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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헤미안 렙소디’와 예수의 탄생

에배소서 허태수 목사............... 조회 수 260 추천 수 0 2020.01.22 23:3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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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엡2:12-18 
설교자 : 허태수 목사 
참고 : 2018.12.11 성암감리교회 http://sungamch.net 

보헤미안 렙소디’와 예수의 탄생

엡2:12-18

   

요즘 이 영화로 인해 1975년에 나온 그룹 퀸의 노래가 역주행을 한다고 합니다. 제목인 ‘보헤미안 렙소디’란 ‘인습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 자유분방하게 노래하다’라는 뜻입니다. 퀸의 보컬은 프레다 머큐리라는 남자인데 이 사람은 탄자니아에서 태어난 페르시아계 혼혈입니다. 유색인종이었습니다. 그래서 영국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을 비하하는 의미로 ‘파키보이-인도 놈’라고 불렀습니다. 우리가 아는 ‘조센징’, ‘쪽발이’라는 비하어(卑下語)와 같은 것입니다. 이런 구분은 순수한 피를 기지고 태어난 사람은 옳고 섞인 피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은 틀리다는 ‘혈통주의’에서 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단일민족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고려가요에 ‘쌍화점’이라는 노래가 있는데, ‘쌍화점에 쌍화사러 갔더니 회회아비, 내 손목을 잡더라’는 대목이 나오는데 이 ‘회회아비’는 이란계의 아랍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고려시대에 이미 아랍, 거란, 여진, 몽골, 위구르, 베트남 사람까지 들어와 살았습니다. 여러분은 그 중에 어느 피가 섞였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니 이를 어찌 순수혈통이라고 할 수 있겠어요. 이렇게 1910년대까지 이 모든 민족을 아우르는 개념으로 ‘배달민족’이라고 했어요. 그러다가 1990년대 이르러 국제화가 이루어지면서 이른바 순혈주의가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이거야 말로 시대의 역주행인거죠.

 

얼마 전 인천의 한 건물에서 14살 아이가 폭력에 쫓겨서 달아나다가 떨어져 죽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러시아계 한국인이었습니다. 보헤미안 렙소디에 등장하는 프레디 머큐리 즉 ‘파커보이’가 등장한 사건인 것입니다. 프레디 머큐리는 노래로, ‘보헤미안 렙소디’로 ‘우리 아닌 존재’의 고통에서 벗어났지만 인천의 그 소년은 같은 또래들의 ‘우리’와 ‘우리 아닌’ 구별로 목숨을 잃은 것입니다. 뒤에서 다시 말씀을 드리겠지만 우리 사회는 빈부격차의 장벽, 북에서 온 국민과 남한에 정주하고 살아온 국민과의 보이지 않는 벽, 다문화 가정, 이주 노동자, 난민등의 문제들로 인해 반 보헤미안 렙소디의 사회가 구축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런 때에 이 영화를 보는 이들은 단지 음보(音譜)로만 이 영화에 매료될 게 아니라 사회과학적인 해석의 눈으로 읽어야 합니다. 이에 우리는 한 발자국 더 나아가 보헤미안 렙소디의 프레디 머큐리를 아기예수의 탄생의 빛으로 조명해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프레디 머큐리는 혈통으로 사람과 사람을 칸 막아 소통과 평화를 깨뜨리는 시대에 그것을 거부하고 세상을 평화로 잇는 삶을 살지 않았습니까? 그것이 ‘보헤미안 렙소디’가 이 시대에 소환되어 각광을 받는 뜻이라는 겁니다. 그런 시선으로 2018년의 예수 탄생을 보자는 것이죠.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바울이 에베소교인들에게 보낸 편지 중 일부입니다. 이 단락 속에는 바울이 어떻게 예수를 이해하고 있느냐 하는 게 담겨 있습니다. 14절이 핵심 구절인데, “그는 우리의 평화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셨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라고 규정되어 있죠. 그 평화의내용이 뭐냐 하면 ‘둘러 갈라진 것을 하나로 만들고 중간에 막힌 담을 허는 일’로 규정되어 있죠? 여기서 중간에 막힌 담은 ‘중간에 가로막은 분리의 장벽’을 말하는 것입니다. 강조점이 ‘분리’죠? 이 단어가 우리 성경에는 번역되어 있지 않습니다.

바울에게 예수는 둘 사이를 분리시키는 장벽을 허물어 버리는 존재이며, 그가 하시는 일은 바로 이 장벽을 허무는 일입니다. 평화란 장벽이 분리시키는 장벽이 허물어질 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말하는 그 담, 장벽, 분리시키는 그 장애물은 뭘까요? 누구와 누구를 무엇과 무엇을 가로 막고 있는 담인가요? 인종과 인종을 가로막는 담입니다.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의 담, 헬라인과 유대인 사이의 담을 지적합니다. 12절에서, 이방인은 약속 밖의 사람들로 규정됩니다. 바울도 롬3:9에서 유대인이 헬라인보다 더 나은 게 없다고 말합니다. 10:12절에서는 더 분명하게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다고 선언합니다. 차별이란 이쪽과 저쪽에 긴 천(cloth)이 내려져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둘 사이에 그런 천은 있어서도 안 되고, 있을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몇 주 전에 ‘선택받은 사람’즉 ‘성민’에 대한 이야기를 드렸습니다. 특별해서 성민이 아니라 불상하게 여겨서 특별히 여김을 받은 것이라는 게 주된 의미였습니다. 이스라엘이 성민이 된 내력을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걸 그들은 배타적인 의미로 사용해왔습니다. 세례요한은 마3:9에서, ‘너희만 하나님의 자녀라고 한다면 돌멩이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다’고 까지 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정체성으로 다른 민족과 분리하는 근거로 삼았던 그들에게 이런 예언자들의 말은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는 좀 더 적극적으로 이쪽과 저쪽을 구별하여 배타하여 계층화된 세상이 평화하게 하셨습니다. 이게 2000년 전에 오신 예수가 하신 일입니다.

 

그러면 오늘, 2000년 뒤에 오시는, 좀 더 정확하게 말해서 오시는 예수를 받아들여 그 예수처럼 살아야 하는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무엇일까요? 보헤미안 렙소디를 불러야 하는 것입니다. 그걸 부르던 프레디 머큐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갈라진 것을 하나로 꿰매 ‘평화의 사람과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내용면에서는 2000년 전과는 완전히 다른 장벽들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남자와 여자 사이에, 자본과 자산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사이에, 가난한자와 부자사이에, 내국인과 난민 사이에, 남쪽국민과 북쪽 국민 사이에, 노인과 젊은이 사이에, 그리고 노인들 사이에서 조차 서로를 가리 우고 배제하는 장막으로 장치되어 있는 세상입니다. 엊그제 신문 기사는 이제 강남의 아파트는 중산층의 상징물이 아니라 ‘넘세벽’이라고 정의하고 있었습니다. 세상이 뒤집어져도 넘을 수 없는 벽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배타적인 인종적 경계선을 긋고 사는 이들은 비단 이스라엘뿐만이 아니죠. 미국의 백인사회도 그렇죠. 되놈, 양놈, 쪽발이, 조센징 하는 것도 모두 분리와 배타주의입니다. 심지어는 같은 동네에 조금 나은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과 조금 작은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조차 서로를 분리하며 삽니다. 사회는 점점 계급이 고착이 되어서 태어날 때 가난하면 평생 그 가난을 면하기 자본주의적 배타주의 세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근래에 등장하는 여성과 남성의 차별화에 대한 논의들도 결국은 평등성의 위배 즉 유대인과 이방인, 유대인과 헬라인의 장벽과 다르지 않습니다. 요즘 대학에서 ‘여학생학우회’가 사라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제 전국대학에 몇몇 대학만 여학생 학우회가 있답니다. 남자학생들이 투표로 없애버렸다는 겁니다. 이는 여자혐오의 한 전형일지도 모릅니다. 북쪽의 동포들 4만 명 이 우리와 같이 살고 있고, 국내에 체류하는 난민은 탈북자수보다 더 많습니다. 우리는 은연중에 이들과 우리사이에 천을 내려 장벽을 만들고 있습니다.

 

내일 모레 아기예수의 탄생일이라고, 아기 예수가 오셔서 앞에서 지적한 이런 장벽들을 걷어내는 일을 하실 거라고 믿는 분들은 없죠? 결국 이 일들은 예수가 하셨던 삶의 방향성과 의미를 내 믿음으로 받아들인 우리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그 전에 우리는 에베소서를 통해 예수에 대한 정체성을 이해했던 바울의 이야기를 결론적으로 들어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당시 사회 속에 장치되어 있었던 여러 종류의 막힌 담을 허는 이유는 평화를 곳곳에 정착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본문 17절에서는 그리스도의 역할이 먼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평화를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도 평화를 전하는 것이었음을 또렷하게 천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적어도 ‘평화를 위한’것이었음은 분명합니다. 앞의 문장에서 ‘평화’라는 단어를 반복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중복되는 문장인데도 생략하지 않은 이유는 이 ‘평화’를 강조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먼 곳에 있는 사람에게도 평화,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에게도 평화를 전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난 날 예수님이 지상에서 수행했던 역할을 이어받고 그 여할을 충실히 수행하기로 결단한 사람들이 다름 아닌 크리스챤들이라면, 아니 성암교회 교우들이라면, 우리가 감당하며 살아야 할 역할도 분명해진 셈입니다. 이 시대의 프리데 머큐리로 사는 것입니다. ‘보헤미안 렙소디’를 불러야 하는 것입니다. 그 노래에 세상이 열광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2000년전 유대 땅의 예수가 그랬듯이 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누구에게는 성탄이 큰 짐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걸 짐이라고 여기지 않고 받아들여 사는 자는 복된 성탄이 아니겠어요? 해마다 돌아오는 성탄절입니다. 뻔한 삶의 배열에 의식이나 관점이나 신앙의 태도를 두지 말고, 먼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평화를 전하고(만들고)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 평화를 지어내는 예수그리스도의 대변인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성탄절에 우리가 프레디 머큐리의 [보헤미안 렙소디]를 관람하면 좋겠습니다. 보신 분들도 성탄의 의미와 함께 다시 보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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