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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10: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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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10장 1절-8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예수께서 이 비유로 저희에게 말씀하셨으나 저희는 그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1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다른 문은 없다.
2절: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본질로 들어가야 한다.
3절: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문지기는 목자를 위해 문을 연다. 사도요한이 하늘 문이 열려서 하늘의 것을 보았듯이 계시의 문을 열어준다. 하늘의 문이 열리는 것은 차원이 높은 건데, 영적인 활동의 문이 열리는 것을 말한다. 사람의 활동의 배후에서 짐승의 영이 움직이는 건지, 성령님이 움직이는 건지를 보는 눈이다. 이 눈은 차원이 높은 거다. 예수님은 한 분이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기준은 한 분이다. 이 기준을 따라 열두 사도가 따라간다. 질이 똑같다.
우리가 사도바울의 편지를 보면 하나님의 본질로 창조의 목적관이 들어있다. 사도바울의 교훈 속에는 예수님께서 표면적으로 말씀을 하지 않은 것도 있는데, 예수님의 교훈 속에는 사도바울의 이런 교훈도 다 들어있는 거다.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누가 목자의 양이냐? 순종하는 자가 목자의 양이다. 교인들이 목자로부터 하나님의 진리이치의 말씀을 듣고 쾌히 기뻐서 그 말씀에 순종을 한다면 이 성도는 주님의 양이다. 주님의 양은 순종으로 되는 거다. 주님을 쏙 빼닮은 실력이 당신의 양이다.
4절: ‘자기 양을 다 내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주님 안에서 교훈을 받고 의사단일이 된 후에 앞서 가면. 누가 앞서 가는 거냐?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교훈이 앞서 가면 양들이 따라간다. 양이 목자를 따라가는 것을 말한다. 목자에게서 하나님의 본질인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음성이 나오지 않으면 주님의 음성이 아니다. ‘예수 믿고 세상에서 부자가 되라’고 하는 것은 마귀의 음성이다. 마귀가 얼마든지 영광의 천사처럼 나타날 수 있다.
5절: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타인의 음성은 구원의 음성이 아니기 때문에,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진리본질의 음성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을 살리는 구원의 음성이 아니기 때문에 멸망이요 심판을 받게 하는 소리다. 주님의 양떼들에게 타인의 음성이란 천국복음에, 하나님의 본질에, 하나님의 의사단일에 맞추는 음성이 아닌 세상과 세상에 속한 것을 가르치는 게 마귀의 음성이요 타인의 음성이다. 이런 음성은 멸망의 소리요 심판을 받게 한다.
‘심판’이라고 할 때 눈으로 보이는 심판만 생각하지 말고 창조의 목적관에서 볼 때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지지 않게 하는 음성은 전부가 멸망이요, 사망이요, 심판이요, 영적인 면과는 관계가 없는 거다. 진리본질에 대한 신앙을 모르면 ‘아무 교회나 나가도 하나님이 계시지’ 하게 된다.
일반적으로도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때 ‘이 사람은 사기꾼이구나. 사람을 마음을 붕붕 띄우는구나’ 하는 것을 아는데 신앙은 영에 속한 것이라서 우리가 더 엄격히 구별 분별을 해야 한다. 영에 속한 것은 신령한 하나님의 본질을 가지고 질적으로 구별 분별을 해야 한다. 우리가 자기의 현실에서 ‘죽느냐 사느냐, 영원이냐 임시냐, 세상이냐 천국이냐?’ 하는 것을 잘못 선택하면 자기의 미래의 성장성이 죽게 된다. 자기가 미련해서 죽고, 미련한 가운데 알지 못해서 유혹 미혹을 받아서 죽게 된다. 이건 영적인 면에서 멸망이다.
소돔 고모라가 불바다가 된 것은 영적인 면에서 이미 완전히 망한 것을 의미한다. 영의 눈을 가지고 보면 소돔 고모라 성의 사람들은 노아홍수 때의 먹고 마시고 춤추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사상이 그대로 들어있는 건데, 이런 것을 눈으로 보이는 사창가만 생각하지 말아라. 교회가 물질화로 들어가면 그 사상은 소돔 고모라 사상과 똑같은 거다.
신앙이 영 주격으로 나가지 않으면 물질풍부 쪽으로 빠지게 된다. 이것은 넓은 길이니 여기에는 이룰구원이 없다. 그리고 신비적 체험으로 ‘보았네, 들었네, 꾸었네’ 하는 쪽으로 나가는 것은 귀신과 악령에게 잡힌 거다. 우리도 예수를 믿다 보면 환상도 볼 수 있고 꿈을 꿀 수도 있는 거지만 이런 것을 신앙의 주격으로 삼고 말을 하면 안 된다. 말씀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지 분위기를 조성을 해서 사람의 마음을 홀리게 해서 인간의 감정으로 종교적 열심을 내게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말씀에서 주님의 음성을 듣고 이 음성을 따라가야 하는데, 말씀에서 이룰구원의 이치와 도리를 깨닫는 게 주님의 음성이다. 성경을 들고 신비적인 체험이나 일반 도덕성을 강조하는 것은 세상적인 개념이라서 이런 교훈을 따르면 주님으로 닮아지지 않는다. 성경의 룻을 들고 시어머니를 공경하라고 한다면 이것은 계시가 아니라 일반개념이다. 계시를 밝혀야 신앙정신이 나오는 건데 성경에서 계시가 나오지 않으면 활동강조가 될 수밖에 없다. 이건 목자의 소리가 아니라 타인의 소리다. 예수님의 음성이 아니다. 종교적 업적강조, 부자가 되라는 소리, 덩어리를 키우자는 소리 등은 주님의 소리가 아닌 타인의 소리다. 전부는 사람이 병이 드는 소리요 사람을 죽게 만드는 멸망의 소리다.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참 양은 좁은 길 생명 길이 아닌 넓은 길은 안 따라간다. 넓은 길은 많은 사람이 다니는 길이라서 이 사람들은 소원 목적도 이런 저런 것이 많고, 하나님과의 의사단일도 아니다. 이것을 세상 속화된 교회로 보면 이런 교회는 활동강조가 많다. 이건 넓은 길이다. 본질 안에서 활동을 하는 것과, 넓은 길로 가는 사상에서 활동을 하는 것은 다르다. 하나님의 본질을 알고 정신 사상으로 들어가면 응용성이 많다.
6절: ‘예수께서 이 비유로 저희에게 말씀하셨으나 저희는 그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예수님은 양의 문이요, 그러면서 문지기도 된다. 또한 제사장도 되고, 제물도 된다. 질을 두고 말을 하는 거다.
1절에서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라고 했는데, 질적으로 볼 때 양의 문으로 들어가는 자가 양의 목자다. 3절에서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라고 했는데, 하늘의 문, 계시의 문, 성경을 깨닫게 하는 문을 연다.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라고 했는데, 참 양은 밖에 내어놔도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라온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말씀을 따르는 게 목자를 따르는 거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이런 말씀을 하셨는데 유대인들은 이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다. 이들에게 비유로 말씀을 하실 수밖에 없는 이유는 신령세계는 실상세계이지만 이 세상은 현상세계요, 가견적 세계요, 있다가 없어질 세계이기 때문에 천국에 대해 직접적으로 말씀을 하시면 못 알아듣기 때문이다. 하늘나라는 우리가 갈 곳이요 영원히 있는 실상세계다. 하나님은 영원히 안 죽는 실상적인 존재다. 하늘나라는 인간의 눈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에 육신의 눈에 보이는 물질세계를 만들어서 신령세계를 알게 한 거다. 그래서 이 세상은 천국을,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는 비유다.
성경은 전부가 비유요 비사인데, 하늘나라를 깨닫게 하려니 눈에 보이는 것을 들어서 말씀을 하시는 거다. 성령님께서는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자에게 역사를 하신다. 하늘나라의 것은 하나님의 신이 감화 감동을 시켜야 깨닫는 거다. 말씀을 듣고서 ‘아 그 세계가 그렇게 좋은가? 나도 가고 싶다’ 하는 마음을 가지면 하나님의 신의 감동으로 깨닫게 도우신다. 우리가 길을 갈 때 길을 묻는 사람에게 길을 가르쳐 주지 안 묻는 사람에게는 가르쳐 주지 않는 것과 같은 거다.
세상이 비유라고 하는 것은 없어지는 물질세계에 속하는 것을 가지고 와서 영원한 영적인 면을 깨닫게 한다는 면에서의 말이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것에는 진리이치를 깨닫는 영적인 이치가 들어있다. 그런데 믿는 사람이 세상을 보고 비유적으로 깨닫는 게 아니라 세상 것을 목적적으로 잡고 살게 되면 이 사람은 영적인 면에서 멸망이다.
7절-8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양의 문은 하나뿐이다. 하나님의 본질로 닮아지는 것도 하나밖에 없다.
기본적으로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과,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으로 영능의 실력으로 이룰구원으로 들어가는 문은 이 문 하나밖에 없다. 그래서 말씀을 들을 때는 ‘하나님의 본질의 말씀이냐. 아니냐?’ 하고 심사를 해야 한다. 말씀을 들을 때는 항상 ‘그런가, 아닌가?’ 하고 시험을 해 봐라. 본질이 아니면 아닌 거다. 본질로 바로 들어가 있다면 성령님의 역사가 들어가 있고 구원이 되어가는 거다. 이룰구원도 진리생명으로 된 정확한 예수 그리스도가 규격이다. 각 교회마다 가르치는 인도자들의 설교가 예수 그리스도의 규격에 맞아야 성도들이 하나님의 성품으로 온전해진다.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예수님보다 먼저 왔다는 게 무슨 말이냐? 예수님보다 먼저 태어났다는 말이냐, 아니면 이방종교가 예수보다 먼저 왔다는 말이냐? 한국에 불교가 기독교보다 먼저 들어왔다. 아니면 자기가 언제 태어났던 주님의 진리본질보다, 즉 하나님의 성품보다 다른 것을 먼저 받아들였다는 말이냐? 세 번째가 정답이다. 본질은 시간 안에 든 게 아니라서 언제 태어났던 자기가 하나님의 본질 안에 들어있다면 주님 안에 든 거다.
우리가 예수이름으로 맞아들인 게, 영접한 게, 예수를 믿는다고 한 게 과연 하나님의 본질에서 된 거냐? 아닌 게 많을 거다. 그러니 다 절도요 강도에 들어간다. 그래서 예수를 그렇게 오래 믿었는데 깨닫는 이치가 하나도 없는 거다. 교회에서 물질을 가지고 신앙을 따지면 강도가 된다. 강도나 절도는 도둑질하고 사람의 목숨을 빼앗아 간다. 사람의 시간성 노력성 투자성을 다 뺏어간다. 신앙적으로 말을 하면 열심히 노력을 해서 모은 재산을 교회에 바쳤는데도 말씀 깨달음으로 만들어진 게 하나도 없다면 다 빼앗기고 도적맞은 거다. 주님 앞에서 바로 한 것은 절대로 도적맞지 않는다.
마르다와 마리아가 예수님을 모시고 잔치를 했는데, 언니는 물질봉사를 했고 동생은 예수님 앞에서 말씀을 들었다. 주님이 이곳에 계신 것은 마리아의 정신 사상의 질에 주님이 계신다는 것을 말해주는 거다. 또 다른 곳에서의 마리아는 예수님께 향유를 부어서 장례준비를 했는데, 마리아의 향유의 향기가 오늘날 세계적으로 그 영감을 받은 사람들에게 진동을 하고 있다. 우리에게는 이게 이룰구원에서 실지요 실상이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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