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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절

민수기 신윤식 목사............... 조회 수 2030 추천 수 0 2013.09.25 23:27:08
.........
성경본문 : 민9:1-8 
설교자 : 신윤식 목사 
참고 : 은석교회 http://onlycross.net 

12강

민9:1-8

유월절

97.5.4

 

히브리서 11:1을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을 그대로 해석하면 믿음이란 바라는 것들의 실상으로 미리 앞당겨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요,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것들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증거로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천국을 바라고 살아가십니까? 천국은 하나님의 약속이지만 우리의 눈으로는 볼 수도 없고 현재에는 이루어지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그러한 천국을 바라고 살아간다면, 천국을 바랄 수 있게 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믿음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믿음을 주셨기 때문에 보이지 않으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요, 보이지 않는 천국을 바라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현재에 이루어지지도 않았고, 볼 수도 없는 것을 바라고 믿고 살아간다는 것은 인간 스스로의 의지로는 되어지지 않습니다. 때문에 여러분이 보이지 않는 천국을 바라고 세상을 살아가고 계신다면 그 믿음이 바로 하나님이 계신다는 증거이고, 하나님이 계신다면 하나님의 약속 또한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고, 약속이 이루어진다면 우리에게 영원한 안식이 주어진다는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믿음은 현재 눈에 보이는 것들에 기대를 걸게 하는 것도 아니고, 땅의 것을 내것으로 소유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믿음도 아닌 것입니다. 현재에 주어지지 않았고 눈에 보이지도 않는 것을 바라고 소망하고 살아가는 증거로서 주어진 믿음이라면 당연히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하늘의 것을 바라며 살아가도록 인도하지 어떻게 눈에 보이는 현재의 것에 매이도록 인도하겠습니까? 따라서 믿음을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은 절대로 하나님께서 선택받은 자에게만 허락하신 믿음이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믿음의 사람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들의 공통점은 그들의 삶 자체가 눈에 보이는 것을 좇아가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하늘의 기업을 바라며 살았던 특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것에 연연하지 않았고 하늘의 것을 위해서 세상의 것을 포기할 줄 알았습니다. 그 믿음으로 인해 많은 고통과 핍박을 받게 되어도 그들은 믿음의 길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모든 것이 믿음이 없는 눈으로 보면 얼마나 어리석은 모습입니까? 눈에 보이지도 않고, 현재에 보장된 축복도 아니라, 알 수 없는 미래에 주어지는 복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까지도 버릴 수 있다는 것은 세상의 눈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믿음이라고 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선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이 세상이 보지 못하는 것을 증거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 믿음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을 드리는 것은 믿음은 절대로 인간의 자의적으로 만들어 낼 수 없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어서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선택된 자에게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세상에 연연하지 않고 천국을 바라며 세상을 살아가신다면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선물인 믿음이 여러분에게 주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존재하시는 분명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이 없는 자들은 어떤 모습이겠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믿음이 없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을 믿지를 못합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지 못하고 세상 사람과 똑같이 눈으로 확인하고 볼 수 있는 것에 소망을 두게 되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증거로서의 믿음이 없으니까 보이지 않는 것을 믿지 못하고 보이는 것에 매이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닙니까? 결국 교회 안에서도 참된 믿음에 대한 판단은 보이는 것을 바라보느냐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느냐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믿음이 없으면 자신 스스로가 믿음을 만들어 내려고 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즉 인간이 믿음의 기준을 만들어 세우게 되고, 그 기준에 어긋나면 믿음이 없는 자로 여겨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준에 맞게 살면 믿음이 있는 자로 증명되면서 사람들의 존경을 받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세워놓은 믿음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예배참석하는 것, 큐티하는 것, 기도하는 것, 십일조 하는 것, 모두 이런 것들이 아닙니까? 교회에서 이것들을 믿음이 있는 표로 강조하고 있고, 또 자신 스스로도 그것이 믿음의 표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열심히 예배참석하고, 기도하고, 큐티하고, 십일조 하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이런 행위들에서 뭔가 게을러지거나 예전보다 못해질 때 '믿음이 떨어졌다'고 하면서 불안해하게 되고 결국 믿음을 올려보려고 기도원을 찾아간다거나 부흥회를 참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것이 바로 믿음이 없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지 못하고 있으니까 보이는 것으로 자신이 믿음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스스로 자기의 믿음에 만족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교회 일에 열심을 낼 때 왜 기분이 좋아지는지 아십니까? 자신의 믿음이 아주 좋은 것으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열심이 자신을 신자다운 신자의 모습으로 증명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에 대해서 아주 만족해하면서 교회 일에 열심을 내게 되는 것입니다. 주일예배에 빠지지 않고, 철야 기도회에 참석하면서 그러한 것으로 자신의 믿음에 대하여 확인을 하는 것입니다.


저는 성경공부를 다니면서 '목사님의 말을 들으니까 힘이 빠진다'는 말을 여러번 들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전에는 눈에 보이는 여러 가지 종교행위들을 통해서 믿음을 확인했기 때문에 종교 행위가 있으면 있을수록 자신의 믿음은 상승하는 것이고, 그로 인해서 믿음의 자부심을 가지게 되고 또 사실상 그것 때문에 뭔가 부지런히 했던 것 아닙니까? 그리고 그것을 믿음의 힘으로 느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전혀 반대로 그러한 것들은 믿음의 증거가 아니라고 말하면서 인간의 힘으로 뭔가 하려고 하지 말라고 하니까 갑자기 끈 떨어진 연처럼 혼란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행동하도록 부추겼던 뭔가가 사라져 버린 순간 온 몸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행동을 하지 않을 때의 불안감 때문에 견디지를 못해서 다시금 부지런히 뭔가를 함으로서 자신을 달래게 되는 것입니다.


항상 말씀드리지만 저의 이런 말이 결코 행동을 부정하고 있다는 의미가 아님을 잘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하는 말은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증거이기 때문에 절대 눈에 보이는 것을 통해서 믿음을 확인하려고 하지 마시라는 것입니다. 신자의 행동은 단지 믿음이 있는 자로서 자연스럽게 보여지는 것이지 행동함으로서 믿음이 발생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보이는 것에 믿음의 기준을 두게 되면 꼭 보이는 것에 매이게 되어 있습니다. 가령 하나님이 무엇인가를 하라고 하셨을 때 왜 그것을 하라고 하시는지 하나님의 뜻은 전혀 무시해 버린 채 단지 행동을 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지켰다고 착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 주위에는 이러한 잘못된 행동들이 수없이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합니다. 예배를 드리면서 예배의 의미보다는 예배라는 의식에 매이게 되고, 기도를 하면서 왜 기도를 해야 하는지 보다는 기도한다는 것에 매이게 되고, 구제를 해도 구제가 무엇인지 의미를 생각하기보다는 구제했다는 것에 더 매이게 되는 것이 오늘날 신자들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잘 이해하시고 눈에 보이는 것에 매여있는 잘못된 믿음이 아니라 보이지 않은 것의 증거로서의 믿음으로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유월절에 대한 규례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유월절을 지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13절에 보면 유월절을 지키지 않으면 그 백성 중에서 끊어질 정도로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아주 소중한 절기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유월절의 의식에 관심을 두고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유월절의 의식이 중요하다면 지금의 우리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물론 구약의 유월절은 오늘날의 예배로 바뀌었다고 말을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백성 중에서 끊어지는 것입니까? 백성 중에서 끊어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상관이 없어진다는 뜻인데 이 말대로 하면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천국에 가지 못한다는 의미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결국 예배가 천국 가는 근거가 되어버리는데 성경에는 어디를 봐도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천국에 가지 못한다는 말이 없습니다. 또 예배라는 의식이 천국에 가는 근거가 되는 것은 절대로 기독교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은 유월절의 의식에 관심을 두고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유월절을 말씀하시면 그 방법까지 다 말씀을 하셨지만 그 모든 것은 의식을 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유월절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무엇인가를 계시하시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유월절에 행하는 모든 의식 하나하나에까지 하나님의 계시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스라엘은 유월절을 지키면서 하나님이 이 유월절을 통해서 무엇을 말씀하시는지를 알아야 했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유월절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은 구약의 유월절을 통해서 하나님이 무엇을 계시하시는지를 잘 깨닫고 유월절의 정신이 흐르는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유월절이 맨 처음 제정된 것은 이스라엘이 출애굽할때입니다. 출애굽기 12장에 보면 유월절이 제정되고 있는 내용이 나오는데 6절과 18절에 보면 유월절은 정월 14일 해질 때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유월절은 정월 14일로 제정된 것입니다. 그런데 민수기 9장 11절을 보면 유월절이 한 번 더 추가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유월절이 추가되는 이유는 혹 사람의 시체로 부정케 되어서 유월절을 지킬 수 없거나 먼 여행 중에 있어서 지킬 수 없었던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이것을 보면 하나님은 유월절이라는 날을 지키는 것이 목적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특정한 날에 대해 의미를 둘 때가 많습니다. 주일이라는 날, 부활절이라는 날, 성탄절이라는 날에 대해서 의미를 많이 둡니다. 이 외에도 사순절 등 날에 대해서 이름을 붙여 가지고 의미를 두려고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날에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유월절이 1월 14일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정하게 되거나 부득이해서 유월절을 드리지 못한 자들을 위해서 다시 한 번 2월 14일에 유월절을 지키도록 하신 것은 한사람도 빠짐없이 유월절의 의미를 잊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유월절의 의미를 잊지 않는 것이 왜 그토록 중요한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때로는 이런 생각을 해보기도 합니다. 천국이 우리의 힘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가는 것이고, 또 그 믿음도 우리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이 택한 자에게만 주신 선물이라면 그냥 택한 자들에게 믿음을 주셔서 천국가게 하시면 되지 무엇 때문에 유월절을 지켜라 뭘 해라고 요구하시냐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천국은 그냥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천국에 가기 위해서 뭔가를 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천국은 사람이 바뀌어서 들어갈 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유월절을 지켜라고 하시는 것도 '너희는 이런 인간이 되어라'는 것을 가르쳐주시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약속의 땅을 향해서 가고 있습니다. 은혜의 땅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 은혜의 땅에 그냥 쑥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의 땅에 살 수 있는 인간으로 달라져야 들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가르쳐 주시는 것이 유월절입니다. 때문에 이스라엘은 유월절을 지키게 된 것을 큰 감사와 축복으로 알아야 하고, 오늘 우리가 이렇게 예배를 드리게 된 것도 큰 감사로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배의 의미를 생각하고 오기보다는 예배에 참석한 것으로 만족해 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때문에 여러분은 예배 참석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어떤 인간으로 달라져야 하는가에 의미를 두는 예배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유월절의 의미를 생각해 보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달라진 인간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11,12절을 보면 "이월 십 사 일 해 질 때에 그것을 지켜서 어린양에 무교병과 쓴 나물을 아울러 먹을 것이요 아침까지 그것을 조금도 남겨 두지 말며 그 뼈를 하나도 꺾지 말아서 유월절 모든 율례대로 지킬 것이니라"고 합니다.


여기 보면 유월절에는 어린양을 먹고, 무교병을 먹고, 쓴나물을 먹습니다. 그런데 어린양은 그냥 먹는 것이 아니라 뼈를 꺾지 않은 채 먹습니다. 유월절은 하나님이 그 집안을 치려고 하다가 어린양의 피를 보고 그냥 넘어갔다고 해서 유월절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천사가 어린양의 피를 보고 그냥 넘어갔다는 것을 안다면 어린양을 먹고, 무교병을 먹고, 쓴나물을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유월절에는 음식이 있습니다. 그러나 단순한 음식이 아닙니다. 자신의 건강을 위하거나, 맛있는 음식의 맛을 즐기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양고기를 먹으면서도 그것을 음식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뼈를 꺾지 말고 먹으라고 합니다. 뼈를 꺾는다는 것은 죽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뼈를 꺾지 말고 먹으라는 것은 죽을 필요가 없는데 죽었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9장에 보면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때 군병들은 예수와 함께 못박힌 자들의 다리는 꺾어서 죽음을 확인했지만 예수님은 이미 죽은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36절에 보면 "이 일이 이룬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우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결국 예수님의 다리가 꺾이지 않도록 하신 것도 죽음을 당할 필요가 없는 분이 애매하게 죽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하신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이미 유월절의 어린양의 고기를 먹는 데서부터 나타나있는 것입니다. 결국 뼈를 꺾지 않은 양고기를 먹음으로서 나 때문에 애매하게 죽은 희생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다음에는 무교병과 쓴나물을 먹습니다. 무교병은 누룩을 넣지 않은 떡을 말합니다. 누룩을 넣지 않은 떡은 맛이 없습니다. 그 맛없는 떡을 쓴나물과 함께 먹어야 합니다. 이것도 보면 맛을 위해서 먹는 음식의 의미는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결국 무교병과 쓴나물은 이스라엘을 살리기 위해서 누군가가 이렇게 맛없고 쓴 고생을 했다는 것을 잊지 말아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곧 새사람의 모습입니다. 이스라엘은 이것을 알아야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유월절을 통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새사람의 모습은 희생을 아는 인간 되는 것입니다. '나 때문에 누군가가 애매하게 고생하면서 희생했다. 나는 누군가가 희생해서 천국 가는 인간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 덕분에 산다' 이것을 깨닫는 자가 곧 새사람인 것입니다. 뼈를 꺾지 않은 양고기, 무교병과 쓴나물을 먹으면서 누군가의 희생덕분에 살았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는 자는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유월절을 지키지 않으면 백성중에서 끊어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유월절이라는 의식을 지키지 않은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유월절을 무시하고 있는 그 자체가 누군가의 희생으로 살아난 은혜를 모르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에 은혜의 땅에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희생의 은혜를 아는 자가 들어갑니다. 즉 새사람된 자가 들어가는 나라입니다. 우리가 이 점을 생각할 때 교회에 오면서 아무 생각없이 단지 예배 한시간 드리기 위한 목적으로 나와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비록 교회에 올 때는 그런 생각없이 나왔다고 할지라도 적어도 이 자리에 앉아서 말씀을 들을 때는 주님의 희생을 아는 새사람 되기를 간절히 소원해야 할 것이고 세상에서도 새사람으로 살아가기를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 대한 소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소망이 희미합니다. 믿음을 보이는 것과 연관지어 버립니다. 새사람으로 살겠다는 열망이 없습니다. 7절에 보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사람의 시체로 인하여 부정케 되었거니와 우리를 금지하여 이스라엘 자손과 함께 정기에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지 못하게 하심은 어찜이니이까"라고 합니다. 이들은 이방인을 의미합니다(14절). 이방인이라도 유월절을 지키고자 하면 지킬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배려로 이월 십사일에 다시 한 번 유월절을 지키도록 하신 것이 아닙니까?


누구든지 희생의 은혜를 깨닫고 하나님께 나오는 자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여기에는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주님의 희생에 대한 열의가 있습니까? 신자라고 하면서 주님보다 세상이 좋은 이유는 주님의 희생에 대한 열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히 세상에서 돈버는 일에는 열심이고, 한푼이라도 못벌고 손해를 보면 근심이 되고 안타까운 마음이 그치지를 않지만 말씀을 가까이 하지 못하고 예배에 참석하지 못하는 데에 대해서는 전혀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13절에 보면 "사람이 정결도 하고 여행 중에도 있지 아니하면서 유월절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니"라고 합니다. 이 말은 유월절, 즉 어린양의 희생으로 살아난 은혜에 대해서 열의가 없는 자는 어린양의 피로 살아난 이스라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희생의 은혜에 열의가 있는 자라면 세상보다는 주님을 더 좋아할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주님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신자가 신앙생활하면서도 평강을 누릴 수 없는 것은 그 속에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주님만 사랑한다'는 것을 의식적으로 드러내기 위해서 눈에 보이는 행동을 통해서 자기의 죄를 감추면서 믿음을 드러내려고 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것은 절대로 믿음이 아니며 새사람의 모습도 아닙니다. 신자는 주님만 그리워하면서 살아가야 할 존재입니다. 교회 안에서만 주님을 찾지 마시고 교회 밖에서도 주님의 희생을 생각하며 그 은혜 때문에 기뻐하고 사람을 사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로서의 믿음이고 진정한 예배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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