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김남준  | 출판사 : 생명의말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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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 안에 살던 신자를 은혜에서 멀어져 부패에 빠지게 하는 요인에 대해 바로 알고 지금 자신의 마음 안에서 그 위험한 부패가 일어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하는 책!하나님께서 더 많이 은혜를 주시기를 바랄 뿐 자신은 은혜 안에 머무르기 위해 전혀 애쓰지 않는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의 손에 꼭 들려 주고 싶은 책!은혜에서 미끄러질 때, 거기서 길을 묻다.왜 우리는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을까? 은혜로부터 미끄러지게 하는 원인은 내 안에 있다. 은혜에서 물러나 부패의 위험에 놓인 이들에게 길을 찾게 하는 말씀의 빛!잔존하는 죄의 지배로 은혜의 샘이 막혀 방황하는 모든 이에게 이 100가지 질문 앞에 서 보기를 권…[더보기▶]




김남준 목사님의 <은혜에서 마끄러질 때>를 읽으면서 각 챕트마다 일부분을 옮겨적었습니다.
가능하면 읽어보는 것으로 만족하시고 죽 긁어다가 다른데로 옮기는 것은 좀 삼가해 주시길 바랍니다.
저작권 문제 때문에 글이 여기저기 복사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아시겠지요?
햇볕같은이야기 6430-6529호까지 한편씩 나눈 글입니다. -최용우


1.영혼을 돌보기에는 삶이 너무 바쁩니까?

영혼이 은혜에서 멀어져 마음이 부패해졌는데도 육신의 생활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그리스도인들도 나중에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이렇게 고백할 것이다. “저는 열심히 살아서 화려한 옷과 좋은 차와 큰 집을 얻었습니다. 사람들의 칭찬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제 영혼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영혼을 돌보지 않고 마음이 부패해지는 것을 방치한다면,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날 가슴을 치며 후회하게 될 것이다.


2.의무가 아닌 사랑에 붙들린 삶입니까?

정말로 중요한 것은 얼마나 유능하냐, 얼마나 많은 성과를 냈느냐가 아니다. 무슨 동기로 그 일을 하느냐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잊어버릴 때가 많다. 특히 은혜가 사라졌을 때, 더더욱 그러하다. 무엇에 얽매여 사는가? 우리가 얽매여 있어야 할 것은 하나님을 향한 애끓는 사랑  뿐이다.


3.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습니까?

인생길에는 두 방향밖에 없다. 하나님을 향하여 살거나 하나님을 등지고 사는 것이다. 회심이란 신자의 마음과 의식에서 일어나는 일로 말씀과 성령으로써 삶의 방향을 죄로부터 돌이켜 하나님을 향하게 되는 것이다. 무엇을 바라보고 사나?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가는 일, 그것이 바로 신앙생활이다.


4.회심의 은혜를 누리고 있습니까?

좁은 의미의 회심은 구원에 이르는 회심으로써 일생에 단 한번만 일어나고 중생의 결과로 온다. 반대로 넓은 의미의 회심은 성화에 이르는 회심으로 좁은 의미의 회심의 의식적 반복이다. 신앙생활의 핵심 과제는 첫째는 회심하는 것이고 둘째는 그 회심을 매일 반복적으로 누리며 사는 것이다.


5.거듭나지 않았는데, 그저 은혜가 떨어졌을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까?

인간이 불행한 근본적인 원인은 이 땅의 유한한 자원을 조금 소유한 데서 찾기 때문이다. 그런데 첫 회심을 통해 죄, 용서, 사랑, 영광, 은혜에 대한 신령한 감각이 생겨나면, 이전까지 자신을 지탱해 오던 세상적인 가치관이 무너지고 하나님 중심적인 새로운 가치관이 생각난다.
하나님의 생명의 증거가 거의 나타나지 않는 살을 살면서도 영혼의 상태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나 근심이 없다면, 자신의 구원 문제를 좀 더 정직하게 고민해 보이야 한다.


6.하나님의 용서를 개념적으로만 생각하고 있습니까?

용서의 은혜는 이해와 설득을 통해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사랑이 영적으로 경험됨으로써 누리게 된다. 그래서 참된 그리스도인에게는 언제나 자신이 용서받은 죄인일 뿐이라는 인식이 있다. 이 사죄에 대한 감각은 첫 회심의 때에 탁월하게 깨어난다. 첫 회심 이전에는 정죄의 경험만 있을 뿐, 사죄의 기쁨은 없다. 그러나 회심하게 되면, 죄에서 해방된 놀라운 기쁨이 넘쳐난다.


7.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경험하였습니까?

회심은 하나님의 용서에 대한 감각을 깨어나게 한다.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은 죄로 물든 인간의 본성과는 너무나 이질적인 것이어서, 제아무리 좋은 성품의 사람이라 할지라도 회심 이전에는 결코 그것이 어떤 것인지 잠작조차 할 수 없다. 이 사랑의 경험은 죄에 대한 용서의 경험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하나님의 용서를 확신하게 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놀라운 감각도 생겨난다.


8.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감각이 살아 있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감각이 살아나면 자기 자신을 중요한 존재로 여기던 옛 생각의 체계를 버리게 된다. 사실 우리가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자기 자신을 온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인생이 의미 있게 되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것이다. 영광의 하나님을 알며, 하나님의 영광을 세상에 가득 드러내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9.회심하기를 바라고 있습니까?

회심의 신비는 이것이니, 만약 회심하였다면 그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요, 아직 회심하지 못하였다면 그것은 모두 자신의 책임이라는 것이다.


10.매일 새로운 회심의 은혜를 누립니까?

첫 회심은 죽어있던 영혼에 하나님의 새 생명이 주어지는 것으로 일회적인 사건이다. 반면 이후의 회심은 첫 회심을 통해 이미 누린 새 생명의 축복을 반복적으로 다시 갱신하여 누리는 사건이다.


11.회심을 반복적으로 경험하고 싶습니까?

첫 회심은 우리를 단번에 은혜의 지배 속으로 데려간다. 그나 이후의 회심은 은혜의 지배로 들어갈 기회를 제공할 뿐이다.


12.자신의 구원을 낙관하고 있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중생 없이 회심을 추구하는 오류를 범한다. 한때 누린 도덕적 감화나 신비한 체험을 중생으로 오인하기 때문이다. 중생은 죽었던 영혼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죄를 죽이고 거룩한 삶을 사는 일은 오직 거듭난 사람에게만 가능한 일이다. 거듭나지 않은 채 성화를 추구하며 산다면, 그의 신앙생활은 열매 없는 혼란만 가득할 것이다.


13.죄와 싸우는 것은 싫고 은혜의 경험만 바랍니까?

분명한 회심을 경험했는데도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와 동행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회심의 강도의 문제가 아니라 청산되지 않은 자신의 부패의 문제이다. 일단, 죄와 죽기까지 싸워 이겨보라. 신앙의 도약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14.구원받았는데 왜 여전히 죄가 좋을까요?

죄가 소름끼치게 싫기만 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어떤 죄는 신자에게도 너무나 유혹적으로 다가온다. 그리스도인이 성화의 여정에서 만나는 죄는 단칼에 쳐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싸우며 거룩함을 쫓는 생활을 통해 이길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15.하나님의 용서를 확신할 수 있습니까?

용서의 확신은 사랑의 관계가 회복됨으로써 온다. 그러므로 용서의 확신을 누리려면 먼저 우리의 마음 안에서 죄의 실제적인 지배력이 사라지고 은혜의 강력한 지배력이 굳건해야 한다. 


16.교리를 알고자 애쓰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의 삶은 치열한 전쟁터이다. 따라서 죽은 후에 하나님 나라로 가기 전까지 그리스도인의 손에는 언제나 무기가 들려 있어야 한다. 교리에 대한 선명한 지식은 그리스도인이 소유해ㅔ야 할 최고의 무기 가운데 하나이다. 교리는 성경으로부터 와서 성경을 통해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을 보게 한다.


17.영혼의 상태에 대해 바로 알고 있습니까?

병을 고치려면, 일단 자신이 어디가 어떻게 얼마나 아픈지부터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신을 비춰보고 자기의 상태를 직접 깨달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영적인 경험이 많고 정확하게 말씀을 분별해서 조언해 줄 수 있는 신앙의 선배나 목자를 찾아가 자신의 영혼의 상태에 대해 상담한다면 조움이 될 것이다.


18.회심의 은혜 안에 살고자 힘쓰고 있습니까?

회심의 은혜를 보존하며 살 때, 우리는 우리 안에 교묘하게 살아남은 죄를 찾아내어 죽여가며 거룩한 삶의 항해를 지속적으로 이어갈 수 있다.


19.나태한 생활과 싸우고 있습니까?

죄가 은혜의 샘을 막는 첫 번째 방법은 영혼의 싫증과 육체의 게으름을 조장하는 것이다. 영혼의 싫증과 육체의 게으름은 신자로 하여금 마땅히 행해야 할 신앙의 의무에 태만하게 만들고 영혼의 기쁨까지 잃어버리게 한다.


20.마음에서 일어나는 부패의 징후를 파악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삶은 마음의 틀을 통해 나오는 결과물로, 그 마음의 틀이 어떠하냐에 따라 경건한 삶이 나오기도 하고 추루한 삶이 나오기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을 부패로부터 지켜야 한다. 마음의 틀은 어느 한 순간 갑자기 변하지 않는다. 서서히 쌓인 태만이 마음을 부패하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의 마음에 세워진 은혜의 틀이 죄의 틀로 바뀐다.


21.인생의 참된 만족이 주님께 있습니까?

환경이 편안해졌다고 방심하는 것은, 그의 삶의 기준이 그리스도를 사랑하며 그분을 닮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안락과 성공이었다는 증거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열심히 살되, 그 인생에서 누리는 것들에 지나치게 마음을 빼앗기며 살지 않도록 늘 조심해야 한다. 이 세상의 가치가 인생의 목표가 되면, 어느 한 순간 번영이 찾아올 때 반드시 부패할 것이기 때문이다.


22.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고 있습니까?

우리는 잘못된 가르침에 속을 수도 있고, 그릇된 삶의 모본을 보여 연약한 영혼을 잘 못 이끌 수도 있다. 그러므로 거짓된 평화에 안주하게 하는 모든 그릇된 가르침을 분별하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진리 앞에 정직하게 서야 한다.


23.속이는 영에게 혹은 자기 자신에게 속고 있지 않습니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정신과 속이는 영의 감언이설에 속아, 은혜의 상태를 파괴하기 위해 다가오는 명백하고도 임박한 위험을 알아채지 못할 때가 많은 것이다. 그래서 쓰러지기 일보 직전인데도 자신이 제법 건강한 줄 착각하고, 은혜에서 멀어져 미끄러지고 있는데도 견고하게 서 있는 줄 오해한다.


24.교만한 가운데 자신의 영적 상태를 과신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겸손해지도록 주신 말씀을 오히려 교만해지는데 사용하는 사람이 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에게 그릇되게 적용하여 거짓된 평화를 누리는 것이다. 죄와 벗하여 살고 있으면서도 죄책감을 느끼기 보다는 거짓 평화를 누리고 있지는 않은가? 참된 평화는 은혜를 향해 마음을 열게 하지만, 거짓된 평화는 죄를 향해 마음을 열게 한다.


25.영혼의 싫증을 지성으로 합리화합니까?

영혼의 싫증에 빠진 자신의 상태를 애써 합리화 하려는 사람들은 틀린 견해를 받아들이기 쉽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를 뉘우치고 끊임없이 그 죄를 죽이며 살아가는 것은 사실 다른 무엇과의 싸움이 아니다.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다. 날마다 죽는 삶은 영혼의 고통과 내면이 깨어지는 아픔이 있는 길이다. 힘든 길이지만 이 길 위에만 예수님의 생명이 있다.


26.성경을 사랑하고 말씀에 순종합니까?

성경은 능력의 샘이요, 진리의 집적이다. 그리스도를 아는 보고이다. 성경말씀에 순종하면서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 것보다 더 확실한 은혜로 나아가는 길은 없다. 복잡다단한 인생길의 가장 탁월한 나침반이 성경이다. 성경말씀을 늘 가까이 하는 사람들은 복음을 떠난 가르침에 미혹되지 않는다.


27.은혜의 샘을 막는 일들에 대하여 경계합니까?

죄가 은혜의 샘을 막으면 우리의 마음은 굳어져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을 누릴 수 없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들어오지 않고, 친밀한 기도도 할 수 없게 된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도 순종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그리고 이렇게 마음이 굳어지게 되면, 영혼은 하나님의 신령한 자원을 공급받지 못해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신속

히 떠나게 된다.


28.자신도 모르게 안일한 생각, 태만한 마음에 빠지지는 않습니까?

그리스도인은 하늘로 훨훨 날아갈 수 있는 기도와 말씀의 두 날개를 가진 존재이다. 그런 그리스도인이 죄의 함정에 빠져 은혜를 잃고 부패해지는 것은 죄와 유혹에 대한 경계가 태만해진데서 비롯된다. 그리고 이 경계의 태만은 곧 생각의 태만으로부터 시작된다.


29.교회 출석, 헌금 등 일반적 의무에만 집중할 뿐 영혼의 상태에는 무관심합니까?

생각이 태만해지면 교회 안에서 마땅히 지켜야 할 일반적인 의무 이행에 만족하고, 그리스도의 몸 된 지체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순전한 사랑, 진실한 기도 같은 개별적인 의무에는 무관심해진다.


30.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삶으로 고백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많은 경우 이 고백은 일반적이고 포괄적인데 그치기 쉽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고백이 참된 것이라면, 그것이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 고백 속에는 언제나 자신의 치열한 삶이 녹아있다.


31.삶의 이유와 목적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 때문에 살아간다. 그래서 그의 삶은 한걸음 한걸음이 모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고백이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한다. 나는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고 싶다.”라는 고백은 아름답다. 그러나 그 고백이 개별적인 의무 이행과 실천적인 삶에 녹아들 때 더욱 아름답다.


32.명백히 죄임에도 불구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문제는 없습니까?

죄에 대해서는 그 어떤 방심도 금물이다. 처음부터 아무렇지도 않게 큰 죄를 짓는 사람은 없다. 죄는 우리의 구원을 취소시킬 수는 없지만, 우리를 하나님 없는 사람처럼 살게 할 수 있다.


33.죄가 주는 즐거움에 빠져 있습니까?

죄가 달콤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미 죄가 주는 쾌락을 맛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은혜가 가져오는 기쁨, 경건이 선사하는 기쁨을 모르기 때문이다. 지혜로운 그리스도인은 죄가 가져오는 잠깐의 즐거움과 영원한 즐거움을 바꾸지 않는다.


34.은혜가 사라져 마음이 허기질 때 어떻게 합니까?

은혜의 상태에서 미끄러지면, 죄의 낙을 즐김으로 은혜가 사라진 마음의 허기짐을 채우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죄는 잠시 즐거움을 주지만, 은혜는 영원한 행복을 준다. 죄는 은혜가 사라진 마음의 고통을 잠시 잊게 할지는 모르지만, 근원적인 치료책이 되지는 않는다. 은혜에서 멀어져 마음의 부패를 경험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에게는 회개와 자기 깨어짐이 약이다.


35.하나님이 없어 허한 마음을 죄를 통해 달래려 합니까?

죄를 달콤하게 느끼기 시작하면 그의 영혼에서는 부패한 정욕이 먹구름처럼 피어올라, 입을 벌리고 그 욕구를 채워달라고 요구한다. 죄가 주는 당장의 기쁨은 덫에 놓인 한조각의 고깃덩이일 뿐이다. 그 고깃덩이에 현혹되어 덫에 발을 딛는다면 후회 속에서 살게 될 것이다.


36.창조 세계의 아름다움을 묵상하며 삽니까?

목표 없이 방황하던 생각이 어느 날 갑자기 신령한 은혜의 보좌 앞에 다다르는 법은 없다. 혼란해진 생각은 대개 어두운 곳을 기웃거린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각이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추구에서 이탈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마음 지킴은 생각지킴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죄의 유혹을 뿌리치고 죄를 미워하며 경계하기 위해서는 창조의 아름다움을 묵상해야 한다.


37.십자가에 대한 현재적인 감격이 있습니까?  
십자가에 대한 묵상은 우리가 죄를 경계하는 데에도 매우 요긴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묵상할 때, 우리는 죄가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십자가를 묵상하며 ‘내가 다시 죄를 짓는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것과 같다.’ 라고 생각하야 한다.


38.생각을 정돈하여 예배에 참석하고, 말씀이 선포될 때 집중하여 깨닫고, 그 말씀을 삶에 적용하며 살고 있습니까?

생각은 진리의 빛인 말씀을 받아들이는 능력이다. 생각이 하나님의 말씀을 향해 예민하게 깨어 있어야, 진리가 선포될 때 영혼이 정직하게 반응할 수 있다. 생각이 희미하고 마음이 혼란스러운 상태에 있는 사람은 말씀을 들어도 예배당을 나서는 순간 잊어버리기 일쑤이다.


39.나의 영혼의 기능은 건강합니까?

마음이 은혜로부터 멀어져 부패하면 영혼의 세 가지 능력이 파괴된다. 첫째로, 생각이 혼란해지기 시작한다. 그래서 허탄한 것에 열광하며 허무한 삶을 살아간다. 둘째로, 총명이 흐려져 사리를 분별하지 못하게 되고 이전에 있었던 잘 믿는 성향이 약화된다. 셋째, 마음이 딱딱하게 굳어져 말씀에 반발하거나 무관심해진다.


40.버려야 할 생각과 취해야 할 생각을 분별하여 선택하고 있습니까?

총명한 사람은 영혼의 생각과 선택을 바르게 통제하여, 지혜롭고 순전하게 살아간다.
하나님께 총명을 주시도록 간구하고 있는가? 총명 안에서 살아가기를 사모하고 있는가? 총명 없이는 은혜의 상태를 유지할 수 없다. 총명은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할 때 가장 탁월하게 빛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시기를. (엡1:8)


41.날마다 더 총명해지고 있습니까?

한 사람이 인생길을 항해해 나가는데 있어 총명의 역할은 선장과 같다. 아무리 배가 튼튼하고 선원들이 훌륭해도 그들을 이끄는 선장이 무능력하다면 안전한 항해를 보장할 수 없을 것이다. 영혼의 총명을 잃었는가? 낙심하지 말라. 하나님께서는 회개하고 돌아오는 사람들을 새롭게 하여 총명을 회복하게 하신다.


42.나의 영혼은 빛 가운데 있습니까, 어두움 가운데 있습니까?

마음에서 은혜가 사라지면 부패가 시작되고, 마음에서 부패가 시작되면 영혼의 아름다운 능력들은 파괴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제 영혼은 그 어떤 진리의 빛도, 은혜의 빛도 발견할 수 없는 어두움의 상태로 들어가 무감각해져간다.
그러므로 빛의 자녀들은 어둠속을 헤매서는 안 된다. 그런 인생은 우리의 몫이 아니다.


43.죄를 짓고자 하는 욕구에 어떻게 반응하고 있습니까?

누구나 죄의 욕구는 있다. 다만 그것을 다스리며 사는 사람이 있고, 그것에 끌려 다니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자신 안에 있는 죄의 정욕을 적절히 통제하지 않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44.자주 넘어지는 부분은 무엇입니까? 그 부분을 하나님께 의뢰하고 있습니까?

죄는 우리에게 은밀하고 친밀하게 다가온다.  죄는 누구나 홀릴만한 일반적인 미끼보다 딱 한 사람에게 특화된 개별적인 미끼를 사용하기를 좋아한다.


45.나를 공격하는 죄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죄에 대한 지식의 깊이는 거룩함에 대한 지식의 깊이에 비례한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죄에 대해 잘 모르는 현실은 그들의 관심이 거룩함이 아님을 보여준다. 인간의 참된 가치는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게 사는 것이다. 죄를 죽이시는 분은 성령님이시다.(롬8:13)


46.나도 모르게 너그러워지는 특정한 죄가 있습니까?

죄가 인간 안에서 역사하는 두 가지 방법은 속임(deceit)과 강압(force)이다. 죄는 그 크기와 결과를 속여 특정한 죄에 대해 너그러운 태도를 갖게 한다. 죄는 이런 식으로 사람들을 속인다. 저마다 자신의 입장과 자신의 편의에 맞춰 마음  속으로 죄의 기준을 바꾸었기 때문이다.


47.‘죄송하니까 이렇게라도’ 하는 보상 심리로 신앙생활하고 있습니까?

죄를 짓고싶은 욕망이 우리 안에서 솟아날 때, 또는 어떤 죄를 짓고 그 죄책감으로 크게 고통받고 있을 때, 우리는 우리의 다른 장점으로 보상하려는 시도를 한다.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터무니없지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께 잘못했음을 깨달았을 때, 진실한 회개 대신 외적 봉사나 행위로 보상하려는 것이다.


48.특정한 욕망에 대한 옹호와 합리화가 죄로 이어진 경험이 있습니까?

특정한 욕망에 대한 불완전한 처리는 평생 그를 따라다니며 힘들게 한다. 혹시라도 특정한 죄의 욕망에 대해 ‘이 정도는 괜찮아’ 하며 스스로 옹호하고 합리화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라. 이러한 성찰은 반복적으로 그 죄를 범하지 않도록 하는데 꼭 필요하다.


49.성화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참으로 사람이 되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해서 곧 참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성화는 인간의 성실한 노력으로 말미암는 도덕적 개선이 아니라 성령님의 초자연적인 역사이다.


50.삶의 전 방면에 걸쳐 순종하고 있습니까?

성화는 삶의 모든 방면에 걸친 총체적인 순종으로서만 가능하다. 성화란 죄인의 전 본성을 새롭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밖으로 드러나는 삶 뿐 아니라 마음에 도사린 의도와 판단까지 모두 하나님의 뜻에 함당하기를 추구하는 총체적인 삶의 순종이 있을 때, 우리는 죄를 이기며 살 수 있다.


51.실제의 삶 속에서 죄와 싸우고 있습니까?

어느 그리스도인이 목회자에게 물었다.
“그리스도인이 행복해지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죄를 죽이면 됩니다.”
그리스도인이 다시 물었다.
“그것은 어린애들도 다 아는 답입니다.”
목회자가 다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어른들도 실천하기 어려워하는 일입니다.”


52.왜 진리를 알고자 합니까? 지적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해서입니까?

깨달아 순종하기 위해 진리를 추구하는 것은 거룩한 갈망이지만, 새로운 것을 알기 위해 진리를 추구하는 것은 본성적인 지적 호기심일 뿐이다. 자기만족을 위한 지식의 욕구는 세상 사랑이다.(요일2:15-16)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구하는 동기는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자 하는 것이어야 한다.


53.날마다 더 진리를 알아 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개념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적으로 맛보아 아는 것이다. 맛보아 안다는 것은 감각의 총체적 경험이다. 그리스도인은 진리에 대한 올바른 이해 위에 경험적인 이해의 과정을 통해 경건의 신비에 도달한다. 그리고 그렇게 경험을 통해서 터득된 진리는 우리를 사랑과 지식으로 충만하게 한다.


54.머리에 쌓인 지식이 가슴으로 내려오고 있습니까?

지식이 마음으로까지 내려와야 하는 이유는 단지 생각에 머무르는 지식으로는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거룩한 삶은 생각에서 시작되지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풍부한 삶의 실천으로 완성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머리로 발견한 시식을 가슴에 담아야 한다. 그 일은 항상 경험적 이해로만 가능하다. 손으로 재면 두 뼘밖에 되지 않지만, 머리부터 가슴까지의 거리만큼 먼 것은 없다.


55.지식을 통해 총명을 누리고 있습니까?

진리를 경험적으로 깨달은 사람들은 늘 마음에서 진리를 꺼내 가르친다. 그럿은 혼란스럽거나 주관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지성의 명료한 인식이 경험을 통해 마음으로 내려간 것이기 때문이다. 개념적 지식은 총명을 가져다주지 못한다. 진리를 경험적으로 알아가며, 날마다 더욱 총명해져 가는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다고 기도해야 한다.


56.진리에 의해 삶이 고쳐지고 있습니까?

개념적인 지식으로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삶을 고치는 것은 언제나 진리에 대한 경험이다. 진리를 경험하기 원하는가? 진리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간절한 기도가 필요하다.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순종하겠다는 결단이 필요하다.


57.지식 때문에 교만해집니까?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는 특징이 있다. 우리는 남들이 모르는 것을 알 때 우월감을 느낀다. 그리고 그때 다른 사람을 얕잡아보는 마음이 생겨난다. 그리스도인은 그런 감정을 즐기지 말아야 한다. 그런 마음 안에서는 지식이 그를 거룩하게 하는 수단이 아니라 오만하게 하는 수단에 불과하다. 개념적인 지식은 교만을 가져온다.


58.진리를 경험적으로 알아 가고 있습니까?

진리를 아는 참된 지식은 우리를 거룩하게 만든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경험적인 이해를 통해 가슴으로까지 내려와 마음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면, 우리의 본성은 변화되어 갈 것이다. 
진리에 대한 경험적 지식은 마음에 적용되어 총명으로 나타나고, 거룩한 삶의 실천으로 이어진다.


59.어떤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예배가 은혜의 요람이 되고 있습니까?

예배를 통해 경험적 지식에서 자라가려면, 먼저 믿음과 사랑으로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경배하는 태도로 하나님을 갈망하며 예배에 참석하고 있는가? 예배의 회복 없이는 풍성한 지식도, 그 지식으로 말미암는 풍성한 삶도 없다.


60.진리를 따라 살고자 몸부림치는 삶의 현장이 있습니까?

우리는 알게 된 진리를 실천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실천 없이 지식만 쌓이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정신적인 유희를 즐기려는 것에 불과하다. 어찌하든지 그 진리를 내 삶속에 녹여 내고자 해야 한다.(빌1:20) 진리를 아는 참된 지식은 그것을 따라 살고자 하는 전인적인 추구 속에서 확장되고 깊어진다.


61.자기의 생각과 의지를 꺾고 하나님의 뜻에 따르고자 합니까?

그리스도인이 영적으로 부패하는 것은 자기 부인이 없는 삶을 살기 때문이다. 신앙이 깊어질수록 우리 안에 자리 잡은 이기심과 위선도 교묘하게 작용한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살기 위해서는 그것을 찾아내는 총명과 지식이 필요하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자기를 부인하라는 신앙의 요구를 듣는다. 자기 부인이 없는 삶을 살아가면 은혜의 상태를 유지할 수 없다. 


62.날마다 마음을 지키려 애쓰고 있습니까?

자기 부인의 삶은 죄의 욕망 안에서는 힘든 일이지만, 하나님을 향한 사랑 안에서는 특권이다. 왜냐하면 자기 부인의 경험을 통해 하나님과의 보다 깊은 사랑 속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자기부인 없이는 하나님을 누릴 수 없다. 자기 부인의 힘은 성령님 안에서 하나님께 붙어있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에서 나온다. 우리 안에 남아있는 내적 부패성 때문에, 우리에게는 자기부인이 필요합니다.


63.죄의 유혹을 잘 분별해 거절하고 있습니까?

신자를 향한 유혹은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로 우리에게 늘 있는 시험이다. 둘째로 최대의 크기와 결과를 속여 우리로 하여금 죄를 친근하게 느끼게 하는 것이다. 셋째로 어떤 특정한 정욕을 부추겨 범죄 하도록 하는 강한 끌림이다.
이러한 유혹들을 잘 분별하고 있는가? 악한 유혹의 손짓을 거절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외적 유혹들이 많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자기 부인이 필요하다.


64.신앙적 의무에 대한 올곧은 인식이 있습니까?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신앙적 의무들을 열렬하게 이행하는 때가 있는가 하면, 마지못해 행하는 때도 있다. 그러나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대한 기준이 달라져서는 안 된다. 자기 부인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의무에 대한 올곧은 인식이 있어야 한다.


65.마땅히 행해야 할 의무를 상황에 따라 회피하거나 축소하고 있습니까?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데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인식이 나온다. 그러나 이것만이 의무의 올곧은 인식의 전부는 아니다. 의무에 대한 올곧은 인식은 모든 상황 속에서 의식과 마음이 인식을 놓치지 않는 것을 포함한다. 범죄는 순간에 실행되나, 긴 시간 동안 준비 된다. 그 준비가 쌓여 결정적인 순간 자신의 의무에 대한 인식을 놓치게 만드는 것이다.
의무를 올곧게 인식한다는 것은 상황이 달라져도 의무에 대한 인식이 바뀌지 않는 것이다.


66.‘현실적으로’라는 핑계 뒤에 숨어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고 있습니까?

힘들지 않은 순전한 삶이 어디 있겠는가? 분명한 사실이 있다. ‘현실적으로’ 라는 모호한 말 뒤에 숨어 순종하지 않는 자신을 합리화하는 사람 치고 바르게 신앙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칭찬 받는 삶을 산 신앙의 선배들은 모두 비현실적인 삶을 산 사람들이었다. 종종 있었던 그들의 미끄러짐은 현실적인 선택을 했기 때문이다. 의무를 올곧게 인식한다는 것은 올곧게 그 의무를 따라 행하는 것이다.


67.의무에 반하는 생각과 욕구를 의지로 통제하고 있습니까?

많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오류와 악들은 우리의 양심을 무뎌지게 한다. 그리고 그 가운데 우리는 아주 서서히 성경적 가치관에서 세속적 가치관으로 이동한다. ‘왜 굳이 힘든 길을 가려고 해, 괜찮아. 이 정도는 큰 잘못이 아니야. 우리가 완벽할 수 없다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더 잘 아셔. 편하게 생각해. 죄인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야’ 하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의무를 올곧게 인식한다는 것은 의무에 반하는 생각과 욕구를 의지로 적절히 통제한다는 것이다.


68.은혜를 지속적으로 누리기 위해 의지를 활용하고 있습니까?

우리에게는 매일 수 만가지의 생각이 스쳐간다. 그 수만 가지 생각 중 마음에 착상 되는 것은 의지가 붙드는 생각이다. 그래서 우리는 특정한 죄가 마음에 착상하기 위해서는 생각의 참여와의지의 동의가 필수적이라 말한다. 생각이 특정한 죄를 선택할 때 뒤따르는 결과에 눈을 감으면, 의지는 적극적으로 그 죄를 열망한다. 그렇게 마음이 죄를 붙들면 죄는 그 안에서 자라가며 행위로 산출될 때를 기다린다.
죄가 생각의 참여와 의지의 동의로 우리 안에 들어오듯, 은혜도 생각의 참여와 의지의 동의를 바탕으로 우리 안에 역사 한다.


69.죄라는 것을 알면서 버리지 못하는 즐거움이 있습니까?

죄는 생각의 설복과 의지의 동의로 성장한다. 우리가 죄를 계속 머릿속으로 계획하고 그 죄를 통해 얻게 될 것들을 상상하며 즐거움에 빠질 때 죄는 힘을 공급받고 성장한다. 때때로 신실하던 사람이 생각지도 못한 범죄를 저지르는 것을 보는데, 이것은 그 죄가 강력하게 그 사람을 끌어 당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죄로 하여금 그렇게 강력한 힘을 지니게 만드는 것은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바로 그 자신이다.
죄는 정서의 간청과 의지의 동의로 산출되는데, 정서의 의지는 우리도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쩔 수 없었다라고 변명 하지 말아야 한다.


70.죄의 소원이 있을 때 그것을 막기 위해 어떻게 합니까?

생각을 통해 죄가 성장하면 마음이 그 죄에 대한 정욕으로 가득 차게 된다. 그러면 정서가 안달하며 죄의 산출을 간청한다. 물론 이때도 의지가 죄의 산출을 거부하면 죄는 산출되지 않는다. 그러나 죄가 이렇게 성장할 지경까지 이르면 의지는 홍수로 불안한 물을 감당하지 못하는 뚝과 갔다 특정한 죄에 대한 점증하는 욕망이 그 마음에 가득 차오르는 동안 홍수 때 저수지 주변에 수풀이 물에 잠기는 것처럼 그 마음 안에 있던 은혜의 질서들은 죄의 물에 잠겨 간다.
우리의 생각과 의지를 하나님을 향하게 할 때, 죄를 물리칠 수 있다.


71.믿음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하나님께서는 종종 우리를 낙심하게 하심으로 우리 안의 참된 믿음이 있는지 드러나게 하신다. 그리스도인이 거룩함의 길에서 포기하고 주저앉는 것은 일차적으로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도우심에 대한 절대적인 바람이다. 하나님께서 도우실 것이라는 전망이 믿음이다.


72.나의 인생에 주신 은혜 중 가장 큰 감사의 제목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지나온 세월을 돌아보자. 감사해야 할 수 많은 조건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셨고 사랑하셨고 인생의 고비마다 도우셨다. 우리가 기대하는 것 이상의 결과를 베푸셨고 우리에게 일어난 나쁜 일들을 결국 선으로 바꾸어 주셨다.(창50:20)
은혜에서 미끄러졌을지라도 이미 받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헤아려 보라. 감사의 고백을 그려보라. 다시금 살아갈 힘을 얻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회고하는 것이 감사이다.


73.매일 신앙을 점검하기 위해 자신에게 던지고 있는 질문은 무엇입니까?

개인기도 시간에 뜨겁게 기도 했는가?
대화나 행동을 하기 전에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했는가?
온화하고 상냥하며 친절 했는가?
먹고 마시는데 점잖았는가?
잠자는 일에 절제 했는가?
모든 죄들를 고백했는가?
기도생활이 태만해질 때 우리의 마음은 은혜 상태에서 멀어져 부패로 나아간다.


74.짧은 기도 생활로 만족하고 있습니까?

짧게 기도하려는 유혹을 받는 것은 마음 속에서 신령한 친교가 약화된 것을 보여준다. 기도를 얼마나 오래 하느냐가 기도의 깊이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깊은 기도는 거의 대부분 긴 시간을 요구한다. 기도생활에 태만에서 벗어나려면 짧게 기도하려는 유혹을 떨쳐 버려야 한다.


75.열심히 기도하지 않으면서 달콤한 은혜만 원하고 있습니까?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도를 향한 열정과 기도에 대한 싫증은 공존한다. 그러므로 기도 하기 위해서는 하기 싫어도 하는 희생이 필요하다. ‘기도가 달콤해지는 상태에 도달하려면 그때 기도하겠다’ ‘지금은 기도하기 너무 힘드니 하지 않겠다’ 라는 생각은 옳지 않다. 그런 신앙의 태도로는 아름다운 기도의 세계 속으로 들어갈 수 없다. 힘들어도 기도해야 기도가 무엇인지 왜 기도하며 살게 하셨는지 알 수 있다.>


76.기도로 우리 안의 죄와 싸우고 있습니까?

죄는 기도가 자신을 죽이는 것을 안다. 그래서 우리 영혼 안에 자리를 잡으면 가장 먼저 기도생활을 공격한다. 우리가 기도로 죄를 위협할 수 없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 할지라도 열렬하게 할 수 없게 하고, 간혹 열렬 해질지라도 지속적으로 실천되지 못하게 한다. 기도로 죄를 죽이고 있는가? 열렬한 기도는 죄와 맞붙어 싸우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 무기를 버리고 죄에게 투항 하지 말라. 그것은 사탄의 역사에 부역하는 것이다. 기도가 죄를 죽이는 실천적인 방편이다.


77.기도하지 않으면 갈급합니까?

그리스도인이 느끼는 기도에 대한 욕구는 그에게 남은 은혜의 크기에 비례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의 욕구를 어느정도 느끼거나 느끼냐를 통해 자신의 영적 상태를 진단할 수 있다. 즉 기도의 욕구는 영혼의 자기공명영상장치이다. 기도의 욕구가 살아 있는 사람은 하루 이틀만 하나님 앞에서 간절히 마음을 쏟아놓지 못해도 마음이 갈급해서 견딜 수 없다. 그리고 이것은 그가 은혜 안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은혜의 크기만큼 기도의 의욕을 느낀다.


78.은혜의 불씨를 살리고자 기도에 매달리고 있습니까?

우리가 환경과 상황을 핑계로 기도를 소홀히 하면 환경과 상황이 나아지면 다시 기도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니라, 환경과 상황에 상관없이 기도 할 수 없게 되고 만다. 그러면 짧은 기도 밖에 할 수 없는 상태의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해야 할까? 기도의 불을 다시 일으켜야 한다. 우리가 많은 시간을 기도할 수 있는지 없는지 주님께서 아신다. 문제는 간절함이다.
깊은 기도의 세계로 들어가려면 간절함이 있어야 한다. 은혜에서 미끄러졌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남은 은혜가 있다. 상습적인 짧은 기도는 우리를 영적인 가사 상태에 빠지게 한다.


79.마음의 깨어짐이 있는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까?

기도의 가치는 기도자의 마음이 얼마나 실려  있느냐에 달려 있다. 건성으로 드리는 기도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 그리고 하나님을 경험할 수 없는 기도는 형식일 뿐이다. 단지 형식적인 기도로는 아무것도 변화시킬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을 드려기도를 해야 한다. 영혼의 시선을 하나님 한 분께 모으고, 간절히 바라다 못해 마음이 깨뜨려 지고 자기 자신까지도 깨뜨려지는 것 같은 기도로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을 찾는 사람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신다. 기도생활에 태만에서 벗어나려면 마음의 깨어짐이 있는 기도를 드려야 한다.


80.기도로 새롭게 되고 있습니까? 
마음의 깨어짐이 없이 냉랭하게 기도하던 지난날을 회개하자. 심령의 가난함 대신 부요함으로 하나님보다 자기를 더 신뢰했던 잘못을 고백하자. 그런 지난날들이 우리에게 남긴 것은 나태하고 무기력한 삶뿐이었다. 거룩함의 소명을 따라 사는 성실한 삶, 그런 삶 속에서 누리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재, 기도를 통해 맛보는 새롭게 하시는 능력을 소망 하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마음을 깨뜨리는 기도로 당신 앞에 나오기를 기다리신다. 마음의 개어짐이 있는 기도는 우리의 영혼을 쇄신 시킨다.


81.누구에게나 자기 사랑은 있으나 모두가 그 사랑에 휘둘리며 살지는 않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랑으로 삽니까?

교만을 버려야 한다. 하나님의 무한하심과 자신의 미천함을 대조하고, 완전한 하나님의 성품과 불완전한 자신의 비천함을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묵상해야 한다. 자신의 추루함을 하나님의 탁월한 아름다우심의 빛 아래서 인식할 때 우리는 자기 사랑을 버릴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의 마음을 채우는 아름다움에 대한 인상 때문에 사랑하게 된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할 수 없다.


82.성령님 안에서 살아가는 삶입니까?

기도의 능력은 기도하는 자의 능력이 아니라 그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다시 말해 기도를 하는 행위 자체가 힘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은혜의 수단에 참여하는 신자의 영혼에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능력에 힘이 있다. 그런 능력이 기도에 역사하여 은혜에서 미끄러진 신자들을 보호하고 새롭게 하는 것이다. 기도의 능력은 우리의 기도 자체에 신령한 힘이 있어서가 아니라 기도할 때 임하시는 성령님 때문이다.


83.오늘도 열렬하게 기도하였습니까?

무엇인가를 소독할 때 가장 흔히 쓰는 방법은 삶는 것이다. 섭씨 100도의 물에 5분을 삶아야지만 죽는 균은 50도 쯤 되는 미지근한 물에는 5시간을 넘게 두어도 죽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죄들은 그 죄를 죽이기에 충분한 열렬한 기도가 있을 때 죽지 적당히 열심을 낸 기도로는 죽지 않는다. 열렬하다는 것은 영혼이 활발하게 움직인다는 뜻이다. 이때 마음은 하나님을 향해 뜨겁고 간절하게 고양된다. 열렬함은 마음의 초점과 관련이 있다. 햇빛 아래에서 볼록 렌즈의 초점을 어떤 사물에 정확하게 맞출 때 불이 붙는 것처럼, 영혼의 시선이 하나님께 고정 될 때 마음은 열렬해진다. 기도가 이렇게 열렬해질 때 우리 안에 있는 죄가 죽는다.


84.일정한 시간을 기도에 바칩니까?

그리스도인이 열렬한 기도를 잃어버리게 되는 이유는 영혼의 싫증 때문이다. 영혼의 싫증이란 하나님을 사랑하던 마음이 식어서 부적절한 마음으로 이행하는 상태에서 나타나는 영적 권태감이다. 이것을 방치하면 하나님을 떠나 방황하고 반항하는 데 까지 나간다.
가슴에 손을 얹어 보자 하루에 기도하는 시간이 얼마나 되는가? 교회에서 어떤 직분을 맡고 있다는 사실은 열렬한 기도의 필요성을 더해 주는 것이지 덜어 주는 것이 아니다.


85.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사연으로 기도를 채우고 있습니까?

열렬한 기도를 잃어버리는 이유는 마음을 쏟지 않는 형식적인 기도생활 때문이다. 아무리 오랜 시간을 엎드려 있어도 마음을 쏟지 않았다면 그것은 살아 있는 기도가 될 수 없다. 그런 기도 속에서는 생명의 능력들이 흘러나오지 않는다.
마음을 쏟아 기도하자. 마음을 쏟는 기도 없이는 무너진 은혜의 세계를 다시 세울 수 없다.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기도가 아니면 부패 한 마음을 고침 받을 수 없다.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 마음을 드리지 않고도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신령한 의무일수록 마음을 바치는 신령한 헌신을 요구한다.


86.충분한 시간을 기도에 바칩니까?

그리스도인이 열렬한 기도를 잃어버리는 이유는 짧게 기도하기 때문이다. 마음을 실은 기도라 할지라도 아주 잠시 그렇게 기도할 뿐이라면 기도의 능력이 유지되기 어렵다. 뜨겁게 기도 하는데도 성화에 진전이 없는 것은 기도가 짧기 때문이다. 열렬히 기도해도 오래 지속하는 기도가 아니면 영적인 능력이 깃들기 어렵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바꾸고 싶어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기도를 통해 우리를 바꾸려 하신다.


87.정해진 기도의 시간과 장소가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이 열렬한 기도를 잃어버리는 이유는 정한 규칙이 없는 기도생활 때문이다. 기도 생활에 있어서 정해놓은 규칙이 없다는 것은 기도가 되면 하고 안 되면 안 하겠다는 뜻이다. 이런 태도로 기도하면, 환경의 작은 변화에도 기도생활이 방해를 받는다. 하나님을 향한 열렬함의 축복은 의무라는 화로에 담길 때 지속성을 갖는다. 예수님께서도 습관을 쫓아 기도 하셨다.(눅22:39) >


88.정직하고 진실한 삶을 살고 있습니까?

열렬한 기도의 비결은 말씀의 빛 앞에서 자신을 성찰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잘못을 지적할 때 진실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은 대부분 온전한 삶을 살고 있다. 왜냐하면 그가 지금 정직하게 반응할 수 있는 것은 오늘 갑자기 진실해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동안 진실하게 살려고 꾸준히 노력을 해 왔기 때문이며, 그 과정들이 그를 진실한 사람으로 만들어 갔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정직해지는 것이 열렬한 기도의 비결이다.


89.마음에 깊이 잠겨 은혜에 적셔진 기도의 제목이 있습니까?

열렬한 기도의 비결은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언어로 기도 하는 것이다. 언어가 없는 기도는 진정한 기도가 아니다. 기도는 기도하는 자의 지성 안에서 그 내용이 이해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마음에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전14:14) 마음을 다 드리는 열렬하고 지속적인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거룩해져 간다. 은혜에서 미끄러진 상태에서 마음이 메마른 채로 기도하는 것은 몹시 힘든 일이다. 마음 깊은 곳에서 길어 올린 말로 기도를 하는 것이 열렬한 기도의 비결이다.


90.마지막으로 간절하게 기도한 때가 언제입니까?

열렬한 기도의 비결은 간절함이다. 일상에서 우리는 간절함과 열렬함을 비슷한 의미로 사용하기도 하지만, 기도회 세계에서는 간절함과 열렬함은 서로 구분된다.
기도의 열렬함이 맹렬하고 뜨거운 열정이라면 간절함은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고 매달리는 절실함이다. 그래서 열렬함 안에는 언제나 간절함이 있고 지속적인 간절함은 열렬함을 불러온다.  이 둘은 서로 하나가 되어 능력있는 기도로 생활로 나가게 한다. 간절하게 기도하는 것이 열렬한 기도의 비결이다.


91.열렬하게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까?

기도에 있어서 열렬함의 기원은 성령님이시다. 성령님께서는 우리가 열렬하고 간절하게 기도할 수 있도록 도우신다. 그러므로 열렬하게 기도 하고 싶다면 우리 내면이 성령님의 충만한 임재로 가득 차기를 구해야한다. 열렬한 기도를 위한 우리의 노력은 수단일 뿐이다. 성령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죽었던 기도는 살아있는 기도가 된다.


92.기도 생활을 지속적으로 실천하고 있습니까?

한 번에 수천도의 열을 내는 산소 절단기라 할지라도 불꽃을 철근에 대다 말다 하면 철근을 잘라낼 수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 안에 죄를 죽이는 기도도 열렬함만으로는 부족하다. 지속적으로 꾸준히 기도 하는 일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서 열렬한 기도를 계속 실천하여야 한다. 열렬히 기도하는 사람은 찰나의 기도로는 만족할 수가 없다. 마치 사랑에 빠지면 사랑하는 그 사람과 오래도록 같이 있고 싶은 욕구를 절제하기 어려운 것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지속적인 기도는 하는 것이 아니라 되는 것이다.


93.기도 생활에 게으름이 스며들지 않았습니까?

죄는 기도를 죽이고 기도는 죄를 죽인다. 그러므로 열렬하게 기도하지 못 하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죄 때문이다. 이 죄는 실제적으로 우리의 생활에서 게으름으로 나타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게으름은 연약한 것일 뿐 악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죄는 게으름이 탈을 쓰고 우리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린 후 마음에 침투한다. 마치 적군의 병사들이 아군의 복장을 하고 경비병들이 지키는 부대 정문을 유유히 통과 하듯이 말이다. 지속적인 기도를 방해하는 것은 우리의 게으름이다.


94.거룩한 생활의 습관이 형성되어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기도의 습관 속에 사셨다. 이른 새벽부터 깊은 밤까지 쉴 틈 없이 말씀을 전하시고 영혼을 돌보셨기에 그분도 홀로 있는 시간이 되면 쉬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분에게 홀로 있는 시간은 대부분 기도하는 시간이었다.
우리의 육체는 거룩한 삶을 위한 의무들을 행하는 일에 호의적이지 않다. 그나마 은혜 안에 있을 때에는 조금 났지만 은혜로부터 멀어지면 적극적으로 신앙의 의무들을 실천하는 일을 거부한다. 그래서 우리는 지속적인 기도 생활을 위해서 때로는 우리의 육체를 엄격하게 다를 수 있어야 한다.


95.예수님을 위해 희생하는 생활입니까?

성화에는 지름길이 없다. 쉽게 참된 신자가 될 수 있는 길은 모두 잘못된 길이다. 그런 편한 길이 있었으면 예수님께서 왜 우리에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는가?(마16:24)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묵상하는 일은 우리에게 자기 희생을 위한 감화를 준다. 그래서 우리가 신앙의 길을 걸어가며 치르는 희생을 특권으로 여기게 만들어 준다. 우리의 삶에 예수님을 위한 희생이 있는가? 예수님이 아니면 절대 그렇게 애쓰지 않았겠지만 예수님 때문에 기꺼이 애쓰는 일이 있는가?


96.기도해도 차가운 거절감만 느껴지지 않습니까?

신자에게 기도가 잘 되지 않는 것은 큰 고통이다. 그러나 고통스럽다고 기도의 자리를 외면하면 하기 시작하면 얼마가지 않아 그 고통스러운 마음까지 사라진다.
우리에게 다른 길은 없다. 잠시 힘든 상황을 모면해 보고 싶어서 기도를 대신할 다른 길을 선택한다면 기도에서 더 멀어지지만 할 것이다. 기도가 안 되는 것은 결국 기도로 해결해야 될 문제일 뿐이다.


97.나태한 삶에서 벗어나고 싶습니까?

신앙을 이루는 요소들은 각기 떨어져서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 즉 기도는 깊이 하는데 말씀은 잘 안 들린다거나 자기 부인은 잘하는데 나태한 삶을 산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만약 자신에게 그러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상태를 올바르게 판단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뜨겁게 기도 하고 싶다. 그러나 그렇게 능력있는 기도생활을 이어가는 사람은 소수이다. 한순간에 간절한 기도는 오랜시간 하나님 앞에서 살아온 치열한 삶의 울림이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기도는 삶을 능가할 수 없고 그의 삶은 기도를 넘어설 수 없다. 우리는 사는 만큼 기도할 수 있고 기도 하는 것만큼 살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하기 위해 살고, 살기 위해 기도한다.


98.기도 속에서 형성된 성품입니까?

한 사람의 됨됨이는 그 하나님 앞에 엎드렸을 때 모습 이상 이하도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기도 한만큼 그리스도인이 되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만큼 산다.
간혹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은 아닌데 도덕적으로 바른 사람이 있다. 그러나 기도는 기도하는 사람을 도덕적인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을 넘어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게 한다.


99.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사는 삶입니까?

성화는 매일 매일의 삶이 쌓여 이루어진다. 매일 한 발짝씩 꾸준히 거룩 해져가는 삶은 사실  한 순간 주님을 위해 죽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일 수도 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한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
그리스도의 생명은 날마다 그분 안에서 죽는 자에게 나타난다. 성화는 기도응답을 통해 단번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도 가운데 끊임없이 죄를 죽임으로서 이루어진다.


100.예수님을 닮아 가는 즐거움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해 구원 하셨다.(롬8:29)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단순한 행위 모방이 아니다. 예수님의 광야 금식기도나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일을 그대로 따라 한다고 그분을 닮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을 닮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과 참 사람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은혜 안에 살아가기를 원하는 것은, 그렇게 살아야만 이룰 수 있는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그 소망은 바로 예수님과 하나 되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런 삶을 살아갈 때 우리는 인생의 끝자락에서 하늘의 소망이 실현되는 것을 경험할 것이다. ⓒ김남준 (열린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