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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11:7-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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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부겸 목사 |
참고 : | 수도원교회 http://blog.naver.com/malsoom/149915626 |
2012년 2월 5일 주일설교
성경말씀 : 마태복음 11장 7절~19절
설교제목 : 요한의 사명, 예수의 사명
【이들이 떠나갈 때에, 예수께서 요한을 두고 무리에게 말씀하시기 시작하였다. "너희는 무엇을 보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아니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냐?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은 왕궁에 있다. 아니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예언자를 보러 나갔더냐?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는 예언자보다 더 위대한 인물이다. 이 사람에 대하여 성경에 기록하기를 '보아라, 내가 내 심부름꾼을 너보다 먼저 보낸다. 그가 네 앞에서 네 길을 닦을 것이다' 하였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가 낳은 사람 가운데서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었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는 아무리 작은 이라도 요한보다 더 크다. 세례자 요한 때로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힘을 떨치고 있다. 그리고 힘을 쓰는 사람들이 그것을 차지한다. 모든 예언자와 율법서는 요한에 이르기까지, 하늘 나라가 올 것을 예언하였다. 너희가 그 예언을 받아들이고자 하면, 요한 바로 그 사람이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이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길까? 마치 어린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서, 다른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우리가 너희에게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을 추지 않았고, 우리가 애곡을 해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요한은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는 귀신이 들렸다' 하고, 인자는 와서,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니, 그들이 말하기를 '보아라, 저 사람은 먹기를 탐하는 자요, 포도주를 즐기는 자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다' 한다. 그러나 지혜는 그것이 한 일로 그 옳음이 증명된다(마태 11:7~19)】
<요한 이야기>
어려서부터 ‘세례요한과 예수’에 대한 이야기에 대해서 불만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요한에 대해서 ‘예수의 길’을 예비하는 자라는 이야기를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열등한 인간, 예수는 우등한 인간으로 비교 되었더랬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지상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이었으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자로, 즉 예수의 수준에는 한참 못 미치는 자라는 평가가 있어왔습니다.
저는 그런 비교가 불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에 대한 평가가 그런 식으로 정돈(?)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결론을 미리 말씀드리자면, 요한과 예수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존재들입니다. 예수와 요한은 등산과 하산의 관계입니다. 그래서 누가 더 우월하다는 식의 평가는 옳지 않습니다. 요한과 예수는 형제이며, 자매이며, 친구이며, 동지이며, 연인이며, 동역자입니다.
<요한과 예수>
요한은 어떤 인물일까요? 그는 예언자 전통사회의 마지막 사역자였습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자, 금식하면서 회개를 촉구하는 자, 위대한 예언자 전통의 막내. 그가 요한의 자화상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는 어떤 인물일까요? 그는 ‘영성자 개척사회의 최초 사역자’였습니다. 세상의 거리에서 소요유(逍遙遊)하며 정중동(靜中動)하는 존재, 음식을 즐기면서 평안을 노래하는 자, 아름다운 영성자 전통의 맏이. 그가 예수의 자화상이었습니다.
요한과 예수는 못난 사람과 잘난 사람으로 나뉘어져야할 존재들이 아니었습니다. 그 둘은 다만 사명이 다른 존재들일 뿐이었습니다. 한 사람, 즉 요한은 미친 항로를 따라 운행하는 옛 시대의 비행기를 추락하지 않고 사뿐하게 연착륙시켜야할 사명이 있는 사람이었고, 또 한 사람, 예수는 새로운 항로를 뚫으면서 새롭게 비행기를 이륙시켜야할 사명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요한은 옛 시대를 연착륙시켜야할 사명이 있었고, 예수는 새 시대를 급이륙(急 離陸)시켜야할 사명이 있었습니다. 그 차이 뿐입니다.
<작은 결론 : 두 가지 사명>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초점은, 언제나 어디서나 어느 시대에나 어느 사회에서나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우리 인류에게는 두 가지 사명이 함께 주어진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어느 시대에서나 어느 사회에서나 옛 시대와 새 시대는 공존하는 것이기 때문 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옛 시대와 새 시대’의 사이공간에서 살아가게 마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항상 ‘요한의 사명’과 ‘예수의 사명’, 그 둘이 정중하게 요청되는 것입니다.
<나의 두 사명 : 목회자로서>
목회자로서 우리에게 부여된 사명이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느님에게 이르는 올바른 항로에서 이탈된 채 미친듯이 날뛰고 있는 우리 한국교회라는 비행기를 연착륙시키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미쳐있습니다. 이미 오래전에 항로를 이탈했습니다. 창공의 끝에 올랐던 비행기는 항로를 이탈한 채 추락하고 있습니다. 그게 한국교회의 실상입니다.
아주 위험한 상황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승무원들을 대상으로 권력투쟁을 벌이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잃어버린 항로로 되돌아가기 위해 무진 애를 쓰기도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더 이상의 희망을 발견할 수 없다고 판단해서 낙하산을 펴서 뛰어내리기도 합니다. 물론 대다수의 승객들은 그 비행기가 위험한지도 모른 채 평안하게 잠들어 있고, 대다수의 승무원들은 그 비행기가 위험하다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으면서도 달콤한 현실이 가져다주는 쾌락에 취해서 미래의 걱정을 몰아내고 있습니다. 아주 위험한 상황이고, 대단히 불순한 상황이고, 무척 염려스러운 실정입니다. 거의 절망적 상황에 가깝습니다.
이때 우리에게 필요한 사명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당연히 요한의 외침입니다. “회개하라. 깨어나라. 일어서라.” 예언자의 외침이 이때 절실히 필요합니다. 추락하는 비행기 안에서 끝까지 탈출하지 않고, 몰락과 소멸의 끝지점까지 ‘잠들어 있는 승객들’과 함께 하면서 광야의 외침을 외쳐야할 사명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즉 요한의 사명입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우리에게는 또 하나의 사명이 있는데, 그것은 예수의 사명입니다. 추락하는 비행기 안에서 우리는 또 다른 비행기를 만들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이제 연착륙하건 급착륙하건 이 비행기는 착륙할 것입니다. 그래서 비록 소수일지라도 살아남은 자들이 생길 것입니다. 우리는 이 위험한 비행기 안에서 ‘앞으로 살아남을 자들을 위한 비행선’을 만들어야 합니다. 새술을 담을 새 부대를 짜내야 합니다. 그게 예수의 사명입니다.
<더 확장된 이야기>
한국교회 뿐만이 아니죠. 이야기는 더 확장됩니다. 현대사회는 이미 오래 전에 항로를 이탈한 채 추락하고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들(초중고대학교)-진리탐구라는 본연의 목적을 내팽개친 공간, 또 무한경쟁이라는 잘못된 틀로 짜여진 자본주의 사회, 만인평등의 이상을 세운 공산주의사회 - 그러나 독재사회로 타락된 사회, 이제 곧 바닥이 들어날 석유 위에 세워진 위험한 현대문명, 영혼의 고향인 자연을 버린 위선적인 도시문화, 지구를 몇 차례나 끝장 내버릴 수 있는 현대인류의 위험한 기술들 ……… 현재 인류문명은 항로를 이탈한 채 추락하고 있습니다.
이때 우리의 사명은 무엇일까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마지막 예언자로서 “깨어나라”고 외치는 것이며, 또 하나는 영성자로서 ‘새 술을 담은 새 부대’를 짜는 일입니다. 그 두 가지 사명을 요한과 예수가 동시에 일깨워주고 있는 것입니다.
<설교를 마치면서>
이제 설교말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말씀의 제목을 ‘요한의 사명, 예수의 사명’이라고 잡아보았습니다. 오늘 이 설교말씀의 제목을 깊이 묵상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 축도
하늘의 님이여. 땅의 예수여. 바람의 성령이여!
이제는 우리 생명의 근원 되시는 하느님의 신비로운 사랑과
이 땅에서 진리의 세계로 진입한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와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를 아름다운 곳으로 인도해 주시는 성령님의 은총이
우리 수도교회 교우들 머리 위에 영원토록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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