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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누가복음 박경미 교수............... 조회 수 454 추천 수 0 2015.03.30 22:55:01
.........
성경본문 : 눅6:20-21 
설교자 : 박경미 교수 
참고 : http://www.saegilchurch.or.kr/index.php?mid=sermon&category=129757&page=2&document_srl=128849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누가복음 6:20-21)

 

2013년 1월 13일 주일예배

박경미 교수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

 

 

사람들은 자기가 살고 있는 시대에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진정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사실은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가령 오늘날 우리에게 나치와 히틀러가 범죄적이었다는 것은 아주 당연한 사실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히틀러 시대 독일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그렇게 자명하지 않았습니다. 독일 국민은 나치정권을 열렬하게 환영했고, 히틀러는 당시 독일 사람들에게 영웅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히틀러가 등장하기 전 1차대전에 패전한 독일에게 승전국은 엄청난 배상금을 부과했고, 독일 정부는 배상금을 지불하기 위해 은행에서 대출을 했고, 이로 인해 엄청난 인플레이션이 생겼습니다. 살기가 너무 힘들었고, 실업률은 30%가 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히틀러는 집권 3년 만에 실업률을 거의 0%로 만들고, 4년 만에 경제를 회복시켰습니다. 그는 국민들에게 열렬한 환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 시절 무식한 대중만이 아니라 하이데거를 비롯한 수많은 지식인들이 나치정권에 협조했습니다. 당시 많은 독일 지식인들이 산업혁명 이후 자본주의의 발전으로 인한 모순을 해결해줄 해결사가 사회주의보다는 히틀러의 파시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이태리의 무솔리니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1930년대 파시즘이 유럽 전역을 휩쓸 수 있었던 것입니다. 히틀러도, 무솔리니도 악이라는 것이 그 당시에는 자명하게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경제를 살리고 실업률을 낮추고 잘난척하는 자유주의자들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고 게르만 민족의 전통을 드높일 수만 있다면 정치적으로 견해가 다른 사람들을 감옥으로 보내고 처형시켜도, 유대인들을 그렇게 학살해도, 유럽 전역을 전쟁의 포화로 뒤덮어도 감수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 부수적인 악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독일과 유럽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나라도 구한말 한일합방을 하도록 고종에게 청원하는 문서에 서명한 사람의 숫자는 무려 100만에 달했다고 합니다. 설사 이것이 강제로, 허위로 만든 문서라 할지라도 100만이라는 숫자는 당하는 편에서 수동적인 의미에서라도 협조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숫자입니다. 또 우리에게는 다 똑같은 친일파이지만, 한일합방의 공을 누가 차지할 것인가를 두고 친일파들은 서로 경쟁했습니다. 우리에게는 을사오적이 다 똑같이 나쁜 사람들이지만, 실제로 그들은 한일합방의 공을 두고 서로 경쟁했습니다. 가령 일진회의 이완용과 총리대신 송병준은 서로 한일합방의 공을 차지하려고 경쟁했습니다. 이 둘은 앙숙이었습니다. 한일합방을 성사시키고 이들이 다 같이 찍은 사진을 보면 일말의 후회도, 망설임도 없고,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도 없는 얼굴들입니다. 아마 쓰러져가는 조국을 다시 일으킬 구국의 길이 일본을 통한 근대화와 부국강병의 길 외에 달리 어디 있겠는가고 자신만만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 개화파나 지식인들 사이에서 꽤 널리 퍼져 있던 생각이었습니다. 사실 이완용은 개화파였고, 독립협회 위원장을 지낸 적도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는 자신을 매국노라 부르는 것은 천부당만부당 하다고 억울해 했을 것입니다. 비단 이완용만이 아닙니다. 해방이 되었을 때 친일을 했던 그 많은 민족 지도자들, 지식인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정말로 이렇게 일찍 해방이 될 줄은 몰랐다.” 물론 친일파의 문제는 엄정하게 다루어야겠지만, 이런 사정을 보면 그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때는 다들 그래야 한다고, 그럴 수밖에 없다고,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그들이 그렇게 행동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역사를 돌이켜보면 우리는 우리 시대에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사실은 잘 모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더글러스 러미스라는 정치학자가 있습니다. 아주 재미있는 노인인데, 그는 <경제성장이 안 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책에서 러미스는 근대세계를 지배하는 정신에 대해 “타이타닉 현실주의”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말하는 “타이타닉 현실주의”라는 것은 맹목적인 경제성장주의에 매몰되어 파국으로 치닫는 근대세계에 대한 비유입니다. 그는 거대한 빙산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다가가고 있는 배로 오늘날 세계를 비유하고 있습니다. 배가 빙산에 부딪힐 것이라는 경고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지만, 오히려 거기에 너무 익숙해져서 사람들은 실감을 못합니다. 대신 눈에 보이는 것은 배 안의 현실뿐입니다. 결국은 침몰할 배 안에서 사람들은 분주하게 일하고 열심히 먹고 마시고 즐깁니다. 배안의 모든 사람들은 각자 일상사를 가지고 있고, 그 일을 합리적이고 효율적으로 해나가는 것을 현실주의라고 합니다. 반면 “누군가 ‘엔진을 멈추어야 한다’고 말하면 그것은 비상식, 비현실주의적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타이타닉호라는 배는 전진하도록 되어 있고, 전진하지 않으면 저마다의 일거리가 없어져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전진하는 것이 타이타닉 호의 본질입니다. 전진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러미스는 이것이 타이타닉호의 논리, 타이타닉 현실주의라고 합니다.

 

이와 함께 러미스는 또 다른 배의 비유를 드는데 그것은 허먼 멜빌의 소설, 모비딕에 나오는 ‘피쿠드호’입니다. 선장인 에이하브는 일찍이 자기에게 상처를 입힌 흰 고래를 찾아 온 세계를 헤맵니다. 선장은 자신의 광기를 잘 알고 있고, 일등항해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사용하고 있는 방법은 정상적이고 합리적이며 논리적이다. 목적만이 광적인 것이다.” 에이하브 선장의 이 말은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본질을 무섭도록 정확하게 보여줍니다. 그것은 바로 타이타닉 현실주의입니다. “정치가나 경제학자, 비즈니스맨이나 은행가, 경제발전을 추진하려고 하는 온갖 전문가들이 사용하고 있는 방법, 일하는 방식은 그 시스템 속에서는 매우 정상적이며 논리적이고, 현실적입니다. 하지만 타이타닉호와 같이, 그리고 에이하브의 배와 마찬가지로 그 목적은 광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현대세계가 처한 위험에 대해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습니다. 경제적 세계화와 그로 인한 전 세계적 양극화, 지구온난화와 그로 인한 기후변화, 테러와 끝없는 폭력의 악순환, 핵무기와 원자력발전으로 인한 방사능의 위험. 이런 것들은 우리를 파멸로 몰아넣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들 배후를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항상 GNP, 경제성장에 대한 신화가 깔려 있습니다. 경제성장이라는 목적을 위해서는 전쟁이나 환경파괴를 비롯한 온갖 폭력과 비인간적인 행위가 정당화된다는 것입니다. 전쟁도, 자연파괴도 바람직한 것은 아니지만, 경제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개인적인 차원에서라면 도저히 용납하기 어려운 엽기적이고 폭력적인 일들을 경제성장을 위해서라면 용납합니다. 행복에 대한 우리의 생각도 경제적인 풍요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물질적 풍요가 행복을 보장해준다. 적어도 행복의 필수조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우리는 다른 모든 것을 용납합니다. 결국 경제가 우리 삶의 전 영역을 지배하는 것을 우리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당장 우리 개인의 삶을 놓고 보더라도 조금만 깊이 생각해보면 기막힌 모순이 도처에 깔려 있습니다.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물질적으로 안정되어야 하고, 물질적으로 안정된 삶을 누리기 위해서는 취직을 해서 돈을 벌어야 하고, 취직을 잘 하기 위해서는 좋은 대학을 나와야 한다고 누구나 생각하지만, 힘든 경쟁을 뚫고 어렵게 대학에 들어가도 취업의 문은 높기만 합니다. 현재 각 대학이 내놓는 취업률을 보면 대체로 정규직 비정규직을 통틀어서 50%를 겨우 넘습니다. 앞으로 이 상황은 더 나빠지면 나빠졌지 좋아지지 않을 것입니다. 설사 취업을 한다 해도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은 사라진지 오랩니다. 퇴직을 하고 나면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고 무방비 상태인 노년의 세월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 세대의 심리적 정서를 표현하는 가장 정확한 말은 두려움입니다. 미래에 대한 근원적 두려움입니다. 개인적 차원에서든, 세계적 차원에서든, 또 분명하게 의식을 하든 못하든, 우리 앞에 거대한 빙산이 놓여 있다는 바로 그 객관적 사실 때문에 두려운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두려움 가운데 떨면서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의자를 하나씩 빼면서 낙오자를 만들어가는 우리 시대의 시스템에 대해서 견디기 힘들어하면서도 두려워만 할뿐 그것이 잘못되었고 어떤 방식으로든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못합니다. 다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그 대목에 우리 시대의 이집트 고기 가마가 있습니다. 풍요로움과 행복이 등을 돌리고 있는 상황이라면 그중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우리는 지금 그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기술이나 정보가 아니라 어쩔 수 없다는 신화를 무너뜨리고 삶의 의미와 방향을 세워줄 급진적 상상력입니다. 행복에 대한 우리의 생각도 그에 따라 바뀔 것입니다. 행복으로 가는 길은 오히려 경제성장이 없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서 자유로워질 때 비로소 열릴 것입니다. 이 점에서 우리 사회의 문제는 진보건 보수건 둘 다 이상적인 삶, 보다 나은 삶에 대한 상상력이 늘 물질적 풍요라는 데서 멈춘다는 것입니다. 늘 민주주의보다 경제성장이 우선입니다. 아마 이것이 오늘 우리가 벗어나야 할 타이타닉 현실주의일 것입니다.

 

암살당한 미국의 정치인 로버트 케네디는 40년 전, 당시 차기 대통령으로 유력시 되었을 때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는 그때나 지금이나 강력하게 통용되고 있는 GNP 신화를 통렬히 비판했습니다. “미국은 세계제일의 GNP를 자랑하고 있다. 하지만 그 GNP 중에는 담배나 술이나 마약, 이혼이나 교통사고나 범죄나 환경오염이나 환경파괴에 관련된 일체가 포함되어 있다. 전쟁에서 사용되는 네이팜탄도 핵탄두도 경찰의 장갑차도, 소총도, 나이프도, 아이들에게 장난감을 팔기 위해 폭력을 예찬하는 텔레비전방송도.” 이렇게 말한 뒤 다시 케네디는 GNP에 반영되지 않은 것들을 나열합니다. “아이들의 건강, 교육의 질, 놀이의 즐거움은 GNP에 포함되지 않는다. 시의 아름다움도, 시민의 지혜도, 용기도, 성실함도, 자비로움도...” 그리고 그는 이렇게 끝맺습니다. “요컨대 이런 말이다. 국가의 부를 측정한다는 GNP에는 우리 삶에서 진정한 가치가 모두 빠져 있다.”

 

케네디의 말과 생각은 행복에 대해 다른 상상을 하도록 우리를 자극합니다. 두려움과 공포가 아니라 안심과 즐거움을 에너지로 해서 발전할 수 있는 느린 사회의 모습을 우리가 상상할 수 있게 해줍니다. 물질적인 풍요로움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의 풍요로움이 넘치는 사회를 만든다는 것은 경제성장이라는 성공담보다 훨씬 재미있는 일이며, 우리를 행복에 가깝게 합니다. 아마도 그런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경쟁보다 공생이 더 기분 좋고 즐거운 일이라고 생각하고, 물질적 풍요보다는 삶을 누리고 즐길 줄 아는 능력을 훨씬 더 높이 평가할 것입니다. 미학적 관점도 지금과는 아주 다를 것입니다. 콘크리트로 덧입혀놓은 인공적인 직선의 강보다 구불구불 유유히 흐르면서 모래사장을 만들어내는 곡선의 강이 더 아름답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리고 상품과 서비스를 소비하는 것보다 생기발랄함, 인생살이 자체에 재미를 붙이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고 여길 것입니다.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의 상품화에 의해서 ‘살처분’ 당한 만물의 “살아 있음”을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경제성장 이데올로기에 이의를 제기한다고 해서 무슨 금욕주의나 음울한 도덕주의를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풍요로움과 행복, 아름다움에 관한 전혀 다른 감각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행복은 행복에 관한 올바른 관념을 강요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들에 핀 백합처럼, 공중을 나는 참새처럼 스스로 기쁨에 겨워서, 저절로 넘쳐나는 것입니다. 창세기에서 천지만물을 창조한 하느님은 매번 한 가지 창조가 끝날 때마다 “좋구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성서적 창조신앙의 핵심에 있는 것은 존재 자체의 좋음에 대한 근원적인 긍정입니다. 하느님이 만물을 창조하셨으니 이 아니 좋은가! 창세기 창조설화의 기자(記者)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커먼 구름 사이로 열린 하늘을 보듯이, 창조신앙은 생명의 근원적인 명랑함에 참여하는 신앙입니다. 그리고 생에 대한 이러한 근원적인 긍정이 행복의 근원이며, 모든 윤리의 출발점입니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누구나 겪는 일이겠지만, 아이가 크면서 어느 단계에 이르면 자꾸 고자질을 할 때가 있습니다. 특히 아이가 숙맥이거나 고지식할 경우 그 정도는 더 심합니다. 그런데 아이가 고자질하는 내용을 가만히 들어보면 대부분은 자기도 하고 싶은데 무서워서 못하는 것을 다른 아이가 했을 때 일러바칩니다. 제가 자라던 시절 같으면 엄마가 먹지 말라고 꼭꼭 감춰놓은 간식을 동생들 중 하나는 기어이 뒤져서 찾아먹고, 저는 속으로는 먹고싶어 껄떡거리는 것을 애써 누르고 참았다가 엄마한테 일러바치는 것으로 착한 아이라는 보상을 받고 싶어 합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이런 식으로 규칙을 배워가고, 이런 식으로 초보적인 윤리의식을 키워갑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른이 돼서도 이걸 윤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고, 특히 기독교인들 가운데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벌에 대한 두려움과 보상에 대한 기대가 진정한 윤리일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적대적인 선악의 세계 안에 갇혀서 금지 아니면 의무를 윤리라고 착각하는 사람은 절대 행복할 수 없고, 다른 사람을 불행하게 만듭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소심함과 무능력을 왜곡된 윤리의식으로 치장하고 심리적으로 보상받고 싶어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식의 윤리를 모릅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이런 식의 윤리관념에 의해 죄인이라고 낙인찍혔던 사람들을 예수께서는 친구라고 부르셨고, 자신은 죄인의 친구라고 하셨습니다. 또 예수께서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간음한 여인을 돌로 치려는 사람들을 향해서는 누구든 죄 없는 사람이 제일 먼저 돌을 던지라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의 어깨 위에 금지와 의무의 짐을 또 하나 지우려고 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 삶인지 몸소 보여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유명한 복 선언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태 5:3-12)

 

이 말씀은 지금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가 되고, 슬퍼하는 사람들이 슬퍼하지 않게 되고, 박해받는 사람들이 박해받지 않게 되리라고 약속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비참한 처지에 빠지게 하고 박해하는 사람들을 무찔러 벌주고 복수하게 되리라고 약속하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라 인생이 가난하고 슬프고 까닭 없이 미움받고 박해받는 것은 내 머리 위에 하늘이 있고 발밑에 땅이 있듯이, 해가 지고 달이 기울듯이 그냥 그런 것이라고 전제하고 있습니다. 삶은 도대체 말이 안 되는 것들로 가득 차 있고, 기본적으로 슬프고, 또 정의로운 복수 같은 것은 아예 기대도 할 수 없지만, 그래도 하느님이 허락하신 인생은 살만한 것이며, 그저 감사로 받을 뿐이라고, 부당한 폭력과 알 수 없는 고통 가운데서도 행복은 조용한 분별의 시냇물처럼 흐르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인생의 비밀을 안 사람은 질그릇 속에 보화를 간직한 사람이고, 이 행복의 시냇물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삶 속에 감사와 기쁨이 넘칩니다. 그래서 바울은 감옥에서도 늘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빌립 4:6) 그런 사람은 바울처럼 다른 사람을 향해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형제요, 나의 기쁨이며 화관”(빌립 4:1)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타인이 이웃이 되고 친구가 되는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때는 그 모든 금지와 의무가 사라지고, 대신 사랑의 윤리가 활동하기 시작합니다.

 

행복은 무엇보다도 삶을 향유하는 데서 우러나오는 것이며, 인간관계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한 사회가 이상적인 삶, 보다 나은 삶에 대해서 어떤 감각을 가지고, 어떤 그림을 그리는가 하는 것은 그 구성원들이 행복한 삶을 영위하는 데 대단히 중요합니다. 스지 신이치라는 일본의 문화인류학자가 있습니다. 이 분은 행복을 중시하는 새로운 사회로 가는 길을 “대항발전, 줄이는 발전”이라고 말했습니다. 구체적으로 이것은 에너지소비를 줄이고, 경제활동에 사용하는 시간을 줄이고, 가격이 붙은 것을 줄인다는 의미입니다. 대신 경제 이외의 가치, 경제활동 이외의 인간활동, 시장과 쇼핑 이외의 모든 즐거움을 늘리고 발전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중요한 것은 경제성장이 아니라 인간관계입니다. 행복은 물질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생겨납니다.

 

사실 가난이 왜 고통스러운가 하면 물질적 궁핍 그 자체 때문이라기보다는, 가난하기 때문에 싫은 사람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되고, 가난하기 때문에 관리나 억압에 저항하지 못하고 착취당하기 때문입니다. 상사가 아무리 보기 싫어도 이를 악물고 일해야 하고, 경멸당하고 무시당해야 하니까 그것이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물질의 결핍이나 가난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관계의 문제인 것입니다. 관리되는 인간관계에서 가난 때문에 자신의 위엄이 상처받는 것이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반면 행복이란 상호의존에 가까운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 덕분에 사는 것입니다. 사람과 사물과 일들이 모여서 내가 지금 여기 이렇게 있을 수 있도록 지지해주고 있다는 느낌. 그런 인연들에 대해서 감사하는 마음이 행복이라는 말에 담겨 있습니다. 기독교적으로 말하면 은혜라는 것입니다. 경제중심 사회에서 풍요로움은 무엇을 사고 소비했는가에 의해 결정되지만, 앞으로는 무엇을 만들어내는가가 각 개인의 정체성에서 핵심이 되는 사회가 다시 도래할 것입니다. 농사를 지어서 사람들이 먹을 것을 만들어낼 줄 알고, 손으로 뭔가를 만들 줄 아는 사람들, 그렇게 해서 다른 사람들의 삶을 지지해주는 사람들의 창조성이 발휘되는 사회야말로 풍요로운 사회인 것입니다. 각자 많이 벌어서 많이 사고 많이 소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땀 흘리며 몸을 움직여서 내가 다른 사람의 삶을 지지해주고, 또 나 역시 다른 사람으로부터 지지받고 있다는 느낌. 이것이야말로 우리 삶의 든든한 안전망이고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타이타닉 현실주의와 경제성장 지상주의를 넘어서자고 할 때 그것은 무슨 금욕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풍요로운 사회, 참다운 의미에서의 행복을 추구하자는 말입니다.

 

물질적 풍요를 최우선시하고 타이타닉 현실주의가 판치는 세상에서 물질적 가난은 불행입니다. 경제성장을 최우선시하는 사회에서 물질적 가난은 고립과 굴종, 인간관계의 파탄을 가져옵니다. 그래서 불행의 원인이 됩니다. 그러나 진정한 행복을 추구하는 사회, 재미를 추구하는 사회에서 가난은 우정의 기초입니다. 가난은 다른 사람을 필요로 하게 만듭니다. 물질적 가난은 내가 다른 사람에게 의지해서만, 다른 누군가의 덕분으로만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줍니다. 내가 살아 있는 것은 누군가의 덕분입니다. 누군가의 은혜 때문입니다. 그 누군가는 가깝고 먼 친구들일 것입니다. 은혜란 이렇게 인간이 관계적 존재라는 것의 한 표현입니다. 인간은 결코 단독자로는 존재할 수 없는데, 마치 단독자로 존재할 수 있는 것처럼 가정하고, 원자화 된 인간들이 싸우게 만드는 것이 경제성장주의 사회라면, 인간을 관계적으로 이해할 때 공생의 논리와 철학이 나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행복을 추구하는 사회는 경쟁이 아니라 서로 덕분에 사는 사회, 우정과 환대의 공동체를 만듭니다.

 

동서양의 오래된 전통에서는 모두 덕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정점을 우정이라고 보았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정은 이성에 따라 적극적으로 살아갈 때 얻어지는 행복이라고 말했습니다. 행복에 필수적인 요소가 우정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세 가지 우정을 이야기했습니다. 첫째가 쾌락에 바탕을 둔 우정이고, 둘째가 유용성에 바탕을 둔 우정, 셋째가 덕에 바탕을 둔 우정입니다. 그는 이 세 번째, 덕에 바탕을 둔 우정만이 가치 있고 지속가능한 우정이라고 했습니다. 덕 있는 행동을 기꺼이, 자발적으로 할 용의가 되어 있는 사람들의 우정이 최고의 우정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덕은 좋은 일을 행할 수 있는 습관적인 성향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 덕은 공동체에 의해서 함양됩니다. 지속가능한 우정 없이 인간은 참다운 행복에 이를 수 없습니다.

 

기술이든, 물질적 풍요든 그것은 인간에게 어느 정도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기술이든 풍요든 어느 한계를 넘어가면 인간을 억압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편리하게 하기 위한 기술이 어느 수준을 넘어서면 우리를 더욱 불편하게 합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부의 수준이 그렇습니다. 한계를 넘어선 풍요, 한계를 넘어선 기술, Technology는 Art of Living, ‘삶의 기술’을 축소시킵니다. 우정은 인간 삶에서 가장 중요한 art of living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넘치는 풍요 때문에 우정을 잃어버린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검소함입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와 아퀴나스에게는 가난과 검소가 우정의 기초였던 것입니다. 신학대전에서 아퀴나스는 가난은 즐거운 것, joyfullness라고 했습니다. 공생공락, 함께 살고 함께 기뻐하는 삶, 우정의 토대는 가난입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이 살아가시던 1세기 유대 사회의 수많은 고정관념을 뒤집어엎으셨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통쾌한 것은 “가난한 자는 행복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께서는 “가난한 자는 행복하다. 장차 부자가 될 것이니까.”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가난한 자는 가난하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아마도 행간의 여백을 채워 넣는다면 이런 말씀일 것입니다. 가난한 자는 행복하다. “가난한 자에게는 사랑하는 친구가 있으니까.” 여러분들이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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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31 시편 의로운 재판장이신 하나님 시94:12-23  이한규 목사  2016-02-06 460
12930 시편 하나님께 복수를 맡기십시오 시94:1-11  이한규 목사  2016-02-06 458
12929 사무엘상 범사에 감사하며 사는 길 삼상6:1-12  이한규 목사  2016-02-06 1119
12928 느헤미야 성도에게 중요한 5대 삶 느9:1-38  이한규 목사  2016-02-06 580
12927 마가복음 성찬에 담긴 3대 의미 막14:22-24  이한규 목사  2016-02-06 629
12926 베드로전 세상에서 성도답게 사는 법 벧전3:13-16  이한규 목사  2016-02-06 714
12925 시편 하나님에 대한 4대 정의 시93:1-5  이한규 목사  2016-02-06 350
12924 요한복음 건강한 4대 기독교 영성 요17:14-19  이한규 목사  2016-02-06 531
12923 아모스 여호와를 찾으라 암5:4-6  강승호 목사  2016-02-05 657
12922 마태복음 화목하고 화평케 하는 성도가 되자 마5:9  한태완 목사  2016-02-05 800
12921 누가복음 종말의 능력과 현실 눅4:14-21  정용섭 목사  2016-02-05 336
12920 이사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리라! [1] 사62:1-5  정용섭 목사  2016-02-05 511
12919 누가복음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인가? 눅3:15-17  정용섭 목사  2016-02-05 413
12918 에배소서 하나님 찬양과 하나님의 축복 엡1:3-14  정용섭 목사  2016-02-05 599
12917 골로새서 기독교인 완전 골3:12-17  정용섭 목사  2016-02-05 487
12916 이사야 하나님의 위로 사52:7-10  정용섭 목사  2016-02-05 645
12915 누가복음 마리아 찬송 file 눅1:46-55  정용섭 목사  2016-02-05 447
12914 스바냐 기뻐하고 노래하라! file 습3:14-20  정용섭 목사  2016-02-05 515
12913 누가복음 하나님의 구원을 보리라! file 눅3:1-6  정용섭 목사  2016-02-05 486
12912 누가복음 변화산에서 내려오라 눅9:28-36  강승호 목사  2016-02-04 501
12911 사사기 하나님의 것을 갖자 삿18:1-20  최장환 목사  2016-02-02 420
12910 레위기 하나님만 섬기자 레24:116  최장환 목사  2016-02-02 386
12909 여호수아 기념비를 세우라 수4:1-7  강승호 목사  2016-02-02 541
12908 누가복음 고백과 실천 눅19:1-9  강종수 목사  2016-01-31 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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