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마지막 순간

점심 먹고 낮잠 자다가 꿈을 꾼다. 고대 이집트 쐐기문자처럼 생긴 낯선 문자로 된 글인데 이런 내용이다. “그것이 세상에서 내가 먹은 마지막 음식이었을 때 그것은 내가 세상에서 맛 본 최고의 음식이었다.”
요즘 옮기고 있는 <천사들과 말하다>에서 릴리의 천사가 말한다. “지금이 너의 마지막 순간이 아니라는 것을 무엇으로 확신하는가?” 그렇다. 나는 언제 어디서나 마지막 순간이다. 그러므로 지금 겪고 있는 이 일이 내 생애 최고의 경험이다.


2.불경죄

프랑스 어느 도시 귀족이 죽으면서 전 재산을 하나님께 바친다며 교회에 기증했는데 그것이 최후 심판 자리에서 ‘불경죄’로 다스려졌다고 한다. 당연하다. 그가 그것을 다른 누구에게 줬다면 불경죄로 심판받지 않았을 거다.
후배가 묻는다. “어째서 자기 재산을 모두 하나님께 바친 것이 불경죄인가요?”
흥분하여 대꾸한다. “자, 네가 내 지갑에 있는 돈을 모두 꺼내어 내게 주면서 내 전 재산이니 받아달라고 하면 그게 나를 모욕한 것 아니냐?” 후배가 어리둥절하며 입술을 내민다. 말을 알아듣는 것 같지 않다.


3.지금 여기

사람이 일 분 전 과거와 일 분 뒤 미래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어떻게 실현 가능한지를 수학과 물리학과 철학이 총동원되어 밝혀낸다. 과거, 현재, 미래의 환각에서 깨어나 너에게 주어진 유일한 현실인 지금 여기를 살라는 게 그냥 해 보는 근사한 말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현실에서 가능하다는 사실이 너무나 분명하고 간결하게 학문적으로 입증되어 홍분을 억제할 수 없었다.
그런데 꿈에서는 그토록 이론異論의 여지 없 이 분명하게 알던 것이 깨고 나니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게 정말 가능한 일 아니라면 내일 걱정말고 오늘 하루 살라고 말씀하신 예수가 거짓을 가르친 셈이다.
그분을 거짓교사로 만들 수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나는 그런 일이 나에게 선물로 주어지기를(어차피 내 노력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걸 알았으니) 오늘도 믿음으로 기다릴 따름이다.


4.시선

화랑에 어른 키만큼 큰 그림이 걸려 있다. 반추상화 같은데 무엇을 그린 건지 잘 모르겠다. 화가라는 남자가 다가오더니, 이 그림은 이렇게 봐야 하는 거리며 그림 앞에서 오른쪽옆구리를 바닥에 대고 비스듬히 눕는다. 그제야 거기 눕도록 마련되어 있는 장치가 보인다.
그가 가르쳐 그렇게 준 데서 그림을 보니, 맑은 개울물이 돌과 풀숲 사이로 졸졸 대로 누 소리 내며 흐르고 있다. 아름답게 생동하는 그림이다. “와!” 감탄하다가 꿈에서 깨어난다.
깨어나면서 드는 생각, ‘왜 그림을 세로로 걸어 놓고서 옆으로 누워야 제대로 보이게 했을까? 그림을 가로로 걸어 놓으면 바로 서서 볼 수 있을 텐데’.
꼬리를 무는 생각, 화랑의 그림이야 보는 사람 위주로 걸 수 있지만, 그래야 하겠지만, 세상은 그럴 수 있는 게 아니잖은가? 광주 무등산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자네가 이리저리 자리를 옮겨 가면서 봐야지, 산을 돌려놓으며 볼 순 없잖은가? 허허허···
누가 누군지 뭐가 뭔지 어디가 어딘지 잘 모르겠거든 자네 자리를 좀 옮겨 보시게, 가끔은 바닥에 누워도 보고.


5.최고의 직업

남미의 어느 원주민이 자기가 배설한 똥으로 나를 대접해야 하는데 그걸 한 친구가 몰래 먹어 치워서 난감해 한다. 자기 똥을 향기로운 기름과 소금으로 버무려서 대접하는 것이 최상의 손님 접대라는데 그 풍습이 조금도 이상히 여겨지지 않고 오히려 같이 난감해하다가 꿈에서 깨어난다.
갓 태어난 새끼의 배설물을 먹어 치우는 어미 새를 자연 다큐에서 보았다. 깨끗하게 먹었으면 똥이 더러울 이유가 없다. ‘새들이 하는 걸 사람은 못하는구나’, 뭐 이런 생각이 들면서 웃음이 난다.
쓰레기 버릴 때마다 그것을 가져가는 이들이 참 고맙다. 오늘날 ‘환경미화원’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그들이야말로 봉급은 어떨지 모르나 영적으로 최선의 직업을 가진 복자(福者)들이다.


6.하나님의 일

새벽, 비몽사몽간에 한 말씀 듣는다.
“며칠 전 네가 소리샘한테 말했지? 너한테 일어나는 일은(그게 무엇이든) 네가 달라고 해서 한님이 주신 것 아니면 누가 너에게 주겠다는 걸 한님이 승낙하신 거라고, 그러니 안심하고 받아들이라고, 왜냐하면 어느 경우에도 그 일의 목적이 오직 하나, 어린 영혼인 너를 성숙시키는데 있기 때문이라고··· 말 잘했다. 이제 그 말을 네 몸으로, 네 삶으로 솔선하여라. 너부터 너 말에 책임을 져라. 그럴 때가 되었다. 평소에 네 입으로 한 말의 내용을 스스로 증명할 때가 되었단 말이다. 그러다가 가까운 이들의 오해를 살 수도 있고, 정신병자로 몰릴 수도 있고, 세상이 말하는 비명횡사를 당할 수도 있다. 괜찮겠느냐?”
저보다 더 단호하게 누가 대답한다. “예! 물론입니다.” 하지만 설마 네가 네 힘으로 그럴 수 있다고 말하는 건 아니겠지? 예! 물론이지요. 아멘, 아멘.


7.생명의 논리

주승동 목사가 저쪽에서 혼자 걸어오는데, 누가 그를 가리키며 속삭인다. "저 친구, 이번에 아주 기특한 일을 했어요. 십년 동안 착실히 모은 돈 1억을 가난한 시골 교회에 주었답니다." 아무 입에서 말이 나온다. "하늘이 도우셨군. 천만다행일세." 그가 묻는다. "무슨 말입니까?“
"아무튼 간에 십 년 동안 돈을 쌓아 두었다는 얘기 아닌가? 들어온 것이 무엇이든 그때그때 나가지 않고 쌓여있는 그게 바로 생명한테는 재앙이거든. 안 그런가? 하늘이 그 친구를 도우 셨어. 그걸 치우지 못하고 죽었더라면 벌거숭이 알몸으로 돌아가신 예수 앞에서 그 민망함이 어떻겠는가?"
제 입이 하는 말에 스스로 놀라 잠에서 깨어난다.


8.범아일여1

이른 새벽, 꿈자리에서 누가 누구에게 말한다.

나는 개나리 피어나는 봄이다.
나는 봄에 피어나는 개나리다.
나는 봄 개나리의 피어남이다.

나는 알밤 떨어지는 가을이다.
나는 가을에 떨어지는 알밤이다.
나는 가을 알밤의 떨어짐이다.

내가 모두다.
내가 그거다. 


9.범아일여2

늦은 오후, 고속버스에서 졸고 있는 누구에게또 누가 말한다.

나는 전쟁터에서 병사를 죽이는 병사다.
나는 전쟁터에서 병사에게 죽는 병사다.
나는 전쟁터 병사의 죽음이고 죽임이다.

내가 모두다.
내가 그거다.

나는 별명이 많다. 사랑, 진실, 하나, 흐름, 변화, 영, 에너지, 앓, 하느님, 한님···.


10.은사

웬 사람이 말한다. "하나님이 나에겐 성령의 은사를 주시지 않았습니다." 정색을 하고 그에게 말한다. "누구한테서 받을 만큼 다 받아 놓고 아무것도 받지 않았다고 하면 말이 되겠소?"
"안 되지요."
"당신 지금 하나님한테 그러고 있지 않소?"
"내가 무슨 은사를 받았단 말입니까?"
"당신이 지금 살아서 이렇게 말하는 것 자체가 공짜로 받은 선물인 줄 모르는 거요?"
그가 제 가슴을 가리키며 묻는다. "이게 은사인가요?"
"은사恩賜란 말 자체가 위에서 아래로 값없이 베푼다는 뜻이오. 당신 몸을 포함하여 당신한테 있는 것들 가운데 값없이 받지 않은 게 있소? 그러는 게 아니오. 사람이 은혜를 입었으면 고마워할 줄 알아야지. 아무 받은 게 없다고 불평하다니···.“
대화가 설교로 바뀌려는 순간 고맙게도 잠에서 깨어난다.


11.미투

거센 ‘미투’ 바람에 마음이 좀 흔들렸던 모양이다. 새벽 꿈에 한 말씀 듣는다. ”괜찮다. 대나무도 나무고 소나무도 나무고 여자도 사람이고 남자도 사람이다. 사람 아닌 남자 없고 나무 아닌 소나무 없고 사람 아닌 여자 없고 나무 아닌 대나무 없다. ‘인류’에 속하지 않은 ‘개인’이란 없는 물건이다. 눈을 높이 들어 멀리 널리 보아라. 태고로부터 진행되어 온 인류 진화 과정에서 마지막 차별의 장벽이 무너지느라고 저러는 거다. 괜찮다. 아무도 죽지 않는다. 아무도 다치지 않는다. 네 몸이 네가 아니라고 하지 않았느냐?"
말씀은 옳은 말씀이지만 실감되지 않는다. 아픈 건 아픈 거다. 지금은 아프고 슬플 때다. 울어야 할 때다. 이 물건은 사람이지만 저무는 시대의 벌판에서 황혼을 바라보는 무능한 늙은이다.


12.예수의 길

 7, 8 학년 마음공부 마치고 보리밥과 점심 하고 무지개의 ‘각별한 마음’에서 커피 한잔 마시고 돌아오니 잠이 쏟아진다. 낮잠에도 꿈은 찾아온다. 어느 항구도시 신부들이 피신을 하는데 이유인즉 교회에 앙심이 있는 폭력배가 탈옥하여 사제들부터 무차별 공격한다는 정보 때문이다.
그런데 김 신부만 도망하지 않고 사제관에 태연히 앉아 있다. 그에게 묻는다. “자네는 왜 몸을 숨기지 않는가?” 그가 답한다. “그럴 이유도 없지만 사람이 자존감이라는 게 있는데 어찌 한낱 깡패를 무서워한 말이오? 내 평생 어디서나 살아남을 궁리하지 않고 살았소. 그게 우리 스승 예수의 길 아니오?” 박수치며 큰 소리로 웃다가 잠에서 깨어난다.
통쾌한 꿈이다. 살고자 하는 자 죽고 죽는 자 산다는 말씀이 저 멀리 어디에서 후렴처럼 들려온다. ‘죽고자 하는’ 자가 아니라 ‘죽는’ 자다. 달리 말하면 사랑이 전부인 사람이다.


13.앎

복잡하고 아리송한 꿈의 말미에 문득 떠오르는 선명하고 간결한 한마디 말씀, “먼저 착각錯費이 있고 그 뒤에 정각正覺이 있다. 이것이 앎이다”
그렇다. 저 때문에 어미가 있는 줄 알다가 어미 때문에 제가 있는 것임을 아는 게 순서다. 제 소원을 아비가 들어주는 줄 알고 고마워하다가 아비의 뜻을 이루는데 제가 쓰이는 줄 알고 고마워하는 것이 신앙이다. “먼저 추락이 있고 그 뒤에 앎이 있다. 둘 다 은총이다”(노리치의 줄리안).
아쉬움이 있다면 많은 사람이 추락에서 추락으로 추락하다가 삶을 마감하고 만다는 사실이다.


14. 죽기 전에 죽기

꿈에 웬 사람을 길에서 만난다. 그가 말한다.
“나는 죽은 사람이다. 누구와 다투다가 그가 결투를 신청했고 내가 받아들였다. 결투장에서 신호와 함께 그는 총을 꺼내 들었고 나는 칼을 뽑았다. 물론 내 칼이 그의 몸을 찌르기 전에 그의 총알이 내 심장에 박혔다. 그런데 하나도 억울하거나 분하지 않다. 그는 결투라고 하면 으레 총으로 하는 것이라 생각했고 나는 칼로 하는 것이라 생각했고 이 점에서 둘 사이에 아무런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다만 돌이켜 생각하니 이왕에 죽을 것을 내가 살기 위해서 누구를 죽이려 했다는 사실이 민망할 따름이다. 그날 내가 칼을 뽑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걸. 하지만 이 무슨 쓸데없는 생각인가? 허허허···.‘ 호탕한 웃음소리에 잠이 깨었다.
사람이 죽으면 저렇게 마음이 넉넉해지는 걸까? 살아서는 그럴 수 없는 걸까? 죽기 전에 죽은 사람이면 그럴 수 있을 것이다. 무엇이든 자기의 죽음이라는 렌즈로 보면 평소와 다르게 보일 테니까. 명심하자. 너 오늘도 그분 앞에서 죽은 목숨이다.


15.누가 병을 앓는데 누가 처방을 한다.

아픈 사람 귀 씻은 물을 고운 베로 여과하여 그 물로 귀를 씻으면 감쪽같이 낫는데, 어디가 아프든지 아픈 부위를 씻는 게 아니라 귀를 씻어야 하고 남이 쓴 물을 여과시켜 쓰는데 비방秘方의 포인트 가 있으며, 그 물로 귀 씻은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효과가 크단다.
스승님 말씀에 눈이 밝으면 온몸이 성하다고 하셨지. 눈보다 귀라는 건가? 아니다. 눈 다음에 귀라는 얘기겠다. 공자도 지천명知天命 뒤에 이순耳順이라, 하늘길을 보고 나서 귀가 착해진다고 하셨다. 맑은 눈은 사람을 살리고 밝은 귀는 사람을 건 강하게 한다? 


16.이천식천以天食天

새벽꿈.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앉아 오른쪽사 람이 왼쪽 사람 가슴과 아랫배에 우산살처럼 생긴 황금 빨대를 여러 번 깊이 꽂으며 거기 있는 기운을 뽑아서 제 양식으로 삼는데, 빨대를 꽂는 쪽과 꽂히는 쪽의 표정이 진지하고 두렵고 미안하고 고맙고 아프고 흐뭇하고 무심하기가 별반 다르지 않다.
눈길 따라 아래로 내려가니 두 사람이 배꼽에서부터 한 몸인 샴쌍둥이다. 누가 우렁차게 말한다. “잘 보아라. 저게 사람이다. 저게 인류다. 저게 역사다.”


17.하늘의 말

잠자리에서 비몽사몽으로 들은 두 마디, “하늘에서는 반대말이 여기와 다르다. 예를 들어,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니라 움켜잡음이고 슬픔의 반대말은 기쁨이 아니라 무감 동이다” 아니다. 거기는 아예 반대말이라는 게 없다. 둘 가운데 어느 쪽이 맞을까? 둘 다 맞고 둘 다 틀려? 암튼, 사랑의 반대말을 미움으로 보는 건 여기서나 가능한 착각이다.


18.다르게 살기

이 세상 살다 간 영혼들이 다닌다는 허름한 시골 학교를 견학하다가 막판에 한 말씀 듣는다. “이제부터 네 공부는 표출表出이 아니라 수용受容이다.” 그동안 안에서 들리는 음성이 시키는 대로 세상을 살아보았으니 이제부터 세상에서 오는 온갖 것을 안으로 받아들여 명실공한 우주로 있어 보라는 건가? 아무튼 좋다. 더 생각하지 말자.
괜히 집어 든 비매품 책에서 읽는다. 교황 23세가 한 말이란다. “전체를 보라. 많은 것들에 눈을 감아라. 조금 바꿔라.”
세기의 명언이다. 아무리 큰 그릇도 담을 수 없고 아무리 작은 그릇에도 담길 수 있는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는 사람이면 마땅히 생의 좌우명으로 삼을 ‘말씀’이다. 어째서 이런 말씀을 이 제야 듣는 건가? 뭐, 괜찮다. 이제라도 들었으니 됐다. 앞으로 남은 세월만큼은 크게 보고 그리고 작게 살자. 버릇대로 살지 말고 다르게 살아 보자.


19.강물처럼 구름처럼

꿈에 소중한 무엇을 잃어버렸다. 한참 애타게 찾다가 꿈과 현실의 문턱에서 스스로 말한다. “이건 꿈이다. 그러니 잃어버린 물건도 잃어버린 자도 아예 없는 거다. 누가 있고 뭐가 있어야 잃어버리고 자시고 할 것 아닌가? 다만 있는 것은 소중한 물건을 잃었다는 생각과 그것이 만든 가상현실에서의 이런저런 경험뿐이다.”
실제로 깨어나니, 그토록 애타게 찾던 잃어버린 물건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겠다. 그럴 수밖에···없는 뭐를 어찌 알 것인가?


20.죄

새벽, 꿈결에 마른하늘 벼락같은 한마디 듣고서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난다. “죽도록 충성했어도, 네가 했으면, 그것이 죄罪다.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가까웠다.”
그렇다. 죄란 누구를 해치고 미워하고 도둑질하는 것이 아니다. 정의를 위해 싸우면서 아버지를 외면하는 것이 죄다. 자선을 베풀면서 어머니를 등지는 것이 죄다. 나라를 구하면서 백성을 죽이는 것이 죄다. 교회를 섬기면서 그리스도를 무시하는 것이 죄다. 무슨 일을 했든지, 그 일을 한게 ‘너’였으면, 그 무엇으로 죄를 지은 것이다. 네 몸을 내주어 불사르게 했더라도 거기에서 ‘사랑’이 배제되었으 면 큰 죄를 지은 거다. 진실로 죄는 악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무지에서 나오는 것이다.....이어서 떠오르는 노리치의 줄리안, “죄는 있을만 해서 있는 것이다.”


21.견해

무슨 고등학교에 강의하러 갔는데 학생은 없고 노동자로 보이는 몇 사람이 마당에 둘러앉아 잡담을 나누고 있다. 그들이 오늘의 수강생이란다. “좋아. 그렇다면 그런 거지” 하고 말을 꺼낸다.“사람의 말이란 하는 쪽과 듣는 쪽이 함께 해야만 루어지는 것이라, 오늘 당신들이 나를 좀 도와주어야겠소. 내가 물을 테니 정직하게 답해 주시오. (앞에 있는 한 사람을 가리키며) 당신 여기 왜 오셨소? 지금 여기에서 뭐 하고 있는 거요?” 그가 답한다. “모르겠소. 누가 가보라고 해서 왔소.” 묻는다. “그게 누구요?” 답한다. “모르는 사람이오.” 말한다. “당신,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참이오? 허수아비로 두 팔 벌리고 들판에 서 불어오는 바람이나 맞으며···.” 말하는 중에 괜히 화가 나며 말투조차 거칠어진다. 문득 꿈에서 깨어난다.
누가 속삭인다. “네가 왜 화를 내느냐? 저마다 자기 몫 착실히 감당하고 있다. 하나님 우습게 여기지 마라. 그분 하시는 일에는 빈틈이 없다. 하늘 그물이 성겨도 빠뜨리는 게 없다 했거늘, 너야말로 무얼 안다고 큰 소리냐?” 아아, 과연 유수식견唯須 息見이렸다. 다시 누가 웃으며 속삭인다. “ㅎㅎㅎ, 괜찮아, 괜찮아. 그 또한 네 몫이니!”...잠에서 확 깨어난다.


22.처음부터

꿈속에서 꿈을 꾼다. 길 가던 중 우박을 맞다가 강도를 당하는 꿈이다. 모든 걸 빼앗겼지만 아무 빼앗긴 게 없다는 걸 알고 있다. 이게 꿈인 줄 알기 때문이다. 제가 만든 하늘에서 쏟아지는 제가 만든 우박을 제가 만든 길에서 제가 맞다가 제가 만든 강도한테 제가 당하고 있다. 모두가 저다. 사물도 저고 사람도 저고 사건도 저고 날씨도 저고 모든 게 저다. 이 꿈 밖으로나아가면 다른 꿈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현실과 상상이 비빔밥으로 버물린 것 같다. 혹시 내가 천지를 지었다는 그 하나님인가? 맙소사, 그럴지도 모른다. 내가 세상을 만들고 내가 나를 만들어 그 안에서 온갖 일을 겪고 있는 것인가? 정말 나는 누군가? 꿈속에서 강도 만난 꿈을 꾸고 있는 이 물건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만, 생각 스톱! 별난 꿈 다 본다. 하나만 기억하자. 아무것도 잃어버리지 않는다. 잃어버리지 않는 게 아니라 잃어버릴 수 없다. 처음부터 가진 게 없어서다.


23.어떻게 믿는가?

왠 수녀가 소설을 썼는데 첫 줄이 이렇게 시작된다. “하느님이 사람으로 되신 데 대한 믿음이 인간관계에 미치는 영향을 논라하.” 소설 내용은 생각나지 않고 첫 문장을 두고 누구와 이야기를 나눈 기억이 난다. 얘기가 산만했지만 결론은 간단했다. “무엇을 믿느냐보다 어떻게 믿느냐가 치명적으로 중요하다. 사람이 무엇을 믿든지 그것을 절대시하면 남에게도 자기 믿음에 동의하기를 강제하기 쉽고, 둘 사이에 어떤 명분으로든 강제가 작용하면 인간관계 자체가 병들거나 무너지기 때문이다.” 사람들과 말하다가 ‘하느님’이란 단어가 나오면, 명심하자, 어떤 말로도 단언하지 말고 대충 얼버무릴 것!


24선택

누구에게 묻는다. “삼거리 길인데 어디로 가야 하오?” 그가 답한다.
“곧장 가지 말고 돌아가시오. 곧장 가면 넓은 길, 돌 아가면 좁은 길, 우회?廻가 직진直進이오.” 깨어나면서 답에 답한다. “고맙소이다.” 그가 말한다. “선택은 여전히 그대 몫이오.”


25.성경

어디에서 아침에 일어나 사람들과 함께 성경을 읽으려고 하는데 웬 여인이 다가와서는 진지한 얼굴로 말한다. “그렇잖아도 생각이 많아 복잡한데 성경까지 읽어서 더 복잡하게 만들어야 하겠는가?”
답한다. “물론 그렇다면 당신은 읽지 않아도 좋다. 하지만 사람 머리에 쓸데없는 생각들이 너무 많아서 그래서 성경을 읽자는 거다.”


26.죽음

꿈은 복잡했지만 메시지는 간단했다. 누가 죽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가 그에게는 죽지 않았고 그를 아는 사람들에게만 죽었다. 그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죽지 않았다. 그들에겐 그가 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죽음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본인에게는 처음부터 있을 수 없고 다른 사람들, 그것도 그를 알던 몇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죽음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살았느냐, 죽었느냐를 결정짓는 것은 그가 아니라 그에 대한 누군가의 앎이다.


27. 여기와 거기

목포 여성숙 선생이 어느 모임에 가셨다가 그곳을 선전하는 리플릿 표지에서 “여기로 오라. 천국 아랫목을 차지하라.”는 문장을 굵은 펜으로 몇 자 지우고, “거기 있어라. 여긴 아니다. 천국은 아랫목이 없다.”로 고친 것을 본다. 통쾌하여 잘하셨다고 말하는데 정작 본인은 어디에 있는지 안 보인다. 동일한 장소인 듯 이번엔 아무가 강론을 한다. 사람들이 뜨악한 얼굴로 흘낏거리며 처음부터 들을 마음이 별로 없다. 아무가 말을 계속한다. “나는 예수의 사도로 이곳에 왔소. 그러므로 여기서 하는 이 사람 말은 이 사람 말이 아니라 예수의 말씀이오.” 그러자 몇몇이 불쾌한 표정으로 아예 등을 돌린다. 아무가 큰 소리로 말하면서 꿈에서 불쑥 깨어난다. “우리 스승님이 그러셨소. 너희가 어디 가서 내 말을 전할 때 사람들이 들으려 하지 않거든 발에서 먼지 털고 돌아서라고!” 


28. 전체와 부분

물속에 잠긴 용을 본다. 용이 아니라 용의 자태를 한 커다란 바위다. 그것을 꺼내는 과정에서 바위가 여러 조각으로 부서졌다. 부서진 조각들은 아무리 보아도 용과 상관없는 그냥 돌덩이다. 그것들을 꺼내어 지상에서 용의 형상으로 다시 조립하는데 잘되지 않는다. 누가 말한다.  “물에 사는 용을 뭍으로 꺼냈으니 세상없어도 용일 수 없지.” 다시 누가 말한다. “하늘에 사는 나를 뭍으로 내렸으니 세상없어도 내가 아니지.” 이 말에, ‘그럼 나는 몇 조각으로 깨어진 나인가...’ 생각하다가 꿈에서 깨어난다. ...안다. 나는 나의 한 조각이다.


29. 너

‘무엇을 추방할 것인가?’ 이런 제목의 글을 꿈에서 읽는다. 네 안의 사령부를 외국 군대가 점령하도록 놔두지 마라. 너를 통솔할 사령부는 물론 네 안에 있고 사령관은 바로 너다. 누가 시키는 대로 움직인다면 그건 너로 사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네 맘대로 사는 것 또한 진정한 너로 사는 건 아니다. 많은 사람이 행복하기를 바라면서 불행하게 사는 까닭이 모두 제 맘대로 살려고 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변덕스러워 믿지 못할 것이 네 마음이다. 안 그러냐? 진정한 사령관이 네 안에 잠들어 있다. 그를 깨워라. 아니 그는 잠들 수 없는 존재다. 네가 그의 현존에 깨어나는 것이 그를 깨우는 것이다. 그가 깨어나면 그동안 너를 점령하여 괴롭히던 가짜 사령관은 일삼아 추방하지 않아도 저절로 쫓겨난다. 그리되면 너의 남은 인생이 건강하고 행복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너의 참 ‘너’가 바로 그다.


30. 죽지 않는 물건

물방개처럼 생겼는데 물방개는 아니다. 물에 뜨기도 하고 물속에 가라앉기도 하고 뭍으로 나와 바위를 기어오르기도 하면서 흐르는 개울 따라 아래로 내려가고 있다. 몸이 단단하지 않아서 쉽게 부서진다. 지나가던 오소리 발에 밟혀 부서지고 큰 바위에서 떨어져 부서진다. 하지만 그래도 죽진 않는다. 부서진 몸 조각들이 금방 다시 연결되어 언제 무슨 있었더냐 싶게 원형을 되찾기 때문이다. 마치 군대의 ‘헤쳐모여!’ 같다.
이유를 알고 보니 물방개처럼 생긴 생명체가 처음 길을 떠날 때 하느님으로부터 “바다에 이르기 전 중간에서 죽든지 아니면 바다에 이르기까지 안 죽고 그 뒤에도 계속 지금처럼 살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하라.”는 말을 들었는데 그가 안 죽는 쪽을 택했던 것이다. 몇 번이나 산산조각으로 몸이 부서졌지만 그 물건은 죽지 않는다. 아니, 죽을 수 없다. 그런데 그게 참 사정이 딱하게 됐다. 늘 같은 물에서 같은 일을 겪는 것이 지겨울 만큼 따분한데, 그 따분함과 무의미가 견딜 수 없을 만큼 역겨운데, 도무지 어떻게 벗어날 길이 없다. 누가 천둥처럼 으르렁거리는 소리 들으며 꿈에서 깨어난다. “죽음이 축복인 줄 알아라. 이 미련한 것들아!”


31.쉬운 길

강자가 약자를 이길 수는 있지만 질 수는 없다. 그래도 약자에게 져 줄 수는 있다. 져 주는건 강자만 할 수 있는 일이다. 약자는 질 수 있지만 져 줄 수는 없다. 아니 약자도 져 줄 수 있다. 지되 기꺼이 지면 져 주는 거니까. 그런즉, 서로 살기를 가능케 하는 것은 약자가 아니라 강자다. 열쇠는 약자가 아니라 강자한테 있다. 그래서 노자가 ‘대국자하류(大國者下流)’를 말했다. 옳다. 서로 이기려 하면 서로 지고, 서로 져 주면 서로 이기는 거다. 예수 말씀이 이것 아닌가?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고 죽으면 산다. 아, 이렇게 쉬운 것을! 세상이 서로 이기려 하면 지옥이고 서로 져주면 천당인데, 게다가 전자는 어려운 일이고 후자는 참 쉬운 일인데, 사람들이 쉬운 길 버리고 굳이 어려운 길을 택하여 스스로 만든 지옥에서 생고생들을 하는구나. 서로가 서로에게 골짜기로 되어 주면 모두가 봉우리인 세상인데···. 


32.내란

어느 음식점이다. 전라도 바닷가 외딴곳에 ‘나미야’라는 작은 횟집이 있는데 재료가 신선하고 주인이 친절해 멀리서 손님들이 모여든다. 도시에서 온 사람이 그 앞에 비슷한 식당을 ‘나비야’라는 이름으로 차렸는데, 새 건물에 가려 옛 건물 이 잘 보이지 않는지라 ‘나미야’ 손님이 ‘나비야’로 가는 경우가 자주 있어 ‘나미야’ 주인이 ‘나비야’ 주인에게 “이 집 문 앞에 팻말을 하나 세워 이 집은 ‘나미야’가 아니니 ‘나미야’ 손님은 몇 걸음 더 가서 오른쪽으로 오시라고 알리겠다.” 하고 ‘나비야’ 주인은 “그럴 수 없다” 해서 시비가 붙었다. 결국 소송으로 들어가 재판중인데 나비야 주인이 나미야 주인에게 고춧가루 물로 세례를 주어 눈이 멀게 생겼다. 어수선한 가운데 뭐가 잔뜩 시끄럽고 그러다가 이런 꿈은 더 꾸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슬그머니 잠에 서 깨어난다.
뒷맛이 참 별로다. 이번 경우도 그렇다. 나미야 인이 나비야 주인에게 신장개업 축하하는 꽃다발을 보내고, 나비야 주인은 나미야 주인에게 이름이 비슷해서 손님들이 두 집을 혼동하는 모양이니 나미야 손님은 뒷집으로 가시라는 팻말 을 우리 집 문 앞에 세우겠다고 했더라면 결과가 어찌 되었을까? 긴 말 필요 없다. 사람들이 낙원에 못 들어가는 게 아니다. 안 들어가는 거다.


33.하나님

달리는 열차(?)에서 이런 노래를 들었는지 읽었는지 모르겠다. 아니, 단조로운 멜로디가 아직 머리에 남아 있는 걸 보면 들었나 보다
 세상을 만드신 건 돈이 아니고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신 거고
 사람을 살리는 건 돈이 아니고
 하나님이 사람을 살리는 거고
노랫말도 단순하지만 멜로디도 단순하다. 그러면서 오늘 이 세태를 한마디로 간추린 느낌이다. 멜로디를 오선지에 옮겨 볼까 하다가 누구든지 노랫말을 보면 스스로 멜로디가 떠오를 것 같아서 그만둔다.


34.날씨가 개면

정향丁香이 어디론가 여행을 떠났는데 돌아오기로 한 날 돌아오지 않고 연락도 되지 않는다. 이리저리 서성거리며 기다려도 종무소식이다. 집에 전화기가 없으니 저쪽에서도 연락할 길이 없겠다는 건 알지만,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 궁금하여 괜히 컴컴한 숲길 같은 데를 헤매다가 웬 태국 남자아이를 만난다.
20만 원만 주면 자기가 여자로 돼서 “손님을 즐겁게” 해 드리겠단다. “내가 미쳤냐?” 그러고는 먼 타국까지 와서 먹고살겠다고 애쓰는 게 딱하니 이거 받으라고, 5천원권 한 장 건네주고 나오는데, 갑자기 외할머니가 집에 계시고 어머니도 있고 웬 아이들도 올망졸망 있다. “어떻게 된 거예요?” 하고 물으니 어머니가 대답하신다. “장마 때문이다. 그래서 연락할 수 없었어.” “그 사람 집에 왔어요?” “그래, 저기 있다.”
고개 돌려 보니 처녀 시절의 정향이 검은 스웨터 차림으로 고개 숙인 채 저만큼 서서 흐느낀다. 우선 반갑고 이제 안심이라는 표시다. “됐어, 돌아왔으니 됐다고. 울긴···.” 그러고 바라 보다가 급히 꿈에서 깨어난다.
그렇다. 세상에 ‘죽은 사람’이란 없는 거다. 단지 장마 때문에, 서로 간의 연락을 가로막는 날씨 때문에 통하지 못하는 것뿐이다. 날씨만 개면 언제든지 서로 만날 수 있다. 소크라테스가 죽으면서 울고 있는 자녀들에게 남겼다는 말이 생각난다. “울지 마라. 지난번 내가 크레타섬으로 여행 떠날 때와 하나도 다를 것 없다.”


35.'사람'이 끝나는 날

사람이 탈 수 있는 건 거의 다 타 본 것 같다. 말, 낙타, 자전거, 열차, 버스, 유람선, 비행기까지. 목적이 있다면 (나중에야 생각난 거지만) 세상 구경이다. 아니, 세상 구경이라기보다 사람 구경이다. 하룻밤 사이에 볼 수 있는 사람은 다 본 것 같다. 아니, 보지 못한 사람이 없는 것 같다.
아기한테 젖 먹이는 여인, 삿갓 쓰고 지팡이 짚고 다리 난간에 기대어 서 있는 노인, 콩밭에서 괭이질하는 농부, 사슴 떼처럼 벌판을 달려가는 병사들, 피리 부는 애꾸 소녀, 어선에서 도시락 먹으며 웃는 어부들, 염전에서 담배 피우는 사람, 자동차 세워 놓고 오줌 누는 남자, 닭똥 같은 눈물 흘리고 있는 계집아이, 투우장에 서 황소 등에 칼 꽂는 투우사, 썩은 이 뽑고 활짝 웃는 노파, 시장에서 멱살 잡고 싸우는 남자들과 그들을 말리면서 구경하는 사람들, 배가 왕산만큼 부른 임산부, 흑판에 백묵으로 아라비아 문자를 그리고 있는 여선생, 승용차 운전하면서 노래하는 젊은 이, 뭐에 삐져서 볼이 잔뜩 부어오른 아이, 고양이하고 뽀뽀하는 아가씨, 혼자서 마라톤 뛰는 중년 여인, 벌거숭이 몸으로 격렬하게 사랑하는 두 남녀, 바위틈으로 거미처럼 기어오르는 붉은 모자의 산악인, 부둣가에서 하염없이 수평선 바라보며 울고 있는 수녀··· 이 밖에도 무수한 사람들을 보았는데 기억이 여기 까지다.


36.경전

어디론가 새로 이사를 했는데 막상 들어가서 보니 전에 살던 집을 새로 개조한 집이라 말하자면 오랜만에 제집으로 돌아온 셈이다. 일봉一棒이 지나다가 들렀다며 반가이 인사한다. 그러면서 자기 친구들이 이 동네를 휘어잡고 있는데 그 친구들과 자신에게 경전을 읽어 달란다. 온갖 밑바닥 일로 잔뼈가 굶은 친구들이지만 심성은 곱고 착하니 경전을 충분히 소화할 거라면서··· 반갑게, 그러자고, 그러려고 온 세상인데 망설일 뭐냐고, 진짜 밑바닥 친구들한테 좀 배워야겠다고, 신나게 말하다가 깨어난다. 기분 좋은 꿈이다.


37.길

새벽에 일어났다가 다시 자리에 누웠더니 또 짧은 꿈이다. 다일교회 최일도 목사가 근처에 있는데 보러 오겠다는 연락이다. 방금 독일에서 돌아오는 길이란다. 기다리는데 오지 않는다. 사정을 알아보니 길을 찾지 못해서 못 오는 게 아니라 길이 중간에 사라졌단다. 독일처럼 먼 데서도 길이 있으면 올 수 있지만 옆 마을에서도 길이 없으면 올 수 없는 거다. 그럼 다시 만나게 될 때까지 서로 잘 있자는 말을 전한다.
어떻게 전했는지는 알 수 없다. 어디론지 가면서 길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누군가에게 말하다가 깨어난다. 꿈에서는 길이 사라질 수 있지만 현실에서는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다. 길 없는 곳이 없는 게 세상이다. 세상 곧 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순간이라도 떠날 수 있으면 그건 길이 아니라고 하였다. "내가 길"이라고 말씀하신 분이 곁에 계시고 안에 계시니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38.살아있는 사람

산돌교회 영동목사가 말한다.
“형님, 아무개가(누구더라? 꿈에선 물론 잘 알았지만 깨고나니 역시 모르겠다.) 죽었어요. 온 몸에 가시가 박혀서 죽었습니다.”
“그래 어쩌다가 그런 변을 당했다던가?”
“당한 게 아니라 스스로 떠난 거요. 내가 갔을 땐 벌써 숨이 끊어진 한참 뒤였소.”
“그래? 그러면 무슨 유서같은 거라도?”
“내가 왜 이랬냐고 물으니, 나 같은 것 세상에 없으면 좋겠다고, 아버지가 저러시니 난들 별 수 있냐고 그러더군요.”
“그래? 그렇다면야 진짜 별수없는 일이지. 그래 장례는 잘 치렀는가?”
“뭐 그럭저럭...” 여기 까지다.
깨고나니 생각난다. 죽은 송장이 말했다고? 하긴 꿈인데 무슨 안될 일이 있으랴? 송장도 할 말이 있으면 하는 거다.
가만, 죽은 사람이 말하는 건 오히려 당연한 일 아닌가? 노자도 공자도 예수도 석가도 모두 세상에서 죽은 사람들 아닌가? 맞다. 살아서보다 죽어서 말하는 그 사람이 진짜 산 사람이다. 살아서 떠드는 거야 누군들 못하랴?


39.꿈

꿈이 한동안 어수선하게 이어지다가 마침내 이런 문장 하나 읽으면서 깨어난다. "세상 많은 사람들이 그것으로 살지 않고 그것에 붙잡혀 살아간다. 그것을 뒤에 두지 않고 그것을 앞세워 걸어간다. 그것이 무엇이냐?" 뭐긴 뭐야? 이 바쁜 세상에 저마다 열심히 찾아 헤매는 그놈의 일, 일, 일이지.
일자리 창출! 이것이 최대의 화두요 과제인 세상에서, 일이 무슨 상전처럼 떠받들리는 세상에서, 누가 그것을 종으로 부리며 살 것인가? 세상에 사람이 사람으로 태어나 하필이면 일하려고 살다니? 괜히 속으로 역정을 내다가 슬그머니, 아니지, 그게 아니지. 일은 허울 좋은 이름이고 그 속에 숨어 있는 건 돈, 돈, 돈이지. 맘몬이지··· 우습다.
자리에서 일어나 흐트러진 이부자리를 차분히 갠다. 시계로는 새벽 4시 반. 오늘 옮긴 「스토아철학」의 라이언 홀리데이도 말한다. "수 세기를 거치면서 사람들은 재물이 온갖 불행과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렇지 않다면 왜 저토록 수고스럽게 일하겠는가? 하지만 그렇게 해서 실제로 갈망하던 돈과 지위를 얻으면 그것이 기대했던 것과 너무나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결국 그 허망盧妄을 배우려고, 사람들이 저렇게 돈, 돈, 돈 하면서 살아가는 것인가?


40.인생

효선이 묻는다. “샌드위치 먹을래요?” "샌드위치? 그거 좋지. 무슨 샌드위치?" 되묻다가 꿈에서 깨어난다. 아, 인생이란 결국 한 조각 샌드위치인가? 빵 두 쪽은 기본이고 그 사이에 무엇이 담기느냐에 따라서 값이 달라지는 샌드위치.
육신과 정신은 기본이고 그사이에 무엇이 담기느냐에 따라서 질이 달라지는 인생. 그런데 둘 사이에 무엇이 어떻게 담기느냐를 빵 두쪽이 결정하는 건 아니잖은가? 그렇다면 인생의 질을 결정하는 건 누구인가? 한 인간의 육신과 정신 사이에 무엇이 담기느냐를 결정하는 건 누구인가? '나'라는 물건은 대체 어디있는 건가? 됐다. 어지러운 질문, 답 없는 질문은 여기까지.
그날 황혼에 물든 부산 육군병원 뒤뜰에서 들은 한마디, "너 인생이 네 것이냐? 왜 네가 걱정하느냐?"를 평생 가슴에 묻고 살아왔다. 그거면 됐지. 이 인생 질質이 어떻든 고민할 것 없다.
그냥 살자. 살아지는 대로(하지만 순간의 선택은 신중하게 하면서) 사는 거다. 다른 길이 없다. 할 수 있으면, 무슨 일로도, 어떤 경우에도 한 인간에게 책임을 묻는 폭력행사는 사절하리라.


41.무릎 끓기

어디 동네 대중탕 같다. 사람들이 여기저기 앉아 있는 사이로 지나가는데 누가 빤히 쳐다보다가, 어찌 남의 동네를 지나며 사람을 본 척도 하지 않느냐고, 이리 좀 오라고 부른다. 모습이 당차 보인다.
그 앞에 무릎을 착실히 끓고서 "죄송합니다", 사과를 하니 굳었던 표정이 누그러지며, 나이가 몇이냐고 묻는다. "예, 일흔 하고 다섯입니다." "흠, 아직 젊으시군. 하지만 고희를 한참 넘긴 사람을 무릎 꿇게 해서 과히 민망하오. 노무현 대통령의 예로 보면 나 또한 마땅히 무릎을 끓어야겠으나 내 허리가 많이 불편한 고로 그냥 앉아 있겠소. 우리 서로 인사나 하고 지냅시다.“ 한다.
꿈에서 깨어난다. 깨어나 생각해도 무릎 꿇기를 참 잘했다. 그 당차 보이는 늙은이가 나보다 연상이었더라면 마땅한 처사였고 연하였더라도 스스로 고개를 숙여 준 셈이니 잘했다. 네가 누군데 지나가는 사람한테 시비냐고 대들기나 했더라면 아무리 꿈이라도 한참 시끄러웠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그게 현실이었어도 그랬을까?


42.마지막 편지

전라도 촌놈 임락경은 현실에서도 총명하지만 꿈속에서도 그렇다. 아무가 꿈에 읽은 성경에서는 예수가 운명하시던 날 새벽에 한 장, 아침에 한 장, 누구에겐가 편지를 쓰신 걸로 되어 있다. 여럿이 있는 자리에서 퀴즈 문제를 풀며 노는데 아무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죽던 날 세 통의 편지를 썼다" 하고 말하자 곁에서 눈을 반짝이던 임락경이 손을 번쩍 들며, "예수!" 하고 소리친다. "맞았습니다!" 하는데 그가 귓속말로 "실은 새벽에 한 통, 아침에 한 통 이렇게 두 통 썼잖아?" 한다. "아니, 세 통이야. 마지막 편지는 십자가에 달려서 썼다고!" 그러자 아까보다 큰 소리로 "그래, 그렇지. 세 통이지!" 하면서 "역시 너는 나야", 킬킬거리고 웃는다.
재미있지만 진지한 꿈이다.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 아버지, 제 영을 거두소서.” 이게 편지 아니고 무엇인가? 종이에 붓으로 글을 써야만 편지라고 누가 그러는가? 아무는 마지막 편지를 누구에게 뭐라고 쓸까? 궁금하다. 내용이야 미리 알 수 없지만, 받는 이는 '사랑이신 어머니 한님'이기를···.


43.삶

몇 사람이 상의하러 왔다며 문간을 서성거린다. 무슨 일이냐 물으니, 이제 곧 은퇴하는데 나머지 세월을 어떻게 보내면 좋을지 생각 중이란다. 무슨 아이디어가 있느냐고 물으니, 사람들이 일하지 않고 쉬는 공일空日이 많은데 그날의 의미라 할까 의의라 할까를 설명해 주는 일을 하면 어떻겠느냐고 되묻는다.
"그거 괜찮군. 공일이라고 그냥 놀기만 하는데 그날을 뜻깊게 살아보자는 것 아닌가?"
사람들이 박수 치면서, 저희가 아이디어를 내놓고는 마치 누구한테서 얻어들은 것처럼, 바로 그거라고 좋아한다.
"그러면 공일날이 진짜로 알찬 날이 되겠구먼?“
 "그렇지. 그거야말로 꿔 먹고 알 먹고,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일거양득 아닌가?"
"그럼 우리도 은퇴하는 거 아니잖아?"
"은퇴? 그런 게 어디 있나? 해가 멈추는 거 봤어? 개울이 물러나는 거 봤어?"
얼씨구나, 북 치고 장구 치고 그러다가 꿈에서 깨어난다.


44.넓음과 좁음

어떻게 그 큰 차가 거실로 들어왔는지 모르겠다. 아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차를 운전하여 거실 밖으로 나간다. 분명 열었는데 닫혀 있는 판자문을 양쪽으로 밀면서 차가 벽을 넘어 밖으로 나간다. 나가면 곧장, 이웃집과 함께 쓰지만 소유주는 이웃 사람인 담장이다. 벽에서 담장까지의 공간은 자동차 앞이마가 담장에 닿고 뒤꿈치가 벽에 닿을 딱 그만큼이다. 자동차가 제자리에서 멈추지 않고 조금이라도 전진하면 담 너머 한참 아래에 있는 이웃집 마당으로 떨어져야 한다. 차가 구멍난 담장 이쪽에 약간의 상처를 내면서 담장과 벽 사이 공간으로 떨어지더니 우아하게 좌회전하여 골목 밖으로 나간다. 사람도 차도 다친 데가 없다. 담장에 슬쩍 상처가 났지만 저쪽에서는 보이지 않으니 모를 것이다. 어디선가 소리샘이 짝짝 소리 나게 박수치며, 내 이럴 줄 알았다고 입술을 비쭉거린다. 비웃는 게 아니라 부럽다는 표정이다.


45.사람 마음

무슨 일로 외출했다가 집으로 돌아가는데 경사진 골목이 숨을 가쁘게 한다. 60년대 서울 금호동 판자촌 같다. 작고 좁은 집들이 벽 하나 경계로, 추위를 견디는 남극 팽권들처럼 올망졸망 붙어 있다. 어느 집은 안방에서 샘이 터져 수족관처럼 되었다. 물속에 잠겨 있는 작은 침대가 그 방이 전에 안방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남매를 키우며 젊은 부부가 살고 있다. 잠은 어디서 자느냐니까 웃으며 부억에 불기가 있어 따뜻하단다. 착해 빠져 보인다. 같이 웃다가 꿈에서 나온다.
몇 초쯤 걸렸을까? 짧은 꿈이지만 가난하면서 여유로웠다. 그렇다. 빈부격차는 돈으로 계산할 수 있는 게 아니고, 사이의 넓음과 좁음은 줄자로젤 수 있는 게 아니다. 세상의 모든 격차와 거리가 사람 마음에 있다. 마음 넓으면 좁은 골목이 고속도로, 마음 좁으면 벌판이 감옥이다.


46.꿈속과 꿈 밖

코미디언 심형래가 주연이다. 꿈이고 뭐고 시시하고 재미도 없어 눈까지 떴다가 다시 꿈속 난장판에 들어가 있기를 여러 번 되풀이하며, '꿈에서 깨어나는 것도 맘대로 안되나?' 이런 생각을 한다. 그 생각이 꿈속에서 났는지 꿈 밖에서 났는지 잘 모르겠다.


47.음성 쓰리

음성 부근이다. 평소에는 걸어서 다니던 길인데 오늘은 시내버스를 탄다. 버스가 심한 비탈길을 올라가더니 막바지에 이르러 공중제비로 붕 떠서는 정확히 180도 회전하여 터미널 앞에 멈춘다. 같이 탄 초등학교 교사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좋아한다. 말로만 듣던 점프하는 버스를 오늘 처음 타 본다나?
터미널은 보통 시골 터미널 그대로다. 사람들로 크게 붐비지도 않는다. 한눈에 소매치기임이 분명한 노인이 손자로 보이는 아이 하나 데리고 접근한다. 경계하면서 주머니 속 지갑을 확인한다. 있다. 그러는 내 모양을 보고 노인이 소년에게 말한다. "이 아저씨는 우리가 누군지 알아챘으니 다른 데로 가자." 둘이 사라진다.
우송이 어딘지 우송 가는 차는 자주 있는데, 그 우송이라는 데가 충주 가기 전에 있는지 아니면 충주를 거쳐서 가는 덴지 알 수가 없다. 물어볼 곳을 찾아 두리번거리는데, 아차, 주머니가 허전하다. 당했구나! 손을 넣어 보니 역시 텅 비었다. 아무것도 없다. 주변을 살피지만 노인과 소년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어쩐담?


48.전화번호

주머니를 있는 대로 털어 본다. 5백 원짜리 동전 하나에 백 원짜리 동전 셋, 8백 원이 있다. 이것으로 전화 두 통은 할 수 있겠다. 가까운 데 있는 도와줄 만한 사람을 생각한다.
청주에 홍 목사가 있지. 그런데 그 친구 전화번호를 모른다. 공주에 소하가 있지. 하지만 거기도 전화번호를 알 수 없으니 틀렸다. 난감하다. 충주 홍삼이도 있는데 있으면 뭐해? 그 친구 전화번호도 모르는걸. 번호를 모르면 세상에 없는 물건이 전화인 줄 비로소 안다. 날은 어둑어둑 저무는데 연락할 곳은 있지만 연락할 방법이 없다. 그런데 어째서 충주 집에 연락할 생각은 못했을까? 깨고 나서 생각해도 미스터리다.
꿈속 에서야 제가 그러고 있는 줄도 몰랐으니 그렇다 치고, 그래도 그렇지 사람이 비록 꿈이라 하여도 어쩌면 그렇게 멍청하단 말인가? 도무지 이 난감함에서 헤어날 방법이 없는데, 어라? 저만큼 깡통 위에 지갑이 놓여 있다. 달려가 집어 들고 속을 살핀다. 주민등록증, 전화카드, 종로서적 회원카드, 모두 있는데 돈만 없다. 돈 대신 서툰 글씨로 ‘어떠신가? 음성 쓰리本 솜씨? 맥 빠지지?’라고 쓴 쪽지가 들어있다. 거리는 존 웨인 서부영화 세트장처럼 황량한데 갈 곳은 없고 어디 연락할 데도 없고 제자리에서 맴돌다가, 어깨가 들썩 올라갈 만큼 크게 흔들리며 잠에 서 깨어난다.


49.그 '하나'

뭐가 많이 복잡했다. 사건도 있었고 다양한 감정도 있었고 아슬아슬, 어질어질, 우여곡절도 많았다. 그런데 꿈의 마지막 자락에서 모든 것이 사라지고 기억에도 남아 있지 않다. 맑고 투명한 하늘을 배경으로 겨울의 나뭇가지였던가, 이 니면 부러진 돛대였던가? 아무튼 그 '하나'만 남고 모든 것이 사라졌다.
그 남은 '하나'는 십자 모양으로 가로질러진 두 줄기 검은 선線이다. 그 '하나'가 존재하는 모든 것의 알파요 오메가다. 어디서 음성이 들린 것  같은데, 누구의 음성이었는지 아니면 누구의 느낌이었는지, 그건 모르겠다. "보라, 십자가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두 줄기 사랑의 만남, 저뿐이다. 저가 모두다."
꿈보다 먼저 눈이 뜨인 것 같다. 지금까지 오랜 세월, "십자가는 고난이 아니라 죽음이다", 이 말을 가슴에 담고 살았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이제 말을 바꿔야겠다. 십자가는 사랑 이다! 죽음으로 마침내 완성되는 사랑! 하느님 사랑과 인간 사랑이 만나는 교차점, 바로 그 순간이다." 무슨 말을 보텔 것인가? 아멘, 아멘, 아멘! 그러므로 십자가는 생명이다.


50.실패

꿈은 기억나지 않는데 메시지는 명료하다. '뭐를 하고 싶다', 이런 생각이 들면 그 뭐를 하는 거다. 단, 상황이 허락되면, 그래서 자연스럽게 할수 있으면, 그러면 그냥 하는 거다. 그래서 결과가 어찌 될지를 미리 계산하거나 예측하지 않는다. 그런데 막상 해보니 더이상 계속할 수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그러면 즉시 중단하고 돌아선다. 언제 뭐를 했더냐 싶게, 아쉬워하지 않고, 오히려 중단하게 된 것을 기뻐하면서···.
이것이 메시지다. 간단하다. 아, 여기까지 적는데 꿈이 생각난다. 어린 여자아이들이 한복을 차려입고 폭포수 아래에서 춤을 춘다. 폭포가 배경이 아니라 무대다. 무슨 말이냐 하면, 아이 들이 추운 겨울에 얼음이 둥둥 떠다니는 물웅덩이에서 춤을 춘다는 얘기다. 누가 저런 미친 짓을 아이들에게 시킨 거냐고 어른들은 한편에서 말이 많다. 아이들이 오들오들 떨며 춤을 추는데 동작이 반은 얼어붙었다. 한 아이가 물에서 뛰쳐나온다. 다른 아이들도 뛰쳐나온다. 입술이 새파랗게 질렸는데도 춤을 중단해서 너무나 행복하다는 듯, 기뻐 죽겠다는 얼굴로 저마다 이를 하얗게 드러내며 환히 웃는다. 그 모습이 참으로 예쁘고 건강한, 사랑 어린 연금술사들이다.
그렇다. 인생이란 얼마나 시시한 일에 성공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고귀한 일에 실패하느냐로 그 값이 매겨지는 것이다. 지상에 천국을 이루려다가 나무에 달려 죽은 누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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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모쪼록 오늘 하루

저녁을 무겁게 먹어서인가? 꿈도 무겁고 어둡다. 조선 시대 무슨 대감의 별장인지 저택인지 아무튼 당대 세도가의 서재였다고 한다. 설명한 사람이 누군지는 모르겠다. 집주인이 정치보다 문화에 관심이 있어 조선은 물론 중국과 일본, 멀리 인도의 서책까지 많은 장서를 보유했었단다. 그런데 지금은 방의 한쪽 벽과 양 모서리만 형태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남아 있고 온통 칡덩굴과 가시장미가 거미줄처럼 얽혀 있다.
‘흠, 제행무상이군. 그런데 언제 한 번 왔던 곳이라는 이 느낌은 뭐지? 혹 전에 살던 곳인가?’
이런 생각을 하다가 꿈이 다른 장면으로 넘어갔고 그 뒤로는 기억에서 사라졌다. 그렇다. 시작된 것은 언제고 끝을 보게 마련이다.


52.오늘 하루

이 몸은 생일이 있으니 사망일도 있겠지. 가만, 언제가 생일이지? 아무년 12월 10일? 그러면 9일에는 이 몸이 없었나? 있었다. 차원이 다른 세상에, 어머니 아닌 어머니 몸으로, 엄연히 존재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어머니의 어머니, 그 어머니의 그 어머니··· 어디까지 올라가야 끝, 아니 시작을 볼 수 있을까? 알 수 없다. 그 이유가, 아예 그것이 없어서가 아닐까? 그렇다면 이 몸의 사망일 그다음 날에는 이 몸이 없는 건가? 그럴 리 없지. 시작이 없는데 무슨 끝이 있을 건가? 다만 겉모습의 끊임없는 변화가 있을 따름이다. 겉사람은 날로 썩어가나 속사람은 날로 새롭다는 바오로의 말이 결코 하나의 추상개념이 아닌것이다. 그러니 모쪼록 오늘 하루, 한순간을 착실히 순順하며 살 따름이다.


53.사랑 때문이다

예수께서 무엇 때문에 세상에 태어나셨던가? 사랑 때문이다. 그분이 무엇 때문에 죽으셨는가? 사랑 때문이다. 사랑은 속에 담아 두기 위한 것이 아니다. 드러나야 사랑이다. 보여야 사랑이다. 이루어져야 사랑이다. 어떻게? 간단하다. 내어 주는 거다. 내어 주고 내어 주다가 더 내어 줄 것이 없으면 마침내 자기 자신을 내어 주는 것, 그러니까, 죽는 것이다.
벗을 위하여 목숨을 내어 주는 것보다 큰 사랑이 없다고, 길을 가다가 길이 되고 사랑하다가 사랑으로 되신 그분이 말씀하신다. 상대가 누구든 상관없다. 자기 아닌 누군가를 위하여 자기를 내어 주면, 그것으로 충분한거다.
예수는 세상에서 말하는 '살아남는 길'을 보여 주러 오신 분이 아니라 '죽는 길'을 보여 주러 오신 분이다. 살아남으려다가 서로 죽는 길이 아니라 죽어서 모두 사는 길을 그분은 보여 주셨다. 그렇다고 말만 하신 게 아니라 그게 그렇다는 걸 당신 몸으로 보여 주셨다. 음.


54.잠자리에서 일어나며 드는 생각

하느님이 우리에게 무슨 일을 시키셨다면 그 일에 필요한 여건을 완벽하게 갖추어 놓으셨다. 무슨 아이디어가 떠오르는데 그대로 실행할 여건이 미비하다면 아직 그 일을 시키신 게 아니다. 그 일을 준비하시는 중이거나, 그분과 아예 상관없는 일이다. 한 가지 유념할 것, '준비'는 언제나 겨자씨만큼 작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아직 준비되지 않은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혹은 땅속에 묻힌 보배처럼, 아브라함이 고향 떠날 때 행선지를 알 수 없었던 것처럼 아예 눈에 띄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행선지가 마련되지 않은 건 아니다. 그가 행선지도 모르면서 고향을 떠난 것은 당장 고향을 등지고 떠나는 데 필요한 조건이 두루 갖추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그에게 고향을 떠나지 못할 조건이 하나도 없었다는 얘기다. 머뭇거리지도 말고 치달리지도 마라. 발꿈치를 들지도 말고 가랑이를 찢어지게 벌리지도 마라. 한 번에 한 걸음, 이것이 저 시내가 흐르고 흘러 바다에 들기까지의 한결같은 방법이다.


55.여기가 바로

서너 명이 일행이다.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떠들고 웃고 그러면서 어디를 간다. '행복지문'이라고 쓰인 간판 앞에서 그것을 "행복의 문'(幸福之門)으로 읽어야 한다", "아니다, '행복한 소식'(幸福之聞)으로 읽어야 한다" "아니다, '행복 손금(幸福指紋)으로 읽어야 한다", 저마다 갑론을박, 설왕설래인데 모두가 동의하는 결론은 없다.
그래도 괜찮다. 아무도 '행복지문 대한 결론을 내리자고, 또는 내려야 한다고 말하거나 주장 하지 않는다.


56.아무렇지도 않다

동화 작가 정생 형이 늦장가를 들었는데 그 집 앞에서 "신랑 신부 자는 방에 들어가는 건 실례다", "아니다, 여기까지 왔다가 그냥 간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역시 가타부타 시끄러운 소리에 문이 열리며 누가 잠옷 차림으로 나온다. 정생 형 아닌 정규 형이다. 같은 동화 작가지만 엄연히 다른 두 사람인데 꿈에 서는 정생 형 방에서 정규 형이 나오는 게 너무나 당연하다. 아무렇지도 않다. 이게 무슨 조화냐고, 왜 권정생 방에서 강정규가 나오는 거냐고 묻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방에 들어갔는지 아닌지 모르겠다. 시골 학교 실내체육관 같은 데서 저마다 혹은 앉고 혹은 서서 어슬렁거리던 장면까지 기억에 남아 있다.


57.공존

한 단어가 속에 두 의미를 담는 경우가 많다. 이런 단어 앞에서 번역하는 사람은 두 의미 중 하나를 택할 것인지 아니면 두 문장으로 옮길 것인지 고민하게 된다. 방금 꿈에서 만난 단어가 그랬다. 한 단어에 '서로 낳아 주는 나무'와 '서로 살려 주는 나무'라는 두 의미가 담겨 있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깨어난다. 깨어나는 중에 문득 떠오르는 문장, "존재가 은총이요 삶 자체가 축복이다"(아브라함 혜셀).
그렇다. 하나가 둘이고 둘이 하나다. 낳는 것이 살리는 것이고 살리는 것이 낳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는 둘이 아니고 둘은 하나가 아니다. 낳는 것은 살리는 것이 아니고 살리는 것은 낳는 것이 아니다. 이 원리가 통하지 않는 구석이 없다는 게 우리가 시방 살고있는, 언제나 한쪽은 어둡고 다른 한쪽은 밝을 수밖에 없는, 그러면서 어둠과 밝음이 하나로 존재하는 떠돌이 지구별의 특징이자 운명이다. 원주악장폐珠握掌에 단청별丹?別 이라, 둥근 구슬 한 손에 잡고 붉음과 푸름을 분별한다.
오늘도 기억하자. 하나가 보이면 둘을 보고 둘이 보이면 하나를 보자. 양쪽을 잡되 어느 쪽도 잡지 않는다. 그런다는 이유로 비난당해도 좋다.


58.우리가 나는 세상

꿈꾼 건 알겠는데 내용이 생각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아무는 꿈을 꾼 건가, 꾸지 않은 건가? 양쪽 다 그렇고 양쪽다 아니다. 꾸었다고 해도 되고 꾸지 않았다고 해도 된다. 있다고 해도 되고 없다고 해도 된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무엇이 과거에 있었다는 건 그것이 미래에도(모양이야 달라지겠지만) 있을 거라는 말이다.
분명한 것 둘이 있고 그 사이에 분명하지만 알 수 없는 하나가 있다. 무엇이 있었다는 것과 그것이 있을 것이라는, 이 둘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 사이에 무엇이 있는 건 분명하지만 보이지 않아 알 수가 없다. 분명하여 보이는 무엇의 과거와 분명하지만 보이지 않는 무엇의 미래 사이에 보이지 않는 무엇의 현재가 있다. 이게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아니 세상을 사는 우리다.


59.설날 아침에

엊그제 일부一夫와 나눈 이야기가 생각난다. 
-문명의 전환기에서 사람들은 분명한 과거와 불분명한 미래 사이를 통과하게 마련이다. 많은 사람이 분명한 과거를 붙잡고 그것을 보내지 않으려 하지만, 그건 원천적으로 불가능이다. 저무는 해를 누가 잡아 둘 것인가? 그런데, ‘이건 아님’이라는 깃발로 과거를 등지고 ‘아직 모름’이라는 깃발로 미래를 향하는 소수의 사람들, 일흔다섯 나이에 고향을 떠나 행선지도 알수 없는 곳으로 발길을 옮기는 아브라함 같은 사람들이 있다. 기성 제도에 대하여 이건 아니라고 분명히 말하면서 그러니 어쩌겠다는 거냐는 질문에 는 모른다고, 모르지만 우리를 앞에서 이끄시는 하느님을 믿는다고, 담대히 말하자. 여기가 토인비가 말했다는 ‘창조하는 소수 자’의 주소다. 과거를 고집하는 다중多衆 속에서, 분명하지만 알 수 없는 미래를 향하여 나아가는 것 자체가 시대를 거역하는 소수자의 외로울 수밖에 없는 발걸음이다. 각오하자··· 대강 이런 얘기였다. 돌아보니 설날의 화두치고는 적절한 바 있다. 더 이상 아닌 것이 분명한 어제와 아직 알 수 없는 내일 사이에 존재하는, 분명히 있으나 보이지 않는, 찰나가 바로 설날 아닌가?


60.연화

새벽에 깨었다가 다시 잠들었는데 또 꿈이다.
연화는 시궁창에서 태어나 시궁창 같은 인생을 산 여자다. 수많은 남자들에게 말하자면 짓밟혔고 그러는 사이에 아버지가 누군지 알수없는 딸 하나 키우며 문자 그대로 외롭고 쓸쓸한 인생길을 혼자 걸었다. 연화는 딸한테만큼은 자기 인생을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틈만 나면 딸에게 일러 주었다.
너는 어미처럼 살지 마라. 네가 여자라는 이유 하나로 남자들이 너를 함부로 대하며 괴롭히게 허락하지 마라. 어느 남자한테도 얽매이거나 밟히지 마라. 어미가 한평생 시궁창을 헤매며 깨친게 하나 있다면 바로 이거다. 고상한 사람이 고상한 짓을 하고 불쌍한 놈이 불쌍한 짓을 하더라. 남자들한테 매이지도 말고 그들을 붙잡지도 마라.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붙잡거나 얽매는 건 인간으로서 할 짓이 아니다.
너는 여자로 살지 말고 사람으로 살아라. 사람으로 짐승도 대하고 사람으로 사람도 대하면서 나비처럼 꽃처럼 훨훨 아름답고 자유롭게 살아라. 너 닮은 딸 하나 낳아서 당당하고 아름다 운 사람으로 키워라. 네 딸에게 아버지라는 존재가 필요할 경우, 살다 보니 그럴 때가 있더라, 그럴경우엔 마을의 아무나에게 아비 노릇을 부탁할 수 있을 만큼 남자들과 선하고 믿음직한 관계를 이루어라. 네가 그들을 두려워하거나 경멸하지 않고 사람으로 사람답게 대하면, 남자도 사람인지라, 기꺼이 네 딸의 아비 노릇을 맡겠다고 나설 것이다. 남자는 네 적이 아니다. 그러니 미워하지도 말고 겁내지도 마라. 남자는 네소유가 아니다. 그러니 매달리거나 붙잡아 두려 하지 마라. 네가 스스로 자유로운 그만큼 다른 사람들을 구속하지 않을 것이다. 이 말은 거꾸로 하는 게 옳다. 네가 남들을 구속하지 않는 그만큼 너는 자유로울 것이다. 얘야, 사랑하는 딸아, 부디 너는 어미의 삶을 뒤집어 살아 다 오. 지옥을 뒤집으면 거기가 바로 천국 아니겠냐···.
여기까지 말하다가 갑자기 연화가 웃음을 폭발하며, "어때? 관옥? 자네 오늘 우리 애 아비 노릇 좀 해 주지 않겠나?" 하는 바람에 깜짝 놀라 꿈에서 깨어난다. 그러니까 이게 어찌 된 건가?어미가 딸로 된 것인가, 딸이 어미로 된 것인가? 아무러면 어때? 시궁창에서 연꽃이 피어난다더니, 그래서 이름이 연화蓮花 였구나! 아름답고 당당하고 시원하던 꿈속의 그 여자 얼굴이 삼삼하다.


61.뗏목을 타고, 마음을 다하여

이른바 '원로 여류 작가'라는 타이틀을 자기 이름에 덮어쓰고 사는 노파의 글을 읽는다. 곧장 중심으로 들어가지 않고 괜한 말로 이리저리 집적거리는 난삽한 문장의 대표 자리에라도 앉힐 만한 글이다. 글 말미쯤에, '괜찮은 내용을 난삽한 문장이 망쳐 놓은 작문'의 한 예로, 예수를 언급한 아무의 글이 인용되어 있다. 의아하기도 하고 불편하기도 하여 몇번 인용된 문장을 읽어 보지만 노파가 왜 그렇게 썼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누가 속삭이듯이 말한다. "본디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지? 난삽한 글을 쓰는 사람 눈에는 온통 난삽한 글만 보이는 거라."
"그런가? 그렇다면 그녀의 글을 '난삽한 문장의 대표 자리에라도 앉힐 만한 글'로 읽은 아무도 난삽한 글을 쓰는 사람이라는 말인가?" 속삭이는 소리가 심기를 더욱 불편하게 만든다. 거 기 어디쯤 꿈에서 깨어난다. 한동안 뒤끝이 깔끔치 않다.


62.말에 속지마

오래전 꿈에 들은 무위당 선생 말씀이 생각난다. "말은 아니야. 말에 속지 마. 곧장 들어가라고!' 옳은 말씀이다. 하지만 그러니 아예 벙어리로 살라는 말씀은 아닐 게다. 말에 속지 말라 는, 그 또한 말 아닌가? 숨 쉬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인생이다. 하지만 숨 쉬는 게 인생의 목적은 아니잖은가? 말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게 인생이지만 말하는 게 인생의 목적은 아닌 것이다. 그렇다. 사람의 말은 뗏목이다. 그것을 타고서 말로 옮길 수 없는 건너편 언덕에 닿아야 하는···.


63.출근 도장 찍기 싫어

밤중에 깨었다가 다시 잠들었다. 시인 도종환이 어깨를 뒤로 젖히며, 용돈이 필요할 텐데 어디 취직이라도 하지 않겠느냐 묻는다. 웃으며, 출근 도장 찍기 싫어서 취직 같은 건 생각 없 다고 답한다. 실은 같은 말을 현실에서도 한 적이 있었다. 당신 함께 일하자는 오재식 선생의 말을 이런저런 핑계로 거절하다가 출근도장 찍는 게 싫다고 하니 흔쾌히, 알았다고, 그럼 자 유인으로 살라고, 오래전에 돌아가신 그분이 말씀하셨지.
글쎄, 직장 없는 사람이 자유인이라면 시방 온 세상이 젊은 자유인 천지겠지만 그건 아니겠고, 아무튼 그무렵 다시는 취직을 위한 이력서 따위 쓰지 않겠다고, 일자리 찾아 두리번거리지 않겠다고, 필요하면 용의도 있고 준비도 되어 있으니 일이 나를 찾아오라고, 그런 생각을 한 것은 사실이다. 장관인 도종환 시인에게, 정 굶게 생겼으면 구걸할 생각인데 혹시 당신한테 손을 내밀더라도 거절하지 말라고 농담처럼 말하며 웃다가 꿈에서 깨어난다.


64.누구에게나

누구에게나 자신이 좋아하고 남들에게 해가 되지 않을 만한 일이 하나는 있게 마련이다. 그런 게 주어지지 않은 사람은 없다. 하느님이 경영하는 세상에 오발탄 인생이란 있을 수 없는 것, 저마다 자기만의 소명을 받아서 온 세상이다. 빈둥거리며 세월을 보내는 것도 창조적으로 즐겁게 하면 그런 일들 가운데 하나일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날마다 빈둥거린다 해서 사회가 병들 거나 무너지는 건 아니잖은가? 만일 누가 직장이 없다는 이유로 징징거리거나 화를 내거나 앙심을 품는다면 그거야말로 외면할 수 없는 사회적 문제겠지만.


65.부고

초등학교 동창 태순의 부고가 날아왔다. 그런데 보내는 사람이 본인이다. 자기 죽음을 자기가 알린 거다. 꿈이니 그럴 수 있겠지만 하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당연하다는 생각도 물론 없었다. 다만 부고에 앞으로 어떻게 하겠다는 내용이 들어 있는데 문장을 조금 바꿨다는 말을 들었다. 그것도 본인이 바꾼 게 아니라 아무가 바꿔 주면서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이를 대신하여 관옥 날인'이라고 도장까지 박았다는 거다. 무엇을 바꿨냐 하면, "날마다 눈물로"라는 말을 "날마다 기꺼이"라는 말로 바꿨단다. 그러면서 '눈물로'는 부고에 어울리는 단어가 아니라고 했단다.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하다가 꿈에서 까 어난다.
 '눈물로'와 '기꺼이'가 어떻게 다른가? 앞의 것이 어찐지 어렵고 힘들어 보이는 반면 뒤의 것은 가볍고 쉬워 보인다. 그렇다. 뭘 해도 좋다. 그것이 어렵고 힘들다면 아직 중력(안팎에서 밀고 당기는 힘)의 지배 아래 있다는 표시다. 중력을 벗어나면 뭐든지 가볍고 쉬워진다. 낡은 세상의 종결과 함께 새로운 세상의 시 작을 알리는 것이 부고다. 누구 장례식에 갔다가 방명록에 축 졸업, 축 입학'이라고 쓴게 생각난다. 대부분 경우에 후자는 생략되거나 망각되지만, 실제로 인생이란 날마다 자기 부고를 띄 우면서 살아가는 '하루'의 연속 아닌가?


66.거미줄로 당겨도 끌려가고

요즘 저울로 달 수 없는 체중이 많이 가벼워진 게 느껴진다. 이런저런 중력들로부터 자유로워진 모양이다. 거미줄로 당겨도 끌려가고 거미줄로 막아도 멈출 수 있게 해 달라는 기도가 이루 어지는 중인가? 누가 뭐라고 해도 역겹게 들리지 않고 무슨 일이 일어나도 "괜찮아"라는 말이 먼저 나온다. 그나저나 태순 그 친구 잘 있는지 모르겠다. 평생을 충주 대성여객 직원으로 살아 온 사람이라 언제든지 터미널에 가면 비쩍 마른 터주대감을 볼 수 있었는데....


67.장례

 꿈의 앞부분은 기억에서 사라지고 뒷부분 몇 장면만 전쟁터 파편처럼 남아 있다. 후배들이 모여 누구 장례를 치른다. 처음 보는 젊은이가 망치로 천장을 부순다. 솜씨가 훌륭하다. 목수들과 어울리며 잔뼈가 굵었고 지금은 전도사로 산골 교회에서 목회한단다. 누가 그에게 어느 학교 출신이냐고 묻자 귓속말로 대답하는데 물은 사람이 큰 소리로 "중학교 졸업이라고?" 하는 바람에 그의 학력이 중학교에서 멈췄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하지만 본인은 아무렇지도 않게 "배가 고프다"고 말한다. 아무가 땅에 떨어져 있는 빵 조각과 인절미 한 덩이를 건네 주자, "이거 우리 집에서 가져온 건데?" 하며 받아먹는다.
장면이 바뀌고 여기는 장례식 현장이다. 아는 얼굴의 후배들이 예복을 갖추고 단상에 앉아 있다. 누구도 아무를 알은체는커녕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이 자리에서 자취 없이 몸을 피하는 게 저들에 대한 마지막 예우라는 생각으로 돌아서다가 그래도 온갖 쓰레기들로 지저분한 집 안은 대강 치워 놓고 가야겠다 싶어 겠다 싶어 봉당에 엎질러진 고추장을 손으로 긁어모으는데까 지가 기억에 남아 있는 꿈의 전부다.
꿈이지만 잘했다. 사람들이 알아 주거나 말거나, 누가 왜 이렇게 했는지를 캐어묻지도 않고서, 더러워진 곳을 깨끗이 청소하고 어지러워진 것을 가지런히 정돈하려 한 건 잘한 짓이다. 그래, 그렇게 사는 거다. 그마저 또 다른 하나의 쓰레기로 남겠지만··· 어쩔 건가? 누구도 제 송장까지 치워 놓고서 죽을 순 없는 일이다.


68.왼손, 오른손

범인을 찾아내는 벌 두 마리를 동화 작가 권정생 이 사는 안동 일직 마을의 착한 농부가 기르고 있다. 누누이 말하거니와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 꿈속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어느 쪽이 더 있을 만한 곳인지는 사람마다 의견이 다르겠지만.
벌은 날아다니는 속도가 사람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빨라서 용의자의 지문을 신속히 찍어 올 수 있다. 따라서 범인의 지문이 채취되었으면 그를 잡는 건 시간문제다.
벌이 찍어 온 지문 사진들을 범인의 지문과 대조하는 것이 형사들의 일이다. 그런데 이번에 찍어 온 사진들 가운데 벌의 주인인 농부의 지문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이 있어서 사태가 복잡해졌다.
정확히 말하면 사진으로 찍힌 것이 지문이 아니라 손금, 그것도 왼손 새끼손가락 아랫부분인데 그 손금이 바로 벌의 주인인 농부의 손금인 것이다. 농부가 꼼짝없이 범인으로 몰리게 되었다. 권정생이 나서서 그 사람 그런 사람 아니라고 말해 보지만 소용없는 짓이다.
그 순간, 뭐가 뒤집어졌는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중요한 무엇이 뒤집어지면서 문제의 사진이 네거티브 필름이라는 사실과 함께 사진으로 찍힌 것이 왼손이 아니라 오른손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하마터면 범인으로 체포될 뻔한 농부가 빙그레 웃는다. 여기 까지다.


69.되도록이면 멍청하게 살자

꿈에서 나와 공상을 계속한다. 우리가 지금 사는 이 세상이 네거티브필름으로 펼쳐지는 세상이라면 선이 악으로 악이 선으로, 위가 아래로 아래가 위로, 그렇게 되는 건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겠지. ‘누’는 뒤집어도 ‘구’니 네거티브라고 해서 달라질게 없지만 ㅓ 를 뒤집으면 ㅏ 로 되니 같을 수 없다.
자, 그렇다면 무엇이 바로 봐도 뒤집어 봐도 같은 것일까? 그걸 혹시 진실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걸까? 관두자. 괜한 공상은 여기서 접고 어쨌거나 당분간 살면서 이런저런 경험을 해야 할 현실로 돌아온다. 다만 그 무엇에 대하여도, 누구에 대하여도 확고한 판단과 결정적 단언을 자제하기로 마음먹는다.
아무리 객관적으로 본다고 해도 그것 또한 주관적인 객관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되도록이면 멍청하게 살자. 스승께서 괜히 남을 판단하지 마라고, 유수식견이라, 오직 견해를 쉬라고 말씀하신 게 아닐 터인즉...


70.할 말이 없다

길모퉁이에서 한 여인이 고흐의 소묘처럼 얼굴 을 무릎에 묻고 운다. 재수 없게 웬 여편네가 남의 동네에 와서 우느냐고 지나가던 늙은이가 역정을 낸다. 어디선가 일기예보 소리가 들린다. "오늘은 하늘이 무겁고 비나 눈이 내리겠습니 다!" 여기쯤에서 꿈을 벗는다.
거의 동시에 누가 속삭이듯 말한다. "하늘이 무겁다? 어디 있지도 않은 것이 무슨 수로 무겁고 가볍고 그런다는 거냐? 무거운 건 하늘이 아니고 거기 있는 공기나 구름이나 뭐 그런 것들이겠지." 맞다.
그렇다면 저 무릎에 얼굴 묻고 우는 건 여인인가, 여인 속에 있는 무엇인가? 저렇게 역정을 내며 구시렁거리는 건 늙은이인가, 늙은이의 버릇인가? 여인의 속에 있는 그 무엇은 본디 여인의 것인가? 늙은이의 버릇은 늙은이 혼자서 만든 것인가? 저 허공에 나부끼는 건 깃발 인가, 바람인가? 아니면 그것을 바라보는 마음인가? 어떻게 물어도 답은 '어느 것도 아님' 혹은 '모두임'이다.


71.아는 사람으 말하지 않는다

노자가 왜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는다고 했다. 말하지 않는 게 아니라 할 말이 없는 거다.
"그물의 목적은 고기 잡는 것이다. 고기가 잡히면 그물은 잊힌다. 토끼 덫의 목적은 토끼 잡는 것이다. 토끼가 잡히면 덫은 잊힌다. 말의 목적은 뜻을 전하는 것이다. 뜻이 전해지면 말은 잊힌다. 내가 어디에서 말 잊은 사람을 볼 수 있을까? 그와 말해 보고 싶구나"(장자).


72.칼과 신호등

아는 사람이 일본에서 사무라이가 되어 돌아왔다. 스승이 칼과 칼집과 칼 쓰는 법을 물려주면서 이것으로 생명을 죽이지 말고 살리라고 했단다.
그렇다. 사람은 저마다 세상에 태어나면서 몸과 마음과 생명을 물려받는다. 모두가 스스로 만든 게 아니라 물려받은 것이다. 칼과 칼집을 가졌다고 모두가 사무라이는 아니다. 칼 쓰는 법을 스승으로부터 제대로 배워야 비로소 사무라이다. 칼과 칼집의 역할은 칼과 사람을 다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스승이 또 말하기를 혹여 이 칼로 생명을 다 치거나 죽이게 되더라도(그러지 않을 수 없는 경우가 있을 터인즉) 그것으로 붉은 신호등이게 하라고 하셨단다.
꿈에서도 붉은 신호등이란 말이 절묘하다 싶다. 붉은 신호등은 길을 가지 못하게 막는 역할을 하지만 그러는 목적은 결국 길을 잘 가게 하는 것이다. 붉은 신호등은 푸른 신호등에 속한 물건이다. 푸른 신호등 때문에 붉은 신호등이 존재한다. 반대는 아니다. 붉은 신호등이 없을 수 없는 세상이다. 상대와 맞서고 겨루고 갈라서야 하는 세상이다. 하지만 때로는 그것이 최종 목적일 수는 없는 거다.
사무라이가 칼을 마지막으로 근사하게 사용하는 길이 있다. 누군가를 위하여 혹은 스스로를 위하여 자진自盡하는 것이다.


73.굶주린 개

사람도 여럿 등장하고 사건도 있었지만 모두 날아갔다. 한순간의 장면만 남았다. 어느 잿간에서 수도꼭지를 트는 데 "쉭" 소리와 함께 쏟아져 나온 물이 바닥에 닿기도 전에 벼락처럼 달려들어 그 물을 받아 마시는 것은 사흘이나 물에 굶주린 이웃집 개다.
아무 인생에도 저런 장면들이 있었던가? 있었다. 본인과 세상에 대하여 속수무책 절망하던 순간, 도무지 출구가 보이지 않는 절벽같은 현실 앞에서 눈 둘 곳을 찾지 못하던 순간, 그때 그분을 만났다. 그렇게 그분을 만난 순간들이 돌아보면 가장 행복한 순간들이었다.
그렇다. 행복은 행복을 보여 주지 못한다. 불행만이 행복을 보게 해 준다. 캄캄한 밤하늘이 반짝이는 별을 보여 주듯이. 하지만 아무리 캄캄한 밤에 찬란한 별이 반짝인다 해도 눈 감은 자에게는 그것들 모두 없는 것이다.
당신이 세상에 온 것은 보지 못하는 자들을 보게 하기 위해서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신 까닭을 알겠다. 열쇠는 눈이다. 밤하늘도 아니고 별도 아니다. 하늘의 별처럼 반짝이는 눈이다. 벌컬벌컬 물 마시던 개의 모습이 뚜렷하다.


74. 단 하나의 의미

꿈속에서는 이름도 얼굴도 알았지만 깨고 나니 모두 사라졌다. 주인공은 생각나지 않고 이야기만, 그것도 흐릿하게 남아 있다.
두 사촌 형제 이야기다. 아랍계 이름이었으니 하나를 '알' 이라 하고 다른 하나를 '파'라 하자. 알과 파는 한 할아버지 손자들인데 선조의 유산을 물려받아 넉넉하게 산다. 그러다가 알 이 파산하여 말 그대로 알거지가 된다. 그래도 파가 살림을 보살펴 주어 큰 어려움 없이 지낸다.
하루는 알이 굶주려 쓰러져 있는데 곁을 지나던 파가 보지 못하고 그냥 지나친다. 그러는 파를 알이 본다. 알은 파가 자기를 보고도 못 본 척했다고 생각한다. 두 번 다시 파의 신세를 지지 않겠다고, 어떻게든 홀로서기를 다짐하며 파의 집에 발길을 놓지 않는다.
파가(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으나) 알이 자기를 찾아오지 않는 이유를 알게 된다. 그래도 가만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여 알 모르게 알의 곳간을 채워 주기로 한다. 알은 누가 자기 곳간을 채워 주는지 처음에는 몰랐지만 결국(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으나) 파가 그러고 있다는걸 알게 된다. 둘이 부둥켜안고 올음을 데서 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어차피 터뜨리는 이렇게 저렇게 살다 가는 인생이다. 누가 부자로 살고 누가 가난뱅이로 사는지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인생에 단 하나 의미가 있다면 그렇게 살면서 얼마나 영혼이 성숙했느냐에 있다 하겠다. 부자로 넉넉하게 사는 것도 경험이고 가난하여 굶는 것도 경험이다. 둘 다 값진 경험이라는 점에서 다를 바가 없다. 모쪼록 온갖 경험을 자양분 삼아 영혼의 나무를 "그리스도의 경지에 이르기까지" 키울 일이다.


75.내가 살아 있는 건

멀지 않은 데서 메시지가 날아왔다. 편지로 왔는지 전화로 왔는지 아니면 문자로 왔는지, 그건 잘 모르겠다. 어떤 경유로 날아왔는지도 모르겠다. 메시지는 단 한 줄이지만,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누가 살아 있다는 건 그를 위해 서 누가 죽었다는 거다. 네가 살아 있는 건 누가 너를 위해서 죽었다는 얘기다. 그렇게 삶과 죽음이 하나로 이어진다. 삶 곧 죽음이고 죽음 곧 삶이다.
누가 살아 있음은 누가 그에게 밥이 되었다는 뜻이다. 누군가를 위해서 죽어가는 생명이 곧 밥이다. 십자가는 세상을 살리는 밥이다. 죽음으로 실현되는 사랑이다.
누군가의 밥이 되려고 애쓰지 마라. 시금치는 나물로 되려고 애쓰지 않는다. 소는 불고기가 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다만 네 뜻을 그분 앞에서 포기하여라.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신 자 유의지를 스스로 아버지에게 돌려드리는 것으로 본인의 자유 의지를 행사하여라. 그것만큼은 너 말고 아무도 대신할 수 없기에 하는 말이다.
죽으려고 하지도 말고 죽지 않으려고 하지도 마라. 네가 그렇게 살아 있음은 오늘도 너를 위해서 죽어 주는 누군가의 행복이다. 너 또한 누군가를 위해서 기꺼이 죽어 주는 오늘의 행복을 누리도록 하여라.


76.프로페셔널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엿들으려고 엿들은 게 아니라 그렇게 되었다. 아버지는 은퇴한 프로 농구 선수고 아들은 장차 프로가 될 꿈을 안고 대학팀에서 뛰는 아마 추어 농구 선수다. 아버지가 말한다.
"너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를 아느냐?"
"예, 아마추어는 농구를 즐기는 사람이고 프로는 농구가 직업인 사람이지요."
"틀렸다. 프로도 농구를 즐겨야 한다. 즐기지 않으면 농구가 아니라 밥벌이일 뿐이다. 프로는 농구가 직업인 사람이라기보다 농구로 사는 사람이다. 그에게는 삶의 유일한 터가 농구 코트다. 농구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게 프로 농구 선수의 삶이다. 모차르트한테서 음악을 빼면 무엇이 남겠느냐? 아버지가 그랬다. 나에게는 농구가 전부였다. 그 점에서는 부끄럽지 않다. 프로농구 선수답게 살았다."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한테는 어머니도 저희도 없고 오직 농구뿐이었지요."
"그런데도 너는 프로가 되고 싶은 거냐?"
아들은 답이 없다. 아버지가 말한다.
"아마추어에게는 아마추어의 맛과 가치가 있고 프로도 마찬가지다. 무엇에 프로로 되느냐, 아마추어로 되느냐는 본인이 결정하는 게 맞다. 나도 너에게 이래라저래라 하지 않겠다. 다만···." 아버지가 말을 멈춘다.
아들은 기다린다. 아버지가 말을 잇는다. "사랑만큼은 아마추어가 되지 말고 프로가 되어야 한다. 사랑은 취미로 하는 게 아니라 목숨 걸고 하는 거다. 아버지의 농구 사랑은 프로로서 거의 완벽했다고 본다. 조금도 후회되지 않는다. 다만···."
아버지가 다시 말을 멈춘다. 아들은 말없이 기다린다. 아버지가 말을 잇는다. "그 사랑의 대상이 농구가 아니라 사람이었으면, 그게 죽은 네 어미와 너희들과 나 자신이었더라면…." 아버지 눈에서 이슬 같은 반짝임을 본 것이 꿈속인지 꿈 밖인지, 눈인지 가슴인지, 그건 잘 모르겠다.


77.여무는 인생

누구와 이야기를 나누는 건지 처음엔 몰랐고 나중에 알았다. 반세기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다. 하지만 그 얼굴을 마주 대하지는 않았다. 아직 아버지 안에 있는 모양이다. 그분 안에 있으니 서로 얼굴을 볼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이 하느님을 눈으로 볼 수 없는 까닭은 간단하다. 서로 안에 있기 때문이다. 혹 내가 죽으면 아버지를 눈으로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인 생이란 더디게 진행되는 임신 과정이라고 누가 말했던가? 그렇다면 아무는 지금 아버지이신 어머니 태중에 있는 거다. 그래서 이렇게 그분을 몸으로 느낄 수 있지만 눈으로 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분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던가?
"머리가 시켜도 몸이 그대로 하지 않는 경우가 있더군요."
"몸이 마비되어서가 아니라 살아 있어서 그런 거다."
"생각은 누구를 비난하고 싶지만 입이 그것을 밖으로 내지는 않더라고요."
"그런 때가 지나면 생각으로도 누구를 비난하지 않게 될 것이다."
"예, 맞아요. 이젠 특별하게 누가 밉거나 역겹거나 하지 않아요. 그저 모두가 짠하고 고맙고 그럴 뿐이지요."
“하늘은 사사로이 덮지 않고 땅은 사사로이 싣지 않는다 하지 않더냐? 네가 잘 여물어 주어서 고맙다. 때 되면 우리 서로 얼굴을 마주 보게 될 것이다. 시간 없는 곳으로 태어나려면 시간 좀 걸려야 한다. 기다려라.”
예, 아버지. 


78.신성모독

"The greatest helper to others, I hate you, get away!" 엉터리 영어인지 모르나 옮기면 이런 뜻이다. "남들 돕는 더없이 위대한 자야, 네가 싫다. 꺼져라!"
달리는 열차에서 이 말을 듣는데 뜻이 단호하고 명료하게 다가온다. 누가 누구를 돕는다는 행위 자체가 신성모독이란 거다. 가장 진실에 가까운 거짓이기에 그래서 더욱 혐오스럽다는 거다. 하느님은 누구의 도움을 받아야 할 만큼 모자라거나 나약한 존재가 아니다. 누가 누구를 돕는다는 말이 아무의 사전에서 사라질 때가 되었다.
물이 산 아래로 흐르는 것은 만물을 이롭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모든 '위하여'가 삶의 구석에서 지워질 때가 되었다. 아멘.


79.무위無爲면 무위無違다

누구와 함께 다른 누구를 험담하면서 걷는데 그 다른 '누구'가 하필 조폭 두목이다. 게다가 그의 부하가 둘의 뒤를 바짝 따라오며 녹음하고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다. 둘이 현관에서 조폭한테 잡힌다. 그는 둘을 들어가지 못하게 막고 둘은 들어가려고 애쓰고 그러다가 어찌어찌 방 안으로 들어오는데 문밖에서 말소리가 들린다.
"이제 너희는 감옥 안에 있는 거다. 나오는 날이 제삿날이다!" 밖에서 대기하는 폭력배를 좀더 센 다른 폭력배로 물리칠 궁리를 하지만 도무지 방법이 없다. 이런 흉몽이 없다고 생각하다가 화들짝 놀라 꿈에서 깨어난다.
그렇다. 세상에 흉몽은 없는 거다. 거기에서 깨어나지 않는 꿈이 없기 때문이다. 무슨 일을 겪더라도 두려워할 것 없다. 깨어나면 한바탕 꿈인 것을. 하지만 생각이 있는 한, 위선자는 되 지 말자. 가장 진실에 가까운 거짓이 가장 고약한 거짓이다. 여수가 왜 당시 종교 지도자들을 향해서 '위선자'라는 화살을 날렸는지 알겠다.
이제부터 아무도 돕지 않을 것이다. 깨어 있는 한, 그럴 것이다. 옳다. 무위無爲면 무위無違다.


80.울타리와 감옥

텔런트 고두심 얼굴의 젊은 여자가 배우 앤서니 흡킨스 얼굴의 늙은 남자와 벤치에 앉아 있다. 둘이 이른바 '상식'의 울타리 안에서 무엇을 두고 씨름했는데 바야흐로 한쪽이 그 경계를 벗어나려고 한다. 아니, 그것이 무너질 때를 기다리고 있다.
젊은 여자 무릎에 도시락처럼 생긴 상자가 놓여 있고 그 안에 사랑이라는 이름의 시한폭탄이 들어 있다고 했다. 두 사람 말고도 여러 사람이 왔다 갔다 했지만 모두 기억에서 사라졌다. 이번에도 영문으로 된 문장 하나가 꿈의 말미에 떠오른다. 직역하면 이렇다. "윤리 안에서, 울타리 안에 있는 너를 본다. 사랑 안에서, 울타리 밖에 있는 너를 본다."
그렇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윤리가 필요하다. 울타리는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무너져야 할 때 무너지지 않으면 울타리가 아니다. 감옥이다.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만든 감옥에서, 맛볼수록 허망한 쾌락을 목마르게 탐하며 살고 있다. 하지만 결국은 고두심이 앤서니 흡킨스를 이길 것이다. 윤리보다 사랑이 더 작고 더 크기 때문이다.
상식은 필요하다. 하지만 무너져야 할 때 무너지지 않으면 상식이 아니다. 화석으로 된 도그마다. 그놈이 사람을 잡는다. 거대한 상식의 생성과 소멸이 되풀이되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한 걸음씩의 진화, 이것이 인류사다.


81.목숨 걸고

제주도라고 했다. 새끼에게 나는 법 가르치는 어미 독수리를 구경한다. 깎아지른 얼음벽 아래 푸른 바다가 물결친다. 어미가 얼음벽에 발톱을 박고 서서 벼랑 위 새끼에게 말한다. 엄마가 받아 줄 테니 겁내지 말고 뛰어내리라고, 새끼가 망설이다가 뛰어내린다. 어미가 날개 벌려 새끼를 받아 주는데 자칫 잘못되면 그대로 떨어져 둘 다 죽는다.
어미 독수리들이 벼랑 여기저기에 매달려 저마다 새끼들을 훈련하고 있다. 전체 광경이 멀리 조망되면서 그대로 아스라한 파노라마가 펼쳐진 다. 독수리가 현실에서 그렇게 새끼들을 훈련하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지만 꿈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장면이다.
곁에서 누군가 “음, 목숨들 걸었군” 한다. 다른 누가 말한다. “그러니 저마다 장엄한 인생이지. 사람이 목숨 걸지 않고 사는 법은 없으니까.” 이 소리를 듣는데 돌연 숨이 가빠진다. 효선이 흔들어 깨우며 와 숨을 그렇게 쉬느냐고 묻는다.
꿈에서 깨어나 생각한다. 사람이 목숨 걸지 않고 사는 법은 없다? 맞다. 그렇다. 무슨 일을 하더라도 그 일을 하다가 죽을 수 있는 게 사람이다. 길을 가다가 죽기도 하고 운전하다가 죽기도 하고 잠자다가 죽기도 한다. 다만 자기가 그러고 있다는 걸, 언제 어디서나 죽음을 코앞에 두고 있다는 걸 모르고 살 뿐이다. 이 무지가 사람을 태평하게 해 주기도 하지만 지금 여기를 옹글게 살지 못하게도 한다. 지금 이 일을 하다가 숨을 거둘 수 있다.
어떻게 건성으로 할 수 있는가? 이 친구를 만나다가 죽을 수 있다. 어떻게 아무렇게나 대할 수 있는가? 하루에도 몇 번쯤 이 엄연한 ‘진실’을 기억하는 것이 좋겠다. 오늘 저 사람 마지막으로 보는 걸 수 있다. 어떻게 함부로 상대할 것인가? 오늘 수업이 마지막 수업일 수 있다. 잊지 말자, 목숨 걸고 사는 인생인 것을.


82.절박한 순간에

아무가 이번엔 중년의 일본 여인이다. 두 남자 와 팀을 이루어 공사 현장에서 '시다'로 일한다. 자재들 나르고 흐트러진 물건 정돈하고 공사 마치면 청소하는 것까지 온갖 허드렛일을 눈에 띄는 대로 하는 거다. 때로는 셋이 손발을 맞추 어야 할 경우가 있다. 이번 일이 그렇다. 장년 몸통만한 돌을 여기에서 저기로 옮긴다. 셋이 힘을 모아 돌을 들었는데 발을 떼어 놓는 순간, 마치 살아서 굼틀거리는 짐승마냥 손에서 퉁겨져 나온 돌이 맞은편 남자 머리를 치며 땅에 박힌다. 남자가 눈을 하얗게 뒤집어 뜨고 몸을 부르르 떨다가 현장에서 숨을 거둔다. 아무 입에서 아버지, 어머니, 아버지, 어머니가 무슨 기 관총알처럼 쏟아져 나온다.
꿈이 이 정도로 벅차면 대개는 깨어나게 마련이다. 오늘 새벽도 그랬다. 깨어나 숨을 몰아쉬며 꿈인 것에 고마워 하고 그리고 그 절박한 순간 입에서 아버지, 어머니, 아버지, 어머니가 나온 것에 대하여 고마워한다. 간디가 그랬다지? 자기가 아직 연달아 살아 있는 동안에는 자기를 마하트마(위대한 영혼)라 부르지 말라고,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 자기 입술이 하느님을 르면 그때는 그 이름으로 불러도 되겠다고.


83.강아지

두 형제가 한 울타리 안에 따로 산다. 버림받은 강아지가 울타리 안으로 들어온다. 귀엽고 착하게 생겼다. 어느 집에서 그 강아지를 기를 것인지에 대하여 토론이 벌어진다. 이쪽은 이래서 자기네가 강아지를 길러야 하고 저쪽은 저래서 자기네가 강아지를 길러야 한다, 양쪽 집 주장이 모두 옳다, 한참 갑론을박하더니 누가 제안한다. “좋다. 우리가 강아지를 소유할 게 아니라 강아지가 우리를 소유하게 하자. 같은 음식을 장만해 놓고 강아지가 밥 먹는 집에서 강아지를 기르는 거다.” 다른 누가 박수치며 좋아한다. “그런 수가 있는 걸 몰랐군. 그렇게 하자. 강아지는 한 마리니까 두 집 밥을 한꺼번에 먹을 순 없겠지. 강아지가 어느 집 밥을 먹든지 그 집에서 강아지를 기르는 거다.” 기억나는 꿈은 여기까지다.
깨어나서 생각한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저러시는 걸까? 너가 나를 소유하여라. 나를 네 맘대로 하여라. 내 뜻이 따로 있지만 네가 털끝만치라도 뜻을 세우며 기꺼이 네 뜻에 따를 것이다. 나는 네가 잘못한 아우를 용서했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를 미워하겠으면 미워해라. 나는 네가 형제와 다투지 않고 사이좋게 지냈으면 좋겠다. 하지만 서로 다투겠다면 그렇게 해라. 그래도 너희는 오갈 데 없는 내 아들 내 딸이다. 너희가 내 앞에서 너희 뜻을 온전히 비우고 백기를 들 때까지 나는 너희를 위한 내 뜻을 유보하고 기다릴 것이다. 알아 두어라. 너희한테는 시간이 있지만 나에게는 시간이 없다는 것을···.
과연 그리될는지 알수 없지만 속으로 다짐한다. 누가 무슨 짓을 해도, 그를 막거나 배척하지 않으리라. 남은 세월이 있다면, 하늘처럼, 저 가없는 허공처럼, 이냥 이렇게 있기만 하리라.


84.노래와 늑대

아, 그 장엄하고 슬프고 힘 있고 아련한 멜로디! 꿈에서 깨어난 뒤에도 한동안 귓가를 떠나지 않는다. 빼앗긴 나라의 망명객이라고 했다. 곁에 아무도 없다. 홀로 황혼의 강 언덕에 서서 한 늙은이가 노래를 부르는데 누구라도 함께 부를 수 있을 만큼 익숙하지만 동요처럼 단순하고 쉬운 멜로디는 아니다. 볼가강 뱃사공 노래를 연상시킨다. 낯선 땅을 망명객으로 떠도는 한 인간의 모든 것이 슬프면서 힘차고 아련하면서 당당한 멜로디에 녹아 있다. 함께 부르지 않을 수 없는 노래였다.
밤중에 깨었다가 새벽에 다시 잠들었는데 황갈색 늑대들이 떼를 지어 찾아온다. 무서워서 피하다 보니 더 갈 데 없는 옥상이다. 안전한 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아걸기는 이제 글러 버렸 다. 늑대 대장이 눈을 번들거리며 옥상으로 올라온다. 두려움이 폭풍처럼 몸을 휩싼다. 하지만 다른 방도가 없다. ‘오냐, 이렇게 당하는구나! 올 테면 오너라. 늑대한테 물어뜯겨서 죽는 게 어떤 건지 마지막으로 한번 겪어 보자.’ 이런 마음이 날카로운 송곳처럼 몸을 뚫고 들어오면서 빙그레 웃음이 난다. 얼핏, 늑대도 웃고 있다는 느낌과 함께 꿈을 벗는다.


85.늦봄, 달빛

문익환 목사님이 미국 어느 대학신문에 영문으로 기고하셨다는 짧은 에세이를 읽는다. 이런 내용이다. “노예를 해방하신 하느님이 그렇게 해서 태어난 자유인에게 복종을 강요하신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정말 그렇다면 그건 하느님이 스스로 자기를 모독하는 행위다. 그분이 당신만큼 자유로워진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게 있다면, 당신처럼 기꺼이 누군가에게 자기를 내어 주는 사랑의 화신으로 되라는 것뿐이다. 물론 그 요구를 들어주느냐 외면하느냐, 이마저도 전적으로 인간의 몫이다. 자유인에게는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서 자신의 자유를 포기할 자유가 있고 그러므로 그는 죽어서도 자유다.”
아멘. 속으로 박수치다가 꿈에서 깨어난다. 모를 일이다. 생전의 문 목사님이 이런 내용의 글을 실제로 어디에다 쓰셨는지···
잠시 깨었다가 곧장 다른 꿈으로 들어간다. 평생토록 베토벤의 피아노를 들으며 살아온 어느 이름 없는 맹인 노파가 숨을 거두게 되었다. 한 피아니스트가 소문을 듣고서 그 노파 한 사람 을 위하여 베토벤의 「월광」을 연주한다. 노파가 눈물을 쏟으며 말한다. “저건 그냥 베토벤이 아니라 백건우 선생의 베토벤이야. 저렇게 연주하는 사람은 그분밖에 없어. 이게 어찌 된 일이 지?” 연주를 마친 피아니스트가 말한다.
“할머니, 그동안 고마웠어요. 덕분에 제가 이렇게 살았습니다. 이제 평안히 가십시오.” 노파가 묻는다. “고마운 건 이 눈먼 늙은이지요. 죽어 가는 노파에게 베토벤의 달빛을 비춰 준 댁은 뉘시오?” 피아니스트가 공손히 답한다. “예, 제 이름은 백건우라고 합니다.” 노파가 누렇게 썩은 이를 드러내며 보름달처럼 환히 웃는데 깜짝 놀라 꿈에서 깨어난다.


86.위로, 옆으로

이전에 아무가 「풍경소리」에 쓴 글을 읽는다. “질 수 없는 한 사람과 지지 않을 수 없는 무리의 대결이 십자가다. 전자는 져 줘서 이긴 사람이고 후자는 이겨서 진 사람들이다. 전자는 자기를 포함하여 누구와도 싸우지 않고 후자는 자기를 포함하여 모든 상대와 싸운다.” 송대선 목사가 예배당 출구에서 이 글을 수정할 수 없느냐고 묻는다. 그게 안 되면 설명이 라도 해 달란다. 아무가 말한다. “설명? 그건 불가능일세. 신비는 언외言外라, 부활은 선포되는 거지 설명될 수 있는 게 아니거 든….” 기억나는 꿈은 여기까지다.
깨어나서 생각한다. 십자가는 역사적 사건이기에 설명이 가능하다. 그것은 한 사람 예수가 침묵으로 자기 아버지와 아우성치는 어둠의 무리한테 져 준 사건이다. 누구와도 싸우지 않으려다가 외로이 죽임당한 예수, 그의 죽음은 역사의 끝이 아니다. 부활로 열리는 신비의 문이다. 땅에서 예수가 한 일은 위로 아버지 하느님과 옆으로 어둠의 무리한테 져 주는 것이었다. 져 주는 것은 지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강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누구든지 살고자 하는 자, 모든 상대와 싸워 이기려 하는 자는 죽을 것이요 누구든지 죽는 자, 모든 상대한테 져 주는 자는 살 것이다.” 이 말씀의 완벽한 실현이 예수의 십자가요 그의 부활이다.


87.스스로에게

중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아이들과 중년 이상 어른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다. 아무가 의견을 내어, 어른과 아이들 수가 비슷한데 마주 앉아 이야기하면 어떻겠느냐 하니 한 아이가 이냥 이대로 하잔다. “오케이 그렇게 하자.” 좌석 배치 문제는 일단락되고 이번에는 토론 주제를 정하는데 경일 신부와 민해 목사의 생각이 다르다.
의논 끝에 선배인 경일 신부의 제안대로 ‘얽힌 인간관계를 끝장내는 한 가지 방편’을 모색하기로 한다. 저마다 돌아가며 자기의 방편을 말하는데 들으면서 “좋다. 근사하다.” 고개를 끄덕인 건 생각나는데 꿈에서 나오자 약속이나 한듯 모두 지워졌다. 아무의 말만 기억난다.
“일정 때 종로패 두목이던 김두환의 별명이 ‘이찌방’이란 말을 들었다. 누구와 붙어도 주먹 한 방이면 끝난다고 해서 얻은 별명이라더라. 내게도 세상을 굴복시킬 ‘주먹 한방’이 있다. ‘나 죽는다. 너 살 아라’ 이렇게 말하고 그대로 하는 거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며 그랬듯이···.”
경일 신부와 민해 목사에게 써 준 글씨 ‘主居羅任?'’(주거라 임마)가 생각난다. 아무래도 회수해야겠다. 저 아닌 다른 누구에게 줄 글씨가 아니다.


88.안팎

이순신 장군 이름이 꿈에서는 이성순이다. 이성순 장군 일대기를 쓰고 제목을 붓으로 적는데 지나가던 웬 여인이 뭐라고 빈정거린다. 벼락같이 화를 내며 붓을 여인에게 던지니 붓이 송곳처럼 여인 몸에 박힌다. 여인은 비명을 지르고 순간 겁도 나지마 미안하기도 해서 여인에게 다가간다. 혼절한 여인 겨드랑이에 붓이 박혀 있다. 뽑아 드는데 붓이 아니라 진짜 송곳이다. 그것이 박혔던 자리에서 피 대신 맑은 물이 방울방울 맺히며 흘러내린다. 여인은 몸을 부르르떨며 혼절에서 깨어나고 아무는 깜짝 놀라 꿈에서 깨어난다.
사람의 감정이 같은 물건을 다른 물건으로 만드는 줄 비로소 알겠다. 분노가 붓을 송곳으로 만들면 사랑은 송곳을 붓으로 만드는가? 아마도 그럴 것이다. 역시 문제는 사람 손에 무엇이 들렸느냐가 아니라 그 가슴에 무엇이 담겼느냐다. 그런데 왜 이순신이 꿈에서는 이성순이지? 저쪽 어디에서 누가 말한다. “아 무면 어때?” 여기서는 사람 이름이 별것 아니다.


89.원칙

초등학교 동창 광식이, 그에게 묻는다. “넌 법을 어긴 적 없니?”
그가 말한다. “그래, 없다.”
“그러면 법을 어기고 용서받아 본 적도 없겠구나?”
“응, 없어.”
“참 딱하다. 어쩌다가 그리되었니?”
“법 어기지 않고 사는 데 목숨 걸었거든.”
“음, 그랬다면 그럴 만도 하다. 그러니 법을 어긴 사람들 용납이 안 되겠지?”
“용납은커녕 이해도 되지 않아.”
“상대하기도 싫겠지?”
“그래, 역겨워.”
“그런데 먼 옛날 너 같은 사람들이 스스로 자기네를 일컬어 바리사이라고 부른 건 알고 있니?”
‘바리사이’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광식이 귀에 철커덕 자물통 채워지는 소리가 느껴지고 급히 꿈에서 깨어난다.
효선이 빵 냄새 풍기며 다가와서는 여러 가지로 생각한 결과 빵 하나에 2천원으로 값을 정하기로 했단다. 잘했다고, 값을 매기는 건 소비자 몫이고 따라서 물건값을 생산자가 정하는 건 법도가 아니라는 원칙에 어긋나긴 하지만, 그러는 것이 여러 사람 편케 하는 길이라면 어겨도 좋다고, 혼쾌히 말해 준다.
효선 왈, 빵값을 정하고 나자 갑자기 길모퉁이에 서있는 초라한 예수님이 생각나서 한참 울었단다. 흠, 길모퉁이의 초라한 예수라! 좋은소식이다. 복음이다. 주어진 길 제대로 가는 것 같다.


90.돌아감

올림픽이다. 여러 나라 사람들이 모였다. 아무가 개회사를 한다. “지구별에 수많은 동물들이 살지만 누가 더 빠르고 누가 더 높이 뛰어오르는지를 겨루며 노는 동물은 인간밖에 없다. 이번 올림픽을 서로 가까워지기 위해서 하고 그래서 우리가 서로 가까워지면 놀이를 잘한 거고 그렇지 않으면 시간과 자원의 낭비는 물론이요  짐승만도 못한 존재로 추락한 거다. 우리가 이 놀이로 지상에서 적과 분쟁을 청산하고 모두 한 형제자매로 돌아갈 의지나 꿈이 없다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다. 폐회식 때려치우고 각자 집으로 돌아가자.”
 깨어나면서 드는 생각, 어찌 올림픽만 그러랴? 우리가 서로 친목하고 한 형제자매임을 확인하는 방편이 아니라면 정치는 뭐고 문화는 뭐고 종교는 또 무슨 낭비란 말인가? ‘반자도 지동’反者道之動이라, 돌아가는 것이 길의 움직임이라고 했다. 근본에서 나 아닌 게 없음을 깨치고 그리로 돌아감이야말로 사람이 한세상 살면서 추구해 볼 만한 가치 있는 일 아니겠는가?


91.베스트셀러

실제로 그런 데가 있는지 모르겠으나 만주 땅 송정 마을이라고 했다. 독립군 하나가 그곳에서 요즘 말로 히트를 쳤다. 무엇으로 어떻게 성공을 거두었는지 꿈에서는 잘 알았는데 깨고 나니 모르겠다. 아무튼 그에 대한 소문이 퍼지면서 많은 독립군들이 송정으로 모여들었다. 어느새 독립운동이 인기 있는 상품으로 되었고 어떤 사람은 독립운동 한 사발에 3천원씩 받아서 하루에 30만 원을 번다. 꿈에서도, “세상에 독립운동을 팔다니, 돈으로 바뀌지 않는 물건이 없구먼” 탄식하다가 깨어난다.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효선이 들어오더니 옷을 챙겨 입으며 빵 구우러 부엌에 간단다. 그러면서 자기가 만난 강원도 정선 빵장수 얘기를 들려준다. 천 원에 세 개씩 빵을 팔아 장날 하루 68만원을 벌었단다. 그러니 대충 계산해도 여러 종류의 빵을 하루에 이천 개쯤 기름에 튀기고 불에 구운 셈이다.
빵이야 그럴 수 있다지만 세상에 독립운동을 팔다니! 말도 안 된다. 터무니 없는 꿈이라서 그런가? 아니다! 독립운동은 관두고 성경 말씀도 팔아먹고 그 말씀에 대한 자기 생각까지도 팔아먹는 세상이다. 머릿속 생각을 팔아먹는 현실에 견주면 독립운동을 파는 꿈은 차라리 낭만적이다.
빵 구우러 가면서 효선이 말한다. 요즘 자기가 배우는 건 어떤 상황이 코앞에 닥쳐도 기꺼이 부드럽게 받아들여 그것을 더 나은 상황으로 바꾸는 기술이라고···.


92.(-1) (-1)

참새 한 마리를 포함하여 비둘기, 꿩, 오리, 제비 등 예닐곱 마리 새들이 보이지 않는 울타리 안에서 놀고 있는데 어쩐지 분위기가 무겁고 어둡다. 어딘가에서 참새 한 마리가 포르르 울타리 안으로 날아들어 온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울타리 안에 참새는 여전히 한 마리뿐이고 울타리의 분위기가달라진다. 무겁고 어둡던 새들이 돌연 가볍고 밝아진다. 무슨 영문인지 궁금한데 누가 속삭인다. "날아온 참새가 암놈인 데다가 더하기 아닌 곱하기로 들어왔거든."
무슨 말인지 금방 알겠다.  암놈이니 플러스(+)가 아니라 마이너스(-)다. 마이너스로 더하지 않고 곱했으니 ‘-참새’ 한 마리가 새들의 울타리에 더하기 아닌 곱하기로 들어온 거다. 무엇에 마이너스 하나(-1)가 더해지면 양量은 줄지만 질質은 그대로다. 그것이 곱해지면 양은 그대로고 질이 달라진다. 바야흐로 ‘여성’(陰, 마이너스)이 세상에 더하기 아닌 곱하기로 들어오는 시대가 열린다는 얘긴가? 더하기로 들어오는 건 거죽으로 만나는 거고 곱하기로 들어오는 건 속으로 만나는 거다. 박수 치며 “그러니까 시방 그렇다는 거야? 아니면 앞으로 그렇게 된다는 거야?” 묻다가 꿈에서 깨어난다.
묻기는 했지만 답은 듣지 못했다. 어쩌면 둘 다겠지. 그렇다. 틱낫한이 만든 영어 ‘인터빙 Interbeing’속에 인간 구원의 길이 있다. 모두가 서로 안에 있는 거다. 아니, 그 진실을 몸으로 깨치는 거다.


93.노자처럼

큰일이다. 만나기로 한 장소에 먼저 가 있을 참이었는데 엉뚱한데 앉아서 버스를 기다리다가, ‘맞아. 거기가 여기서 지척이지. 걸어가면 될 것을 멍청하게 오지도 않는 차를 기다리고 있다니’ 하는 생각이 들어 뛰다시피 화물차 정거장으로 걸어간다. 저만큼 차가 서 있고 집사람이 차 곁에서 기다리고 있다. 미안한 마음으로 숨 가쁘게 달려간다. 걸상에 앉아 있는 화물차 늙은 기사가 한마디 한다. “천천히 하시오. 노자老子처럼 생각합시다.” 집사람도 웃으며 “괜찮아요. 노자처럼 생각해요” 라고 말한다.
열린 화물칸에서 철제 침대를 맨손으로 번쩍 들어 내려놓는다. ‘아니, 내가 이렇게 힘이 센가?’ 속으로 놀란다. 하지만 그 순간의 고마운 마음에 견주면 아무것도 아니다. 화물차 늙은 기사가 고맙고, 웃어주는 집사람이 고맙고, 천지 사 방이 온통 고맙다. ‘노자 죽은 지 수천 년인데 여전히 살아서 참 좋은 일 많이 하시는구나. 과연 신선으로 몸을 바꾸어 승천하셨구나’, 고맙고 고마워 눈물이 나려고 한다. 그러다가 문 여는 소리에 꿈에서 깨어난다.
효선이 방으로 들어오며 활짝 웃는다. 생각보다 말이 먼저 나온다. “하느님,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예, 노자를 말로만 하지 않고 노자처럼 생각하며 살겠습니다. 아니, 그렇게 살도록 저를 도와주십시오. 아멘.”

94.단언

웬 노인이 책 세 권 손에 들고 묻는다. “이것이 무엇이냐?” “책입니다.” “몇 권이냐?” “세 권입니다.” 노인이 말한다. “아니다. 상중하로 되어 있는 알렉상드르 뒤마의 「몽테크리스토 백작」 한 권이다.”
다시 책 두 권 들고 묻는다. “이것이 무엇이냐?” “책입니다.” “몇 권이냐?” “두 권입니다.” 노인이 말한다. “아니다. 상하로 되어 있는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다.”
다시 책 한 권 들고 묻는다. “이것이 무엇이냐?” “책입니다.” “아니다. 책 모양으로 만든 도시락이다.” 노인이 웃으며 말한다. “무엇에 대하여도 단언하지 마라. 그냥 무엇처럼 보인다고 해라. 그게 정답이다.”
이 말을 들으며 슬그머니 꿈에서 깨어난다. 맞다. “이건 이것이다”라고 단정하여 말할 수 있는 무엇이 하나도 없는 데가 우리 사는 세상이다. 명심하자. 그냥 그렇게 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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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닭

중학교나 졸업했을까? 앳된 소년이 시장에서 닭고기를 구워 팔겠단다. 효선이 골목 약방으로 들어간다. 약방 주인이 약만 파는 게 아니라 그 부근 상가의 터중대감이라, 아이를 위해서 가게 자리를 알아보겠다는 거다.
효선이 약방으로 들어간 뒤에 아이를 붙잡고 묻는다. “닭고기 맛있냐?” “예, 맛있어요” “닭고기를 구우면 행복하냐?” “예, 무지 행복해요.” “그거 다른 사람들도 먹었으면 좋겠니?” “좋지요. 얼마나 맛있는데요!” “닭은 있어?” “예.”
아이가 병아리 한 마리 들어 보인다. “화덕 은?” “여기 있어요.” 골목 한구석에 흙으로 빚어 만든 화덕이 보인다.
아이에게 말한다. “당장 시작해라. 가게 자리 알아볼 것 없다. 닭고기 있고 화덕 있고 닭고기 좋아하는 너와 너처럼 닭고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망설일 게 무엇이냐?”
아이에게 다시 묻는다. “닭고기 팔아서 돈 벌고 싶으냐?” “예. 돈 많이 벌고 싶어요.” “돈 벌려고 닭고기 굽지는 마라. 닭고기가 좋아서, 그걸 사람들과 나눠 먹는 게 좋아서, 그래서 닭고기를 구워라. 그러면 돈 많이 벌게 될 거다. 잊지 마라. 돈보다 행복이 먼저다. 돈을 벌어서 행복한 게 아니라 행복하게 일해서 돈이 들어오는 거다.” 효선이 약방을 나서며 명랑하게 “마침맞은 가게가 있대!” 소리치는 바람에 꿈에서 깨어난다.

96.없어도 되는 것

석회암과 화강암이 섞여 있는 동굴 바닥에 지 렁이 아닌 지렁이들과 구더기 아닌 구더기들과 번데기 아닌 번데기들이 비빔밥처럼 뒤섞여 뭉쳐 있는데, 그것들 위에다가 기도실을 포함한 작은 토굴을 지어야 한단다. 휘발유를 끼얹어 모두 테워 버리고 나서 그 위에 짓자는 의견과 살아 있는 상태로 흙을 두껍게 덮고 그 위에 짓자는 의견이 팽팽하게 맞선다. 그래서 어찌 되었는지 (꿈은 이어졌지만)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동굴 정면에 자그마한 구멍이 있어 그 구멍으로 들어가면 천연 토굴일 텐데 왜 새삼스러이 집을 짓자는 건지 혼자서 의아해하던 건 생각난다.
뒤숭숭한 꿈이지만, 그러니까 무슨 일이든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면 하지 말라고, 없어도 되는 것이면 없는 게 최선이라고 말해 주는 것 같다. 선생님이 가끔 쓰시던 문장이 생각난다. 산불여무山不如無라, 산도 없느니만 못하다.


97.냉수

북산北山이 신문을 펼쳐 들고 낭랑한 목소리로 말한다. -내 친구 이오二吾가 오십오년 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는데 주책없이 올해 또 신춘문예에 응모하였다. 이제부터 내가 읽을 테니 잘 들어 보아라. ‘시우야, 시우야, 시시우우야, 일찍이 모악母岳 부인 너를 두고 노래하였지. 시우야, 시우야, 시시우우야, 시우야, 시우야, 시시우우야···.’ 북산은 천연덕스럽게 같은 말을 되풀이하고 이오는 슬그머니 꿈에서 깨어난다. 짧은 꿈이다.
시우時雨는 가뭄으로 대지가 목마를 때 마침맞게 하늘에서 내리는 비다. 시우의 생명은 때맞추어 내리는 데 있다. 하지만 제때에 내린다 해도 그 양이 모자라거나 넘치면 그 또한 재앙이 다. 사람이 누구에게 시우로 존재하려면 먼저 상대의 형편을 살피고 나중에도 상대의 형편을 살펴서, 줄 때 주고 거둘 때 거둘 줄 알아야 한다. 아, 천하에 누가 과연 이 일을 제대로 할 것인가?
목이 마르다. 냉수 한잔 마시고 다시 생각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없다. 스스로 세상에 시우 되기를 포기하라. 포기하고 너를 온전히 하늘에 맡겨라. 땅이 저를 하늘에 맡기고 하늘이 저를 길에 맡기고 길이 저를 자연에 맡기듯이, 너를 놓아 버려라.


98.돈값, 사람값

 무슨 신문사인지 방송국인지 기자 고희범을 만나러 간다. 희범은 자리에 없고 선배이자 사장인 아무 장로가 반가이 맞으며 오랜만에 점심이나 같이하잔다. 서너명이 어울려 식당에서 음식을 시키는데 귀한 후배가 왔으니 한상에 30 만 원짜리 정식으로 하잔다. 무슨 밥을 한 그릇에 30만 원씩이나? 그런 밥 안 먹겠다고 하자 장로가 웃으며 말한다. "이 목사, 어쩌겠나? 돈으로 사람의 품위가 결정되는 세상인걸."
그의 징글맞은 웃음 앞에서 치밀어 오르는 분통을 터뜨리며 "돈값 오르는 만큼 사람값 떨어지는 거야!" 외치다가 꿈에서 깨어난다. "헉" 소리가 입에서 나온다. 효선이 놀란 목소리로 왜 그러냐고 어디 아프냐고 묻는다. "음, 꿈꿨어." "그 꿈 좀 안 꾸면 안되나? 꿈꾸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해요“ 여전히 꿈결이지만 웃고 만다.
다시 꿈속이다. 깊은 산골 어느 부부의 작은 집에서 젊은이, 늙은이 스무명 남짓 경을 읽고 명상하고 산책도 하며 이 세상 어떻게 살 것인지를 공부한다. 조용하고 아늑하다. 부부가 살림 하는 안채로 들어가는데 사방이 거미줄 천지다. 호박녕쿨이 벽을기어오르고 돌절구와 맷돌이 마당에 놓여 있다. 가난하다. 그리고 풍성하다. 헤어지는 자리에서 누가 말한다. "관옥 선생 기분이 어떠십니까?" 질문받은 건 알겠는데 뭐라고 답했는지는 생각나지 않는다. 어떻게 꿈에서 나왔는지도 모르겠다. 누가 곁에서 속삭이듯 묻는다. "유다가 예수의 목숨 팔아넘긴 것과 목사가 그의 가르침 팔아먹는 것이 어떻게 다른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겠다. 부끄럽다. 송구하다. 몸둘 바를 모르겠다.


99.연민

"이건 삼류 소설이군" 하면서 꿈을 꾼다.
어느 목사의 아내가 살해되었다. 살인범은 오랜 세월 목사를 짝사랑해 온 처녀다. 처녀가 세 통의 편지를 목사에게 보냈는데 세 통 모두 봉투째 반송되었다. 내용을 읽어 보지 않았다는 표시다. 처녀가 네 번째 편지를 우체통에 넣고 목사의 부인을 죽였다. 네 번째 편지는 이런 내용이다. "내가 당신에게 바란것은 단둘이 마주 앉아 차 한잔 마시자는 것이 전부였다. 그런 데 당신은 그것을 세 번 다 거절했다. 당신이 그러는 이유는 당신 부인 때문일 거다. 그러므로 나는 당신 부인을 죽이고 나도 죽겠다. 내가 세상에 더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
꿈속에서 누군 가에게 말한다. "목사가 굳어졌군. 깜냥에 유혹을 피한다고 한 것이 사람을 그것도 둘씩이나 죽이고 말았어. 봉투 열어 읽어 보고, 정중하고 부드럽게 답장을 보냈더라면 그런 비극이 벌어지진 않았을 텐데···."
이어서 다른 꿈이다. 선후배 목사들과 무슨 선교 여행이라는 걸 갔는데 말이 선교지 홍청망청 관광이다. 마지막 날 고급 식당에서 이른바 뒤풀이를 한다. 평소에 선교 헌금을 많이 내는 장로가 식당 주인이란다. 어둠침침한 홀에 사람이 득실거리고, 칠레산 고급 와인과 거창하게 장식된 칠면조 구이가 나온다. 그동안 참고 참던 아무가 이윽고 폭발하여 "이 우라질 것들아, 너희가 목사냐? 더이상 너희 범죄행위에 동참 못하겠다. 잘먹고 잘 살아라" 소리치는 바람에 어떤 후배는 울고 어떤 선배는 화를 내고 파티가 난장판으로 바뀐다. 쫓겨나듯 식당 밖으로 나오며, 슬그머니 화장실 가는 척 자리 뜨면 될 건데 괜히 큰 소리로 난리를 피웠다고 혼자 민망해하다가 꿈에서 깨어난다. 뭔가? 아직도 깊은 속 어디에 세상을 향한 경직된 분노 따위가 있다는 얘긴가? 늘 조심히 깨어 있어야겠다. 오늘의 메시지, 어지러운 세상을 분노 아닌 연민으로 바라볼 것, 모두가 본인의 다른 모습이라는 진실을 잊지 말 것.


100. 안식일

어디서 성교육 강의를 듣는다. "일주일에 엿새는 남성 상위, 하루는 여성 상위로 성교하는 게 옳다. 슬기로운 사람은 이 말의 의미를 스스로 알 것이다." 꿈에서 깨어나는데 과연 그 의미가 스스로 다가온다.
모든 사람이 남녀 불문 흙에서 왔다가 흙으로 돌아간다. 흙의 날인 토요일이 한 주일의 시작이며 끝이다. 한 사람의 생애란 토요일에 비롯되어 토요일로 마감되는 여정이다.
시작하는 토요일은 씨앗, 마감하는 토요일은 열매다. 한 그루 나무의 생애가 씨에서 열매로 가는 여정이듯, 한 사람의 생애는 태어남에서 죽음으로 가는 여정이다.
그 사이를 해, 달, 불, 물, 나무, 쇠로 살아간다. 해, 달, 불, 물, 나무, 쇠는 그로써 사람이 살아가는 것들이고 흙은 사람이 거기에서 왔다가 거기로 돌아가는 바탕이다.
유대교의 안식일은 엿새 일하고 나서 쉬는 하루가 아니라 엿새 일할 수 있게 해 주는 하루다. 엿새 일하려고 하루 쉬는 거 아니라 하루 쉬려고 엿새 일하는 거다. 그날은 엿새를 마감하는 날 이 아니라 엿새가 비롯되는 날이다.
한 주일이 안식일에 비롯되어 안식일에 마감된다. 해, 달, 불, 물, 나무, 쇠는 끝없이 움직이고 흙은 언제나 고요하다. 움직임은 남성이고 고요는 여성이다. 모든 움직임이 고요에서 왔다가 고요로 돌아가므로 여성이 모든 남성의 시작이자 마감이다. 그런즉 일주일의 엿새(일, 월, 화,수, 목, 금)는 성교를 남성이 주도하고 하루(토)는 여성이 주도하는 게 맞고, 시작이면서 마감인 그 하루가 다른 모든 날의 바탕으로 존중받고 우대받는 것이 옳다···.


101.쉼

여태까지 경험으로 알게 된 바로는 사람이 쉰다는 게 무슨 작대기처럼 아무 일 하지 않고 가만있는 것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 알맞게 하고 거기에서 오는 기쁨과 보람을 누리는 것이다.
그런즉, 하고 싶은 일 알맞게 하면서 기쁨과 보람을 누리는 모든 날이 안식일이다. 천국엔 안식일이 따로 없을 것이다. 날마다 안식일일 테니까.
과연 공이 색이고 색이 공이고, 무위가 위고 우가 무위고, 남성이 여성이고 여성이 남성이고, 위가 아래고 아래가 위라는 진실이 일반 상식으로 통하고 받아들여지는 새로운 영성의 세대가 밝아 올 것인가? 


102.아늑하고 고요한 방

사람이 늙어 가면서 단단하게 좁아지기는 쉽고 물렁하게 넓어지기는 어려운 건가? 문학평론가 고故 이 아무 선생, 생전에 분명하고 올곧기로 세상에 널리 알려진 분이다. 꿈에 이 선생 집으로 초대를 받았다.
시골의 아담한 초가집이다. 얼굴 익은 사람들과 낯선 사람들이 모여 잔치를 벌인다. 이 선생이 벗들과 웃으며 환담하는데 그의 어린 아들이 어머니 말을 그대로 전한다.
 "그렇게 웃으니까 참 좋아요. 평소에도 자주 부드럽게 웃는 얼굴 보고 싶어요.” 순간 이 선생이 날카로운 가위로 가죽 가방을 소리 나게 찢으며 벌떡 일어나더니 눈을 부라리고 어디론지 가버린다. 아무가 앞을 막아서며 "선생님, 이러지 마세요. 사람이 끝을 잘 마무리해야지, 이러시면 안됩니다" 하고 만류하자 그가 눈물을 글썽이며 말한다. "이 목사, 난들 이러고 싶겠소? 집사람만 보면 짜증부터 나는 걸 어쩌란 말이오?"
문득 장면이 바뀌고, 여기는 이 선생이 하숙하며 집필하는 방이다. 천으로 된 작은 칸막이들 속에서 공장 다니는 처녀들이 잠을 자는데 그사이를 복도처럼 통과하여 맨 끝에 있는 작은 방 아늑하고 고요하다. "흠, 어머니 자궁 같군!" 고개를 끄덕이다가 꿈에서 깨어난다.
세상을 향하여 웃기는 쉽지만 아내를 향하여 웃기는 쉽지 않은 게 보통이다. 잘못되어도 많이 잘못되었다. 어떻게 하면, 안으로 들어갈수록 넓어지는 물리物理에 순順하여, 늙을수록 사람이 너그러워지고 부드러워질 것인가? 길은 하나다. 살아서 다시 한번 어머니 자궁에 들어갔다 나오는 거다. 예수의 말로 하면 죽기 전에 죽어 거듭니는 거다. 그러면 저절로 부드러워지고 괜히 너그러워진다. 따로 애쓸 것 없다.


103.후회와 감사

멀리 동해 바다가 언덕들 너머로 내려다보이는 강릉 무슨 호텔. 버클리 대학 교수이자 시인으로 세간에 알려진 유민 박사가 귀국하여 이른바 '사인회'라는 걸 한다. 유리창 너머로 그에게 묻는다. "부인은 잘 계시는지?" 버클리에서 만났던 여리고 헬쑥한 모습의 그녀가 생각난다.
유 시인이 울먹울먹 한다. "그동안 심해져서 두 번 다녀왔는데 아무래도 다시 가야 할 것 같습니다." 그녀가 두 번 다녀왔다는 곳은 정신병원이다. 이 말을 곁에 있던 여자들이 함께 듣는다.
꿈인데도 후회스럽다. 그런 답이 나올 줄 알았으면 유리창 너머로 물어서 그가 큰 소리로 말하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유민은 어느새 몸을 감추었고 그를 따로 만나 손이라도 잡아 줘야겠다고 호텔 아래위층을 오르내리지만 보이지 않는다.
얼핏, 둘째가 떠 준 모자를 쓰고 커피숍에 앉아 있는 관옥이 보인다. '흠, 제가 저를 훔쳐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지 생각하며 그를 창 너머로 바라보는데 후배 목사 송 아무가 다른 친 구들과 나란히 그에게 가서, "선생님, 절 받으시겠습니까?" 하고 묻는다. "아니, 받지 않겠네."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말투가 단호하지만 무슨 감정이 섞인 건 아니다.
꿈에서 깨어나는데 어제 산책길에 ㅁ메모해 둔 문장이 생각난다. -한평생 살면서 스승은 여러 분 모셨지만 제자는 한 명도 두지 않았다. 한두 차례 그럴번 했으나 큰스승께서 유혹에 넘어 가는 것을 막아 주셨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영락없이 추잡해졌을 것이다. 오직 감사!


104. 성패

퀴리 부인이라고 했다. 조수 겸 동료인 애인(분명치 않다. 그렇다는 소문만 들린다)과 함께 무슨 화학 실험을 한다. 결과는 실패다. 그녀가 국립 물리학회와 후원자들에게 보고서를 제출하 는데 단 한 줄이다. "결과는 예측한 대로 되지 않았으나 이번 실험으로 두 가지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였음. 끝."
'간결하다. 멋지다. 과연 노벨상 받을 만한 천재다!' 속으로 박수치며 감탄하다가 꿈에서 깨어난다. 이런 사람 사전에는 '실패'라는 단어가 없겠다. 물론 '후회' 라는 단어도 없을 것이다. '용서'는 있을까? 아마도 '용서를 구하다'는 있을지 모르나 '용서하다'는 없을 것이다. 무슨 일에 실패했느냐, 성공했느냐를 결정짓는 것은 그 일의 결과가 아니라 그 일을 한 본인과 주변 사람들 마음이다. 들판의 초목은 실패를 모른다.


105.경멸하는 마음

문학한다는 젊은이들과 함께 어디를 간다. 저마다 소통되지 않는 말을 시끄럽게 지껄이며 행동거지가 어지럽다. 그중 하나가 다가와서는 어깨를 두 팔로 감고 느물느물 말 한다. "존경하는 선생님, 저도 아동문학을 하는데요, 세상이 깜 짝 놀랄 만한 동화를 쓸 겁니다." 이 말을 듣는데 기분이 고약하다.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한다. "자네, 이따위로 술에 취해 길바닥에서 해롱거리며 동화를 쓴다고? 동화는 관두고 인생 자체를 모독하지 말게. 자네를 경멸하네!"
자신의 격한 말에 잠깐 깨어났다가 다시 꿈속으로 들어간다. 이번에는 어느 모임에서 도道가 하나를 낳고 하나가 둘을 낳고 둘이 셋을 낳고 셋이 만물을 낳는다는 노자의 말을 강의 한다. 하나는 옹근 통합이고 둘은 음과 양이고 셋은 음양과 그것이 곱하기로 만나 생기는 사물이고 그것들이 세상 만물을 이룬다. 이 강의에 대한 소감을 여러 사람이 나누는데 그들 가운데 캐나다 오강남 교수가 섞여 있다. '저분이 언제 귀국하셨던가? 그런 줄 모르고 공자님 앞에서 문자 썼군.' 은근히 켕기다가 꿈에서 깨어난다.
뭔가? 여전히 누구를 경멸하는 마음이 남아 있다는 건가? 그렇다면 아직 멀었다. 저 대자유의 아바타로 되려면, 그리하여 아미타 미소로 세상을 빙긋이 바라보려면··· 세상 만물이 셋에서 오고 셋이 둘에서 오고 둘이 하나에서 왔으니 알고 보면 세상에저 아닌 것이 없거늘 제가 저를 경멸하다니, 이야말로 자신에 대한 모독 아닌가? 삼가 입 다물자.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지 말고.


106.비밀

강원룡 목사님이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작별 인사를 하신다고 해서 댁으로 간다. 많은 사람이 모여 웅성거린다. 목사님은 모습을 보이지 않고 그의 아들이라는 젊은이가 아버지의 평생 비밀이 간직된 함函을 찾는다며 이리저리 돌아다닌다. 얼굴이 아무와 면식이 있는 목사님 아들이 아니다. 태도가 명랑하고 밝다. 꿈에서 깨어날 때까지 함은 발견되지 않았다. 무슨 사건들이 분명 있었는데 모두 기억에서 사라졌다. 그러니 목사님의 평생 비밀이 간직된 함이 집안 어디에 있다는 사실만 확인되었을 뿐이다.
깨어나면서 드는 생각, 비밀은 그것이 어디에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알 때 비로소 비밀이고 그래서 나름대로 힘이다. 하지만 그 내용이 밝혀지면 더이상 비밀이 아니고 따라서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한다. 비밀은 비밀로 덮어 두자. 그러나 예수 이르시기를 밝혀지지 않는 비밀이 없다고 하셨거니와, 술래잡기의 술래가 발견되기 위하여 숨듯이 비밀은 언제고 밝혀지기 위해서 비밀로 감추어져 있는 거다. 따라서 예수 부활의 신비가 밝혀질 날도 반드시 온다. 하지만 아마도 그분처럼 살고 그분처럼 죽지 않는 사람한테는 그날이 마냥 지연될 것이다.


107.낯선 사람

시간과 공간의 차이를 조금씩 두면서 두 문장을 차례로 읽는다. 첫 문장은 책에서 읽고 둘째 문장은 벽에 걸린 포스터에서 읽는다.
1.너는 너로부터 낯선 사람을 받아서 살고있는 너다. 그 사람을 가져라.
2.수지가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건 종種개념이고, 수지가 전의 수지가 아니라는 건 유類개념이다.
깨어나면서 드는 생각, 내가 다른 사람이 아니어서 생기는 문제의 답은 내가 다른 사람으로 바뀌는 데 있다. 종개념에서 파생되는 인생사 제반 문제를 푸는 열쇠는 유개념으로 들어가는 데 있다. 아인슈타인 말대로, 문제를 일으킨 사람 의식으로는 문제를 풀수 없기 때문이다.
바오로의 고민, 즉 스스로 바라는 일은 하지 않고 바라지 않는 일을 하고있는 나에 대한 고 민을 푸는 열쇠는, 그러는 내가 아니라 나보다 의식 수준이 높은 누구한테 있다. 생명의 본질은 변화다. 살아 있다는 건 달라진다는 거다. 네가 주지 않고 살아 있는 한, 너는 달라지지 않을수 없다. 문제는 네가 어떻게 달라지느냐인데 그것도 크게 문 없다. 네가 그렇게 하루하루 살다 되고 싶은 사람을 가슴에 품고서 하루하루 살다보면 어느날 문득 거울에 비친 너한테서 그를 보게 되리라.


108. 법

오랜만에 소설 같은 꿈이다. 때는 고려 말엽? 성주城主가 절간 대들보로 쓸 만한 나무토막 하나를 아무에게 주면서 말한다. "이것을 성문 안쪽 마당에 세워서 묻어라." 아무가 나무와 함께 받은 연장은 장도리처럼 생긴 작은 망치 하나다. 나무를 망치로 박는데 아무리 힘껏 쳐도 땅으로 들어가는 것 같지 않다. 그래도 성주이자 스승인 스님의 명을 거역할 수 없다. 있는 힘을 다해서 망치질을 하는데 나무 한편으로만 망치 가 쏠린다. 그러자 마치 둘로 쪼개진 것처럼 나무 한편은 땅에 묻히고 다른 편은 그냥 남아 있다. 하지만 나무가 쪼개진 건 아니다. 망치를 묻히지 않은 편에 내려치자 기다렸다는 듯이 푹 박힌다. 그 뒤로는 나무 박는 데 별로 힘이 든 것 같지 않다. 
이윽고 나무가 땅 위로 한 뼘쯤 남았을 때 스님이 말한다. "됐다. 그만 박아라. 애썼다. 장차 이 나무토막이 많은 사람 살릴 터인즉, 누구는 이것에 걸려 넘어질 것이고 누구는 이것을 박차고 날아오를 것이다." 중간 이야기는 기억나지 않고···.


109.처녀

'범'이라는 이름의 젊은 망나니가 마을 처녀 하나를 말 그대로 단물만 빼먹고 길바닥에 내다버린다. 그런데도 누구 하나 말리거나 나무라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그 밖에도 망나니는 행 패가 이만저만 아니다. 아무가 그를 찾아가서 말한다. "네가 그 토록 싸움질을 잘하느냐? 어디 나하고 겨뤄 보자." 그러고는 다짜고짜 발목을 잡아 바닥에 패대기친다. 망나니가 비명과 함께 두 다리를 개구리처럼 길게 뻗으며 기절한다.
아무가 그를 질질 끌어다 나무토막 근처에 두고서 말한다. "스님 말씀하시기를 이것이 사람 살린다 하셨다. 정신 돌아오거든 사람 한번 되어 보 아라." 얼마 만에 그가 깨어나서 나무토막을 움켜잡은 것까지는 알겠는데 뒷일은 기억나지 않는다. 물론 꿈속에서는 잘 알았지만.
한참 세월이 흐르고··· 왜구 서른 명이 마을을 습격한다. 벌거숭이 몸에 아랫도리만 가린 깡패들이다. 온 마을이 아수라장이다. 그때 어디선가 범이 벼락처럼 나타나 왜구들을 단신으로 일망타진하는데 인명은 다치지 않고 팔목이나 발목을 부러뜨려쓰지 못하게하는 정도다. 솜씨가 과연 호랑이답다. 아무가 그에게 "고맙다. 네가 짐승의 허울을 벗고 사람이 되었구나" 하는데 어느새 아무가 스님인 성주로 되어 있다. 범이 왜구들에게 말한다. “성주님 은혜로 너희를 살려 두니 다친 몸 추슬러 쓸 만해지거든 각자 고향으로 돌아가 부모에게 효도하고 남은 세월 착하게 살아라” 왜구들이 절하며 고개를 굽실거리는데 한 비구니가 나타나 그들의 다친 몸을 어루만진다. 놀라 바라보니 저 옛날 범한테 몸과 마음을 짓밟히고 버림받았던 바로 그 처녀다. 엄숙히 합장하며 "나무아미타불"을 뇌다가 꿈에서 깨어난다.
하나 더 생각나는 게 있다. 범이 이름을 무이라고 바꾸었다는데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다. 무이無二면 둘이 아니라는 뜻이고 무이無異면 다르지 않다는 뜻인데, 뭐 그게 그거 아니겠는가만.


110.아는 만큼만

아르헨티나 출신 축구선수 메시에 대하여 누구 와 토론하다가 슬그머니 깨어난다. 그 '누구'가 누군지는 꿈속에서도 몰랐고 깨어나서도 모르겠다. 그냥 평소에 가까운 사이라는 것 정도만 알겠다.
아무가 묻는다.
"메시의 풀 네임이 뭐지?"
"글쎄? 미카엘이 던가?"
"미카엘은 아니고 요한?"
"요한도 아닌 것 같은데?"
"우리한테 스마트폰이 있으면 당장 검색해서 알 수 있겠지만 너나 나나 그게 없으니 알아볼 방도가 없군."
그가 말한다. "그냥 메시라고만 부르자. 그 친구 풀 네임을 꼭 알아야 하는 건 아니잖아?" 그렇지. 뭐든지 아는 만큼만 알고 사는 거라. 모르는 건 놔둬도 돼. 오케이. 


111.실축 세리머니

아무가 말한다. “난 메시가 골을 넣고서 두 손을 들고 하늘을 우러르며 뭐라고 중얼거리는 모습이 특히 인상적이더군. 물론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방금 골을 넣은 건 제가 아닙니다. 당 신입니다'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말씀이야. 메시의 라이벌 골잡이라는 호날두인지 뭔지 하는 친구가 공중에 붕 떠올랐다가 반바퀴 돌아 떨어지며 두 팔을 힘껏 내려 펼치고는 '봐라, 이게 나 다!'라고 으스대는 것과 너무나도 대비되는 거라. 메시 그 사람 볼수록 겸손하고 착해 보여서 가까이하고 싶은 친구야. 그런데 하나 아쉬운 점이 있더군. 한번은 그가 페널티킥에서 실축하는 걸 봤는데 민망한 표정을 짓고 말더란 말이지. 그때도 두 손들고 하늘 우러르며 '방금 실축한 건 제가 아닙니다. 당신입니다' 라고 했어야 앞뒤로 맞는 거 아닌가?"
그가 말한다. "글쎄, 우리가 보는 건 텔레비전에 비치는 영상뿐이니까, 실제로 운동장에서는 그랬을지도 모르지." "아니야. 실제로 그랬다면 그토록 인상적인 장면을 카메라들이 놓쳤을 리가 없어." "그건 그렇군." 그가 다시 말한다. "음, 그러니까 메시가 아직 그 정도까지는 성숙하지 못한 거로 봐야겠지. 그래도 잘된 일은 내 탓, 잘못된 건 조상 탓이라는 보통 수준에서 잘된 건 조상 탓, 잘못된 건내탓이라는 수준으로 올랐으니 그만해도 어딘가?" "그야 물론이지! 하지만 그 친구가 한 단계 수준을 높여서 페널티킥을 실축하고도 하늘 우러르며 '저 아닙니다. 당신입니다'라고 중얼거리는 모습을 보여 준다면 우리 모두에게 놀라운 선물이 될 텐데.”
“완전동감!" 그와 마주 보며 웃다가, 서재에서 자던 효선이 이불 속으 로들어오는 기척에 깨어난다.


112.더 무엇을 바랄 것인가

효선이 말한다. "간밤에 당신 꿈 꿨어요. 차 타고 어디를 가는데 당신은 어떤 사람과 나란히 조수석에 앉아 있고 나는 뒷좌석에서 당신을 보고 있었지. 그런데 그 사람이 자리를 너무 넓게 차지해서 당신 몸이 자꾸 작아지더니 나중에는 평소의 절반밖에 안 되는 거예요. 속이 상해서 선생님 불편하시겠다고. 누구한테 말하다가 목적지에 도달했는데 당신이 언제 무슨 일이 있었 냐는 듯 당당하게 서서는 '아, 잘 왔다'고 말합디다."
꿈 얘기 듣 는데 속으로 웃음이 난다. 그가 누군지는 모르나 그는 커지고 나 작아지고 그랬으면 된 거다. 더 무엇을 바랄 것인가?


113.인류의 유산

원불교 고위 성직자 하나가 여자와 재물에 연관되어 저지른 비위 사실이 교단보다 사회에 먼저 알려졌다. 언론들이 대서특필로 무슨 전쟁이나 일어난 것처럼 호들갑을 떤다. 류하가 방송국 기자라는 젊은이들에 둘러싸여 이야기를 나 누고 있는데 저쪽에서 한 무리가 팔을 휘두르며 누군가를 또는 무언가를 성토한다. 허공이 먼지로 자욱하다.
기독교 목사라는 늙은이가 우려 섞인 말투로, 하지만 속으로는 오히려 재미있어하는 게 분명한 말투로 중얼거린다. "아무래도 교단에 치명적인 상처가 될 것 같아." 곁에 있던 다른 누가 맞장구친다. "갈 더 있겠어? 분열되거나 부서지거나 뭐 그러겠지." 그들의 말을 듣는데 문득 화가 치밀어, "같잖은 소리 집어치워라! 너희 종교는 스승을 세 번이나 등진 배신자 위에 세워지지 않았더냐? 그 정도의 스캔들로 무너지거나 쪼개질 종교라면 진작 없어졌을 거다!" 호통을 치다가 제소리에 놀라 꿈에서 깨어난다. 깨어나 생각한다. 말은 옳았다만 큰소리로 호통을 친 것은 잘한 일이 못 된다. 분노라는 정서는 참으로 소중한 인류의 유산이라 상대를 가려서 내는 것이 마땅하다. 이웃 종교의 곤경을 두고 겉으로는 우려하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오히려 고소해하는, 그 정도로 미숙한 인간들에게 화를 내는 거야말로 우려할 만한 일이다. 그래서 예수 이르시기를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지 말라고, 그것들이 너희를 물어뜯을지 모른다고 하신 것 아니겠는가? 화를 낼 때 내더라도 모쪼록 상대를 가려서 지혜롭게 낼 일이다.


114.지난 일

이혼한 삼남매를 차례로 만난다. 자기네 말로 둘은 이혼 당했고 하나는 이혼했단다. "뭐 그게 그거지"라고 말하는데 그들의 자식 같은 젊은이가 수염이 덥수룩한 얼굴로 투덜거린다. 미리 알리지도 않고 갑작스레 들이닥치면 어떻게 하란 말이냐고. 웃으면서, 미안하다고, 하지만 인생사 본디 그런 것 아니겠냐고, 장차 이혼할 것을 미리 알았으면 결혼했겠느냐고, 그러다가 슬그머니 꿈에서 깨어난다. 그러니 지난 일을 두고서 무슨 핑계로든 후회하거나 자신을 포함하여 누구를 탓할 것 없다는 얘기? 유념하자.


115.성공의 비결

누가 아주 훌륭한 일에 성공했다. 사회적으로 국가적으로 많은 박수를 받는다. 그가 그렇게 한 경위, 말하자면 성공하기까지의 비결이 열 가지로 나열된다. 하나하나 읽는다. 모두 동감되면서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꿈에서 깨어나기 직전까지도 열 가지 비결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는데 깨어나는 순간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린다. 그것들 가운데 하나라도 잡아 보려 하지만 소용없는 짓이다. 결국 포기한다. 간밤엔 정말 헛된 꿈을 꾸었다. 문득 위로부터 칼날처럼 떨어지는 한마디 말씀, "네가 진정 내 뒤를 따르려거든 '성공'이란 말조차 버려라. 거긴 내 길이 아니다". 알고 있습니다. 간밤에는 제가 그것을 까먹었습니다. 부디 꿈속에서도 깨어 있게 해 주십시오. 성공의 열 가지 비결 모두 지워 주셔서 고맙습니다.


116.실체

새벽에 잠깐 깨었다가 다시 잠들어 누구에겐가 말을 한다. "잘 보시게. 자네 속에 있는 모든 것들이 자네는 아닐세. 자네 맹장이나 손발이 곧 자네는 아니잖은가? 자네 아닌 것들의 총합이 곧 자네인 거라. 그리고 자네 밖에도 자네 아닌 것들로 가득 차 있지. 자, 이래도 자네가 어디 따로 있다고 우길 텐가?"
이렇게 말하는데, '자네'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고 말하는 '나'도 보이지 않는다. 깨어나는 순간, 누가 속삭인다. "보았지? 그게 너다!"
글쎄다. 누가 무엇을 보았다는 건가? 음, 내가 누군지 더 묻지 말자. '나'라는 물건이 어디 따로 있는 게 아니라는 진실만 속에 간직하고서 남은 날들을 살아 보는 거다. 누가?


117. 만남

초록색 음경陰莖들이, 길고 굵고 짧고 가늘고 한 각종 음경들이, 아무의 아랫도리에 여러 개 무더기로 달렸는데 그것으로 사람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온갖 사람들을 상관하면서 잠에 들고 잠을 깨는 것이 그에게 주어진 일이다.
어떤때는 이 순서를 잊기도 하는데, 그러면 잠을 자든 깨어 있든 하루가 공일이다.
꿈에서 깨어나며 드는 생각, 그렇다. 사람이 한평생 산다는 게 겨우 몇 사람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사람을 만날 때, 보이는 거죽으로만 만나지 말고 보이지 않는 속으로도 만나자. 그의 말만 듣지 말고 그 말에 배어 있는 외로움, 슬픔, 기쁨, 아픔을 함께 나누자. 그러지 않으면 날마다 공일이다. 물질이든 정신이든 건성은 금물. 대충 인생이란 처음부터 허탕이므 로, 사실 없는 것이다.


118.오늘부터

꿈에 읽었는지 들었는지 모르겠다. "기도로 일어나 착실함으로 걷고 고마움으로 먹고 정직으로 일하고 성심으로 세상 만나고 소망으로 누워 기도로 잠든다."
아, 젊은 시절에 이것으로 인생 목표를 삼았더라면? 허허, 웃기는 생각! 오늘부터라도 늦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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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속으로 들어가서

디아코니아 자매회 언님들이 머물고 있다는 펜션인데 안개 낀 바다 저편으로 이스탄불이 흐릿하게 보인다. 양파 모양의 돔들이 여기저기 서 있고 거리에는 사람과 마차들이 지나다닌다. 이스탄불 전경을 카메라에 담으려 하자 누가 말린다. 바다 건너 이스탄불에 들어가서 찍는 건 좋은데 여기서는 찍지 말라고. 왜냐고 묻자, 찍어도 아예 인화되지 않거나 생판 다른 모습으로 찍힌다는 거다. 그렇다면 이스탄불에 들어가 찍겠다며 배 타고 바다를 건너다가 꿈에서 깨어난다.
깨어나는 순간 드는 생각, 아하, 그래서 이가관가以家觀家라, 집으로 집을 보라고 했구나. 누가 물을 삼키면 물이 그 사람으로 되듯이 누가 집에 들어가면 그가 집으로 되는 거다.
집으로 집을 보라는 말은 집 안에 들어가서 집을 보라는 말이다. 밖에서 무엇을 보면 그것의 본래면목이 안 보이거나 일그러질 수밖에 없다.
이스탄불에 들어가서 이스탄불로 되어 이스탄불을 보아야 비로소 이스탄불이 보이는 거다. 누구를 보든지, 무엇을 보든지, 눈길을 겉모습에 머물지 말고 속으로 들어가서 보자. 그게 안 되면 겉모습만으로 상대를 판단하는 잘못이나마 저지르지 않도록 조심하자. 무엇이든지 그 참모습은 겉으로 드러난 외모 속에 감추어져 있다. 그것을 보는 눈이 하나님의 눈이다.


120.퇴임사

생시엔 있을 수 없는 일들이 꿈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일어난다. 수천 명 신도를 자랑하는(?) 대형 교회 담임자로 선임되었다.
들리는 말에 어느 노파가 신임 목사로부터 김치 한 조각이라도 먼저 대접받지 않으면 교회에 발을 끊겠다고 했단다. 수석 장로라는 사람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다. 노파가 교회의 창설 멤버이긴 하지만 평소에 사사건건 까다로웠는데 이참에 무시해서 아예 나오지 못하게 하잔다. 속으로 말한다. 그럴 순 없다고, 우선 그 노파부터 찾아가 김치 한 포기 대접할 거라고, 그것이 목사의 일이라고.
은퇴하는 목사가 후임 목사 소개하는 말을 듣고 있자니 취임 예배가 곧장 퇴임 예배로 바뀌는 장면이 떠오른다. 퇴임 인사는 이 한마디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아 사는 데 이토록 큰 건물, 화려한 장식, 복잡한 규범이 있어야 하는 까닭을 모르겠다. 그러므로 여기는 이 사람 있을 자리가 아니다." 자기 입으로 하는 말을 듣다가 화들짝 꿈에서 깨어난다. 기분 참 묘하다.


121.사랑의 통로

  꿈에 문장 하나를 만난다. “Let your life be a chan-nel for the One's Love ”(네 삶으로 하여금 한님의 사랑을 위한 통로가 도 게 하라). 아멘입니다, 주인님. 그러나 그것은 제가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통로가 어떻게 저를 통로 되게 하겠습니까? 오직 당신만이 저를 통로로 쓰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네가 스스로 원하여 허락하지 않으면 나도 너를 통로로 쓸 수 없다. 그러니 네 도움이 필요하구나."
예, 알겠습니다. 제발 남은 세월 당신 사랑의 채널로 살게 해 주십시오. 제가 더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122.다만 오늘

며칠 전 꿈에는 은빛 높은 트럭에 어머니가 앉아 계시는데 함께 타려다가 바퀴가 너무 커서 아무리 용을 써도 탈 수 없더니, 간밤엔 죽은 사람들이 아예 떼로 몰려오는 꿈의 연 속이다.
북산北山이 목사로 있는 교회에서 촛불을 밝힌다. 어찌된 영문인지 심지에 불이 댕기지 않는다. 교인들이 밖에서 뭐라고 소리친다. 떠밀리다시피 교회를 나오자 북산이 뒤따라오며, "너하고는 소통이 되지 않는구나" 한다. "그렇지. 너는 죽음 고개를 이미 넘어 거기 있고 나는 아직 여기 있거늘 어찌 둘 사이에 소통이 가능하겠느냐"고 답한다. 그가 뒤따라오는 것은 알고 있지만 돌아서서 그의 존재를 확인하지는 않는다. 여러사람 앞에서 말을 하는데 돌연 몸이 옆으로 기울어지며 맥없이 빠지고 ‘음, 이렇게 죽는구나’ 생각이 든다. 그래도 그들에게 말한다. "여러분 걱정 마시오. 이 사람 아주 선명한 의식으로 제 길을 가고 있습니다." 동시에 눈에서 눈물이 난다.
정향이 다가와 짠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혀를 내밀어 눈물을 닦아 주려 하지만 안경에 걸려 혀가 눈물에 닿지 않는다. 순간 이 사람 지금 저세상 사람인데 혀가 눈에 닿았으면 그대로 갈 번했구나' 번개같은 생각과 함께 꿈에서 깨어난다. 아무렴, 삶과 죽음 사이는 백지장이라, 다만 오늘 하루 순간마다 착실히 살아갈 뿐.


123. 양심

꿈에 만난 낯익은 문장 하나, "Don't be afraid of anything. All is passing through you. The most important is how to face it"(아무것도 무서워 마라. 모든 것이 너를 관통하여 지나간다. 중요한 건 그것들을 어떻게 맞느냐다). 어떻게 맞을 건지도 걱정할 일 없다. 우리 모두에게 하느님의 마음이 있어 그것이 시키는 대로 하면 된다.
양심(consciousness)이 그것이다. 동양에서는 천명天命 또는 성性이라고도 부른다. 간디도 말했지. "나는 내 자유를 사랑한다. 그러므로 네 자유를 구속하는 어떤 짓도 하지 않겠다. 내가 바라는 것은 단순하다. 내 하느님인 내 양심을 즐겁게 해 주는 거다."
말꼬리를 잇는 질문 하나, "양심이 아예 없거나 있어도 무뎌져서 도무지 쓸모가 없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어쩔 건가?" 대답, "심장 없는 사람 보았는가? 양심 없는 사람은 없다. 다만 무슨 이유로 그것이 뒤틀렸거나 무뎌졌을 뿐이다. 그래서 수행修行하라는 거다".
다시 질문, "그가 수행하는 건 고사하고 아예 그럴 마음조차 없다. 어쩔 건가?" "진심으로 권해 보았는가? 그래도 그런다면 스스로 자기를 버린 사람이다. 놔둬라. 네 힘으로 어쩔 수 있는 무엇이 아니다."


124.병든 사람

북조선청소년교실에서 문학을 강의하다가 “몸과 마음은 완전히 하나다.” 라는 말에 스스로 놀라 꿈에서 깨어난다. 그렇다. 몸은 보이는 마음이고 마음은 보이지 않는 몸이다.
이 진실에 눈이 어두워서 자본주의니 사회주의 하는 것들을 만들고 그것들이 사람을 망가뜨리게 하는 거다. 그러고 있는 게 누군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 병든 사람이다. 세상에 나쁜 사람은 없다. 병든 사람들이, 그렇게 해서 참으로 건강한 것이 얼마나 복된 것인지를 깨치려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하늘 맑은 마음을 지닌 사람 몸에 병이 든다면? 그것은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어가기 위한  유마거사(維摩居士)의 병이다. 그러다가 병든 사람들에 의하여 죽임을 당한다면? 그것이 곧 죄 없는 몸으로 죽어간 예수의 십자가 아니겠는가?


125.나뭇잎처럼

아직 완공되지 않았지만 거의 마무리 단계에 있는 신축 성당이다. 어마어마하게 크다. 사람이 황소 뿔에 붙은 개미 같다. 까마득한 성가대석으로 등산하듯 기어 올라간다. 여자 늙은이와 아이가 있었는데 어디론지 가버렸다. 혼자다. 무섭지는 않아도 왠지 조마조마하다.
꿈에서 깨어남과 동시에 드는 생각, 아, 거기가 거기였구나. 하느님 말씀을 귀 아닌 몸으로 듣는 곳, 그분 말씀이 전자기電磁氣로 바뀌어 그냥 알몸에 스며드는 곳, 태양 에너지로 광합성 하는 나뭇잎처럼···
사람의 말도 생각도 소용없는 곳, 손가락이 몸에 붙어서 살아 움직이듯 그렇게 저절로 살아지는 곳. 제 마음대로 하는데 하늘 법을 어기지 않더라는 일흔 살 공자의 경지? 비록 꿈이지만 그 언저리에 가 보았으니 고마울 따름이다.


126.왕자

무슨 거창한 마라톤 행사가 주최 측의 농간 때문에 중단되었다. 시골 한 출판사가 주관하는 소규모 마라톤에 사람들 모여 함께 달린다. 달리는 모습이 저마다 다르다. 캥거루처럼 모둠발로 뛰는 사람, 줄넘기하면서 뛰는 사람, 게처럼 옆으로 달리는 사람, 무슨 악기를 불면서 달리는 사람, 춤추듯이 달리는 사람··· 말 그대로 각양각색이다.
결승점이 없어 그냥 달리기만 하면 된다. 남보다 빨리 달려야 할 이유도 없다. 소문에, 달리는 사람들 가운데 하늘에서 내려온 왕자가 섞여 있다고 했다. 그런데 그가 누군지 아무도 모른다. 재미있는 건 왕자 자신도 자기가 하늘에서 온 왕자인 줄 모른다는 거다. 그래도 마라톤이 중단되지 않고 오히려 갈수록 참가자들이 늘어나는 이유는 오로지 그 왕자 때문이다. 그래서 마라톤 이름이 왕자의 마라톤이다. 왕자들의 마라톤이 아니다.
꿈에서 깨어나는데 누가 속삭인다. "실은 말이다, 달리는 사람들 모두가 하늘에서 내려온 왕자들인데 그걸 모르고 저마다 자기가 혹시 그 왕자 아닐까 생각하면서 저렇게 달리고 있는 거라ㅋㅋㅋ···."


127. 용건

무위당 선생 손녀라는 단발머리 아이가 묻는다. "할아버지는 누구고 세상을 사는 용건이 뭐예요?" '용건'이라는 단어를 쓰는 꼬맹이가 대견스러워 용건과 용도의 차이를 설명하다가 꿈에서 깨어나는데 아무가 아이의 질문에 답한다.
"나는 자유롭고 평화로운 하늘에서 사랑만 하며 살던 하느님 아들인데 그렇게 사는 것이 어떤 건지를 몰랐어. 그래서 참 심심했지. 그러자 우리 아버지가, 너 온갖 얽매임과 다툼과 사랑 아닌 것들로 가득한 곳에 가서 그런 것들을 경험하며 참된 사랑과 자유와 평화가 무엇인지를 배우면 어떻겠냐고 하시더라. 그래서 '좋습니다. 그러죠 하고 여기 온 거야. 이게 내가 세상을 사는 용건이다."


128. 하늘 나그네

꿈이다. 소금素琴 선생 장례식에서 조사弔詞를 읽는다. 이런 내용이다. 세상은 소금 선생을 풍류 신학자라 부르지만 내 눈에 풍류 신학은 선생이 자신의 정체를 신학 언어로 밝힌 것이다. 선생은 '풍류'라는 단어를 쓰기 훨씬 전부터 이 미 뚜렷한 풍류객이었다. 교실에서 학생들에게 성서를 강의하다 말고 창밖의 시나브로 지는 은행잎에 한참 동안 말없이 눈길을 주는 사람, 수습기자 신분이라 추석 보너스 받지 못한 부하 직원을 퇴근길에 불러 세우고 오늘 너는 이것이 없고 나는 있으니 나눠 먹자며 봉투 속 돈을 대충 눈짐작으로 절반쯤 덜어 주는 사람, 오랜 혼수에서 깨어났으나 말을 잃어버린 제자 병상에서 기도하다가 더운 눈물로 뺨을 적시는 사람···
선생은 고운孤雲 최치원을 비롯하여 이 땅의 고고한 나그네들로 이어져 온 맥을 멋있고 맛있는 삶으로 계승한 당대의 풍류객, 진정한 하늘 나그네였다. 오늘 이 풍진세상에서 한백년 인연 좋아 이리저리 노닐던 하늘 나그네가 본향에서 기다리는 부인 흰돌 여사와 어머니 아버지 품으로 돌아가시는구나.
아아, 그렇다 한들 이 땅의 도도溜溜한 풍류가 선생의 귀향으로 문을 닫기 야하겠는가? 그러니 안심, 안심하시라.


129.관계

두 처녀가 한 자동차를 운전하는데 이쪽은 브레이크와 액셀을 밟고 저쪽은 핸들과 기어변속을 잡았다. 둘이 눈을 마주 치지도 않으면서 마치 한 몸인 듯 험한 고갯길을 씽씽 잘도 달린다. 이 장면만 남아 있고 나머지는 모두 기억에서 사라졌다.
깨어나면서 드는 생각, 이게 전부 아닌가? 서로에 대한 믿음과 협동, 이것 없이는 한순간도 돌아가지 않는 것이 사람 세상이다. 유념하라. 사람도 가고 자동차도 가지만 사람들 사이의 믿음과 협동은 늘 거기에 있다. 우주를 구성하는 것은 별들이 아니라 그것들 사이의 관계다.


130.붓다와 중생

꿈결에 한 말씀 들린다. "에고는 (누구의 에고든 간에) 미워할 대상이 아니다. 차라리 고마워할, 하지만 그것에 속지 않도록 조심할 대상이다."
그대로 잠자리에 누워 생각한다. 그렇다. 빛이 있으려면 그것으로 비출 대상이 있어야 한다. 별과 별 사이의 캄캄한 밤하늘처럼, 비출 대상이 없으면 어디에도 없는 것이 빛이다. 빛이 무엇을 비춘다는 건 그 무엇이 빛의 진행을 거스른다는 뜻이다. 빛이 저를 거스르는 무엇을 만들어 그것으로 저를 있게 한다. 그러나 빛이 비추는 모든 대상은 진짜로 존재하는 실상이 아니라 임시로 있는 척하다가 사라지는 허상들이다. 우주에 영원히 빛나는 별은 없다. 그러므로 그것들에 속지 않도록 조심할 필요가 있다.
사랑도 그렇다. 사람들 사이에 오가는 덧없는 사랑 없이는 진정한 사랑이 있을 수 없다. 붓다를 거스르는 중생 없이는 해탈도 자비도 없는 것이다.


131.무지

어느 집 벽에 걸려 있는, 경慶으로 시작하여 유猶로 끝나는 일곱 자 한문을 설명하는데 이리 막히고 저리 막히는 꿈이다. 대충 얼버무리다가,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주인에게 모르면서 아는 척하는 저를 보고 깜짝 놀라 깨어난다.
'아, 아직 멀었구나!' 마음 한구석이 민망한데 누가 속삭인다. "괜찮다. 네가 그러고 있는 줄 알았으니 이제부터 모른다고,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면 된다. 아인슈타인이 말하기를 세상에 두 가지 무한無限이 있는데 하나는 우주고 다른 하나는 인간의 무지라고 했다지? 네가 '알았다'고 말할 수 있는 건 처음부터 없었고 지금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아멘, 고맙습니다.


132.눈길

철수 화백과 이야기 나누는데 그가 말하기를, 이제는 사람들 얼굴에서 어떤 표정도 따로 읽히지 않는단다. 곁에 계시 무위당 선생이 한 말씀 하신다. "자네가 드디어 그윽한 눈길을 얻으셨군. 사람들 얼굴에서 온갖 표정이 한꺼번에 읽힌다니 말일세, 허허허." 선생 말씀을 듣고 심하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꿈에서 깨어난다.
아, 무엇을 보든지 보이는 겉모양에 머물지 않고 그것을 관통하여 보이지 않는 중심에 가서 닿는 그윽한 눈길! 하늘이시여, 부디 당신의 그 눈길로 오늘도 사람과 세상을 보게 해 주십시오.


133.기도

여류如流 선생이 번잡한 길에서 속리산 가는 버스를 기다리는데 약속된 차가 오지 않는다며 두리번거린다. 초조하거나 불안한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 그가 들고있는 책 뒷표지에서 다음 문장을 읽는다.
사람이 한님께로 가까이 가는 동안 세 가지 기도를 차례로 하게 된다.
1.저에게 평화를 주십시오.
2.저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십시오.
3.저에게서 당신 뜻을,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조건 없이 이루십시오.
"마지막 기도가 하나 더 있지"라고 말하다가 꿈에서 깨어나는데 그 마지막 기도가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혹여 기도 자체가 사라지는, 기도에 아무 소용이 없는, 그런 어디를 향한 침묵의 미소?


134.놀이공원

엘에스 구 회장 초대를 받아 놀이공원에서 타원형으돌아가는 컨베이어 벨트를 탄다. 처음에는 몸이 벨트의 방향과 속도에 익숙하지 않아 비틀거리다가 떨어질 위험이 있었지만 어디선가 벨트와 하나 되라고 외치는 소리에  ‘오냐, 이제 부터 난 벨트다.’ 생각하고 발을 바닥에 밀착시키며 눈을 감자 문득 사위가 고요하여 아무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는다.
'됐다. 드디어 한순간도 멎지 않고 흐르면서 늘 거기 있는 강처럼 되었구나. 지구별 타고 끊임없이 우주를 헤엄치면서 꿈적도 하지 않는 저기 저 산처럼 되었구나. 동정일여動靜一如라는 말이 헛말이 아니구나' 감격하다가 꿈에서 깨어난다.

135.X

어둡고 경사 심한 계단 아래에서 누가 빤히 쳐다본다. 죽은 허당虛堂이다. 어느새 그가 얼굴을 귀밑에 대고 속삭이듯 말하는데 서로 눈빛을 교환하지는 않는다. 그의 말인즉, X에 속하고 보니 어떤 것도 문제가 아니더란다. X가 어딘지 듣긴 들었는데 모르겠다.
깨어나 생각한다. 그렇다. 무슨 일이 일어났으면 일어날 만해서 일어난 것이고 해결해야 할 문제라기보다는 지혜롭게 겪으면서 얻을 것 얻고 버릴 것 버리라는 교훈이다.
그렇다면 아무개도 시방 X가 어딘지 거기에 속해 있다는 얘긴가?


136.가난

언제부터 같은 궤도를 맴돌고 있는데 도무지 달라지는 바가 없다. 갑자기 서러움에 북받쳐 궤도고 뭐고 팽개치고 울음을 터뜨린다. 그 순간 어디선가 부르짖듯 들려오는 한마디가 꿈의 껍질을 깨뜨린다.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그 한마디가 메아리친다. "가난을 경제의 눈으로 보지 마라! 그러니 답이 없는 거다." 자리에서 일어나 오줌 누는데 생각이 이어진다.
그렇다. 가난은 떨쳐 버릴 무엇이 아니다. 삶으로 실현할 이상理想이다. 산상수훈에서 그냥 "가난"이라고 한 루카와 "마음의 가난"이라고 한 마태오, 누가 옳은지에 대한 의문도 함께 풀린다. 마태오가 옳다. 루카가 스승의 말에서 '마음'을 지운 거다. 예수, 그분은 언제나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셨다. 까닭 모르게 마음이 차분해진다.


137.죽는 사람

이삿짐을 싸는데 화사한 옷차림의 어머니가 말씀하신다. "어째 속이 답답한 게 아무래도 코로나에 걸린 모양이다."
'흠, 노인들이 코로나에 걸리면 위험하다는데 이번 참에 돌아가시려는가 생각하다가, ‘아니지. 어머니는 오래전에 돌아가신 분이니 다시 돌아가실 수가 없지’ 두 번째 생각에 안심하며 깜 박 꿈에서 깨어난다.
그렇다. 죽은 사람은 죽을 수 없다. 아하, 그래서 그날 그렇게 말씀하셨구나? 당신을 살아서 믿는 자는 죽지 않을 것이고 죽어서 믿는 자는 영원히 산다고, 누구를 믿는다는 것은 누구 앞 에서 자기를 죽인다는 것 아닌가? 고맙습니다, 선생님. 오늘도 꿈에 선생님을 뵙는군요. 고맙습니다. 제 앞에 누가 나타나더라도 그에게 저를 죽이겠습니다. 저에게는 선생님 아닌 다른 뉘가 없으니까요. 옴. 


138.축복과 재앙

알레르기 때문에 전복을 보기만 해도 눈과 코에서 진물이 나오고 얼굴에 붉은 반점이 돋아나는 아우가(뉘 집 아우인지는 모르겠다) 바위틈에서 어른 손바닥만큼이나 큰 자연산 전복들을 캐어 바구니에 담는다. '저게 축복인가, 아니면 재앙인가?'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꿈에서 깨어나는데 답이 찾아온다.
저건 축복이기도 하고 재앙이기도 하다. 어느 쪽인지는 그가 전복을 왜 누구를 위해서 캐느냐에 달려 있다. 자기를 위해서 캐면 재앙이고 다른 누구를 위해서 캐면 축복이다. 흠, 어제 옮 긴 요가난다의 글이 그런 뜻이었구나! "나와 내 것이라는 착각에 의식을 집중시키는 에고의 소용돌이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을 때, 그때 카르마 법칙은 사라진다. 참 자아를 깨친 영혼이 마침내 카르마 법칙의 사슬에서 해방된 것이다."
카르마 법칙에 지배당하며 사는 것은 이러나저러나 고해苦海를 헤엄치는 것이다. 속에서 소용돌이치던 에고가 비워 놓은 자리를 하느님의 신령한 법으로 채우면 그것이 곧 해탈이요 구원이다. 죽으면 산다는 말씀의 뜻을 비로소 알겠다.
아아, 하느님, 이 앎이 곧 저의 삶이게 해 주십시오. 저는 못하지만 당신은 하실 수 있나이다, 아멘


139.둬라

어느 집에 갔다가 벽에 걸려 있는 '생명 화가 연제식 신부 그림 달력'을 본다. 달력 종이를 넘기지 않는데도 열두 장 그림이 한눈에 들어온다. 자기 집 안팎 풍경의 사계절을 그렸다. 여자인지 아이인지 노란 텐트에서 코를 골며 자는데 그 위로 뽀얀 안개가 이불처럼 덮여 있는 그림이 인상적이다. 색깔이 전에 견주어 원색으로 빛나고 선도 굵어지고 만화 냄새 나는 이야기들이 그림 속에서 굼틀거린다. 어느새 연延 신부가 곁에 서서 속으로 웅얼거린다. "거참, 제가 뭘 모르는지 모르는 줄도 모르는 놈한테 그게 뭔지를 무슨 수로 일러 준담?"
웃으며 대꾸한다. "제가 뭘 모르는지 모르는 줄도 모르는데 그게 모르는 건가? 놔둬, 그냥 두라고."
번쩍, 꿈에서 깨어나는데 누가 귓속말로 묻는다. "그 뭐라는 것이 저 자신이면? 그래도 그냥 둬?"
"그렇다면 그냥 둘 수 없지. 수고스럽게 살아 봤자 맨 허탕일 테니."
"그리고 그것이 다른 누구 아닌 너라면?"
맙소사. 그러니까 듣든지 말든지 누군가 말해야 한다. 그래 석가모니가 오고 예수가 오고 크리슈나, 피타고라스, 소크라테스, 노자, 공자, 간디가 왔는데, 그런데 사람들은 콧방귀나 꾸 고….
육계肉界, 천계天界, 영계靈界 삼중으로 밀봉된 병에 담겨 바닷물에 던져진 소금이 인간의 영靈이라는 요가난다의 말을 어제 들었지. 그래서 몸이 죽어도 죽어 없어지지 않는 것이 인간이 라고 했지. 하지만 그런 줄 알았으면 또 어쩔 것인가? 병이 스스로 병을 깨뜨릴 수 없는걸.
둬라, 언제고 죽지 않겠는가? 저절로 맨 바깥 육계의 병 하나 깨어질 텐데, 그러면 잊고 있던 무엇이 기억날 텐데, 예수님 그 말씀이 그러니까 바로 이거였구나, 무릎 치며 웃게 될 텐데. 그나저나 연제식 신부, 아직 연풍에 살고 있는지, 연락이 끊기어 알 길이 없다. 보고 싶다.


140. 이참에

잠자면서 정수리, 양미간, 척추, 단전으로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하다가 짧은 새벽꿈을 꾼다. 무슨 수행자들 모임이라는 데서 여류如流 선생이 소개하는 젊은이를 만났는데 수년 동안 공들여 개간한 밭과 주택을 이웃 마을 청년들에게 송두리째 빼앗겼다고 울분을 터뜨린다.
한껏 부드러운 어조로, 차라리 잘 됐다 생각하고 이참에 주유천하周遊天下하라고, 여우도 참새 여우도 참새 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나는 머리 둘 데가 없다 하신 분이 우리 선생님이셨다고··· 그런데 이 말을 그에게 직접 했는지 누구에 전하라고 했눈지 모르겠다. 따라서 젊은이가 이 말을 들었는지 안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언제 어떻게 꿈에서 깨어났는지, 그것도 모르겠다.


141.대성통곡

무슨 수련 모임이라고 했다. 젊고 늙은 여자와 남자들이 시골 초가집에서 밥을 먹는데 먹고 남은 음식 찌꺼기가 울타리 곁 나무 그늘에 버려져 있는 걸 보고, 음식 조금 만들어 그릇마다 깨끗하게 비우는 그 쉬운 일이 이렇게도 어려운 거냐며 하늘이 무너진 듯 대성통곡하다가 제 울음소리 들으며 꿈을 깨다.
자리에서 일어나 손에 잡히는 요가난다의 책을 펼치자 하필 이 대목이 눈에 들어온다. "너는 왜 네 몸 하나 건강하고 아름답게 돌보라는 하느님의 작은 법을 지키지 않는 거냐? 점심 먹고 나서 너는 수건으로 입술을 닦아 내고는 모든 일이 잘되었다고 생각하며 식당을 나선다. 하지만 네 치아는? 어째서 너를 위하여 그렇게 수고한 치아를 맑은 물로 씻어 주지 않는 거냐? 오염된 치아는 여러 질병의 원인이다. 힌두 수행자들은 말한다. 식사하고 나서 칫솔질을 할 수 없으면 맑은 물로 열 번쯤 입을 헹구어 주라고."
하, 대성통곡은 다른 누구 때문에 할 것이 아니었다.


142.별로 없다

얼마 전 작고하신 캐나다 큰형님 윤명중 장로 장례식장이라고 했다. 사람들이 공원의 나무들 사이로 오가는데 얼핏 고인의 모습이 보인다. 아무렇지도 않게 본인 장례에 온 손님들을 만나고 다닌다. 갑자기 누가 책을 불쑥 내민다. 길게 자란 머리로 어깨를 덮어 조선 시대 산적을 연상시키는 늙은이다. 제목은 기억나지 않는데 아무가 평생 쓴 글을 편집하여 묶은 책이다. 제법 두툼하다. 대강 훑어보니 편집자가 아무를 통 째 꿰뚫었다. 이걸 엮은 게 누구냐고 묻자 어느새 삭발한 중머리로 바뀐 그가 대답한다.
"그건 알 수 없지. 알면 또 뭐하나? 허허허." 누가 그의 이름이 '염보'라고 일러 준다. '보'는 한문으로 '步'인 줄 알겠는데 염이 '炎'인지 '念'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다가 꿈에서 깨어난다.
「죽은 철학자들의 서書」를 쓴 사이먼 크리흘리의 문장이 떠 오른다. "죽음은 가까이 있고 언제나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흥미롭다. 안 그런가?" 뒤를 돌아본다. 미련 있나? 없다. 아쉬움 있나? 없다. 아주 없다고 하면 거짓말 같고 그래서 말하자면, 별로 없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 옴.


143.소주

시골 성당에서 미사 도중에 신부와 목사들이 한꺼번에 사라졌다. 제단이 텅 비었다. 그래도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사제들이 왜 사라졌는지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누군가 그들이 사라진 까닭을 말해 준다. 양심상 차마 성체를 모실 수 없어서 도망쳤다는 것이다. 그가 말을 계속 한다. “그래서 지금 골방에 모여 포도주 아닌 소주를 마시고 있지.”
꿈에서 깨어나 사람들에게 말한다. “제대로들 가고 있구먼. 종교가 새로워지려면 사제들부터 망가져야 하는 법이거든.” 광주 경일 신부가 활짝 웃는 합죽이 웃음으로 박수를 친다. 따라 서 웃다가 두 번째 꿈에서 깨어난다.
지금 책상에 앉아 이 글을 적고 있는 것이 세 번째 꿈이었다는 걸 깨칠 날이 저만치 다가오고 있다. 흠….


144. 약초

누가 무슨 잘못을 저질러 벌을 받게 되었다. ‘한 번 받은 벌 다시 받지 않는다’는 보장 문서에 관貫이라는 글자가 나오는 데 아랫부분이 견見인지 패貝인지 생각나지 않아 머리를 굴리 다가 꿈에서 깨어난다.
깨어나면서 들은 대화,
"그게 그거지. 무엇이 보물로 보이면 그게 보물 아닌가?"
"보물로 보이지 않는 건 보물 아니고?"
"아니긴? 둘 다 보물이면 보물이지."
어제 간소과 산책길에 주고받은 얘기가 생각난다. "저 영경퀴가 약초라더군."
"먹고 죽지 않았으면 약藥 아닌가요?"
"먹고 죽었어도 약이지, 독약毒藥."
맞다. 무엇이 무엇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 그것을 보는 사람이다. 그 사람의 사람됨이다.


145. 오늘도 부디

누구 결혼식장에서 인도 사리처럼 생긴 예복을 몸에 두르다가 꿈에서 깨어나는데 곁에 있던 효선이 "여보, 제발 죽지 마" 한다. 그럼 나보고 영원히 잠자란 말이냐고 대꾸하다가 다시 꿈에서 깨어난다.
앞의 꿈은 꿈속의 꿈이고 뒤의 꿈은 꿈 밖의 꿈이다. 지금 아무의 이 삶은 꿈속의 꿈인가, 꿈 밖의 꿈인가? 그건 모르겠으나 일단 꿈인 것만은 알겠다. 사람들이 남긴 이야기 말고는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 가운데 마침내 허망하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꿈이 그렇잖은가? 이야기 말고는 아무 남는 것 없는 그게 꿈 아닌가? 그러니 오늘도 부디 아름답고 착할 노릇이다. "무엇이 너의 사명인가? 착한 사람으로 사는 것이다"(마르쿠 스아우렐리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