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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 성경본문 : | 요일4:7-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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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 차옥숭 원장 |
| 참고 : | 새길교회 |
오늘은 제 이야기를 조금 할까 합니다. 얼마 전 저에게서 강의를 듣는 목사 한 분이 제 방에 찾아 왔습니다. 그 동안 다섯 강좌를 저에게 들었고 많은 영향을 받았다며 고맙다고 했습니다. 특히 엑카르트 강의를 들으면서 모든 것을 놓아버리라는 이야기, 내 영혼의 근저와 하느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모든 이기적인 욕망을 버리라는 이야기를 듣고서, 그렇게 하기 위해 그 동안 많은 애를 섰다는 것입니다. 편안한 차도, 지금 목회하고 있는 교회를 더 크게 키우려는 욕심도 모두 버릴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금년에 졸업을 하고 6개월 실습을 받고 인도 선교사로 떠난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 목사가 제 방을 떠나고 난 후에, 저는 그 동안 잊고 살았던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너는 뭐지? 너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지? 그 목사는 가진 것 전부는 아니어도, 귀중하게 생각하던 많은 것들을 놓아버리고 열악한 조건인 인도를 택해서 선교사로 떠나는데, 정작 학생들에게 놓아버리라고 열심히 강의한 너는 무엇을 놓아버렸지? 가질 것 다가지고 누릴 것 다 누리면서...?" 하는 데 생각에 미치자 저는 괴로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강의에 임할 때는 저는 나름대로 진실 되게 학생들에게 임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그날 이후 "실천 곧 '행함'이 뒤따르지 않은 앎이라고 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 걸까?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진실을 단지 전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라는 말인가?" 등등 고통스런 질문이 이어졌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그래 나를 들여다보자 철저하게."
저는 오랫동안 저를 잊고 살았습니다. 눈에 보이는 나, 위장된 나, 겉치레된 나를 '나'라고 생각하면서 살았습니다. 편안하게 살았습니다. 기도할 때도 "주님의 평화! 주님의 사랑!"을 마음속으로 되 뇌이면서, 그 평화와 그 사랑 속에 빠져서 행복해 했습니다. 주변의 사람들에게 미안할 정도로 "나는 왜 이렇게 행복할까?" 하면서 말입니다. 주변의 불행한 사람을 보면, "주님의 사랑과 평화 속으로 왜 들어오지 못하는 걸까?" 하고 말입니다.
저를 들여다보면서 그것은 교만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를 들여다보면서 저의 추한 모습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애써 외면해 왔던, '내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나'를 보면서 괴로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욕심 많은 나, 아름다운 것들을 그저 고마움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집착했던 나 등등, 내 추한 모습이 저를 괴롭혔습니다. 한동안은 아침에 눈을 뜨면 가슴이 너무나 아프다고 느꼈고,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습니다.
"'주님의 사랑, 주님의 평화' 하면서 비겁하게 도망치지 말자. 나를 있는 그대로 보자."고 생각하고서 틈만 나면 명상을 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너무 힘이 들어서, 자꾸 도망쳐 나갈 또 다른 출로를 찾고 있는 나를 발견했습니다. "언제는 네가 죄인이 아니었느냐? 너는 원래 죄인이었어. 그런 너, 죄인인, 상처투성이인 너, 그대로를 그분은 사랑하셔" 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어느 날 아침 아픔으로 눈을 뜨던 제가 "아 모든 것은 주님의 은총이야!" 하면서 편안하게 눈을 뜨고 있었습니다. 어느 사이 괴로움으로부터 도망쳐 나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상으로 돌아와 평소와 다름없이 즐겁게 감사하면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부족한 저에게 가슴 뭉클한 감동과 함께 하느님의 사랑을 헤아릴 수 있게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제가 강의하는 학교에는 가난한 이들도 많고 상처받은 이들도 많습니다. 그 중에 한 친구를 소개하겠습니다. 이 친구는 발을 몹시 접니다. 어려서 소아마비를 앓아서, 보조 장치가 없으면 하체를 전혀 사용하지 못합니다. 보조 장치를 하고서야 목발을 짚고 다닐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친구를 만나고 난 후에는, 제가 학교에서 완전히 퇴근하지 않는 한 제방에 불을 끄지 않습니다. "교수님 멀리서 보아도 교수님 방에 불이 켜져 있으면 따뜻하게 느껴져요." 하는 말이 가슴에 박혔기 때문입니다.
이 친구는 사회복지학부 학생이었는데, 전북대학을 졸업한 뒤 우리 학교에 입학한 학생이었습니다. 처음 저를 만났을 때는 자기는 별로 살고 싶은 생각이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아무런 희망이 없다고... 저는 어떤 도움도 줄 수 없어서 마음만 아파했는데, 요즈음에는 오히려 제가 그 친구로부터 많은 감동을 받습니다. 그 친구는 우리 학교를 졸업하고 전북대학에서 심리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학교에서 제활 심리학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강의가 끝나고 나면 제 방에 찾아와서 차를 마시고 가곤 합니다. 그 친구가 들려준 이야기를 여러분에게 소개하고자 합니다.
"저는 그 동안 많이 불행하다고 생각했어요. 공부를 잘했는데, 의대나 약대를 가고 싶었지만 제 신체조건 때문에 포기해야 했고, 그 일을 계기로 제가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앞으로 얼마나 많은 장애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하는 생각에 세상이 두렵고 싫어졌어요. 그러나 이제는 인간의 삶은, 인간의 존재는 그 어떤 것과도 비교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소중한 것임을 깨닫게 되었어요. 저는 장애인들을 많이 만나요. 어떤 이는 밥을 먹을 때도 머리가 흔들려서, 밥을 떠 먹이는 사람이 한 손으로 그 사람 이마를 고정시키고 밥을 먹이지 않으면 안 돼요. 그런 상황에 있으면서도 그 사람은 무엇인가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어해요. 저는 그들을 대하면서 그냥 생명을 지니고 사는 그 자체로도, 묵묵히 살아내고 있는 그 자체로도, 아니 이 세상의 한 공간을 채우고 있는 그 자체로도 모두 의미가 있고 소중한 거라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인간의 삶은 삶의 형태에 상관없이 모두 의미가 있고 존중되어야 하는 거라고요. 저의 부족한 이 순간의 이 삶 역시 이 자체로서 의미 있고 소중하고 존중되어야 했던 삶이라는 것을요. 굴러다니는 돌 하나, 돌 틈에 끼인 잡초 하나까지도 모두 이 세상을 조화롭게 하는 꼭 필요한 것들이라고요. 그래서 그 동안에는 조금만 힘이 들어도 투정을 많이 부렸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아요. 그 모든 일들이 너무도 소중한 것들임을 알게 되었지요. 이제는 어떤 거창한 미래의 모습을 꿈꾸지 않아요. 소중한 순간 순간들이 바로 삶 그 자체임을, 이 순간이 행복한 삶임을 느끼고 감사할 줄 알게 되었어요."
저는 이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제 고민이나 아픔들이 얼마나 사치스러운 것인가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부끄러웠지요. 순간 순간의 삶을 진솔하게 있는 그대로 감사하며 받아들일 줄 아는 그 친구의 삶의 태도에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이 친구 이야기를 조금 더 계속하겠습니다.
"교수님 저 남자 친구 생겼어요. 결혼은 용기가 없어 생각하지 않아요. 참 좋은 친구에요. 그 친구 때문에 솔직히 제 삶이 많이 긍정적으로 되었어요. 어느 날 제 남자 친구가 제 모습을 비디오로 담아 왔어요. 저는 움직이는 제 모습을 처음 보았어요. 저는 제가 비록 목발은 짚고 다니지만 키도 적당히 크고 또박 또박 천천히 곧바로 멋있게 잘 걸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실제로 제 모습을 보니 얼마나 보기 싫은지요. 엉거주춤하게 삐딱하게 걷는 제 모습이 너무 싫었어요. 그래서 남자 친구에게 '이게 나야? 정말 싫어' 했지요. 그러자 그 친구가 '이 바보야 나는 이런 네 모습도 다 사랑해' 라고 했어요."
저는 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감동으로 들으면서 그 친구가 정말 아름다운 청년을 만난 것에 감사하면서, 하느님의 마음을 떠올렸습니다. 허물투성이의 나,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주시고 사랑해 주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말입니다. 아니 당신 자신을 온전히 우리에게 다 내어주시고도 더 줄 것이 없어서 마음 아파하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말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성서의 말씀, "어느 때나 하느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 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하셨던 요한서신의 말씀을 다시 한번 묵상하면서, 끝으로 우리 교회에 나오는 정상돈 형제가 제게 메일로 보내주신 몇 편의 시 중에 한 편을 여러분께 소개하면서 오늘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태초에>라는 제목의 시입니다.
태초에
태초에 사랑이 있었다.
그 사랑 숨결로 흙에 스며 사람이 되고
님 보시기에 좋았던 그 사람
유혹과 죄악이 저를 이김에
님께서 한탄하시더니 눈물이 온 땅을 삼키더라.
그런 후에도 짓느니 죄뿐인 사람들의
악한 소리가 하늘에 닿았으나
시작이 사랑이었던 것처럼 끝도 사랑이라
그 사람들 죽을 자리에 님께서 대신 계셨다.
이날까지 나 또한 짓는 게 오직 죄뿐이니
언제나 靈의 사람이 되어
사랑을 회복할 수 있을까 …
언제나 세상의 종노릇 그만두고
님의 사람이 되어
님께서 고통 받던 자리에 대신 설 수 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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