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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 출처 : | https://www.facebook.com/choeseongsu.38256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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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묻는 삶”
사는 일이 점점 편리해진다. 인공지능 개발에 힘입어 더더욱 편해질 것이다.
예전에는 사람을 찾아가 물어야 했던 일들을 이제는 손안의 기계 하나로 해결한다.
길을 잃으면 지도를 켜고,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검색하고, 복잡한 문장이 떠오르면 인공지능에게 묻는다.
답은 빠르고 정교하다. 때로는 놀랄 만큼 정확하다. 그래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이렇게 많은 것이 제도와 기술로 정리되는 시대에, 굳이 하나님께 묻는 일이 꼭 필요할까. 목회자에게 조언을 구하는 일도 점점 낡아 가는 방식은 아닐까?’
그러나 사람은 답을 안다고 해서 늘 바르게 사는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많은 정보를 손에 쥘수록 더 쉽게 자기 뜻을 하나님의 뜻처럼 착각하기도 한다.
아는 것이 많아질수록 더 겸손해져야 할 텐데, 실제로는 자기 확신만 커지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오늘 우리에게 정말 부족한 것은 정보가 아니라 방향이고, 지식이 아니라 분별이며, 검색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께 묻는 마음은 아닐지 싶다.
출애굽 후의 이스라엘은 광야를 지나며 아직 삶의 질서가 완전히 갖추어지지 않은 백성이었다. 율법도 체계화되지 않았고, 규례도 충분히 정리되지 않았다. 그러니 갈등이나 분쟁이 생기면, 모세에게 나아와 하나님의 뜻을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자기 마음 가는 대로 결정하는 백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백성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이드로는 모세가 홀로 모든 일을 감당하는 모습을 보고 그것이 옳지 않다고 말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는 말에서 사용된 ‘토브’를 부정한 말이다.
이 말은 단지 비효율적이라는 뜻만은 아니다. 선하지 않고, 아름답지 않고, 하나님이 바라시는 질서에 맞지 않는다는 뜻으로도 읽을 수 있다.
모세 혼자 다 떠안는 구조는 모세도 지치게 하고 백성도 지치게 했다.
그래서 이드로는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을 세우라고 조언한다. 얼핏 보면 단순한 분업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보다 더 깊은 뜻이 있다. 그것은 권한 위임이다. 맡기는 것만이 아니라 판단하고 책임질 권한까지 함께 주는 일이다. 작은 일은 그들이 감당하고, 큰 일은 더 높은 단위로 올리고, 끝내 사람의 지혜로 다 헤아릴 수 없는 일은 모세가 하나님께 묻는 구조였다.
이 제도는 단지 행정의 효율을 높이기 위한 장치가 아니었다. 공동체 전체가 하나님께 묻는 삶을 지속할 수 있도록 만든 질서였다. 모세 한 사람의 영성이 아니라, 공동체의 순종을 가능하게 하는 장치였던 셈이다.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권한 위임의 중심에도 여전히 하나님이 계셨다는 사실이다. 사람에게 맡겼으되, 하나님을 대신하는 자리로 맡긴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뜻을 더 잘 반영하도록 맡긴 것이었다.
그러므로 권한 위임은 하나님의 자리를 비워 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다스림이 공동체 안에 더 넓게 스며들도록 하는 방식이었다.
우리는 제도 속에 살고, 법 아래 살고, 전문가의 조언 속에 산다. 그것들은 필요하다. 아니, 하나님께서 세상 속에 허락하신 질서이다. 잘 갖추어진 제도는 하나님의 일반은총 안에서 주어진 선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제도가 완전하지 않다는 것도 우리는 너무 잘 안다. 법이 있어도 억울한 일이 생기고, 제도가 있어도 갈등은 끝나지 않는다. 기술이 발달해도 불안은 사라지지 않는다. 인간이 만든 어떤 체계도 사람의 마음 깊은 곳까지 구원하지는 못한다. 옳고 그름을 가려 줄 수는 있어도, 왜 그 일이 내 영혼을 흔드는지까지는 말해주지 않는다.
바로 그래서 믿는 사람에게는 여전히 “하나님께 묻는 삶”이 필요하다. 그것은 무조건 신비롭게 살자는 말이 아니다. 합리성을 버리고 막연한 직감만 좇자는 말은 더더욱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제도와 상식과 정보와 경험을 다 사용하되, 거기서 멈추지 않고 “하나님, 이 일에서 주의 뜻은 무엇입니까”라고 묻는 것이다. 남들이 다 그렇게 하니까, 사회가 허락하니까, 법적으로 문제없으니까, 내 판단에 옳아 보이니까, 그 정도에서 끝내지 않는 것이다.
믿는 사람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이 일을 다시 바라보아야 한다.
이 물음은 답답해 보이기도 하고 우리를 느리게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 답답함과 느림은 낭비가 아니다. 오히려 영혼을 지키는 지혜다.
묻지 않으면 사람은 결국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게 된다. 사사기의 비극이 바로 거기 있었다.
사사기의 백성은 하나님이 없다고 선언한 것이 아니다. 다만 하나님께 묻지 않았을 뿐이다. 제사의 삶은 멈추지 않았을지 몰라도 일상의 삶은 자기 뜻대로 살았다.
오늘 우리도 다르지 않다. 예배하는 삶은 계속된다. 입술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말하면서, 실제 결정은 이미 다 내려놓은 뒤 하나님을 자기 뜻에 수긍하도록 억지를 부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이런 시대일수록 목회자의 역할도 다시 생각해야 한다.
목회자는 모든 문제의 정답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인공지능보다 더 빠른 정보 처리 능력을 가진 존재도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으로 훈련받고, 영혼의 무게를 헤아리며, 삶의 문제를 하나님 앞에서 해석하도록 돕는 일에는 여전히 고유한 사명이 있다.
도덕적 조언을 넘어서 영적 분별을 돕는 일, 겉으로는 단순한 선택 같아 보여도 그 속에 숨어 있는 신앙의 방향을 함께 묻는 일, 바로 그것이 목회의 자리다.
만일 인간의 삶이 단지 제도와 정보와 효율의 문제라면 교회는 금세 주변으로 밀려날 것이다. 지금 진행 중인 사안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람이 끝내 하나님 앞에 서야 하는 존재라면, 교회와 목회는 여전히 사라질 수 없다.
믿는다는 것은 다른 세상으로 도피하는 일이 아니다. 이 세상 한복판에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며 사는 일이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사람의 삶은 제도를 무시하는 삶이 아니라, 제도 너머에 계신 하나님을 잊지 않는 삶이다. 잘 갖추어진 질서 속에서도 주의 뜻을 묻고, 작은 일에서도 하나님 앞에 마음을 낮추고,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는 기도와 말씀과 공동체의 조언 속에서 분별하는 삶이다.
세상은 점점 더 많은 답을 우리에게 줄 것이다. 그러나 답이 많아질수록 우리는 더 자주 물어야 한다.
‘이것이 정말 주의 뜻입니까?’ 그 질문이 살아 있는 한, 교회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 질문이 살아 있는 한, 믿음도 살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질문을 품고 사는 사람이야말로, 제도와 기술이 가득한 시대 속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사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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