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눅19:8-27 |
---|---|
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19장 8절-27절: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시니 이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저희는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러라 가라사대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그 종 열을 불러 은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오기까지 장사하라 하니라 그런데 그 백성이 저를 미워하여 사자를 뒤로 보내어 가로되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노이다 하였더라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돌아와서 은 준 종들의 각각 어떻게 장사한 것을 알고자 하여 저희를 부르니 그 첫째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 그 둘째가 와서 가로되 주여 주의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만들었나이다 주인이 그에게도 이르되 너도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 하고 또 한 사람이 와서 가로되 주여 보소서 주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로 싸두었었나이다 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 주인이 이르되 악한 종아 내가 네 말로 너를 판단하노니 너는 내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인 줄을 알았느냐 그러면 어찌하여 내 은을 은행에 두지 아니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와서 그 변리까지 찾았으리라 하고 곁에 섰는 자들에게 이르되 그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있는 자에게 주라 하니 저희가 가로되 주여 저에게 이미 열 므나가 있나이다 주인이 가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그리고 나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하였느니라.
‘예수=구원’을 영접한 삭개오는 자진하여 소원적으로 자기의 재산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다고 했다. 그러면 여기서 가난한 자들은 어느 나라 사람들이냐? 멀리 사는 여호와 하나님을 안 믿는 가난한 자들이냐? 자기 동족, 백성,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가난한 자들이다.
기독교 안에서 예수 믿는 사람이 이웃을 도울 때 같은 교인이면서 가난한 자들을 먼저, 그리고 이방사람들은 부모형제들이 있으면 그 사람들로 섬기게 해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를 보면 어떤 교회는 일반적으로 보면 잘한다고 할 수 있겠으나 성경의 원칙을 두고 볼 때 이방 불신자들로 하여금 교회는 의례히 사회에서 못 살고 불쌍한 사람들 돌보는 기관이라고 하는 인식을 심어주는 경우가 있다. 교회에서 그런 일을 하도록 바라는 인식을 심어주면 안 된다. 성경의 원칙에서 벗어나는 일들이 많다.
그래서 산을 하나 사서 교인들의 공동묘지를 마련한 게 소문이 나니까 나이 많은 분들, 못 사는 사람들이 모인다. 죽어서 공짜로 묻히려고. 그런 사고발상이 안 들도록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하는 건 성경에서 말하는 선의 개념과는 다른 거다. 그런 게 일반적으로 보면 좋은 일이기도 한데 그만 이게 본 뜻이 흐려져서는 안 된다. 교회가 그런 식이라고 하면 할 수 없겠으나 그러나 성경의 정신으로 볼 때는 합당치 않다.
부자청년과 부자관원이 성경의 각각 다른 곳에 기록이 돼 있는데, 이 둘이 같은 인물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들은 영생을 얻고자 했지만 세상 물질욕심 즉, 마귀가 꾀이는 그 마음은 떠나지 못했다.
세상 물질욕심의 뿌리는, 그 마음은 세상 불탈 것, 불붙는 곳에 박혀져 있다. 그러니까 그 정신을 가지면 불붙는 정신을 가졌기 때문에, 세상 물질적 개념은 불붙는 정신이니, 이건 심판의 불이니 결국 그 정신을 가지고 심판 받을 짓을 크게 만들게 된다. 그래서 일반 이치적으로도 모든 나무는 그 나무의 뿌리와 그 열매를 보는 거다. 그 원리는 속이지 못한다. 하나님이 정해 놨다.
오늘날 교회가 구하고 가르치는 게 세상에 속한 것을 잡기 위해 예수님을 믿고 부르고 있다면 이는 마귀의 수단 방법이다.(마4:) 이건 불탈 신앙이 된다. 또 롯과 같은 부끄럽고 수치스런 신앙이다.
삭개오는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다’고 했다. 이 말의 뜻은?
1. 불법으로 많이 해 먹었다는 말이다? 2. 남을 많이 속였다는 말이다? 3. 정직하게 살았다는 말이다? 4. 예수님을 만났으니 이제 후로는 깨끗하게 살겠다는 말이다? 3번? 8절의 말이 나오는 걸 보면 ‘안 해 먹었지만 자기에게서 불의한 것이 나타나기만 하면’ 그 말이다.
여기서 삭개오의 일반적인 정직성을 볼 수 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평소에 정직하게 살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나는 평소에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살았을까’ 할 때 삭개오만도 못하지 않은가?
9절: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구원은 예수님이다. 예수는 구원이다. 자기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예수님을 영접하고 집으로 들이면 즉, 바른 정신 바른 교훈을 받으면 사람이 바른 사람이 되고 죽는 게 겁이 안 난다. 옳게 들어갔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그 가정을 구원의 가정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역사는 가능하다.
옳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자기가 자꾸 굽게 한다거나 본질로 바로 믿는 사람을 자꾸 헐뜯는다면 하나님의 형벌이 들어간다. 그러니 그런 자들을 겁내지 말아라. 예수님의 정신을 가지고 힘 있게 정직하게 용감하게 담대하게 살아라. 옳은 진리이치로 사는 성도에게는 배경이 하나님으로 들어가 있다. 그런 성도를 건드리면 안 된다. 자기가 해가 된다. 가시나무를 건드리면 자기가 찔려서 피가 나는 거다. 건드릴 게 있고 안 건드릴 게 있는 거다. 겁내면 안 된다. 자기가 살아있는 동안 예수님화 진리화 시키는 삶이 돼야 한다.
예수는 구원이시고, 이 구원이 삭개오의 집으로 들어가신 것이고, 삭개오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 되신 말씀을 달게 받은 것이다. 이 신앙사상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다. 무슨 족보나 혈통을 따져서 말하는 게 아니라 이 삭개오와 같은 신앙은 아브라함이 가지고 있는 신앙사상과 정신이 맥락이 같이 들어간다는 의미에서 아브라함의 후손이다. 신앙의 이치는 그런 거다. 신앙의 질적 면에 있어서 우리도 영적 눈을 가지고 보면 아브라함의 후손이다. 따라서 목사님들은 성경에서 말하는 질에 맞춰 들어가야 계대가 맞아 들어간다. 사역을 크게 하는 그건 아닌 거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어도 구원이 없는 가정이 있고, 예수님과 점심을 같이 먹어도 구원이 없는 대접이 있고, 예배를 하고 충성봉사를 하고 목숨을 바쳐 예수를 믿어도 구원이 없는 신앙 믿음이 있다. 그래서 늘 예수를 헛되게 믿지 말라는 것이다.
충성봉사를 했느냐? 시간투자 물질투자 노력투자 활동투자를 했느냐? 왜 심판받을 짓을 하느냐? 하는 자체가 심판이 아니라 어디다 그 일을 하고 있느냐 그 말이다. 구원이 아닌 짓은 하지 말라 그 말이다. ‘나는 너희들을 모르겠다’ 하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바리새교인들이 안식일을 성대히 지켰어도 이들은 구원이 없는 예배다. 양을 수 십 수 백 수 천 마리를 잡고, 양이 타는 냄새가 진동을 하고, 제사장들은 구약성경에서 말하는 예복을 다 갖추고 했지만 우물가에서 예수님과 대화 하고 있는 여인과 얼마나 대조적이냐?
우리는 예배만이 아니라 대화 속에서 주님이 계셔야 하고, 구원이 있어야 한다. 그 정신자세가 예배의 자세다. 우리 생활이 곧 예배다. 한 시간 드리는 예배만이 예배라면 나가서 밥 먹고 일하고 사는 건 예배가 아니냐? ‘너희는 먹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라’는 말속에는 그 정신을 말하는 거다. 하나님 앞에 있는 게 예배정신이다. 예배한다고 하며 순서는 엄격히 지켜도 소원 목적이 세상이라면 그건 하나님 앞에 예배가 아니라 우상 앞에 예배다.
아브라함의 후손은?
1. 육적 혈통에서 좌우된다?
2. 영적 신앙에서 좌우된다?
어느 거냐?
10절: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잃어버렸다는 것은 있었는데 잃어버렸다는 말인지, 말씀은 예수님이 하시는데 삭개오를 염두에 두고 잃어버린 자를 찾으러 왔다는 말인지?
‘이방인’이라 할 때 하나님께서 아예 이방인을 따로 만들어 놓고, 또 하나님의 백성을 따로 만들어놓은 것이냐?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서 믿는 사람은 택자로 만들어 놓은 것이고, 안 믿는 사람은 불택자로 만들어 놓은 것이냐?
이방인을 따로 만들었다고 하는 것은 불택자를 따로 만들었다는 의미다. 우리 입장에서는 그렇게 보면 안 된다.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구원이’ 하는 말의 의미는 현재 믿는 자기가 깨닫고 보니 그 사실을 안 것이냐, 아니면 전체적 인간이 그렇게 들었다는 것이 전제된 말이냐? 둘 다 맞는 말이냐, 둘 중에 하나는 틀린 말이냐? 둘 다 맞는 말이다. 이걸 택불택으로 나누게 되면 이룰구원 면에서 해석이 안 된다. 어느 한 성경에는 맞을 수도 있지만 전체적인 면에서는 안 맞아 들어간다.
그러면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한 것이 삭개오의 집만 구원이 되고 바리새교인들의 집은 구원이 안 되기 때문에 지옥 간다는 말이냐? 성경에 ‘예수님이 자기 백성에게 오매’ 한 것은 신령천국에 들어갈 백성이요,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백성을 말하는 거다. 그런데 ‘자기 백성이 영접치 아니하고 죽였다’ 했는데, 그러면 이게 어떻게 되는 거냐? 즉, 영접치 않은 자들은 지옥에 가게 되는 것이냐? 이건 이룰구원 면에서의 말이다.
제자들보고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낮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못 들어간다’ 했는데 이것도 이룰구원 면에서의 말이다. 이걸 ‘천국, 지옥’으로 말을 하면 지옥 간다는 말이 된다. 그러면 학교에 들어가서 공부를 계속 못했다면 졸업을 못하는 거냐, 공부는 못해도 졸업은 되느냐? 공부를 못해서 졸업을 안 시킨다면 그 학교에서 늙어 죽을 때까지 계속 가르쳐야 한다. 그러니까 ‘결단코 못 들어간다’ 하는 게 그런 뜻이라면 그런 자를 하나님이 들어갈 수 있도록 골 백 살을 먹도록 다 만들어 놓고 들여보내야 한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이건 아니다.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낫지 아니하면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는 것은 우리의 이룰구원 면에서 ‘결단코 못 들어간다’고 하는 것이지 ‘지옥에 간다’ 그 말이 아니다. 그러니까 ‘들어가도록 더 힘을 써야지’ 하는 마음을 가지라는 것이다. ‘결단코 못 들어간다’ 할 때 믿는 자로서 마음이 기울여지고 힘을 쓰게 되는 거다.
성경에 그런 것이 기록돼 있을 때 우리는 천국에 갈 자나 지옥에 갈 자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지옥에 간다고 했으니까 내가 지옥 갈 짓을 안 하면 된다. 그래서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가는 것보다 ...’ 하는 것도 글자 그대로 본다면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을 보면 그들은 두 눈이 다 뽑힐 자들이다. 그러니까 글자 그대로가 아니라 그 말에는 다른 의도성이 있는 거다.
목사님들이 성경을 볼 때 용어에 자꾸 매이려고 하는 습성이 있다. ‘침을 뱉어 흙을 이겨 눈에 바르시고’ 했는데 ‘그렇지 하지 않고 말씀으로도 하실 수도 있는 건데 왜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에게는 침을 뱉어 흙에 이겨 눈에 발랐느냐’ 하면서 자꾸 ‘침은 뭐다. 흙은 뭐다’ 하는데, 그렇게 볼 것이 아니라 그 방편을 써서 하는 그 분의 의도성을 밝혀내면 그 다음 것은 다 풀리는 거다. 그런데 그러지를 않고 그 의도성으로는 안 들어가고 ‘침은 뭐다. 흙은 뭐다’ 하고 들어가니 뜻이 안 나온다. 그러니 ‘침은 예수님의 입에서 나왔으니 말씀이다’ 하며 편리한대로 갖다 붙이게 된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것은 예수님의 입장에서 소경 한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바리새교인들과 주위에서 그걸 보며 서 있는 자들에게 말씀하고자 하는 의도성이 있는 거다. 소경 한 사람을 고쳤지만 바리새교인들과 둘러 선 사람들, 그리고 소경에게도 이치가 다 들어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소경에게 침을 발라서 하는 방편을 썼으니 소경의 입장에서 그렇게 해 주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느낌성이나 예수님을 생각하는 마음,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소경에게 하시는 예수님의 처사를 봤을 때 “저게 뭐냐? 수건으로 닦아주거나 눈에 손을 얹어서 ‘눈을 떠라’ 하면 되는 건데 왜 저런 방편을 쓰시나” 할 수 있겠지만 그렇게 볼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셔야만 하는 면에서 문제점이 누구에게 있는 것인가’ 그것도 있는 거다.
그래서 힌트를 준다면 소경에게 침을 뱉어서 흙을 이겨서 눈에 바른다면 어쨌든 그 행위가 누가 보더라도 좋은 행위냐, 이상한 행위냐? 보기가 참 나쁜 거다. 그래서 소경의 입장에서도 ‘왜 더럽게 침을 뱉어서 그것도 흙을 이겨서 이게 뭐하는 겁니까’ 하며 ‘나 안 고치렵니다’ 한다면 어떻게 되는 거냐? 영원히 눈을 못 뜨는 거다. 그렇다면 소경의 입장에서는 ‘나의 눈을 띠워주실 분은 저 분이다. 저 분이 나에게 어떤 방편을 쓰시던지, 눈을 쑤시던지 나의 뺨을 치시던지 어쨌든 저 분이 나의 눈을 띠워줄 분이다’ 한다면 주님이 자기에게 어떤 대우를 한다고 할지라도 거기에는 순종이 들어가는 거다.
그러고서 소경에게 어디로 가라고 했느냐? 실로암 못으로. 실로암의 뜻이 ‘보냄을 받았다’인데, 실로암이 보냄을 받은 거냐. 소경이 보냄을 받은 거냐? 소경이다. 이 실로암 연못은 상징적 비유로 들어가 있다. 그러니까 날 때부터 소경은 누구의 보내심을 받은 자에게로 가야 하는 거냐?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예수님에게로 가야 한다. 이렇게 되는 거다. 그 예수님에게 내가 또 보냄을 받아야 하고. 이게 무슨 뜻이냐? 실로암이라고 하는 것은 못이지만 소경이 순종을 해서 거기로 가야 눈이 뜨이는 거다. 순종을 안 하면 눈이 안 뜨이는 거다.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 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거냐? 예수님이 보냄을 받은 건데, 그 보냄을 받은 주님이 소경을 실로암 못으로 보냈으니 질적인 면에서는 거기에 순종을 해서 가면 눈을 뜨게 되어서 보게 되는 것이다. 가라. 어디로? 보냄을 받은 곳으로. 그러니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있는 그곳이 실로암이니 그곳으로 가라. 그러면 그곳에는 예수님도 계시고 성령님의 역사도 있는 거다.
인간은 눈을 떴어도 날 때부터 예수님을 하나님을 모른다. 영적 차원에서 구별도 분별도 아무 것도 못하는 거다. 그래서 모두는 소경이다. 여기에는 상징적이면서 비유도 들어있는 거다.
어쨌든 눈을 뜨고 오니 많은 사람들이 ‘네가 어떻게 눈을 떴느냐?’ 하고 물었다. 소경이 분명히 예수님 앞에서 눈을 떴으니까 그가 많은 사람 앞에서 ‘선지자인줄 안다’고 했다. 선지자는 미래를 보게 하고 알게 한다. 우리 입장에서 하나님께서 하실 일에 대한 미래, 구원에 대한, 이룰구원에 대한 깨달음을 주는 게 나의 미래다.
그가 소경이었던 것을 부모도 알고, 많은 사람들이 그가 날 때부터 소경인 것을 안다. 그런데 그가 눈을 뜬 것을 보고서 어떤 사람은 그가 날 때부터 소경인 것을 안 믿는다. 육신의 눈을 뜬 사람들이 안 믿는다 그 말이다. 육신의 눈을 뜬 사람은 날 때부터 소경은 아니다. 그런데 영적 면의 의미로 보면 눈을 뜨고 있어도 하나님을 못 보고, 구별 분별을 못하고, 메시아를 알지 못하고, 하늘의 뜻을 모르는 면에서 날 때부터 소경이다.
날 때부터 영적 소경은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어져야 눈을 뜨게 된다. 즉 영의 눈을 뜬다는 거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가 다 실로암이냐? 그렇지를 않다. 그러니까 영의 눈을 뜨고 싶으냐? 실로암 못으로 가라.
진흙으로 한 게 어떻게 보면 기분이 나쁜 거지만 그렇게 해서 이겨서 발랐다는 것은 ‘누가 봐도 그 사람은 날 때부터 소경이었구나’ 하는 것을 알게 하는 거다. 그러니까 소경에게 그렇게 해 주시는 것은 ‘이 사람은 날 때부터 소경이다’ 하는 증거다. 그 증거를 많은 사람에게 보여주고, 그 다음에 씻고 돌아와서 눈이 밝아진 것을 증거하는 거다. 그런데도 안 믿는 사람들은 안 믿는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영이 어두운 날 때부터 소경이라는 것을 모른다. 안 믿는다. 오늘날 세상 속화된 교회가 안 믿는다. 영의 눈이 뜨이는 것이 뭔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자기는 영의 눈을 떴다고 스스로 자위하는 거다. 예수 믿으면서 세상을 구하고 자랑한다면 그게 어떻게 영의 눈이 뜨여진 것이냐? 우리는 영의 눈이 뜨여져야 한다. 날마다 실로암 못에 가서 씻어야 한다. 가령 예수를 믿으려고 처음 왔다면 그건 눈이 감긴 상태다. 말씀을 가지고 자꾸 씻겨야 한다.
목사님들은 그걸 봤을 때 영적 소경인줄을 알아야 한다. 그런 자들에게 이룰구원에 대한 미래를 알게 하고, 자기의 존귀 영광면의 미래를 알게 해야 한다. 그래서 그걸 안다는 면에서, 미래를 밝혀준다는 면에서 선지자를 만났다고 하는 거다. 말하자면 그 교훈의 질이 각자 본인에게 있어서 선지자적 성질이 들어있는 거다. 미래를 보게 하는 성질이 들어있다. 그런데 세상을 구한다면 뭐가 되겠느냐?
예수님께서 여리고로 들어왔고 삭개오의 집으로 들어온 것인데, 이것은 그 옛날 저주받을 여리고 성에서 기생라합이 두 정탐꾼을 통해 하나님이 전해주는 소식을 듣고 믿고 구원을 얻은 것처럼 질이 같이 흘러가고 연결되고 있다. 저주받은 여리고 성에서 삭개오를 구원해 주시려고 예수님께서 오신 것이 분명하다.
‘구원’이라는 말속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된 ‘기본구원’이 있고, 이 세상에서 영능의 실력을 닦고 가야 하는 ‘이룰구원’이 있다. 간단히 말해서 기본구원은 예수학교에 들어가는 것. 그 다음에 영능의 실력을 키우는 면에서 공부 잘하는 실력은 이룰구원. 그 다음에 실력을 잘 닦아놓으면 천국에 가서 영능의 실력대로 누린다. 학교에서 실력적으로 공부를 잘 하면 그 실력을 일터에 가서 다 써먹는 것과 같은 이치다.
예수님께서 여리고 성에 오신 것은 오늘날도 삭개오와 같은 신앙자를 찾아서 이 시대에 사라지지 않게 하고 세상 끝 날까지 보호하신다는 의미가 들어있다. 여리고는 저주받은 성이요, 그 질을 보면 여리고의 성질을 가지고 있으면 세상 끝 날에 저주를 받고 하나님의 심판에 들어가게 된다. 그런데 그 가운데 살고 있던 삭개오에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이 분이 들어가니 삭개오는 영접이 됐다. 여리고에서 살고 있어도 이룰구원으로 마지막 날에 그는 구원이 되는 거다.
왜 세상 끝 날까지냐? 여리고를 길게 늘어뜨리면 세상심판으로 들어가는 거다. 그래서 세상 끝 날까지 삭개오와 같은 신앙을 가진 자를 세상 끝 날까지 보호하고 하나님의 간섭이 들어있는 거다. 하나님의 보호가 들어있다.
그래서 지금도 예수 믿으면서도 아브라함의 신앙사상을 가진 교인들이 있는 거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이’ 하는 그 구원계대. 시대 속에서 흘러가는 신앙의 질적인 면을 가진 그 자자손손 그 계대가 생명계대요 구원계대요 아브라함의 구원계대다. 하나님은 그런 자를 잡고 쓰신다. 아무 교회나, 아무 목사나 그게 아니다.
그런데 11절-27절로 보면 삭개로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하고, 예수님 당신이 오신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왔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 말은 삭개로 잃어버렸는데 찾았다는 말이고, 또 예루살렘 가까이 오셨다. 사람들은 이걸 보고 느끼기를 ‘예수님이 이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 구약 때 모세처럼 로마 강대국을 이적을 행해서 제압하고 이제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나라를 세우려나 보다’ 그렇게 기대심을 가졌던 모양이다. 그래서 본 절에서 당신이 오신 이유를 바로 알아들으라고 귀신이 왕권을 받아오는 비유를 잠깐 말씀하신 것이다.
무슨 말씀 끝에 왜 그 비유를 했나? 무슨 말씀을 하시고는 왜 얼토당토않은 말씀을 하시나? 그게 있는 거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