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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누가교회의 교우들

누가복음 허태수 목사............... 조회 수 215 추천 수 0 2018.09.19 18:2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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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눅19:1-10 
설교자 : 허태수 목사 
참고 : 2017-11-29성암감리교회 http://sungamch.net 

누가복음, 누가교회의 교우들

눅19:1-10

  

지난 주일에는 마태복음교회의 교우들의 삶과 신앙을 톺아보았습니다. 오늘은 누가복음 즉 누가교회 교인들의 신앙은 어떤 상황에서 어떠했나를 보려고 합니다. ‘본다’고 해서 모델 하우스 구경하듯 그렇게 하겠다는 게 아니라, 그들의 신앙을 거울삼아 현재의 나를 보겠다는 뜻입니다.

 

누가복음을 탄생시킨 공동체는 마가 공동체보다는 훨씬 규모가 크고 다양성을 담보하던 공동체였습니다. 누가는 열두 제자뿐 아니라(6:13) 70인의 제자를 언급하고 있으며(10:1) 이들이 모두 많은 제자들 가운데서 뽑힌 대표들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대표들만 모두 82명이었으니 누가공동체는 큰 교회였을 것입니다. 전쟁의 급박한 상황에서 이방인 지역의 한 변두리에 모여 작은 소종파를 이루었던 마가 공동체와는 달리 누가는 팔레스타인이라는 작은 울타리를 벗어난, 어쩌면 로마에 터를 닦고 있었던 보다 더 포괄적이고 더 보편적인 성격을 지닌 공동체였습니다. 그 공동체 안에는 가난한 사람과 부자가 섞여 있었고,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있었으며, 열두 사도와 칠십인 대표와 같은 지도자들과 라오스라고 불리는 평신도들이 함께 있었습니다.

 

또한 누가복음서 저자는 경건한 유대전통의 그리스도교 계열에서 만든 예수의 어록을 읽었고, 이방인과 소외된 계층이 그리는 예수의 복음이야기인 마가복음서도 읽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제 이전에 자기가 들었던 예수 이야기와 이미 읽은 모든 이야기들을 가지고 처음부터 순서대로 정확히 정리하여 한 로마관료에게 보냅니다(누가 1:3). 그렇게 하는 이유는 그리스도교가 이제 더 이상 “어느 한 구석”(행 26:26)에서 일어난 불분명한 스캔들이 아니라 성령의 힘에 의해 모든 사회 계층을 꿰뚫고 들어가며 다른 민족, 인종 및 계층의 벽을 뒤흔드는 생명력 있는 운동이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가는 제일 처음 유대인인 세례요한의 이야기에서 시작해서 이방인의 사도였던 바울이야기로 끝을 냅니다. 우리는 누가복음서와 사도행전이 같은 저자의 것임을 이미 알고 있고, 그래서 신학자들은 누가복음서와 사도행전을 붙여서 누가-행전이라고도 말합니다.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유대 사회에 하나님 나라 운동이 펼쳐진 것처럼, 이제 이후 제자들과 평신도들을 통해 이방 세계가 변화합니다. 가난한 자들의 해방과 평등 경험에서 비롯된 이 공동체에 부자들이 동참하고, 로마 사회에 상습적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떼거리들이라는 의심을 받았던 상태에서 이 사회에 가치 있는 요소를 제공하는 공동체로 탈바꿈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그리하여 이제 누가는 예수 사후 그 운동을 이은 자신들의 선교를 통해 성령의 능력 안에서 온 세계에 하나님 나라가 이뤄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로마시민들이 좋은 황제로 기억했던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가 만든 로마의 평화(팍스 로마나)보다 훨씬 더 낳은 평화를 만드는 나라임을 증명해보이고자 했습니다.

 

누가공동체는 로마대제국 안에 살고 있지만 로마의 황제가 마치 자신들이 신인 양 제 맘대로 하도록 두지 않았습니다. 누가복음서가 쓰이기 전의 로마를 다스리던 도미티아누스는 자신의 신하들에게 자신을 “주와 하나님”(Dominus et Deus)으로 부르게 한 첫 번째 로마황제였는데, 유대인의 세금을 따로 거두기 위해 군중들이 보는 앞에서 90세 노인조차도 바지를 내리고 할례를 받았는지 조사하는 악독하고 교만한 놈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로마의 귀족들에게 암살당하였고, 누가는 이렇게 교만한 황제의 죽음 속에서 “권세 있는 자를 왕좌에서 끌어내시고 비천한 자를 높이시는”(누가 1:51-52) 하나님의 뜻을 보았습니다. 로마가 워낙 거대한 권력이기에 직접적인 정면대결은 못했지만 예수의 시험이야기에서 마귀를 로마황제의 모습으로 상징화하고, 사도행전 12장 20절 이하에서는 헤롯 아그립바가 자신을 신격화 시켰기 때문에 죽었다고 말합니다. 누가공동체는 정치적 권력이 신성화되는 것에 대해 직접적으로 그리고 공개적으로 공격합니다.

 

누가공동체는 사도행전을 남기면서 바울의 순교를 적지 않습니다. 그가 우상처럼 떠받들어질까 염려한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 나라 운동이 왕성해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널리 전파되었다는 것으로 사도행전이 마치는 뜻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산헤드린 앞에서 선교 금지를 당한 베드로와 요한의 말을 들어 봅시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보다 당신들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일이겠는지 한 번 판단해 보시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소이다.”(행 4:19-20) 이렇게 말하고 풀려난 베드로와 요한은 다른 사도들과 함께 모여 기도합니다.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주님, 주께서는 우리의 조상이며 주님의 종인 다윗의 입을 빌려 성령의 힘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이방인들이 떠들어 대고 뭇 백성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주님을 거슬러, 그의 그리스도를 거슬러 세상의 왕들이 들고 일어나고 군주들이 함께 작당하였다.’”(행 4:24-26) 후에 다시 산헤드린이 이들을 호출하자 또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합니다.”(행 5:29)

 

누가는 바리새인들을 구별해서 볼 줄 압니다. 누가복음서의 전통적인 논쟁에서 일반적으로 대다수의 바리새인들은 위선자로 그려지고 있지만(루가 11:37-54), 누가는 그리스도교를 지지하는 바리새인도 알고 있습니다(행 5:35 이하). 어떤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을 자기 마을에 못 들어오게 하지만(누가 9:51이하), 한 사마리아인은 이웃 사랑(누가 10:25-37)과 감사하는 신앙(누가 17:11-19)의 모델입니다.

 

누가는 정부와 권력자들을 묘사할 때도 구분합니다. 헤롯 안티파스는 세례요한을 죽이는 악한 놈일 뿐이고(루가 3:19 이하), 예수의 생명을 위협하는 자(누가 13:31 이하)일 뿐이고, 빌라도는 예수가 무죄임을 알면서도 사형집행을 하는 폭군(누가 23:4, 14, 22)일 뿐이지만, 총독 서기오 바울은 그리스도교의 메시지를 접하고(행 13:4-12)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바울에 의해 헤롯 아그립바 2세는 그리스도교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선교를 단 한마디로 요약하고 있는데 그것이 오늘 우리 모두가 함께 읽은 말씀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사람들을 찾아 구원하러 온 것이다.” 이 한마디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교의 에토스인 예수 그리스도 휴머니즘을 발견합니다. 예수는 가난한 이들, 죄인들 그리고 비천한 사람들을 위하여 헌신하는 인간애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는 잃은 사람들 당시에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사회 문화적으로 소외당하고, 때로는 여론에 의해 매도당한 사람들을 찾아 그들과 함께 식탁교제를 나눕니다. 우리는 잃은 은전의 비유, 잃은 양의 비유, 그리고 잃은 아들의 비유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지극한 것인지, 선교의 핵심이 무엇인지, 방법은 어때야 하는지 정확하게 배울 수 있습니다.

 

누가-행전의 첫 머리를 장식하는 세례요한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속옷 두 벌을 가진 사람은 한 벌을 없는 사람에게 주고 먹을 것이 있는 사람도 이와 같이 남과 나누어 먹으라”(누가 3:11)고 말합니다. 이것은 가난한 자들을 후원하라고 소수의 부유한 자들에게 하는 말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세례요한의 말을 듣는 이들은 ‘오클로이’ 즉 가난한 민중들입니다. 이 말은 속옷 두 벌을 가지고 두 사람이 공유하며, 먹을 것도 여러 사람이 함께 소유하라는 말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함께 서로 어깨를 기대어야만 살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누가-행전의 후반부의 주인공인 바울은 에페소의 장로들에게 또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누구의 은이나 금이나 옷을 탐낸 일이 없습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나와 내 일행에게 필요한 것은 모두 나의 이 두 손으로 일해서 장만하였습니다. 나는 여러분도 이렇게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도와주고 또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 하신 주 예수의 말씀을 명심하도록 언제나 본을 보여 왔습니다.”(행 20:33-35) 이 말씀은 부자들을 향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고대에는 자신이 일을 해서 먹고 사는 것이 아니면 부자로 여겨졌습니다. 이 고별연설은 다른 사람의 노동으로 자신의 경제적 독립을 확보할 수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설교한 것입니다. 바울은 경제적 독립보다 더 중요한 무엇을 위해서 설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다른 이들의 도움을 받아서 생계유지를 할 수 있었으나, 그 권리를 희생합니다. 즉 그는 부양받기 위하여 일하기보다, 오히려 주기 위해서 즉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일하였고, 그럴 때만이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예수의 말씀이 의미가 있게 됩니다. 이 말씀에 따르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일을 하여야 할 의무가 있으며, 욥바와 다비다는 과부들을 위해 옷을 지음으로써(행 9:36-43) 좋은 모범을 보였습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은 단순히 돈 많은 세관장이라는 이유 때문에 모든 사람들로부터 죄인이라는 낙인이 찍혀 있었습니다. 식민지 지배 상황에서 세리들은 로마의 중개인 역할을 하면서 폭리를 취하기 일쑤였기에 세관의 우두머리라면 그런 혐의에 노출될 확률이 거의 100%에 달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자캐오가 남을 속여먹었다는 근거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8절에 “제가 남을 속여먹은 것이 있다면 그 네 갑절을 갚아주겠습니다”라고 말한 것은 오히려 “자신은 결백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부자였고 세관장이었기에 매도를 당했던 자캐오가 오늘 자신의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구원을 얻었고, 예수는 그동안 소외된 삶을 살았던 자캐오를 방문하고 그와 함께 먹고 마시고 그로 하여금 나눔의 기쁨을 맛보게 함으로써 살 맛 나게 만들어 줍니다.

 

세례요한의 충고, 바울의 연설, 자캐오 이야기가 이루어 낸 결과는 무엇인가요? 그것은 모든 사람이 함께 수평적으로 하나 되는 것입니다. 사랑의 공산주의(Communism of Love)가 실현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루가복음 9장 23-24절에서 예수께서는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제 목숨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 것이다.”

 

한 번 더 읽겠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제 목숨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 것이다.” 제 목숨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에 대해 잃고자 하는 사람이 아니라 지금 제 목숨을 잃는 사람 즉 미래에 목숨을 잃어버리려고 하는 사람이 아니라 현재 목숨을 잃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는 것도 “한 때”나 “앞으로”가 아니라 매일 지는 사람입니다. 그게 누가교회의 교인들의 신앙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입니까? 한 때 십자가를 졌던 사람입니까? 앞으로 질 사람입니까? 아니면 매일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사람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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