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꽃씨와 도둑>은 최용우 개인 책방의 이름입니다. 이곳은 최용우가 읽은 책의 기록을 남기는 공간입니다. 최용우 책방 구경하기 클릭! |
프란체스코의 새들
새벽 명상을 하다 문득 天上에선 듯 쟁쟁하게 울려 오는
새소리를 들었다 가는귀먹은 늙은 하느님,
쿨쿨 코골며 새벽 단잠을 즐기는 젊은 것들이야 듣건 말건
청정한 새벽 숲속을 울리는
소쩍새, 뻐꾸기, 찌르레기 구슬픈 울음 소리······ 그 사이로
가끔씩 웬, 맑은 은방울 굴리는 새소리도 들렸다
(저 새소리가 세상의 아픈 이들에게 藥이······?)
오, 그렇다면 올빼미 박쥐 굼벵이 등
어둠 속에서 퍼드덕거리며 꿈틀대는 진귀한 神藥 들을
어렵사리 구해다 먹고도
肝에 달라붙은 암덩어리를 어쩌지 못해
싸리 가지처럼 빼빼 말라 죽어가는
그녀에게, 나는 왜, 저 은방울 굴리는 목소리로
차라리 그대 한 마리 새가 되어 푸드득 날아다오,
말해주지 못하고 새벽마다
징징 지렁이 울음 소릴 흉내내고 있는 걸까
아아, 그러나 나는
저 아시시의 聖者처럼 지상의 병든 새들을 불러
드넓은 가슴에 품어안지 못해도
내 얇은 귓바퀴에 소리의 화살이 되어 정겹게 날아 드는
황홀한 새소리에 취해
어둡고 음울한 지렁이 울음 소리를 잠시 거둔
이 청정한 새벽 숲속
---
病
병이여, 함께 살자
허리 끊어놓을 듯 아픔을 보채는 길 위의 노동,
魔가 아니라면
길에서 얻은 병을 물리치지 않기로 한다
잠 아니 오는 밤의 위안부
창녀여,
낡은 테이프에서 흐르는 실크로드를 따라
얼마쯤 걷다 지친 낙타,
귓속을 가득 채운 모래를 털어내고
테이프를 갈아끼운다 문득
잔물결 흔들며
흙피리 소리 굽이치는 大黃河에 엎디어 잠시
목을 축인다 아아, 그래도
목이 마르다......
누가 그따위 말을 지껄였는지 어렴풋하지만
사람은 혼자가 아니다······ 난
요즘 이름도 성도 모르는 바이러스랑
벗해 산다 苦木 껍질처럼 쓰디쓴
竹鹽 한 숟가락 입 안에 털어넣고
부석부석한 얼굴 가득 핀 熱꽃 대황하에 씻으며
---
천국엔 아라비아 숫자가 없다
한여름의 시청 광장
마천루 위에 까마득히 떠 있는
광고탑, 뜨겁게 달아오른 아라비아 숫자들이
불인두처럼 이글이글 내 몸에 닿아
쉬 지워지지 않을 깊은 文身을 아로새긴다
아, 악!
벌려진 입을
나는 다물지 못한다 순간,
내 내장을 거꾸로 훑으며 구토하듯 목구멍으로
쏟아져나온 불, 불타는 아라비아 숫자들이
너희들 몸에도 깊은 文身을 아로새긴다
전염성이 강한 모양이다
지옥에서 활활 타오르는 결핍처럼 몹시
전염성이 강한 모양이다
성적 부진을 비관해 빨랫줄에 목매 죽은
국민학교 4학년 그 어린것도
혜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허영게 까뒤집힌 눈동자에
아라비아 숫자들이 불거져 있었을까
오, 결핍은
작렬하는 사막에 솟는 불기둥인 양
아무데서나 불타오르고
터번도 두르지 않은 아라비아 숫자들이
태양을 삼킨 채
광고탑 위에서 이글거리고 있다
---
이 좀약으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시외버스를 타려고 상봉터미널로 가다보면
병든 內臟들을 와장창 쏟아 산더미처럼 부려놓은
폐차장 옆을 지나게 된다
마침 황색 바탕의 레커 한 대가
마구 꾸겨진 셀로판지 같은 폐차를 등에 업고
빵빵거리며 비좁은
폐차장 입구로 들어가는 것이 보인다, 만일 내가
온갖 쇠붙이를 쏠아먹고
능히 邪氣를 쫓는다는
상상의 짐승 불가사리라도 될 수 있다면······
세상에 병이
있으면 약도 있다는데 신선처럼 은둔해 산다는
저 神藥의 명의라도 만나볼까, 아니면
神通한 비법이 쓰인
무슨 서책이라도······ 오만잡념을 되씹으며
문득 열린 푸른 신호등을 따라
붐비는 차도를 건너
막 시외버스를 올라타는데,
맨날 마주치는 키가 작달막한 가죽점퍼 사내가
쿵, 쿵, 큰기침을 서너 번 하고 예의 쉰 목소리로
유창한 약선전을 시작한다
이 좀약으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
연등연등연등을 후후, 불어 끄고
한밤중에도 깊이 잠들지 못한다
쉴 새 없이 쏟아져 흐르는 자동차들의 여울물 소리
假睡眠 속으로 밀려들어
한밤중이면 내 몸은 곧 수인산업도로가 된다
주룩주룩 궂은비 내리는 밤,
갑작스레 울려오는 앰뷸런스의 소름돋는
비명, 흠뻑 비에 젖은 수인산업도로는
놀란 눈망울 비비고 일어나
창문 밖 번들거리는 제 몸뚱어릴 내려다본다
야심한 시각에도 여전히 길은 비좁다 내 몸 속에
지하 터널이라도 뚫어야 할까보다
아직, 불이 켜져 있는 마루방,
그녀의 副業도 잠들지 못했나보다 손톱 밑이 터지는
종이 연등 만들기, 부처님 오신 날 가로에 줄줄이 매달
저 연등으로 내 몸 속 지하 터널을 불 밝힐 수 있을까
불 밝힌 연등연등연등을 후후, 불어 끄고
그 환한 잠의 뿌리에 당을 수 있을까
---
괄태충
향수병자들의 마음엔 둥근 달 떠올라,
달뜬 마음의 지도 위에 그려진 고향을 찾아가는데,
산업도로 초입 부터 차량들이 붐빈다
언제부터 이 지경이 되었던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는 무쇠 덩어리의 사슬에
손 발이 꽁꽁 묶인 저 노예들의 행렬......
뇌 없는 괄태충들처럼 꿈틀, 꿈틀거리고 있다
---
푸른 콩잎
지루한 장마 끝,
된장독에 들끓는 구더기떼를 어쩌지 못해
전전긍긍하던 아내는
강 건너 사는 노파에게 들었다며
담장에 올린
푸른 강낭콩잎을 따다
장독 속에 가지런히 깔아 덮었다
사흘쯤 지났을까
장독 뚜껑을 열어젖힌 아내의 눈빛을 따라
장독 속을 들여다보니
평평하게 깔린 콩잎 위엔
무수히 꼬물거리던 구더기떼가 기어올라와
마른 콩깍지처럼 몸을 꾸부려
뻗어 있었다
오랫동안 곪은 종기를 말끔히 도려낸 듯
개운한 낯빛으로
죽은 구더기떼와 함께 콩잎을 걷어내는 아내에게
불쑥, 나는 묻고 싶었다
온통 곰팡이 꽃핀
눅눅한 내 마음 한구석
들끓는 욕망의 구더기떼를 걷어내는 데도
푸른 콩잎이 可하냐고-
---
허 물
여름내 피울음을 쏟아낼 하얀 모시적삼 같은
매미 껍질 하나,
늙은 대추나무 밑둥에 매달려 하늘거린다
기어이 허물을 벗었구나!
실바람만 불어와도 훅 날아가버릴 것 같은
흔적의 가벼움, 저것이
내가 벗어야 할 허물을 들추는구나!
그렇다면,
파란 가을 하늘에 하늘하늘 떠다니는
투명한 고추잠자리 겹눈들은
그 겹눈으로 무얼 보기는 보는 걸까?
---
도둑괭이
손바닥만한 터밭에 무우씨를 넣다
소나기를 만나
허겁지겁 종탑 그늘에 들어 잠시 비를 피하는데,
맨날 집 주위를 쏘다니던
도둑괭이 한 마리
예배당 창고 어둑한 처마 밑에
털끝 한 올 요동치 않고 낮은포복 자세로
뭘 노려보고 있다
여보, 저어기 쥐구멍이 있나봐요
소곤거리듯 아내가 일러준다
허허, 저것이 날고기를 탐해 벌써 禪定에 들었군!
문득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니
까마득하니 鐘樓에 매달린 무쇠 덩어리가
어찔, 어찔
구름바다 위를 내달리고 있었다
---
아침 산맥
흰 눈발을 짚삿갓처럼 쓴 첩첩한 봉우리들을 거느린,
아침 산맥의 굽이치는 띠가 눈부시게 밝다.
저 흰 밝음을 가슴 깊이 들이마시면
누군들 거듭 태어나지 않으랴.
눈보라 몹시 치던 날, 오죽헌에서 본,
서걱이는 烏竹들에 둘러싸인
신사임당의 자수 병풍 속의 투명한 벌레들도
기어이 병풍을 뚫고 저 아침 산맥 속으로 날아가,
어린 연듯빛 봄을 예비할 것만 같다
---
문학과 지성 시인선129
프란체스코의 새들
지은이/ 고진하
펴낸곳/ 문학과 자성사
펴낸때/1993.5.1초판
---
고진하
- 1953년 강원도 영월 출생.
- 감리교신학대학 졸업.
- 1987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
- 시집으로 『지금 남은 자들의 골짜기엔』(1990), 『프란체스코의 새들』(1993), 『우주 배꼽』(1997), 『얼음 수도원』(2001), 『수탉』(2005), 『거룩한 낭비』(2011) , 『호랑나비 돛배』(2012), 『꽃 먹는 소』(2013), 『명랑의 둘레』(2015), 『야생의 위로』(2020) 등이 있음.
- 김달진문학상(1997), 강원작가상(2003), 영랑시문학상(2016) 수상.
- 숭실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겸임교수.
- 원주 한살림교회 목사.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