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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 출처 : | 최주훈 목사 페이스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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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진화론 이단 결의 유감: 우리가 정말 지켜야 할 것>
지난달 말, 서울 신길교회에서 열린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제120년차 총회에 긴급 안건으로 올라온 유신진화론이 총대 3분의 2가 넘는 찬성표로 이단으로 규정되었나 보다. 그 소식이 여기저기서 파열음을 만들어 낸다. 다른 교단 일이라고 입 다물고 있기엔, 너무도 황망한 마음이 들어 한 글자 보탠다. 기독교대한성결교회가 어떤 숙의 과정을 거쳤는지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신학자이자 목회자로서 한 신학 사조가, 더 정확히 말하면 하나의 가설이, '이단'이라는 가장 무거운 이름을 얻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이단’(αἵρεσις, 하이레시스)은 본래 가볍게 입에 올릴 수 있는 단어가 아니다. 초대교회가 이 칼을 빼 든 자리는 언제나 복음의 심장부였다.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이신가를 두고 니케아 공의회는 아리우스와 갈라섰고(주후 325년), 성령의 신성을 두고 교회는 또 한 번 무릎을 꿇어야 했다. 교회사에서 이단이라는 말은 "예수가 누구신가"라는 질문 앞에서만 비로소 꺼낼 수 있는 단어였다. 그 칼을 기독교대한성결교회는 하나님이 생명을 빚으신 '방법'에 관한 물음에 겨누었다.
이 결의를 밀어붙인 이들의 가장 단단한 논리는 창조과학의 화석 이야기가 아니었던 것 같다. 성결교 총회의 유신진화론 이단 결의를 두고, 어떤 이는 '교회 목사들의 지적 게으름'이라고 비웃지만, 별로 믿고 싶지 않은 말이다. 아마도 사도 바울이 말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들어왔고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의가 임했다’는 로마서 5장의 골조, 첫 사람 아담 위에 마지막 아담 그리스도를 포개는 고린도전서 15장의 논리가 성결교 목회자들의 손을 들게 한 지배적인 분위기 였던 것 같다. 실제로 아담이 한낱 상징에 그친다면 원죄와 구속의 뼈대가 흔들리는 것 아니냐는 물음은 결코 가볍지 않다. 가볍게 다루는 쪽이 오히려 정직하지 못하다. 그 때문에 성경의 권위를 지키고 복음을 보존하려는 성결교회 목사들의 마음 또한 의심할 이유는 없다. 정죄가 아니라 신앙을 지키려는 결단이었다는 총회의 해명을 나는 진심으로 믿어보려고 한다.
다만, 한 발 물러서 있는 내가 보기에 문제는 그다음에 있다. 물음의 무게를 인정하는 것과, 그 물음에 대한 답 하나를 구원의 경계선으로 못 박는 일은 전혀 다른 차원이다. 교회가 정통과 이단을 가르는 칼을 빼는 자리는, 그것이 무너지면 복음 자체가 무너지는 단 하나의 지점(status confessionis), 곧 '그리스도 외에 다른 복음이 없다'는 고백뿐이다. 창조의 방법에 관한 해석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오래도록 서로 다르게 답해 온, 그러나 같은 주님을 부르며 함께 성찬상에 앉아 온 열린 물음이었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하나 있다. 원죄 교리의 설계자 아우구스티누스조차 로마서 5장 12절의 라틴어 번역, 곧 사람들이 "그(아담) 안에서(in quo) 모두 죄를 지었다"로 읽은 본문 위에 자신의 교리를 세웠다. 훗날 그 구절의 헬라어(ἐφ' ᾧ, 에프 호)가 "그 안에서"가 아니라 "모두가 죄를 지었으므로"에 가깝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교리를 떠받치던 성경적 주춧돌 하나가 흔들린 것이다. 그런데도 원죄 교리는 무너지지 않았고, 원죄 교리에 질문하며 흔들린다고 이단이라 부른 사람도 없었다. 교회의 교리는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보다 훨씬 단단하다. 정작 교리를 약하게 만드는 것은 해석의 차이가 아니라, 작은 차이마다 칼을 겨누는 '조급함'이다.
실제로 이번 성결교의 이단 결의는 너무 조급했고, 과녁도 빗겨나갔다. 자연에서 관찰되는 변이로서의 진화론(과학적 사고)과, 생명에 목적도 창조주도 없다고 선언하는 '무신론적 진화주의'는 전혀 다른 범주의 논의이다. 결의가 겨눈 표적은 후자였으나, 그 칼에 베인 것은 후자를 똑같이 거부하면서 다만 창조의 방법을 달리 상상하고 표현하는 우리의 형제들이었다. 하나님이 천지를 지으셨다는 고백을 굳건하게 붙들고 그 솜씨 안에 진화라는 방식도 있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물으면서 하나님의 창조를 더욱 풍성한 방식으로 세상에 설명하고자 시도하는 우리의 형제들을, 다윈을 신으로 모시는 무신론자와 한통으로 묶어 정죄한 셈이다. 이단이라는 잘 드는 칼을, 같은 창조주를 찬양하는 가족의 등에 꽂은 것과 같다. 이런 식의 이단 판정이면, 과학적 사고와 접촉하는 현대 신학의 거장들뿐 아니라 성결교회에서 신앙생활하는 평범하고 신실한 과학자들과 교사들도 이단으로 밀쳐내는 결과를 초래한다.
창세기 1장을 둘러싼 오해도 여기서 풀어야 한다. 그 본문이 과학 보고서가 아니라는 말은, 창세기에 아무 역사도 담겨 있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다. 창세기 1장은 바빌론 포로기 한복판에서 제국의 신화에 맞서 터져 나온 고백이었다. 바빌론 사람들이 신으로 섬기던 해와 달을 하나님이 하늘에 매달아 두신 등불로 끌어내리고(창 1:16), 노예로 빚어졌다던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이라 선언한다. 빛이 첫째 날에, 해가 넷째 날에 오는 순서는 이 본문이 시간표가 아니라 찬양임을 스스로 일러준다. 그러니 창세기를 가장 굳건하게 지킨다는 사람들이 그것을 생물학 교과서의 경쟁 상대로 끌어내릴 때, 오히려 창세기 본문의 진짜 힘을 제 손으로 깎아버리는 셈이 된다.
종교개혁자 루터의 ‘십자가 신학’이 이 대목에서 자꾸 생각나는 건 왜 일까! 십자가 신학이 정죄를 경계하는 까닭은 모호함이 좋아서가 아니다. 복음이 그리스도 한 분으로 이미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 충만함 위에 창조의 메커니즘에 관한 특정 해석을 정통의 자격 요건으로 얹는 순간, 그것은 복음을 지키는 일이 아니라 복음에 무언가를 더하는 일이 된다. 루터는 이 더하기의 충동을 영광의 신학(theologia gloriae)이라 불렀다. "영광의 신학자는 악을 선이라 부르고 선을 악이라 부른다. 십자가의 신학자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부른다"(Martin Luther, Heidelberg Disputation, 1518, 제21명제, WA 1:354). 있는 그대로 부른다는 것은, 열린 물음을 닫힌 판결로 위조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나는 진화론을 신주처럼 떠받들자고 이런 글을 쓰는 게 아니다. 아담이 실제 첫 사람이었는지 아닌지, 여기서 답할 필요는 없다. 이 문제 역시 정직한 신앙인들이 여전히 씨름하는 물음이고, 한 개인이 몇 글자로 결론 내릴 수 있는 문제도 아니기 때문이다. 히브리어 아담('adam, אָדָם)이 흙(아다마, 'adamah)에서 온 ‘사람’을 뜻한다는 사실도 아담의 역사성 논쟁을 끝내지 않는다. 다만 창세기가 아담을 향해 내디딘 첫걸음이 무엇이었는지는 우리가 모두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그것은 그를 어느 지층에서 찾느냐가 아니라, 숨어 버린 사람을 끝까지 부르신 하나님의 자비로운 음성이었다.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
나 역시 한국교회의 품에서 자랐고, 그 무릎에서 기도를 배웠으며,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사랑한다. 그렇기에 이번 형제 교단의 결정에 함께 아파한다. 우리가 함께 고백하는 하나님 창조 신앙의 본령은 우리가 누구를 이단으로 판결하느냐에 있지 않다. 흙에서 온 우리를 향해 지금도 어디 있느냐 물으시는 그 음성 앞에, 우리가 과연 정직하게 서 있느냐에 있다. 다수결로 정죄하기는 쉽다. 그러나 그분의 음성 앞에 고개를 드는 일은 훨씬 더 두렵고, 또 훨씬 더 거룩하다.
최주훈 목사 (중앙루터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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