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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뻐하고 노래하라!

스바냐 정용섭 목사............... 조회 수 515 추천 수 0 2016.02.05 00:4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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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습3:14-20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8505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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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뻐하고 노래하라!

습 3:14-20, 대림절 셋째 주일, 2015년 12월13일

 

14 시온의 딸아 노래할지어다 이스라엘아 기쁘게 부를지어다 예루살렘 딸아 전심으로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15 여호와가 네 형벌을 제거하였고 네 원수를 쫓아냈으며 이스라엘 왕 여호와가 네 가운데 계시니 네가 다시는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 16 그 날에 사람이 예루살렘에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시온아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 17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18 내가 절기로 말미암아 근심하는 자들을 모으리니 그들은 네게 속한 자라 그들에게 지워진 짐이 치욕이 되었느니라 19 그 때에 내가 너를 괴롭게 하는 자를 다 벌하고 저는 자를 구원하며 쫓겨난 자를 모으며 온 세상에서 수욕 받는 자에게 칭찬과 명성을 얻게 하리라 20 내가 그 때에 너희를 이끌고 그 때에 너희를 모을지라 내가 너희 목전에서 너희의 사로잡힘을 돌이킬 때에 너희에게 천하 만민 가운데서 명성과 칭찬을 얻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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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여러분은 성경을 얼마나 자주 읽으시는지요? 개인적으로 큰 차이가 있을 겁니다. 어떤 분들은 성경을 읽고 싶지만 먹고 사느라 시간이 없어서 읽지 못한다고 종종 말합니다. 시간이 없다기보다는 성경에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는 게 더 큰 이유가 아니겠습니까. 성경이 티브이 드라마나 오락 프로그램처럼 재미있다면, 또는 멋진 레스토랑에 들어가 최고급 요리를 먹는다거나 원하던 곳에 여행을 간 것처럼, 또는 골프나 테니스 시합을 하는 것처럼 재미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시간을 내서 읽을 겁니다. 재미있다는 건 마음이 끌린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세상의 흥밋거리와 차원이 다른 방식으로 우리의 마음을 강력하게 끕니다. 영혼의 재미, 즉 영혼의 기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 경험하면 성경을 읽고 싶고, 더 배우고 싶어집니다. 저는 오늘 대림절 셋째 주일을 맞아서, 영혼의 기쁨이 무엇인지를 경험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면서, 제1독서인 습 3:14-20절이 가리키는 세계 안으로 여러분을 안내해볼까 합니다.

 

스바냐의 메시지

 

일단 여러분은 지금부터 2천6백 년 전으로, 정확하게는 기원전 630년 전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스바냐가 선지자로 활동한 시대가 그때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대라는 나라는 기존의 제국 아시리아와 신흥 제국 바벨론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처량한 신세로 전락해 있었습니다. 남유대와 형제 나라인 북이스라엘은 스바냐가 활동하던 시대보다 백년쯤 전인 기원전 722년에 이미 아시리아에 의해서 무너졌습니다. 남유대는 아시리아에 무모할 정도로 강력히 저항하던 북이스라엘과 달리 아시리아에 조공을 바치면서 백년쯤 버텨온 겁니다. 세월이 흘러 아시리아의 힘이 약해지는 틈을 타서 새로운 제국인 바벨론이 부상하기 시작했습니다. 바벨론은 결국 아시리아 제국을 무너뜨렸고, 이어서 기원전 587년에 유대까지 함락시켰습니다. 스바냐가 활동할 때는 아시리아와 유대가 무너지기 전이었습니다. 풍전등화와 같은 자기 조국 유대의 운명을 스바냐 선지자는 신학적인 관점에서 해석했습니다. 그것을 유대 백성들에게 선포했습니다. 그 선포를 기록한 것이 바로 스바냐입니다.

 

그 내용은 간단합니다. 유대가 처한 어려운 상황은 누구나 다 알고 있습니다. 아시리아와 바벨론 제국의 힘은 막강해서 자신들이 극복할 수 없는 대상이었습니다. 두 제국의 싸움에서 누가 이기든지 자신들의 운명은 이미 망하는 것으로 정해졌습니다. 이것을 스바냐는 단순히 국제 질서로만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통치로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이런 제국들을 통해서 유대를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제국들도 다른 방식으로 또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제국은 일시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들려 유대를 심판하는 것뿐입니다. 이것이 구약 선지자들의 신학이었습니다. 습 1:4-6절을 공동번역으로 읽겠습니다.

 

나는 손을 들어 유다 국민과 예루살렘 온 성민을 치리라. 여기 얼마 남지 않은 바알의 신상들을 없애고 그 사제라는 것들을 이름도 없이 쓸어버리리라. 지붕 위에서 하늘의 별들을 예배하는 것들, 야훼를 예배하면서도 맹세는 밀곰을 두고 하는 것들, 알아 볼 일이 있어도 야훼를 찾지 아니하고 등지고 떠나가는 것들을 나 없애 버리리라.

 

스바냐는 유대의 수도인 예루살렘을 항해서 ‘패역하고 더러운 곳, 포학한 그 성읍’이라고 했습니다(습 3:1). 그 성읍에 화가 내릴 것입니다. 그런 일이 일어날 날을 가리켜 스바냐는 여호와의 큰 날, 분노의 날, 황폐와 패망의 날, 캄캄하고 어두운 날, 진노의 날이라고 했습니다. 예루살렘의 잘못은 우상숭배와 불의한 삶의 태도입니다. 우상숭배는 단순히 괴상하게 생긴 형상을 만들어 섬기는 것만이 아닙니다. 피조물을 절대화하는 것이 우상숭배입니다. 이런 점에서는 현대인들도 스바냐가 지적하는 우상숭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봐야 합니다. 오히려 더 심해졌습니다. 돈을 우상으로 섬깁니다. 이런 현상을 아주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집니다. 교회도 그런 태도를 은근히 부추깁니다. 우상숭배는 결국 삶까지 불의하게 만듭니다.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대한민국 안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세상이 다 그런데 어쩌란 말이냐,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돈을 우상처럼 섬겨도 당장 패망하는 건 아니지 않느냐, 오히려 돈이 우리 삶을 단단하게 지켜주는 거 아니냐, 하고 생각하는 분이 있을까요?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고 믿으면 기독교 신앙이 뭔지를 모를 뿐만 아니라 삶을 추상적으로 대하는 겁니다.

 

스바냐는 암담한 현실 앞에서 하나님의 심판만 말하지 않았습니다. 우상숭배에 떨어지지 않은 사람들을 하나님이 남겨 두셨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보호를 받을 겁니다. 이 ‘남은 자’는 악을 행하지 않고 거짓을 말하지 않기 때문에 일상생활에서 두려움이 없습니다. 더 나가서 이들은 이제 전혀 다른 차원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습 3:14절에서 이렇게 외칩니다.

 

시온의 딸아 노래할지어다 이스라엘아 기쁘게 부를지어다 예루살렘 딸아 전심으로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놀라운 말씀이지요? 지금 예루살렘 주민들의 현재와 미래는 불안하기 짝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징벌, 그의 분노가 코앞에 놓여 있습니다. 실제로 스바냐의 예언이 끝하고 얼마 지난 뒤에 예루살렘은 바벨론에 의해서 무너졌습니다. 하나님을 바로 믿는 ‘남은 자’들도 이런 상황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인생살이가 팍팍해집니다. 그런데도 노래하라고, 기뻐하며 즐거워하라고 스바냐는 외칩니다. 이게 말이 될까요? 지금 당장 배고픈 사람이 노래하고 즐거워할 수 있을까요? 아무리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이라 해도 지금 호스피스 병동의 환자로 지내면서 노래하고 기뻐할 수 있을까요? 제 정신으로 말입니다.

 

쉽지 않습니다. 기도를 해도 어두운 마음이 잠간은 없어져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갑니다. 이를 단칼에 해결할 수 있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성경이 전하는 길을 묵묵히 가는 게 최선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스바냐가 기뻐하고 노래하라고 외칠 수 있었던 근거는 춥고 배고프고 외롭고 고통스럽고 억울하고, 그래서 하루하루가 견디기 힘든 모든 순간이 결국은 지나간다는 사실에 놓여 있습니다. 이것이 확실하다면 어두운 현실을 버텨낼 수 있고, 더 나가서 기뻐하고 노래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지나간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노래하고 기뻐해야 할 만한 일이 무엇인지를, 그게 정말 기다릴만한 일인지를 뚫어보아야 합니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그냥 노래하고 기뻐하는 건 정신적으로 이상한 겁니다.

 

그 날과 그 때

 

스바냐는 노래하고 기뻐해야 할 이유, 그 근거를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한 마디로 하면, 그것은 하나님이 암담한 상황을 해결해주시는 그 날과 그 때가 온다는 사실입니다. 스바냐는 16절 이하에서 ‘그 날’에 일어날 일에 대해서, 그리고 19절 이하에서 ‘그 때’에 일어날 일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그 표현이 아주 강렬합니다. 먼저 ‘그 날’에 대한 말씀을 봅시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다...’고 했습니다. ‘임마누엘’의 그 하나님은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십니다. 우화 식으로 이런 상황을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여러 명의 아이들이 동네 깡패들에게 수모를 당하고 있습니다. 도둑질을 강요받았습니다. 대다수 아이들은 깡패들의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한 아이는 그 상황을 그대로 버텨냈습니다. 조금만 있으면 경찰서장인 아버지가 퇴근해서 이곳으로 오실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스바냐는 전능자이신 하나님과 ‘남은 자’의 관계를 17절에서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시라.

 

하나님이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신다니, 참으로 놀라운 표현입니다. <사도>라는 영화에서 영조는 세자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급기야 ‘네 존재 자체가 역모야.’라고 말합니다. 이와 달리 연인들은 ‘네 존재 자체가 내 기쁨이야.’라고 말합니다. 스바냐의 이 말은 ‘남은 자’가 하나님에게 기쁨이라는 뜻입니다. 그 남은 자는 그 혼돈의 시대에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 순종하면서 세상의 요구에 길들여지지 않은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런 이들은 ‘그 날이 오면’ 하나님이 ‘너를 보니 기쁘다.’하는 말을 들을 수 있습니다. 이런 순간, 이런 날을 예상하는 사람이라면 이미 지금 기뻐하며 노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날이 마음에 그려지시나요?

 

19절에는 ‘그 때’에 일어날 일이 묘사되었습니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입니다. 괴롭힘을 당하던 사람들, 다리를 저는 장애인들, 쫓겨난 자들, 세상에서 수욕 받는 자들이 구원받습니다. 여기에 거론되는 이들은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이들입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온 유대인들도 다 이런 사람들에 포함됩니다. 당시에 바벨론은 천하무적의 제국입니다. 장애인들에게 이 세상은 넘을 수 없는 바벨론과 똑같습니다. 그러나 ‘그 때’가 되면, 즉 하나님의 때가 되면 버림받은 이들이 구원받는다고 했습니다. 바벨론 제국이 여전히 기세등등한 시절에 이런 예언을 선포한 스바냐는 제 정신이 아닌 사람 취급을 받았을지 모릅니다. 비현실적인 것으로 들렸을 겁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의 예언은 옳을까요? 우리가 여전히 그 말씀으로 이 세상을 버텨내고 살아갈 수 있을까요? 종교적인 돈키호테의 비현실적인 몽상쯤으로 간주하는 게 옳을까요? 솔직하게 생각해보십시오. 포로와 같은 삶을 우리는 지겨워합니다. 경쟁력이 없는 사람들 곁으로 가기가 싫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한두 번은 도와줄 수 있지만 반복해서 함께 지내기는 어렵습니다. 세상살이에 바빠서 이런 문제는 아예 신경 쓰고 싶지도 않습니다.

 

잘 들으십시오. 스바냐가 거론한 사람들의 운명을 예수님도 똑같이 당했습니다.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가 바로 저는 자, 쫓겨난 자, 수욕 받는 자였습니다. 이것을 실질적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님이 인간 구원을 위해서 당연히 고난당하고 멸시당하고 십자가에 죽어야만 했다는 식으로, 그러니까 예정된 길을 기계처럼 따라간 걸로 받아들이면 오해하는 겁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있는 여섯 시간 동안 일곱 가지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입니다. 다른 여섯 마디 말씀은 헬라어로 기록되었지만 이 말씀만은 원래 예수님이 사용하신 언어인 아람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이 그럴 정도로 중요했다는 뜻입니다. 그 뜻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십니까?’입니다. 십자가 처형을 자기 사명의 실패로 받아들인 겁니다. 당시에 십자가에 처형당한 사람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십자가에 처형당한 이를 의롭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연민을 느끼지도 않았습니다. 바울은 고전 1:23절에서 십자가 죽음은 유대인들에게 거리끼는 것이고, 이방인들에게 미련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정확한 지적입니다.

 

모든 이들로부터 버림받는 사람,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도 버림받은 것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예수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여러분은 잘 아십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했습니다. 전적으로 새로운 생명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이런 말이 별로 실감나지 않을 겁니다. 지금 내가 잘 먹고 잘 사는 게 중요하지 나중에 새로운 생명으로 변화되는 부활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입니다. 그런 방식으로 생각하고 그런 방식으로 살아간다면 이 세상에서 아무리 세련되게 살아도 그는 하나님과는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저는 자들, 쫓겨난 자들, 수욕 받는 자들을 하나님이 구원하신다는 이 엄청난 말씀도 무감각하게 들릴 겁니다.

 

다음의 사실을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도 곧 십자가에 달린 사람의 운명에, 즉 버림받음의 자리에 떨어집니다. 그게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곧 늙고 병들고, 그리고 결국은 죽음의 문턱에 다다를 것입니다. 죽으면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사랑하던 가족도 다 떠납니다. 가족과 친구들이 죽은 우리를 그리워하겠지만 그것도 죽은 자에게는 큰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의 운명은 십자가 처형과 다를 게 없다는 말씀입니다. 저는 자, 쫓겨난 자, 수욕 받는 자의 운명입니다. 요즘 우리교회에서는 수요일마다 욥기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지난 수요일에 공부한 욥 30:24-31절이 우리의 운명을 생생하게 묘사합니다. 30,31절만 읽어보겠습니다. ‘나를 덮고 있는 피부는 검어졌고 내 뼈는 열기로 말미암아 탔구나 내 수금은 통곡이 되었고 내 피리는 애곡이 되었구나.’ 욥이 당한 처지를 말하고 있는 거 같지만, 욥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미래를 말하고 있습니다. 스바냐가 말하는 쫓겨난 자들의 운명과 같습니다. 스바냐는 ‘그 때가’ 오면 하나님이 이들의 운명을 회복하신다고 선포했습니다. 그런 세상이 정말 기다려집니다. 이런 기다림 없이는 이 세상을 버텨낼 수 없습니다.

 

대림절 전통

 

오늘은 대림절 셋째 주일입니다. 성탄절도 다가오고 있습니다. 연말과 연시가 한데 묶여 있어서 뭔가 축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습니다. 망년회 모임도 있을 겁니다. 멀리 떨어졌던 자식들이 방학을 맞아 집으로 돌아올 수도 있습니다. 다 즐거운 일입니다. 스바냐가 ‘시온의 딸아 노래할지어다 이스라엘아 기쁘게 부를지어다.’고 말한 것처럼 뭔가 흥겨운 일이 예감되는 대림절입니다. 예수님이 오시어 세상을 심판하고 우리 생명을 완성하실 것을 생각하면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기쁨의 노래는 어떤 근원적인 것을 전제합니다. 그게 뭔지 아시겠지요? 스바냐가 처한 상황을 다시 생각해보십시오. 혼돈입니다. 불안입니다. 절망입니다. 바벨론 제국에 포로로 사로잡혀 있는 상황입니다. 현대인의 삶도 실제로는 이와 다를 게 없습니다. 세상은 십자가 처형의 반복입니다. 개인적으로도 우리는 결국 이런 길을 갈 수밖에 없습니다. 스바냐의 표현으로는 진노의 날, 패망의 날, 황폐의 날, 어둠의 날이 현재와 미래입니다. 이런 현실을 뚫어보는 사람만이 구원의 날을 기다리면서 기뻐하고 노래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현실은 구원이 오직 하나님으로부터만 가능하다는 사실에 대한 반증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이 ‘하나님으로부터만 가능하다.’는 말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다른 그 어떤 인간, 세력, 이념, 체제, 그리고 온갖 소유와 유흥은 일시적으로 우리를 자극할지 몰라도 결국 다 시시한 것이 되고 맙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실존적으로 경험합니다. 하나님만이, 그의 구원만이 우리의 기쁨과 찬양의 유일한 근거입니다. 그 하나님의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의 삶에 전적으로 새로운 현실(new reality)이 되었으니 우리가 어찌 기뻐하고 노래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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