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정원  | 출판사 : 영성의 숲
판매가 : 8,000원7,200원 (10.0%, 800↓)
Love  Is  Everything 사랑이야말로 인생의 목표이며하나님의 의도이며 완성입니다.우리는 영혼의 진보를 위하여 이 땅에 왔으며영혼은 진보될수록 사랑이 섬김,아름다움과 따뜻함의 성향을 가지게 됩니다.우리들은 사랑이 발전한 수준만큼하나님과 연합하게 되며천국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는진정한 사랑과 따뜻함이 필요한 시대입니다.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받지 못하므르지치고 병들고 죽어가고 있습니다.어떻게 하면 우리는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어떻게 그들의 사랑의 시선으로 보며영혼을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통로가 될 수 있을까요우리는 이 책에서 그 해답을 찾아볼 것입니 …[더보기▶]



정원<영적인 삶의 중심은 사랑입니다>

제목 변경<영성의 중심은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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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이전에 한번 읽었고 이번에 한번 더 읽은 책입니다.
책의 내용중 일부 내용을 올립니다.


1.주님의 슬픔


어느 날 주님께서는 몹시 분노하셨습니다.  
 주님의 생애 중에서 주님께서 분노하신 것은 거의 몇 번 되지 않았습니다. 마태복음 23장에서 주님은 외식하는 서기관바리새인들을 심하게 꾸짖으셨습니다. 또한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에게 분노를 표현하셨습니다.(마21:12,13 )
 그러나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 주님은 따뜻하고 온유하신 분이셨습니다. 그분은 사람들을 아주 친절하고 사랑스럽게 대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날의 분노는 도대체 무슨 연유에서였을까요?
 
 이 날 주님은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마침 손 마른 사람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주님은 넘치는 긍휼의 마음으로 그 병자를 바라보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한가운데로 불러 세우셨습니다.
 이제 주님은 여태껏 그렇게 해 오셨던 대로 그 병자를 치유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많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함께 있었습니다. 그들은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그들은 손이 마른 병자와 예수님을 주의 깊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병자를 바라보는 관점은 주님과 전혀 달랐습니다. 그것은 병자에 대한 연민의 관점이 아니었습니다. 병자가 살아왔던 지금까지의 아픔에 대한 안타까움의 마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느냐, 아니냐에 있었습니다. 율법을 지키느냐, 아니냐에 있었습니다. 그것은 법에 맞는가, 맞지 않는가에 있었습니다.
 
 불구의 몸이라는 사실 때문에 이 사람은 많은 아픔의 세월을 보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지도 모릅니다. 부모의 마음에 너무도 많은 한을 남겨주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제 그의 인생은 새롭게 시작될 수 있는 계기가 생겼습니다.
 그를 치유할 힘이 있으며, 그를 치유하기 원하시는 주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시각은 아주 냉혹했습니다. 그가 치유되고 회복되어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보다 지금 치유되는 것이 법에 맞느냐, 맞지 않느냐 하는 것, 그것이 그들에게는 훨씬 더 중요했던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의 마음을 아십니다. 아무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주님은 회당을 감싸고 있는 냉정하고도 악한 분위기를 느끼십니다. 병자를 만지려던 손을 멈추시고 주님은 그들에게 조용히 물으십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막3:4)
 그러나 아무도 대답하지 않습니다. 회당에는 죽음과 같은 정적이 흐를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저희 마음의 완악함으로 인하여 분노하십니다. (막3:5) 그것은 분노이면서 동시에 슬픔입니다. 그들은 아무런 악한 행동을 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러나 주님은 그들의 침묵 속에서 그들의 적의를 느낍니다. 그들의 잔인함, 무정함을 느끼십니다.
 주님은 노하심으로 저희를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손을 내밀라.”
 그가 순종하였을 때 그의 손은 곧 회복되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바리새인들은 분노로 충만해집니다. (눅6:11)
 그것은 주님의 슬픔, 주님의 분노와는 전혀 다른 성격의 분노였습니다.
 그들은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기 시작합니다. (막3:6)

 그들은 왜 화가 났을까요? 무엇이 그들은 그렇게도 싫었을까요? TV에서 이산가족이 재회하면서 울면 대부분의 시청자들은 같이 따라 우는 데, 왜 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이 치유된 병자의 기쁨에 동참할 수 없었을까요?
 흐느끼는 그의 눈물에, 기뻐 뛰는 그의 행동에 왜 같이 감격할 수 없었을까요?
경직된 그들의 신앙관이 그들의 인간성을 말살했을까요? 
 안식일에 일을 한다는 것, 법을 어긴다는 것, 그것이 그렇게 억울했을까요? 아니면 예수님의 인기 때문에 그들의 위치가 위협을 받았기 때문일까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지도자들은 정치 지도자이든, 종교지도자이건 상관없이 정적이나 경쟁자에게 대중의 인기를 빼앗기게 되면 자기 반성을 하는 것보다는 상대방 쪽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거나 이단으로 몰아서 제거하는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물론 그 쪽이 훨씬 쉽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도 아마 그랬을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그들이 종교의 지도자들이고 성경에 대해서 가장 잘 아는 사람으로 자처했으면서도 그들은 참된 신앙의 정신, 사랑과 긍휼의 마음에 대해서 거의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의 형식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참된 율법의 정신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무엇이 옳고 그른가에 대해서는 박사 학위 논문도 쉽게 썼을 것입니다.
 그러나 연약하고 버림받은, 진정 사랑이 필요한 사람들의 필요에 대해서 그들은 진정 둔감했고 냉정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따뜻함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들은 자연스러운 인간성을 잃어버렸습니다. 가장 따뜻해야 할 신앙이 오히려 사람을 정죄하고 억압하는 도구로 전락했으며 이러한 그들의 냉정함이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슬프게 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은 어떨까요? 지금의 상황은 그때보다 좀 나을까요? 안타깝지만, 오늘날의 상황도 별로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신학과 교리는 그 어느 때보다 발전했는지 모르지만, 관용과 사랑의 정신은 별로 나아진 것이 없어 보입니다. 당시 마음의 아픔을 느끼셨던 주님께서는 아마 이 시대에도 여전히 고독하시고 여전히 아파하시지 않을까요. 사랑과 열정이 많이 식어버린 그분의 몸된 교회를 향하여 몹시 괴로워하시지 않을까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하신 그분의 노하심과 근심하심이 지금 이 시대에도 계속되지 않을까 싶은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날에도 신앙의 본질적인 부분인 사랑과 따뜻함의 아름다운 마음보다도 많은 지식과 신앙 경력, 교회 안에서의 위치 등이 더 중요시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의 교회에서도 천국의 향취와 따사로움과 안식보다는 정죄와 편가르기, 무관심, 시기, 경쟁의 요소를 많이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정한 따뜻함을 회복하기 위하여, 신앙의 본질을 회복하기 위하여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상한 마음을 위로하고 그분과의 실제적인 교통을 회복할 수 있도록 사모하고 구하여야 합니다. 그렇게 교회에 사랑과 따뜻함과 주님의 임재가 충만하게 될 때 우리는 교회가 실제적으로 천국의 문이 되는 것을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5.영적 전쟁의 3가지 측면 - 1)능력대결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영적 전쟁에 대해서 잘 모르면서도 자기에게 불리한 것은 전부 마귀 취급을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나와 기질이 잘 맞지 않는 남편도 마귀, 나를 괴롭히는 직장 상사도 마귀...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대결하는 구도 속에서는 바른 영적 성숙이나 인간관계를 맺기가 어렵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대체로 정보, 지식도 충분하지 않으면서도 자기의 지식이나 교리에 대한 확신이 많은 것 같습니다.
기껏해야 자기의 영적 지도자로부터 조금 배운 간단한 교리에도 큰 확신과 긍지를 가지며 그와 반대되는 의견을 가진 다른 교파나 형제들을 배척하며 이단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직됨은 그리스도의 몸된 하나된 교회를 분열시키고, 고통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무엇보다도 관용과 사고방식의 유연함이 필요하다고 하겠습니다.
남을 함부로 정죄해서는 안되며 심지어 이단이라고 해서 그들의 인격을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교회는 항상 약할 때는 핍박을 받았지만, 세력이 클 때는 반대로 잔인하게 교권을 사용해서 사람들의 인권을 유린했습니다.
종교전쟁으로 죽은 사람은 2차대전시에 죽은 사람보다도 더 많으며 모든 아집 중에서 종교적 광신만큼 무서운 것이 없는 것입니다.
구원의 길은 오직 예수님 뿐이지만, 우리는 불신자나 심지어 무신론자에게도 배울 것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관용하고 넓어지는 것 - 이것만이 그리스도인들이 참다운 자유함의 세계로 들어가는 길인 것입니다.

영적 전쟁에 대한 이해를 위하여 이것을 세 가지 측면으로 살펴볼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능력 대결의 측면, 진리 대결의 측면, 사랑 대결의 측면입니다.
이 영적 전쟁에 대한 고찰은 개인적, 사역적인 구분이며 빛과 어둠의 세계의 전체적인 전쟁을 다루는 것은 아닙니다.
체험 신앙이 없는 지적인 신자들은 귀신과의 싸움, 영적 전투 등에 대해서 거의 관심이 없거나 무지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알지 못하는 가운데 많은 피해를 당하고 있어도 그 원인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그들은 꿈에서 악몽에 시달리거나 가위눌리는 경험을 하거나 할 때 어렴풋이 악의 존재 를 느낄 뿐입니다.
그들은 귀신이나 마귀가 성경 속에서나 나오는 이야기이거나, 아니면 미신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영의 기능이 눈을 뜨게 되면 보이지 않고 영적인 세계가 우리의 삶과 운명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죽을 때까지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이 땅을 떠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영혼이 육체를 떠나기 직전, 5분전이나 10분전쯤에 갑자기 영안이 열려 어둠의 세계와 자기를 끌고 가려는 어둠의 존재들을 비로소 보게 되고 공포에 질리지만 평생동안 거의 영을 훈련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때는 이미 늦은 것입니다. 물론 주변인의 도움으로 인하여 부끄러운 구원을 얻을 수는 있을 것입니다.

영적 전쟁의 첫 번째 단계는 능력 대결입니다.
이것은 은사와 능력과 권능을 얻어 마귀를 물리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가는 곳마다 병든 자들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몹시 놀랐으며 제자들은 그들도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물리치게 되자 몹시 고무되었습니다. (눅10:17)
그러나 제자들이 이 영적 전투에서 항상 승리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악한 영이 어느 사람을 붙들고 있는 것이 분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주님께서 그 귀신을 쫓아내신 후, 제자들이 자신들의 실패한 이유를 묻자, 주님은 오직 기도를 통해서만 이러한 능력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9:29)
기도에는 능력이 따릅니다.
많은 기도에는 많은 능력이, 적은 기도에는 적은 능력이 따릅니다.
기도에 대해서 책을 쓰고 설교를 해도 실제로 기도를 하지 않으면 그에게는 능력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도에 대해서 별로 아는 것이 없어도 기도를 많이 하면 그에게는 주님의 권능이 묻어 나오게 됩니다.

어떤 집사님은 기도할 때 항상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만을 되풀이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시험이 들어서 그분이 기도만 하면 도망을 갔는데 막상 그 집사님이 기도만 하면 병이 낫고 귀신이 떠나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단순한 기도도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능력대결이란 이와 같이 기도하고 권능을 얻어 마귀를 물리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가장 기초적인 단계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언젠가 어느 기도원에서 기도를 하던 중 그 곳에서 알게 된 남자 집사님에게 기도 요청을 받았습니다. 몸이 많이 아프고 이것이 귀신이 괴롭히는 것 같으니까 쫓아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잠시 주님의 보혈로 나를 보호해 주시기를 기도하고, 나를 통해서 주님의 빛이 임하게 해 달라고 기도한 후, 그 집사님께 조용히 나를 응시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나를 쳐다보던 그분의 눈이 흰자위만 남고 경련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악한 영이 사람의 속에 들어가서 사람을 보면 사람의 시각, 육의 시각이 아닌, 귀신의 시각, 영의 시각으로 보여지게 되므로, 주님께 속한 사람을 보면 상대가 사람으로 보이지 않고 예수님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주님의 빛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에 떨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그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누구냐? 네 이름이 뭐냐?
그는 풀이 죽어서 대답합니다.
나는 그저 떠돌이야. 나는 이름도 없어.
그는 그저 힘들고 피곤하니까 제발 여기서 살게 해 달라고 애원합니다.
나는 허락하지 않습니다.
안돼. 너 절 좋아하지? 거기 네 친구들이 많잖아, 거기로 가.
그는 그래도 하소연 합니다.
아니야. 거기도 터줏대감이 있어. 나 같은 떠돌이는 안 끼워줘.
그는 계속 머물게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조금 더 대화를 하다가 나는 주님의 이름으로 꾸짖습니다. 그는 경련과 함께 쓰러지고, 잠시 후에 집사님은 일어납니다.
휴 - 시원하다. 이제는 살 것 같군요.
나는 이와 같은 이야기들을 시시콜콜 계속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귀신 전문가가 아니며, 마귀를 가르치는 것보다는 주님을 가르치는 것이 더 좋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싸움은 정말 피곤한 일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중요한 임무 중의 하나가 이와 같은 악한 세력을 쫓아내고 사람들을 자유케 하시는 것이었으며, 이러한 영적인 세계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균형 잡힌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악한 영들과 대화를 하는 것은 결코 권장하고 싶은 일이 아니지만, 사역자들은 그러한 경험들을 하나님의 말씀과 비추어보아서 분별의 지혜를 얻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신학생 시절, 나에게 좋은 경험이 되었던, 비슷한 일화가 있었습니다.
한국의 대표적인 교회라 할 수 있는 Y교회에 다니던 집사님의 딸이 악한 영에 사로 잡혀서 정신이 이상해 졌습니다. 우연히 기도원에서 만난 그 여집사님은 나의 도움을 간절하게 요청하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정신병이 다 귀신에 의한 것은 아닙니다. 단순히 뇌기능, 신경의 장애도 있고 정서적인 상처나 충격도 있으며 또 대부분 이런 원인 위에 악한 영이 복합적으로 역사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도우려면 의학적 지식, 심리학적 지식, 영적 지식과 경험이 다 요구되는 것입니다.
또한 모든 병이 다 귀신이라고 주장하시는 분들도 있으나 그것은 성경의 지원을 받는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귀신으로 인한 질병도 분명히 있습니다.
물론 일반적인 질병과 마귀로 인한 질병은 그 증상 면에서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일반 적인 정신병과 마귀로 인한 정신병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 책의 주제는 아니 므로 넘어가기로 합니다.
나는 여러 번 그 집에 가서 20대 중반인 그녀와 대화도 하고 기도도 해주곤 했었는데, 그녀를 도울 수가 없었습니다. 아마 경험, 분별력, 기도와 영력, 모든 것이 부족해서 효과적인 도움을 줄 수 없었던 것 같았습니다.
사실 많은 목사님들과 사역자들이 그 곳에 왔다 갔지만 근본적인 치유는 되지 않았습니다.
이제 와서 생각하면 그녀의 문제는 기도뿐만이 아니라 정신의학적인 도움이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녀와의 만남은 내게 여러 가지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내가 집에서 TV를 보고 잡담하고 시간을 낭비하고 대충 살다가 그녀의 집으로 가면 그녀는 내게 전혀 위협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내게 다가와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하고 때로는 비웃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여러 시간 장시간의 기도, 특히 방언기도를 많이 하고 그녀의 집에 가면 그녀는 나를 보는 즉시 숨어버렸습니다. 때로는 벽에 붙어서 덜덜덜 떨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몹시 고통스러운 듯이 보였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그녀가 그녀를 위하여 누군가가 기도해주려 오면, 그 상대방이 도착하기도 전에 그 상대방의 영력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누가 온다는 얘기를 들으면 피식 웃기도 하고, 어떤 사람의 이름을 들으면 얼굴이 긴장되어 도망갈 궁리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예배를 한번 드리면 예배가 끝난 후에 쓰러져서 일어나지를 못했습니다.
별로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 와서 예배를 인도하면 예배 후 서너 시간은 쓰러져 누워 있다가 그 후에 일어나서 예배 인도자를 막 욕을 했습니다.
그 쓰러져 있는 시간은 그녀 속의 악한 영이 회복되기 위한 시간인 것 같았습니다.
어떤 다른 분이 와서 예배를 인도하면 하루종일 쓰러져 있기도 했고, 강력한 영감의 소유자가 인도하면 거의 일주일 가까이 혼수상태에 있었습니다. 아마, 그럴 때에, 그녀 속의 악한 기운이 힘을 잃었을 때, 치유와 사랑과 돌봄을 베풀었다면 그녀는 아마도 많이 회복되지 않았을까 생각이 듭니다.
또한 재미있었던 것은 그녀가 선호하는 교회와 싫어하는 교회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유명한, 알려진 교회, 지적인 교회 등에 데려가면 그녀는 별로 저항이 없이 교회에 따라가서 뒷좌석에 앉아 찬송가도 같이 따라 불렀습니다.
그러나 능력을 강조하는 교회, 예배에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이 나타나는 교회에는 그녀는 어떤 일이 있어도 가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그런 교회로 자신을 데려가려 하면 상대방을 물어뜯거나 심지어 옷을 발가벗는 등 격렬하게 저항했습니다. 그녀의 눈에는 극심한 공포가
나타나곤 했었습니다. 그녀 속에 있는 악한 영은 그런 곳에 가면 쫓겨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이와 같은 이야기는 내가 별로 즐기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두려움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는 '나는 기도를 안 하니, 참 능력이 없겠구나...' 열등감을 심어줄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나 내가 여기서 나누고 싶은 것은 그와 같은 능력 대결, 능력 받아 악한 세력을 쫓아내는 싸움은 초보의 시작단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능력 받아 마귀를 쫓는 것이 그렇게 긍지를 느낄만한 것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와 같은 이야기는 이러한 영적인 세계, 영적인 전쟁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으로 충분하며 진정한 영적 전쟁의 승리는 능력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제 나누겠지만, 이러한 능력 대결은 진리의 대결, 사랑의 대결로 발전해 가야 합니다.
능력으로 악한 세력을 쫒아내는 것은 일시적으로 회복된 것 같이 보이지만, 결코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더 나빠지기도 합니다.
결국 사람들이 망가지고 병들고 악한 세력에 시달리는 것은 진리에 대한 이해와 체험이 부족하며, 사랑을 받지 못했고 또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의 영혼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채워지지 않으면 그들은 어둠의 영역을 이겨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랑만이 모든 것을 치유하고 온전케 하는 힘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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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영적 전쟁의 3가지 측면 - 2) 진리대결

능력 대결이란 잘 알려진 개념입니다. 10여 년 전만 해도 이러한 부류의 책들을 찾기 어려웠으나 지금은 많이 볼 수 있고 또 기도원 같은 곳에 가보면 그런 비슷한 이야기들을 하시는 분들을 많이 만나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 대결이란 개념은 비교적 알려지지 않은 개념입니다.

제 기억으로는 아마 닐 앤더슨 목사님이 처음으로 사용했고, 가르치는 개념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책은 죠이 선교회의 [이제 자유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이제 알았습니다] 등의 책을 보면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진리 대결이란, 마귀와의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길은 기도를 많이 해서 능력을 받아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기록된 진리를 얼마나 이해하고 있느냐에 승패가 달려 있다고 보는 관점입니다.
즉 주님께서 약속한 우리의 자녀됨의 권세, 위치를 바로 깨닫게 될 때 우리는 흔들리지 않고 마귀로부터 자유와 승리를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학생 시절, 나는 어느 교회에 들어가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 교회는 도심에 있는 유서깊은 아름다운 교회였는데 항상 본당이 개방되어 있어서 나는 데이트를 할 때나 그곳을 지날 때는 그곳에 들러서 기도하고 가곤 했습니다.
한참 기도에 몰두하고 있는데 저만치 앞에서 기도하는 젊은 남자의 기도하는 모습이 아주 묘했습니다. 뭔가 중얼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욕을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또 온 몸을 경련하듯이 좌우로 부자연스럽게 움직이기도 하고... 하여튼 정상은 아니었습니다. 호기심으로 가까이 가보니 그는 깨끗한 신사복에 얼굴도
미남형이었습니다. 그의 자세는 기도하는 자세인데, 뭔가 욕지거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공산당 녀석들! 나쁜 놈! 뭐 그런 식의 말들이었습니다.

그는 문득 내가 그를 지켜보고 있는 것을 느끼고, 정상적인 기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경배를 받기에 합당하시며... 그러나 그것은 일종의 홍보용 멘트같은, 들으라고 하는 기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경험과 분별력이 부족했던 나는 덥석 그에게 손을 얹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살아계신 주님! 이 청년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그리고는 그를 지배하고 있는 악한 영을 꾸짖기 시작했습니다.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이 악한 세력은 떠나가라!
나는 그 당시만 해도 악한 영들이 사람의 속에 들어오는 것은 뭔가 먹을 것이 있기 때문이며 이런 조건들을 처리해야 하는 것을 몰랐습니다. 쓰레기를 치우지 않으면 파리떼를 근본적으로 처리할 수 없는 것입니다.

물론 악한 영의 먹이는 분노, 억울함, 강한 증오, 용서하지 않음, 육적 욕망, 상처 등 다양합니다.
나는 그때에는 이러한 쓰레기들과 악한 세력과의 관련성을 몰랐기 때문에 치유나 상담 등을 하지 않고, 그저 능력 받아서 마귀를 쫓아내면 다 해결된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나의 기도가 시작되자 그 청년은 나를 비웃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더니 나를 쳐다보며 웃었습니다.
나를 보고 나가라고? 넌 아직 멀었어. 기도가 부족해. 내가 볼 때 넌 아직 약해. 그 순간 나는 기가 팍 죽었습니다.

'아, 맞아. 나는 아직 멀었어. 기도도 부족하고 능력도 부족하지.' 그런 생각이 떠오르자 나는 기도를 조금 더 하다가 도망치듯이 교회를 빠져 나오고 말았습니다.
과연 나는 능력이 부족해서 그렇게 도망칠 수 밖 에 없었을까요? 물론 그것도 사실일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문제는 다른 데에 있었습니다.
그 이후 악한 영들을 더러 쫓아내는 경험을 했을 때, 나는 악한 영들이 그렇게 상투적으로 거짓말을 하고 위협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순진하게도 거기에 속아버린 것입니다.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를 잘 알지 못하며 제대로 믿지 않으면, 이와 같은 귀신의 말을 믿게 되고, 자기의 주관적인 감정과 경험을 믿게 되며 거기에다 신앙의 기초를 두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때는 승리를 하는 것 같지만, 진리와 지식의 부족으로 인하여 자주 혼돈과 미혹에 빠질 수 밖 에 없습니다.

첫 번째 단계의 능력과 권능의 신앙은 초보적이고 자연적인 단계입니다. 이 때는 아직 사고의 수준이 육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무조건 외적으로 형통하고 복 받고 건강하고 문제가 없으면 좋은 줄 압니다.
생명의 성장을 위한 고난이 오면 그것이 영원한 보물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시험에 들기도 합니다. 보화를 주면 통곡하고 쓰레기를 주면 기뻐하는데 그 모든 것들이 아직 눈이 열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단계의 진리적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의 중심과 원리를 이해하고, 깨닫고, 체험하여 자기의 것으로 만드는 단계입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의 이론으로 알 뿐, 실제의 체험은 거의 드뭅니다.
그들의 지식은 그저 여러 번 듣고 지적으로 이해한, 세뇌된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모태신앙이다, 무슨 훈련을 받았다, 무슨 단계를 떼었다... 하는 분들이 극단적인 상황에 가면 하나님이 정말 계시는가... 등등의 기초에서 흔들리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사실 이 경우는 신앙이 실족했다기 보다는 원래의 신앙을 드러낸 것입니다. 주님께서 환란을 통하여 자신의 본체를 보여주신 것이므로 사실 그것은 복이 되는 것입니다.
진리의 체험은 이 기초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됨의 권세를 가진 것, 용서받은 것, 아버지께서 우리를 받아주신, 십자가의 도, 사탄의 패배, 우주와 세상과 하나님의 계획, 이런 것들이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우리의 뼈 속까지 스며들어 나의 실체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와 같이 주님의 말씀, 그 진리가 우리 안에 실체가 될 때 우리는 마귀를 이기게 되며 자기의 생각과 경험을 믿지 않게 됩니다.
이것이 진리로서 영적 대결에서 승리하는 길인 것입니다.
오늘날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이면서 실제적인 진리를 경험하지 못하고 있는 분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들의 생각은 세상으로 가득 채워져 있고 육신의 정욕과 세상 근심으로 가득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어둠의 왕국 속에서 살며 어둠의 세력들에게 짓밟혀 사는 것이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닌 것입니다.

진리의 빛이 분명해 질수록 우리는 변화됩니다. 그리고 자유롭게 됩니다. 그리고 보게 됩니다. 예전에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게 됩니다.
하나님의 계획, 자신의 사명, 가는 일, 의미... 모든 것들이 말씀의 빛을 통해서 하나씩 드러나게 됩니다.
이단에 빠지는 사람들은 이와 같은 말씀의 빛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거짓의 영들에게 속는 것입니다.
마귀와의 능력 대결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그러나 더 깊은 진리를 깨달아 진리의 대결에서 승리할 때 우리는 좀 더 아름다운 삶을 누릴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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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영적 전쟁의 3가지 측면 - 3)사랑 대결

이 책의 주제와 약간 다르게 영적인 이야기를 많이 다루게 되었지만, - 좀 더 자세한 영성의 원리들에 대해서는 다른 책들에서 다룰 것이지만 - 여기서 이런 부분을 언급하는 이유는 본서의 주제인 따뜻함, 사랑의 힘, 능력이 마귀를 가장 치명적으로 패배시키며 우리가 최종적으로 승리할 수 있는 가장 근원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나누기 위한 것입니다.
영적 전쟁의 첫 번째 측면은 능력과 기름부음을 많이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육체적인, 자연적인 영역의 차원입니다. 이 단계에서는 능력은 받으나 아직 육의 욕망, 정욕, 혈기 등이 처리되지 않아 마귀를 많이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유명한 사역자, 심지어 기적을 일으키는 사역자들도 쉽게 정욕과 명예욕에 굴복되어 실족하곤 합니다. 이것은 타락이라기 보다는 본인의 상태가 감추어진 것이 드러난 것 뿐 입니다.
영적 진리의 두 번째 측면은 느낌과 감각단계를 넘어선 진리의 빛의 체험입니다.
이 단계에 오면 자기의 생각과 감정을, 경험과 환경을 신뢰하지 않으며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말하는 것에만 주의를 기울입니다.

영적 전쟁의 세 번째 측면은 인격의 단계입니다.
이는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을 말하며 고난과 깨어짐, 훈련을 통하여 타고난 자기 사랑이 죽고 그리스도의 생명과 사랑이 자기의 삶 속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주님의 손이 다루심을 경험해 갈수록 그 사람에게는 주님의 따뜻함, 긍휼, 자비가 나타납니다. 이것이 진정 그리스도의 열매이며 생명에 속한 것입니다.

초보자들은 그저 담대하고, 강하면서 힘차게 예수 이름을 외치기만 하면 모든 마귀들이 벌벌 떠는 줄 압니다. 그러나 마귀는 나의 처리되지 않은 성품 속에 있습니다. 고집, 교만, 교활함, 위선... 이 모든 악들 속에 마귀는 숨어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악들을 미워하고 진정 주님의 마음을 갖기를 사모하지 않으면 온전한 승리를 할 수가 없습니다.
마귀를 온전히 이기려면 온유와 겸손과 사랑을 가져야 합니다. 자기 욕심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왜 에덴에서 하와는 유혹에 넘어졌을까요?
그것은 마귀의 제안이 하나님의 명령보다 자기에게 훨씬 유리했기 때문입니다.
불순종하면 죽는다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내가 하나님이 될 수 있다는 마귀의 말이 훨씬 더 달콤하게 들립니다.
회개하라는, 순종하라는 주님의 말씀보다 '너는 진정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다' 라고 속삭이는 마귀의 말이 훨씬 더 매혹적입니다.

'이런 것을 깨닫는 자는 너밖에 없다' 라고 마귀가 거짓된 생각을 넣어줄 때, 환란과 고통의 훈련을 통해 겸손을 배우고 자기 포기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이것을 이겨낼 수 없습니다.
이러므로 많은 사람들은 주님께 순종하고 연합되는 것을 추구하기보다는 성공, 성공, 남들이 알아주는 성공을 향해서 달려가는 것입니다. 그 영원한 결과를 알지도 못하면서 말입니다.

온유하지 않은 사람은 마귀를 이기지 못합니다. 약점을 지적 받을 때 불쾌해 하는 사람은 사실 이미 자신과 마귀의 종인 것입니다.
겉으로는 겸손하게 '충고 감사합니다. 잘 들었습니다.' 하지만 속으로는 '앞으로 너같은 것 상대하나봐라' 라고 하는 이들은 자신의 영혼을 어둠의 세계로 던지는 것입니다.
이 시대의 영성이 너무나도 떨어져 있기 때문에 어쩌면 이러한 말들이 비현실적으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성이 발전하지 못하면 진정 주님께서 가르치시는 천국의 기쁨을 우리는 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의 손에 훈련되어 질수록 주님의 마음이 임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마음은 사랑입니다. 긍휼이고, 자비입니다.
능력의 차원에 있는 사람의 관심은 누가 세고 약한 가에 있습니다. 진리의 차원에 있는 사람의 관심은 뭐가 옳고 그르냐 입니다. 그는 옳지 않은 것을 보거나 불합리한 일을 겪으면 견디지 못합니다. 경우 없는 사람을 참아내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그런 사람을 자신에게 보내시는지 아직 눈이 열리지 않아서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차원에 있는 사람은 모든 상황, 모든 사람을 긍휼과 포용의 시선으로 봅니다.
그는 강도를 보아도 불쌍하고 간음자를 보아도 불쌍합니다. 창기를 보아도 그는 아름답게 보아줍니다. 그것은 주님의 마음으로 그녀들을 보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세리와 창기를 옳으냐 그르냐의 차원에서 보았기 때문에 돌로 치고 싶어했습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마음속에서 남들을 돌로 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오직 사랑으로, 긍휼로 모든 사람들을 보셨습니다. 심지어 자기를 못박은 자들도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셨습니다.

사랑이 있는 만큼, 우리는 세상을 이기며 마귀를 이기며 온전해 집니다.
사랑은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사랑이 있는 자는 거지도, 불구자도, 거리의 방랑자들도 황홀한 아름다움으로 보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육의 눈에 비친 화려한 색깔, 미인대회나 탤런트들 같은 외적 아름다움밖에 보지 못하지만, 영의 눈이 열리고 주님의 눈이 열리면 방랑아들도, 희대의 살인자도... 그저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보입니다.
마귀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미움과 분노를 줍니다. 교만을 주고 높아지라고 부추깁니다.
강퍅함을 주며 지지 말라고 부추깁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온유와 겸손과 사랑을 주십니다.

우리는 마귀와 세상과 싸웁니다.
어떤 사람이 우리를 미워할 때, 우리의 무기는 사랑입니다.
우리의 사랑이 그들의 마음보다 약하면 우리는 지게 되고 서로 미워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사랑이 그들의 미움보다 강하면 우리는 이기게 되고 그들속에 있는 미움의 영은 떠나가며 우리는 서로 사랑하게 됩니다.

기독교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따뜻함입니다.
사랑은 아름다움입니다.
가까이 있는 사람들, 진정 우리에게 주님께서 보내신 소중한 사람들...
그들에게 부터 먼저 사랑을 훈련해야 합니다.
사랑만이 온 세상을, 모든 사람을 치유하며 온전케 합니다.
그러므로 따뜻한 그리스도인들은 진정 주님의 사람이며 주님께서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시기 위하여 사용하시는 귀중한 그릇인 것입니다. Ⓒ정원 목사


들꽃편지574호에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