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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누가복음 궁극이............... 조회 수 47 추천 수 0 2023.03.26 13:0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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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눅16:23-31 
설교자 : 김경형목사 
참고 : 궁극교회 주일예배 

1623-31: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 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가로되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찌니라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찌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두 사람에게 대한 대우가 완전히 뒤바꼈다.

 

그렇다면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 있게 된 것은? 1. 거지가 되어서 평생 고생을 해서? 2. 부자에게 천대와 멸시를 받아서? 3. 불행 중에라도 아브라함과 같은 신앙을 가져서? 3.

 

부자가 불구덩이에 떨어져서 고통을 당하는 것은? 1. 평생을 세상 누림으로 살아서? 2. 거지에게 구제를 안 해서? 3. 아브라함과 같은 신앙정신을 안 가져서? 3.

 

아브라함과 같은 신앙을 가졌다면 가난하게 살아도 별 문제가 없는 거고, 또 부자로 살아도 별 문제가 없는 거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신앙을 가졌다면 인인관계가 바로 돼 나갈 것이다. 그러니까 부자의 결정적인 실수는 신앙은 가졌는데, 지금으로 말하자면 예수를 믿으면서도 신앙이 없는 사람들이 많듯이 아브라함의 신앙을 가지지 못했다. 반면에 거지에게 돋보이는 것은 아브라함의 신앙정신이다. 부자와는 정 반대이다.

 

성경에 부자로 살면 지옥에 간다고 했느냐? 예수님은 부자는 싫어하고 가난한 사람을 좋아하느냐? 예수님은 그건 아니다. 그러나 가난한 자보다 부자가 더 좋다. 세상 사람들은 그런다. 지금 예수 믿는 사람들도 부자가 좋다. 세상에서 부자 되는 거 좋다. 세상에서 부자가 되는 건 좋은 건데, 그런데 신앙이 없이 부자가 돼버리면 문제가 있다. 그렇게 되면 성경에서 말씀하듯이 네가 세상에서 다 받았다.

 

그런데 예수 안 믿는 거지는 세상에서 못 받았는데 아브라함의 품에 있었다. 즉 천국에 갔다. 그러면 예수 안 믿는 거지는 세상에서 못 받았으니까 천국에 간다는 말이냐? 그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의가 가난하게 살자주의냐, ‘부자로 살자주의냐? 무슨 주의냐? 온전이다. 온전으로 살다보면 세상에서 부자가 될 수도 있고, 믿다보니 가난하게 될 수도 있는 거다. 우리는 가난해도 이룰구원을 이뤄가고, 부자가 돼도 이룰구원을 이뤄가고. 그러니까 가난에 푹 빠지거나, 부자에 푹 빠지는 신앙은 아니다.

 

부자 되기를 힘쓰지 않았으나 부자가 되는 경우도 있다. 가난하게 살자는 마음을 안 먹어도 예수를 믿다보면 시대적인 경제난으로 가난하게 살 수도 있는 거다. 그런데 예수를 믿으면 꼭 부자에 갖다 붙이는 것은 예수 믿는 정신과는 반대다. 그래서 그런 마음을 가지고 믿는 사람들을 꾀이려고 마귀가 눈에 보이는 걸 가지고 와서 예수이름으로 부자가 되라고 한다.

 

그러면 마귀가 하는 말이 예수이름을 부르짖어서 부자로 만들어 달라고 하라한다면 예수님이 그 기도를 들어준다는 말이냐, 그걸 돋보고 부러워하면 마귀가 가져다준다는 말이냐? 세상물질이 인간 타락 후에 마귀에게 맡겨져 있느냐? 내가 쓰고 있는 이 안경을 마귀에게 빌려 쓰고 있는 것이냐? 성경도 물질이니 마귀가 이 성경을 써놓은 것을 내가 빌려 쓰는 것이냐?

 

물질세상은 하나님이 맡고 계신다. 그런데 성경에 세상을 마귀가 다스리는 것처럼 한 말이 있다. ‘공중권세를 잡은 자에게 줬다.’ 그러면 예수님도 마귀에게 빌려 써야 하느냐? 생각을 잘 해야 한다.

 

공중권세를 잡은 자에게 줬다는 것은 예수 믿는 사람이라도 소원 목적성이 세상에 들어가 있으면, 내가 세상 것을 안 가졌어도 세상을 소원 목적하는 그 정신을 가지면 그 사람은 마귀에게 붙여진다는 말이다.

 

물질은 다 주님의 것이다. 그런데 온 교회가 세상을 소원 목적하고 부자 되기를 힘쓰며 예수를 믿고 있다면 그 사람은 그 정신에 의해 마귀에게 붙여진 것이다. 그래서 이룰구원 차원에서 세상정신을 가진 사람은 마귀가 다스리게 돼 있다. 마귀의 권세 아래 붙여진다.

 

그냥 세상은 마귀가 다스린다하면 안 된다. 교인들이 그렇게 생각을 하니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갈릴리 바다의 풍랑은 누가 일으킨 거냐? 그런 신앙은 갈릴리 풍랑을 마귀가 일으켰다고 해석을 할 수밖에 없다. 신앙지식이 잘못돼 들어가면 예수를 믿으면서도 미신 식으로 믿게 된다. 미신 식으로 돌아가는 생각을 갖게 된다.

 

마귀에게 준 세상은 어떤 세상이냐? 마귀가 다스릴 수 있는 세상은 어떤 세상을 말하는 것이냐? 흑암의 권세? 하나님의 말씀은 교회에 주시는 말씀이고, 교회는 성도들이니, 소원 목적이 세상정신 사상으로 들어가 있으면 마귀권 안에 들어가 있다. 마귀의 다스림으로 들어간 거다.

 

그러면 마귀의 다스림이라서 예수님이 마귀와 동등적이 돼서 마귀와 대화를 하는 거냐? 아니다. 마귀도 하나님의 심부름꾼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집 자녀들이 말을 안 들으니까 마귀라는 깡패에게 붙여버리는 거다. ‘실컷 두들겨 패줘라하고서. 그러나 생명만큼은 못 건드린다. 생명은 하나님께 속했다. 주님 것이니까. 만일 마귀가 실컷 두들겨 팼다가 성도 하나를 죽였다고 한다면 주님의 권한이 그렇게 허술한 거냐? 그런 게 아니다.

 

예수님이 마귀의 시험에서 졌느냐, 이겼느냐? 마귀시험에서 이겼다. 그러니까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되는 거다. 그 이치를 잘 깨달아야 한다. 안 그러면 미신으로 돌아가 버린다.

24: 부자가 아버지 아브라함을 보았다면 아브라함의 신앙이 생각날 것이고, 그 품에 안긴 나사로를 보았다면 부자가 생각하기를 저 거지 나사로가 내 형제였구나하게 된다. ‘저 거지가 내 형제였구나. 내 형제인데 내가 거지 나사로에게 참으로 몹쓸 짓을 했구나하고 자기가 한 일들이 생각이 날 것이다.

 

나사로도 아브라함의 후손이니까 결국 부자의 형제다. 그래서 부자가 아브라함의 품에 앉긴 나사로를 보면서 아브라함에게 아버지 아브라함이여라고 한 것은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직속 아들이라는 말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뜻이다. 즉 그 신앙을 가졌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부자의 입장에서 자기의 형제라는 의미에서 아버지 아브라함이여한 것이다.

 

그런데 이 부자는 세상에 살 때도 자기 생각만 하더니 죽어서 불꽃의 고통 속에서 형벌을 받고 있으면서도 역시 자기 생각만 하는구나. 불붙는 가운데 있는 자기의 고통도 참기 힘들겠지만 건너편의 거지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있는 것을 보니 속이 더 탄다.

 

부자나 거지 나사로나 둘 다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점에서 형제요, 그 중에 영적 아브라함의 믿음의 질을 가진 영적 아브라함의 후손은 따로 있음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예수 믿는 것은 다 똑같으나 육의 생각을 가지고 예수를 믿는 사람이 있고, 영의 생각을 가지고 예수를 믿는 사람이 따로 있다. 육의 생각과 영의 생각은 정 반대다.

 

예수님은 늘 우리의 구원에 관한 영의 생각을 가지고 살았을까, 늘 세상의 생각을 가지고 살았을까? 이걸 안다면 예수 믿는 자기가 무슨 생각을 가지고 예수를 믿어왔는지,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이치에 의해서 그냥 드러나는 거다. 이치에 의해서 그 믿음이 다 드러난다. 이게 하나님의 말씀이다. 여기에 따라서 예수님의 대우가 전혀 다르다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아브라함은 세상에 살 때에 하나님을 명령을 듣고 즉시 갈대아 우르를 떠났다. 아들을 번제물로 바치라는 시험에 합격했고, 여기서 하나님 앞에 이삭을 하나님의 자식으로 이전등기 시켰다. 번제물로 드려지는 모리아 산의 번제물로 통해 아들 이삭을 하나님의 족보에 이전등기 시켰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이삭을 번제물로 구워 먹었느냐? 하나님께 드려지니 하나님의 것으로서 아브라함에게 도로 온다. 그게 신앙 믿음이다. 그런데 세상 속화되고 타락된 자들은 이게 안 믿어진다.

 

그러면 성경에 처음 열매는 내게 바치라했는데, 처음 열매는 누구 것이냐? 하나님 것이다. 왜 그럴까? 왜 하나님이 내게 바치라하느냐? ‘처음 아들은 내 것이니 내게 바쳐라왜 그렇게 표현을 하실까?

 

여기 계신 분들, 큰 아들이 출생해서 하나님 족보에 다 이전등기 시켰느냐? 하나님께 바친다고 했느냐? 그런 신앙 믿음을 가지고 교육을 했느냐? 아닐 것이다. ‘예수 믿어서 세상에서 부자 되라했을 것이다. 하나님께 드린다는 게 뭐냐? 하나님의 말씀으로 키우는 게 하나님께 드림인 것이다. 오늘날 세상부모들은 전부가 자식을 우상 앞에 제물로 바쳤다.

 

그런데 가만 보면 부모가 자식에게 냉대를 받고 자식이 부모를 안 모시려고 하니까 노후대책을 세운다고 자식에게 돈을 안 물려주고 실버타운에 간다고 하니 자녀관계가 다 끊어지지, 인정관계가 다 끊어지지, 그러니 신앙은 아예 볼 것도 없는 거다. 누가 그렇게 만든 것이냐? 부모다. 자녀가 그렇게 된 것은 부모교육을 생각해야 하는데 남 탓으로 돌아간다. 남 탓하는 사람치고 믿음이 올바른 사람 한 사람도 없다. 전부가 이기주의다. 그러니 하나님으로부터 일반은총을 어떻게 받겠느냐?

 

선악과 따먹은 후에 땅은 저주를 받았는데, 그렇게 된 것은 사람의 마음에 의해서 생명과는 안 따먹고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이다. 즉 세상기준으로 사는 것이 선악과를 따먹은 것이다. 그런 사람의 마음바탕은 항상 가시가 돋아있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마음은 땅이니 그 마음에 하나님이 거하면 전이 되는 건데 선악과를 따먹고 저주를 받으면 그 마음은 가시가 돋쳐있다. 네 가지 밭의 비유도 사람의 마음 밭을 말하는 거다.

 

가시가 돋쳐있는 사람은 항상 다른 사람을 향해 찌른다. 항상 다른 사람을 괴롭게 한다. 예수를 안 믿어도 자꾸 사람을 못 살게 굴면 너는 왜 가시 같으냐한다. 이런 사람은 말도 워낙 안 하다가 한 마디 하는 것도 사람의 마음을 푹 찌른다. 워낙 말을 안 했기 때문에 말하는 솜씨가 없다.

 

부드러운 말, 좋은 말, 아름다운 말을 많이 쓰면 사람의 마음도 그만큼 달라진다. 그런데 대화를 하기 싫으면 아예 말을 안 하는 거다. 그러나 말을 안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생각을 안 하느냐? 속에 이런 저런 생각이 다 들어있다. 그래서 말을 한 번씩 하면 송곳이 돼서 푹 찔러버린다. 그렇다고 해서 옳은 말도 아니고, 옳은 교훈도 아니고, 자기감정대로 말을 한다. 사람의 마음을 찔러대는데 그런 사람을 누가 좋아하겠느냐? 그런 성격을 가지면 귀신들리기 좋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물질도 풍부하게 줬다. 그 물질을 가지고 가군 318명을 키웠다. 그리고 그 군대로 이방 사대 연합군에게 잡혀가는 조카 롯과 많은 가족을 구해냈다. 그러니까 재산을 가치 있게 썼다. 사대 연합군으로부터 탈취한 것이 상당히 많다. 아브라함이 가군들 318명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재산을 가지고 길러냈는데, 군대를 길러낸다는 것은 지금으로 말하면 신앙의 진리의 용사를 길러낸다는 것이다. 미래를 보지 않으면 못 기른다.

 

일제 강점기에 비밀리에 독립군에게 자금을 대준 것처럼 예수 믿는 사람이 영적 군대를 위해 그런 마음이 있을까? 힘들다. 자기 집을 몇 채씩 살지언정 그게 참 힘들다. 하나님 나라의 일에 대해서 염려하고 걱정하는 사람은 돈 씀씀이가 다르고 모든 면에서 다르다. 천국백성으로 그 백성을 자기 백성이요 자기 족속이요 자기 형제로 안다면 주님과 같은 마음을 품게 된다. 그게 천국의 애국자이다.

 

불구덩이에 떨어진 부자는 아버지 아브라함처럼 물질을 그렇게 가치 있게 썼느냐? 자기 세상의 유흥과 연락과 누림에 다 낭비한 것이 아니냐?

 

지금 웬만한 교회는 외국에 선교사를 보내고 하는데 그 신앙의 질이 다르다. 외국에 선교를 가려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영능의 실력자로 성령의 두루마기를 입혀서 보냈듯이 보내져야 할 텐데 세상이 들어있기 때문에 신앙의 질이 다르니 솔직히 말해서 중국이고 어디고 가는 명색이 선교사라고 하지만 내가 볼 때는 아니다. 구경 가는 거다. 선교사라면 성경을 알아야 한다.

 

부자가 하나님께서 주신 물질을 그만큼 낭비를 했으니 불구덩이에서 목말라 애타하는 것이 불쌍한 게 아니라 가서 머리를 쥐어박으면서 네가 한 짓에 네가 당하니 그게 싸다하고 싶다. 불속에서 고통 받는 이 부자를 우리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괘씸한 느낌이 든다. 거지는 불쌍한 느낌이 들고. 거지이기 때문에 불쌍한 거냐?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어떻게 긍휼히 여겨달라는 것이냐? 부자 자기는 거지 나사로와 같은 아브라함의 후손인데도, 같은 형제인데도 나사로에게 따뜻한 밥 한 그릇이라도 갖다 주었느냐? 표현이야 일반표현으로 들리지만 그 밑에 깔린 게 뭐냐?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불리려 해도 그것으로 배가 불러지겠느냐? 결국은 못 먹어서 죽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형제가 고통 중에 있을 때 나 몰라라 하고서는 자기가 고통 중에 목이 마르고 속이 탄다고 하며, 자기의 어려움 알아달라고 하며 거지 나사로를 시켜서 손가락 끝에 물 한 방울을 찍어서 자기 혀 밑에 넣어 서늘하게 해 달라고? 이게 말이 되느냐? 그 말을 하면 물 한 대접을 갖다 줄줄 알았을까?

 

25-26: 네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이냐? 부자는 세상에서 날마다 유흥으로 연락하면서 누리면서 사는 것. 그러면 아브라함이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더냐? 부자가 세상에 살면서 조상 아브라함이 어떤 믿음을 가지고 살았을까하고 한 번이라도 생각을 했더라면 거지 나사로를 대문간에 그대로 죽도록 내버려두지 않았을 텐데, 그리고 그것이 또 하나님께서 좋아하실 일인데. 긍휼을 베풀지 않으면 긍휼 없는 심판이 오게 된다.

 

21절에 보면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을 먹었다면 나사로가 부자의 상 밑에 누웠다는 말이 되고, 부자의 잔칫상도 대문간에 차려졌다는 말인데, 이건 다 말이 안 되는 말이다. 그러면 왜 말이 안 되는 말로 표현을 했을까? 무엇을 깨닫게 하려 하심일까? 이것은 부자가 잔치를 할 적마다 거지 나사로를 보게 해서 이룰구원을 얻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긍휼이다.

 

하나님께서는 부자에게 긍휼을 베풀어서 그만큼 구원을 이루도록 여러 번 기회를 베푼 것이다. 그러니까 그 대문은 기회의 문이 되는 거다. 부자는 상황적으로 오는 기회, 사건적으로 오는 기회의 문을 보지 못한 죄로 속이 타고 불에 타는 조금도 긍휼이 없는 심판을 받게 된 것이다. 우리 모두에게도 진리가 있을 동안에, 자기에게 시간적인 기회, 장소적인 기회, 연령적인 기회, 눈 밝을 때가 다 기회로 주어진 것이다.

 

그러니까 거지 나사로를 들어서 문간에 들락날락 하며 보여지게 한 것은 하나님께서 부자에게 깨닫게 하는 면에서 긍휼을 베푸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니 불꽃 속에 떨어져서 자꾸 부자가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하고 있다. 이미 대문간이라고 하는 문을 통해서 나사로를 눞여서 기회를 줬는데.

 

우리가 갈 수도 없고 너희들도 올 수도 없는 우리와 너 사이에 큰 구렁이 있다는 것은 영과 육이 근본적으로 다르듯이 영의 생각과 육의 생각이 다르고, 영적인 신앙과 육적인 신앙이 질적 근본적으로 통할 수 없다는 것이다. 건너오고 가고자 하는 여기에 큰 구렁이 있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안 통한다는 것이다.

 

다 같이 예수를 믿지만 근본적으로 안 통하는 신앙이 있다. 충성봉사 다 했고, 목숨 바쳐서, 살림도 다 바쳐서 주님을 위해 한다고 했는데 예수님이 난 너희를 모르겠다한 것은 신앙이 근본적으로 예수님과는 안 통하는 신앙이라는 것이다. 개인감정이 아닌 질적으로 신앙의 질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영의 생각이 아니고 육의 생각이면 주님과 안 통한다. 영의 생각을 가지고 예수를 믿는 자들과 육의 생각을 가지고 예수를 믿는 사람과는 안 통한다. 남이 이단이라고 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질이 다르면 안 통하는 것이다. 신앙은 하나님 앞에서 의사단일이라야 통한다. 질이 같아야 통한다.

 

이 부자를 이방인이라거나 불신앙자로 보면 안 된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하고 불렀고, 아브라함은 부자를 사랑스럽게 얘야하고 불렀다. 그리고 다섯 형제가 모세와 선지자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니까 이 부자가 이방 불신자는 아니다.

 

이 부자가 물질 세상에 살 때 자기의 신앙의 질을 조상 아브라함의 신앙으로 바꿨다면 불꽃 속에 안 떨어질 텐데 죽음의 선을 넘어선 후에는 그게 안 바뀐다. 죽음의 선을 넘으면 육적인 신앙이 영적인 신앙으로 바꿔지지를 않는 것이다.

 

이게 우리를 깨닫게 하는 비유의 말씀인데, 부자가 불꽃 속에 들어가서 고난을 받기 때문에 영원한 지옥 불에 떨어진 것이라고 하게 되면 우리가 깨달을 게 없는 거다. 이렇게 알게 되면 또한 영원한 지옥 불에 안 떨어지려면 거지 나사로 같은 사람을 잘 도와줘야 한다하게 된다.

 

눈에 안 보이는 이 구렁은 영의 신앙과 육의 신앙 사이에 놓여있어서 근본 질적으로 절대로 합해지거나 결합되지 않음을 말해준다. 이 부자가 신앙이 있는 거지 나사로를 자기 대문 안으로 맞아들여서 아브라함의 신앙을 깨달았다면 큰 불구덩이로 가지 않았을 텐데 부자는 아버지 아브라함을 불렀지만 이미 때는 늦었고 기회는 끝났다.

 

사람들은 세상에서 호화로운 누림을 알아주지 환난 속의 아브라함의 신앙을 가진 거지 나사로의 신앙을 알아주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느 것을 더 알아주실까?

 

부자가 세상 사람들과 누리면서 살 때 무엇인가 깨달음이 있었을까? 신앙에 대한 아무 느낌이 없었을까? 예수님을 믿는 신앙을 생활의 풍부함에서 찾는 것은 잘못된 신앙이다. 구렁 이 편에서 저 편으로 사람은 보이고 음성은 들리는데 인격적으로 의사소통이 안 되는 이것이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다. 진리생명인 하나님의 말씀의 깨달음에서 멀어지는 이게 더 앙화다. 그게 너의 재앙이다. 다 같이 예수를 믿어도 그런 게 있다. 그렇게 안 통한다. 왜 그러냐? 영과 육은 안 통하는 거다.

 

부자가 어디에서 살 때 이것을 몰랐느냐? 세상에 살면서 누리면서 그걸 알아야 하는데 몰랐다. 우리도 이걸 안 밝혀주면 모르는 거다. 안 믿는 사람들은 왜 안 통한다고 보이느냐? 우리 입장에서는 왜 안 통하는 거냐? 근본적 질이 다르면 같이 예수를 믿어도 안 통한다.

 

주님과의 통하지 않는 그 관계, 전체 교회들 간의 그 관계, 한 교회 안에서도 관계성, 한 집 식구 간에도 영육간의 관계성이 통하느냐? 주님과 안 통하면 다 안 통하게 돼 있다. 부부라도 안 통한다.

 

27-28: 부자의 간청이 무엇이냐? 일단 사후의 세계로 들어오면 인간 제 마음대로 세상에 나갈 수 있느냐? 없는 거다. 사람이 죽으면 귀신이 돼서 공중에서 떠돈다? 그런 소리 믿지 말아라. 점쟁이 소리 믿지 말아라. 다 귀신 악령의 장난들이다.

 

사무엘 선지자는 이미 죽었는데 사울 왕이 발등에 불은 떨어지니까 찾아간다는 게 어디로 찾아갔느냐? 무당을 찾아갔다. ‘사무엘의 영을 불러올려라했다. 그것을 보면 사울 왕도 미신신앙을 가졌던 모양이다.

 

아니, 무당소리를 듣고 사무엘의 영이 올라오겠느냐? 하나님의 종 사무엘이? 말도 되지 않는 말이다. 그래, 사무엘의 모양을 하고 올라온 게 진짜 사무엘의 영이냐? 악령이 그렇게 나온 것이다. 사무엘의 영이 하는 말이 너랑 나랑 이맘 때 같이 있으리라했다. 이맘 때는 그 다음 날 사울 왕이 아들과 죽는 시간이다. 그러니 악령이다.

 

부자가 자기 집에 형제 다섯이 있다고 했는데, 말투로 봐서 다섯 형제가 믿음이 없는 형제다. 형제들이 자기까지 모두 여섯인데, 전부 호화로이 세상 누림으로 연락하며 살고 있는데 그들이 하나님 앞에 인간을 만든 창조의 목적대로 사람구실이 바로 돼질까?

 

사후세계로 들어온 나사로를 세상으로 도로 보내서 형제들을 이 불 속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소식 좀 전해주게 해 달라한 것을 보면 그래도 형제들 생각은 낫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 인정정실이 통하는 거냐? 사후의 세계는 인정정실도 안 통한다. 그리고 형제들이 많아도 믿음이 있는 형제는 없는 듯하다. 참 불행이다.

 

29-30: 세상 누림성에는 한 마음이 돼서 그렇게 잘 쏘다녔는데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그에게 뭐라고 했느냐?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다. 형제들이 그들의 말을 듣고 깨달았으면 믿음을 가지고 순종하며 살면 된다했다.

 

모세는 하나님의 특별계시 목적으로 쓰임을 받은 종이다.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마하고 약속하신 축복의 땅을 알게 했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자유롭게 나오게 해서 광야에서 40년을 통과하면서 하나님의 이적과 기사와 만능의 능력을 보게 하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도하면서 가르친 모세다. 선지자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범죄 할 적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예언한 자들이다. 이런 선지자들을 무시하고 사후의 세계를 알 길은 없다.

 

그런데 지금 불꽃 속의 부자는 그런 깨달음을 받는 성경을 무시하고 어디에 있었던 자가 꼭 가야 회개를 한다고 하는 것이냐? 죽었던 자가 살아나서 증언을 하면 확실히 회개하고 믿을까? 예수님께서 하늘나라의 복음을 증거하실 때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가 옆에 있는데도 바리새 종교인들이 믿었느냐? 유대 종교인들 바리새인들이 믿었느냐? 예수님께서 삼일 만에 살아난 것을 보고서 믿었느냐? 부활 승천한 것을 보고서 믿었느냐? 안 믿었다.

 

성령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도 안 믿어서 믿음이 그 모양인데 천국과 지옥을 보고 왔다고 떠드는 그런 사람들의 말을 듣는다고 해서 바로 믿겠느냐? 그럼에도 교인들이 얼마나 마귀의 꾀임에 잘 넘어가는지? 그러니까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을 보고 믿었다고 해도 얼마나 잘 믿을지 모르지만 하나님 앞에 회개는 안 된다. 그걸 알아야 한다.

 

보고 믿는 자는 자꾸 보는 것으로 증거를 삼기 때문에 회개가 안 된다. 말씀을 듣고 말씀의 이치에서 자기 생각 마음이 잡혀가는 거다. 그런데 그건 없고 보는 것으로 믿고 안 믿고 하는 건 믿는 게 아니다. 그렇게 해서 믿어지는 게 아니다.

 

제자들이 3년 동안 따라다니면서 오순절 날 성령으로 역사 감화한 게 무슨 뜻이냐? 열두 제자들이 예수님의 언행심사를 보고 증거를 할 때 자기들이 본 것으로 들은 것으로 증거가 될 런지 모르지만 왜 거기에 성령님의 감화가 들어가는 거냐? 성령님의 감화가 아니면 예수님의 정신이 안 들어간다. 지식적으로는 알지라도 성령님의 감화가 없이는 안 되는 것이다. 성령님의 감화가 없이는 믿음이 들어가지지 않고 역사가 안 된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의 간증소리를 듣고 아브라함의 믿음이 좋아져서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은 것이냐?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는 것으로다. 말씀을 잡고 순종하는 삶은 회개가 들어간 삶이다. 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는 건 등지는 것이니 이게 회개의 삶이다. ‘아이고, 잘못했습니다하며 눈물 콧물 흘리는 게 회개가 아니라 말씀을 잡고 가면서 세상을 등진 그게 회개의 삶이다. 세상을 잡고 살면서 뭘 잘못했습니다하는 회개는 회개가 아니다.

 

예수를 믿으면서 회개를 못한 자가 많다. 그러면 그렇게 믿다가 나중에 큰 사건이 오면 회개가 되느냐? 절대로 안 된다. 그 이치를 알아야 한다. ‘뭐 잘못했습니다. 뭐 잘못했습니다가 아니다. 회개는 방향과 목적이 바로 잡히는 것이다. 세상 쪽으로 향한 게 천국 쪽으로 향하면서 이룰구원을 이루며 사는 것이 회개다. 그 사람은 날마다 회개가 되는 거고, 날마다 죽는 거고, 날마다 살아나는 거고, 거기에는 영능의 실력이 들어있다. 이게 예수 바로 믿는 거다. 세상을 쳐다보면 소금기둥이 될지언정 회개는 안 된다.

 

아브라함은 부자의 말을 듣고는 그것이 믿음이 아니라고 말을 한다. 불 가운데 부자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그 믿음이 안 믿어지는 것이다. 오늘날도 이 부자처럼 고통을 당하는 자들이 아브라함이 말해놓은 성경은 안 믿어지고 죽었던 자가 살아나서 간증을 하면 믿겠느냐? 그건 믿음이 아니다.

 

고통 중에 있는 부자는 계속 자기 고집만 말하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말하는 진리의 말은 듣지도 않는다. 그런 것처럼 성경 하나님의 말씀은 등 뒤로 던져놓고 간증하며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말을 믿고 따른다면 그 사람은 성령을 받은 자가 아니다. 악령을 받은 자이다.

 

성경의 뜻은 모르고, 성경은 안 믿어지고 그런 사람들의 말을 따라가면 그건 악령의 짓이다. 보혜사 성령님은 죄에 대하여, 천국에 대하여, 진리에 대하여 증거가 나오는 건데 그건 따르지 않고 왜 자꾸 악령을 따라가느냐? 그게 예수 믿는 거냐? 그건 악령을 따라가는 거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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