 자와 작은 자가 부딪치면 작은 자가 물러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기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사방으로 우겨 싸도 싸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우겨 싸려고 해도 우리 등치가 너무 크기 때문에 우겨 싸여지지 않습니다. 왜 우리 등치가 큽니까? 하나님이 우리 속에 계시기 때문에 세상 것으로 우리를 우겨쌀 수가 없습니다.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답답해도 하나님이 천지를 지으신 그 능력으로 같이 계시므로 하나님 앞에서 모든 문제는 사라지고 마는 것이기 때문에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핍박을 당해도 버림받지 않는 것은 세상이 우리를 핍박해도 천지와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이 우리를 품에 품고 계시니 우리가 버림당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핍박당할수록 하나님께서 더 사랑하시고 더 품어 주시고 더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거꾸러져도 망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망하려고 해도 불사조처럼 도로 일어나는 것이 우리 성도인 것입니다. 죽은 자도 부활하는데 우리 생활과 사업이 죽었어도 하나님 또 부활시키는 것입니다. 더 낫게 부활시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7절에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위대해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심히 큰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와 계시므로 세상 것으로 아무리 둘러싸고 짓밟고 거꾸러뜨린다고 하더라도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우리 속에 계시므로 하나님은 짓밟히지 아니하고 둘러싸이지 아니하고 거꾸러지지 아니하는 능력을 가지고 계신 것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3. 우리가 살아갈 길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갈 길은 영적인 실상을 바라보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환경보다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항상 하나님을 바라보고 사는 우리들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하늘을 쳐다보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보고 하늘을 들어 별들을 헤아려 보라고 한 것 처럼 하늘을 바라보고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헤아려 보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7장 24절에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다 되신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13장 5절로 6절 다같이 읽어 보십시다.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주님께서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므로 우리가 담대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어느 선교사의 간증을 제가 읽었는데 불신의 종족들 가운데 복음을 전하러 갔는데 하루는 밤중에 믿지 않는 불신의 종족들이 횃불을 들고 손에 손에 몽둥이와 창검을 들고 이 집을 불태우고 선교사 부부를 죽이러 왔었습니다. 군중들이 모여오는 것을 보고 부부가 엎드려서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우리는 단둘이인데 저 부족들은 떼가 많고 횃불을 들고 창검을 들고 오니 우리가 감당할 수 없습니다. 우리를 지켜 주소서." 간절히 기도했었습니다. 바깥에서 고함을 치고 꽹과리를 치고 발을 구리고 야단법석을 하면서도 집에 불을 붙이지 않고 다가오지 못하거든요. 거리를 두고 야단법석을 하더니만 일제히 돌아서서 걸음아 나 살려라고 도망을 쳤습니다. 아침까지 와도 조용하고 아무도 찾아오지 않고 그 일 지나고 난 다음 1년 동안 선교사들을 감히 공격하거나 욕하지 아니하고 모두다 친절히 대하고 굽신 굽신 했습니다. 그 다음 1년이 지난 후 그 추장이 회개를 하고 예수를 믿고 난 다음에 선교사 집에 자꾸 와서 자꾸 두리번 두리번 찾거든요. "무엇을 찾느냐?" 하니까 "1년 전에 우리가 여기 왔을 때 이 집을 둘러싸고 있던 그 군병들이 어디 갔습니까? 빛난 옷을 입고 수많은 군인들이 집을 둘러싸고 있는데 우리는 혼비백산했습니다." "군인들이 없는데요. 그 누굴까요? 그래서 그날이후로 우리는 그 군인들이 어디에서 숙식을 하는가 찾아보려고 스파이를 보내서 아무리 찾아봐도 온데 간데 없어요. 없어진 것이 하기야 맞기는 맞군요." 그러니까 선교사가 "그는 육신의 군대가 아니라 하나님의 천사들이 와서 우리를 보호해 주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들을 결국 보호해 준 것은 하나님의 천사들이 엘리사를 보호한 것같이 보호해 준 것입니다. 오늘날도 여러분 우리들은 우리 주변에 하나님의 천사들이 끊임없이 보호한다는 것을 알아야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고 그를 의지하면 하나님이 그 사자들을 보내어서 우리의 모든 길에서 우리를 지켜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뱀과 독사를 밟으며 젊은 사자와 뱀을 발로 누룰 수 있는 권세를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자신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믿고 난 다음 자기가 어떠한 신분을 가졌는지 이해를 못합니다. 우리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바 되었으며 마귀의 자식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며 육의 자녀에서 영의 자식으로 거듭났으며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되고 예수님이 우리 구주가 되고 성령이 우리 보혜사가 되고 천군천사가 우리의 병사들이 되어서 우리와 함께 거하는 것입니다. 육신으로 보면 약하게 보지만 영적으로 보면 거대한 군대인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육의 눈으로만 자기를 보고 환경을 봐서는 안되고 항상 영의 눈이 깨어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는 우리가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부흥사였던 길선주 목사님은 임종 시에도 그를 둘러 서 있는 사람들을 향해 "하늘에서 전보가 왔으니 이제 가봐야 되겠다. 안녕히 계세요." 그리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죽음 앞에서 목사님은 슬퍼하지 않으시고 떠나신 것입니다. 죽음조차도 우리에게 원수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디엘 무디 목사님은 임종시에 눈물을 흘리는 아내와 자녀들에게 "땅이 물러간다. 천국이 열리고 세계가 내게로 다가온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는구나. 내가 너희들 보다 먼저 가겠다!" 그리고 눈을 감았습니다. 여행 떠나는 것이지 죽어 고통을 당하는 것이 아니었었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조차도 우리에게 두려움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구세군의 창시자였던 윌리암 부스의 아내였던 캐더린 부스는 임종시에 "이제 나는 죽는다 죽는다기 보다는 오히려 더 나은 생애가 시작되는 것이 눈에 보이는구나. 이제 와서 보니 죽음이야말로 아름답고 귀한 것이구나" 이렇게 말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태어난 이후로 이 세상에 염려, 근심, 불안, 초조, 절망, 고통에 휩싸여 살면서 고난당할 뿐 아니라 사람에게는 최고로 가장 무서운 것이 죽음인 것입니다. 죽음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살지만 실제로 언제나 죽음은 가능성적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를 믿는 사람은 살아있을 동안에 하나님이 불말과 불병거로 우리를 지켜줄 뿐 아니라 죽음 그 자체조차도 영광에 들어가는 기회로 삼아주시는 것입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있을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내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나 있는 곳에 너희도 함께 있게 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위해서 처소를 예비하고 여러분의 때가 차면 여러분을 데리러 오셔서 여러분과 함께 천국에 들어가서 영원히 살게 만들어 주시는 것이므로 우리의 국적은 이 땅에 육신으로 있을 뿐 아니라 영적으로 영원한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희망은 이 땅에서 끊어지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계속 되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썩어질 것을 향하여 살지 않고 썩지 않고 영원히 있을 것을 향하여 사는 우리들이 다 되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동안에 항상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만 맺고 있으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그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이가 그 아들과 함께 무엇을 선물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환란이나 곤고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기근이나 죽음이나 칼이랴 이 모든 일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면서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놓치는 것은 너무나 큰 비극인 것입니다. 안 믿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서 대적 하고 있지만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가 끊어져서는 안 되고 그것이 훼방되어서도 안 될 것 입니다. 요한일서 1장 5절로 10절 우리 다같이 읽어 보십시다.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죄를 짓지 않는 의인이 이 세상에 누가 있습니까?
여러분 한 주간 동안 한 번도 죄를 안 지은 사람 손들어 보세요. 내가 표창 할테니까? 아무도 없잖아요 사람이 죄를 안짓고 어떻게 삽니까? 이 세상에 혼탁한 세상에 사니까 사람이 다 넘어지고 쓰러지고 걸리고 상처입게 되는 것입니다. 안하면 제일 좋지요. 안해야 하나님과 가까이 할 수 있으니까 가장 좋지요. 그러나 이 세상은 죄를 짓기 때문에 죄 없다고 변명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죄 없다고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너희가 죄를 짓는 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될 일은 매일같이 하나님의 법에 의지해서 우리의 죄를 고백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최소한도 지켜야 될 법이 십계명입니다. 613개의 법은 다 지키지 못해요. 불교가 말하는 227개의 법을 다 지키지 못해요. 최소한도 십계명을 통해서 우리에게 비춰봐야 되는 것입니다.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우상에 절하지 말라.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 안식일을 거룩히 지켜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네 이웃을 거짓증거 하지 말라. 네 이웃을 탐하지 말라. 최소한도 십계명을 우리가 마음에 간직하고 여기에 비춰 보아서 우리 죄를 회개하고 자복하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이 무엇이 다릅니까? 안 믿는 사람은 회개하지 않습니다. 자복하지 않습니다. 십계명이 있어서 비춰보고 잘못을 고백하느냐 하면은 그렇지 않습니다. 믿는 자의 다른 점은 우리가 십계명을 항상 마음에 비춰보고 넘어질 때마다 회개하고 자복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늘 씻는 사람하고 씻지 않는 사람하고 세월이 지나보면 누가 더 때가 많습니까? 안 씻는 사람은 때 덩어리지요. 늘 씻는 사람은 때가 묻어도 적게 묻지요. 여러분, 우리는 항상 예수님의 보혈로 씻어서 정하게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과 교통함이 있는 것입니다. 어두움에 처해있지 말고 항상 빛을 향해서 돌아서는 우리들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믿고 항상 입술의 고백을 강하게 잡아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신앙이란 입술의 고백인 것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고백을 강하게 하는 것이 우리 신앙인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속으로만 몰래 가지고 있는 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입술의 고백입니다. 혼자서도 고백하고 이웃 사람에게도 고백하고 하나님 앞에서도 고백하고 세상사람 앞에서도 고백해야 되는 것입니다. 신앙의 고백이 우리의 믿음을 굳게 잡아 주는 것입니다.
로마서 10장 10절에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골로새서 2장 6절로 7절에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고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우리가 믿었으면 입으로 강하게 시인하고 그 다음에는 감사함을 넘치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왜 감사함을 넘치게 합니까? 모든 일에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것을 믿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좋은 일은 좋아서 감사하고 나쁜 일은 좋게 만들어 주실 것이니 좋아 감사하고 좋으나 궂으나 감사함을 넘치게 하면 하나님께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항상 끝이 좋게 해주시지 과정도 평탄하고 좋게만 만들어 주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시련이 없는 믿음은 겉으로만 믿음이 잘 믿는 것 같고 키만 크는 것 같지 시련을 당하면 곧 쓰러지고 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과정은 하나님이 크고 적은 시련을 통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운동하라고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기도운동, 믿음운동, 전도운동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우리가 말씀만 먹고 신앙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운동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련은 우리 기도운동인 것입니다. 시련 안당하면 기도 안해요. 고통 당해야 기도하지. 지나가 보면 여러분 기도 가장 많이 할 때가 가장 어려울때 가장 기도 많이 했지.. 가장 편안하고 좋을 때는 기도 안하는 것입니다. 슬플 때 가장 찬송 많이 하지 즐거울 때는 별로 찬송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시련과 고난과 고통이 다가와야 기도도 많이 하고 회개도 많이 하고 깨어지고 찬송도 많이 하고 눈물도 많이 흘리고 신앙이 쑥쑥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것만 좋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최선으로 성장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좋은 양식도 먹여 주시고 좋은 일도 일어나게 해주시나 시련도 늘 보내 주시는 것입니다. 시련을 통해서 우리가 연단을 받아서 능력 있고 힘있고 탄탄한 사람이 되어서 나중에 이 세상에 살면서 진짜로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는 삶을 살도록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어려운 일도 우리가 그것을 보배로 삼고 감사하면 그것이 좋은 일로 변화된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반드시 좋은 일만 좋은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생활 가운데 어려운 일이 다가올 때 그것을 가지고 감사하게 생각하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그를 통해서 좋은 일로 변화시켜 주는 것입니다. 나쁜 남편이 반드시 나쁜 것도 아니고, 까다로운 아내가 반드시 나쁜 아내도 아닌 것입니다. 시련을 가져오는 자식 때문에 자식을 미워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통해서 믿음이 자라게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역경이 변해서 좋게 만들어 주시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꿈을 버리지 말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꿈을 가지고 좋아진다. 좋은 것은 좋아지고 나쁜 것은 더 좋아질 수 있다고 신념을 가지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스라엘에는 사해가 있습니다. 해수면이 바다보다 400미터나 낮지만 물이 계속 증발되어 소금 호수가 되었습니다. 물이 짜니 생물이 살지 못하여 죽음의 바다라고 해서 '사해'라고 이름 붙인 것입니다. 지금은 이스라엘과 요르단과의 국경에 사해를 반으로 갈라서 반은 이스라엘에 속하고 반은 요르단 국가에 속해 있는 것입니다. 저 그림에 보는 것처럼 안가라 안잖아요. 소금이 너무 많아서 둥실둥실 떠고 안가라 앉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스라엘은 사해라고 하지 않고 '염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요르단은 진짜 사해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쪽의 사해는 활발하게 개발되어 그 죽음의 바다가 치료 휴양지로 조성되었습니다. 사해에는 소금 외에 몸에 좋은 무기질이 녹아 있어 각종 피부병 치료에 특효를 발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는 곳마다 안락한 호텔과 휴양지가 조성되어 피부병을 치료하려는 사람들과 관광객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습니다. 또 사해 남쪽에는 비누 공장, 진흙 팩 공장 등 온갖 화학 공장들이 밀집해 있습니다. 플라스틱 원료는 세계 인구가 100년을 쓰고도 남을 만큼의 양이 매장되어 있습니다. 또 농약이나 페인트의 원료도 전 세계 소비량의 1/4이 사해에서 생산됩니다. 이제 사해는 세계 최고의 자연 병원, 세계 최대의 화학 공장으로 바뀐 것입니다. 더 이상 죽음의 바다가 아닙니다. 축복의 바다입니다. 그러나 요르단 쪽은 신기하리 만치 방치해 놓고 있어서 말 그대로 '죽음의 바다'가 되었습니다. 똑같은 사해인데 이스라엘 쪽은 번영의 처소가 되고 만 것 입니다. 요르단 쪽은 문자 그대로 죽음의 바다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러느냐, 이스라엘은 사해를 받아 들였을 때 어떻게 받아 들였느냐. 주님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우리를 인도하였으니 이것도 결국은 사해가 아니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다. 이곳에 젖과 꿀을 찾아내자. 죽음의 바다에서 젖과 꿀을 찾아 내니가 온갖 치료약이 다 나왔으며 온갖 비누공장, 비료공장이 다 나왔으며, 온갖 휴양지가 다 나왔고, 온갖 유용한 물질이 다나오게 된 것 입니다. 죽음의 바다인줄 알았는데 들어가서 꿈을 가지고 믿음을 가지고 감사하면서 들여다보니까 복지요, 젖과 꿀이 흐르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요르단 측에서는 그것을 사해로 받아들이고 이는 못쓸 땅이다. 못쓸 바다다. 거기에는 아무 생물도 살지 못하고 농사도 짓지 못하는 곳이라고 방치해 놓으니까 그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죽음의 땅으로 변화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가정에 젖과 꿀이 흐르는 가정을 만들 수도 있고 죽음의 가정으로 만들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젖과 꿀이 흐르는 삶으로 만들 수도 있고 사지로 만들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은 우리가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믿고 어떻게 감사하느냐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나는 못한다. 안 된다. 할 수 없다. 나는 저주받았다. 패배한다. 그렇게 하면 어느 곳에 가나 일어서나 앉으나 죽음의 사지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바라보고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해서 꿈을 갖고 믿음을 갖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태도로 감사하면 사해도 축복의 바다가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예수님은 용서와 의와 영광을 퍼부어 주십니다. 거룩함과 성령충만을 부어 주십니다. 치료와 건강을 넘치게 주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복과 형통을 주시는 것입니다. 부활, 영생, 천국을 주시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삼대재앙에서 삼중축복을 주셔서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게 해주는 것입니다. 눈을 들어 십자가를 바라보고 영적인 세계 속에 사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십자가를 바라보고 사는 사람인 것입니다.

<결론>
전쟁할 때 보면 본부와 통신이 두절되면 일선에 있는 장병들은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지시도 받지 못하고 보급도 끊어집니다. 우리 안에 계시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확실하면 우리는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과 확실한 관계가 있는데 무엇이 두려워 할게 있습니까?
로마서 8장 35절로 39절 우리 다같이 소리 내어 읽어 보십시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야호! 무엇이든지 우리는 넉넉히 이기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구주시고 천지와 만물을 지으신 아버지가 우리 아버지신데 왜 두려워합니까?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무서워 말라. 내가 너와 같이 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의로운 손이 우리를 붙들고 있는데 왜 두려워하고 놀랄리가 있는 것입니까? 육신의 눈을 뜨고 아람군대를 바라보고 그 병기와 그 깃발을 휘날리는 것을 바라보면 안 됩니다. 여러분 기도해서 하나님의 불 말과 불 병거가 우리를 둘러 진치고 있는 것을 바라보고 꿈을 가지고 믿음을 가지고 강하고 담대하게 나가면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로써 권세와 능력이 나타나고 승리의 깃발을 휘날릴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이 세상에 우리들은 끊임없이 죄악에 우겨 싸이고 염려와 근심에 마음이 갈라지고 핍박으로 고통당하고 낙심과 절망으로 거꾸러지고 망할 때도 많습니다. 환경을 바라보면 좌절하고 절망할 수밖에 없지만 우리는 특이한 사람으로 환경으로 인하여 살지 않고 우리 속에 계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는 것이 옵니다. 지극히 크고 영원하신 하나님이 우리 질그릇 속에 와 계시고 이 하나님과 연결해서 꿈과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강하고 담대하게 기도하고 나갈 때 언제나 결과는 우리가 승리하게 되는 것을 알게 도와 주시옵소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우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피할 길을 내사 우리로 능히 감당케 하시는 하나님을 감사드립니다. 하나님 아버지여 우리 성도들이 모두다 눈을 들어 십자가를 바라보고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넘치는 은혜를 바라보게 도와주시옵소서. 이스라엘 백성이 죽음의 바다 사해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바라보고 믿고 개간하니 정말 보배로운 곳이 된 것처럼 우리의 사지가 천국이 된다는 것을 알게 도와주시옵소서. 우리는 어느 곳에 가나 어떤 어둠에도 빛을 절망에는 소망을, 죽음에는 생명을 가져오는 하나님의 사자들이라는 것을 잊지 말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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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11 빌립보서 삶의 푯대와 인생 빌3:13~14  조용기 목사  2009-12-14 2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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