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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금요일 Good Friday

목회독서교육 최주훈 목사............... 조회 수 21 추천 수 0 2026.04.03 07:4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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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s://www.facebook.com/choejuhun/posts/26572116352408467 
<성금요일 Good Friday>
해마다 이맘때면 제게 한 가지 질문이 생겼습니다. 성금요일, 'Good Friday'라는 이름 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날을 왜 '좋은 금요일'이라 부르는 걸까요. 이 이름은 불경한 것 아닌가, 아니면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한 무엇이 이 이름 속에 담겨 있는 것인가.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오랫동안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너무 쉽게 넘겨버렸던 것 같습니다.
교회에서 자란 분이라면 성금요일 풍경이 익숙하실 겁니다. 제단에 꽃은 치워지고, 십자가에는 검은 천이 드리워집니다. 찬송도 낮은 톤으로 부르고, 설교도 묵직합니다. 모든 것이 슬픔과 탄식의 방향을 가리킵니다. 실제로 가톨릭 전통에서 성금요일은 일 년 중 유일하게 미사가 거행되지 않는 날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성체를 새로 축성하지 않고 전날 성목요일에 미리 준비해둔 빵과 포도주만 나눕니다. 동방정교회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날 성찬 자체를 행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숨을 거둔 날에 승리의 잔치를 벌이는 게 부적절하다는 논리입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예의이고, 지극히 합리적인 판단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반전이 있습니다. 루터교회 전통은 정반대의 길을 보여줍니다. 16세기부터 지금까지 루터교회에서 성금요일은 일 년 중 가장 중요한 종교적 축일이었고, 이 날 성찬을 거행하는 데 아무런 제한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성금요일이야말로 성찬을 받기에 가장 합당한 날로 여겼습니다. 신실한 루터교인이었던 바흐의 《마태수난곡》이 바로 이 날을 위해 작곡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수난의 절정에서 가장 장엄한 음악이 울려 퍼지고, 바로 그 자리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회중에게 베풀어집니다.
잠시 그 장면을 상상해 봅시다. 1727년 라이프치히, 성 토마스 교회입니다. 성금요일 오후, 교회 안은 촛불로 어둑합니다. 바흐가 지휘봉을 들자, 합창단이 "오라, 너 딸들아, 나와 함께 애통하라"를 부르기 시작합니다. 세 시간에 걸친 수난 이야기가 음악으로 펼쳐지고, 그 끝에서 회중은 빵을 떼고 잔을 나눕니다. 죽음의 한복판에서 성찬이 거행되는 겁니다. 가톨릭과 정교회가 침묵으로 이 날을 보내는 동안, 루터교회는 가장 풍성한 예배를 드립니다.
왜 루터교는 이렇게 달랐을까요. 여기에 루터 신학의 핵심이 담겨 있습니다.
1518년, 마르틴 루터는 하이델베르크 논쟁에서 당시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선언을 합니다. "영광의 신학자는 악을 선이라 부르고 선을 악이라 부른다. 십자가의 신학자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부른다."(Martin Luther, Heidelberg Disputation, Thesis 21, 1518, in Luther's Works 31:40) 이 한 문장은 단순한 학술적 명제가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를 완전히 뒤집는 선언입니다.
우리는 보통 하나님을 떠올릴 때 무엇을 상상하나요. 전능, 영광, 위엄, 빛, 승리. 루터는 이것을 '영광의 신학'이라 불렀습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십자가는 당연히 패배입니다. 수치이고, 하나님이 자리를 비운 증거입니다. 아들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부르짖는 그 자리에 하나님이 계실 리가 없다는 것이 상식적인 판단입니다.
그러나 십자가 사건을 루터는 정반대로 읽어냅니다. 바로 그 수치와 패배의 자리, 하나님이 가장 부재해 보이는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가장 결정적으로 자신을 드러내신다고 본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기독교 사상사에서 가장 위험하고, 동시에 가장 아름다운 명제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인간이 상상하는 전능함의 확대판이 아닙니다. 십자가 위의 무력함 속에서 작동하는 역설적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사랑받을 만한 대상을 골라서 찾아가는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자를 먼저 찾아가, 그를 사랑스러운 존재로 만들어버리는 사랑입니다.
이 관점이 성금요일의 의미를 완전히 바꿉니다.
영광의 신학자에게 성금요일은 하나님이 침묵한 날입니다. 그래서 성찬을 거두고, 꽃을 치우고, 말을 아끼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신학자에게 이 날은 전혀 다른 풍경으로 읽힙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는 "다 이루었다(Τετέλεσται)"라고 선포하셨습니다(요한복음 19:30). 이 헬라어 단어는 단순히 '끝났다'가 아닙니다. 채무 문서에 쓰이던 법률 용어로, '빚이 완전히 청산되었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이 이 순간 완료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날 성찬을 거행하지 않을 이유가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요.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린도전서 11:26).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선포하기에 성금요일보다 더 적합한 날이 또 어디 있을까요. 루터교의 성금요일 성찬은 장례식이 아니라, 복음의 가장 충만한 자리가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혹시 하나님의 일하심을 너무 '상식적으로' 기대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승리는 반드시 승리의 모습으로 와야 하고, 축복은 반드시 풍요의 형태로 나타나야 하고, 하나님의 임재는 반드시 뜨거운 감동으로 느껴져야 한다고 전제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십자가의 신학은 이 모든 생각들을 뒤집습니다. 가장 어두운 자리에서 빛이 시작되고, 가장 깊은 상실에서 구원이 완성되며, 하나님이 완전히 침묵하신 것처럼 보이는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가장 결정적으로 선포됩니다.
이것이 'Good Friday'라는 이름의 신학적 정당성입니다. 어원적으로 'good'이 'holy'를 뜻했든 말았든, 십자가의 신학자에게 이 금요일은 진정으로 '좋은 금요일'입니다. 악 가운데서 선이 드러나고, 죽음 가운데서 생명이 완성되며,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처럼 보이는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임재가 가장 깊이 실현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에도 '성금요일'이 있습니다.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은 날, 하나님이 멀어진 것 같은 밤, 기도가 천장에 부딪혀 되돌아오는 것 같은 시간 말입니다. 그 자리가 바로 하나님이 일하시는 현장이라고, 십자가의 신학은 말합니다. 2천 년 전 골고다에서 그러셨던 것처럼,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님은 우리가 가장 예상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당신의 사랑을 완성하고 계신다고,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그러니 성금요일을 두려워하지 맙시다. 이 날은 끝이 아니라 완성의 날이고, 침묵이 아니라 가장 깊은 선포의 날이며, 부재가 아니라 가장 결정적인 임재의 날입니다. 다 이루었다고, 그분이 직접 말씀하셨으니까요.
글. 최주훈 목사 (중앙루터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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