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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출처 : | http://www.dangdang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303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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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원은 멋이 아니다.(3)
지성수 | sydneytaxi@hanmail.net
2018년 06월 14일
▲ 영화 '위대한 침묵 (Into Great Silence)'의 한 장면
수도원은 영성을 추구하기 이전에 인간들이 모여 사는 공동체이다. 그러므로 공동체 훈련이 안되면 제 아무리 고귀한 영성을 추구하려 하여도 수도원 생활이 유지될 수 없다. 가톨릭의 수도원은 천 년 이상의 전통 속에서 공동체의 모습이 형성되고 굳어져 왔다. 그러므로 개신교에서 수도원 운동을 시작하려면 먼저 공동체 훈련이 먼저 되어야 한다.
예수의 가르침은 실제의 생활에서 개인들이 실천 할 수 없는 것들이 많다. 그래서 예수는 말끝 마다 ‘너희는 서로…… ’라고 하면서 ‘서로’를 강조 했다. 예수의 가르침은 일차적으로 그를 따르는 제자공동체를 대상으로 한 말이다. 예수의 윤리는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가르친 윤리가 아니고 공동체 안에서 실천해야 하는 윤리였다. 그래서 슈바이처는 예수의 윤리를 이 세상과 하나님 나라의 [중간 윤리]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불교에서 부처, 불법, 승가의 3 보배에 귀의한다는 말이 있다. 부처나 불법에 귀의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승가에 귀의 한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왜 스님들에 의지해야 하느냐고 의문이 제기 될 수 있다. 그러나 이 말은 스님들 개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뜻을 따라 살려고 하는 불자들이 공동체를 말하는 것이다. 즉 부처도 공동체를 보배로 생각 했다는 것이다.
불교의 공동체는 수행을 하고자 하는 소수의 사람들을 위해 형성된 것이다. 다시 말해 여기엔 개인주의적인 정서가 깔려 있다. 반면에 기독교의 공동체는 수행을 할 만한 여건이 현실적으로 되지 않는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었다.
초창기의 불교와 기독교는 기본원리 면에서부터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불교는 '수행을 하려면 먼저 공동체를 이루어라'이지만 기독교는 '세상을 공동체로 만들어라. 그러면 삶 자체가 수행이 된다.'는 것이다. 자발적인 수행자들이 모이는 불교에 비해서 결과적으로 기독교적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더 어렵다.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초대교회 공동체가 일시적이고 계속될 수 없었던 이유는 소비만 있고 생산이 없었던 공동체였기 때문이다.
1968 년을 기점으로 미국을 중심으로 퍼져 나갔던 반문화 운동으로 히피운동이라는 것이 있었다. 그 때부터 세상에서 소위 ‘Alternative Lifestyle(대안적 삶)’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한국에서는 ‘대안학교’라는 말로 많이 알려졌다. 기독교 공동체 운동은 기존의 교회에 대한 대안 즉, Alternative Lifestyle이 아니라 기독교의 Original Lifestyle이다. 원래 기독교는 계층적인 유대교에 대비해서 평등한 공동체로 시작을 했다.
“너희가 세상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아니했다”(요 15:19)는 말씀처럼 공동체는 세상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인간이 모여 사는 곳에서 벌어질 수밖에 없는 공동체 내부의 구성원 상호간에 벌어지는 끝임 없는 적고 큰 갈등이 발생한다. 오히려 외부적으로는 한 없이 평화로워 보여도 실제로는 날마다 보이지 않는 총탄이 오고 가듯 치열한 영적인 전쟁이 벌어지는 최전방일 수가 있다.
공동체 생활은 마치 군대나 감방 마냥 꼼짝없이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야 하기 때문에 늘 다른 사람과 부딪치기 마련이다. 그러니 그 속에서 날마다 크고 작은 갈등이 생길 것이다. 따라서 자연히 공동체 생활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영적으로 긴장된 생활을 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 그러나 마치 태권도 선수가 대련을 통하여, 권투선수가 스파링을 통하여 강해지듯이 영적으로 강해질 수 있는 것이다.
공동체 생활은 현실적으로 공동체가 모든 책임을 지어줌으로 아무런 염려 없이 살아갈 수 있다.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 배를 받되”(마태 10:30)라는 말씀이 공동체에서 문자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실제로 공동체 생활의 현실적 유익은 말로 표현 할 수 없을 정도로 풍부하다.
하나님 나라는 다수결로 되는 것이 아니다. 한국 교회의 문제점은 공동체성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동체적인 수도원 운동이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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