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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노예가 된, 부활

마가복음 허태수 목사............... 조회 수 236 추천 수 0 2017.12.23 21:4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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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막16:7 
설교자 : 허태수 목사 
참고 : 2017.4.24 춘천 성암감리교회 

교회의 노예가 된, 부활

막16:7

                    

교리라고 하는 것은 개개인의 신앙을 일반화 한 것입니다. 일반화란 규격화란 말과 같습니다. 표준화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면 왜 개개인의 신앙을 표준화 하는 걸까요? 그것은 신앙의 권력화와 연관이 있습니다. 직업적인 성직자, 성직자들의 직제화와 맞물려 있습니다. 이런 제도나 표준화 이전에 신앙은 자유롭습니다. 그러나 일단 직제 안으로 신앙이 들어오고 그것이 표준화 되면 ‘예수를 믿는 창조적인 자유의 신앙’은 점점 종교의 노예가 되어갑니다. 오늘은 바로 그 이야기, 예수의 부활이 교회의 직제 즉 종교권력 안에 장치되면서 노예화가 되었음을 성찰해 보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지키는 ‘예수부활‘이 믿는 사람 개개인의 삶에서, 역사 안에서, 세계 안에서, 창의적이고 자유로운가 하는 겁니다. 그렇지 못하고 오로지 교회 안에서만 작동하는 ’예수 부활‘이라면 그건 종교의 노예로 전락한 것이라는 것이죠.

 

‘팍스 로마나 Pax Romana’는 옥타비아누스 황제가 내란을 진압한 다음에 한 선언입니다. 사실 로마는 이 선언 이후 200년 동안 전쟁도, 내란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평화의 시대였습니다. 옥타비아누스가 이 선언을 주전 17년 5월31일에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기념하는 축제가 3일 동안 로마시에서 열립니다. 이때 경축행사를 주도한 단체가 로마에 있는 성직자들입니다. 그들은 팔라틴 산위에 대리석으로 화려하게 만들어진 신전 앞에서 수만의 시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경축행사를 지휘했습니다. 옥타비아누스를 칭송하는 어용찬송이 54명의 성을 경험하지 않은 소년 소녀들에 의해 합창되었습니다. 로마시민들은 그들에게 평화를 가져다 준 신과 그 신에게 선택된 통치자를 칭송합니다.

 

이 선언은 신속히 로마전역에 퍼집니다. 그리고 그들은 말하기 시작합니다. ‘평화는 황제에게서 시작되었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평화’의 시대가 되었다고 세계 시민 모두, 로마시민이나 유대인이나 하인이나 노예나 누구에게나 평화가 실현 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고대 역사가인 타키투스는 로마의 평화가 로마 사람이 아닌 사람들, 나라들에게는 평화가 아니라 사막화였다고 말합니다. 다른 민족들은 모두 말라죽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로 이 ‘팍스 로마나’, 로마의 평화가 다른 민족들에게는 말려 죽이는 일이라서 여기저기서 저항이 생기게 됩니다. 그래서 등장하는 것이 세례 요한이 외치는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입니다. 요한의 이 외침은 바로 ‘팍스 로마나’에 대항하는 외침입니다. 우연히 기도하다가 나온 종교적인 언어가 아니라 역사적인 배경을 둔 외침이죠. 요한을 뒤이어 예수님도 같은 선포를 하게 되죠. 이것은 옥타비아누스와 그를 맹종하는 하수인들이 오십여 년 간 선포했던 ‘로마의 평화’, 이미 정착이 되어 ‘신의 나라가 도래했다’는 로마권력을 대항하는, 뒤엎어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이 선언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는 말은 옥타비아누스 황제의 ‘팍스 로마나’는 가짜다 그런 말입니다. 로마의 평화는 진정한 평화가 아니었습니다. 자신들의 평화를 위해 누군가 수 없는 생명들이 희생을 하고, 진멸의 고통위에 세워지는 평화였습니다. 그래서 가짜라는 겁니다. 내가 평화하기 위해 누군가 희생을 해야 한다면 그건 가짜라는 겁니다.

 

사람이 정복당하면 그의 말이나 생각이나 신앙도 정복됩니다. 일제 강점기에 신사참배를 해야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로마에 정복당했다는 것은 그들이 믿던 신, 그들의 신앙도 정복되어 있었다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따지고 보면 이스라엘의 하나님도 억눌려 있어야 했던 것이죠. 인간숭배의 신에 의해 하나님 신이 눌려 있는 것입니다. 로마의 평화는 정복당한 백성들이 믿던 신을 짓밟고 그 위에 옥타비아누스의신을 세웠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말합니다. “하늘에는 영광, 땅엔 평화” 이게 ‘팍스 로마나’입니다. 우리가 성탄절 때 무심코 외치던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 이 말은 본래 기독교의 용어가 아니라, 팍스 로마나 당시 옥타비아누스를 칭송할 때 쓴 말입니다. ‘영광도 옥타비아누스로부터, 평화도 옥타비아누스로부터’이런 말입니다. 그 옥타비아누스가 하늘이고, 영광이고, 평화였다는 말입니다. 그걸 기독교가 예수의 탄생을 기회로 옥타비아누스를 빗대어 했던 구호입니다. ‘옥타비아누스가 하늘이 아니고, 거기서 영광이 내리는 게 아니고, 옥타비아누스에게서 평화가 오는 게 아니다. 그것은 예수로 부터다’그런 뜻으로 한 외침입니다.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 로마의 이 구호와 이스라엘 땅에 나신 예수를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라고 말하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같은 문장을 공유하고 있긴 해도 이스라엘의 그 말은 로마의 아우구스투스를 대적함으로 나온 것입니다. 예수를 지칭하여 비롯된 이 구호는 정복자 로마의 이빨에 찢긴 백성들의 시체위에서 울려 퍼진 것입니다. 절망스러운 역사의 현장에서 하늘을 향해 속삭이듯 부르짖는 소리입니다. “희망은 남아 있다. 우리 모두가 이제까지 고통에 고통을 겪으면서 갈구했던 구원의 소망이 남아 있다. 그것이 바로 예수의 부활이다.” 이게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라는 말이었으니 로마의 그 개인을 우상으로 숭배하는 말과는 반대되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런 희망이 살아 있음을 우리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속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의 희망은 예수가 살아났다는 것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예수가 죽었다가 살아났기 때문에 우리의 희망을 꺾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좌절하지 않아도 된다는 겁니다. 살아나신 예수가 갈릴리에서 우리를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로마에 의해서 삶도, 존엄함도, 하나님을 믿는 신앙도 모두 짓밟혀진 상황에서 예수의 부활이 이스라엘의 희망으로 솟아오르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자신들의 역사적 현실에서 희망으로 다시 일으켜 세우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저자에게 예수의 부활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로마의 압제로 인한 고난과 고통 속에 빠진 이스라엘의 구원과, 십자가에 죽은 예수의 사건이 하나의 맥락에서 이해되고 해석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 이스라엘의 역사적 현실을 극복하는 희망의 출구였던 것입니다. 이것을 마가복음 저자는 부활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옥타비아누스의 통치철학을 ‘영웅주의’라고 합니다. 그리고 ‘영웅은 전능하다’는 생각을 갖습니다. ‘팍스로마나’즉 ‘로마에서 평화가 나고, 아우구스투스에게서 영광이 비롯된다’는 말은 한 영웅을 숭배하기 위해 하는 말이고, 그는 전능한 존재이며 세상은 바로 그런 존재들이 다스리는 것처럼 보일 때, 그것의 허위를 고발했던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믿는 신이 짓밟혀 신음소리조차 잃은 듯이 보일 때, 그 속에서 침묵당한 진실을 갈구하고, 그 소망을 잃지 않으려는 자들의 몸부림이었습니다. 로마의 압제에 눌려 죽은 것 같은 그들의 얼굴에 당시대 주류정신인 영웅주의에 타협하지 않으려는 생명성이 잉태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고백하는 겁니다. “우리는 이 소망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지, 로마의 영광이나 아우구스투스의 은혜나 전능으로 구원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정복한 자들의 노래가 아닙니다. 교리화되고 직제화된 잘 짜여 주류담론의 개선행진곡이 아닙니다. 그것은 정복당한 자들의 다시 일어섬, 신조차 정복당한 듯 보이던 그 신의 반란입니다. 이렇게 로마의 압제 속에서 아우구스투스라는 영웅을 신격화하는 시대에, 이스라엘이 믿는 하나님조차 억눌려 있던 때에 예수님의 부활을 희망의 밑천을 삼아 험난한 역사 현실에 대항하며 살아냈던 것이 이스라엘의 부활입니다. 그런데 점점 그 역동적이고 역사적이며 삶의 현장에서 믿는 개개인을 살아내게 했던 그 부활이 그만 교리와 교회라는 제도 안에 갇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교인들은 자신의 삶을 역사의 현실 안에서 역동적이게 하는 부활이 아니라 교회에서 종교적으로 기념하는 부활로 기억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적 책무는 이런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의식과 신앙 행위의 반란을 일으켜서, 예수의 부활이 적극적으로 내 삶에, 의식에, 가치관에 개입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과감하게 현실의 고통에 좌절하지 말고 희망하고, 희망의 성취를 위해 혁명해가야 합니다. 그래야 누구든 교회를 다니면 소금이 되고 빛이 됩니다. 부활은 그렇게 개개인을 뒤집어엎어서 새 인간으로 살게 거대한 하나님의 에너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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