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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문제에 대한 성경적 고찰

생명환경자연 전광식 교수............... 조회 수 2943 추천 수 0 2010.05.23 20: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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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환경문제에 대한 성경적 고찰

 

전광식(고신대 교수, 기독교철학)

 

서론

 

1. 오늘날의 시대정신 내지 역사조류에 대한 학자들의 진단은 '전환기(轉煥期)'라는 말에 잘 집약된다. 이 20세기 후반의 역사적 시점은 21세기라는 새로운 시대로 접어드는 전환기라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어떤 보편적인 시대정신과 이데올로기에서 다른 하나의 그러한 것으로 전이(轉移)되는 '과도기(過渡期)'라는 뜻이고, 따라서 이런 과도기의 현금(現今)은 무언가 정립 내지 정착되지 못한 다양한 사상의 혼재(混在)가 있다는 뜻이다.
논자는 이런 혼재라는 용어와 현금에 대한 그것의 적용에 쉬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시대 상황 내지 전신의 모습에서 어떤 혼재의 과도기적 변화 모습을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1) 근대주의(Modernism)이념의 실패 내지 그것에 대한 거부와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의 등장, 그리고 양자의 대립적 존재
2) 공산주의적 이데올로기와 그 체제의 붕괴 및 잔존(殘存), 그것으로 인한 사상적 진공상태, 또 자본주의 체제의 확산 3) 극우민족주의의 대두와 공동적인 지구촌 문명의 병립 현상
4) 전통적인 서양과학과 사상의 위기와 동양사상의 세계무대 등장
5) 무속(巫俗) 내지 신비주의의 등장과 첨단과학기술의 병존
6) 정보화로 인한 사회구조 및 각 영역의 급진적이고 근본적인 변화
7) 기술화산업화의 부정적 결과로 나타난 환경오염과 생태계 파괴 등

이러한 시대정신상황의 과도기적 모습은 우리에게 지금까지의 인생관과 세계관, 가치관과 문명관에 대해 근본적인 점검과 반성을 요구한다. 특히 이런 과도기를 혹자는 '호기(好機)', 혹자는 '위기(危機)'로 평가하고 있으므로 이것이 인류문명의 황혼(黃昏)과 인류쇠망의 징후이든 또는 새롭고 찬란한 시대문명이 동터올 여명이든지간에 우리는 성경의 말씀 앞에 인간의 위치과 인류의 삶을 근본적으로 조명해 보아야 한다. 이런 조명으로 우리는 성경적 원리 위에서 개인의 삶과 인류문명이 나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또 그것과 함께 종말(終末)과 그것의 의미에 대한 선지자적 자각과 지침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2. 이런 '전환기'문제와 관련하여 작금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 가운데 하나는 환경오염과 생태계 파괴의 현상이다. 이것은 그 동안 인류에게 유용한 것을 많이 제공해 오던 과학기술과 산업문명이 우리에게 던진 부정적인 결과 가운데 하나이다. 산업혁명 이후의 기술적 근대화(技術的 近代化)는 서구인에게는 원시적 신화(神話)를 깨고 계몽과 해방의 의미를 지니며 인류 문명의 새 장(章)을 열게 하였다. 그러나 이런 기술적 근대화가 명시적, 암시적으로 유토피아 이데올로기적 요소를 띠고 또 인간의 근본적인 이기적 욕망과 결부되므로 현상적이고 영적인 여러 부작용들을 낳게 되었다.

그 중에 우리가 성경적 관점에서 지적할 수 있는 두 가지 큰 문제는 1) 인간과 인간 삶의 물질화, 현세화, 내재화 2) 환경오염과 생태계 파괴현상이다. 오늘 우리의 주제인 이 두번째 결과는 금세기 들어와서 전 인류가 봉착한 난제이다. 기술적 근대화는 개인과 국가의 이기적 욕망 성취와 결부되는 성장지상주의(成長至上主義)의 흐름을 타면서 20세기에 접어들어 자연파괴를 심각한 위기의 수준에까지 이르게 했던 것이다. 금세기는 기술산업의 발달로 인한 생산의 증가, 에너지 사용의 확대로 인한 천연자원의 남획 및 구조의 변경, 인구의 급격한 상승과 도시화 확장, 군사적 대치로 인한 무기실험, 특히 핵무기 개발과 실험 등으로 인한 환경은 매우 오염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 문제가 심각한 것은 인간이 자신의 삶을 향상시키기 위해 개발한 과학기술과 산업화가 도리어 인간의 삶을 근본적으로 파괴하고 그 거주지인 지구를 인간이 아예 거주인으로 살 수 없을 정도로 무너뜨리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 인간이성의 난처함과 당혹함이 있고 또 자기당착같은 것이 보인다. 인간의 삶의 조건을 구성하는 생태환경의 파괴는 바로 인간 실존의 파괴로 직결될 수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제 환경문제는 단순히 좋은 환경을 유지, 보존하는 차원을 넘어서 지상인간의 생존과 실존의 문제로 대두되게 된 것이다.

아울러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문제가 하나님의 창조질서와 조화를 깨뜨리며 인간에게 문화적 명령으로 맡겨주신 청지기적 사명을 그릇되이 수행하고 있다고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환경문제를 창조-타락-구속이라는 성경적 패러다임을 통해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어떻게 변화되는지, 또 문화명령의 본 뜻은 무엇인지, 나아가 이 문제의 해결에 대한 성경적 제시와 답변은 무엇인지 논구하여 보고자한다. 그러나 그에 앞서 환경오염과 생태계 파괴의 현실을 약술하고 그것의 성격과 원인을 역사적 내지 성경적으로 규명해 보고자 한다.

 

Ⅰ. 환경문제의 현안, 성격 그리고 원인 분석

 

1. 환경문제의 현안

 

오늘날 생태계 위기현상은 어느 한 지역에 해당되는 국지적인 것이 아니고 모든 환경과 영역에서 일어나는 전체적인 것이고, 또 어떤 몇 종류에 해당되는 부분적인 것이 아니고 모든 자연환경에 해당되는 전면적이고 전체적인 것이다. 우리 사회에 있어 환경문제의 현안 중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일곱 가지의 문제들을 열거할 수 있을 것이다.

1) 수질 오염 : 수질오염은 대체로 전국 곳곳의 공장건립과 농약의 과다 사용, 지하수 굴착공사 등으로 인해 생겨 먼저 지하수가 오염되고, 또 빗물과 농업용수에 의해 강과 바다로 들어가 하천과 연안을 오염시킨다. 수질오염의 심각한 문제로 식수가 오염되고 있다는 점이다.

2) 대기 오염 : 자동차의 배기가스, 각종 산업시설의 굴뚝 매연, 유독가스, 분진 등에서 나오는 아황산가스는 건강을 해치고 정도의 표준치를 훨씬 넘어 스모그 현상을 일으키고 인간을 비롯한 모든 피조물이 숨쉬기조차 곤란한 오염된 공기를 만들고 있다. 그리고 이 오염된 공기는 인간에게는 폐병, 피부병, 호흡기 질환의 병들을 발생케 하고 농작물에게는 성장을 저해하는 요인을 만든다.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 농도의 급증은 세계 기후에 변동을 주어서 산림파괴, 지구온난화, 그것으로 인한 해수면의 상승 등 갖가지 우려될 만한 현상들을 일으킨다.

3) 토양 오염 : 산업 쓰레기의 무단투기 등으로 납이나 카드뮴 같은 독을 담고 있는 토양이 되었고, 비료나 농약의 과다사용으로 토지는 산성화되고 그곳에서 생산되는 작물은 병충해나 냉해에 약하고 또 중금속이나 여러 화학물질의 성분을 함유하여 인체에 해를 주는 농작물을 내게 되었다.

4) 해양 오염 : 산업공단에서 나오는 폐수의 유입, 기름 유출, 하천과 육지 오염의 유입 등으로 연안어업이 황폐화된다. 납, 수은, 구리, 아연, 카드뮴, 수은 등이 어패류를 심하게 오염시키고 이런 먹이 사슬을 통해 물고기를 거쳐 인간에게로 전염되어 간다.

5) 원전 문제 : 핵발전소에서 나오는 막대한 양의 핵 폐기물의 처리와 그로 인한 방사능 오염의 가능성은 인체와 생태계에 큰 위험과 위협이 되고 있다. 이를테면 기형아 출산, 기형 물고기의 등장 등이 그 실제이다.

6) 쓰레기처리문제와 여러 가지 산업공해 : 가정과 공장에서 나오는 쓰레기, 등산객과 여행객들이 버린 쓰레기들이 산이나 강을 오염시키고 산업화와 도시화로 인해 생기는 여러 가지 공해들 이를테면 공장 굴뚝에서 나오는 먼지, 악취와 유독 가스, 갖가지 소음과 진동 등이 있다. 그리고 그 밖에 오염된 식품의 유통이나 직업병 등도 공해로 인한 것이 대부분이다.

7) 생태계의 변질 : 산성비로 인해 초목들이 말라 죽어가고 생태계에도 어떤 종(種)은 사라지고, 어떤 종(種)은 새로 생긴다. 그리고 동식물의 변종화(變種化), 기형화 현상이 생긴다.

 

2. 환경문제의 성격과 원인

환경오염과 생태계 파괴의 현상적 요인은 자연에 대한 집중적 이용과 착취, 인구의 팽창, 에너지의 집약적 사용 등이다. 그러나 우리가 보다 심층적인 측면에서 그것을 바라볼 때 공해의 발생과 생태계의 파괴는 그 성격상 여러 가지 의미와 측면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환경문제는 창조질서에 관련된 문제이다.
환경오염과 생태계 파괴는 하나님의 창조세계가 그 고유한 질서와 조화를 잃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처음 조성하셨을 때 보시기에 '좋은' 조화 있고 질서 있는 평화로운 세상이었고, 살아있는 모든 것은 그 종류대로 아름답게 지어졌고, 인간을 비롯한 피조물은 각기 제 위치에 있었는데 이제 그런 질서는 흐트러지게 되었다.

둘째, 환경문제는 일종의 영적 문제이다.
철학자들의 용어를 빌려서 표현하면 이것은 실존(existentia)문제일 뿐 아니라 본질(essentia)문제이기도 하다. 또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자연인(自然人)으로서의 문제일 뿐 아니라 신자로서의 문제이기도 하다. 환경오염 자체가 인간이 타락한 이후 자연도 그 본래의 미(美)를 잃은 것에서 기원하고, 또 그것이 극심하게 되어 위기로 다가오게 된 것도 타락한 인간이 자기의 욕망 성취를 위해 자연을 수단으로만 남용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환경문제의 해결도 문화명령을 바로 수행하고 창조질서를 보존하는 데 있고 또 구속을 통해서만 자연이 회복된다는 데 있기 때문이다.

셋째, 환경문제는 세계관문제이다.
환경파괴의 현상적 요인은 산업화와 성장지상주의, 그리고 자연보호를 소홀히 한 인간의 자세 등에 있겠지만 모든 심층적인 요인은 세계관 문제에 있음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즉 우리가 자연에게 갖는 태도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자연을 '소모해 버려도 되는 것'으로 보는 관점이야말로 자연파괴의 출발점이다. 말하자면 자연을 객체화·대상화시킬 때 일어나는 문제이다. 역으로 자연을 인격체로 보지는 않지만 창조질서의 한 부분과 인류존재의 기반으로 '더불어 사는 존재'로 보고 소중히 가꾸고 보존하려는 자세는 바로 환경문제 해결의 단서가 되는 것이다. 후술하겠지만 인간 중심적 세계관은 자연파괴를 일삼았고 하나님 중심적 세계관은 이 문제해결의 정답이 되는 것이다.

넷째, 환경문제는 인간실존과 인류생존의 기반에 관한 문제이다.
환경오염의 주요대상인 물과 공기는 인간생존에 필수불가결한 것인 바, 그것이 더 이상 취할 수 없는 것이 될 때 인간은 인간으로 존립할 수 있는 기반이 무너지게 된다. 그것과 함께 땅과 바다에서 생산되는 생산물의 오염도 인류생존에 중대한 위협이 된다. 그러므로 생태계오염의 파괴력을 더이상 인간의 힘으로 제어하지 못하게 된다. 인간의 지상적 실존은 서서히 종국에 달하게 되는 것이다.

다섯째, 환경문제는 국내 및 국제 사회의 총체적 구조문제이다.
환경오염은 단지 자연개발과 산업화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그것은 산업외적인 요인, 이를테면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복합요인을 지닌다. 세계각국은 후진국으로 남지 않고 선진국이 되기 위해 경제발전과 산업발달을 경쟁적으로 추진하여 왔다. 그래서 대규모 공업단지를 조성하고 천연자원의 획득을 위해 자연파괴를 일삼아왔으며 각국의 군사적 대결구도도 폭탄실험, 핵실험 등의 강행을 통해 환경파괴를 주도해 왔다. 그리고 각국의 내부사정을 볼 때 경제외적인 무분별한 목표, 말하자면 정치권력과 그것에 기생한 소수재벌들이 자기들의 부의 축적을 위해 외국으로부터 공해산업을 들여와 산업공해가 많이 생기게 되었다. 소위 '공업화 정책'이라는 미명하에 인간의 존엄성과 자연환경의 보존이라는 의식없이 공해를 극히 정당화했던지 혹은 대수롭잖게 여기게 되었다. 또 각 산업시설은 생산성의 향상이 급선무이므로 공해가 많이 나오는 기술과 기계를 쓰게 되고 또 그런 제품을 만들게 되었다. 공해문제를 논할 때 가시적 결과도 적고, 실업자도 더 많이 생긴다는 사고 속에 공해방지장치같은 것은 염두에 두지 않고 어떻게든 생산성 향상에만 주력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 공해로 인해 농어민, 노동자들의 생존권이 짓밟히고 있는 실정이다. 결국 공해의 현상적인 성격은 이것이 사회의 총체적 구조문제임을 알 수 있게 한다. 이것은 국력, 정치, 경제, 그리고 국민의식 등 모든 것에 얽혀 있는 문제인 것이다.

 

Ⅱ. 환경문제에 대한 성경적 패러다임

 

1. 창조 때의 환경

 

1) 오늘날의 그리스도인은 생태계 위기 현상과 관련하여 창조론(創造論)에, 문화의 변혁과 관련하여 문화명령에 관심이 많다. 물론 복음주의 진영에서는 전자는 기독론, 후자는 선교명령과 병합적으로 관심을 가진다.
창조론에 관심을 가진 신학자들 가운데 생명과학(生命科學) 내지 생태학(生態學)을 신학적 사유로 접근하면서 소위 생태신학(Eco-Theology)을 전개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이 생태신학을 주창하는 이론적 토대와 사유방식 가운데는 첫째, 전통적인 창조신학을 비판하면서 창세기에 나오는 창조기사에 대한 주석적인 재해석을 통해서 접근하는 방식이 있고(C.Westermann, J.Moltmann), 둘째, 기존에 있던 철학적 신학의 사유들을 빌어 과정신학적(J.B.Cobb), 여성신학적(D.Solle)으로 접근하는 방식이 있고, 셋째 원시신앙, 유불선, 그리고 힌두교 등의 동양사상을 도입하여 전개하는 방식(D.Suzuki)이 있다. 이런 세 가지 방식의 생태신학을 국내신학계에서도 혹은 독창적으로 혹은 아류의 형태로 주창하는 학자들이 있다.

하여튼 이런 갖가지 형태의 생태신학은 생태학적 사유로 어떤 신학을 전개하여 최근의 생태계 위기를 극복하는 이론적 방안을 제시하고자 하는데 공동적 의도가 있으며, 기존의 창조론이 오류이든지 아니면 부적합하다는 판단 위에 출발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Lynn White나 Carl Amery같은 이들처럼 생태계 위기의 뿌리가 이 창조론과 문화명령에 놓인다고 보는 이들도 있다.
이런 생태신학의 제유형들의 주장을 상론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이 신학들이 주창하는 근본적인 문제점들을 지적할 수 있다. 창조론 재해석적인 생태신학은 Text의 원의(原義)에 충실하다기보다는 생태위기라는 Context에 근거하여 임의도출식의 귀납법적 신학의 형태를 표방하고 있다. 과정신학적이고 여성신학적인 생태신학은 과정성과 남여평등성 등 성경신학의 본질 외적인 철학적이고 사회학적인 지평의 도그마를 가지고 주석적 치밀함이 결여된 채 사상을 전개하고 있다. 그리고 동양사상의 틀과 내용을 빌리는 생태신학은 성경적 세계관이 틀렸다는 전제 위에서 자연중심적 세계관을 전개하고 있으며 제설혼합주의와 종교다원주의를 표방하고 있다.

이러한 생태신학의 형태들은 생태계위기의 극복을 위해 창조론만 문제삼고 있다. 하지만 생태계 위기의 문제는 창조론과 문화명령과 함께 죄와 타락의 차원에서 접근해야 하며 또, 그것의 회복문제도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최근에 생태신학들이 지니는 맹점은 '창조-타락-구속'이라는 성경적 패러다임을 도외시하고 소홀히 한 데 있다. 또 일부의 생태신학 형태들은 하나님 중심적 세계관보다 자연중심적 세계관이나 어떤 통합적 세계관을 표방하고 있으므로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들이 전통적 창조론을 비판하는 배경에는 이런 성경적 패러다임과 하나님 중심적 세계관을 오해했던지 혹은 간과한 점이 놓여 있는 것이다. 논자는 전통적 창조신학이 생태계 위기의 사상적 뿌리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창조-타락-구속의 측면에서 환경문제의 전반을 바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전통적 창조론이 해석과 이론전개에서 미비하고 부족한 점이 있을 수 있으므로 보완할 점이 있다고 여겨진다.

 

2)우리는 창세기의 말씀에서 생태계와 환경의 본래 모습이 어떠했는지 그리고 그것의 근본속성은 무엇인지를 알 수 있고 나아가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자연 간의 상호관계성에 대해서도 바른 지식을 가질 수 있다. 이런 고찰은 타락 이후 환경위기의 근본 원인을 진단하고 그것의 극복과 본래 모습으로의 회복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제시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① 창조기사가 가르쳐주는 첫번째 교훈은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인간과 자연만물은 그에 의해 만들어진 창조질서라는 점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인간과 자연만물의 피조성(被造性)과 의존성(依存性)을 볼 수 있다. 이 피조성은 무엇보다 먼저 인간과 자연의 신격화(神格化)를 배격한다. 자연 속에 신성이 있다는 범신론이나 범재신론을 거부하고 나아가 인간과 같은 인격성도 없음을 창조기사는 교훈한다. 자연은 인간과 마찬가지로 창조의 일부분일 뿐인 것이다. 또 이 피조성은 유한성을 포함한다. 우리의 유한한 우주는 개발되고 상품을 내는 데 있어 제한될 가능성만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또한 인간과 만물은 하나님에 의해 무로부터 창조(creatio exnihilo)되었기 때문에 오로지 하나님에게만 의존할 뿐이다. 그것의 존재와 존재함의 유일한 절대 필수적인 근거는 하나님과 그의 창조뿐인 것이다. 무로부터 창조하신 하나님은 창조를 야기하는 어떤 전제나 외적인 필연성, 또 하나님 자신의 아무런 내적 불가피성이 없이 순수한 무로부터 우주를 창조하신 것이다. 말하자면 세계는 '하나님의 자유로부터의 창조(creatio elibertate Dei)'인 것이다.

 

② 창조기사가 주는 두번째 교훈은 하나님께서 그가 지으신 인간과 우주만물을 '보시기에 좋았더라'(창1장)라는 점이다. 이 '좋았다'라는 표현은 우선은 인간과 우주만물이 혼돈과 공허한 상태로 있는 것이 아니라 질서와 조화 가운데 있게 되었음을 말하고 만물이 모두 종류대로 제 위치에 있음을 보여준다. 나아가 그것은 타락 이전의 모습으로 윤리적이고 영적으로 선한 모습을 그리고 있었다. 즉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영광을 드러내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이 '좋았더라'라는 표현은 피조물을 향한 하나님의 기호와 사랑을 단적으로 드러내준다. 죄가 들어오기 전의 자연환경은 미(美)와 선(善)을 동시에 지니고(Kalokagathia), 또 하나님의 사랑(amor Dei)도 받고 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이 형용사적 표현에는 피조세계의 미와 선,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하고, 또 그것을 착취하고 손상시키는 어떠한 행위들도 통제받고 제한 받아야 한다는 것과 동시에 그것의 원모습을 잘 보존 유지해야 한다는 강력한 제시가 담겨 있는 것이다.

 

③ 창조기사가 주는 세번째 교훈은 소위 '문화명령'에 관한 것이다. 인류는 하나님의 형상(amor Dei)으로 창조되어 자연계를 지배하고 다스리는(dominique naturale) 만유의 영장(dominus mundi)으로 세움을 받았다. 창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이 구절은 인간에 대한 일반은총, 인간과 자연의 관계, 세계관, 문화변혁과 건설운동, 그리고 최근의 생태계 위기와 결부된 과학기술의 발달과 자연개발 등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구절로 인용, 이해되기도 했고 또 오해, 오용되기도 한 구절이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타락한 종교성으로 자연적 대상물이나 현상들에 대해 숭배를 표한 원시종교들을 염두에 두고 볼 때 이런 미신적 행위를 막고 그것으로 자유케하고 해방시키시는 가르침을 읽을 수 있다. 오늘날에는 자연을 인간과 기술의 거대한 힘에서 해방시키는 것이 문제인데 고대세계에서는 인간을 자연의 큰 힘에서 해방시키는 것이 문제였던 것이다. 그러나 타락한 인류는 결국 자연에 대해서 공포심과 경외심을 가져 그것을 종교적 숭배의 대상으로 삼게 되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이 구절이 주는 중요한 표현은 '정복하고 다스리라'라는 명령형이다. 환경파괴와 생태계 위기의 사상적 근본 원인을 추적하는 이들 중 많은 이들이 이것이 서양사상과 과학기술, 문화전통에서 생겼음을 지적하고 그것의 원뿌리는 창세기의 이 문화명령에서 비롯되었다고 지적한다. 이 구절에서 자연을 대상화하고,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관과 통치권을 내세우며, 자연 착취와 자연파괴를 일삼게 된 기본적인 태도가 나왔다는 것이다.

동양사상이나 고대 헬라로마 종교들은 자연물이나 자연현상들을 신격화하고 인격화했는 데 비해 기독교의 이 창조교리는 자연을 신으로부터 분리시킴은 물론 인간에게서도 분리시켜 유일신론과 인간 중심적 세계관을 주창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연을 단지 인간의 욕망과 필요를 충족시키는 대상물과 효용수단으로 전락되어 신성함과 신비함의 베일을 벗겨 버리고 오로지 이용과 착취만 되어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문화명령에서 볼 수 있는 분명한 진리는 이 구절이 인간중심적 세계관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적 세계관을 여전히 표방한다는 사실이고,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섬김을 받는 왕직소지자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보호하고 개발하여 잘 가꾸라는 보존자 내지 관리인 같은 청지기직의 담당자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과거의 신학이 그릇되이 해석한 점이 있을지 몰라도 적어도 이 구절의 뜻은 그러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명령은 홍수사건 이후 노아와 그의 자손들에게도 주신 것이고(창9:1) 또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과정(민32:29, 수18:1)에서도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연만물을 인간에게 주셔서 인간이 그것을 개발하고 가꾸며 그 속에서 살고 활용하도록 하신 것이 일차적인 뜻이고, 다음으로는 창조의 궁극적 목적에 따라 그것으로 자기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여지도록 하기 위함이다. 말하자면 인간의 유익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연계는 존재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정복하라'는 것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소유 및 지배의 권력을 의미하고 그것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다. 히브리어 원어의 'kabas'는 어떤 대상을 가꾸고 돌보며 유익도 취하면서 그것과 공존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를테면 지배와 피지배, 주인과 종과 같은 관계의 의미가 아니라 상호공존의 평화적 의미를 지닌다. 또 '다스리라'라는 뜻의 'raddah'는 부모가 자식을, 통치자가 백성들을 돌보고 치리 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고대 바벨론이나 애굽에서의 왕은 그 본래적 신분상 폭정을 행하며 백성을 학대, 착취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의 안녕과 백성의 복리를 위해 책임을 지는 보호자의 위치에 있다. 이처럼 문화명령에 나타난 '정복하고 다스리라'라는 명령의 원의(原義)는 통치자와 백성, 또는 목자와 가축의 관계와 유비(類比)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리고 창 2:16에는 인간으로 자연(에덴동산)을 '다스리고 지키게'하셨다고 했다. 즉 인간은 하나님의 심부름꾼 내지 대리자로 창조질서를 보존하며, 한편으로는 그것을 이용하여 의식주 문제와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유익을 취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주인이 꾸며 놓으신 대로 주인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되도록 돌보고 가꾸라는 명령을 받은 것이다. 말하자면 자연을 돌보고 가꾸는 정원사의 역할이다.

우리 인간도 자연만물과 같은 피조물이다. 인간은 우주를 창조하지도, 또 그것을 하나님에게서부터 쟁취한 것도 아니므로 그것에 대한 어떤 절대권력을 가진다고 주장할 수 없는 것이다. 이 명령에 나타난 신적 위임은 한마디로 청지기직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창조 때와 홍수 이후에 주신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인간과 자연에 '복을'주시기 위한 방편인 것이다. 하여튼 인간은 주인이 아니고 주인이신 하나님의 역사(operation)에 청지기로 협력(cooperation)하게 된다.

 

④ 창조기사가 주는 네 번째 교훈은 자연이 인간에 대해 갖는 의미이다. 인간은 영적 삶을 하나님께 의존하고 육적인 삶을 하나님이 주신 이웃과 자연에 의존한다. 흙(adamah)으로 지음 받은 인간(adam)의 육체적 기원은 땅에 있다. 굳이 생태학적 신학이 말하지 않더라도 창조기사는 우리에게 인간의 생명과 삶은 지구와 그 생태계적 환경이 없이는 존속유지될 수 없음을 말한다. 지구와 생태계는 인간 삶의 터전이다. 물론 넓은 의미에서의 인간도 피조된 자연계의 일부인 것이다.

그래서 인간과 자연계는 이 지상적 삶에 있어서는 동반자요 공동운명체이다. 인간이 자연을 돌보고 가꾸면, 자연도 인간에게 음식을 비롯한 삶에 필요한 여러 가지 자원들을 공급한다. 인간이 타락할 때 자연도 손상되고 파괴되며, 또 근자처럼 자연이 오염되고 병들 때 인간의 건강도 해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로 구원받을 때 자연도 그 본질에서 회복의 은총을 입는 것이다.

 

⑤ 창조기사가 주는 다섯 번째 교훈은 생명(生命)의 고귀성이다.

인간을 비롯한 지상의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창조목적에 따라 존재하는 실체들이다. 하나님은 인간만 '살아있는 존재'로 만든 것이 아니라 모든 생물들에게 '생명'을 주셨다. 모든 피조물의 이러한 생명은 신적 기원을 지니고 있으므로 고귀하다. 심지어 무생물인 땅이나 공기도 창조의 목적대로 존재하는 것으로서 '살아있는'것이다. 이렇게 생명이 있는 것은 창조 때부터 부여받은 생존의 목적과 존재의 의미가 있으며, 하나님은 그런 생명을 소중히 여기셨다. 이러한 생명은 비록 유한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창조질서가 계속되는 한 지속된다. 하나님은 인간의 생명과 함께 다른 피조물의 생명도 축복해 주어서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며 땅에 충만하게 했다. 하나님은 자신이 지으신 피조물들의 멸망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따라서 그의 명령을 받고 청지기직의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우리 인간도 땅과 공기, 그리고 동식물 등 생명체들의 생명이 전면중단되지 않도록 소중히 여겨야 한다. 노아의 방주에 동물이 한 쌍씩 보존된 것도 이런 생명존중의 뜻이 담긴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우리가 살생(殺生)을 금기로 하는 불교의 논리 같은 것을 따르자니 것이 아니다. 생명의 단절과 총체적 파괴를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⑥ 창조기사가 주는 여섯 번째 교훈은 창조사건은 물론 인간을 위시한 전 피조계의 본분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에게 영광을 돌리는 데 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시24:1)'이기 때문이다. 창조 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표현된 것은 창조행위와 그 결과가 하나님께 영광이 되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엿새간의 창조행위가 끝난 후 이레 되는 날 하나님께서 안식을 가지신 것은 창조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인간 중심적 세계관이 나오게 된 배경으로 지목하고 있는 엿세째 날의 인간창조가 창조의 정점이기는 하지만 그 다음의 안식일이 창조의 피날레요 창조행위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다. 창세기 2장 3절은 이렇게 적고 있다.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주시고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이 구절에서 창세기 1장이 끝나야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날의 안식을 통해 하나님은 그 창조행위의 완성을 기뻐하시고 피조물로 하여금 이 기쁨에 동참케하고 그들에게 축복하시는 것이다. 하나님 중심적 사상에서 본다면 창조행위를 마치신 하나님의 안식의 기쁨에서 창조사건이 끝난다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창조사건이 끝난다고 볼 때 창조의 의미와 목적은 바로 하나님의 안식과 기쁨, 그리고 영광에 있다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아가 이 안식 가운데서 생태계는 생육, 발전 보존되고 이런 관점에서 구약 이스라엘 민족에게서 안식년이나 희년의 제도는 의미가 깊었던 것이다.

2. 타락 후의 환경
1) 환경오염과 생태계 위기의 원인을 기독교와 결부시켜 논의하는 이들은 대개 그것을 창조기사에서 제시된 세계관과 문화명령에다 돌리고 있다. 그들은 기독교 창조론이야말로 자연을 신령화, 신비화하는 애니미즘(Animism)을 창조신앙으로 대치함으로 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사라지게 했고, 나아가 인간을 자연의 지배자로 세우면서 그것을 착취하게끔 했다고 한다. 하지만 창조사건에 나타난 하나님 중심적 세계관과 문화명령은 학자들의 흔한 주장과 달리 생태계 위기와 무관한 것이며, 그것은 도리어 생태계 보존과 생명 존중사상을 가르치고 있다. 오늘날 인류가 당면하고 있는 생태계 위기의 현상은 어떤 하나내지 몇 가지의 사상적인 배경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과학기술과 산업발전 등을 통해 인류의 삶과 문명을 이끌어 가는 인간에게서 죄와 타락의 심성이 일으킨 총체적인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일컫자면 창조론이나 어떤 사상에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타락에 이 위기의 뿌리가 놓이는 것이다.

 

2) 아담과 그로 인한 인류의 범죄와 타락은 인간이 자신의 본분을 떠나 하나님의 직접적인 명령을 결정적으로 불순종한 사건이다. 이 타락은 그 형벌과 영향력이 아담의 후손인 인류에게는 물론, 인간이 대표로 있는 전 피조영역에도 임하는 것으로 그것은 보편적인 것이다. 우선은 인간에, 다음으로는 자연계에 대한 이 타락의 영향은 모든 개인악과 역사악의 원인이 되며 생태계 위기의 원인도 되는 것이다.

 

① 타락과 죄는 인간 중심적 세계관을 만들었고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의 본래 신분을 잃게 했다. 아담의 범죄는 하나님의 계명인 신율(神律)을 버리고 자기의 판단인 자율(自律) - 물론 사탄에 의한 타율(他律)이 원인이 되었지만 - 을 취함으로써 빚어진 사건이었다.

타락 이전에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에게 절대순복하며 그의 명령과 지도를 따라 살게 되었지만, 타락 이후에는 하나님을 등지고 자기 중심으로 살게 되었고 자아중심적 세계관을 가지게 되었다. 창조질서 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 가운데 살도록 그는 이제 지정 받은 신분에서 이탈되게 되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되었을 때 인간은 이웃이나 자연과의 관계도 정상화 상태에 있지만 그것이 잘못되었을 때는 이 후자의 관계도 근본적인 손상을 입게 된다. 창조주와의 관계에서 인간은 자연에 대해서 관리인 내지 청지기이지만, 이제 자율과 자기의 성(城)에 갇힌 인간은 스스로 주인노릇을 하려고 하고, 바로 이런 인간의 자기중심주의가 환경 파괴의 서막이 되는 셈이다.

 

② 인간의 타락과 범죄는 자연의 미(美)와 조화(調和)를 파괴했다. 그래서 땅은 인간에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게(창3:18)되었던 것이다. 아담이 인류의 대표인 것처럼 인간은 피조계의 대표로서 그의 범죄는 전 피조영역에 미치는 것이다. '가시덤불과 엉겅퀴'는 창조 때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던 자연의 조화와 질서, 아름다움과 평화를 깨뜨리는 것이다. 그것들은 다른 식물과 동물들에게 유익을 주는 것이 아니고 해가 되는 것이다. 자연은 인간과 함께 고난과 영광을 나누는 공동운명체인 것이다. 사도바울은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롬8:22) 당하였고, 인간과 같이 '허무한데 굴복'(롬8:20)하고 '썩어짐의 종노릇'(롬8:21)을 하고 있다고 했다.

바울은 자연계도 타락으로 인한 징벌 하에서 본래의 찬란한 창조의 영광을 잃어버리고 고난과 죽음의 장막아래 탄식하고 고통하는 소리를 잘 들었던 것이다. 우리는 인간의 개발과 상관없이 자연자체에서 황폐화되는 현상을 여러가지 지적할 수 있다.

가뭄으로 말라죽어 가는 식물과 갈라지는 토양들, 우박이나 산사태로 죽어 가는 작물들과 폐허가 된 골짜기, 강풍과 폭우로 쓰러져 가는 숲과 초목들, 폭설과 긴 추위로 동해(冬害)를 입는 식물들, 화산폭발과 가스로 인한 동물들의 집단 살상, 지진으로 인한 엄청난 폐해, 사막화 현상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이 모든 것은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생태계가 변화되고 황폐화된 모습이다.

 

③ 인간의 타락과 범죄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관계와 자세의 변화를 유발시킨다. 창조론에 따르면 자연에 대한 인간의 자세는 그것을 경외하거나 숭배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그것을 착취하거나 파괴하지도 않는 관계로 있었다. 그러나 타락으로 인해 인간은 자연을 신격화하며 숭배하기도 하고, 또 역으로 그것을 착취하거나 파괴하기도 했다. 결국 인간과 자연은 본래의 동반자관계에서 상호간에 공포와 두려움의 관계로 변질되었다. 죄는 인간을 하나님에게서 분리시켰듯이 자연을 인간에게서 또 인간을 자연에게서 분리시키게 되었다. 인간이 자연을 두려워할 때 자연을 숭배하게 되었고, 인간이 자연을 착취할 때 자연은 인간이 두려운 존재가 되었다. 타락 이후 대부분의 동물들은 인간의 길들임이 없이 자연적 상태에서는 인간을 두려워하고 피하게 된 것이다.

홍수사건 이후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고기가" 인간을 "두려워하며 무서워"(창9:2)하게 되었다. 그리고 타락한 인간은 '종교의 씨'(semen religionis)를 가지고 정당하게 경배해야 할 창조주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다스리고 돌봐야 할 자연을 섬기는 우상숭배에 빠지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복음의 빛이 비춰지기 전 이방인들은 모두 이런 우상숭배의 종노릇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미신과 우상숭배의 모습에서 볼 때 자연개발에는 계몽과 해방의 의미가 담겨있다. 하지만 타락한 인간의 심성은 죄성으로 가득차 스스로를 우상화하여 하나님 대신 자기의 영광을 위해 자연의 지배자와 정복자의 노릇을 하게 되었다. 자신의 욕망 성취를 위해 맹목적이고 무분별하게 자연을 파괴하고 착취했으며 그것을 수단화하여 창조질서를 깨뜨리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타락으로 인해 이미 자체적으로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던 자연은 인간의 욕망으로 인한 이용과 착취로 더욱 손상되어 갔던 것이다. 현대의 수탈적인 기술문명하에서 자연은 착취와 고난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④ 인간의 타락과 범죄는 인간 삶의 방향을 자연을 수단으로 한 욕망충족과 지상 유토피아 건설로 이끌게 했다.

어거스틴은 「신국」(De Civitate Dei)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지상의 나라를 구분하면서 전자가 하나님의 사랑(amor Dei)과 은혜(gratia)가 지배한다면 후자는 자기사랑(amor sui)과 욕망(cupiditas)이 지배한다고 설파했다.

 

⑤ 인간의 타락과 범죄는 인간으로 하여금 은사(恩賜)를 잘못 사용하게 했고 또 인간의 사고를 변질시켰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문화명령을 주셨을 때 인간은 그에게서 그 명령을 수행할 능력과 재질을 부여받았다. 인간에게 있는 하나님의 형상(image Dei)은 영성과 지,정,의와 같은 인격성, 그리고 거룩함이었다. 하지만 인간이 범죄한 이래로 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 거룩함이 없어져 버렸고, 영성도 미신과 우상을 섬기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고, 또 자연을 보존하고 개발하며 문명을 발전시키는 능력도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바르게 사용되지 못하였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를 잘못 사용하여 자연과 후손들에게 죄를 짓고, 또 하나님께서 더욱 범죄하게 되었다.

또 타락한 이후 역사의 흐름 속에서 인간은 차츰차츰 물질 중심적, 현세 중심적, 인간 중심적, 기계론적, 환원주의적, 상대주의적 사고와 사상을 발전시켜 왔고, 소위 과학적 사고라는 미명하게 근대 이후 특히 이런 사고가 인간의 사상을 지배하게 되었다. 그래서 인간과 자연, 사실과 가치, 객관과 주관, 존재와 본질, 필연과 우연, 이성과 신앙, 도회지화와 자연보존, 내재와 초월의 이분법에 기초하여 개념군내에서의 전자에 의한 후자의 지배형태가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사유구조에서 인간중심적 세계관, 유물론, 실증주의, 기계론적 법칙주의, 맹목적 객관주의, 본질을 등한시한 실존우의사상, 이성절대주의, 문화와 우월사상, 내재주의 등의 세계관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런 사유와 세계관들은 과학의 풍요와 산업화의 현란함 속에서 창조질서 속에서의 인간의 인간됨, 삶이 문명의 본질과 의미를 바로 파악하지 못하고 그릇된 이데올로기의 모습으로 각 영역들을 조종하고 움직이게 되었다. 이것이 서구족 근대화의 모습인데 여기에서 인간은 창조질서내에서의 본래적 모습에서 더욱 이탈하여 자기 모순과 위기에 빠지게 된 것이다.

그 결과들은 소망했던 바대로 과학이나 문명이 인간을 해방시키고 낙원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인간의 물화(物化), 의미의 상실, 가치의 혼란, 삶의 목적과 방향의 상실, 생태계 파괴와 자연재앙 등의 부작용들이 쉬지 않고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상으로 살펴본 대로 타락은 인간 중심적 세계관에서, 자연자체의 손상과 파괴에서, 자연에 대한 인간의 착취적 자세에서, 인간의 삶이 욕망충족과 지상 낙원을 지향하는 방향에서, 또 은사의 그릇된 사용과 사유의 변질에서 오늘날 인류가 당면한 생태계 파괴의 위기에 직접적인 원인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생태계 위기의 배후에는 타락의 동인(動因)이 놓여 있다.

 

3. 구속에서의 환경

 

1) 오늘날 생태윤리학이나 생태철학을 주장하는 이들이 이 생태계 위기의 현상을 극복하는 길로 제시하는 것을 주로 자연에 대한 인간의 태도변화와 기술사용의 절제 등이다.

그러나 이러한 대책들은 어느 정도는 생태계의 심각한 위기 현상을 중단시킬 수 있지만 자연의 근본적인 변화와 회복을 유도할 수는 없는 것이다.

생태계 위기의 극복은 물론 자연계의 창조질서적 조화와 미의 회복, 문화명령에 대한 인간의 바른 수행 등을 위해서는 타락으로 인해 잃어버린 타락 이전의 창조질서에로의 바른 회복에 있어야 한다. 이런 회복을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에서 보여준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은 전 우주적이어서 인간을 죄와 죽음의 사슬에서 해방시킴은 물론 피조계도 고통하며 신음하는 타락의 짐에서 풀어주시므로 만유의 진정한 회복이 거기에서 이루어진다.

창조질서의 진정한 회복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에서 이뤄진다. 그 안에서 자연의 회복과 인간의 회복이 있고, 또 인간과 자연의 본래적 상호관계도 회복된다. 이 모든 회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회복에 기초해 있다.

 

2)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이 인간을 비롯한 피조세계에 주는 의미는 다음과 같은 세가지 사실에 집약된다. 첫째, 인간을 위시한 만유가 창조질서에로 회복되는 역사가 일어난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과 만물이 원상태보다 더욱 영화롭게 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린다. 세째, 종말과 하나님나라를 향한 소망이 제시되고 은혜를 입은 자들이 그런 축복을 받게 된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타락이후 피조물의 탄식과 고난, 하나님의 아들의 출현에 대한 대망,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이러한 회복과 변화의 축복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그러면 이런 구속은 환경문제에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은 타락과 죄 가운데 있던 우리 인간과 전 피조계를 원천적으로 회복시키신다.

인간의 타락을 통해서 원치도 않게 허무한데 굴복하고 썩어짐의 종노릇하던 피조물이 예수그리스도의 회복케하는 역사로 근본적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신약은 구약에서의 인간과 자연의 관계성을 그대로 이어 받아 그것에다가 그리스도의 구속론을 통한 만유회복의 목적설정을 하고 있다. 예수님은 이미 지상의 삶 가운데서 이적과 기사를 통해 피조계가 어떤 영광을 입을까를 보여주고 가르쳐 주셨다. 그의 구속은 인간에 대한 구원의 빛이면서 동시에 전 피조계에 보편적인 희망을 준다. 골1:15-20에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고, 모든 피조물의 첫열매라고 했다.

옛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간구원 뿐 아니라 피조물의 회복과 갱신이 이뤄진다고 했다.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고 즐거워"(사35:1-2)하게 되는 것이다.또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35:6) 흐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은 구원받은 성도들의 책임 하에서 이뤄진다. 그리스도 구속의 현재성에 참여하고 있는 인간과 자연이 여전히 타락 이후의 곤궁과 파괴, 수탈의 연장 선상에 있는 것은 원리적으로는 회복되었지만 구원받은 성도들이 여전히 죄성적 욕망을 가지고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회전반이 타락에서의 모습 그대로 자연개발과 수탈을 수단으로 하여 욕망의 유토피아를 건설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생태계 파괴와 자연적 재앙들은 그리스도의 회복케하시는 역사에 동참하지 못하고 여전히 자연계를 자신의 욕망의 땔감으로 사용하고 있는 인간들에 대한 창조주되시고 구속주되신 하나님의 경종이요 징벌인 것이다.

 

②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은 인간의 관계와 위치를 회복시켜준다.

원죄로 인하여 인간은 한편으로 하나님과의 평화적 관계, 다른 한편으로 이웃과 자연과의 조화적 관계에서 벗어서 자기의 성(城)으로 도피했는데, 이제 그의 구속에 참여하고 그 은혜를 입은 자들은 이 양관계에서의 자기 위치를 회복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본래부터 이런 관계 속에서 살도록 된 것이 하나님의 지정이요 창조질서인데, 이제 그 위치에 다시 서는 축복을 받은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과 자연과 단절되었을 때 그는 자연에 폭군으로 행세했지만 이제 본래의 관리인과 청지기에 복귀하게 되었다. 자칭 주인과 왕의 자리에서 관리인과 청지기로 전이하게 된 것은 인간에게는 비하가 아니고 축복인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타락의 심성과 의식을 지니고 있는 인간이 그것을 비하라고 생각하고, 여전히 자연의 주인과 왕노릇을 하려고 할 때 자연수탈과 환경파괴는 계속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③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은 창조 때 주신 문화명령에 대해 바른 자각을 주고, 또 그것을 바로 수행케 한다. 그리고 성경적 세계관과 자연관을 갖게 한다. 구속사건은 인간을 하나님과 창조질서의 원위치로 돌아가게 하며 그 때 주신 사람의 본분대로 살도록 한다.

인간은 타락으로 인해 허무한데 굴복하고 썩어짐의 종노릇을 하고 살았으며 무엇보다 만족할 수 없는 영적 공허 속에, 그리고 하나님의 문화명령을 잊고 살았었다. 그러나 구속은 인간의 원위치를 회복하여 문화명령을 수행케 하며, 그것으로 타락문화를 개혁하고 하나님에게 상달되는 하늘의 문화, 하나님에게 영광이 되는 구속의 문화를 형성하게 한다. 무엇보다 구속사건이 환경문제 해결에 답을 던지는 것은 그것이 성경적인 세계관과 자연관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Abraham Kuyper에 의해 재발견된 칼빈주의는 우리에게 성경적 세계관을 바로 제시해 준다. 이 세계관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창조목적의 성취와 완성이라는 관점에서 본다. 그것에 의하면 타락으로 손상되고 성취되지 않았던 창조의 목적과 문화명령이 구속을 통하여 회복되었으므로 그 구속의 은혜를 입은 성도들은 이제 그 목적을 이루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된다는 것이다.

 

④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은 인간을 자연과 화해하게 하고 조화로운 관계를 이루게 한다.

타락으로 인해 공포와 두려움, 경계와 정복의 대상이었던 양자의 관계는 원죄 이전의 에덴공산에서처럼 서로의 위치에서 화해와 조화의 관계에 있게 된다. 이제 하나님과 화해하게 된 인간에게는 '악한 짐승이 땅에서 그리고 빈들에 평안히 거하며 수풀에서 자게'된다.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며 내 산 사면 모든 것도 복되게 하여 때를 따라 비를 내리되 복된 장마비를 내리리라. 그리한 즉 밭에 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땅이 그 소산을 내리니 그들이 땅에서 평안할지라."(겔34:24-27)라고 하나님은 화평의 언약으로 말씀하신다. 특히 이사야 11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인해 인간과 자연만물이 서로 해하지 않으며, 자연만물 간에도 약육강식이 없이 평화적으로 공존하게 됨을 회화적으로 잘 묘사하고 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사11:6-8) 이 때에는 해(害)됨과 상(傷)함도 없을 것이고 평화와 화해만이 있을 것임을 말한다.

 

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은 종말적 구원과 전망을 제시한다.

인간과 만물을 회복시키는 그리스도의 구속은 종말에 이르러 완성된다. 하나님은 태초에 창조하신 것을 역사 속에서 보존·회복시키시고, 그리고 종말에는 지상 피조계에 대한 그의 사역을 종결하신다. 이로써 하나님은 과거·현재·미래의 하나님이시고, 역사의 알파와 오메가가 되신다. 구속의 주님은 만물을 새롭게 하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예비하신다. 이런 종말적 구원은 구속받은 인간은 물론이고 만물에게도 대망의 사건이 되는 것이다.

타락으로 인한 굴레와 멍에, 그리고 그 인간의 착취로부터 파괴되고 파멸되어온 생태계와 자연은 이 종말적 구원에서 치유되고 온전히 회복된다. 그리고 이런 회복의 대미(大尾)와 함께 현재의 생태계는 종국에 이르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새하늘과 새땅으로 대치되어진다.

성경이 말씀하는 이런 종말론적 약속의 성취는 모든 인간적 가능성의 목적과 한계를 드러내준다. 이것은 현재의 생태위기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능성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종말론이란 결국 하나님에 의해서 임하는 종말(終末)을 기다리는 것이므로 그것은 인간 고유의 모든 행위의 한계를 제시해준다. 우리가 환경과 생태계를 회복하고 바로 보존할려는 노력과 무관하게 생태계는 그 자체적으로 영원한 가치를 지닌 것이 아니라, 새하늘과 새땅이 임할 때 그것은 덧없이 사라져 버릴 류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재적 실존의 무시되거나 간과될 수 없는 것이다. 비록 우리의 현재적 시간이 종말 앞에 있는 소위 중간기(Interim)라 할지라도 이것이 현재적 조건들을 소홀히 하거나 또는 그것을 정당화하는 것으로 이끌지는 않는다. 우리의 생태계 보존 노력과 회복운동은 이래서 무의미한 것이 아니다.

Ⅲ. 환경문제해결에 대한 성경적 제시와 답변

 

'환경문제에 대한 성경적 고찰'이라는 주제를 두고 우리는 성경에 나타난 환경개념을 분석해 내거나 창조-타락-구속이라는 성경적 패러다임에서 환경문제를 어떻게 보느냐에만 우리의 논의를 머물게 하지 않고, 환경오염과 생태계파괴에 직면한 오늘의 우리 인류에게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 나갈 수 있는지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지침을 성경적으로 찾고 제시하는 데까지 우리의 논의를 끌고 가야한다. 그러나 폐수나 쓰레기처리를 어떻게 하며 수질개선과 토질개선은 어떻게 하는지 등 현실적인 지침을 제시하는 방향으로 논지를 진행시킬 수 없고, 다만 성경에서 제시하는 기본적으로 원칙적인 답변들을 논의해 보고자 한다.

 

1. 인간 중심적 세계관에서 하나님 중심적 세계관으로의 변화

 

상기한 바대로 생태계위기의 중요한 원인은 세계관적 요인이다. 과학기술의 발전이나 자연파괴의 배경에는 인간 중심적 세계관이 놓여있다. 생태학자나 환경론자들의 생각에는 기독교의 창조론과 문화명령은 인간 중심적 세계관을 가능케 했고 그것이 인간으로 하여금 자연을 정복하고 수탈케하며 오늘날처럼 생태계 위기를 낳게 했다고 한다. 이런 세계관은 서구적 근대화의 기반이 되었고 근대성의 위기와 함께 서구적 - 기독교적 사상의 위기가 왔다고 한다.

인간 중심적 세계관으로 인한 생태계 위기현상에 대해서 성경은 하나님 중심적 세계관의 해결책을 던진다. 타락이전의 창조질서에서는 원래 이러한 세계관이 있었지만 인간의 범죄로 그것이 인간에게서 지켜지지 않았던 것이다. 하나님 중심적 세계관은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을 창조주로, 인간과 만물을 피조물로 하여 양자간에 엄격한 구분을 도입하고 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물론 인간과 자연세계의 자기정체성과 바른 위치, 바른 관계를 설정하고 있다. 이 세계관에서는 하나님 중심으로, 그리고 문화명령에서 주어진 자연계에 대한 인간의 근본적인 자세는 물론, 생태계 위기에 있어서의 인간의 타락사건과 자연에 대한 그것의 영향 등을 규명하고 분석한다. 또 심각한 환경문제를 성경적인 창조질서의 관점에서 논의해보고 거기로부터 생태학적인 방향설정을 끄집어내는 것이다. 요컨대 하나님 중심적 세계관에서 인간이 자연을 다 장악하여 착취하지 않고 청지기로 수종들고, 또 자연도 피조성과 개발 및 능력에서 유한성을 지닌다는 것을 환경문제 해결의 첫걸음이 되는 것이다.

 

2. 그릇된 왕직수행에서 바른 청지기적 역할로의 변모

 

타락은 인간으로 하여금 영적인 눈을 멀게 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신분을 바로 보지 못하게 하였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대신, 하나님을 젖혀두고 자기가 우주 전체를 장악하며 군림하는 폭군의 신분으로 상승시키고자 했고 또 실제로 그런 역할을 했다. 인간은 인류의 발전과 문명화를 위해 자연을 수탈적으로 이용하고 정복했으며 그것의 생존권과 창조질서의 성격을 인정치 아니했다. 지구와 생태환경은 인간의 유익과 창조질서의 보존을 통한 하나님의 영광구현을 위해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돌보고 가꾸도록 위탁하신 것이다. 이 점을 염두에 두는 것에서 기독교적 생태의식이 출발하게 된다. 인간은 이제 그릇된 왕직수행을 버리고 바른 청지기역할을 할 변모를 하여 자연을 다스리고 가꾸며 우리 인간과 생명의 같은 연대성 가운데 있음을 인식하고 사랑하며 돌봐야한다. 이런 인간의 신분찾기와 역할변화에서 생태계 위기는 중단될 기반을 갖게 되는 것이다.

 

3. 욕망충족 절대주의에서 창조질서 속에서의 원만한 삶으로의 변화

 

인간의 불순종으로 하나님의 창조질서가 파괴되면서 세상에는 많은 불의와 죄인들이 나타나게 되었는데 이 모든 것은 대개 인간의 욕망에 기인한 것이다. 인간도 개인적, 집단적으로 이기적 탐욕에 사로잡혀서 서로를 착취하고 또 서로가 세계를 착취하게 되었다. 인류는 국가적, 사회적으로는 성장지상주의의 도그마에 빠져있고 개인적, 집단적으로는 죄로 인해 부풀어진 각종 욕망을 채우는 삶의 방식에 젖어있다. 오늘날의 환경오염은 인간의 무한정한 욕망에 따른 자연의 예속적 위치가 그 근본원인인 것이다. 그 욕망을 채우고 성장을 이루기 위해 또는 '문명의 발전'을 위해 자연계를 수단으로 그것을 약탈하고 착취해왔던 것이다. 각국의 경제성장 이데올로기는 정부의 산업화정책을 통해 펼쳐지고, 개인이나 기업들의 무절제한 이익추구와 결부되어 환경파괴를 낳게 되었다. 이제 이러한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욕망충족지향의 논리에서,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욕망의 절제를 통해 자연과의 조화관계 속에 있고 또 창조질서를 존중하고 지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는 삶으로의 변화를 이룰 때 환경오염이 이렇게 인간의 생존을 위기까지 이끌고 가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삶은 하나님과는 물론이요, 이웃과 자연물과도 '더불어 사는 삶'이 될 것이다.

 

4. 인간 삶의 가치와 목적에 대한 성경적 정립

 

지상에서의 인간의 삶이 어떤 의미와 가치 그리고 목적을 지녔는가를 바로 파악할 때 인간은 자연파괴를 통한 욕망성취에 절대성을 부여하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생태계파괴가 감소 내지 최소화될 것이다. 기독교인의 생태의식은 인간의 지상적 삶이 지니는 의미를 바로 인식하고 파악하는 것과 결부되어 있다. 자연개발이니 문명의 발달이니하는 주장에 절대성이 실리는 이유 중 하나는 인간의 지상적 실존의 영구한 것이 아니라 순례적 삶이라는 점을 모르는 것에 놓인다. 그리고 인간 삶의 목적이 지상개발과 자기 영화에 있지 않다는 것에 무지한 것도 한 이유이다. 성경은 인간이 지상에서 나그네로 산다는 것과 또 그 존재의미는 다른 피조물과 함께 하나님께 대한 영광이라고 한다. 인간과 그의 삶에 의미와 궁극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인간을 비롯한 모든 존재의 궁극적 가치와 목표가 있는 것이다. 이런 인식은 자연계를 어떻게 보느냐하는 것보다 어쩌면 자연보존에 더 중요한 배경이론이 될 지 모른다.

 

5. 생명적 생명관의 확립

 

하나님께서는 우주를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한 것은 그것의 무죄상태, 그것이 지닌 조화와 질서, 미와 평화 등의 이유 때문이라 하겠지만 피조물들이 생명을 지녔다는 데에서도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다.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실 때 생명을 불어넣으셨고, 온 피조계는 이런 생명체들 간의 연결고리들로 이어져 있다. 이렇게 생명기원의 신성과 생명체간의 유대관계를 생각할 때 우리는 생명이 매우 소중하다는 점과 한 생물의 생명파괴는 다른 생물의 생명파괴나 손상으로 연결될 수 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인간의 생명과는 차마 비교할 수 없지만 동식물의 생명도 그저 없애버려도 될 정도로 하찮은 것이 아니며, 또 생태계의 파괴는 그것과의 유기적 관계 속에서 연결되어 있는 인간의 생명까지도 위협이 된다는 것이다. 인간이 비록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고 다른 피조물과는 구분되는 창조의 면류관이지만 그 생명도 다른 자연물의 생명에 의존되어 있다. 하나님은 자신이 부여하신 생명을 축복하시고 소중하게 여기듯이 우리도 우리 자신의 생명은 물론 다른 생명체들의 생명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 하나님께서 구약에서 피에 관하여 여러 가지 금령(禁令)을 내리신 것은 그것이 생명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안식의 제도를 두신 것도 생명을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6. 성경적인 기술이해의 정립

 

기술에 대한 이해는 생태계 보존을 위해서 매우 중요하다. 기술이 없이 현대 문명과 역사는 굴러가지 않는다. 그것은 어쩌면 현대인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인 것이다. 수십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마치 요술상자로 보였던 기술은 현금에 와서는 지킬과 하이드처럼 두 얼굴을 지니게 되었다. 환경문제에 대해 우리가 이러한 논의를 하게 된 것도 기술의 두 얼굴 가운데 선(bonum)의 쪽보다는 악(malum)의 쪽이 더 크고 치명적이기 때문이다. 산업혁명 이래로 인간은 기술의 선한 면을 보고 그것에 대한 인간적인 긍정(menschliches Ja)을 했다. 이러한 단순한 긍정은 기술과 그것의 발달만이 인류의 삶을 인간이 꿈꾸는 이상적인 것으로 이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기술이 테크닉에서 테크놀로지로 발전되면서 악한 측면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우리가 성경적 입장에서 이런 점들을 조명해 볼 때 우선 창세기 4장에 나오는 대로 기술의 기원은 아벨과 셋계열의 종교적 행위와 대립, 대조적으로 가인의 후손들에게서 먼저 보여진다. 이것은 셋계열이 구원의 특별은총 속에서 하나님을 경외했다면, 가인계열은 일반은총으로 일반문화를 개발하는데 주력했음을 보여준다. 비록 성경이 기술의 기원을 긍정적인 측면을 부각하기보다 부정적인 기원을 얘기하지만 그것이 기술 자체를 전면 부정하고 죄악시했다고는 볼 수 없다. 그것 자체는 분명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인간이 만든 일반은총의 선물이다.

오늘날 테크놀로지는 인간에 의해 타율적 지배를 안 받을 정도로 엄청나게 성장하여 어떤 자율성을 지닌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여전히 의식과 윤리성을 지니지 않은 기계와 물적 존재에 불과하다. 성경적 관점은 문제가 기술자체에 있는 게 아니라 그것을 만들고 사용하는 인간에게 있다고 본다. 또 기술은 늘 인간의 통제하에 있는 정도까지만 개발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인간의 통제하에 있는 것이라도 사용하기에 따라서 반인간적 결과나 생태계파괴의 결과가 나올 수 있는 기술도 아예 개발이 금지되는 것이 유익하다. 왜냐하면 죄성을 지닌 인간이 늘 기술을 선의 측면만을 위해서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현금에 이르러서는 생태적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기술문명을 전적으로 포기할 수 없고 또 어쨌던 원시적 자연에로의 회귀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기술전능주의 앞에 스스로 경계해야 한다. 성경적 기술관은 기술전능주의와 기술 숭배사상에 대한 비판에 머문다.

 

결론

 

환경문제에 대한 성경적 고찰에서 얻은 결론은 구속받은 신자는 물론 모든 인간은 타락과 범죄로 인해 빚어진 이 생태계 위기현상앞에 인류의 행위와 역사의 방향을 두고 깊이 반성하고 회개하여 창조질서 회복과 보존운동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땅을 잘 개발하고 보존하는 데 실패하여 청지기직을 바로 수행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사를 잘못 사용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일종의 죄인 것이다. 그 죄는 후대의 인간과 자연에 대한 죄일 뿐 아니라 바로 하나님에게 대한, 하나님을 향한 죄인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대리자로 그의 문화명령을 바로 받들어서 주님의 재림시까지 자연을 잘 보존하고 가꾸는 것은 먼저는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바른 책임 수행(종교적)이요, 다음으로는 미래의 이수, 즉 후손들에게 대한 바른 책임수행(윤리적)이요, 그리고 자연에 대한 바른 책임회복(문화적)이다. 생태계 회복 내지 보존운동은 종교적, 윤리적, 문화적 행위인 것이다. 물론 그것이 그 행위의 전체는 아니고 한 부분이지만 말이다.

시대의 변화나 요청과 상관없이 이 종교적, 윤리적, 문화적 명령은 중단없이 수행되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에서 한가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의 행위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시간적이고 지상적인 것에 관련된 것일 때는, 우리 인생이 이 땅에서 나그네된 자임을 명심하고 그런 일을 복음과 좁은 의미의 영성에 직결된 문제보다 너무 앞세우거나 절대화하지 말아야 한다. 인간의 타락한 심성은 초월의 하나님대신 그 어떤 다른 것들, 또 초월의 하나님을 핑계 대고 어떤 것을 절대화하고 이데올로기화하기 쉽게 때문이다.

환경문제를 두고 성경은 오늘의 우리가 무엇보다 먼저 세계관을 교정하여 인간 중심적 세계관에서 하나님 중심적 세계관으로 변화할 것을 요구하며, 그릇된 왕직 수행으로 자연에 폭군 노릇을 하지 말고 바른 청지기의 역할을 수행할 것을 요구하며,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을 절대화하는 삶에서 창조질서에 따른 원만한 삶을 살 것을 요구하고, 인간 실존과 삶의 의미와 가치가 오로지 하나님에게만 있음을 깨닫도록 요구하며, 성경적 생명관과 기술관을 정립할 것을 요구하며, 그리고 지상 유토피아를 지향하는 삶에서 하나님나라를 지향하는 삶으로 전환할 것을 요구한다. 이러한 성경적 관점은 오늘날의 기술중심적 문화를 비판하고 또 그릇된 생태신학과 윤리학과 비판한다. 그밖에 우리가 이런 논의에서 깨닫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인류문명의 발전을 절대화할 이유도, 필요도 없고 또 그것은 현재와 같은 물질주의 방식으로 지속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과학기술의 전능성은 허위이며, 그것이 주는 선 외에 그것에서 비롯되는 해악도 엄청나다는 사실이다. 자연의 유한한 가능성과 그것의 반발로 인해, 또 인간성의 죄성으로 인해 지상 유토피아는 올 수 없다는 것과 하나님의 나라가 인간 노력의 저편에서 하나님에 의해 역사피안에서 온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오늘날의 인간들은 지적, 도덕적 쇄신과 함께 영적, 정신적 갱신이 일어나야 한다는 점이다.

어쨌든 우리는 이 환경문제에서 우리의 하나님께서 이 창조세계에서 기뻐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한 점을 망각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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