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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10:24-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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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10장 24절-27절: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가로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케 하려나이까 그리스도여든 밝히 말하시오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어늘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24절-25절: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가로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케 하려나이까. 그리스도여든 밝히 말하시오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어늘.’ ‘그리스도여든 밝히 말씀하십시오.’ 예수님은 당신의 말로써 ‘내가 아무개다’ 라고 안 해도 언행심사 전부가 당신이 그리스도를 말씀하심이다.
예수님의 모든 이적과 기사와 표적과 사심과 말씀하심 전부는 당신이 그리스도이심을 말씀하고 있다. 지나간 모든 역사도, 다가오는 역사도 그리스도를 말씀하심이고, 세상의 모든 존재와 일들도 다 그리스도를 말씀하심이다. 예수께서 직접 하신 것은 직접적으로 말씀하심이고, 사건 환경을 통해 하신 것은 간접적으로 말씀하심이 된다.
우리가 사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깨닫는 이치로 들어가 있다. 그래서 몰라서 안 믿었다고 하는 것은 변명이 안 된다. 우리가 이 땅에서 먹고 마시고 일을 하는 것 전부에는 우리가 그리스도성을 입을 수 있는 게 들어있다. 우리는 그리스도라는 밭에 살고 있는 거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말씀의 이치를 깨달아서 자기 삶의 전반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살 수 있는 거다.
인간이라면 예수를 믿지 않더라도 구원이라는 밭에서, 그리스도라는 밭에서 그 혜택을 입고 살게 되어있다. 여기에서 탈출을 못한다. 즉 인간으로 만들어진 이상 구원으로 살아야 한다는 거다. 그런데 믿는 사람들이 성경에서 가르치는 이 바탕을 모른 채 부분적 행동적으로만 신앙생활을 하려고 한다. 그래서 이유와 변명이 많은 거다.
바다의 동식물이던 땅의 동식물이던 전부는 하나님의 자연은총의 혜택을 입고 있다. ‘공중에 나는 새를 봐라. 들의 백합화를 봐라’ 하는 것은 이것들도 하나님의 일반은총을 받고 있다는 거다. 뿐만 아니라 인간들도 하나님을 떠나서 살 수 없고,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의 혜택을 입고 있다. 더 나아가 모든 인간은 자기 일생의 전폭이 구원목적에 들어있다. 인간이면서 이걸 모르면 어리석게 살게 되고,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받게 된다.
세상의 모든 존재와 사건은 그리스도를 말씀하심이다. 그래서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사건 환경 가운데서 구원도리를 깨닫고 그리스도의 사람, 즉 성령의 사람으로 만들어져야 한다. 이렇게 되는 게 그리스도의 일이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이것을 다 밝히 드러내서 말씀을 하셨는데도 이들은 믿지를 않았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서 늘 말씀을 듣고 배운다면 영능의 실력적인 사람이 되는 게 당연한 거다. 말씀을 들을수록 성령의 사람으로,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신의 사람으로 만들어진다. 성령의 열매가 가득한 사람은 신의 사람이다. 이게 기독교요, 교회에서는 이것을 깨닫게 해야 한다. ‘예수 믿어서 세상에서 부자가 되라’ 라고 하는 것은 신앙이 아니다.
펄이나 더러운 곳에는 아무 것도 살지 않을 것 같으나 그런 곳을 좋아하는 생물은 그곳에서 자기가 살 수 있는 영양분을 먹고 번식을 하며 살아간다. 이것을 인간의 입장에서 생각을 하면 그런 곳에서 영양가를 빨아먹고 살아나오는 생명이 참으로 강인한 거다. 가치판단을 할 줄 아는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진리이치의 말씀을 먹는 우리는 이런 것을 보면서 깨닫고 사건 환경을 거치면서 영능의 실력으로 성장하고 올라가야 한다. 이렇게 살지 않고 맨날 사건 환경에 얻어맞아서 울고불고 한다면 이 사람은 사람 구실을 못한다. 성도의 구실이 안 된다. 생명은 자라게 되어있고, 성장하게 되어있고, 가지가 뻗어나가게 되어있다. 원리가 그렇다.
38절에서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찌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신대’ 라고 했는데, 예수님께서는 하늘로부터 오셨으니 당신의 모든 언행심사에는 하늘의 일이 들어있다. 즉 당신의 모든 언행심사는 우리를 예수님 당신처럼 신적 온전으로 만드는 거다. 따라서 모든 성경해석도 여기에 맞아야 한다.
모세가 지팡이를 들어서 티끌을 이로 만들었는데,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가 티끌에 있는 거냐, 모세의 지팡이에게 있는 거냐, 모세에게 있는 거냐? 하나님께 붙잡힌 모세라는 사람에게 있는 거다. 그래서 모세가 지팡이를 들고 홍해를 가르던, 바위를 치던, 아니면 막대기가 아닌 손가락으로 바위를 찔러도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는 거다. 그러니까 우리가 성경의 모든 이적 기사를 볼 때 무엇을 중심으로 봐야 하는 건지 알아야 한다.
도끼가 물에 빠지자 엘리사가 나뭇가지를 베어 물에 던져서 도끼로 떠오르게 했는데, 물에 던진 나뭇가지가 십자가를 말하는 거냐? 이렇게 말을 하는 것은 나뭇가지를 던진 엘리사를 중심으로 보는 게 아니라 나뭇가지를 중심으로 본 거다. 나뭇가지를 던지는 것에 중요성이 있다면 누가 이 나뭇가지를 던져도 이런 이적이 일어나야 한다. 그러나 그렇지를 않으니 사람이 문제인 거다. 즉 어떤 이적 기사가 나타나는 것은 그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문제다. 그러니까 ‘너도 나에게 붙잡히기만 하면 너에게도 그렇게 해 주고 싶다’ 라는 의미가 깔려 있는 거다.
막대기를 인간으로 비유한다면 막대기 자체는 아무 힘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잡고 쓰실 때는 비록 막대기에 불과하지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거다. 그러니까 막대기 자체에 능력이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무엇이든 잡고 역사를 하시면 역사가 되는 거다. 하나님의 능력은 당신이 줬다가 뺏어가기도 하는 거지 나에게서 솟아나는 게 아니다. 내 것이 아니다.
이런 것을 별 게 아닌 것으로 알면 안 된다. ‘어디에 목적을 두고 말을 하느냐?’에 따라 거짓이 되기도 하고, 참이 되기도 한다. 아예 처음부터 통째로 잘못된 것도 있지만 가다가 잘못 해석을 하게 되면 사람이 망하게 된다. 그러니 가르치는 자에게 책임이 큰 거고, 받는 자도 신경을 써야 한다. 설교를 잘못해서, 또는 잘못 들어서 하나님의 재앙을 받는다면 이런 귀신들린 짓이 어디 있느냐? 잘못된 교회에 나가다가는 자기의 영원이 통째로 날아간다. 인간 자기의 창조의 목적이 무목적이 되어버린다. 자기가 몰라서 이제까지 속아왔다면 남을 정죄하기 전에 자신부터다. ‘나는 예수 믿으면서 왜 몰랐던가?’ 라고 해야 한다.
성경에 함의 자손의 아들 가나안이 있는데, 노아의 저주성이 왜 함의 후손에게 내려갔느냐?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이방 땅에서 객이 되어 430년을 살게 된다고 했는데 왜 이 저주가 내려가는 거냐? 자기의 잘못으로 이런 재앙이 자기에게 내려지는 게 마음이 아프겠는지, 자기의 잘못으로 아들딸 후손들에게 이런 재앙이 내려가는 게 마음이 아프겠는지? ‘내 때에 안 받으니 됐다’ 하는 게 믿는 부모의 양심이냐? 오늘날 부모의 신앙이 본질이 아닌 이질로 걸어가고 있다면 그 재앙이 후손으로 내려가는 건데, 부모가 이것을 모르거나 ‘내 때 안 당하면 된다’ 라고 한다면 이건 히스기야의 사상이다.
일반적으로도 부모가 재산이 없이 살았고 못 배웠으면 자기의 소원성을 자식에서 넣어서 ‘너 만큼은’ 하는 게 있다. ‘너도 나처럼 살아라’ 하는 부모는 없다. 그래서 자식의 미래를 위해 부모가 얼마나 피땀 흘려 노력을 하느냐? 그런데 우리의 믿음이 죽어서 되는 것은 주님이 책임을 지는 거고, 이룰구원은 현세에서 되어지는 실질적인 얘기다. 그런데 말세가 될수록 교인들이 이 면에 대해 무딜 대로 무뎌질 거다.
신적 온전은 세상의 물질적인 조건과 요소로, 즉 학권 재권 세권 교권 종교사업권 종교제도권 안수권 종교업적권 등으로 되는 게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로만, 신의 역사로만, 성령님의 역사로만 되는 거다. 그러니 일반세상의 조건을 기준으로 믿음을 따지지 말아라. 타락된 사람일수록 하나님의 신적인 역사를 세상의 조건을 가지고 따진다. 물질을 가지고 사람의 믿음을 따지는 목사는 거짓 종이요, 이단자요, 마귀 짓이다.
26절-27절: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너희는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주님의 양이 아니면 뭘 안 믿는다? 예수님을 안 믿는다. 예수를 믿으면 예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을 영접한다. 인간창조의 목적을 받아들인다. 이걸 안 받아들인다면 이 사람은 예수를 안 믿는 거다.
예수님의 양이 아니면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진리이치를 듣지 않고, 예수님께서 하신 일의 깊이를 알려고 하지 않고, 또 그 깊은 것을 믿지도 않는다. 예수님은 성육신하시기 전에 선재적 그리스도로 계셨던 분이니까 예수님께서 도성인신으로 오신 것을 믿는다면 이 사람은 예수님께서 선재적 그리스도로 계셨던 것도 믿는 거다. 이 예수님께서는 우리로 성령의 열매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예수님처럼 온전하게 만들어지게 하는 일을 하신다.
목사님들은 그리스도의 이 일에 수종을 드는 것이니 교인들을 목사 자기처럼 만들어지게 하는 게 아니라 질적 성분적 성질적 본질적으로 주님처럼 만들어지게 하는 일을 해야 한다. 이런 면에서 교회 인도자들은 세례요한의 역할을 하는 거다. 이게 주님께 인도하는 거다. 성도가 목사를 따라가는 것은 목사라는 사람을 따르는 게 아니라 말씀이 좋아서 그 말씀 속의 주님을 염두에 두고 따르는 거다.
세상에서 유명하고 안수를 하면 병자가 낫고 하는 목사의 껍데기를 보고 이 목사를 따라가면 이용을 당하고 만다. 목사가 자신의 이런 것으로 교인들이 자기를 따르게 하면 거짓 종이다. 참 종은 이런 식으로 따르는 교인들을 밀어버린다. 목사의 입장에서는 이런 교인에게 정을 들이면 안 된다. 자칫 잘못하면 교인들의 마음이 정이라고 하는 사람의 따뜻함에 쏠리게 되어서 진리말씀을 도무지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다. 믿는 사람은 주님의 온전한 밝은 이치로, 주님 쪽으로 밀착이 되어야지 목사를 닮으면 안 된다. 예수를 닮아야 한다.
교회에서 하는 모든 일들이 그것을 통해 주님이 발견이 되도록 해야지 그런 것으로 인간의 마음을 도둑질하면 안 된다. 인간의 정실에 물이 들게 하는 것은 마음 도둑질이다. 신앙의 질이 이런 쪽으로 가게 하면 안 된다.
선재적 그리스도께서 성육신 예수로 오셨고, 성육신하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성령의 사람, 그리스도처럼 만들어지는 일을 하셨으니 믿는 우리가 이렇게 만들어지는 게 구원이다. 내가 이렇게 만들어지면 하나님께서 ‘너는 내 영광이다’ 라고 말씀을 하신다. ‘내가 주님을 따르며 주님처럼 만들어진 것은 주님의 역사입니다’ 하는 게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거지 ‘내가 부자가 된 게 주님이 은혜를 주셔서 된 것이니 감사합니다’ 라고 하는 것은 물질성을 두고 하는 감사이라서 이런 것을 가지고 아무리 ‘주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라고 해도 주님께서 받지 않으신다.
자타가 구원이 된 데서 나오는 감사의 행위가 아닌 물질성에서 나오는 감사는 하나님께 영광이 아니다. 주님께 한 번 영광이 된 영광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지만 세상으로 된 것은 없어진다. 없어지면 세상에서 기억한바 되지 않기 때문에 영광이 아니다. 계:에 창세 이후로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들은 짐승에게 경배한다고 했다. 본능적이고, 세상 물질적이고, 옛사람 부패성적이고, 마귀적인 것을 목적하여 예수를 믿게 되면 예수의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게 없기 때문에 이 사람은 예수님의 생명책이 기록이 되는 속성이 하나도 없구나.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예수님의 양은 구원의 음성을 듣는다. ‘세상에서 부자가 되자. 종교적인 사업을 이루자’ 하는 소리는 안 듣는다. 왜냐? 이런 것은 예수님의 음성이 아니니까. 이런 것을 믿고 따라가다가는 사기를 당한다. 남에게 속을 때는 ‘내가 왜 남에게 속아 넘어갈 정도로 어리석을까?’ 라고 하면서 자기를 잡고 안타까워 해야 한다. 예수님의 음성은 나를 온전의 힘으로 살게 하고, 영능화 실력화 되게 하고, 신령천국에서 예수님으로 실상화 된 것으로 영원히 살게 한다. 예수 믿으면서 이 영능의 실력을 무시하면 마귀의 가르침을 따르게 된다.
마귀의 가르침은 세상으로 들어가 있다. 세상으로 들어간 가르침을 따르면 이룰구원이 되지 않는다. 이렇게 믿는 것은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으로 오신 것을 부정하는 셈이다.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은 육신을 입은 우리로 하여금 영능의 실력을 이루는 이룰구원을 위한 모본을 보여주신 건데 이걸 무시하는 셈이 된다. 이건 마귀의 가르침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당신의 33년의 삶을 증거하는 거다. 당신의 이 땅에서의 삶 전부가 영생이요, 거룩이요, 신령한 것이요, 죽은 게 없고, 죽을 게 없는 삶을 살았다는 것을 말하는 거다. 예수님의 양이 아니면 예수님의 말씀을 안 믿는다고 하는 것은 앞에서 말한 예수님의 우리의 구원을 위한 삶을 안 믿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부활도 믿고 천국도 믿는데 현재에서 이 죽을 것이 죽지 않을 것에 삼킨바 되는 이룰구원을 안 믿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믿음을 놓고 통분히 여기셨다. 통분히 여기셨다는 것은 책망성이 들어있는 울분이다. ‘너희가 지금까지 나와 사겼는데 그걸 모르느냐?’ 라고 하는 거다.
예수님께서 부활도 보여줬고, 현실에서 안 죽는 진리에 삼킨바 되는 이치를 다 밝혀놨는데 오늘날 예수 믿는 사람들이 왜 세상을 쫓아가며 심판 받고 형벌 받을 짓는 하는 거냐? 세상에 욕심을 품지 않고 이룰구원으로 사는 사람은 물질적으로 좀 못 살더라도 마음이 평안하다. 그리고 현실의 삶이 어렵더라도 원망으로 들어가지 않고 그것을 믿음으로 능히 이기지 못하는 자신의 영능의 실력 면을 안타깝게 여기고 이 면의 실력을 보강해 나간다.
예수님의 양이 아니면 예수님의 말씀을 안 듣는데, 말씀을 안 듣는다는 게 무슨 뜻이냐? ‘예수님의 존재성을 믿는다. 안 믿는다’ 하는 것도 있겠지만 믿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니, 자기의 현실에서 이 죽을 것이 죽지 않을 것에 삼킨바 되는 이치를 안 믿는다는 거다. 즉 자기의 현실에서 예수의 사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거다. 자기의 생애가 통째로 사망계로 삼켜져 들어가는 삶을 산다는 거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모세로 통해 주신 성경을 가지고 여호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 이 성경을 예수님께서 주신 건데 그 분을 믿지 않았다. 성경은 한 마디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되라는 건데, 지금도 예수 믿는 사람들이 신구약 성경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되는 것을 안 믿고 있다. 온 세상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되는 구원을 말하고 있는데도 이것을 안 믿고 있다. 이것을 믿으면 세상과 천국이, 밝음과 어두움이, 생명과 사망이, 고저와 장단이, 성공과 실패가 분명히 구별이 되는데 안 믿으니 구별이 안 된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되라는 게 본인 자신에게 하는 말씀인데 이 말이 남에게 하는 말처럼 들리고 자기 주관대로 살려고 하는 것은 말씀을 인격적으로 믿지 않는 거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몰라서 고통을 당하고, 어리석어서 고통을 당하고, 자기의 고집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마음이 좁아서 고통을 당하고, 게을러서 고통을 당하고, 교만하여 고통을 당하면서도 그 이유를 모른다. 사람이 이렇게 살면 자기의 정신과 소원과 목적이 세상이라고 하는 방편을 들어서 야금야금 너를 잡아먹는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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