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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출처 :  

칼빈의 하나님/인간의 관계이해: 변증법적인가 아니면 삼위일체론적인가 ?

 

칼빈의 관심은 신약성경의 본래적인 경륜적-삼위일체론적 관심과 니케아 신학자들의 동기를 재발견, 요약한 것이었다[1]. 스콜라신학은 삼위일체론을 먼저 주어진 성경적 진술, 교부들의 주장, 철학적 명제들을 기정 논리에 의거하여 공리적인 의미로 사용하는 연역적인 방식으로 전개하려는 경향을 드러낸다. 이와 대조적으로 칼빈은 귀납법적인 방식, 곧 신약성경 주석의 자료들과 거기에서 성부, 성자, 성령에 대해 계시된 사실로부터 출발하여 하나님의 세 위격들의 단일성에 대한 논의를 위해 필요한 성경적, 성경외적인 일반화로까지 나아갔다. 삼위일체론을 체계적으로 전개함에 있어서 칼빈은 단일한 신적 본질(ousia)과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위격(hypostaseis)의 관계에 대한 전통적인 교부들의 이해를 깊이 받아들였다. 그는 비록 삼위일체 안의 상대적인 '질서'를 인정하긴 했지만, 존재론적 종속설이나, 양태론에 대한 어떤 혐의도 주지 않으려고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2]

 

그는 삼위일체적 위격(hypostaseis)들에 대해 말하고 있는 신약성경의 경륜적 관점들에 대해 일차적으로 관심을 가짐으로 현대신학자들이 말하는 바 내재적 삼위일체에 관한 것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경륜적 사역에 대해 말하고 있는 성경본문에서 명확히 반영되어 있지 않는다면, 그것에 대해 분명하게 유보적 입장을 취했다. 또 다른 한편으로 칼빈은 opera Trinitatis ad extra communia(indivisa)라는 어거스틴의 언명이 경계하려고 했던 기능적 양태론으로 전락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경륜적 사역은 세 위격들 모두의 통일된 사역이라고 주장했다. 칼빈은 성경에 계시된 대로 하나님의 인간과의 경륜적-삼위일체론적 사역이라는 렌즈를 통해서만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인식론적인 접근이 가능하다고 이해했다.

 

구원에 대한 칼빈의 삼위일체론적 이해를 지배하고 있는 신약성경 주석적 관심은 삼위일체론을 교리적으로 최종적으로 공식화한 니케아 신학자들의 전례와 뚜렷한 연속선상에 있는 것이다. 니케아 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제네바의 지도자 칼빈에게 있어서 전체적인 기독교적 비젼을 위한 삼위일체론적 페러다임이 불가피하고 규범적이었던 이유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구원사적인 사역을 충실하게 말하기 위함이었다. 니케아 신학자들의 삼위일체론적 확신은 철저하게 경륜적인 것이었다. 곧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사적인 관계에 대한 관심이었다. 그러므로, 초대교회가 가진 핵심적인 삼위일체론적 관심들은 인간 구원이 삼위일체되신 하나님께 있으며, 또 삼위일체론이 기독교의 신앙, 예배, 삶에 대한 깊은 함의를 주제로 삼은 것이다. 칼빈에게 있어서 삼위일체론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구속사적인 관계 전체의 뿌리와 유형과 동력으로 이해되었다.

 

Philip Walker Butin에 의하면 칼빈은 니케아 신앙고백을 작성한 신학자들의 심원(深原)한 관심에 가장 철저하게 충실한 신학자였다.[3] Timothy George는 칼빈의 삼위일체론적인 관점 속에 담긴 성경주석적, 교부신학적, 구원론적 관심을 다음과 같이 간명하게 요약했다: " 칼빈에게 있어서 삼위일체론이 왜 그다지도 중요하게 다루어지는가 ? 그는 추상적 신학의 형이상학적 정밀함에 연연해하지 않았고, 전통적 표현들에 맹목적으로 매이지도 않았다. 칼빈에게 있어서 삼위일체론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증거이고 또 그렇기에 그에 의해 획득된 구원의 확실성에 대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칼빈이 전개한 삼위일체론의 목적은 아타나시우스의 경우와 같이 구원론적인 것이었다. 칼빈은 성경의 메시지, 곧 "하나님께서 육체로 현현(顯現)하셨다는 메시지를 잘못된 해석들에 맞서서 변호하기를 원했던 것이다."[4] 1539년판과 이후의 기독교 강요 개정판에서 칼빈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상호내주(περιχορησις)에 대한 고전적 동방교회의 표현으로 간주되고 있는 Gregory Nazianzen의 유명한 다음 문장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분과 통일에 대한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나는 세 분의 광채(光彩)로 재빨리 에워싸이지 않고서는 한 분을 생각할 수 없다; 또한 한 분에게로 곧바로 다시 돌아가지 않고서는 세 분을 식별할 수 없다".[5] 비록 칼빈 자신은 περιχορησις란 단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이와 매우 유사한 개념들을 사용함으로 하나님의 통일성을 설명하려고 했다. 칼빈의 요한 복음 주석은 세 위격들의 통일성에 대한 상호내주적인 접근(perichoretic approach)을 보여주고 있다. 성령에 의하여 그리스도 안에 참여함으로 신자들은 하나님의 생명에 περιχορησις한다고 칼빈은 말한다.

이러한 칼빈의 철저한 삼위일체론적 관심, 그것도 성경적, 구원론적, 경륜적 삼위일체론적 관심에 대한 앞에서의 논의를 통해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인간에 대한 관계문제이다. 삼위일체론적 색채에 깊이 물든 칼빈신학과는 달리 후대의 칼빈주의에 와서는 이러한 원색적인 삼위일체론이 퇴색된 이유로, 삼위일체론적 관계성보다는 일반적, 철학적 신론에 근접한 변증법적 관계성이 두드러지게 되었다고 판단된다. 부틴에 의하면 칼빈연구가들은 칼빈신학의 전면에 두루 흐르고 있는 삼위일체론적 관심을 평가절하하는 경향이 있지만, 삼위일체론은 칼빈신학에 있어서 하나의 패러다임의 위치에 있다.[6] 일찍이 칼 바르트는 교회교의학 I.1에서 삼위일체론을 철저하게 삼위일체론적 표현으로 하나님의 자기계시로 전개한 다음 하나님/인간의 관계를 기독론으로부터뿐 아니라 보다 포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자기계시의 삼위일체론적 성격으로부터 해명하려고 했다.

 

부틴에 의하면 칼 바르트의 이런 삼위일체론적 하나님/인간의 관계성은 칼빈 이후의 개혁주의 전통에서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삼위일체론적 이해가 19세기의 개혁주의 전통과 칼빈해석에서 상당 부분 무시되었기에 칼빈의 삼위일체론적 지평을 재평가해야 된다고 부틴은 바르게 주장한 바 있다.[7] 지난 200년 동안 칼빈해석가들은 하나님/인간의 관계성에 대한 칼빈의 입장을 과격하고 반립적, 양극적인 변증법적 관계로 해석해 왔다.[8]그러나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관계는 칼빈에 의하면 철저한 삼위일체론적 패러다임의 지평 위에 서 있는 것이었다[9] F. Wendel과 같은 가장 권위있는 칼빈연구가들조차도 칼빈의 변증법적 해석을 그의 신학의 본질로, 하나님의 절대적 초월과 인간에 대한 그의 "절대적인 타자성"을 본질적인 원리들로 생각했다.

 

그의 피조물로부터의 무한한 거리를 유지하시면서 어떠한 하나님/인간의 혼합도 허락지 않는 극단적인 구분의 관계로 하나님/인간의 관계는 종종 묘사되었다. 변증법적인 finitum non capax infiniti라는 명제가 경륜적-성경적 삼위일체론적 humanitas capax divinitatis per accommodationem보다는 종종 앞서서 강조되었다. 그러나 펠라기우스에 대항해 타락한 인간과 의로우신 하나님 사이의 무한한 질적인 차이를 강조한 어거스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칼빈은 의로우신 하나님과 죄악된 인간본성에 대한 이러한 변증법적, 반립적 관계는 하나님/인간에 대한 일시적인 묘사이지, 결정적인 것은 아니다.

 

칼빈이 사도신경의 삼위일체론적 구조를 따라서 자신의 기독교 강요를 저술했다는 구조적인 측면에서도 칼빈의 삼위일체론이 하나님/인간의 관계의 기초, 형태, 동력에 대한 전포괄적인 페러다임을 제공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10] 우리는 앞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원색적 삼위일체론적 지평이 점차적으로 퇴색되어감에 따라 하나님/인간(세계)의 관계도 점차적으로 변증법적 관계로 나아갔다고 본다. 이러한 변증법적 관계로 인해 개혁주의의 "인간의 전적부패교리는 인간은 가치가 없으며 어떠한 선도 행할 수 없다"는 오해와 "개혁주의 신앙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부정적, 율법주의적 접근을 조장한다"는 오해를 가져왔다.[11]

 

칼빈주의의 삼위일체론적 페러다임을 깊이 회복해야한다. 한국 칼빈주의 교회현실에서도 하나님/인간의 관계는 반립적, 변증법적으로 이해되고 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는 구호 아래서 참된 휴머니즘으로서의 복음이 간과되고 있는 교회현실은 비삼위일체론적, 일반적인 유신론적 하나님/인간의 관계규정에서 나온 것이다. 한국 칼빈주의 교회는 보다 삼위일체론적인 관계규정으로 이러한 현실을 교정해야 한다.

 

5) 현대신학의 삼위일체론의 재발견

 

초대교부들이 사용했던 테올로기아의 개념은 중세를 지나 근대에 접어들면서 그 의미가 달라지게 되었다. 근대의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의 영향으로 테올로기아는 더 이상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에 대한 존재론적인 질문을 소홀히 하게 되었고 슐라이허마허의 신앙론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인간 자신의 신앙에 관한 논의로 변했다. 서구철학이 존재론에서 후퇴해서 인식론과 언어철학으로 축소된 것처럼 신학도 시대철학의 영향을 극복하지 못했다. 신학은 그 고전적인 의미가 퇴색되어 종교학, 신앙론, 종교철학, 인간구원론, 정치사회적 이데올로기로 되어버렸다. 헬라철학적 존재론에 대한 혁신과 혁명으로 패러다임 전이와 같은 영향력을 행사했던 신학은 칸트 이후 근대신학에 접어들어서는 시대정신을 극복하지 못하고 칸트철학적인 불가지론이라는 먹구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신학의 다시금 자기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을 시작한다.

 

거룩하신 삼위일체되신 주님에 대한 지식으로서의 테올로기아, 가장 거룩하고 경건한 하나님지식 속에 가장 진보적인 세계비판이 존재한다는 혁신된 사고가 회복된 것이다. 신학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송영을 그 본질로 삼는다. 신학은 그 본질에 있어서 삼위일체론적이다. 그러나 삼위일체론적 신학은 인간구원과 세계평화, 사회정의을 떠나서 영지주의적, 신비주의적인 신지식으로 도피하자는 것이 아니다. 성삼위일체 하나님의 삶 속에 세계문제에 대한 답변이 모두 존재한다. 해방신학자 보프에게서는 치열한 정치사회적 프락시스와 경건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송영은 공존한다. 발트 카스퍼에게는 고전적 삼위일체론이 현대 철학적 무신론에 대한 답변으로, 몰트만에게서는 생태학적 위기와 신정론의 답변으로서, 군톤에게는 서구 개인주의/집단주의의 딜레마에 대한 해결책으로 제시되고 있는 점은 삼위일체론적 신학은 가장 경건하면서도 가장 진보적인 세계비판이 된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우리가 삼위일체론적 신학으로 회귀하는 이유는 후기현대의 시대적 유행처럼 고대에 대한 낭만적인 향수 때문도 아니요, 역사비평적 성경연구법의 후기시대 속에서 교회의 자기비판으로서의 현대신학적 개념을 모두 버리고 교회성만을 찬양하는 자기안일로 도피하지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가장 비판적이기 위해 가장 겸손해지고 경건해져야 한다. 교회가 진실되게 교회다울 때 그것은 어떤 켐페인과 프로그램보다도 가장 강력한 사회비판이 될 수 있는 것처럼 신학이 가장 신학다울 때 그 어떤 복잡한 인간학적, 종교학적, 정치사회적 논의 보다도 더 진보적이게 된다. 현대의 다양한 주제신학, 상황신학들은 삼위일체론적 신학 속에서 해소되는 것이 아니라, 지양된다. 삼위일체론적 신학은 결코 또 하나의 현대신학적 유행이 아니다. 서구의 번역신학으로 머물고 있는 한국신학이 입수하게된 또 하나의 유행신학이 아니다. 모든 것을 토착화시켜야만 한국적이 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어슬펀 시도 보다 모든 민족들이 성령 안에서 가져야 할 참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삼위일체론적 신학은 목표한다.

카스퍼의 평가에 의하면 서구 근대사상은 삼위일체론적 신앙고백의 파괴의 역사였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삼위일체론을 재구성하려는 시도의 역사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삼위일체론을 재구성하려는 시도는 신학에서보다는 근대 철학에서 발생했다. 그 대표적 인물은 헤겔이다. 그러나 헤겔의 철학적 삼위일체 이해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와 은폐성을 삼켜버렸다. 헤겔은 신학전통에서 그 동안 오랫동안 잊혀졌던 삼위일체론의 종말론적 차원을 되살렸다. 즉 성자가 성부에게 그의 나라를 넘기실 때 하나님은 모든 것 안에 모든 것이 되실 것이다(고전 15:28). 그러나 삼위일체론은 헤겔의 절대정신이라는 추상적 개념이나 사랑이라는 필연적인 개념으로부터 추론, 증명할 수는 없다. 삼위일체론은 엄밀한 의미에서 신비(mysterium stricte dictum)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 삼위일체론적 지평의 재발견에 있어서 헤겔철학의 일종의 촉매역할을 했다고 본다. 무엇보다도 현대의 삼위일체론의 재발견의 개신교와 카톨릭의 칼 바르트와 칼 라너에게서 이루어졌다. 토마스 F. 토런스는 칼 바르트와 칼 라너가 이룩한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논의없이도 독립적으로 한 분이신 하나님을 말할 수있다는 중세 카톨릭적, 계몽주의적 이원론적으로 왜곡된 전통을 고전적인 동방교부들의 삼위일체 이해를 재발견, 재강화함으로서 결정적으로 교정했다는 점이다. 즉 고전적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앙고백의 원색적 삼위일체론을 회복함으로 다시금 기독교 신학의 모호한 주변으로 밀려난 삼위일체론을 기독교 신학의 근본적 문법이라는 중심적 위치를 회복시켰다는 것이다[12] 칼 바르트와 칼 라너는 una substantia-tres personae라는 전통적 공식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았다. 곧 그들은 하나님을 전통적인 방식처럼 본체로서가 아니라, 주체, 곧 자기계시의 주체(바르트)와 자기전달의 주체(라너)로 새롭게 이해했다.

 

그러나 우리는 바르트는 신적인 주체를 강조하는 관념주의적 사변적 삼위일체론을 수용함으로 결국 삼위일체성보다 하나님의 통치를 앞세우고 이 하나님의 통치에 있어서의 신적이 주체성에 대한 보장과 해석을 위해 삼위일체론을 사용함으로 일종의 기독교적 유일신론으로서 삼위일체론을 제시했고 삼신론에 대한 강한 경계의식으로 인해 양태론적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고 평가한 몰트만의 입장이 옳다고 본다.[13] 물론 군톤의 주장처럼 바르트가 비록 양태론적 경향을 지닌다는 혐의를 충분히 벗어나지는 못한다하더라도 그를 양태론자로 부를수는 없다. 우리가 그를 비판하는 것은 그가 양태론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현대 개인주의의 폐허로부터 인격에 대한 관계적 이해를 회복하는데 미흡했다는 사실에 있다.[14] 바르트의 철저한 삼위일체론적 이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남아있는 독일 관념주의적 잔재와 서방신학의 한 분 하나님에 대한 강조를 몰트만은 동방신학과의 대화로부터 비판했다.

 

그는 성경적 증거에 근거하면 세 위격으로부터 출발하게 되고, 절대적인 단일성이라는 철학적 요청과 철학적 논리에 근거한다면 한 분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게 된다고 말함으로 다소 강한 어조로 자신의 서구전통을 비판했다[15]. 몰트만은 하나님의 한분되심은 절대적, 폐쇄적, 배타적 단자적 단일성이 아니라, 자신을 나누어줄 수 있는 하나됨, 열려있고, 초청하고, 통합할 수 있는 하나됨이라고 표현했다. 몰트만 신학의 방법론적 과격성에도[16] 불구하고 그의 바르트 비판과 삼위일체론적 역사이해는 신선하면서도 도전적인 통찰로 평가할 수 있다. 곧 삼위일체 하나님의 세 위격들의 한분되심은 단일한 본질로 전제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바르트의 주장처럼 하나님통치의 동일성 혹은 라너의 경우처럼 자기전달의 동일성에 의해서 추가적으로 비로소 확보되는 것도 아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통일성은 오직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교제를 통해서 이미 주어진 사실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본질의 동질성 혹은 절대적 주체의 동일성에서가 아니라, 삼위일체의 세 위격들 사이에 존재하는 상호내주적인 하나됨에서 발견해야 한다.

 

칼 라너에게 있어서 삼위일체론의 출발점은 바르트와는 달리 하나님의 주체성이 아니라, 인간의 주체성이라는 인간학적인 동기로 착상되어 있다. 이는 그가 삼위일체의 신비를 철저하게 구원의 신비로 이해하려고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자유롭고 절대적인 자기전달의 사건이다’”. 그러나 바르트가 삼위일체론으로 하나님을 절대적 주체로 주제화함으로 인간의 주체성이 위협을 받는 것과 같이, 칼 라너는 인간의 주체성을 주제화시킴으로 말미암아 삼위일체 하나님 당신이 위협을 받게 되었다. 카스퍼는 칼 라너의 경우 인간 구원을 강조된 나머지 삼위일체께 대한 송영이 약화되었다는 비판을 한다.[17] 하인리히 오토는 라너에게는 아직도 사변적 잔재가 남아있어서 삼위일체 하나님 앞에 서있는 '실제적'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전달의 '가능적' 수취인으로서의 인간에서 출발함으로 보다 철저하게 계시의 실제성에서 출발하지 못했다고 비판한다(S. 340).[18]

또한 칼 라너의 유명한 공리는 "경륜적 삼위일체는 내재적 삼위일체이며, 그 역으로도 해당한다"이다.[19] 칼 바르트도 이와 유사한 표현을 했다.[20] 카스퍼는 경륜적 삼위일체론은 곧 내재적 삼위일체론이라는 공리는 결국 인간의 구원이 하나님과는 구별되는 피조된 선물일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자신을 나누어 주신 하나님 자신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고 풀이한다.[21]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행하신 우리를 위한(pro nobis) 하나님의 구원행동은 곧 하나님 자신의 행동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22]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자신을 주신 계시사건은 결코 배후에서 일어난 숨어계신 하나님(Deus absconditus)의 어떤 흐릿한 주변이나 나머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계시된 하나님(Deus revelatus)은 곧 Deus absconditus라는 구원사적 진리를 말함이다. 또한 구원은 성자께서 이루신 것인데, 이는 성령 안에서 성부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과 딸들이 되는 것이다. 곧 은혜는 성령 안에서의 자유로운 하나님의 자기전달이라는 사실을 말함이다. 몰트만은 십자가신학을 삼위일체론적으로, 삼위일체론을 십자가신학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그의 기본입장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구원경륜적 삼위일체론에만 국한시키고 내재적 삼위일체론과의 연관을 상실한 전통적인 경륜적/내재적 삼위일체론의 구분을 비판했다[23].

 

내재적 삼위일체론과 경륜적 삼위일체론을 동일시하는 것은 구원역사적 경륜적 삼위일체론의 독자성을 흐리게 한 나머지, 영원한 내재적 삼위일체론의 단순한 시간적 현현 정도로 이해할 수 있는 오해의 여지를 가지고 있다. 그럴 경우 성자의 성육신을 통해 구원역사적으로 이루어진 세상 속으로의 시간적 파송과 성부로부터의 영원한 출생은 거의 구별되지 않은 채, 성자께서는 성육신을 통해 역사 속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간과하게 된다. 또한 반대로 내재적 삼위일체론이 경륜적 삼위일체론에 흡수된 나머지, 마치 영원한 삼위일체께서 역사 가운데서 처음으로 또한 비로소 역사를 통하여서 규정된다는 식의 오해를 일으킬 수 있다.

 

그럴 경우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원으로부터의 세 위격들간의 구분은 기껏해야 양태적인 것이며, 역사 속에서 비로소 실제적으로 규정되었다는 오해가 나올 수 있다[24] 그러므로 내재적 삼위일체론과 경륜적 삼위일체론의 동일성은 A=A라는 동어반복적인 의미로 이해되어져서는 안된다. 경륜적 삼위일체론은 내재적 삼위일체론'이다'라는 공리에서 '이다'는 결코 동어반복적인 동일성이 아니라, 구원역사적(경륜적)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나타난 자유롭고 은혜롭고 역사적인 내재적 삼위일체 하나님의 현존이라는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카스퍼는 칼 라너의 그 테제를 다음과 같이 교정했다: "구원역사적인 자기수여 안에서 내재적 삼위일체 하나님의 자기수여는 새로운 방식으로 세계 안에서 현재한다"[25]. 카스퍼는 이 새로운 테제는 내재적 삼위일체론에 대하여 경륜적 삼위일체론의 은혜롭고 자유로우며 케노시스적인 성격을 보호하며, 삼위일체 하나님의 자신의 자기계시 안의(배후가 아니라 !) 내재적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를 올바르게 이해한다고 말한다[26] Y. Congar도 칼 라너의 이 테제의 절대성을 강하게 제한한다. 특히 'umgekehrt'이하의 뒷 문장은 보다 정교한 주의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자기수여로 자신의 '모든' 신비를 관련시켜 계시했는가 ?"라고 그는 질문한다[27]

 

Congar는 라너의 테제를 충실히 발전시킨 Piet Schoonenberg을 비판하면서 인식(認識)의 영역에서 존재론의 영역으로 비약하는 한에 있어서 'umgekehrt'는 문제가 된다고 말한다.[28] 또한 경륜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자기수여는 낮추심, 비하, 섬김 곧 Kenose의 상태로 일어났기에 경륜적으로 계시된 삼위일체론과 영원한 삼위일체론의 구분을 침해하지 않기 위해서는 둘 사이에는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카스퍼와 Congar의 지적대로 칼 라너의 이 테제를 불필요한 오해로 비판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뒷 문장에 대해서는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할 것이다.[29] 그러나 무엇보다도 칼 바르트와 칼 라너를 비롯한 현대 삼위일체론적 신학자들에게서 도전받아야 할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내면적 삶(내재적 삼위일체론)을 교회사의 낡은 기념물 정도로 방치하는 자세에 대한 비판적 자세다. 하나님 본질의 불가침성과 신비를 축소시키지 않는 범위 내에서 신학은 성삼위일체되신 하나님의 내면적 삶을 외면적 구원계시에 근거해 탐구해야 한다.[30] 신학이 경계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내면에 관한 칸트적인 불가지론과 함께 개인주의적 구원에 집착한 나머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대한 실용주의적인 무관심이다. 이런 의미에서 현대신학은 비록 지나치게 하나님의 내적인 삶에 대해 너무 쉽게 말하고 너무 많이 알고 있는것처럼 보이지만, 테올로기아의 고전적 사명을 재발견하여 발전시켰다고 본다.

 

6) 동방신학의 삼위일체론적 지평의 재발견

 

"오라, 민족들아 !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께 경배하자 !" 동방신학은 구원론적인 죄용서로부터가 아니라 삼위일체론과 그리스도의 신인되심으로부터 출발한다. 삼위일체 신비의 계시야말로 동방신학에서 신앙의 모든 신비 중에서 가장 근본적인 신비이다[31] 서방신학에서는 삼위일체론은 기독교 복음의 정수를 농축한 것으로가 아니라 논리적, 수학적 난제를 포함한 하나의 문제로 간주하는 경향으로 흘러 점차적으로 삼위일체론이 의문시된 데 반하여 동방신학과 예배는 줄곧 삼위일체론적 범주들로 채색되어 있다. 서구신학에서는 삼위일체론은 마치 정통신학을 인정하기 전에 힘겹게 넘어야만 하는 일종의 지적인 허들로 간주되었던 것이다[32] 삼위일체의 신비를 맛보는 것은 권위있는 삼위일체 성화에서 뿐 아니라, 기도와 예배를 통해 끊임없이 이루어진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체험은 무엇보다도 예배문서를 통해 이루어진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영광을 돌릴찌어다"라는 예배언어는 끊없이 반복된다. 예배의 시작에서부터 삼위일체 하나님께 대한 부름이 자리잡고 있다: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하나님,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우리를 정결케 하소서, 주(主)여, 우리의 죄악을 사하소서, 우리의 통치자여 우리의 범죄를 사하소서, 우리의 연약함을 돌아보소서, 거룩하신 주님,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고치소서". 이와 함께 아침예배문서에는 항상 "Triadikon", 곧 삼위일체론을 찬양으로 발전시킨 구절을 반복한다[33]. 동방교회에는 삼위일체론적 송영으로 시작되지 않고 끝나지 않는 기도가 없다. 동방교회의 기도는 또한 언제나 성령의 능력 가운데서 일어남을 강하게 부각시킨다[34]. 이런 기도와 송영과 예배에서의 성령의 사역을 강조함으로 동방교회는 서방신학의 그리스도일원론(Christomonismus)의 위험을 경계하고 있다[35].

 

서방신학에서처럼 동방신학에서는 성부의 진노와 성자의 사랑이 분열된 채 대립하지 않는다.[36] 삼위일체 하나님의 본질은 사랑이다. "성부의 사랑은 성자를 십자가에 못박는 사랑이며, 성자의 사랑은 십자가에 못박힌 사랑이며, 성령의 사랑은 십자가의 능력으로 승리하는 사랑이다. 그러므로 동방신학은 고난받을 수 없는 하나님의 고난이라는 서구신학의 자기모순을 반성할 수 있는 신학적 차원을 가지고 있다. 이는 서구신학에서처럼 철학적, 일반적 유신론 혹은 유일신론의 일반범주의 영향 아래 그리스도의 고난을 구원론적, 기독론중심주의적으로만 제한하여 보는 것이 아니라, 보다 폭넓고도 철저하게 성경계시의 경륜에 근거하여 성령론적 차원과 삼위일체론적 차원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자기사건으로 파악한 것이다. 동방신학과 같이 고난받지 않는 신의 공의로운 세계통치라는 아프리오리한 일반종교적 범주에서 자유로와지고 삼위일체론적으로 스스로 고난받으시는 성경계시의 경륜의 아포스테리오리에 충실해질때만이 세계고난의 의미에 대해서 하나님 자신의 답변을 듣게 된다.

 

동방신학은 세 위대한 갑바도기아 신학자들에 의지해서 삼위일체의 하나됨을 구체적, 체험적, 인격적으로 기초시킨다: Christos Yannaras에 의하면 동방교회는 존재에 대한 인격의 우위를 강조한다: " 하나님께 대해 말할 때 동방교회는 언제나 보다 구체적인 것, 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곧 인격적 관계의 하나님을 말한다"[37]. Christos Yannaras는 서구신학이 신앙과 삶을 단절시켜 하나님을 경험할 수 없는 오지로 추방했다고 비판한다.[38] 이에 반해 동방신학은 체험의 신학을 강조한다. Karl Chistian Felmy에 의하면 동방신학에서 이 체험은 경건주의에서처럼 회심이라는 개인적 신앙체험을 의미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교회, 예배, 세례와 성찬, 신비, 기도, 수도를 통한 체험, 곧 교회성이라 할 수 있다[39].

 

경건주의 신학과 경건이 개인적 구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개인적 관계로부터 시작되는데 반하여 동방신학의 체험은 철저하게 삼위일체론적 신학 아래서 구체적인 삼위일체 하나님의 세 위격으로부터 시작한다.[40] 동방신학은 끊임없이 삼위일체 하나님께 대한 송영과 예배, 기도와 찬양의 흐름 속에서 전개된다. Yannaras는 마틴 하이데거를 인용하면서 서방신학적인 사변적 신개념을 비판하고 있다: "자기 원인(causa sui)으로서의 신은 기도할 수도 예배드릴 수도 없는 신이다.

 

Causa sui라는 신앞에서는 우리는 경외함으로 무릎을 꿇을 수도 없고 음악으로 찬양할 수도 춤출 수도 없는 것이다"[41]. 이에 반해 동방교부들과 이를 계승하는 동방신학은 철저하게 인격적인 하나님인식을 가르쳐왔다.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관계는 주체와 객체의 관계가 아니라, 히브리어 와 같이 사랑의 관계이다. 세계와 하나님의 관계를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로 보지 않고 비인격적, 기계적으로 주체와 객체, 원인과 작용으로 본다면 하나님은 세계로부터 단절, 추방되어지고 세계는 독립하게 된다. 사실 서방신학은 동방신학만큼 성경적, 경륜적 삼위일체론적 신학전통에 충실하지 못하였고 자연신학적, 일반적 유신론, 유일신론적 범주와의 불운한 조우를 하게 되었다.[42] 동방신학에 있어서 성경계시에 드러난 세 위격은 케류그마의 대상으로서 신학적 사유와 도그마의 대상인 세 위격의 통일성(Monarchie)보다 선행한다.

 

서방신학은 비인격적, 사변적, 철학적, 일반적 하나님/세계의 관계를 낳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서방신학은 동방신학의 삼위일체론적 세계관을 통해 도전을 받고 반성되어야 할 것이다.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의 관계로 정립되지 않은 지성주의적인 합리적 추론으로 도출된 하나님/세계의 관계는 주지주의적인 객관화와 효용성과 연루된 합목적성의 노예가 되고 만다. 서구신학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인 인격적인 체험과 만남의 신앙을 삶으로부터 추방하게 되고 철학적 개념 혹은 상징적 표상으로 환원하게 됨으로 세속화를 가져오게 되었다는 동방신학의 비판은 정당한 것이다.[43] 러시아 종교철학의 세 가지 특징, 곧 기독교적 특징, 인격주의적 특징, 공동체적 특징은 분명 물질주의적, 개인주의적, 비기독교화되어 있는 서구정신과 철학에 큰 도전과 날카로운 비판이 되는 것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므로 러시아 종교철학은 서구 철학전체에 하나의 충분하가도 필수적인 대안이 되는 것이다.[44]우리는 서구의 탈기독교화, 세속화 과정은 원색적인 삼위일체론적 색채를 퇴색시킨 非삼위일체론화 과정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현대 서구신학의 당면한 반기독교적, 탈기독교적 세속화의 위기는 바로 원색적인 삼위일체론적 차원의 재발견을 통해서 해결되어야 하며 해결될 수 있다고 본다. 사실 현대신학이 전통적인 유일신론을 반성하고 새롭게 철저히 구원역사적, 구원경륜적인 관점에서의 삼위일체론을 재발견하게 된 것은 교회연합운동을 통해서 동방신학과 접촉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동방신학의 성령론적, 삼위일체론적, 예전적, 신비적, 송영적 색채에 서방신학은 깊이 도전을 받았다. 그러므로 이 생태학적 문제에 대해서도 동방신학의 성령론적 관점은 하나의 실마리를 충분히 제공할 수 있다고 본다. 몰트만의 경우 바로 동방신학적 전통에 대한 수용으로 사회적 삼위일체론을 통한 생태학적 답변을 시도했던 것이 그 예이다. 이미 칼빈도 동방신학에 대한 깊은 조예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칼빈은 동방교회에 더 가깝다 할 수 있다. 부틴은 칼빈의 삼위일체론이 가지고 있는 동방교회와의 관련성을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통상 동방교회적인 삼위일체론적 사고방식으로 간주되는 내용들과의 칼빈의 이런 유사성이 있다고 해서 칼빈이 삼위일체론에 대한 동방교회적 혹은 헬라적 접근법을 의식적으로 수용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칼빈 자신의 역사적, 문화적 지평의 한계로 볼 때 특히 그러하다. Perichoresis(circumincessio)교리도 갑바도기아 신학자들의 다른 부분둘과 같이 칼빈 이전 시대에 이미 서방 전통의 삼위일체론의 다양한 형식 안으로 수용되었었다.

 

그러나 칼빈을 위시한 종교개혁자들은 새롭게 준비된 갑바도기아 신학자들과 다른 동방교회 신학자들의 본문들을 접근할 수 있었다. 16세기의 반니케아적 논쟁으로 인해 동방교회의 삼위일체론적 이해의 몇몇 부분들에 대한 새로운 논의가 일어났던 것이다. 그렇지만 칼빈에 대한 동방신학자들에 영향은 결코 적은 것이 아니었다. 핵심적인 부분에서 동방교회 전통과 평행된 강조를 칼빈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삼위일체론의 형성을 지배했던 귀납법적인 성경주석법이었다. 물론 이런 유사성들이 지나치게 과장되어서도 안되겠지만 기존의 서방신학 전통에 대해 현격하게 독립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은 확실하다"[45](Butin, p,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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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Philip Walker Butin, Revelation, Redemption, and Response-Calvin's Trinitarian Understanding of the Divine-Human Relationship, Oxford University Press, 1995. p. 49. 이런 점에서 칼빈은 동방교회에 더 가깝다 할 수 있다. 그러나 "관습적으로 "동방교회적"인 삼위일체론적 사고방식으로 간주되는 내용들과의 칼빈의 이런 유사성이 있다고 해서 칼빈이 삼위일체론에 대한 동방교회적 혹은 헬라적 접근법을 의식적으로 수용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칼빈 자신의 역사적, 문화적 지평의 한계로 볼 때 특히 그러하다. <Perichoresis, circumincessio>교리는 갑바도기아 신학자들의 다른 부분둘과 같이 칼빈 이전 시대에 이미 서방 전통의 삼위일체론의 다양한 형식 안으로 수용되었었다. 종교개혁자들은 새롭게 준비된 갑바도기아 신학자들과 다른 동방교회 신학자들의 본문들을 접근할 수 있었다. 16세기의 반니케아적 논쟁으로 인해 동방교회의 삼위일체론적 이해의 몇몇 부분들에 대한 새로운 논의가 일어났던 것이다. 그렇지만 칼빈에 대한 동방신학자들에 영향은 결코 적은 것이 아니었다. 핵심적인 부분에서 동방교회 전통과 평행된 강조를 칼빈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삼위일체론의 형성을 지배했던 귀납법적인 성경주석법이었다. 물론 이런 유사성들이 지나치게 과장되어서도 안되겠지만 기존의 서방신학 전통에 대(對)해 현격하게 독립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은 확실하다"(ibid., p, 45).

[2] Butin, ibid., p. 41

[3] Ibid., p. 48

[4] Ibid., p.48에서 간접인용

[5] Ibid., p. 42

[6] Ibid., p. 26

[7] Ibid., p. 6

[8]. Butin, 1. Reassessing Calvin's Understanding of the Divine-Human Relationship 중에서 Calvin's View: Dialectical or Trinitarian ?을 참고하라.

[9]. Ibid., p. 39. Butin은 상당히 자세하게 칼빈에 대한 새로운 교회사적 평가논의를 통해 이 명제를 논증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Calvin's View : Dialectical or Trinitarian ? (pp. 15-25)를 참고하라. 물론 우리는 Moltmann의 입장을 따라서 하나님/인간의 관계 뿐 아니라 하나님/자연(창조)라는 보다 넓은 지평까지도 철저하게 삼위일체론적 관계성으로 볼 것을 요청한다.

[10]. Jan Koopmans(Das Altkirchliche Dogma in der Reformation), Werner Krusche(Das Wirken des Heiligen Geistes nach Calvin)은 이에 대한 고전적인 저술들이다(ibid., p. 19에서 간접인용).

[11]. 이 오해는 I. John Hesselink, On Being Reformed - Distinctive Characteristics and Common Misunderstandings, Servant Books, Ann Arbor, Michigan, 1983에 나오는 오해(7)과 오해(8)이다.

[12] Torrance, ibid., p. 4

[13] Moltmann, a.a.O., S. 159

[14] Gunton, ibid.,p.124

[15] Moltmann, a.a.O., S. 167

[16]. 방법론적 과격성이라 함은 몰트만의 신학적 관심에 원론적으로 동의하면서도, 다만 지나친 극단화를 염려하는 입장을 표현하기 위함이다. H. Berkhof, W. Pannenberg보다 더 나아가 몰트만은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하나님 자기 자신 안의 역사'로 주장한다. 그러므로 역사의 의미는 성부, 성자, 성령으로서의 하나님의 자기개현에 있고 하나님의 자기역사는 모든 세계역사의 핵이며 역사의 역사(Geschichte der Geschichte)이다. 죄와 죽음으로 물든 모든 인간의 역사는 이 '하나님의 역사' 곧 삼위일체 속에 '지양되며(aufgehoben)', 하나님의 역사의 미래 속에서 통합된다. 그러나, 세계로부터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세계를 이해하는 몰트만의 사고는 세계의 구체성을 손상시키며 역사를 하나님의 자기발전의 운동으로 협착화시키는 위험을 잠재적으로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J. T. Bakker, Een nieuwe theologia crucis, Tijdschrift voor theologie, 1988. 6.. pp.150-155). Kasper의 비판대로 Moltmann은 지나치게 헤겔철학적 방식으로 하나님을 인간죄악의 역사로 해소(解消)시켜 버린 나머지, 하나님의 즉자적, 대자적 존재(Gottes An-sich- und F&uuml;r-sich-Sein), 곧 내재적 삼위일체와 세계고난사(苦難史)와의 구별을 사실상 흐리게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럴 경우 하나님은 결국 인간의 한 계기(Moment)로 흡수되고 말 것이다(Kasper, a.a.O., S. 86). 이러한 몰트만 신학에 대한 비판을 깊이 염두해 둔다하더라도 몰트만의 입장이 만유내재신론적이거나 헤겔철학적이라고는 보지 않는다.

[17] Kasper, a.a.O., S. 368

[18]하인리히 오토는 라너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실제로, 구속사적으로 발생한 계시에 근거해서 삼위일체론을 구성했다는 의미에서는 사변적이라 할 수는 없지만, 그가 이 계시의 실제성의 내적이고 초월적인 필연성을 주장함에는 충분히 사변적이라 할 수 있다고 한다고 말한다(Heinrich Otto. a.a.O., S. 344).

[19]. K. Rahner, Der dreifaltige Gott als transzendenter Urgrund der Heilsgeschichte, in: Mysterium Salutis II, S. 328.

[20]. " Die Wirklichkeit Gottes in seiner Offenbarung ist nicht einzuklammern mit einem nur, als ob irgendwo hinter seiner Offenbarung eine andere Wirklichkeit Gottes st&uuml;nde, sondern eben die uns in der Offenbarung begegnende Wirklichkeit Gottes ist seine Wirklichkeit in allen Tiefen der Ewigkeit" (KD 1/1, S. 503)

[21] Kasper, ibid., p. 334.

[22]. "Gott hat gehandelt -und doch Gott im Gegen&uuml;ber zu Gott ", Otto Weber, Grundlagen der Dogmatik I, Verlag der Buchhandlung des Erziehungsvereins, Neukirchen Kreis Moers, 1955, S. 424.

[23] Moltmann, a.a.O., S. 177

[24] Kasper, a.a.O., S. 335

[25] Ebd., S. 336

[26] Ebd., S. 336

[27] Yves Congar, Der Heilige Geist, Herder Freiburg, Basel, Wien, 1982. S. 334

[28]. "Das Problem liegt im 'umgekehrt', insofern man damit von der Erkenntnis zur Ontologie &uuml;bergeht"(Ebd.,S. 335).

[29]. 같은 맥락에서 J. Moltmann은 다음의 테제를 제시했다: "Aussagen &uuml;ber die immanente Trinit t d&uuml;rfen nicht im Widerspruch zu den Aussagen &uuml;ber die &ouml;knomische Trinit&auml;t stehen. Aussagen &uuml;ber die &ouml;konomische Trinit&auml;t m&uuml;ssen den doxologischen Aussagen &uuml;ber die immanente Trinit &auml;t entprechen"(S. 171).

[30]. 이 점에 대해서는 Werner Br&uuml;ndle이 잘 말해주고 있다. Werner Br&uuml;ndle, Immanent Trinit&auml;t - ein 'Denkmal der Kirchengeschichte ? ', Kerygma und Dogma 38, Vandenhoeck & Ruprecht 1992.

[31] Karl Chistian Felmy, a.a.O., S. 40

[32] Gunton, ibid., p. 31

[33] Karl Chistian Felmy, a.a.O., S. 43f.

[34] Ebd., S. 106

[35] Ebd., S. 107

[36]서구신학 전통은 헬라철학적 영향아래 하나님의 고난불가능성공리를 고수한 채 성자의 고난의 구원론적 의미만을 말할 뿐 칼 라너가 주장한것처럼 삼위일체론적 의미, 곧 성부와의 관련성을 부인해 왔지만, 현대 많은 서구신학자들은 이를 반성했다. 이는 또한 동방신학의 고난의 삼위일체론적 차원과의 교회연합적 만남을 통해 자극을 받은 것이기도 하다. Moltmann이 러시아 신학자 N. Berdjajew의 사상을 수용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Trinit&auml;t und Reich Gottes, 5 Die Trag&ouml;die in Gott). 또한 한스 큉, 위르겐 몰트만, 키타모리, 칼 라너 등이 성자의 고난과 성부와 삼위일체론적으로 깊게 연관시킨다고 해서 이를 성부수난설이라고 쉽게 비판할 수는 없다. 성부수난설은 성부 하나님 자신이 고난을 당했다는 그런 단순한 주장만은 아니다. 성부수난설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그리스도 사이의 일체의 구분을 인정하지 않는 양태론적 군주론에 기초하고 있기에 하나님의 고난과 성부수난설은 구분되어야 한다.

[37] Christos Yannaras, Person, S. 29(Ebd., S. 46에서 간접인용)

[38]. Ebd., S. 2.

[39] Ebd., S. 4

[40] Ebd., S. 5. 동방신학에 대한 재발견은 결코 하나의 새로운 유행이 아니라, 서방교회도 공유하고 있는 초기 교회전통에 대한 재발견이다. 또한 종교개혁정신의 재발견이기도 하다. 이를 우리는 칼빈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칼빈은 삼위일체론이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사적인 관계라는 기초, 유형, 동력인 성경본문으로부터 유리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스콜라주의의 논리에 의존하는 논증 스타일을 피했다. 대신 그는 성경주석과 교회의 예전적, 교리문답적 상황 안에서의 신앙의 체험에 호소했다. 삼위일체에 대한 그의 일차적인 논증은 세례와 신앙의 대상인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삼위일체론적 이해를 위한 인식론적인 길로서의 신앙이라는 하나님의 선물을 밀접히 상호연관시키는 예전적이며 체험적인 것이었다. 그의 논증의 유형은 세 위격들이라는 성경적 현상에서 출발하여 하나님의 통일성이라는 예전적이고 체험적인 필연성으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바로 이런 논증의 방향은 갑바도기아 교부들의 삼위일체론적 논증에 특징적인 방법들과 현격한 유사성을 드러내는 것이다...신학을 성경주석과 함께 전개시키고자 했던 칼빈의 관심은 전통적으로 삼위일체론에 대한 보다 "헬라적인" 혹은 "동방교회적인" 이해로 간주되어 온 관점들과 현격한 유사성을 낳게 했다."(Philip Walker Butin, ibd., p. 44).

[41] Ebd., S. 36에서 간접인용.

[42]. 이는 서구신학의 자기반성이다: " De Deo Uno und De Deo Trino, die schon seit langem durchg&auml; ngig als selbstverst&auml;ndlich empfundene Scheidung und Reihung der Traktate De Deo Uno - De Deo trino. Sie ist erst allgemein&uuml;blich seit der Verdr&auml;ngung der Sentenzen des Lombarden durch die Summe des heiligen Thomas(Ebd., S. 323) 사실상 경륜적 De Deo Trino보다 De Deo Uno를 선행시키는 서방전통과는 달리 동방신학은 경륜적 세 위격을 선행시킨다: "Von Basilius d. Gr. l&auml;ßt sich z. B. sagen: "was das trinitarische Geheimnis insgesamt anlangt, so galten ihm die drei Hypostasen als κηρυγμα, ihre Einheit dagegen, die 'Monarchie' als δογμα.. Damit war im Verst&auml; ndnis des Großen Basilius die Dreiheit als Gegenstand der Verk&uuml;ndigung der Einheit als theologischer Spekulation vorgeordnet"(Ebd., S. 46)

[43]. Ebd., S. 36. "릴케가 "이 세상 어디에도 러시아만큼 하나님에게 가까운 나라는 없다"고 말할정도로 러시아 전통철학자들의 사상은 러시아 정교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그 전체적 성격은 기독교적이라 할 수 있다. 러시아 전통철학에는 인간의 인격에 대한 존숭사상이 깊게 각인되어있다. 곧 인간을 고등동물로서나 공신주의에서 보는 사회적, 경제적인, 즉 소유적 존재로 보지 않고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된 영적 존재로 보고 이런 영적 존재성에 인간의 본래적인 자유가 놓여 있다고 강조한다". 전광식, 마르크스 이후의 철학, 이문출판사, 1994, p. 213-214. 이러한 러시아의 전통철학의 특징은 바로 러시아 정교회의 삼위일체론적 차원의 강한 영향에서 비롯된 것으로 본다.

[44]. "서구철학은 영성의 철저한 결핍위에 수립되어 있는 반면에, 러시아 종교철학은 바로 영성을 기반으로 한 철학이다", 상게서, p. 215.

[45] Butin, ibid., p. 45

▶ 원문<The original> : http://www.geocities.com/diakonia.geo/trinity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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