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글모든게시글모음 인기글(7일간 조회수높은순서)
m-5.jpg
현재접속자

오늘의

읽을꺼리

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관상기도의 현대적 이해

수도관상피정 오방식............... 조회 수 2455 추천 수 0 2009.11.30 21:24:46
.........
출처 :  

관상기도의 현대적 이해

오방식, "관상 기도의 현대적 이해", 「장신논단」 30
(장로교신학대학, 2007) 271-310.


I. 들어가는 말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관상과 관상기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한국교회 안에서도 관상기도에 대한 관심이 점차 증가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혹자는 관상과 관상기도에 대하여 너무 신비적이거나 지나치게 개인적인 기도라고 평가하기도 하며, 또는 하나님과의 합일, 일치를 구하는 기도라고 비판한다. 관상기도는 극소수의 특별한 사람들만이 드릴 수 있는 기도이기 때문에 일반 평신도들이 드리기에는 너무 어려운 기도 또는 위험한 기도라고 말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성경 안에 관상이라는 용어가 나오지 않기 때문에 비성서적인 기도가 아닌가 하는 의혹의 눈초리로 관상기도를 바라보거나 경계하는 분위기도 있다.

우리가 관상기도에 대한 고찰을 할 때 고려해야 할 중요한 사항이 있다. 그것은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관상기도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서로 다른 이해를 가지고 관상기도라는 용어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관상기도에 대한 많은 비판들이 고려할 만한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 중에는 관상기도에 대한 오해와 잘못된 이해에서 비롯된 것들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바른 시각으로 관상기도를 고찰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먼저, 관상기도가 무엇인지를 바르게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이 글의 목적은 첫째,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관상기도라고 부르는 기도들이 어떠한 기도인가를 탐구하는데 있다. 즉, ‘관상기도란 무엇인가?’의 질문에 답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논의하기 위하여 관상과 관상기도의 관계를 고찰할 것이다.

둘째, 관상기도에 대한 바른 이해에 기초하여 관상기도란 실제적으로 어떻게 드려지는 기도인가를 고찰하는 것이 목적이다. 교회전통에서 어떤 기도를 관상기도라고 불렀으며, 그것은 어떻게 드려지던 기도인가? 그리고 현대 관상기도는 어떻게 드려지는 기도인가? 예를 들어,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관상기도라고 말하는 센터링 침묵기도(Centering Prayer) 나 예수기도(Jesus Prayer) , 예수마음기도 또는 그리스도교 묵상(Christian Meditation) 에서 기도하는 자는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인가? 구체적으로 기도자의 능동성과 수동성의 측면에서 살펴볼 때, 이 기도들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이성이나 상상, 추리의 기능들을 사용하여 능동적으로 드리는 기도인가? 아니면 소위 주부적인 관상처럼 전적으로 수동적인 자세로 기도하는 것인가? 서로 다른 형태의 다양한 관상기도들 사이에서 이 수동성과 능동성 사이에 어느 정도 차이가 있는가?

17세기 이래로 20세기 초반까지 관상기도는 다양한 오해들로 인해 기독교회 안에서 위험스러운 기도로 경계를 받거나 소수의 사람들만이 실행에 옮길 수 있는 특별한 기도로 여겨져 오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관상기도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그 관심이 더욱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정황 속에서 이글을 통해 현대 관상기도에 대한 바른 이해를 제공하고자 한다.

 
 
II. 관상(contemplation)이란 무엇인가?

 
1. 어원

어원적으로 관상(contemplation)이라는 말의 라틴어인 ‘컨템플라시오’(contemplatio)는 ‘템플럼’(templum, 성역)에서 파생되었다. 그리고 여기에서 ‘템플’(temple 성전, 사원)이 유래되었다. 이 ‘템플럼’(templum, 성역)은 성스러운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발견하기 위해서 ‘사물의 내면’ 을 들여다보는 장소였다. 이와 같이 어원적으로 관상은 실체(reality)의 내면을 ‘바라보는 것’을 의미한다. 실체의 내부를 들여다봄으로써 그것들의 바탕과 기원인 하나님을 발견하고 바라보는 것이 관상이다.

또한 관상은 ‘Con’(함께) + ‘Templum’(집, 지성소, 성전)의 합성어이므로 집이나 성전에 함께 머무른다는 뜻도 될 수 있다. 즉, 어원적으로 관상은 성전 안에 계신 하나님과 함께 머무른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관상은 단순히 하나님을 지적으로만 추구하여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 함께 머무르는 체험을 통하여 친밀한 영적 교제를 하며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을 말한다.

 
2. 기독교전통에서의 관상 기도

성경 안에 관상이라는 용어는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관상의 의미를 함축하는 용어나 개념, 표현 또는 이미지들을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다. 구약성경에서 관상의 의미를 나타내는 중요한 용어는 바로 t['D(da'ath)이다. 구약성경은 하나님에 대한 경험적 지식을 강조하기 위하여 히브리어 t['D(da'ath)를 사용한다. 이 t['D(da'ath)는 인간의 지력뿐만 아니라 전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말한다.(시139:1-6, 호 4:1,6) 그리스어 성경은 히브리어 t['D(da'ath)를 gnwsi"(gnosis)로 번역한다. 바울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나타내는 말로 gnwsi"(gnosis)라는 말을 사용했다.(엡3:14-21; 골1:9)

관상에 대한 이해를 위해 그리스 교부들의 사상을 살펴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나 오리겐, 에바그리우스, 그리고 니사의 그레고리 등은 컨템플라시오의 의미를 나타내기 위하여 신플라톤주의 학파에서 ‘테오리아’(theoria)라는 말을 가져와 사용했다. 이것은 원래 ‘진리에 대한 지적인 시각’을 뜻하는 것으로 그리스 철학자들은 이것을 최고의 활동으로 간주하였다. 그리스 교부들은 이 ‘theoria’의 본래적인 의미에 히브리어 t['D(da'ath)의 의미를 첨가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theoria’를 피조물들 중에서 하나님의 흔적을 찾는 ‘자연 관상’(theoria physike)을 표현하는데 사용한다.

이들이 말하는 자연관상이란 계시의 상징과 자연 속에 반영된 하나님의 모습 안에서 또는 그 모습을 통해 하나님을 직관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있는 자연적 능력으로 하나님을 관상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 속에 계신 하나님을 관상한다는 뜻이다. 바로 이런 면에서 자연관상은 신비이며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자연관상은 오랫동안 금욕함으로써 마음을 온전히 정화시키는 기도자의 노력을 전제한다. 기도자의 사고가 더 이상 욕망에 의해 좌지우지되지 않고 뒤틀리지 않을 때 사물의 본질을 그대로 꿰뚫어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자연 안에서 그리고 자연을 통하여 하나님을 보는 이 자연관상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선물에 의하여 신비적인 통찰 안에서 완성되지만, 인간이 주도권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고 준비하는 과정을 포함한다. 이런 점에서 토마스 머튼은 이 자연관상을 능동적 관상의 원형이라고 부른다.

다른 한편으로 그리스 교부들은 관상의 가장 높은 형태인 직접적이고 총체적인 -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직접적인 경험으로서의 하나님 인식을 표현하는데 ‘신학’(theologia)을 사용하였다. 신학(theologia) 은 모든 생각을 초월하여, 즉 개념이라는 매개물 없이 이뤄지는 하나님과의 직접적 준 체험적 접촉(direct quasi-experiential contact with God)이다. 이것은 욕망 또는 감상이나 상상에 물든 개념 뿐 아니라 하나님과 영혼 사이에 모종의 매개물을 요하는 가장 단순한 지적 직관까지 배제한다. 이처럼 신학(theologia)은 하나님과의 직접적 접촉을 의미한다. 그리스 교부들에 의하면 이 지고한 기독교 관상은 하나님을 그 분 그대로 아는, 즉 한 성품 세 위의 하나님으로 아는 준 체험적 지식이다. 머튼의 표현으로는 생각과 자연적 빛과 영적 이미지는 하나님을 만지는 영의 적나라한 직선적 감수성을 방해하는 휘장이나 덮개와 같다. 휘장이 걷히면 우리는 신비의 어둠 속에서 우리의 영과 객체인 하나님 사이의 간격이 없어지고, 신비한 사랑의 포옹으로 그분이 하나님임을 알게 된다. 이것이 가장 순전한 의미에서의 주입된 관상 또는 신비적 관상이다.

이 지고의 신비에 들어서는 것은 영적 노력이나 지적 정교함의 문제가 아니며 학습의 문제는 더욱 아니다. 그것은 온전히 사랑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하나 되는 것이다.(요일4:7-8:13-14) 이처럼 친밀한 하나님의 임재 체험에 바탕을 둔 하나님에 대한 지식 이라는 뜻으로 관상을 이해하는 것은 중세까지 계속 되었다.

한편 초기 기독교 시대부터 평신도와 수도자들에게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라는 기도 방법이 권장되었는데, 이를 통해서도 관상에 대한 이해에 접근할 수 있다. 렉시오 디비나는 성경말씀을 읽고(lectio) 입으로 반복하여 외우며 묵상하여 깊은 내면의 차원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방법이다. 이 과정 중에 묵상(meditatio)과 기도(oratio)가 단순화되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 안에 머물러 쉼을 얻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관상(contemplatio)이다. 렉시오 디비나를 통해 알 수 있는 중요한 사실은 원래 관상이란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우리가 능동적으로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관상에 이르게 된다는 점이다.

현재 우리는 과거의 전통을 되돌아보며 관상의 단계나 성격 등을 구별하지만 사실 16세기 이전까지 하나님께 나아가는 인간의 접근방법이 말씀묵상, 정감적기도, 신비적인 관상으로 분명하게 독립된 부분으로 구분되지는 않았다. 16세기에 이르러서야 마음기도는 사고를 주로 하는 논리적 묵상, 의지의 행위를 중점으로 하는 정감적 기도, 하나님께로부터 부어지는 은혜가 지배적인 관상으로 나누어졌다. 이 결과로 인해 묵상과 기도와 관상은 더 이상 하나의 기도 속에서 발견되는 행위가 아니라, 각각 다른 지향과 방법과 목표를 가지는 완전히 독립된 기도가 되었다. 기도들이 이렇게 나뉘면서 사람에 따라 형태적으로 다른 기도를 하게 되었으며, 관상은 몇몇 사람에게만 주어진 특별한 은혜라는 잘못된 생각이 깊어졌다.

특히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이후에 개신교회 안에서 관상을 추구하는 노력은 거의 사라졌다. 물론 개신 교회 안에서도 추리적인 묵상과 정감적인 기도에 대한 가르침은 강조되었다. 개신 교회의 대표적인 인물인 칼빈은 계시에 대해 다루면서 성령의 역사를 통해 복음의 바른 가르침이 마음속에 확신된다고 말하였다. 이는 말씀에 대한 깨달음의 이성적인 측면과 정감적인 측면을 동시에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리처드 박스터도 묵상에서 ‘숙고(considera- tion)’가 “머리와 가슴 사이의 문”을 여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묘사함으로써 추리적인 묵상과 정감적인 확신을 연결하였다. 또한 존 화이트와 본회퍼도 동일하게 추리적 묵상과 더불어 정감적인 요소를 강조하였다.

그러나 계몽주의 이후로 개신교, 가톨릭, 모두에서 점차 이 정감적인 요소는 무시되고 추리적인 묵상이나 사려 깊은 연구를 강조하는 기조가 이어졌다.

한국교회에서 실천되는 큐티를 볼 때에, 정감적인 요소도 강조되나 전반적으로 이성과 추리, 그리고 상상력의 기능을 강조하는 추리적 묵상의 성격이 상당히 강하다. 비단 한국교회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의 교회 안에서도 관상에 대한 이해나 추구는 거의 사라져버렸다.

이러한 흐름은 오랫동안 교회전통 안에서 잊혀져왔던 기도들이나 특별히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면서 달라지고 있다. 많은 기도자들이 말씀묵상 안에서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관상(Contemplatio)의 선물을 사모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정감적 수준 이상의 은혜를 체험하고자 기대하는 것이다. 기독교 초기부터 있어왔던 말씀으로부터 샘솟듯 흘러나오는 기도와 관상을 바르게 이해하고 경험하게 되면서 점차 관상은 낯선 주제의 자리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3. 두 종류의 관상의 길

기독교 전통에는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께 이르는 두 종류의 관상의 길이 있다. 하나는 ‘유념적인 방법(긍정의 길, kataphatic)’이며, 다른 하나는 ‘무념적인 방법(부정의 길, apophatic)’이다. 윌리엄 샤논은 이 두 종류의 길을 설명하면서, 이 두 가지 길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대표적인 신학자들로 오리겐과 니사의 그레고리를 꼽는다.

오리겐(Origen, ca. 185-255)은 알렉산드리아 학파로 '빛'의 신학자이다. 그에게 있어서 인간의 목적은 타락 이전의 본래 모습을 회복하는 것이다. 구속이란 인간이 본래의 하나님을 닮은 모습을 회복하는 것이요, 관상이라는 본래적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다. 오리겐은 인간이 세 단계를 거쳐 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간다고 말한다. 그 중 첫 단계는 도덕적인 조명인데 그것은 죄로부터 떨어져 나와 덕을 실천하는 삶(praxis)으로 돌아서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는, 자연관상(테오리아, theoria, natural contemplation)이며 마지막은, 하나님 관상(테오로기아, theologia)이라고 부른다. 이 마지막 단계에서 우리는 자신의 본래의 상태로 돌아가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된다. 여기에서 오리겐이 말하는 움직임은 빛에서 더 밝은 빛으로의 움직임이며, 오리겐은 어둔 밤이나 무지를 통한 앎에 대해서는 전혀 말하지 않는다. 이러한 유념적인 방법(긍정의 길, kataphatic)은 개념이나 이미지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이 - 개념, 상징, 이미지를 포함하여 - 하나님을 묵상하고 그 분께 이르는데 도움이 된다고 본다. 모든 피조물이나 인간의 모든 선한 경험들은 하나님의 실재를 엿볼 수 있는 창문의 역할을 한다. 이러한 기도에서는 기도자의 능동적 활동을 인정할 뿐 아니라 더 밝은 빛으로 나아가기 위해 필수적인 것으로 이해한다.

한편, 갑바도기아 교부들(Cappadocian Fathers)중 하나인 니사의 그레고리(Gregory of Nyssa) (ca. 335-395)는 관상 이해의 다른 경향을 나타낸다. 이것은 특히 그의 대표작인 『모세의 생애』에 잘 나타난다. 이 『모세의 생애』에서 그레고리는 오리겐이 했던 것처럼 세 가지 단계를 말하고 있으나, 그 방향은 오리겐의 것과 정반대이다. 즉, 빛에서 어두움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이의 첫째 단계로, 모세의 빛의 경험은 출애굽기 3장에 나오는 불타는 수풀에서 일어난다. 그러나 다음 두 단계는 깊은 어두움으로 들어가는 것인데, 이 중 첫 번째는 출애굽기 19장에 나오는 어두운 구름(nephele)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며, 두 번째는 출애굽기 33장에 나오는 짙은 어두움(gnophos)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이성으로는 인지되지 못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선명하게 자신을 드러내주신다. 도리어 이 어두움 안에서 가장 분명한 하나님 인식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무념적인 방법(부정의 길, apophatic)에서는 긍정의 길은 제한되어 있다고 본다.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말해줄 뿐이며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내면의 실재에 이르도록 하지는 못한다고 말한다. 인간의 어떠한 생각이나 사유, 단어, 상징도 인간을 하나님 실재에 이르게 할 수는 없다. 무념적인 방법(부정의 길, apophatic)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나, 개념, 이미지, 상징을 내려놓음으로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을 드러내 주시고 알려주심을 직접 체험하여 그 분과 온전히 하나가 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실재에 이르기 위해서 우리의 개념적인 장갑을 벗고 '빈 손'으로 어둠 속으로 가야 한다.

기독교 영성전통에서 무념적인 접근의 성향을 가진 영적 작가로는 14세기 『무지의 구름』의 저자, 마이스터 에카르트, 16세기의 십자가의 요한, 그리고 20세기의 토마스 머튼 등이 있다. 그리고 유념적인 접근의 성향을 가진 작가로는 아빌라의 테레사, 그리고 로욜라의 이냐시오 등을 말할 수 있겠다. 테레사의 주요 작품들인 『천주자비의 글』, 『영혼의 성』, 『완덕의 길(the way of Perfection)』은 유념적인 전통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테레사는 말이나 개념을 넘어서는 무념적인 영적 체험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반대로 무념적인 전통에 뿌리를 둔 머튼이나 십자가의 요한이 많은 이미지나 개념, 또는 상징을 통하여 하나님을 향한 여정을 묘사하고 있음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위-디오니시오도 그의 저서 『신의 이름들(the Divine Names)』에서 하나님에 대하여 긍정하는 유념적인 접근을 사용하지만, 이 긍정의 길을 통해 언제나 하나님을 완전하게는 알 수 없다고 주장한다.

비록 무념적인 접근과 유념적인 접근이 하나님을 향한 여정과 접근에서 서로의 방향은 다르지만, 하나님을 찾아감이라는 목적에 있어서는 상호보완적이라고 할 수 있다. 긍정의 길과 부정의 길, 이 두 개의 길은 우월이나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동일한 목표를 위하여 서로 조화를 이룰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일치라는 목표를 위해서 말이다.

 
 
III. 관상과 관상기도: 관상기도란 무엇인가?

 
지금까지는 기독교 전통에서의 관상에 대한 이해와 접근을 보았다. 그렇다면 오늘날은 관상이나 관상기도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오늘날 관상이나 관상기도라는 용어는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서로 다른 이해를 가지고 다양하게 사용하고 있다. 일반적인 묵상에서부터,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수동적 차원에 이르게 되는 주부적인 관상까지 마음기도(Mental Prayer) 의 전 범위를 나타내는 용어로서 관상이나 관상기도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이 관상이나 관상기도를 사용함에 있어서도 특별히 구별을 두지 않고 동일한 내용을 표현하는데 병행하여 사용한다. 실제로 적지 않은 작가들이 이 두 용어를 서로 바꾸어가며 사용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교 묵상운동(Christian Meditation)의 창시자인 존 메인은 “나는 묵상이란 용어를 관상, 관상기도, 묵상기도 등과 같은 뜻으로 쓸 것이다.”고 명백히 말한다. 이런 점을 볼 때, 관상과 관상기도에 대한 이해를 명확히 할 필요성을 발견하게 된다. 이번 장에서는 관상과 관상기도의 관계를 살펴보고, 관상기도란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드려지는 기도인지를 밝히고자 한다.

관상과 관상기도의 관계는 무엇인가? 관상과 관상기도의 관계를 규정하기 위하여 라킨(Larkin)은 이 두 용어의 차이를 제안한다. 그 내용은 관상기도는 ‘길’이며 관상이 최종목표라는 것이다. 관상에 대한 앞 장(章)들의 이해를 기반으로 표현하자면, 관상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사귐과 교제가 이루어지는 어떤 영적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관상기도는 그 상태에 이르도록 돕는 역할을 하는 일종의 ‘길’이다.그러나 라킨은 이렇게 관상과 관상기도를 명백하게 구별하면서도 이 구별은 부적절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이 두 가지는 너무나 긴밀하고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다른 하나를 포함한다. 관상기도는 관상을 성취하기 위하여 고안된 일종의 ‘길’이지만 관상기도로써 시작하는 기도는 곧 관상이 될 수 있다. 이렇게 기도의 흐름이나 역동이라는 측면에서 관상기도는 기도의 시작부터 관상 그 자체까지를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관상기도가 언제나 관상에 이르도록 보장한다고 말할 수 없다. 관상의 상태는 오직 하나님께서 은혜로 준비된 영혼에게 선물로 주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키팅이 고안한 현대 관상기도라고 불리는 센터링 침묵기도도 관상은 아니다. 이 기도는 우리의 기도가 관상의 차원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돕는 아주 수용(수동)적이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능동적이되 단순한 기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기도를 드릴 때에 센터링 침묵기도가 관상의 경험과 완전히 구별되거나 분리되는 것은 아니다. 이 둘이 구별은 되지만 기도 안에서 이 둘의 역동적인 관계를 이해하면 센터링 침묵기도는 관상의 문턱에 있는 기도라 하겠다. 또한 이 기도는 관상을 준비하지만 이 기도 안에서 수동적 차원의 상태가 시작됨으로 관상이 이뤄지는 기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관상과 관상기도의 관계를 명료화하기 위하여 이 둘을 구별하는 라킨의 관점은 매우 적절하고 유익하다. 비록 그가 키팅의 관상과 관상기도에 대하여 일부 오해를 가지고 있지만 말이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정리하면 라킨과 키팅의 관점은 동일한데, 그것은 관상기도는 길이며 관상이 최종 목표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 관상기도는 어떻게 드려지는 기도인가? 엄밀하게 보면 여기에서 관상과 관상기도가 구별된다. 관상기도가 관상을 지향하는 기도라고 한다면, 사실상 우리의 모든 기도가 관상을 지향하므로 ‘모든 기도를 관상기도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라는 질문이 나타날 수 있다.

이에 대해 윌리엄 존스톤이 열거한 관상기도의 몇 가지 방법에 대한 설명은 우리가 관상과 구별하여 관상기도가 무엇인지를 파악하는데 큰 통찰을 주며, 그 결과 관상기도를 어떻게 드려야 하는지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우리는 묵상 안에서 고요히 앉아있는 모든 문화와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을 모든 곳에서 본다. 어떤 이는 십자가나 성상 앞에서 한 가지에 초점을 맞추며 묵상하며 앉아 있으며 어떤 이는 제단을 바라보며 앉아서 호흡만을 한다. 또한 어떤 이는 그들의 환경 안에서 정념(awareness, 깨어 있기)이나 하나님을 발견하기(awareness of God)를 실천한다.…… 어떤 이는 그들 자신의 호흡의 리듬을 따라 만트라를 암송한다. …… 어떤 이들은 자신들의 정신과 마음을 우주 안에 계신 하나님의 현존에 열어 드린다. 다른 이들은 하나님께 그저 말씀을 드린다.

확실히 이런 다양한 방법들은 직접적으로 신비적이라고 불리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들은 신비주의에 이르는 관문이다. 그 모든 것이 침묵으로 인도하며 테레사의 고요의 기도 나 더 높은 궁방으로 이끈다.

 
위 표현에서 보면 존스톤은 관상과 관상기도를 확실히 구별하고 있다. 관상기도는 고전적인 의미에서 신비적이거나 수동적인 기도가 아니다. 그것은 그 방향을 관상으로 향하도록 하는 기도이다. 어느 면에서 모든 기도가 관상을 지향한다고 말할 수 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관상기도라는 용어는 아주 적극적으로 사색을 하거나 상상을 하던 입장에서 떠나 단순화된 능동적 기도로 관상을 지향하는 기도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기도의 실천에서 나타나는 관상과 관상기도의 차이를 이해하면, 구체적으로 관상기도를 어떻게 드릴지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다. 관상기도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기도하는 자의 능동적인 행위로 시작된다. 처음에 우리는 말씀에 대한 사색이나 추리, 또는 상상력을 사용하여 묵상하며 기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묵상의 수준을 넘어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면 우리의 기도행위는 일반적으로 매우 단순하고 비추리적인 활동이 된다. 관상기도를 드리는 이는 사색, 논리적인 추론, 상상이나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행위를 넘어서 점차적으로 고요한 현존과 하나님 앞에서의 침묵을 추구하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

교회전통에서 가르쳐온 일반적인 기도의 단계를 통해 설명하자면 소리기도, 추리적인 묵상, 정감적인 기도의 단계를 지나 우리의 전 존재로 하나님과의 일치를 구하는 매우 단순한 형태의 기도가 있는데, 이것이 오늘날 관상기도라고 부르는 것과 유사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 기도형태들은 고전적인 주부적 관상의 관점으로 볼 때는 관상의 경험을 직접적으로 묘사하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기도자가 관상의 은총을 얻기 위하여 아직도 능동적으로 기도를 드리는 성격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살펴 본대로 기도의 실천 가운데 일어나는 흐름과 역동에서 가장 단순화된 능동적 기도를 관상기도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교회전통에는 다양한 형태의 단순기도들이 있다. 바로 이 관상의 은혜를 받고자 우리가 드리는 매우 단순한 형태의 능동적인 기도를 관상기도라고 정의할 수 있다.

 
 
IV. 주부적인 관상과 관상기도

 
앞 장에서는 관상기도의 흐름과 역동이라는 측면에서 관상과 관상기도를 구별하였다. 관상기도는 관상을 목표로 하고 시작하게 되는데, 이 관상 자체가 무엇인지, 그리고 진정한 관상이라고 불리는 주부적인 관상은 무엇을 말하는지에 대해서도 정확한 이해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번 장에서는 관상과 관상기도의 관계를 명료화하기 위하여 관상 특히 주부적인 관상의 의미를 깊이 살펴보고자 한다.

기독교 전통에서 진정한 관상은 하나님의 임재를 직접적이고도 신비적으로 체험하는 주부적인 관상을 의미한다. 주부적인 관상은 “하나님께 대한 초자연적 사랑이요, 인식을 말한다. 하나님에 의하여 영혼의 그 꼭대기에 부어져 내린, 단순하고 어둑한 것으로서, 관상은 영혼으로 하여금 직접적이고도 체험적인 하나님과의 만남을 이루게 해 주는 것이다.” 갈멜 전통의 대표적인 안내자인 테레사와 십자가 요한에게 있어서 관상은 아주 구체적이며 명확한 구획을 가진다. 그들에게 있어서 관상은 수동적인 어둔 밤에서 시작되는 것으로서, 어둠 가운데서 하나님을 순수하게 사랑하는 경험인 것이다. 그것은 신비적이다. 그것은 일반적인 은혜의 역사 아래에서 인간적인 노력에 의해서는 획득될 수 없는 순수한 하나님의 선물이다. 이 체험 안에서 기도자는 일상적인 추리나 사고를 할 수가 없으며, 침묵의 깊이에서는 어느 정도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의심의 여지없이 확실하게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는 체험을 하게 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형태의 기도를 드리는가 하는 것보다는 어느 수준에서 이 기도들이 드려지고 있는가 하는 점과 누가 이 기도를 주도하고 있는가이다. 주부적인 관상의 수준에서는 우리가 어떤 형태의 기도를 드리든지, 성령이 전적으로 주도하시고 우리는 오로지 그 분의 인도를 받으며 수동적인 차원의 기도를 드리게 된다.

그런데 오늘날의 영성신학에서 능동적인 기도와 수동적인 기도, 즉 주부적인 관상사이의 구별은 무시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경향을 잘 보여주는 인물이 20세기의 대표적인 영적 안내자인 토마스 머튼이다. 그는 그의 초기 작품들 속에서는 기독교 전통의 이해를 그대로 받아들여 관상을 능동적인 관상과 수동적 관상으로 나누면서 진정한 관상은 오직 수동적 관상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의 후기 작품에서 이 능동적인 관상과 수동적인 관상과의 구별을 부적절한 것으로 인식하며 양자의 구별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신비적인 기도의 현상학적인 한계 때문이다. 즉, 기도의 어느 시점에서 ‘자연적’ 내지 ‘획득된’ 상태가 끝나고, ‘초자연적’ 또는 ‘주입된’ 상태가 시작되는지에 대하여 명확한 경계선을 긋기 어렵기 때문이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그것은 인간이 언제 스스로 행위의 주관자이기를 멈추고, 주관자 자리를 성령께 내어드리는지에 대한 문제이다. 즉, 어느 시점에서 기도가 신비적인 징후를 보이는가 하는 것이다.

머튼은 이 모든 문제가 관상과 신비를 어떻게 정의하는지에 달려 있다고 본다. 일반적으로 관상을 자연적 관상과 초자연적 관상으로 나누는 사람들은 자연적 관상은 획득될 수 있다고 본다. 이렇게 획득된 관상은 능동적 관상과 유사한 것이며, 관상가 자신은 영적 노력으로 얻어진 초자연적 실체를 직관적으로 인식한다. 관상을 구분하고 획득된 관상을 옹호하는 이들은 이 관상이 별로 신비적이지 않다고 본다. 그러나 이들과는 달리 어떤 사람들은 동일한 기도상태를 말하면서도 그것이 참된 신비적인 관상이며 획득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들은 이 기도의 상태를 수동적인 초자연적 선물로 보는 것이다.

관상과 신비에 대한 이해를 얻는데 칼 라너의 견해는 분명한 도움을 전해준다. 칼 라너에게 있어서 모든 하나님 체험은 믿음과 사랑의 체험이다. 또한 그는 지상적인 것까지 포함하여 모든 것을 신비적이라고 부른다. 하나님에 대한 모든 지식과 사랑이 주부적인 것이다. 기도 경험뿐만이 아니라 심지어 믿음의 산물인 평범한 기독교인들의 경험들도 성령의 움직임이다. 그것들은 일상적인 신비주의이며 매일의 신비주의이다.

그런데 라너의 관점에서처럼 모든 하나님 체험이 신비적이고 주부적인 것이라면 기독교 전통에서 수동적인 관상으로 이해되어져 왔던 것을 이제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에 대하여 라너는 수동적인 관상을 사랑과 믿음의 기본적인 경험이 높은 강도로 체험되어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성인들의 고전적인 신비 경험은 ‘비범한’ 것이다. 그는 그것들이 비범한 것은 그것들의 원리 때문이 아니라 그것들의 강도와 희귀성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신학적으로, 묵상이나 인간 활동 안에서의 또는 고전적인 주부적인 관상 안에서의 하나님 체험은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동일한 선물이다. 오직 그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의 질문은 여전히 남는다. 왜냐하면 두 종류의 관상을 경험할 때에는 둘 사이에 차이가 분명하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라너의 신학도 경험적인 차원이나 수준에서는 이 둘 사이의 상당한 차이를 제거하지 않는다. 라너의 이해에서도 여전히 깊은 차원의 기도 수준은 존재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이 바로 연구할 영역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관상과 관상기도를 구별하고 관상기도를 어떻게 드릴 것인지를 논함에 있어서는 관상의 이해를 다음과 같이 할 필요가 있다. 현대적 관상과 신비 이해를 통해 능동적 관상과 수동적 관상의 연속성을 이해하면서도 그 정도의 차이는 구별해두어야 할 것이다. 이 구별이 중요한데, 왜냐하면 이 구별된 경계선 상에 단순화된 능동적인 기도 즉 관상기도가 위치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묵상과 관상의 관계를 통해 분명하게 제시하고자 한다.

 
 
V. 묵상과 관상 그리고 관상기도

 
묵상과 관상에 대한 전통적인 가르침을 살펴보면, 관상과 관상기도에 대한 이해를 보다 깊게 가질 수 있으며, 현대관상기도의 성격에 대해서도 더 잘 알 수 있다. 현대관상기도라 할 수 있는 센터링 침묵기도의 형태나 그리스도교 묵상의 형태에서 관상기도는 묵상에 속하는가? 아니면 관상에 속하는가? 이것은 앞 장에서의 능동적인 기도와 수동적인 기도의 관계, 그리고 주부적인 관상과 관상기도의 관계에 대한 질문이기도 한 것이다. 이번 장에서는 묵상과 관상의 이해를 통해 관상기도는 무엇인지에 대해 논의를 이어가고자 한다.

일반적인 이해에서 묵상은 능동적인 기도이며, 관상은 수동적인 차원의 기도 또는 수동적 차원의 영적 상태를 말한다. 묵상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하지만 실제적으로 기도하는 자는 성령의 인도 하에서 능동적으로 주도해 나가게 된다. 로랜스 커닝햄과 키스 이건의 공동저서에 의하면, 묵상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일깨워주는 반추적인 기도요, 기도자로 하여금 관상의 선물을 받을 준비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기도”이다. 반면에 관상은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선물로서 주어지는 것이고 변화시키는 경험”이다. 십자가 요한에 의하면 관상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지식(loving knowledge of God)이며, 성령에 의하여 우리가 받을 준비가 될 때에 순수한 선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묵상이란 은혜를 입은 사람이면 누구라도 노력하여 행할 수 있는 것이지만, 관상은 오직 하나님만이 행하실 수 있다.

어원적으로, 라틴어 meditari(묵상하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내면으로 받아 들인다”는 뜻인 ‘meletan’에서 왔다. 이것은 다시 “어떤 것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다”는 뜻의 히브리어 ‘haga’에서 유래했다. 유대전통이나 고대나 중세 수도 전통에서 묵상은 성서본문을 읽고 암송하여 마음으로 그 구절의 충만한 의미를 배우는 것을 의미했다. 즉, 그것은 영혼과 육체의 전 인간이 성서본문을 작은 소리로 끊임없이 반복, 암송하고 마음에 각인시키는 방법이었다.

Meditatio(묵상) 개념은 처음에는 ruminatio(되새김, 반추)의 의미로 사용되다가 12세기 이후 스콜라 학문의 영향을 받으면서 지성적인 면을 강조하는 경향으로 흐르게 되었다. 그래서 본래의 묵상의 개념에 “생각”(cognitatio), “숙고”(consideratio), “연구”(studium)와 같은 지성적인 의미가 첨가되었고 이런 의미들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12세기에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를 체계화한 귀고 2세에 의하면 묵상의 단계란 “하나님의 말씀 안에 숨은 진리를 깨닫기 위해 적극적으로 인간의 이성과 정신을 사용하는 능동적인 단계”이다.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의 경우도 묵상에서 이성의 기능을 강조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성령의 조명 없이는 절대로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없지만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이성의 기능을 사용하여 적극적으로 말씀을 묵상할 것을 강조한다.

렉시오 디비나에서는 rumanatio의 방법이든, 이성의 기능을 강조하는 스콜라적 묵상이든, 묵상은 관상을 지향한다. 비록 이성과 추리적인 기능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여 묵상을 할지라도 지적 깨달음의 수준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하여 영혼에게 다가와서 깊은 일치를 이루시는 관상의 선물을 갈망한다.

묵상과 관상을 통한 하나님을 앎은 개혁주의 신학자 몰트만에게서도 발견된다. 몰트만은 묵상과 관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묵상은 십자가, 파스카의 신비,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복음 메시지를 묵상하는 것이다. 그리고 관상 또한 성서적이며 그리스도 중심적인데, 왜냐하면 관상은 묵상을 하며 반추하는 동안에 각 사람 안에서 일어나는 사랑과 지식의 앎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관상은 하나님을 앎으로 깊어지게 되는 자기 앎으로의 회귀이며,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앎이다. 몰트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묵상’을 어떤 것에 대하여 사랑하고 동정적이며 참여하는 인식으로 이해한다. 관상은 이 묵상 안에서 내 자신의 자아를 성찰하면서 의식하게 되는 것으로 이해한다. 묵상하는 자는 그 묵상의 대상 안에 침잠해 들어간다. 직관 속에서 그는 그들 자신이 사라지며 “자기 자신을 잊어버린다.” 그 묵상의 대상은 역으로 그들 속으로 가라앉는다. 그러면서 관상 안에서 그들은 자신을 다시 내면화한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변화를 인지한다. 그들은 자기로부터 나간 다음에, 자기 자신으로 돌아온다. 묵상 속에서 우리는 대상을 인식한다. 이와 결합되어 있는 관상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인지를 인식한다. 물론 관상 없는 묵상이 없으며, 묵상 없는 관상은 없다. 그러나 이해를 돕기 위하여 묵상과 관상을 이렇게 구분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관상은 우리 가운데서 행하시는 하나님을 그리스도 안에서 경험하는 것이다. 묵상의 여파로서 우리의 몸과 마음, 영 안에 남겨지는 것이다. 라킨은 모든 묵상에 이런 관상의 순간들이 있다고 말한다. 이런 관상의 순간에서는 묵상 안에서 추구했던 사고나 상상,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행위를 더 이상 추구하지 않고, 단순히 하나님의 임재 앞에 머물러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묵상과 관상에서 관상기도는 어디에 속하는가? 앞에서 연구한대로 매우 단순한 능동적 기도의 형태를 관상기도로 본다면 이러한 구조의 틀에서 현대관상기도인 센터링 침묵기도나 그리스도교 묵상은 사고나 추리, 또는 상상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능동적인 묵상이나 하나님과의 깊은 일치를 나타내는 관상의 어느 범주에도 속하지 않는다.

이 논의에 있어서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는 관상기도가 묵상과 관상에서 어디에 위치하게 되는지를 설명하는데 도움을 준다. 관상과 관상기도는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의 네 단계로 이루어진 구조를 통해 보다 명확하게 이해될 수 있다. 관상은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에서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선물로서 주어지는 경험이다. 렉시오 디비나에서의 네 번째 단계가 주부적인 관상이기 때문이다. 앞의 세 단계는 분명히 능동적이다. 하지만 네 번째 단계인 관상은 쉼, 고요, 수동성을 나타낸다. 귀고 2세는 “관상은 정신이 하나님께로 들어 올려져 거기에 머무르는 단계로, 이때 한없이 감미로운 환희를 맛봅니다.” 라고 묘사한다. 이것은 주부적인 관상을 묘사하는 표현이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 관상은 동시에 렉시오 디비나의 일부로서 기도에서의 일상적인 경험이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관상기도는 이 네 단계 중에서는 어디에 속하는가? 관상기도를 실제적으로 가르친 현대기도 안내자들인 라킨이나 키팅 그리고 페닝턴은 공통적으로 그것을 렉시오 디비나의 세 번째 단계와 네 번째 단계 사이에 둔다. 관상기도는 일종의 고안된 능동 기도의 형태이지만 동시에 ‘관상적인(Contemplative)’ 이라고 불린다. 왜냐하면 그것은 주님 안에서 쉼을 그 목적으로 시작되며 곧 그것에로 옮겨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관상기도는 능동적인 차원의 기도와 주부적인 차원의 기도 사이의 기도라 하겠으며, 일상성과 주부적인 은혜, 이 둘의 역동적인 관계를 이어주고 설명해주는 기도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사실에서 묵상과 관상 사이의 기도라고 할 수 있다.

관상기도란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는 관상과 관상기도의 관계를 통해서 분명히 살펴볼 수 있었다. 관상기도는 수동적 관상에 이르기를 목표로 하면서 드리는 기도이다. 그런 면에서 관상과 관상기도는 구별된다. 하지만 관상기도의 흐름 안에서 관상이 시작되기 때문에 관상과 관상기도는 구별되지만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있다. 더불어 묵상과 관상의 관계에서 살펴 본대로 관상기도는 분명히 묵상의 단계를 넘어서는 것이되 관상을 지향하는 것으로 관상 이전의 단계에 위치한다. 그러므로 관상기도는 묵상과 관상 어디에도 속한 것은 아니다. 다만 능동적이되 단순화된 상태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지향을 이어가는 기도이다. 즉, 우리의 사고나 의지가 단순하게 되어 오직 하나님에게만 집중하게 되는 것이 바로 관상기도인 것이다.

 
 
 
VI. 아빌라의 테레사와 십자가의 요한

 
관상기도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하여 지금까지 관상과 현대관상기도들의 관계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그러면 지금까지의 분석은 이 둘의 관계에 대하여 가장 고전적인 가르침을 주는 테레사와 십자가 요한의 가르침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관상기도란 관상을 최종목표로 드려지는 기도이며, 단순화된 능동적 기도라는 지금까지의 이해와 이 두 신비가의 가르침이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이번 장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테레사는 그녀의 저서인 『완덕의 길』,『영혼의 성』을 통해 소리기도에서부터 일치기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기도를 제시하고 있다. 테레사의 실제적인 가르침에서 오늘날 우리가 관상 기도라고 말할 수 있는 형태의 기도가 있는가? 이에 대하여 테레사가 『완덕의 길』 28장과 29장에서 제시한 ‘능동적 거둠’의 기도로 답할 수 있을 것이다. 테레사의 표현으로 능동적 거둠은 “영혼이 제 모든 능력(기관)을 거두어 들여 자기 안으로 들어가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다. 능동적 거둠의 기도는 이전 단계의 기도인 이성이나 상상을 많이 활용하는 추리적인 묵상과는 달리 매우 단순화된 기도이다. 그러나 이것은 능동성이 완전히 배제된 주부적인 관상도 아니다. 이 기도는 묵상에서 관상으로 옮겨가는 중간 단계에 위치한 기도의 형태라고 볼 수 있으며, 바로 이것이 현대의 관상기도와 유사하다고 말할 수 있다. 센터링 침묵기도 운동의 대표적인 안내자이면서 이 기도의 역사적인 뿌리를 고찰한 바실 페닝턴은 테레사에게서 센터링 침묵기도와 유사한 기도의 형태가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여 표현한다. 또한 라킨은 테레사가 말하는 ‘능동적 거둠’의 기도가 현대 센터링 침묵기도의 수준에 속한다고 볼 수 있으며, 실제로 센터링 침묵기도와 유사하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테레사가 표현한 기도에서 현대관상기도라 할 수 있는 ‘능동적인 거둠’의 기도와 구분되는 주부적인 관상의 기도는 존재하는가? 만약 존재한다면, 그 기도가 관상기도는 아니며 관상 자체라고 할 수 있는 특징은 무엇인가? 이에 대해서 우리는 ‘수동적 거둠’과 그 이후에 계속되는 ‘고요의 기도’, ‘일치의 기도’를 설명함으로써 답할 수 있을 것이다.『영혼의 성』 4궁방에 나타나는 테레사의 관상은 ‘능동적 거둠’ 이후의 단계라 할 수 있는 ‘수동적 거둠’과 ‘고요의 기도’로 시작된다. ‘수동적 거둠’은 목자의 피리소리를 듣고 양 무리들이 자신들의 처소로 이끌려 들어가듯이 하나님에 의하여 우리가 내면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차원의 기도이다. 그러므로 이 ‘수동적 거둠’의 기도에서부터 능동성은 사라지고 수동적 차원이 중심이 되는 주부적인 차원의 기도가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테레사의 ‘능동적 거둠’은 4궁방의 ‘수동적 거둠’과 ‘고요의 기도’의 앞 단계의 기도로 분명히 우리가 능동적으로 더 깊은 기도로 이끌림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는 차원이 있다. 다시 말하면 전적으로 수동적이며 주부적인 기도는 아니다. ‘능동적 거둠’의 기도는 고요나 일치적인 신비기도에 이르도록 하는 문과 같은 기도이다. 이런 면에서 테레사의 ‘능동적 거둠’의 기도는 현대 관상기도인 센터링 침묵기도나 그리스도교 묵상과 동일한 수준의 기도라고 할 수 있겠다.

반면에 십자가의 요한은 테레사의 ‘능동적 거둠’이나 현대의 새로운 형태의 관상기도처럼 뚜렷하게 구별되는 관상기도형태를 제시하지는 않는다. 십자가 요한의 관심은 영적 생활에서 관상으로 이끌림을 받았을 때 우리가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지에 관한 것이며, 이 관점에서 관상에 대한 가르침을 주고 있다. 요한은 기도자가 이전의 방법으로는 기도하기가 어려워지면서 ‘감각의 어둔 밤’에 이르게 되는데, 그 안에서 관상의 첫 열매를 경험하게 된다고 이해한다. 요한은 ‘감각의 어둔 밤’을 설명하면서 이 때 나타나는 세 가지의 표시-‘무미건조함’, ‘논리적인 묵상을 할 수 없음’, ‘내면의 방황’ -에 대하여 말한다. 요한은 이 세 가지의 표시가 다 있을 때 감각의 밤에 들어 간 것이 분명하다고 말한다. 십자가의 요한은 실제로 이런 ‘감각의 밤’은 하나님께서 각 개인으로 하여금 더욱 친밀한 관계로 그들을 이끌기 위한 것이요. 젖을 먹는 어린아이의 신앙에서 단단한 음식을 먹는 순수한 어른의 신앙으로 이끌기 위한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가르친다.

요한에게 있어서는 묵상과 관상 사이의 전이형태의 기도가 없다. 앞에서 묵상과 관상 사이에 관상기도가 위치한다고 결론내린 사실을 고려해 본다면, 요한의 가르침에서 관상기도에 대한 설명은 없다고 할 수 있다. 요한은 관상기도의 형태 자체에 관심을 두기 보다는, 우리가 이미 주부적으로 하나님께서 자신 안에서 행하시는 것을 알아차리고, 다만 하나님을 단순히 주목해야한다고 조언한다. 이런 사실에서 라킨은 요한의 기도지침을 현대의 관상기도 형태와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요한의 조언을 다른 상황에 적용시키는 잘못된 이해라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주부적인 관상에서의 단순한 주목은 하나님의 특별한 활동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과 이미 기도자가 수동적 차원으로 기도드리고 있다는 사실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요한이 말하는 ‘감각의 어둔 밤’은 엄밀한 의미에서 주부적인 관상의 시작이라는 사실이다. 기도자는 이 주부적인 관상에서 사랑스러운 눈길을 가지고 아무 노력 없이 수동적인 사랑의 주목을 드리는 것이다.

십자가 요한에게 있어서 관상은 순수한 선물이며 단순히 받는 것이다. 그가 주부적인 관상을 선물로 받기 위한 길로 이해하여 능동적인 협력 차원의 기도를 제안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면에서 십자가의 요한의 관상 이해는 테레사의 것과는 달리 현대 관상기도와 같은 형태의 기도구조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관상기도가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는 아빌라의 테레사와 십자가의 성 요한이라는 두 기독교 전통의 대표적 관상가들을 통해 더욱 정교해지며, 확고해질 수 있다. 아빌라의 테레사의 가르침에서 현대 관상기도는 그녀가 말한 ‘능동적 거둠’의 기도이며, 주부적 관상인 ‘수동적 거둠’의 기도와 ‘고요의 기도’와는 구별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의 가르침에는 관상기도 자체에 대한 설명은 없지만, ‘감각의 어둔 밤’을 이해함으로써 관상, 즉 주부적 관상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보다 명료하게 살필 수 있었다. 이 두 신비가의 이해를 통해 우리는 관상 기도란 온전히 수동적인 관상 그 이전의 것이며, 능동적인 요소가 미약하지만 남아있는 단순화된 기도라고 결론내릴 수 있을 것이다.

 
 
VII. 나가는 말:

 
이글은 무엇이 관상기도이며, 이에 대한 논의를 통해 왜 우리에게 이런 관상기도가 필요한지를 밝히고자 하였다. 이 연구를 진행함에 있어서 시작점은 관상과 관상 기도의 관계를 고찰하는 것이었다. 이 논의가 중요한 이유는 관상의 신비적 차원과 그 차원과 연관된 관상 기도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상호관계성), 또한 상호 간의 차이의 내용은 무엇인지를 분명히 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하여 먼저 정의적 측면에서 용어의 어원을 분석함으로 관상의 의미를 이해하였다. 어원적 의미를 통해 살펴보면, 관상은 우리 존재의 바탕이며 기원인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단순히 지적으로 하나님을 알고자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영적 교제를 통하여 알아가게 되는 경험적인 사랑의 지식을 추구하는 것이다.

또한 여러 학자들이 제시한 관상과 관상기도의 관계를 간략하게 정리하면, 관상은 목표이며 관상 기도는 관상에 이르는 길이라고 할 수 있다. 각 개인은 관상에 이르기 위해 관상 기도를 드릴 수 있으나 관상 자체는 우리 인간의 노력으로 성취할 수 없고, 하나님이 은혜의 선물을 주실 때에야 우리가 받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관상 기도는 우리가 관상에 이르는 은총을 받을 수 있도록 우리를 준비시켜주는 단순화된 능동적 기도라 말할 수 있다.

그 다음 장에서는 목표로서의 관상과 관상에 이르는 길로서의 관상기도의 관계를 보여주기 위하여 먼저 역사적 전통 가운데 진정한 관상으로 여겨져 왔던 주부적인 관상의 의미를 연구하였다. 중세 이래의 갈멜이나 도미니칸 전통에서는 관상에 대한 이해를 능동적인 관상과 수동적인 관상으로 구분하였으며, 이 중에서 수동적인 관상만이 진정한 관상이라고 이해해 왔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 토마스 머튼이나 칼 라너와 같은 인물들이 관상을 능동적 관상과 수동적 관상으로 나누는 것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하였던 것도 또한 살펴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제기를 고려하여 다 수용한다고 하더라도, 수용적 관상으로 부를 수 있는 강도 높은 깊이의 수준을 가진 기도의 차원이 있음을 어느 누구도 부인하지는 못할 것이다. ‘어떻게 이러한 깊은 차원의 기도를 우리가 드릴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은 여전히 과제로 남게 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관상기도의 필요성을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이 글에서는 전통적으로 이해해 온 추리적인 묵상과 관상과의 관계를 조명하면서 현대관상기도가 묵상과 관상 이 둘 중 어느 하나에도 속하지 않음을 밝힘으로 관상기도의 의미를 더욱 분명히 하였다. 특히 렉시오 디비나의 역동을 통하여 관상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또한 묵상으로(말씀으로) 기도를 드리는 가운데 은혜의 선물로 주어지는 일반적인 체험인 것을 지적하면서 관상기도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강조하였다. 렉시오 디비나 중에 말씀은 우리 존재의 일부가 되고 사도바울이 고백하듯이 주님이 내 안에 계시고 우리가 주님 안에 계심을 느끼고 경험하는 일치적인 관상의 체험을 선물로 받을 수 있다. 묵상은 하나님에 대하여 추론적으로 인식하지만 관상은 사랑에 의한 앎이다. 관상기도는 묵상의 수준을 넘어서서 바로 이 관상을 선물로 받을 수 있도록 돕는 단순기도라 할 수 있다. 이성과 추리를 통한 묵상적인 앎을 넘어서 하나님께서 친히 알려주시는 친밀한 앎인 관상의 선물을 얻을 수 있도록 하는데 관상기도의 의미와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본론의 마지막 장(章)에서는 갈멜의 두 대표적인 기도 안내자인 아빌라의 테레사와 십자가 요한의 기도와 묵상 그리고 주부적인 관상에 대한 이해를 명료화함으로 현대 관상기도들이 그들의 가르침과 어떤 관계성을 가지는지를 살펴보았다. 아빌라의 테레사가 표현한 단순기도로서의 ‘능동적 거둠’은 관상을 지향한다는 측면에서 현대관상기도의 형태들과 같은 수준의 기도행위를 다루고 있으며, 특별히 ‘능동적 거둠’은 센터링 침묵기도와 그 실천의 형태와 원리가 유사하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한편으로 십자가 요한은 ‘감각의 어둔 밤’을 통해 주부적인 관상에 대하여 말하였다. 그 사실로부터 요한의 관상과 현대관상기도와는 다른 차원의 기도라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관상과 관상기도의 차이를 보다 명백히 인식할 수 있다.

지금까지 고찰한 바와 같이 오늘날 관상기도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관상적인 일치를 이루고 관상적인 깨달음을 얻을 수 있도록 고안된 기도이다. 관상기도는 어떤 형태의 기도이든지 관상을 지향한다. 이런 면에서 오늘날 현대적인 관상기도는 우리가 묵상하는 말씀이 우리 자신의 일부가 되어지고 우리의 기도가 더욱 깊어져서 하나님과의 깊은 영적교통과 교제를 통한 앎으로 나아가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처럼 관상기도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졌다고 관상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바른 이해를 가지고 어떻게 이 기도를 드릴 것인가가 이제 우리의 실천적 과제이다. 관상은 노력의 산물이 아니라 은혜로 주어지는 선물이지만, 일상적인 기도 안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관상은 소수의 특별한 사람에게만 제한된 것이 아니며, 또한 일상과 유리된 차원의 신비도 아니다. 관상이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임을 알고 기도하는 이들에게 관상기도는 신비와 관상의 문을 여는 기도가 될 것이다. 우리 한국교회 안에서 관상기도에 대한 바른 인식이 커져가고 더불어 꾸준한 기도 수련을 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로 끊임없이 변화하고 성숙하는 삶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한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773 경포호수가에서 일그러진 우상 피러한 2009-12-27 2542
1772 수도관상피정 묵상에서 관상으로 옮겨가는 단계의 특징 운영자 2009-12-21 2336
1771 수도관상피정 죄의 개념과 종류 운영자 2009-12-21 2674
1770 수도관상피정 하나님의 임재 방식 십자가의 요한 2009-12-21 2517
1769 수도관상피정 영적 여정에서의 그리스도론 십자가의 요한 2009-12-21 2133
1768 수도관상피정 초자연적인 현상에 대하여 십자가의 요한 2009-12-21 2602
1767 영성묵상훈련 [어거스틴 참회록89] 하나님에 대한 영적 개념 어거스틴 2009-12-16 3192
1766 영성묵상훈련 [어거스틴 참회록88] 죽음과 심판에 대한 공포 어거스틴 2009-12-16 3022
1765 영성묵상훈련 [어거스틴 참회록87] 첫번째 아내와 이별하고 어거스틴 2009-12-16 3791
1764 영성묵상훈련 [어거스틴 참회록86] 집단생활의 계획 어거스틴 2009-12-16 3010
1763 영성묵상훈련 [어거스틴 참회록85] 아들을 위해 신부감을 찾는 모니카 어거스틴 2009-12-16 3783
1762 논문신학성경 구약성서의 신앙과 신학 [2] 김이곤 교수 2009-12-13 4078
1761 논문신학성경 박윤선의 구약신학과 주경신학 김회권 교수 2009-12-13 6294
1760 수도관상피정 관상기도와 성화 file 박노열 목사 2009-12-11 3781
1759 수도관상피정 정신집중과 기도 방법 (필로칼리아 5권에서) 박노열 목사 2009-12-11 2873
1758 수도관상피정 한국형 관상기도는 없을까? 박노열 목사 2009-12-11 2423
1757 수도관상피정 칼빈의 기도론에 관한 소고 백유현 2009-12-11 2507
1756 영성묵상훈련 [어거스틴 참회록84] 결혼에 대한 논쟁 어거스틴 2009-12-07 3381
1755 영성묵상훈련 [어거스틴 참회록83]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어거스틴 2009-12-07 3102
1754 영성묵상훈련 [어거스틴 참회록82] 알리피우스의 덕과 네브리디우스의 도착. 어거스틴 2009-12-07 2936
1753 영성묵상훈련 [어거스틴 참회록81] 알리피우스의 누명 어거스틴 2009-12-07 3198
1752 영성묵상훈련 외로움에 떨고있는 영혼들 루디아황 2009-12-06 2995
1751 영성묵상훈련 죄인을 정복하라 사랑으로 루디아황 2009-12-06 2320
1750 수도관상피정 동방정교회 영성의 고전 <필로칼리아>에 나타난 무정념에 이르는 길 김수천 2009-11-30 3589
» 수도관상피정 관상기도의 현대적 이해 오방식 2009-11-30 2455
1748 수도관상피정 관상기도의 의식의 흐름과 치유 권명수 교수 2009-11-30 3162
1747 수도관상피정 수도 생활의 쇄신에 관한 교령 운영자 2009-11-30 972
1746 수도관상피정 어거스틴의 수도원 규칙서 운영자 2009-11-30 3015
1745 수도관상피정 가르멜수도회 생활규칙서 운영자 2009-11-30 3582
1744 수도관상피정 당신의 방법으로 기도하라 조이스 허키트 2009-11-30 2150
1743 경포호수가에서 진정한 실패자 피러한 2009-11-28 3581
1742 논문신학성경 가정에서의 조직신학 공부 2 (서평양노회자료) 송수천 목사 2009-11-19 3407
1741 논문신학성경 가정에서의 조직신학 공부 1 (서평양노회 자료에서)) 송수천 목사 2009-11-19 3313
1740 논문신학성경 구원론 송수천 목사 2009-11-19 2677
1739 논문신학성경 예정론 박영선 목사 2009-11-19 3166

 

 혹 글을 퍼오실 때는 경로 (url)까지 함께 퍼와서 올려 주세요

자료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 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본 홈페이지는 조건없이 주고가신 예수님 처럼, 조건없이 퍼가기, 인용, 링크 모두 허용합니다.(단, 이단단체나, 상업적, 불법이용은 엄금)
    *운영자: 최용우 (010-7162-3514) * 9191az@hanmail.net * 30083 세종특별시 금남면 용포쑥티2길 5-7 (용포리 53-3)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