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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아침 차 한잔 마시면서 전해드리는 햇볕같은이야기
♣♣그 6021번째 쪽지!
□십일조의 축복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형통(亨通)하기를 바라시지만, 두 번째로 십일조를 하지 않으면 형통의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십일조는 ‘물질의 축복’을 받는 그릇입니다.
이 세상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인간들이 십일조를 바치든 안 바치든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으시는 부자이십니다. 진짜, 인간들이 바치는 십일조는 하나님께 ‘코묻은 돈’에 불과 합니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하나님은 쩨쩨하게 십일조를 바치면 복을 주시고 안 바치면 복을 안 주시는 분은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복을 주십니다. 그러나 그 복을 받는 그릇은 받을 사람이 준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릇만 가져오면 얼마든지 담아갈 수 있습니다. 십일조는 물질의 축복을 담아가는 그릇입니다.
주일과 십일조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형통의 복을 받게 하는 가장 중요한 믿음입니다. 온전한 축복은 주일과 십일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주일과 십일조는 ‘담’이 되어 그리스도인을 안전하게 지켜줍니다. 집에 튼튼한 담이 있으면 얼마나 마음이 든든합니까?
그러나 담이 없으면 악한 영이 맘대로 들락거리며 좋은 것을 다 훔쳐가는 활짝 열린 집이 되고 맙니다. 다른 믿음이 아무리 좋아도 ‘담’을 쌓지 않으면 수시로 도둑맞게 됩니다.
십일조는 다른 돈을 다 쓰고 남은 것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쓰기 전에 먼저 십분의 일을 떼어내는 것입니다. 그 십분의 일이 나머지 십분의 구를 지키는 것입니다.
예수 잘(?) 믿어도 하나님의 형통의 복을 받지 못하는 가장 큰 근본 이유는 주일과 십일조의 문제이며, 주일과 십일조를 시작하면서부터 온전한 축복도 시작됩니다. ⓒ최용우
♥2018.3.6. 불날에 좋은해, 밝은달 아빠 드립니다.
댓글 '7'
이주현
가이사것은 가이사에게..
샬롬.
성도님께 하나님 우리아버지와 예수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은혜와 사랑이 충만하길 소망합니다.
이래저래 십일조 문제로 여러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그런데 유독 우리나라가 좀 유난하죠. 그것은 십일조를 드리냐 안드리냐로 사람의 신앙을 좋 나쁘냐로 구분하려는 이유이기도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로 인해 교회가 분쟁이 있다는게 문제입니다. 이를 보면 꼭 고린도 교회의 모습과 매우 유사합니다. 그들은 은사를 받았냐 안받았냐 로 성도의 믿음을 평가했으며 또한 나아가서 서로 편가르기로 나누어졌고 그로인해 분쟁이 심화됐다는 것입니다.
중요한것은 십일조로 개인의 신앙을 평가할 수 없으며 그것이 구원의 기준이 될 수 없다는것 입니다. 십일조로 평가 된다면 바리새인이 예수님께 독사새끼라고 욕먹는게 이상한 일이죠.
십일조는 하지만 하나님말씀대로 살지 않는 사람들.. 십일조를 낼 돈은 빼 놓구서 나라에 내야 할 세금을 속이는 자들.. 십일조를 낸다 하면서 근로자의 임금을 착출 하면서 나는 십일조를 내는 신앙 좋은 교인이라고 자랑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것은 드리는 것이 아니라 내는 사람들이죠
물론 성도가 드리는 향기로운 예물은 하나님께서 기쁘시게 흠향해 주시고 교회에도 유용하게 하나님의 일에 사용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가인처럼 삶과 제사가 일치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심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십일조의 전통을 지키려는 한국교회의 선택은 존중합니다만 그로인해 이 한국교회가 돈으로 병들어 가는것을기억하고 우리는 회개해야 합니다. 십일조도 중유하지만 정의와 자비와 신의도 행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겠습니다.
그것들도 반드시 행해야 하겠지만 이것들도 소홀히 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을요.
더 나아가서 십일조를 드리든 성령을 따라 자원하는 마음으로 예물을 드리든 하나님과 예수님이 한몸이듯 우리도 주 안에서 하나임을 감사하고 서로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십일조의 기원은 아브라함이 멜기세댁 제사장에게 드린것인데 그것은 천지의 대주재이신 하나님께 찬양의 의미로 드린 것입니다.
창세기 14장
18. 그 때에 살렘 왕 멜기세덱은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다. 그는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다.
19. 그는 아브람에게 복을 빌어 주었다. "천지의 주재, 가장 높으신 하나님, 아브람에게 복을 내려 주십시오.
20. 아브람은 들으시오. 그대는, 원수들을 그대의 손에 넘겨 주신 가장 높으신 하나님을 찬양하시오." 아브람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에서 열의 하나를 멜기세덱에게 주었다.
이처럼 우리는 찬양의 의미로 마땅히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려야 함이 맞지 않을까요? 그러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도 함께 행하면서요.
정의:진리에 맞는 올바른 도리.
자비:남을 깊이 사랑하고 가엾게 여김.
신의:믿고 의지함.
그리고 십일조는 율법이 아니기에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에서 베풀어야 할 사람들인데 소득이 적은 분들이나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과부와 고아들입니다. 사회적 약자들은 오히려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과부의 두 랩돈 사건입니다.
누가복음 21장
1. 예수께서 눈을 들어서, 부자들이 헌금궤에 헌금을 넣는 것을 보시고,
2. 또 어떤 가난한 과부가 거기에 렙돈 두 닢을 넣는 것을 보셨다.
3. 그래서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가난한 과부가 누구보다도 더 많이 넣었다.
4. 저 사람들은 다 넉넉한 가운데서 자기들의 헌금을 넣었지만, 이 여자는 구차한 가운데서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털어 넣었다."
5. 몇몇 사람이 성전을 가리켜서, 아름다운 돌과 봉헌물로 꾸며 놓았다고 말들을 하니,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이 말씀을 두고 혹 누구는 저봐라 생활비 전부를 털어 넣어야 하나님께서 많이 바쳤다고 인정해 주신다. 너희들도 배우라고 거짓말을 합니다.
과연 이 말씀이 그런 뜻으로 말씀하셨을까 생각해봐야 합니다. 말씀의 진의를 파악해야 합니다. 저당시는 헤롯성전을 짓기위해 갖가지 세금을 걷을 때였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고발하는 것 이였습니다. 과부의 하루 먹을 식량를 살 돈까지 갈취하는 이 시대의 현상을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속여 과부의 하루먹이 까지 바치게끔 말입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몇몇사람들이 말하죠.
성전을 가르키며 아름다운 돌과 봉헌물로 꾸며 놓았다고..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21장
6. "너희가 보고 있는 이것들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질 날이 올 것이다."
너희들이 과부의 생활비 전부까지 갈취해서 만든 이 성전 돌 하나도 돌위에 남지않고 다 헐어버릴 거라고..
이시대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며 과부와 고아와 사회적 약자들에게 하나님의 양식을 베풀지 않고 거두려고만 하고 교회 건물의 확장을 성공의 잣대로 여기는 많은 한국교회를 조심해야 합니다.
말이 너무 나갔네요. ㅎㅎ
암튼 어려운 분들은 교회가 품어야 하며 하나님것은 하나님께 가이사것은 가이사에게..
삼가 짧고 작은 지식으로 말씀을 권면하니 적지만 도움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샬롬.
김경호
그리고 이 십일조가 신약시대에 이르러서 폐지되었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향해 "화 있을진저 !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 23:23)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이것'은 십일조를, '저것'은 율법의 정신인 정의, 긍휼, 믿음입니다. 예수님이 이것도 행하라고 하신 것은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 정당함을 인정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십일조는 신앙의 바로비터입니다. 십일조를 드리는 것을 주저하는 마음에는 재물에 대한 인색함이 자리잡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재물에 대한 탐욕은 구원을 막는 위험요소임을 엄히 경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하셨는데 이 말씀은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사랑하는 사람은 구원받기 어렵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또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눅 18:24-25) 하셨는데 사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은 절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부자라고 해서 다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성경의 의미를 이해하려면 context를 살펴봐야 하는데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당시의 부자들은 탐욕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의 부자들은 재물에 대한 욕심을 채우려고 불의한 방법으로 재물을 모은 이들이 태반이었는데 세리장 삭개오도 동족의 고혈을 뽑아서 치부했던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에 나오는 부자와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에 나오는 부자는 사후에 모두 구원을 받지 못했는데 그것은 그들이 부자여서가 아니라 탐욕과 재물을 바르지 못하게 사용한 것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마치시면서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눅 12:21) 하셨는데 이 말씀은 재물을 어떻게 쓰는가는 구원과도 깊은 관련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십일조는 재물을 바르게 사용하는 방법에 속합니다. 십일조는 재물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한다는 신앙고백이며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행위입니다.
세상에는 십일조 드리는 것이 아까워 교회에 나가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사랑하는 행위이지요.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사랑하는 사람의 결국은 멸망입니다.
구원이 신앙고백에서 나오는 것일진대 십일조는 자신의 신앙고백이 참임을 증명하는 수단입니다. 온전한 신앙인은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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