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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

누가복음 궁극이............... 조회 수 74 추천 수 0 2022.03.15 12: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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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눅12:8-10 
설교자 : 김경형 목사 
참고 : 궁극교회 주일예배 

12장 8절-10절: 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함을 받으리라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

 

8절-9절: 시인하는 것이란 그 분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거. 말씀 시인. 또 사사건건 사건에서 예수님을 시인하는 거. 우리가 전체적인 면에서는 예수님을 시인을 하지만 부분적 지엽적인 면에서는 예수님을 시인을 못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예수님 때문에, 또는 교회에 다니기 때문에 자기 체면이나 재산에 손해날 때 자기 신앙을 양보하는 경우가 있다. 그렇지만 바로 믿는 사람이라면 자기 체면에, 자기 재산에, 자기 목숨에 손해가 난다고 해도 그런 것에 개의치 말고 하나님 앞에 바로 하고자 하는 신앙이 있어야 한다.

 

전체적인 면에서 예수님을 시인을 하지만 평소에 성 밖의 신앙, 전 밖의 신앙을 가지고 있어서 성격과 성질적으로 세상성으로 나간 질이 있다면 지엽적인 면에서 자기 체면에, 자기 재산에, 자기 목숨에 손해가 날 일이 생기면 그걸 이기지 못하게 된다.

 

그 다음에는 박해를 받으면서도 자기 목숨을 걸고 예수님을 시인하는 것. 이것은 미래의 영광을 바라보지 못하면 안 된다.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이게 무슨 말일까? 왜 ‘하나님 앞에서’가 아니고 천사들 앞에서 예수님이 시인하고, 안 하고 한다는 말씀을 할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우리의 이룰구원을 위해서 부리시는 영물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좋게 말하면 천사는 성도를 보호해 주는데 있어서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영물들인데 하나님의 말씀 순종자에게는 순종한대로, 불순종한 자에게는 불순종한대로 적절한 대우를 해 주신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천사들 앞에서 예수 믿는 자기를 보고 ‘내가 너를 모르겠다’ 하면 불방망이를 들고 있는 천사들이 너를 어떻게 대우해줄 것 같은가?” 하는 의미를 갖고 있다. 자기를 두들겨 패는 천사라. 물론 하나님의 주권섭리에서 나의 구원을 위해서.

 

옛날에는 공부를 못하면 매를 때렸는데, 대나무에서 뽑은 회초리로 때리는 것과, 싸리비에서 뽑은 싸리 회초리로 때리는 것 중에 어느 게 더 아플까? 마디가 있는 대나무 회초리는 휘청휘청하면서 사람의 몸을 감는 듯하다. 몽둥이로 때리면 뼈가 부러지지만 회초리로 때리면 뼈는 안 부러지지만 맞으면 칼로 베는 듯이 따갑다.

 

사람이 깨닫지를 못하는 게 참 힘 드는 거다. 우리가 예수 믿으면서도 성경 문자 속의 은밀한 뜻을 모르는 게 참 불쌍한 거다. 까막눈이다. 설교에서 은밀계시를 깨닫지 못하면 교인들은 다 소경이 돼버린다. 소경이 돼버리면 그냥 부려먹는 거다. 사람이 육신의 눈이 어두우면 짐승이 나를 인도하듯이 사람 같지도 않은 목사가 나를 부려먹는구나. 그래서 성경에 보면 유대 율법사들 바리새교인들의 가르침을 주의하라는 것이다. 이들은 성경구절은 다 쓰는데 목적이 문제다.

 

‘불순종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먼저 머리에서 마음에서 ‘하나님 뜻을 받아들이느냐, 안 받아들이느냐’ 하는 게 들어간다. 온전한 순종은 마음만이 아니라 몸까지 자원적 활동적으로 들어간다. 에덴동산에서 ‘생명과를 먹느냐, 선악과를 먹느냐’에 따라서 저주와 영생이 왔다 갔다 했다. 이게 굉장히 중요하다. 그런데 이걸 생각을 못하고 교회에 다니는구나.

 

천사가 무슨 방망이를 들고 있을까? 엘리사가 아람군대의 눈을 어둡게 했는데, 그런데 그 다음에 보면 산등성이에 천군들이 쫙 깔려 있었다. 그 때 천사들이 어떤 자세로 있었을까? 차렷 자세로 있었을까? 불말을 타고 회초리를 들고 있었을까? 창을 들고 있었을까?

 

하나님께서 불순종자를 잡으려고 할 때 누가 그걸 ‘때리라. 마라’ 할 수 있는 거냐? 천군천사들은 누구의 말을 듣느냐? 하나님의 명령이다. 본문을 보면 예를 들어서 천군이 방망이를 들고 때리려고 한다고 할 왜 때리려고 하느냐? 시인을 하고, 안 하고에 따라서 처우가 달라진다.

 

예수님께서 당신 앞이 아니라 천사들 앞에서 ‘내가 너를 시인하겠다. 안 하겠다’ 한다. 그러니까 이 말은 말하자면 천사들이 성도를 두들겨 패는데도 주님께서 모르는 척 하는 것도 있을 수 있고, ‘이제 그만하라’ 하는 것도 있을 수 있다. 때리려고 하면 ‘이 성도는 그 많은 사람 앞에서, 어떤 사건 앞에서 나를 시인했다. 그런 게 있으니 때리지 말아라’ 그런 의미가 들어있다.

 

그런데 전체적으로 크게 보면 예수를 믿고 교회에 나가는데, 그런데 교회에 나가면서도 지엽적인 면에서 사사건건이 예수님을 시인했던가, 아니면 부정을 했던가? 부정을 한 일이 있어도 안 얻어맞았느냐? 분명히 얻어맞은 건데도 왜 맞은 것인 줄을 모르는 경우도 있다.

 

사람이 자기가 잘못하면 몸에 흠집이 생긴다. 망치질을 잘못하면 자기 손가락을 때린다. 이건 누구 잘못이냐? 못 잘못이냐, 망치 잘못이냐, 자기 손이 잘못이냐? 이건 자기 잘못이다. 그런가 하면 타의 손으로 인해 자기 몸이 망가지는 것도 있다.

 

우리가 예수 믿으면서 즉각적인 판단이 들어가야 한다. 모압 왕이 심부름꾼을 통해 보화를 갖고 와서 발람 선지자에게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이스라엘을 저주하라’ 할 때 발람 선지가 ‘하나님께 물어보고’ 했다. 이게 물어봐야 될 일이냐? 선지자라면 상식적으로 목숨이 달아날지라도 ‘이거 안 받는다’ 하고 거절해야 될 일이다. 이 때 하나님께서 ‘가지 말라’고 했다.

 

그 후에 심부름꾼이 두 번째 올 때는 보화를 더 많이 가지고 왔다. 그 때도 발람 선지자가 ‘하나님께 물어보고’ 했는데, 두 번째 물을 때는 이건 발람 선지자가 이미 가는 마음으로 굳혀 놓고 묻는 것이다.

 

우리가 보면 누가 ‘내가 하나님께 물어보고’ 할 때 자기가 하려고 하는 것을 이미 자기 마음에 굳혀놓고 그렇게 묻는 경우가 있다. 이럴 경우 남들이 볼 때는 그렇게 하는 그의 속마음은 모르는 거다. 그러나 그의 마음에는 합리화가 들어있는 거다.

 

자기 마음이 이미 떠날 것을 각오를 해놓고 ‘목사님, 가야 됩니까, 말아야 됩니까’ 그러는 경우가 있다. 생활 속에서 그런 일이 많다. 학생이 학교에서 수학여행을 가는데 주일날이 걸렸다면 ‘아버지, 가야 됩니까, 말아야 됩니까?’ 하고 물어야 할 일이냐? 묻지 않아도 가야 될 일이냐, 안 가야 될 일이냐? 그런데 마음속에서 이미 가기로 정해놓고 아버지에게 ‘가야 됩니까, 안 가야 됩니까?’ 하고 물었더니 아버지가 ‘주일이니 가지 말아라’ 한다면 입이 튀어나온다. 시키는 것마다 불평이 돼서 툴툴거린다.

 

10절: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인자란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인데, 예수님이 당신을 ‘인자’라고 했다.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 그러니까 말로 인자를 거역하는 죄가 있고, 그 다음에 성령을 모독하는 죄가 있구나.

 

그렇다면 말로 인자 거역은 쉽게 알아 듣겠는데 성령 거역 죄는 어떻게 오는 것이냐? 인자란 사람의 아들 곧, 예수님의 인성을 말한다. 불신자 같은 인성을 말하는 게 아니라 아담의 범죄 이전과 같은 인성이다. 하늘로부터 온 인성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처럼 선악과를 먹지는 않았으나 성경의 100% 속에 들어있는 은밀계시의 뜻까지 지켜야 할 그 당신의 인성.

 

그러니까 인자를 거역하는 것이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 구세주로 생각지 않고 하나의 일반사람으로만 보고서 거역하는 것. 쉽게 말하면 교회에서 목사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치가 분명한데 듣는 입장에서 그걸 잘 몰라서 ‘하나의 인간의 말이거니’ 하며 말씀을 들으면서 슬슬 장난이나 하려고 하면 이건 인자를 거역하는 것이 된다.

 

아이가 말을 하던, 어른이 말을 하던, 할머니 할아버지가 말을 하던 그게 옳은 말이면 그 말씀이 옳기 때문에 순종이 들어가야지 옳은 말인데도 아이가 하는 말이라고 해서 ‘인간의 말이거니’ 하는 건 안 된다. 친구들이 말을 할 때는 농담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으나 집에서 아버지는 아버지의 권위성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아버지가 말을 하면 옳은 말씀에는 정중히 받고 생각을 한다. 농담을 할 수는 없는 거다.

 

그런데 타락한 인간들은 아무리 신령한 말을 해 줘도 그걸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믿지를 않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예수님으로 통해 이적과 표적이 나타나도 예수님을 구세주 되심을 믿지 않는다. 이게 말로 인자를 거역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 성령 모독 죄. 뭐가 성령 모독 죄냐? 하늘을 보고 냅다 욕을 하는 거냐? 성령 자체는 거룩한 분이시니 성령의 역사는 거룩한 일을 하신다. 성도를 거룩하게 만드는 일을 한다. 거룩한 감화성, 하나님을 위한 생각, 구원을 이루는 생각, 자타에게 구원에 유익을 주는 생각. 이건 성령에 감화된 생각이다.

 

성령님의 역사는 그 성격과 성질이 거룩한 하나님의 본질의 사람으로 만드는 일을 하신다. 그런데 예수를 믿기는 믿는데 하나님의 성격 성질 성분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예수를 믿으면 그냥 교회 다니고, 내 것을 구하고, 이런 저런 말을 듣고 ‘은혜 받았네’ 하는 이런 게 다가 아니다. 본질의 사람으로 질적으로 만들어지게 하는 것.

 

교훈 속에서 하나님의 의사단일성이 나오면 즉, 하나님의 뜻에 맞춰지면 그 사람은 그 의사단일성으로 소원 목적으로 들어가 있기 때문에 그 다음에 그 한 뜻으로 가게 되니 이것이 생명 길이고 좁은 길이다. 이 길을 왜 좁다고 하느냐? 많은 사람이 받아들이지를 못하고, 하나님 한 분의 의사와 뜻이기 때문에 좁은 길이라고 한다. 넓은 길은 여러 사람이 어깨동무하고 많이 간다. 술 먹고 갈 수도 있고, 이리 저리 왔다 갔다 하며 갈 수도 있고, 공을 차면서 갈 수도 있다.

 

하나님의 본질의 사람으로 만들어지게 하고, 깨닫게 해 주시고, 온전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 인격과 성품이 그렇게 들어가면 그 인격과 성품은 그 사람의 실상이다. 그런데 예수를 믿어도 일반적인 사고방식으로 들어가 있는 주격적 지식은 자기의 실상이 아니다. 왜냐? 천국에 가면서 변화 부활 때 그런 요소는 다 빠져버린다. 내가 못 가져간다. 신령천국은 성령으로 만들어진 거, 하나님의 것으로 만들어진 것만 가지고 올라간다. 그 방편이 변화 부활이다. 괜히 변화 부활을 시키는 게 아니다. 물질성적 요소는, 그런 사고방식은, 그 사상은 변화 부활 시에 다 빼버린다. 다 빠져나간다. 변화 부활에는 그 이치가 들어있다. 이걸 알아야 한다.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님이 오시면 다 부활한다? 말 자체는 맞지만 그 속의 내용 면에서 아니다. 법적 서식에 내용증명이 있듯이 성도는 변화 부활을 하는데 그 내용이 있는 거다. 그러니까 성령님께서 현재 자기에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이치를 갖고 와서 어떤 사람으로 만들어지기를 원하는 거냐? 나는 어떤 마음을 갖고 예수를 믿는 거냐? 어떤 마음을 갖고 말씀을 듣는 거냐? 자기 속에 하나님의 실상적인 성품화가 돼야 한다. 그래야 진리지식의 기준에서 일반지식의 차원도 따져나갈 수 있는 거다.

 

방송에서 대화하는 걸 들어보면 표면적으로는 좋은 말인데 저건 근거가 없는 말이로구나. 사람이 설 수 있는 근거가 안 되는구나. 우리의 교훈은 사람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자라고 성장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게 살아있는 교훈이다. 그런데 일반세상은 그런 건 없다. 아무리 대학공부를 하고 학박사를 따도 사람이 세워지는 것은 없다.

 

일반 세상공부는 ‘물질적 개념으로 발굴을 하고 개발을 하고 과학적인 것을 만들어서 잘 살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잘 살자. 잘 살아보세’ 하는 그런 것은 핵폭탄 한 방이면 다 날아간다. 세상공부는 고작 해봐야 그 수작밖에 없는 거다.

 

핵을 만드는 사람들은 최고의 과학자들이다. 최고니까 최고의 것을 만든 게 아니냐? 그런데 그 최고의 사람이 사람이 선 거냐? 하나님 앞에 반듯하게 영생과 생명의 사람으로 선 거냐? 영생시키려고 핵을 만든 거냐? 이치를 알아야 한다.

 

아무리 세상을 한 방에 다 날려버린다고 해도 하나님께서는 ‘그걸 사용하라. 마라’ 할 주권이 있는 거냐, 아니면 인간들이 그걸 만들어 놓았으니까 ‘그게 터질까’ 해서 벌벌 떨고 있느냐? 핵이 터지면 하나님도 그 핵에 의해서 터지는 거냐?

 

태풍에 바람이 불면 그 바람에 물결이 일어나서 큰 바위라도 끌고 가 버리는데, 어떤 바람은 산꼭대기에 있는 나무는 안 부러지고 골짜기에 있는 나무만 부러뜨리는 것도 있다. 그러면 꼭대기에 있는 나무보다 골짜기에 있는 나무가 약한 거냐? 그것도 아니더라. 그렇게 해서 잘라진 것을 보니까 나뭇가지가 절반씩 뚝뚝 잘려져 나갔다. 그러니까 바람도 총알처럼 좁게 휙 나갈 때 그것만 부러뜨리며 지나가는 것도 있구나. 그러면 누가 이렇게 한 거냐? 바람 제 마음대로 한 거냐? 아, 하나님의 역사다.

 

우리가 보면 의인 가운데에 악인이 가만히 숨어있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요놈’ 하고 그 사람만 탁 치고 나갈 수도 있는 거다. 못 속인다. 양심과 마음 그 정신을 사람은 모른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다 아시고 치고 나가시는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허물과 죄로 영 죽었던 나를 살리셨다고 했는데, 그러면 ‘영 죽었다’는 말이 영이 죽었다는 말이냐, 영원히 죽었다는 말이냐? 영이 죽어야 영원히 죽는다는 의미가 들어간다. 이걸 명사적으로 말을 하면 영을 말하는 게 분명한 건데, 그런데 살지를 못하면 영원히 죽는 거니까 양쪽 다 해석이 가능한 것이다.

 

엡2:에 우리를 주님의 대형 대행 사죄 칭의 새생명으로 구속하시는 것을 보면 이건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역사가 분명하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이 구원의 역사를 말씀을 귀로 듣고 눈으로 보았는데도 불구하고 이 일에 돕지는 못할망정 믿지도 않고 그릇된 주장을 세우고 헐뜯고 비난하고 치고 들어온다면 이는 성령 모독 죄로 형벌을 각오해야 한다. 그러니까 옳은 진리이치를 들려주었는데도 자기 양심 속에서 ‘그게 옳다’ 하는데도 세상살이가 더 커서 그 마음을, 살아있는 그 양심을 자기가 꽉 눌러서 죽일 수 있다. 이럴 때 형벌을 각오해야 한다.

 

목사님들 속에 이런 게 참 많다. 사람이 옳은 지식을 받으면 옳은 양심이 그 옳은 지식에 지배를 받게 되는데, 이렇게 되면 그 양심은 진리 따르는 양심이 되는 건데, 그게 안 바뀌고 자기 성격 성질이 주가 돼서 나가며 옳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의 세상욕심에 이리저리 써먹기나 하고, 목사들끼리 분쟁이나 일으키고, 스승의 교훈의 테이프를 팔아먹고 하면 그 다음에 오는 게 뭘까? 그 결과를 알기 때문에 그렇게 할까? 그 자는 형벌을 각오해야 한다. 그 형벌은 어떻게 올 런지 모른다.

 

보혜사 성령? 보혜사 성령이 따로 있고, 방언성령이 따로 있고, 예언성령이 따로 있는 것이냐? 한 분이 이 역할을 하면 이렇게 되고, 저 역할을 하면 저렇게 되는 거다. 병 낫게 하는 성령이 따로 있고, 하나님의 예언을 하는 성령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한 성령이다. 사람은 하나인데 사람에 따라서, 환경 장소 일에 따라서 어떤 때는 연필로 쓰기고 하고, 어떤 때는 매를 들기도 한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다. 하나 속에서 인격에 의해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오는 거다. 성령님도 마찬가지다.

 

‘보혜사 성령은 죄에 대하여.’ ‘죄에 대하여’ 할 때 우리는 기본구원을 얻었기 때문에 이룰구원 차원에서 구원을 이루지 못하는 부분부분 면에서의 죄를 찾아야 한다. 다시 말하면 죄라 할 때 일반개념으로는 눈으로 보이는 죄 즉, 행동 죄 활동 죄를 말을 하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죄 즉,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 것을 죄로 보는 것이다.

 

그러면 그 뜻에 어떻게 일일이 맞출 거냐? 뭘 하면서 ‘이게 하나님의 뜻입니까, 저게 하나님의 뜻입니까?’ 하며 일일이 물어봐야 하는 거냐? 배가 고픈데 아침 밥상이 들어오면 ‘이 밥을 먹어야 하나님의 뜻입니까, 안 먹는 게 하나님의 뜻입니까?’ 해야 하는 거냐? 배가 고프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일반 이치적으로 밥을 먹으라는 것이다. 그건 하나님의 신호다. 밥이 왔으면 감사함으로 먹으면 되는 거다. 문제는 상대가 나를 넘어뜨리려고 꼭 그 때를 타서 시험을 거는 게 있다. 이때는 주의해야 한다. 우리는 이룰구원이 있기 때문에 다각적 다방면으로 들어가는 거다.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천국의 의에 대하여,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구원을 이루는 의에 대하여 알게 해 주시고,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해 주시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 그러면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심이 뭐냐? 나를 말씀의 사람으로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는데 내가 진리가 아니라면 그 안으로 못 들어간다. 진리와 하나이기 때문에 가게 된다 그 말이다. 그런데 이것을 듣지 못하도록 하고, 받지 못하도록 하고, 다른 데로 마음을 돌리게 하는 것은 심판을 자초하는 것이다.

 

목사님들은 이걸 귀담아 들어야 한다. 목사 한답시고 진리도 아닌 것을 주고, 예언이나 시키고, 방언이나 시키고, 충성봉사나 시키고, 구국주의 사회주의 신비주의 구복주의 극기 극복주의로 나가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신 목적이 아니다.

 

진리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천국복음을 전하다 보니 방편적으로 그런 일 저런 일을 할 수는 있는 거다. 예를 든다면 벳새다 광야에서 오병이어를 먹이는 것은 불쌍한 사람에게 밥 먹이고 옷 입히는 사회구제 목적으로 한 게 아니다. 그건 이적의 떡이다. 이적의 떡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몸을 말을 한다. 교훈적으로 말을 하면 진리의 교훈이다. 무슨 말이냐? 예수님의 본질과 같은 진리본질을 먹여서 그 다음에 제자들로 하여금 ‘바다로 건너가라’ 하는 장면이 나오게 된다. 그러니까 (진리를)배불리 먹여야 (전하러)가게 되는 거다. 이게 인생길이다.

 

그런데 이걸 일반 사회적 사고방식으로 해석을 해 버리면 거기에서 보여주는 하나님의 말씀성이 없어진다. 계시성이 없어져 버린다.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는 그 성질이 없어져 버린다. 우리도 상황에 따라 그런 일을 해야 되는 거지만 성경의 뜻을 그렇게 해석하면 안 된다.

 

우리도 이웃에 가난한 사람이 있으면 도와야 하고, 예수 안 믿는 사람이라도 수술할 병이 있으면 도와서 일단은 살려놔야 한다. ‘저 사람은 안 믿으니까 불택자인가보다. 죽건 말건 상관없다’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왜 그러냐? 우리가 예수 믿기 전에, 하나님을 몰랐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일반은총을 가지고 먹이고 입히고 했지 않았느냐? 우리가 그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이웃에 굶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쌀도 갖다 주고 할 수 있는 거다. 그런데 교회 통째로 ‘그렇게 하는 게 하나님의 계시의 뜻이다’ 하게 되면 문제는 달라진다.

 

그렇게 물질로 돼서 예수 바로 믿을 수 있는 거냐? 절대로 믿음으로 못 들어간다. 그렇게 해서 도움을 받은 사람은 ‘아, 이게 하나님의 사랑인가보다’ 하고 자기도 그 일을 하는 거다. 그런 일을 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보면 참 좋다. ‘그렇게만 한다면 살만한 사회다’ 하겠지만 그런데 사람이 깨달아져야 주는 사람이 되는 거다.

 

이런 것을 성경 구구절절이 말한다면 한이 없다. 예수님께서 ‘내가 말한 것은 영이니라’ 하니까 무리들이 다 도망을 가버렸다. 오늘날 말세 된 교회에 거짓된 인도자가 정말로 많다.

 

행13:8로 보면 사도바울이 1차 전도여행을 할 때 구브로 섬 바보라는 고을에 총독 서기오 바울이 사도바울을 불러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했는데, 이 때 바예수라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있었는데, 이 바예수는 엘루마 즉, 번역하면 박수다. 이 박수가 바울이 전하는 전도 자리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도바울을 대적하고 반박하고 총독 서기오 바울이 믿지 못하게 자꾸 방해를 한다. 그런 것처럼 목사님들이 진리본질이 아닌 말씀을 자꾸 전하게 되면 이건 자기가 알지 못하는 중에 예수님을 알지 못하도록 하고, 발견을 못하게 하고, 못 믿게 한 죄로 들어간다.

 

말씀을 증거 할 때는 하나님의 본질이라야 되는데, 여기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이치가 나와야 한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성품이 입어지고, 그 다음에 삶의 생활에서 지혜가 나오는 거다. 이러면 그 인격과 성품이 고상해진다. 이게 이룰구원 차원으로 영능의 실력적으로 많이 성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아니라 ‘예수 믿어 부자 되자. 만사형통 되자’ 하는 교회에서는 이건 없다.

 

엄마가 교회에서 충성봉사를 많이 하면 아들이 공부를 하나도 안 해도 엄마의 충성봉사를 보고 아들을 대학에 착 붙여주는 거냐? 좀 봐주지 않는 거냐? 실력은 실력대로 들어가는 거다. 그런데 이걸 그렇게 알지 못하는 교인들이 많다. 그러니까 신앙이치에서 보면 이건 하나님을 부정을 조장하는 분으로 만드는 거다. 그들 생각대로라면 말하자면 공부를 잘하는 사람이 떨어져야 공부를 못하는 자기 자식이 합격이 되는 거니까 그렇게 하려면 편법이 나와야 한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편법을 써서 자기 자식을 합격을 시키게 되면 하나님이 공의로운 하나님이 되는 거냐, 불의한 하나님이 되는 거냐? 기도문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했는데 누가 여호와 하나님을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게 해야 되는 거냐? 교인들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불의한 분으로 만들어 놓고서 그 주기도문은 왜 외우느냐? 이치가 틀린 거다.

 

사도바울이 그 바예수를 가만 보니 모든 궤계와 악행이 가득하고, 마귀의 자식이고, 모든 의의 원수이고, 주의 바른 길을 자꾸 굽게 만들고 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그에게 저주를 했다. 바예수가 눈이 멀었다. 바울의 말을 들어야 영의 눈이 뜨일 터인데 저주가 들어가 버렸다. 그 때야 물론 육신의 눈이 감겨진 건데, 그건 영적인 면에서 그가 소경임을 가르쳐 주는 거다.

 

거역의 일반적인 뜻은 윗사람의 명령과 뜻을 거스르고 항거하는 것. 모독의 일반적인 뜻은 침범하고 덤비고 욕되게 하는 것. 신앙 면에서 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과 뜻을 거스르는 일도 있고, 하나님의 살아있는 신령한 말씀을 세상적인 사고방식과 종교적 사고방식으로 모독하는 언행심사가 얼마든지 있다. 그러니 이제 생각을 하니 참으로 두렵다. 그러니까 이제는 그렇게 살면 안 된다. 거역하고 모독을 주며 살면 안 된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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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16 고린도전 하나님이 먼저다 file 고전7:32-35  이익환 목사  2022-03-15 304
17315 고린도전 부흥의 씨앗 file 고전6:9-11  이익환 목사  2022-03-15 154
17314 고린도전 누룩 없는 교회 file 고전5:6-8  이익환 목사  2022-03-15 229
17313 고린도전 마인드버그를 제거하라 file 고전4:3-5  이익환 목사  2022-03-15 136
17312 고린도전 가장 좋은 선물 file 고전3:16-17  이익환 목사  2022-03-15 223
17311 고린도전 하나님의 지혜를 따르는 삶 file 고전2:8-10  이익환 목사  2022-03-15 194
17310 고린도전 문제 해결의 열쇠 file 고전1:18  이익환 목사  2022-03-15 234
17309 다니엘 마지막을 기다리는 성도의 자세 단12:13  이익환 목사  2022-03-15 239
» 누가복음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 눅12:8-10  김경형 목사  2022-03-15 74
17307 시편 마트(mart) 안이 더 위험하다 file 시91:1-7  허태수 목사  2022-03-12 198
17306 요한복음 나는 하늘을 향해 화살을 쏘았노라 요4:27-38  허태수 목사  2022-03-12 104
17305 사도행전 성경 속에서 성경 읽기 행16:8-10  허태수 목사  2022-03-12 94
17304 요한복음 나는 내가 증거한다 요8:12-18  허태수 목사  2022-03-12 81
17303 누가복음 아흔아홉을 보는 눈과 하나를 찾는 마음 눅15:1-7  허태수 목사  2022-03-12 133
17302 신명기 우리는 트루-빌리버, 진짜 신자다. 신4:15-24  허태수 목사  2022-03-12 115
17301 이사야 우리가 믿는 ‘유일하신’ 하나님 사45:1-7  허태수 목사  2022-03-12 129
17300 마가복음 제목새 술을 담아 익혀 마셔라 막2:18-22  허태수 목사  2022-03-12 79
17299 열왕기상 축복의 단비를 주소서! 왕상18:1-2  전원준 목사  2022-03-10 227
17298 미가 평화의 왕이 오신다! 미5:2-5a  정용섭 목사  2022-03-08 107
17297 누가복음 성령과 불 눅3:7-18  정용섭 목사  2022-03-08 90
17296 누가복음 빈 들에서 눅3:1-6  정용섭 목사  2022-03-08 119
17295 누가복음 늘 깨어 기도하라! 눅21:25-36  정용섭 목사  2022-03-08 209
17294 요엘 수치를 당하지 않으리라! 욜2:21-27  정용섭 목사  2022-03-08 99
17293 히브리서 하나님께 가까이! 히10:19-25  정용섭 목사  2022-03-08 179
17292 마가복음 불행한 서기관 막12:38~44  정용섭 목사  2022-03-08 59
17291 마가복음 유대교 신학자의 질문 막12:28-34  정용섭 목사  2022-03-08 81
17290 누가복음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눅12:6-9  김경형 목사  2022-03-07 68
17289 누가복음 선한 이웃이 되라 눅10:25-37  강승호 목사  2022-03-06 148
17288 디모데전 경건한 그리스도인 딤전4:6-10  전원준 목사  2022-03-03 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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