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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본문 : | 요일4:19-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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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 김기동 자매 |
| 참고 : | 새길교회 2007.2.11 주일설교 |
제목: 하나님의 감탄: '보라! 매우 좋다.
본문: 창세기 1:26-31, 2:22-23, 요한1서 4:19-20
설교: 김기동 자매 (새길교회 2007.2.11 주일설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우리 말 성서의 첫 일성에는 히브리어 원문과 약간의 뉘앙스 차이가 들어 있습니다. ‘태초’라는 표현은 처음은 처음이되, 무엇보다도 앞선 것이라는 뉘앙스를 갖고 있는데 히브리어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말로는 ‘태초’라 번역하였고 영어로는 항상 이 구절에 정관사가 붙지요. ‘In the Beginning'이라고요. 그런데 원문에는 정관사가 없습니다. 정확히 번역을 한다면 ‘한 처음에’라는 것이지요.
‘태초’와 ‘한 처음’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태초’라는 표현이 절대적이고, 명시적인 바로 그 첫 시간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라면, 정관사 없는 ‘한 처음’은 상대적인 의미를 내포합니다. 어쩌면 그것은 ‘어느 날’ 내지 ‘그 날’이라는 것과 다를 바 없을 겁니다. ‘태초’라는 표현을 가진 문장이 하나님의 창조 행위의 절대적 의미, 즉 하나님이 창조하시기 전에는 아무 것도 없다라는 것으로까지 나아가는 것이라면, ‘한 처음’이라는 표현은 그저 하나님이 창조하시는 날을 처음으로 규정하자라는 일종의 합의 같은 것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까지 합니다.
이 문장이 함의하는 질문은 태초의 사건에 대한 것이 아니라, 천지에 실존하는 존재들의 근원에 대한 것입니다. 존재의 근원에 대한 물음은 사고의 확장의 결과이며 현실을 해석하기 위한 질문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존재의 목적에 대한 물음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사고의 분화를 아직 경험하지 못한 아이들은 자기가 처한 현실에 대해서 그저 ‘좋다’ ‘싫다’로 표현하지만 좀 더 큰 청소년들은 이렇게 질문하지요. “엄마 아빠는 왜 날 낳은 거야!” 서로 싸우는 부부에게 이렇게 충고하지요. 서로 좋았을 때, 처음 사랑할 때를 기억해 보라고요.
창조에 대한 일성이 그 시간적 의미 때문에 성서의 첫 머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그 신앙은 이스라엘이 처음부터 갖고 있던 것은 아닙니다. 애굽의 노예생활에서 해방시켜 주신 분이 바로 야웨 하나님이라는 것이 이스라엘민족 신앙의 출발이었습니다. 그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계명을 주신 분이고, 광야에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신 분이고, 마침내 가나안 땅을 주시어 거기에 정착케 하고 왕국을 건설하는 은혜를 허락하신 분이라고 계속 연이어서 고백됩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나라가 망한 것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국가의 멸망은 곧 신적 의미로 해석할 때 그 민족 신의 패배를 뜻합니다. 야웨는 이스라엘이 믿듯이 만군의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빌론에 끌려간 포로 생활에서 이스라엘이 선택할 길은 이제 두 가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웨의 구원하심을 기다릴 것인가, 아니면 바빌론의 더 강력한 승리의 신을 믿을 것인가? 그런데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멸망을 신의 패배로 해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자신들의 잘못 때문이라는 고백과 함께 야웨 하나님은 한 민족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천지를 지으시고 모든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이스라엘의 창조신앙은 고통과 패배의 현실, 구원에 대한 믿음을 처음이라는 시간으로 확장시킨 결과라는 것입니다. 구원은 단순히 미래의 사건인 것이 아니라, ‘회복’(restoration), 즉 처음의 그 아름답고 평화로운 모습으로의 복귀라는 실재가 된 것입니다. 조화, 질서, 평화를 일그러뜨리는 인간의 악과 죄성은 ‘회복’될 그 실재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창조의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절대 그런 부조화, 무질서, 싸움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창조의 하나님은 무엇을 원하셨을까요?
저는 오늘 여러분과 창조 이야기를 생동감 있게, 하나의 연극을 보는 양 읽어보려 합니다. 창조 이야기에서의 주인공은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모노로그의 성격이 강합니다. 물론 인간을 만들면서 ‘우리의 형상으로’라는 일인칭 복수가 다른 '신들‘이 있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해도 오직 말하는 자는 엘로힘, 하나님뿐입니다. 2장에서는 그 이름이 야웨로 바뀌기에 사람들은 그 신학과 문맥의 차이를 들어 전혀 다른 이야기라고들 하지만 거기서도 마찬가지로 야웨가 홀로 창조의 주인공이 됩니다. 1장에서는 주로 ’입‘으로 창조하지만 2장에서는 ’손‘으로 만든다는 차이가 있다는 정도입니다.
1절은 이 이야기에서 표제와 같습니다. 이것은 처음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이야기라고 밝히고 있는 것이지요. 2절의 내용이 창조 이전의 실제냐 그렇지 않느냐는 논란은 여기서 접어놓겠습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고대 세계의 사고방식을 오늘날로 다 해석한다는 것이 꼭 최선인 것은 아니라는 정도로만 말하겠습니다.
1장에서 하나님은 6일 동안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것으로 나옵니다. 빛으로부터 마지막 사람에 이르기까지, 천지를 채우는 모든 실재들은 그 ‘종류대로’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그 창조의 도구는 ‘말’입니다.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있었고, 물한테 ‘한 곳에 모이라’ 하니까 바다가 되고 뭍은 마른 땅이 됩니다.
6일 동안 하나님은 참 신났을 것 같습니다. 말하는 대로 되잖아요. 의도하는 대로 다 되잖아요. 있으라 하면, 있고, 종류대로 되라 하면 다 되고, 얼마나 좋아요. 그 신나는 하나님의 모습은 어쩌면 점점 그의 말이 많아지고 있다는 것에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뭐 빛은 빛일 뿐 어떤 다른 종류가 없고, 물고기, 짐승, 식물 등은 그 종류가 많고 복잡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하는 과학적인 근거와는 상관없이, 한마디 말로서 그냥 ‘짐승 있으라’ 하면 될 것을 하나님은 굳이 일일이 열거하면서 말하고 있다는 것은 상상컨대 어쩌면 점점 감정이 고조되는 하나님을 그려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성서기자는 하나님의 신나는 마음을 잘 드러내는 말 즉 창조 작품을 보고 스스로 감탄하시는 하나님의 탄성의 소리를 마지막 말을 제외하곤 모두 간접화법으로 서술해 놓았습니다. 하나님은 총 7번이나 좋다라고 말합니다. 4절(빛), 10절(땅과 바다를 가름, 셋째날), 12절(땅에 만물이 나게 하심: 셋째날), 18절(하늘에 빛을 내는 것들을 두심. 넷째날), 21절(바다, 하늘의 생물 창조, 다섯째날, +복을 주심), 25(짐승, 여섯째날), 31절(마지막말, 여섯째날) 마지막 감탄은 이렇습니다. ‘보라, 매우 좋다’ - ‘봐 너무 좋아!!!!’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이유는 너무 신학적으로 따질 필요 없이 그냥 ‘좋아서’라고 말하면 어떨까요? 인간적으로 말하면, 지루한 일상을 벗어나 새로운 무엇인가를 찾고자 하는 것에서 시작했다고 하면 너무 불경할까요? 자기하고 비슷비슷한 신들과의 생활을 벗어나 무엇인가 새로운 상대자를 찾고 그 관계에서의 즐거움을 만끽하기 위함이 이 ‘좋아’라는 감탄사에 들어있는 것이 아니냐고 질문할 수는 없을까요?
감탄하시는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은 조금 특별합니다. 다른 생물들은 그저 ‘그 종류대로’라고 말하는데 인간을 만드실 때는 조금 더 공을 들입니다. 마치 신들의 회의를 연상시키는 말이 선행합니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가 누구인지 따질 필요는 없고, 중요한 것은 인간은 그저 그 종류대로 생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조금은 특별한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특별히 다른 피조물들을 돌보는 책임이 주어집니다. 하나님은 이제 제대로 돌아가는 세상을 인간에게 맡겨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을 닮은 인간을 자신의 상대자로 세우신 것입니다.
2장에서의 창조 이야기는 하나님은 오직 인간에게 관심을 보여주고 있음을 말합니다. 흙으로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은 혼자 있는 것이 안타까워서 그에 걸맞는 짝을 만들어 주시는 자상한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아마도 이건 하나님의 경험을 밑바탕에 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어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할 때 ‘외로움’이라는 감정은 하나님의 영역은 아닐 겁니다. 외로움은 특히 경험해 보지 않고는 이해하기 힘든 감정입니다. 아무리 전지하신 하나님이라 해도 ‘내가 있잖냐, 너랑 놀아줄 동물들을 내가 만들어 주었잖냐’라고 한다면 인간은 아마 뭐라 딱히 설명할 수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이 요구하기도 전에 그 외로움을 간파하고 상대자를 만들어 줍니다. 요즈음은 동물들과 함께 외로움을 달래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들이 하는 말이 뭔지 아세요? 말이 통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배반할 수도 있는데 동물은 절대 배반하지 않는다는 것이에요.
하나님의 상대자가 되어 그 감탄의 대상이 되었던 인간이 그 짝을 처음 본 순간 처음으로 말을 내뱉습니다. ‘야! 내 뼈 중에 뼈, 내 살 중에 살이다.’ 자기 갈비뼈에서 왔기 때문에요? 아니지요. 이 말은 이성을 보고 첫 눈에 반한 자의 탄성입니다. 하나님이 마치 세상을 보고 ‘아 너무 좋다’라고 한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아 너무 좋다’ 하나님은 이 감탄과 함께 그의 사랑을 시작하였습니다. 특히 그 사랑은 그의 상대자인 아담에게 쏟아졌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신 뒤, 저 하늘 높이 초월적 존재로 남아계시지 않고 계속 인간을 그 상대자로 찾으십니다. 에덴동산에서 거닐면서 아담을 찾으시는 하나님, 위엄으로 가득찬 분이라기보다는 어쩌면 ‘아담 어딨니, 나랑 놀자’라는 아이의 따뜻한 마음의 표현일 지도 모릅니다. 하지 말라는 짓을 한 아담과 하와에 대한 질책을 넘어서 하나님은 다시 사랑을 시작합니다. 벌거벗어서 두려워하고 부끄러워하는 둘에게 옷을 입히심으로써 물가에 내놓은 아이들을 지켜보고 밤늦게 돌아오지 않는 자식을 기다리는 어머니의 사랑을 시작합니다. 자신의 명령을 지키지 않은 인간을 내치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찾고, 매를 들어 바른 길로 자식을 인도하려는 부모의 가슴 아픈 사랑을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뜻은 사랑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아 너무 좋다’라는 하나님의 감탄은 사랑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였습니다.
하나님이 ‘아 너무 좋다’라는 감탄으로 사랑을 시작했다면, 인간은 ‘아, 내 뼈 중에 뼈, 살 중에 살이다’라는 감탄으로 그 사랑을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상대자로서 인간의 역할은 이 감탄과 더불어 상대하는 모든 것에 대한 사랑입니다. 외면하고 하나님을 멸시하는 인간을 향하여 신실한 그의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셨던 하나님을 닮아, 인간을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하는 것, 그것이 인간의 역할이요, 인간의 존재 목적입니다. 하나님의 상대자로서의 자격 조건은 사랑하는 것 외에는 없습니다.
오늘 읽은 요한1서의 말씀은 다시 한 번 우리를 일깨워 줍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형제자매를 미워하는 사람은 실제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아니라고요. 거짓말 하는 자라고요. 그러면 형제자매를 미워하지 않으면 되는 걸까요? 아닙니다. 미워하지 않는 것에는 사랑한다는 적극적인 의미도 있지만, 그저 미움이 없을 뿐이라는 부정의 의미, 즉 무관심도 내포되어 있습니다. 미워하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무관심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끊임없는 관심의 표현이었습니다. 스스로 죄지어 부끄러움을 알게 된 못된 아담과 하와를 그저 내칠 수 있었는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고 그 부끄러움에 관심하였고, 그 부끄러움을 가려주는 적극적인 행위를 내보였습니다.
우리는 모두 형제, 자매라고 하지요. 그런데 이게 얼마나 진정한 의미에서 형제, 자매된 것일까요? 그리스도 사랑 안에서의 형제, 자매는 혈연을 넘어섭니다. 십자가 아래 있는 자들을 형제, 자매라고 부르신 예수의 음성은 곧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는 누구나 형제, 자매되는 것을 드러내 줍니다. 하나님 사랑과 형제, 자매 사랑은 떼어 놓을 수 없는 동전의 양면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적극적인 행위입니다. 관심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까닭은 바로 자신의 사랑을 보여주시고 서로 사랑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가 매주 신앙고백하는 창조의 보전과 완성은 근본적으로 사랑에서 비롯합니다. 신나서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모습, 그리고 시작한 사랑을 저버리지 않은 하나님의 신실성을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미워하고 무관심하도록 우리를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상대자로서 우리의 할 바는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의 고백은 진실된 고백이 됩니다. ‘사랑한다’라는 말 한마디, 어려운 이웃에게 따뜻한 손을 내미는 것, 훼손된 자연을 고치고, 더 이상 파손되지 않도록 지키는 노력, 여기서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사랑은 빛을 발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말, 사랑한다는 표현을 아끼지 마십시오. 그 사랑 안에 바로 하나님이 들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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