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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기독교 세계관

사회역사경제 박병길 목사............... 조회 수 3168 추천 수 0 2010.05.22 13:4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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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궁극적 실재

기독교 세계관을 구성하는 궁극적 실재는 창조주 하나님입니다. 다른 여러 종교나 이데올로기 등에서는 여러 이방 신들, 특정 물질, 논리적 세계, 사회나 경제적 구조 등을 제시하고 있는데 반해 기독교는 우주 만물 가운데 하나님 한 분만이 영원하고 자존적이며 그 외에는 일시적(temporal)이고 의존적(depedent)인 것으로 단정합니다.

궁극적 실재에 대한 개인의 믿음은 그가 따를 종교나 이데올로기를 결정하는데 기초가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올바른 기독교 세계관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개인적 신앙고백과 그의 의식속에 궁극적 실재로서의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역대기 기록자의 하나님에 대한 고백을 살펴보고 그의 세계관과 어떤 관련성이 있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기감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유의 머리심이나이다.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대상 29:11,12)

그의 하나님에 대한 고백은 절대적입니다. 우주 만물의 주인이 여호와 하나님이고, 만백성의 부귀 영화를 주관하시며, 크고 존귀케 하시는 능력이 하나님의 손이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인식을 갖고 있는 그는 세상을 바라보고 삶을 경영해 가는데 있어서 어느 하나라도 그 인식과 관계없이 이루어지는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기독교 세계관을 구성하는데 존재와 원리의 궁극적 실재로서 하나님에 대한 인식은 우리 각자에게도 똑같은 비중으로 다가옵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에 대한 확실한 신앙 고백과 의식으로 단련되어 있다면 우리의 중심을 흔드는 모든 세속적인 가치관에 의해 삶의 기준이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신앙고백이 흔들리게 되면 외양으로는 분명히 그리스도인이지만 실체로는 무신론 혹은 세속화의 길에 서서 허우적거리게 되는 것입니다. 알곡의 겉모습만 닮은 가라지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힘써 알아가야 합니다.

 

인간에 대한 이해

 

올바른 세계관은 온갖 왜곡된 가치관에 감염된 인간을 그 본연의 위상대로 돌이키는 목표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관심이 첨예화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 세계관을 구성하는데 있어서 그 궁극적 실재로서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갖는 것이 우선 요구된다면 그 실재가 가장 크게 방영되는 ‘인간’에 대해서 바르게 이해하는 것도 그 못지 않게 중요한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인류학자들에 의해 다각도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대답은 궁극적 실재를 무엇으로 보는가에 따라 양상을 달리 합니다. 그것을 어떤 물질로 보는 사람은 인간에게 영혼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답하고, 관계적 측면만을 강조하는 사람은 인간을 사회적 존재로 정의하고, 경제활동의 측면만을 보는 사람은 인간을 경제적 제화 창출의 주체로 정의합니다. 그리고 인간을 진화론적 입장에서 보는 사람은 가장 진화돤 영장류로 정의합니다. 그렇다면 인간에 대한 기독교적 정의는 무엇인가?

기독교는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그리고 하나님께 불순종하므로 타락하여 그 형상이 파괴된 존재로 봅니다. 인간은 타락으로 인해 창조시 주어진 하나님의 형상은 크게 훼손되었고, 육체적 능력 역시 제약을 받아 크게 축소되었으며, 영적으로는 죽은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인간에 대한 기독교적 견해는 인간에게서 궁극적 실재가 되는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를 인식하도록, 또한 그 인식에 근거하여 타락으로부터 돌이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기를 끊임없이 요구합니다.

그리고 성령은 돌이키려는 사람에게서 동력원이 되어 하나님의 한없는 자비심, 새생활에 대한 희망을 일깨우는 등의 일을 이루어 가십니다.

인간은 어떻게 그리고 어느 정도 회복될 수 있는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이 타락함으로 그 형상이 파괴되었다는 것은 단지 도덕적 회복만을 필요로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본성과 타락의 양상에 관련지어 회복의 방법과 방향성을 제시해 주기도 합니다. 인간의 타락은 인간이 자력으로 자신의 죄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음을 보여주고 있으므로 구원자를 요구하며, 그 구원자의 사역에 의해 궁극적 실재인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 아래로 복귀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인간은 비록 타락하여 창조 당시의 위상이 파괴되기는 했지만, 타락으로부터 돌아서서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 아래로 복귀되는 것을 전제로 할 때, 여전히 모든 피조물 중 가장 존귀한 존재로서 자리를 구축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관은 어떤 편의성에 따라 인간의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본연의 인권을 옹호 받도록 그 위치를 점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죽음에 대한 이해

 

인간에게 있어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마지막 절차라고 할 수 있는 죽음이란 그것이 살아있는 모든 사람에게서 현실적으로는 직면하지 않는 미래형 사건이지만 그가 살아가는 동안에 적잖은 영향을 끼치는 것입니다. 실제로 죽음에 대한 어떤 긍정적인 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의 현재 살아가는 모습은 그렇지 못한 사람에 비해 훨씬 자신감 있게 비춰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죽음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의 대답은 이미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신(神)과 인간의 이해에 연계되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의 존재를 유용론적 입장에서 보는 사람은 죽음을 소멸이라고 볼 것입니다. 불교적인 시각에서는 끝없는 윤회의 한 단계로 볼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적 시각은 사람의 죽음을 어떻게 보는가?

기독교에서는 죽음을 영과 육의 분리이며, 영생과 영벌의 문으로 봅니다. 이런 현상은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으며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이 그 마지막 과정으로 겪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한번 죽은 것은 하나님께서 정한 것이며, 그 후에는 선악간에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히 9:27). 각자에게 영생과 영벌이란 결과는 어떻게 결정되는가? 인간은 타락하여 하나님에게서 떠나게 되었고 그 결과 죽음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인간은 더 이상 창조주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창조의 이상을 실현하는데 일조하지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죽음에 처한 곧 영원한 형벌에 처한 인간에게 하나님은 다시 기회를 제공하셨습니다. 화목을 위한 재물로 독생자 그리스도를 내어주신 그리스도 안으로 돌아온 자를 자녀로 삼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밖에 있는 자는 여전히 죽음 곧 영원한 형벌에 처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기독교 세계관은 내세를 내세만의 독립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이생과의 연계적 입장에서 바라봅니다. 이 땅위에서의 삶의 형태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사람이라면 그것이 비록 나그네와 행인으로(벧전 2:11), 혹은 외국인으로(히 11:13)순례 길을 가는 형태이지만 자연스럽게 영원한 나라로 연계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때 믿는 자의 죽음이란 땅 위에서 순례 길의 마침임과 동시에 영원한 나라의 입문이 되는 것입니다.

 

도덕에 대한 이해

 

기독교 세계관의 구성 요소에 있어서 네번째 질문은 도덕의 기초와 그 목표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계약적으로 발생된 도덕이 어떤 기원을 가지고 있는지, 또한 그것이 어떤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는지에 대한 진정한 대답을 제시할 수 있을 때 도덕은 인간 존재의 가치를 격상시키는 진정한 지침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흔히들 도덕을 인간의 사회성이 맺은 최고의 열매라고 합니다. 이와 같은 정의가 그 타당성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그 기원과 목표가 냉철하게 검증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도덕의 기원은 이미 전술한 신관과 인간관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일 인간을 자연발생적 존재 즉 진화론적 소산으로 보거나, 그 가치를 수단만을 강조하는 유물론적 입장에서 보게 되면, 그 사이에서 형성된 도덕이란 필요와 상황에 따라 시대와 사회 그리고 민족에 따라 춤추는 꼭둑각시가 되어버릴 것입니다.

식인종 마을에서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 도덕이 되고, 해적 마을에 서는 남을 해치고 물건을 훔치는 것이 도덕이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도덕이 상황윤리를 수습하는 수단으로 전락해 버릴때 더이상 도덕이라는 개념으로 정의하거나 그 의미를 부여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지양하는 도덕에 대한 이해는 중요한 것입니다.

기독교에서 도덕의 기원은 불변하는 하나님의 속성에 근거합니다.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절대 변하시지 않습니다. 또한 사람을 지으신 목적도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그 사이를 관상하는 도덕 개념 역시 시대나 지역 그리고 민족에 따라 불변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요소들에 따라 문화와 가치관의 차이는 있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다양한 문화와 가치관이 투시된 어떤 획일적인 폼을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그 근간을 형성하는 바탕에 대한 것입니다. 아무리 문화가 다양하다고 할지라도 무고한 사람을 해치거나 남의 물건을 훔치는 것을 도덕이라는 그릇에 담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비록 문화와 가치관이 다르다고 할지라도 그 기준을 하나님께 두어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벧전 1:15)는 목표를 지향해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회가 파행으로 치닫을때 가장 선두에 서는 것은 도덕적 파괴입니다. 오늘날 우리 나라를 보면 이미 그 위험 수위를 넘어가고 있다는 인식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경제적, 정치적 혼란이 아무리 큰 산처럼 보일지라도 그보다 우선 넘어야 할 산은 도덕성 회복인 것입니다. 여기에 민족의 장래가 있는 것입니다. 

 

역사에 대한 이해

 

인류가 살아가고 있는 지구상에는 수많은 사상들이나 사건들이 발생했다가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지곤 합니다.

이런 흐름에 따라 세상의 정치, 경제, 문화 등 사람들의 삶에 관련된 커다란 틀이 바뀌어 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세월의 흐름에 따라 삶의 틀이 바뀌어 가는 것을 분야별로 청론하면 그 분야의 역사가 되고, 그것들을 합하면 인류 역사가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역사란 사상을 기반으로 하는 삶의 틀에 대한 서술이므로 바라보는 이의 기준에 따라 그 정의가 다양할 수 밖에 없습니다.

고대인들은 역사를 평면적으로 무한히 반복되는 주기적인 것으로 보았으며, 불교에서는 끊임없는 윤회로 보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지식의 폭이 넓어짐에 따라 역사관도 변하여 중세 이후에는 과학의 발달과 더불어 여러 사조에 근거한 진보주의적 역사관들이 등장하고, 기독교적 역사관도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역사에 의미 부여를 하는데 있어서도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불교에서는 윤회에서 벗어나는 해탈의 과정으로 보며, 진보주의자들은 지상낙원을 이루어 가는 과정으로 봅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에서는 역사를 어떻게 보는가?

기독교에서는 처음부터 역사를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시는 구속사로 보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크게 세 가지 특성이 있습니다. 신적 간섭(divine intervention), 방향성(directionality), 종말사상(escatology)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신적 간섭이란 인류 역사의 중심이 사람의 계획에 의해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그 시작과 과정과 끝이 하나님에 의해서 주관되어진다는 것을 말하며, 방향성이란 역사의 진행이 진화론자들의 주장과 같이 우연히 생성되었다가 없어지는 것의 반복이 아니라, 어떤 목적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역사는 시작이 있었던 것처럼 목적과 부합된 종말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청지 창조는 역사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이는 단지 이 세상에 없었던 인간과 물질이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만이 아니라, 인간의 삶의 물인 사상, 정치, 경제 그리고 문화 활동의 시작 테잎을 끊은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역사관은 그 시작과 과정 그리고 마무리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 목적하신 대로 이끌어 가시기 위해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심으로 인류 역사를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여 형성되는 것입니다.(히 1:3).

 

기독교 학문 활동

 

인류의 학문 활동은 인류의 역사의 기원과 맥을 같이 할 만큼 인간이 이 세상에 존재했던 그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고대 학문, 중세에는 중세 학문, 현대 사회에서는 현대 학문이 인류 문명의 전령처럼 앞장서 가며 사람들의 사고와 의식을 개척해냈습니다.

이처럼 인류 사회 발전의 선구자적 역할을 한 학문이 긍정적인 면만을 보유하고 있는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학문은 그 기본 전제가 인간의 이성인 만큼 인간이 이해하지 못하는 영역의 진리를 외면하는데 있어서도 당장 역할을 톡톡히 했습니다. 예를 들면 진화론으로 창조론을 반박하는 것 등이 이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학문에 대한 정의는 일반 교육학에서의 그것과는 분명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독교 세계관에서 학문이란 하나님의 피조세계를 대상으로 거기에 내재해 있는 하나님의 속성으로서의 조화와 질서를 찾아내는 행위를 말합니다. 창조를 전제로 할 때, 학문의 근본은 하나님의 피조세계를 떠나서 존재할 수 없습니다. 가시적인 물질세계를 연구하는 자연과학이나 공학, 농학은 물론, 비가시적인 논리의 세계이나 심리적인 세계, 그리고 사회 구조까지도 하나님의 피조 범주 안에 있기 때문에 이들을 연구하는 철학이나 예술, 문학, 사회과학 역시 피조세계의 한 측면에 대한 연구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피조세계를 연구하는 학문의 목적은 무엇인가?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피조세계의 연구를 통해 이를 만드신 창조주의 신성과 능력을 발견하여 그에 상응한 창조주의 위상을 인정해 드리는 것, 곧 창조주께 영광과 찬송을 드리는 것입니다. 둘째는 피조세계의 연구를 통해 얻은 지식으로 피조세계를 보호하고, 그것들이 창조주의 창조 목적대로 개발되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이웃의 복리를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학문하는 태도는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관계성 안에서 분명하게 정립되어 있어야 합니다. 마음과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내 자신을 사랑하듯 사랑하는 자세로써 학문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분명한 태도 안에서 맺는 열매라야만 인류 공동체의 환경과 생명을 파괴시키지 않고 유익하게 하는 청지기로서의 사명을 다하게 되는 것입니다. 학문의 목적도 결국은 위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옆으로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적 창의성

 

인류의 문명은 인간의 창의성을 토양으로 하여 발전해 왔습니다. 가히 인간의 창의성은 어디까지가 한계인가? 지금부터 일 이십년 전만 해도 만화책 속에나 등장할 법한 공상과학들이 현재에는 버젓이 현실로 드러나고 있는 것을 보거나, 현재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공상과학들이 제시되고 있는 것을 보면 인간의 창의성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가늠하기가 어렵습니다.

이처럼 인간은 창의성에 의해 새로운 문명을 창출해 내곤 했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저는 막연히 창의성 자체를 찬양하지는 않습니다. 창의성은 인류 문명을 발전시키는 긍정적인 면을 가지고 있는 반면 때로는 인간으로 하여금 죄악의 첨단을 걷도록 하는데 일등 공신 역할을 톡톡히 해 왔기 때문입니다. 인류로 하여금 산업혁명을 일으켜 그 수준을 한 단계 높여주기도 했지만, 인류가 양차 세계 대전을 일으켜 스스로 인간이기를 포기할 정도로 약해지는데 있어서도 일등 공신 역할을 해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의성은 무엇이든지 새롭게 개발하여 힘의 우위를 점유하려는 제국주의적 발상에 의해 발휘되어지기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을 반영하는 청지기로서의 태도에서 발휘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의 창의성이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의 본성중의 하나로서 창조 세계에 내재해 있는 잠재적 가치를 갖고 그것의 실현을 추구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그리고 창의적 활동은 그 사람의 도덕성이나 가치관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반영하도록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가공할 무기를 만들어 내어 사람을 대량으로 살상한다거나, 인간을 복제하여 창조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등의 창의성은 하나님의 백성을 섬기는 청지기로써의 자세라기 보다, 인간이 피조성을 초월해 하나님처럼 되어 보려는 사탄의 죄악인 것입니다.

다가올 21세기는 창의성에 의해 빛을 발할 시대입니다. 창의성에서 탁월한 개인이나 나라는 앞서 갈 수 있고, 그렇지 못하면 뒤에 처지게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이런 현상의 대부분이 기독교 정신과 관계없이 세속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나 국가를 누르고 우위를 점유하려는 힘의 원리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 연구원이나 학생은 기독교 정신으로 사람들을 섬기고 인류 공동체에 유익을 끼칠 창의성을 드러낼 수 있는 지도자가 되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21세기적 선교 사역에 적극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게 되고, 주님의 문화 명령에 수종드는 자로서의 소임을 다 하게 될 것입니다.

기독교 세계관으로 보는 괴학기술

 

과학과 이성은 어울리지 않는 비교일지 모르지만 이 세상의 생성 원리와 방향성을 결정하고 설정하는데 있어서 커다란 전제가 됩니다. 이러한 전제가 사람들의 사고 속에서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문명과 산업이 발전되면 될수록 사람들의 사고는 과학에 의해 지배되는 듯 싶지만 사실은 오히려 이성에 자신의 운명을 거는 경향이 더해 가고 있습니다.

기독교 세계관은 과학에 대한 그 개연성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존재와 그 방향성이 창조주의 주권 하에 있는 것으로 보기 때문에 과학과 기술을 인류역사 초두에 창조주 하나님에 의해서 인간에게 주어진 문화명령(창조명령)의 한 부분으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비슷한 견해로 미카엘 포스터(Michael Foster)는 “자연법칙이란 희랍 과학에서와 같이 독자적이고 논리적인 필연성이라기 보다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으로 보는 기독교적 관점이 근대 과학으로 실증적 연구를 할 수 있게 했다”고 주장합니다. 과학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자연을 개발하고, 발전시키는데 있어서 미신적인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따라 자유롭게 실험하고 관찰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분명히 강조되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이성으로부터 원리와 결과를 수용하려는 교만의 안테나가 있습니다. 인류 역사를 보면 새로운 과학 탐험을 할적마다 이 안테나는 더욱 활발하게 작동하여 하나님을 배제해 버리곤 했습니다. 근대 과학의 발전은 계몽주의 시대를 거쳐 어거스트 꽁트(Auguste Conte)에 와서는 과학적 휴머니즘(scientific humanism)과 더 나아가 과학만능 단계로 변질되게 되었습니다. 과학적 휴머니즘에 의하면 과학만이 믿을만한 지식을 제공하며 인간을 고통과 재난으로부터 해방시켜줄 구세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과학적 휴머니즘은 20세기말에 와서는 과학주의와 기술주의라는 극단적 이데올로기로 발전하여 과학과 기술이 도리어 인간위에 군림한다고 주장합니다.  

기독교세계관에서는 과학을 구주로 보는 과학주의나 진보된 기술이 삶을 주관하리라는 기술주의를 우상으로 간주합니다. 과학과 기술은 피조세계에 대한 문화명령의 일부로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것이므로 궁극에는 하나님의 선한 목적을 위해 사용하도록 허락된 것입니다. 따라서 과학과 기술에 의한 자연의 착취를 반대하고 천연자원에 대한 지나친 의존을 견제합니다. 결국 인간의 희망은 과학과 기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께 있습니다. 자연은 인간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며 과학과 기술도 궁극에는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을 이루는 수단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 노동

 

사람들에게는 몸에 병이 들었거나 요즈음처럼 불경기를 맞아 실직을 당했거나 하여 일을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지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때 사람들은 삶의 의욕을 상실하며 균형을 잃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견디다 못해 보수가 없더라도 일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애원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와같은 처지에 처해 본 사람은 일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곧 확인하게 됩니다.

사람이 땀흘리며 일할 수 있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어떤 축복보다도 고귀한 것입니다. 일이란 주님께서 주신 자원들에 노력을 가하여 그 부가가치를 높여 편리를 도모하고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과정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일하는 사람에게는 물질적인 유익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일을 통해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건강을 얻게 되며, 또한 이웃을 섬기며 하나님에 대한 바른 신앙을 얻게되는 것입니다.

고대 희랍이나 동양 사회에서는 육체적인 것을 천시하고 정치활동 같은 육체적 노동을 하지 않는 직업을 귀하게 여겼습니다. 르네상스(Renaissance)인본주의자들도 손으로 하는 노동을 천시 여겼고, 우리나라 역시 양반과 천민을 구분하여 노동을 하지 않는 계급과 하는 계급을 구분하였습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땀흘려 일하는 노동을 천박한 것으로 여겼으며 그런 일에 종사하는 사람을 천민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견해는 이와 다릅니다. 노동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셔서 인간에게 주신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어떤 풍요를 주실때 인간은 노동이라는 제도를 떠나서 아무것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일하기 싫은 자는 먹지도 말라고 경고하듯(살후 3:10)노동은 인간 존재의 본질적 측면의 하나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루터와 칼빈에 의해서 종교 개혁이 단행될 때 빠뜨리지 않았던 중요한 항목 중 하나는 노동에 대한 왜곡된 가치관을 정립시켜 그리스도인이 소신것 일하게 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노동을 천박한 것으로 바라보게 한 것은 사람을 교만과 이기심의 노예로 전락시켜버린 죄입니다. 인간의 죄성은 신성한 노동의 원래 모습을 왜곡시켜 노동을 단지 생산 수단으로 전락시켰습니다. 이윤만을 노동의 궁극적 가치로 보게끔 하였습니다. 이러한 견해는 노동의 주체인 사람을 보는 시각을 변질시켜 경제적 능력 혹은 노동 능력이 없는 사람에 대해서는 무가치하게 여기는 인간관을 형성해 냈습니다. 노동의 능력이 있다 할지라도 생산직에 종사하는 사람보다 관리직 혹은 연구직에 종사하는 사람을 우대하는 계급 사회를 만들어 냈습니다.

주님은 단지 생계 수단을 위해서 일을 허락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의 하나님의 백성으로써 삶을 살아가도록 허락하신 것입니다. 일을 통해서 자신뿐만 아니라 이웃이 함께 그 유익에 참여토록 하는 봉사의 수단으로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는 하나님의 공의와 평안(shalom)을 이 땅위에 정착시키는 자세로 일을 해야 할 것입니다.

이원론(Dualism)적 세계관

 

교회에서 수많은 설교와 가르침으로 믿는 자들은 열심히 세워가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의 사고와 행동에 지대한 악영향으로 작용하는 세속적 세계관이 그 안에서 여전히 그 날개를 활발히 치고 있습니다.그러므로 저는 앞으로 몇차례에 걸쳐 그 정체를 살펴보고, 이에 대한 우리의 태도들을 새롭게 정립하여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구가하는 장으로 삼고자 합니다.

이원론이란 서로 대립된 두 개의 원리로부터 실제의 부분이나 전체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흔히 신화에서 말하는 원시적 이원론이란 빛과 어두움, 하늘과 땅 등을 구별하는 것이나 조로아스터(Zoroaster)교나 마니(Mani)교에서 선한 신과 악한 신, 빛으로 조명되는 선한 세계와 물질적인 악의 세계로 구별하는 것 등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신화적, 종교적 이원론에 비해 정신과 물질을 우주의 근본 구성요소로 보는 철학적 이원론은 이미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나타나지만 본격적인 등장은 데카르트(R. Descartes)와 칸트(K. Kant)에서부터 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데카르트는 신에 의존하는 유한적 실체로서의 정신과 물체의 이원론을 수립했으며, 그후 칸트는 물체 자체와 현상, 자유 의지와 필연을 구별하는 전형적인 이원론의 철학 사상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적 세계관과 관련하여 고대 희랍식 이원론이 체계적으로 기독교 내에 도입된 것은 중세 최대의 카톨릭 신학자라 불리는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에 의해서였습니다. 그는 기독교 교리와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의 철학을 종합하여 스콜라(Scholar)철학을 집대성하였습니다. 그는 이성과 신앙을 예리하게 구별하여 신앙은 계시에 의존하고 철학은 이성의 영역에 속한다고 하였습니다. 인간 이성의 법칙이 지배하는 영역을 자연이라 분류하고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 지배되는 영역을 은총이라고 불렀습니다. 이와 같은 이분법에 의해 이 세계를 필연에 속하는 속된 영역과 은총에 속하는 거룩한 영역으로 나누었으며 세속은 이분법에 의해 이 세계를 필연에 속하는 속된 영역과 은총에 속하는 거룩한 영역으로 나누었으며 세속적인 일과 영적인 일을 구분하였습니다.

이러한 이원론적 사고는 문화를 이성의 산물, 곧 자연의 영역에 속하는 세속적인 것으로 간주하여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하달 받은 문화 명령(창조 명령)에 대한 청지기적 삶을 살아가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입지를 그 근본부터 흔들어 놓았을뿐만 아니라, 그 결과 방향성을 상실한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하늘만 쳐다보며 문화 형성자(culture-formers)가 아닌 문화 추종자(culture-follower)로 전락되도록 하는 총체적 불순종의 빌미를 제공한 것입니다. 교회가 이러한 사상을 사고와 행동의 지침으로 삼음으로 기독교안에서 인간에 대한 귀천의 구분이 생겨나고 직업의 봉급을 매겨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안식처가 되기보다 오히려 위화감을 조성하는 또 다른 한 단체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원론적 사고의 틀에서 해방되어야 합니다. 속된 것을 경계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우리가 지향해야 할 것은 이성으로 성숙을 구분하려는 태도를 지양하고 모든 것을 수용하심으로 일관하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정금과 불순물은 용광로 속에서 가려집니다. 우리의 중심이 복음으로 불타는 용광로가 되어 세상을 수용하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시면 선이 되며, 사람의 이성만이 활개를 치면 악이 되는 것입니다.

세속주의(Secularism)

 

세속주의는 르네상스(Renaissance)와 계몽주의의 요동에 의해 시작되어 오늘날에는 서구 사회는 물론 전 세계를 지배하는 세계관의 대명사와 같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인간이 중심이 되는 세속주의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경건주의 혹은 영성에 의한 세계관 확립을 이룰 수 없기 때문에 이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하여 이 글을 게재하는 것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의 “자연과 은총”구조는 세속주의를 태동하는 충분한 빌미를 제공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이 우주와 세계의 주인이 되는 것을 주장하는 사상가들은 자연과 은총에서 은총의 영역을 대폭 축소 내지 추방하는 대신 자연의 효율성을 극대화시켜 그 자리를 인간의 자유로 채웠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시도는 수많은 이데올로기들, 즉 계몽주의 자연주의, 무신론적 실존주의, 진보주의 등으로 구체화되며, 세속주의는 그러한 이데올로기의 파도를 타고 유유히 현대인의 심령 속으로 항해해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원론에서 제한적으로나마 인정되었던 하나님의 계시 영역은 거의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세속주의는 문화활동을 창조주 하나님의 문화 명령에 따라 인간은 청지기로서 수종 드는 신·중심적 보존활동으로 보는 기독교적 관점과는 반대로, 인간을 절대화하여 인간 스스로가 보다 나은 세상을 건설하여 언젠가는 낙원을 건설할 수 있는 과정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처럼 세속주의가 유토피아적 종말관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기독교 세계관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으나, 후자는 하나님이 중심이 되는데 비해 전자는 인간이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곧 기독교는 인간이 하나님을 만유의 주로 섬기며 그 사역에 동참하는 것을 문화활동으로 보는 반면, 세속주의는 인간을 주로 받들며 그들이 만들어 놓은 문화의 산물을 우상화하는 것을 문화 활동으로 보는 것입니다. 한 예로 1793년 11월 10일 파리에서 열린 “이성의 축제”에서 사람들은 NotreDame사원을 이성의 신전이라 개칭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이성을 양가집 처녀로 형상화하여 가마에 태우고 시가행진까지 했습니다.

이처럼 계몽시대에 나타난 이성에 대한 우상화는 그 이후 나타나는 수많은 우상의 전조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우상숭배라고 하면 주로 가시적인 피조세계의 일부를 숭배하는 것으로 연상해 왔으나 계몽시대 이후에는 비가시적인 논리 세계나 이데올로기라는, 더 은밀하고 뿌리깊은 우상숭배가 보편화된 것입니다. 세속주의로 통칭되는 여러 사상들도 자세히 살펴보면 계몽시대의 이성이 우상이었던 것처럼 인간의 어떤 측면에 대한 우상숭배인 것입니다.

현대인의 우상 이데올로기

 

이데올로기란 특정한 사회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도구로 사용되는 가치관이나 개념 및 규범의 체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헤르만 도이베르트(H. Dooyeweerd)는 사물에는  여러 양상들이 있는데 이들 중 어느 한 특정한 양상을 절대화하여 그 양상으로 그 사물의 전체를 설명하려고 하는 것이라고 정의하였습니다.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1789년 프랑스 대혁명 당시 혁명 이론가들이 자신들의 사상을 구축하는데 사용했던 데서부터 시작하여 계몽시대의 물결을 타고 항해를 시작하여 18세기말부터 불기 시작한 산업혁명, 현대 물리학 탄생을 기초로 한 과학기술의 급격한 발달, 비극적인 양차 세계대전, 사회의 다양화 그리고 급속한 경제적 팽창 등의 순풍을 타고 20세기에 들어와서는 단지 사상 체계의 형태를 넘어서 자기 목적에 봉사하는 것을 진리와 정의 혹은 선이라는 규정이 강조되므로 우상으로서의 그 면모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현대인들에게 우상화된 전형적인 이데올로기로는 과학주의(Sciencism)와 기술주의(technisism)그리고 경제주의(economism)등을 들 수 있습니다. 왈시(Walsh)와 미들톤(Middleton)은 이 세 가지 이데올로기가 삼위일체를 이루어 현대문화의 특징을 형성한다고 지적했습니다. 즉 르네상스(Renaissance)이후 과학의 절대화는 정부 과학주의를 낳았고, 이 과학주의 정부는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기술이라는 아들 성자를 낳았으며, 과학과 기술의 진보는 물질적 부요라는 성령충만에 견주는 경제주의에 의해 가속적인 발달을 거듭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이데올로기는 일종의 편견이라 할 수 있으며 편견은 무식에서 비롯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통탄할 현실은 수많은 이데올로기들이 현대문화의 특징을 이루며 우상화되어 가고 있는 상황에서 심지어 신학에서조차 이데올로기적인 특성을 갖는 사상들이 난무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신학자나 목회자들이 이데올로기적인 색채를 띠고 있는 것은 상당히 우려할 만한 일입니다. 성경적 세계관을 제시하므로 사람들을 우상의 해독들로부터 해방시켜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선지자적 사명에 생명을 내걸어야 할 그들이 신앙을 빙자한 또다른 우상에게로 나아가는 길을 닦고 있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어두웠던 사상체계보다 더 깜깜한 터널을 뚫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물론 육체와 세상으로 대변되는 이 세상의 한계성 안에서 오염된 이데올로기로부터의 감염을 완전히 차단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이상일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신학자와 목회자는 그 소명에 교회가 우상숭배에 빠지는 것을 막는 것이 포함된다면 우는 사자같이 삼킬 자를 찾으며 입을 크게 벌리고 있는 우상 이데올로기를 경계하는데 경각심을 게을리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박병길 목사 (주향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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