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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큰 기적

갈라디아 류공석 목사............... 조회 수 711 추천 수 0 2016.03.11 22:2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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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갈1:11-24 
설교자 : 류공석 목사 
참고 : 텔아비브욥바교회 http://telavivchurch.org (이스라엘) 

가장 큰 기적
2011년 2월 26일(토) 텔아비브 욥바교회
본문: 갈라디아서 1:11-24


  지난 주중에 한국에서 온 내가 존경하는 목사님을 만나러 남쪽으로 내려갔었다. 한국 다녀온 이후 처음 나들이였는데 도로 주변에 녹색으로 물든 경치로 인해 좋았고, 또한 존경하는 목사님을 만나 교제를 한 까닭에 더욱 좋았다.

  목사님 일행을 모시고 국립공원 한 곳을 갔는데, 거기서 미국계 유대인 청년 커플을 만났다. 그들에게 이 목사님께서 몇 가지 질문을 하면서 간단하게 복음을 전했다. 아주 간단했다. “Jesus is Christ. Jesus is only Savior. Jesus is your Savior.”

  그들이 원하는 장소로 태워주면서도 비슷한 말을 했다. 그들이 내린 후에 그러신다. “저들이 Jesus란 말을 들었으니 그 이름의 능력이 그들에게 역사하실 것이다. 잠 잘 때 생각이 날 것이다. 나는 복음의 능력을 믿는다.”

  이 목사님은 그 말처럼 복음의 능력을 믿으며 목회를 하신다. 복음의 능력이 무엇인가? 사람은 변화시키는 능력, 사람을 구원하는 능력이다. 이 복음의 능력을 여러분들도 믿는가?

  복음에는 사람을 구원하고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다. 말씀에는 사람을 살리는 능력이 있다. 왜인가?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고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복음의 능력을 누구보다도 확신했던 사람이었다. 왤까? 그 능력을 너무나도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 자신을 구원하고 변화시킨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사도 바울을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구주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신하게 된다. 사도 바울의 회심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증거이다. 예수님께서 메시아시오 하나님의 아들이심에 대한 분명한 증거이다.

  왤까?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어떠한 사람이었는지를 보면 안다. 어떤 사람이었는가? 13-14절을 보자.

  “13.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고 14.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사도 바울이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를 말한다. 여기서 먼저 유대교가 무엇인지에 대해 보자. 유대교는 무엇인가? 보통 유대 종교로 생각한다. 그러나 유대교는 좀 더 큰 개념이다. 유대교를 영어로 Judaism이라고 하고, 히브리어로는 야하둣(יהדות)이라 한다. 그 이름에서 보는 것처럼 유대인들의 종교이다.

  그러나 단순히 종교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유대교의 신앙뿐만 아니라 유대교의 여러 전통들과 관습들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즉 할례, 코셔(음식법), 안식일과 절기들, 그리고 율법이다. 또한 유대교의 가치와 철학을 포함한다. 그래서 유대교는 유대 종교 신앙과 삶의 방식을 포괄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회심하기 이전의 바울을 유대 종교 신앙과 생활 방식이라는 측면에서 보자. 어떠했나? 14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동족 중에서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었다고 했다. 연갑자는 동년배, 나이가 비슷한 사람들을 뜻한다. 지나치게 믿었다는 말은 진보하였다는 뜻이다. 유대교를 배우는데 매우 뛰어난 학생이었다는 뜻이다.

  여기서 학자들은 사도 바울이 길리기아 지방의 다소(PPT 지도)에서 태어났지만, 이후 예루살렘으로 옮겨 그곳에서 성장하였을 것이라 말한다. 사도 바울이 누구에게서 유대교 신학을 배웠는가? 당시 최고 랍비 중에 하나였던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성경과 유대교 교육을 받았었다. 요즘으로 하면 예쉬바다. 가말리엘의 문하라면 당시 최고의 유대교 신학교에 해당한다. 바로 예루살렘에서 그런 교육을 받았던 것이다.

  이 말은 그가 철저한 유대교 교육을 받았음을 뜻한다. 성경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복음서에서 장로들의 유전이라고 하는 구전 율법에 대해서도 철저하고 깊이 있게 배웠다. 조상 대대로 내려온 성경 해석인 미드라쉬, 율법을 내용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담은 할라카 등등에 대해 배웠다. 가말리엘의 문하에서도 매우 뛰어난 학생이었고, 이후에는 바리새파에 속한 랍비였다. 젊고 헌신적이고 능력 있는 랍비였다.

  이처럼 철저하고도 깊이 있게 유대교를 공부했을 뿐만 아니라 실천에 있어서도 열심이었다.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조상의 전통은 조상 대대로 내려온 관습을 말한다. 할례, 음식법(코셔), 안식일, 절기, 율법의 규정들(할라카)이다. 이러한 전통들을 지키는 데 매우 열심이었다는 것이다.

  앞서 유대교를 '유대 종교 신앙과 생활 방식'이라고 정의했는데, 바울은 이 두 가지 면에서 철저하고 헌신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교회를 박해했던 동기였다. 13절에서 고백하는 것처럼 유대교에 있을 때 그는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고 멸하려 했던 사람이었다. 첫 번째 순교자 스데반이 유대인들의 돌에 맞아 순교할 때 그 자리에 있어 그의 죽음을 당연하게 생각했던 사람이었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으러 다메섹으로 갔던 사람이었다. 요즘으로 하면 유대교 반선교조직의 행동대장이었다.

  왠가? 유대교에 철저하고 헌신된 그가 교회를 그토록 심히 박해라고 멸하려 했던 이유가 무엇인가? 그가 유대교에 철저하고 헌신하여 열심이었다는 말은 예수님을 유대교의 전통과 관습이라는 틀로 보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과 초대교회 당시의 유대교의 가장 중요한 것은 율법과 성전이었다. 이 둘이 당시 유대교를 지탱하는 핵심이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자신을 모세와 대조시키고, 자신의 새로운 윤리 계명들을 제시하면서 모세의 율법을 대체시키셨다. 그것이 바로 산상수훈이고 예수님의 많은 가르침 속에 있다.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철저한 유대교인의 눈에는 율법을 파괴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유대교인들이 목숨을 걸고 지키는 안식일조차 병자들을 고치고 죄인을 구원한다면서 어기는 것은 안식일을 범하는 죄라고 인식했다.

  또한 예수께서 성전을 허물라 내가 삼일 안에 다시 세우리라고 하셨는데, 이를 예수께서 성전 제사를 거절하는 것으로 여기고 나아가 신성모독으로 여겼다.

  물론 그것은 그들이 깨닫지 못한 까닭이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파괴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다. 율법의 정신과 내용은 사라지고 사람의 목을 죄는 법규정들, 껍데기만 남아버린 율법을 바로잡고,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참된 뜻을 가르치시고 그 정신을 바르게 실천하는 법을 가르치신 것이다. 안식일 논쟁도 아무리 안식일이 거룩하고 중요해도 사람의 목숨과 영혼보다 중요하지 않음을 가르쳐주신 것이다.

  성전 역시 자신이 곧 성전이심을 말씀하신 것으로 죽으심과 부활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로 이제 더 이상 성전에서 드려지는 짐승의 피 제사는 무의미해졌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짐승의 피를 흘리는 희생제사는 불완전한 대속인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완전하고 영원한 대속이 이루어졌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인 지성소를 가리고 있던 휘장이 찢어진 사건이 발생했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숨지실 때의 일어났다. 이 사건은 새로운 시대가 열렸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전에는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인 지성소에 함부로 들어갈 수 없었다. 오직 대제사장만이 일 년에 딱 하루, 욤 키푸르, 대속죄일에만 들어가 백성들의 죄를 고하고 용서를 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더 이상 인간 중재자가 필요하지 않게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에 힘입어 누구든지, 또한 언제든지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이 율법과 성전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의 의미이자 변화인데 유대교에 사로잡힌 자들은 이를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오히려 예수가 율법을 파괴하고 성전을 무시하며 신성모독을 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게다가 그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었는데, 이는 나무에 달린 사람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이라는 인식으로 인해 예수님을 신성모독으로 저주를 받아 죽은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메시아라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고 또 부활하셨다면서 전도하는 사람들이 나타난 것이었다. 예수가 체포되어 십자가형을 당했을 때 다 도망가 흩어져 이제는 사라진 줄 알았는데 어느 날부터 갑자기 예수가 다시 살아났다고 그분이 바로 메시아시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고 외치고 다녔던 것이다.

  이러한 모습이 바울 같은 골수 바리새파 유대인의 눈에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저주의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부활 승천하였고 그가 메시아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주장은 그 자체로 모순이고 유대교의 신앙과 전통을 위협하는 용납할 수 없는 행위였다. 따라서 예수 믿는 이들을 잡아 없애고 그들의 공동체, 교회를 멸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회심 전에 교회를 핍박하고 멸하려 했던 이유였다.

  예수 믿는 사람들과 교회를 핍박하고 멸하는 것이 곧 하나님께 대한 열심이고 헌신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철저하게 유대교의 신앙과 전통과 가치를 몸에 밴 골수 유대교인,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 100% 바리새인이 바로 바울이었다.

  이런 사람이었는데, 이 사람이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를 메시아요 하나님의 아들로 믿을 확률은 몇이나 될까? 0%다. 1%, 아니 0.1%의 가능성도 없었던 사람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바울이 유대교에 있는 동안 유대교 신앙에 대한 회의를 느꼈다는 것이다. 혹은 유대교를 연구하면서 사상적인 발전을 가져왔고 이것이 예수를 믿게 되는 동기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말이 되는가?

  만약 이러한 주장이 맞는다면 그 이전에 유대교에 대한 무언가 회의가 나타나야 한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을 만나기 직전까지 철저한 유대교인이요 바리새인으로서 유대교에 열정적으로 헌신했던 사람이었고 예수 믿는 사람들 때려잡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열심이요 충성이라고 믿었던 사람이었다. 그런 주장은 전혀 논리에 맞지 않는 헛된 주장일 뿐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극적으로 변화된 것을 믿지 못하는 이들의 주장일 뿐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라. 예수 믿을 가능성이 제로였던 사람이었다.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그가 유대교에 회의를 느껴 그랬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있겠으나 아무리 보고 또 보고 생각하고 또 생각해봐도 바울이 예수 믿을 가능성은 어디에도 없었다. 로또 복권 당첨 확률이 하루에 벼락 두 번 맞을 확률이라는데, 그것보다도 없다. 확률 제로다.

  그런 그가 어느 날 갑자기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를 만났다고 하고 나사렛 예수가 메시아라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고 증거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토록 복음을 반대했던 사람이 이제는 신앙인이 되었고, 그토록 교회를 박해하던 자가 이제는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는 사람이 된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마호메트와 같은 경우인가? 마호메트가 동굴에서 천사 가브라엘의 계시를 받아 이슬람교를 창시했다는데 그런 경우인가? 마호메트는 그 당시 중동 전역에 퍼져 있었던 유대교와 기독교의 내용에다가 아랍의 많은 신들 중에 하나인 알라를 연결시켜서 하나의 종교를 만든 사람일뿐이다. 그 자신이 알라교를 믿었던 사람이었고 권력에 대한 야심이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만든 종교가 이슬람이고, 이슬람은 곧바로 정치권력화되었다. 바울과 마호메트는 비교 대상이 아니다.

  헛것을 보았는가? 헛것을 본 사람이 어찌 예수님을 만난 후에 아무 것도 보지 못하게 되었는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했다고 했다. 헛것을 본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가 정신적으로 이상했는가? 바울이 정신적으로 이상했다고 하는 그 사람이 이상한 사람이다. 바울은 정상이었다.

  이런 저런 이유를 들이대도 설명이 안 된다. 바울은 자신이 몸담고 있던 유대교를 자랑했고 거기에 구원이 있다고 믿었던 사람이었다.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누구의 전도로 믿은 것도 아니고 회유나 협박으로 믿은 것도 아니다. 어떤 것으로 그의 회심이 설명이 안 된다.

  뭐가 아쉬워서 자신이 박해하던 신앙을 따르고 모든 것이 갖추어진 사람이 무엇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그 모든 것을 버리고 핍박받고 순교까지 당했냔 말이다. 이것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오직 하나, 실제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것이다! 예수 믿는 사람들 잡으러 다메섹으로 가던 중에 정말로 부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것이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주여, 누구시니이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분명히 맨 정신인 상태에서 부활승천하신 예수님을 만났고 그분의 음성을 들었던 것이다. 자신은 예수님이 율법을 파괴하려 했고 성전을 모독했기에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이단자이자 죄인일 뿐 결코 메시아, 구원자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를 믿는 자들을 때려잡고 교회를 없애버리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열심이요 충성이라 생각했는데, 그 예수가 부활하신 메시아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셨던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는 율법을 파괴하러 온 것이 아니라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것이었고, 하나님의 아들께서 바로 성전이신 것이다!

  십자가의 저주는 바로 내가 받아야 할 저주였는데, 하나님의 아들께서 나를 대신해서 받으신 저주였던 것이었다!

  예수님을 만나면 달라지는 것이 있다. 바로 십자가다. 예수님을 만나면, 그분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게 되면 달라져 보이는 것이 바로 십자가다.

  유대인에게는 십자가가 이전에는 저주의 의미였지만 이제는 나를 용서하신 구원의 증거이다. 우리 이방인들도 마찬가지다. 이전에는 십자가는 나와 상관없는 그저 기독교의 상징일 뿐이었다. 혹은 멋으로 차고 다니는 십자가 목걸이에 불과했고 호러 영화에서 나오는 악령을 쫓아내는 부적과 같은 것으로밖에는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면, 그분의 은혜를 깨닫게 되면 십자가는 나를 향한 하나님의 용서이며 사랑이요 은혜이다. 내가 평생 사랑하며 전할 복음의 내용이다.

  바울이 그런 사람이 된 것이다. 골수 유대교인, 골수 바리새인이었던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 사건을 통해 그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바뀐 것이다. 대역전이다. 이보다 놀라운 반전은 없을 것이다. 이보다 놀라운 기적은 없다.

  이 놀라운 대역전, 이 기적 같은 변화를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바울이 실제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바울의 회심을 통해 예수님을 부활을 목격한다. 다시금 확신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죽음 가운데 다시 살아나셨으며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 옆에 계시다! 부활하신 메시아, 하나님의 아들을 만나지 않고서야 어찌 이런 변화가 가능하겠는가?

  세상의 가장 큰 기적은 다른 것이 아니다. 나 같은 죄인이 예수 믿어 죄용서 받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다. 이것이 기적이다. 이 기적 같은 변화는 오직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다.

  지난 주중에 한국에서 오신 목사님께서 메시아닉 유대인을 만나서 인터뷰를 하고 싶어 해서 리히라고 하는 여자 분을 만났다. 우리 교회에도 2년 전쯤에 방문한 적이 있는데, 지금 바르일란 대학교 성서학과에서 박사과정을 하고 있는 분으로, 메시아닉 유대인 교회와 인터넷, 그리고 라디오 방송에서 성경을 해석하면서 복음을 전하고 있다. 담대하게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고 기회가 닿는 대로 예수님을 전하려고 애쓰는 분이다.

  이 분이 원래는 명상과 요가에 빠졌던 분이었다. 그런데 그것으로 해결되지 않는 인생의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신명기와 시편만 읽었단다. 읽으면서 하늘을 향해 말했단다. "하나님, 당신이 살아 있다면 기적을 보여주십시오."

  그러던 어느 날 바닷가에 앉아 있었는데, 멀리서부터 문어 같기고 하고 해파리 같기도 한 것이 자기를 향해 오더라는 것이다. 곧바로 오는데 너무 징그러워 피하려 하는데 이상하게도 꼼짝달싹 하지 못하여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급한 마음에 "하나님, 당신이 살아 있다면 저것을 치워주십시오."라고 했단다. 그런데 정말 눈앞에서 사라졌단다. 순간 전율이 느껴지면서 하나님이 살아 계시구나 생각하게 되었단다.

  그런데 그녀가 정말 하나님을 믿게 된 것은 시편 89편을 묵상하면서였단다. 시편 89:19에서 '백성 중에서 택함 받은 자를 높였으며'라는 구절을 읽는데, 도대체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이해가 되지 않더란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가 자기의 마음을 여는 것 같이 느껴지면서 그가 바로 예슈아라고 말씀하셨단다. 성령께서 역사하신 것이다.

  그래서 메시아닉 교회를 찾게 되었고, 예슈아를 메시아로 믿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자매에게 일어난 기적은 문어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그녀가 예슈아를 믿게 된 것이다. 말씀을 읽을 때 예언된 그분이 바로 예슈아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것이 기적인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기적은 내가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이 사건이다.

  이 사건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그 사건을 이렇게 고백한다. 15절이다.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하나님께서 나를 어머니의 태에서부터 택정하시고 그분의 은혜로 나를 부르셨다는 것이다. 어쩌다 예수 믿게 된 것이 아니라, 우연히 예수님 만나게 된 것이 아니라, 어느 날 갑자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미리 택정하시고 부르셨기에 일어난 일이라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 입장에서는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사건이다. 내가 예수 믿게 된 것은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진 일 같다. 우연 같기도 하고 내가, 내 의지로 믿은 것도 같다. 그러나 아는가? 나에게는 갑자기지만 하나님에게는 창세전부터 계획하신 일이라는 것을!

  택정하셨다는 말의 원뜻은 구별하셨다는 말이다. 구별하셨다는 말과 부르셨다는 말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의 행위를 표현할 때 쓴다. 하나님께서 나를 오래전부터, 어머니의 태에서부터, 아니 창세전부터 나를 당신의 자녀로 구별하셨다는 것이다. 그 계획에 따라 그분의 은혜,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나를 부르신 것이다.

  그래서 내가 예수 믿어 죄용서 받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다. 그래서 예수 믿음은 은혜인 것이다. 나의 행위나 공로나 선택이나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기에 자랑할 것이 없는 것이다. 오직 은혜일뿐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를 구별하시고 부르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자. 그 은혜를 찬송하며 예배하자. 그리고 아직 구원의 확신이 없는 분들은 기억하기 바란다. 아직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하지 못하고 믿지 못한다 할지라도 지금 이 자리에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서 당신을 구별하시고 부르시는 은혜이다. 하나님의 구별과 부르심에는 우리의 반응이 따른다.

  사도 바울의 경우는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시기 위해 특별한 계시로 부르신 경우이고, 우리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복음을 통해,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부르신다. 여러분들이 말씀을 들을 때, 복음을 들을 때 그 안에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담겨져 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를 구별하였고 내가 너를 자유케 하려고 너를 복되게 하려고 너에게 죄용서의 구원을 주려고 너에게 영원한 삶을 주려고 너에게 참다운 행복과 샬롬을 주려고 너를 부른다. 마음을 열고 나의 아들, 너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라. 그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이것이 복음과 말씀 안에 담긴 하나님의 부르심이다. 이 부르심에 여러분들은 어떻게든 반응하게 된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말이다. 냉담하거나 무관심도 반응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모든 사람에게 향해 있다.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16절 중간을 보면 이렇게 말씀한다.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그를, 예수 그리스도시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울에게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다는 말씀이다. 이것을 바울은 12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게도 마찬가지다. 바울과 같은 직접적인 계시는 아니지만, 하나님은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신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은 내 안에, 우리 안에, 유대인 안에, 모슬렘 안에, 모든 사람들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모든 사람을 향해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 것은 아니다.

  왠가? 그 부르심을 듣고 마음을 여는 자만이 구원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부르심에 마음을 열고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사람들이 되길 축복한다. 여러분들이 말씀을 들을 때에, 하나님의 초청의 부르심을 받을 때 성령님께서 여러분들의 마음을 열어주시길 축복한다.

  이렇게 기적 같은 대역전의 변화를 체험한 바울은 이후 몇 가지 반응을 보인다. 그것이 16절 하반절부터 이어진다. 첫째는 곧바로 혈육과 의논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혈육은 동족 유대인을 말하고, 의미적으로는 명망 높은 학자들이나 랍비들을 찾아가 자신의 경험을 상의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한 자신보다 먼저 사도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도 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자신의 회심과 사도됨을 확인받기 위해 사도들을 만나러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은 언듯 합당하게 여겨지는데 그러지 않았다는 것이다.

  왠가? 자신의 구원과 사도로서 택함을 받은 것은 사람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기에 사람과 상의하지 않고 하나님과 상의하고자 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자신을 구별하시고 불러주신 하나님만이 그가 상의할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아라비아로 간 것이다.

  아라비아는 사우디 아라비아가 아니라 지금의 요르단을 말한다. 다메섹은 지금의 시리아의 다마스커스인데, 거기에서 남쪽으로 내려갔다는 것이다. 이 당시는 나바티안 왕국이 이 지역을 차지하고 있을 때였다. 주전 2세기쯤에 페트라를 중심으로 세워진 왕국으로 바울이 예수님을 만난 후에 그곳으로 간 것이다.

  아라비아란 어떤 곳일까? 요르단을 가본 분들은 알겠지만 서쪽 지역을 제외하고는 광야이고 사막이다. 이 말은 바울이 간 곳은 광야라는 것이다. 마치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유대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금식하시면서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셨던 것처럼 바울 역시 예수님을 만난 이후 광야로 간 것이다. 왜? 자신을 만나주신 예수님을 더 깊이 만나기 위해서다.

  이것은 예수님을 만나면 나타나는 증상이다. 은혜를 받으면 나타나는 증상이다. 더 주님을 만나고 싶고 더 주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고 싶어진다. 나 역시 그러했다. 21살 때 다시 예수님을 뜨겁게 만나고 나서 바로 기도원으로 갔다. 더 깊이 주님을 만나고 싶었다. 더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래서 처음으로 3일 금식을 했었다.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는 우리를 광야로 이끈다. 광야는 홀로 있는 시간이며 장소이다. 묵상의 자리이며 홀로 있는 자리이다. 홀로 있어 하나님만을 만나는 시간이고 자리이다. 나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묵상하며 말씀과 기도 가운데 그분을 만나며 교제하는 시간이다.

  그러기에 광야는 내 영혼을 깨끗하게 하고 주님의 은혜로 채우며 풍성하게 하는 자리이다. 회복의 시간이고 거룩의 장소이다.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가 우리를 광야로 이끌지만 우리 스스로 광야의 자리로 나아가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홀로 있어 주님을 깊이 생각하고 말씀과 기도 가운데 주님을 만나고 교제하는 광야의 시간, 광야의 자리가 있어야 한다.

  이것이 없다면 우리의 영성은 결코 계발되지 않는다. 교회를 다니다보면 어찌 어찌 믿음도 자라겠지만 주님과 깊이 있는 교제를 나누는 영성은 계발되지 않는다. 주님을 깊이 만나는 영성 없이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기 어렵다. 이내 세상에서 지치고 영적인 침체에 빠지거나 혹은 세상과 죄 가운데 타협하고 휩쓸리고 오히려 퇴보할 수도 있다.

  광야로 나아가라. 아라비아로 가라. 아무리 바빠도 홀로 말씀과 기도로 주님을 만나는 시간을 꼭 가지라. 그 시간이 광야이고 그 장소가 바로 아라비아다. 광야의 시간을 통해 주님을 만나고 주님으로 채워야 한다. 주님의 은혜를 만나고 주님의 말씀으로 채우고 주님 자신으로 채워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빛과 소금으로서, 거룩한 주님의 신부로서, 용사로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백성으로서 살아갈 수가 있는 것이다.

  나는 이스라엘을 광야라 생각한다. 다들 공감할 것이다. 지난 달 한국에 가니 참 편하고 친절하고 빨라서 좋기는 한데 너무 복잡하고 분주하다. 여유가 없다. 그에 비하면 이스라엘에서의 생활은 여유가 많다. 시간적인 여유가 무료함이 되고 게으름이 되지 않도록 하라. 그 여유를 광야의 시간으로 만들라.

  살림을 하고 아이들을 키우는 것이 힘들지만 반드시 광야의 시간을 가지라. 남자분들은 여기서도 바쁠 것이나 한국에서만큼은 아닐 것이다. 아무리 바빠도 광야의 시간을 가지라. 청년들은 엄청나게 주어진 시간으로 인해 당황해 하는데 광야의 시간으로 만들라.

  당신 홀로 있는 시간을 가지라. 그런 장소를 확보하라. 그리고 말씀과 기도 가운데 주님을 만나라.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땅에서 주님을 깊이 생각하라. 주님을 아는 지식을 사모하라. 만나기를 사모하라. 그래서 주님을 깊이 만나고 그분의 은혜와 말씀으로 채워주기를 축복한다.

  여기서 못하면 한국 가서는 더 못한다. 여기서 광야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한국 가서도 할 수 있다. 어디서든 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가졌던 광야의 시간이 나의 영성을 계발해주어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람, 원하시는 인격, 원하시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할 것이다.

  바울 역시 삼년 동안의 광야 시간을 통해 주님을 더 깊이 만났고 그분의 은혜와 능력과 복음으로 채워져 이후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는 사도로서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이다. 광야의 시간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다시 한 번 부탁한다. 아무리 바빠도,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말씀과 기도 가운데 홀로 주님을 만나는 광야의 시간을 가길 바란다. 여러분들의 광야의 시간에서 당신을 나타내기를 기뻐하시는 우리 주님의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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