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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출15:19-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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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최만자 자매 |
참고 : | 새길교회 2002. 6.30 주일설교 |
출애굽기 15:19-21, 민수기 12:9-15
한국사람들은 신명만 나면 못해내는 것이 없는 사람들이라는 소리를 이번 월드컵 기간 동안 많이 들었습니다. 꿈도 못 꾸던 4강에까지 오른 것이 기적 같다고 생각들을 합니다. 무엇보다 7백만이 자발적으로 동원된 붉은악마의 응원은 경이롭기까지 하여 외국기자들도 놀라움을 표한다고 합니다. 민족적인 거대한 신명의 용솟음을 본 것 같습니다. 이번에 주동이 된 젊은이들이 대체로 15-25세 연령 등으로 이들을 월드컵 세대라 하여 W세대라고 명명하기도 합니다. 이 W세대가 이번에 온 민족이 하나로 통합되는 신명을 맘판으로 품어내는 축제를 벌이는 주역을 한 것입니다. 월드컵 경기에서 한국의 승리는 그 동안 우리사회 현실이 너무나 암울하여 아무런 희망도 갖기 어려웠는데, 이 절망감으로부터 벗어나 한국인으로서의 자부심을 갖게 해 주었고, 열광적 응원은 축구 승리를 이끌어낸 동력이었으며 동시에 이제 우리도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과 긍지를 응원행위를 통하여 모두 표현해 낸 듯 합니다. 갑자기 '한국인인 것이 자랑스럽다'고 고백하는 젊은이들이 여기 저기 많이 나타났습니다. 언제나 유럽 열강의 우월성에 주눅들었는데 이제 기를 펴게 되었다고 하고 이를 확대하여 아시아의 승리라고까지 표현하면서 아시아지역의 자랑, 기폄으로 사람들이 말합니다. 실제로 제 친구는 태국의 친구로부터 편지를 받았는데 '한국이 자랑스럽다, 아시아의 승리를 보여주어서 고맙다'라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아시아의 대표 대한민국', '아시아의 자존심 대한민국'이라고 합니다. 아무튼 우리는 이번에 대단한 축제를 벌였습니다.
이런 신명이 살아난 것은 아마도 젊은이들이 그동안 사이버세계에만 몰두하여 고립된 생활형태에 갇혔다가 이번에 사람과 함께 만나고 부딪히고 춤추고 끌어안고 소리지르고 하는 접촉문화의 세계를 경험하면서 경이로운 힘이 발산 될 수 있었던 것이며 이를 통해 자신감과 희망을 갖게되었다고 보기도 합니다. 인간은 관계의 확립과 확인을 통해서야 자기 존재의 의미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인가 봅니다. 또 한편으로는 이 열광적 축제가 우리사회 목마름의 표현이라고도 봅니다. 희망 없는 정치나, 경제, 그리고 사회에서 앞날이 암담하기만 한 때에 어떤 돌파구가 생겨났고 온 신명이 거기에 집중된 때문에 가능했다고 봅니다. 아무튼 신명난 축제판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이제 꿈같은 축제의 한 달은 끝이 나고 있고 우리는 일상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벌써부터 월드컵 끝나면 무슨 재미로 살 까를 걱정하는 소리가 높고, 공허감, 허탈감, 공황장애가 호소되고 있습니다. 잠 안 오고, 죽고싶다는 등 우울 증세들도 보이고 있습니다. 광기 서렸던 축제 그 이후에 대한 제안들이 많기도 합니다. 특히 정치차원에서는 민족주의를 더 부추겨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의도들을 노골적으로 내비칩니다. 정부는 이 에너지를 앞으로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지 활용방안을 각 부처에 내게 했더니 100가지 이상의 방안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경제에서는 국가 이미지가 제고되어 국가브랜드를 무형의 자산을 늘이는데 큰 효과를 기대하고 있는데 이 또한 정치에 이용되지 않고 생산적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는 등의 소리가 높습니다. 정말 이 굉장한 축제의 열기, 에너지가 발산된 이후의 삶에 대해 지금 우리는 함께 깊은 생각을 해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저는 오늘 성서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성서 안에 나오는 최대의 축제는 바로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의 노예생활에서 탈출한 직후에 벌여진 신명난 잔치라고 하겠습니다. 물론 우리의 오늘 축제는 문화적 축제라 할 수 있고, 히브리 민족의 축제는 정치적 해방축제이기에 차이는 있겠으나 축제의 모습은 유사한 것입니다. 오늘 읽은 출애굽기 15장 19-21절은 바로 그 때 이스라엘 민족이 함께 노래하고 춤춘 모습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 축제의 노래는 '미리암의 노래'라고 하는데 그 앞에 1절에서 18절까지에 길게 확장된 노래가 있고 그것은 모세의 노래라고 합니다. 미리암의 노래가 더 고대자료이며 원형에 가깝다고 봅니다. 미리암이 원래 불렀던 노래를 후에 더 세밀한 내용으로 확장시켜 모세가 부른 것으로 하여서 출애굽의 해방감을 만끽한 그 축제를 모세 중심으로 만들었다고 학자들은 봅니다. 이는 모세를 중심세력으로 집중시키려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이 축제는 그야말로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환희, 감격의 표현입니다. 오랜 노예생활의 고달픔, 첩첩이 쌓인 모든 애환들, 그리고 애굽에게 당한 모욕과 모멸 이런 것들을 일거에 해소시켜주는 위대한 사건, 곧 자신들을 그렇게 억압하던 애굽의 철병 군대가 홍해바다에 고스란히 수장되고 그들의 손아귀로부터 완전한 해방과 자유를 얻게된 그 감격을 무엇으로 다 표현 할 수 있었겠습니까? 히브리 민족은 자신들을 채찍질하던 그 바로의 군병들, 온갖 멸시와 천대를 자행하던 거만한 애굽 군사들이 바다 가운데서 물에 덮여 잠기는 것을 보고 그 얼마나 통쾌함을 가졌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바로 이 환희를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월드컵 4강에 오른 것으로도 이렇게 그 동안 잠재되어 있던 열등감, 약한 국가로서의 서러움, 아시아인으로서의 모멸감, 이런 것을 풀 수 있다고 흥분하고 환희를 노래하는데, 히브리민족의 해방감, 원수들이 멸망하는 것을 보면서 가지는 통쾌함이 얼마나 큰 것이었겠습니까? 바다를 건넌 저들은 미리암의 인도에 따라 소고를 치며 춤추고 노래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짝짝 짝짝짝' 했는지 모릅니다. 저들은 해방의 축제를 만끽했습니다. 참으로 즐기고 향유하였습니다.
그러나 축제는 끝나고 저들은 이제 광야의 먼 여행을 시작해야 했습니다. 축제 그 이후 그들에게 찾아 온 것은 계속되는 기쁨의 연속이 아니라 오히려 더 슬프고 괴로운 광야생활의 고달픔이었습니다. 가장 크고 절박하게 찾아온 고통은 인간이 정말 참기 어려운 생존의 위협들이었습니다. 곧 이어지는 22절부터는 사흘동안 물이 없어 고통 당하는 현실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리고 겨우 만난 물조차 쓴 물이라 먹을 수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겨우 겨우 물을 찾고 난 그들에게 또 찾아 온 것은 굶주림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막기후 조건과 환경의 위협으로 인한 질병들이었습니다. 축제의 기쁨은 사라지고 목마름과 배고픔에 지친 백성들은 자신들을 억압하던 애굽의 생활을 도리어 동경하게 되기까지 되었습니다. 애굽의 고기가마가 그리웠고 차라리 노예로 그대로 있었더라면 굶어 죽지는 않았을 텐데 하는 분노가 커졌습니다. 그들은 지도자 모세를 원망하였고 모세조차도 지치고 참기 어려워져 바위를 홧김에 두 번씩이나 쳐서 결국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비극을 당하게까지 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저들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바위를 쳐 물이 솟아나게 하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공급하여 저들의 굶주림을 해결해 주십니다.
그런데 또 하나 이 공동체가 겪은 고통은 내부의 분열, 갈등으로 인한 고통이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 민수기 12장은 1절에서부터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판하는 것과 결국 하나님이 모세 편을 드셨고 미리암은 악성 피부병이 걸려서 진 밖으로 추방을 당하게 되는 것과, 그러나 백성들은 미리암의 병이 나을 때까지 그를 기다리고 있다가 그가 병이 나아 자신들에게 돌아오게 되자 함께 여행을 다시 시작하였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실 이 본문은 교회에서 목사님들이 매우 좋아하시고 많이 인용하는 본문입니다. 이 본문은 대부분 모세에 대한 비난의 태도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게되었다고 정리하고 교회에서 하나님이 택하신 하나님의 종을 비난하는 것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며 하나님만이 그를 벌할 수 있다는 주장들을 가능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많은 목사들(사제들)이 자신들에게 비판적 태도를 가지는 상황이 생기면 이 본문을 가지고 평신도를 위협하는데 사용한 예들이 많습니다. 더욱이 아론과 미리암이 같이 대어들었는데 아론은 병이 안 걸리고 미리암이 악성 피부병에 걸린 것을 보라고 하면서, 여자들은 더 크게 벌받는다 라고도 합니다. 참으로 황당한 해석입니다.
얼마 전 최창모 교수께서도 미리암 이야기를 매우 감동적으로 그리고 텍스트에 충실하게 해주셔서 미리암 이해에 많은 도움을 주신 것을 기억합니다. 저는 오늘 이 이야기를 이스라엘 공동체가 광야기간 동안 겪은 지도력간의 갈등과 분열, 그리고 결국은 한 지도력을 중심으로 하는 공동체의 통합과 그에 따라오는 다른 지도력의 배격이라는 배경에서 우리가 이 이야기를 볼 필요가 있다는 말씀을 드리려 합니다. 그리고 이런 관점에서 보면 그 동안 풀리지 않던 내용들이 이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좀 자세히 보고자 합니다. 우선 아론, 미리암, 모세는 출애굽을 이끈 각 각 훌륭한 세 지도자입니다. 미가서 6장 4절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나왔다. 나는 너희의 몸값을 치르고서, 너희를 종살이하던 집에서 데리고 나왔다.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을 보내서 너희를 거기에서 데리고 나왔다"(미가 6장4절). 그리고 출애굽기 15장 20절에는 미리암을 분명히 아론의 누이요, 예언자인 미리암이라고 하여 미리암의 지도력을 예언자로 칭하고 있습니다. 예언자는 판관같은 기능과 전쟁도 지휘하는 공동체의 지도력입니다. 미리암은 모세의 누이 라서가 아니라 그 자신이 예언자로 불릴 만큼 훌륭한 지도력을 가진 여성이고, 집단을 이끄는데 손색없는 지도력입니다. 아론과 모세와 미리암을 혈연관계로 성서는 엮고 있는데 학자들은 이것이 상당히 어색한 연결로 보인다고 합니다. 출애굽기 15장 20절에는 아론과 미리암이 남매임을 말하고 있고, 4장 14절과 6장 20절에서는 모세와 아론이 형제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미리암과 모세의 남매관계는 아무 곳에도 언급이 없습니다. 성서가 혈연으로 엮어 놓은 자료들은 상당히 후대의 것들이라고 봅니다. 고대자료에서는 이들의 혈연관계가 언급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가족으로 구성된 것은 상당히 후대의 견해를 보인다고 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 민족이 애굽을 탈출할 때 실제로는 단일 집단으로 한 것이 아니고 몇몇 집단들이 있었고 그중 아론, 미리암, 모세 세 지도력이 가장 유능한 리더들이었으며, 이들은 각각 자신들이 이끌든 그룹의 리더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이 광야생활동안 함께 지나면서 상당한 대립과 갈등, 그리고 주도권 싸움을 하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결국 모세 집단이 주도권을 잡게되고 모든 기록들은 모세 중심으로 기록 편집되었을 것으로 봅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이 모세를 편들고 있는 것은 그 이유가 매우 불확실합니다. 민수기 27장에는 땅을 분배하는 과정에서 아버지가 죽고 딸만 다섯 명이 남게 된 슬롭핫의 딸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모세가 이들에게 아버지가 없기 때문에 땅을 분배해 주지 않았습니다. 이 딸들이 모세 앞에 나아와 그 부당함을 지적하고 도전합니다. 그때 하나님은 이 딸들의 편을 들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딸들에게 땅을 분배해 주게 됩니다. 지도력들 간의 대립내용이 아닌 곳에서 하나님은 모세만을 편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억울한 딸들을 편드는 정의의 하나님, 인자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12장 오늘의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일방적인 모세편에 서는 것은 납득이 어려운 것입니다. 즉 이 본문은 모세를 내세우고 모세만이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인정하는 지도력임을 강력하게 확인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아론이 병에 걸리지 않은 것은 이스라엘인들에게 사제가 문둥병이 걸리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런 해명 없이 그를 지도력에 도전한 대열에서 제외시키고 있습니다. 결국 미리암만 징벌을 받았고 그리고 미리암의 병은 자기에게 도전했음에도 넓은 관용을 베풀어 간곡한 중보기도를 하는 모세의 기도에 의하여 낫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모세는 대단히 훌륭한 인격의 소유자로 다시 그려지고 있지요.
그런데 미리암이 악성 피부병에 걸린 것에 대한 매우 다른 시각의 해석이 있습니다. 광야의 생활은 여러 가지 질병을 또한 동반할 수밖에 없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피부질환으로 고통을 많이 당했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백성들과 함께 하고 그들의 곁에서 같이 생활을 하며 그들의 질병을 돌보던 미리암은 결국 자신도 피부질환에 걸렸을 것으로 봅니다. 옛날 나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자신이 나환자가 되었던 한 성자의 고귀한 삶을 연상시켜주는 이 해석은 비록 성서본문의 기록을 넘어선 이야기이긴 하지만 매우 설득력 있는 해석입니다.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들의 삶의 자리에 늘 함께 하였던 미리암, 그는 결국 그 민중들의 고통 안에 들어왔고 그들과 아픔을 같이 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미리암을 백성들은 지극히 사랑하고 따랐습니다. 홍해를 건너 축제를 한판 벌릴 때도 모든 공동체는 미리암의 지도를 따라 함께 즐거움을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미리암이 병들어 그들 옆에 있을 수 없고 진 밖으로 격리되는 고통의 시간에도 그들은 그를 버리지 않고 기다리며 그의 병이 낫기를 기도하였습니다. 이 민중들, 공동체 구성원들은 축제의 열광과 고통의 절망을 모두 함께 할 줄 아는 균형 잡힌 의식을 가진 공동체 였으며 그것은 미리암이라는 한 여성지도자의 삶 자체를 통하여 길러진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미리암이 피부병에 걸린 것은 레위기의 기록에서도 나오고 있어 아마도 확실한 사실로 보입니다. 당시 집단들을 이끈 지도자들 가운데 하필 미리암만이 피부병에 걸렸을까, 그 분명한 사실을 알기 어렵지만 병이 전염될 가능성이 많은 환경에 그가 있었다고 볼 수 있고 그렇다면 미리암이 백성들 가운데 많이 같이 있었다는 추측은 무리가 아닐 것입니다. 모세와 그 백성들 간의 관계가 원망과 분노로 진행되는 것에 비해 미리암과 그 백성들 간의 모습은 따르고 함께 하는 관계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민중의 고통 속에 있는 미리암, 미리암의 고통을 알고 그의 회복을 기다리며 함께 하는 공동체, 한 여성지도력이 이끈 아름다운 관계의 공동체를 우리는 마음껏 상상하고 발견해 낼 수 있습니다. 인간은 존재자체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관계의 존재입니다. 혼자서는 아무런 존재의미도 갖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 관계는 일방적으로 기쁨을 누리는 것이 아니고 또 일방적으로 고통을 부담스럽게 안겨주는 것이 아닌 기쁨과 고통을 함께 나누는 관계입니다. 우리의 존재의미는 바로 이러한 기쁨과 고통을 함께 함의 관계에서만 존재의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미리암과 그 공동체는 그러한 함께 함의 관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다시 우리 현실로 돌아와 봅니다. 광기의 축제는 끝나고 이제 우리를 기다리는 현실은 무엇일까요. 벌써 북한과 서해안의 교접상태가 다시 남북관계 진전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정치현실은 아무리 둘러보아도 암담하기만 합니다. 경제는 또 어떻게 흐를지 종잡기 어렵습니다. 이런 사회적 상황에서는 우리 개개인의 삶에도 그리 신통한 것들이 생기기도 어렵습니다. 우리 W세대가 모처럼 가져 보았던 한국인으로서의 긍지와 무엇인가 할 수 있을 것 같던 자신감이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배고픔과 목마름과 질병과 그리고 정치적 분열의 갈등 속에서 미리암의 고통을 알고 그와 함께 한 그 공동체, 곧 축제도 고통도 함께 할 줄 아는 공동체의 모습을 잘 바라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오 대-한민국을 외치며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면서 아시아의 자존심, 아시아의 대표라는 소리를 축제동안 하지만, 그러나 우리가 베트남에 저지른 죄과를 인식 할 줄 아는지?, 또 아시아 여러 나라에 우리 기업들이 저지르는 착취와 폭행을 아는지, 우리나라 사람들이 아시아지역들에 가서 취하는 갖가지 부끄러운 추태들을 아는지.... 우리의 어두운 모습, 드러나지 않은 모습을 인식하고 있으며 그로 인해 고통 당하는 사람들의 아픔을 알고 있는지? 월드컵이라는 세계의 축제를 위해 가난한 나라의 아주 어린 아이들이 그 축구공과 유니폼과 그 용품들을 만들어 내느라 잠도 잘 못 자고 임금도 착취를 당하는 고통을 아는지, 그 아이들은 10대 보다 더 어리고 학교 교육도 못 받고 기본적인 성장과 생활에 필요한 환경조차 못 갖춘 채 살면서 오히려 혹독한 노동에 시달리고 정신과 육체가 모두 학대받고 있는데 그것을 알고나 있는지. 우리가 축구 승리에 열광하고 있는 동안 미군 장감차에 의해 두 여중생이 살해당한 사실을 알고나 있는지, 그 부모와 친구들과 친지들이 가슴을 치며 슬퍼하는데 미군은 잘못조차 시인하지 않는 뻔뻔함을 보여 더 억울하게 하고 있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 한국을 찾는 월드컵 관광객을 위한 친절시민이 될 것을 떠들썩하게 홍보하지만 그와 비슷한 숫자의 한국 안에 있는 외국인 노동자를 위한 친절교육은 있기나 한지. 돈벌이 되고 돈 많고 세력 있는 관광객의 시선은 의식하면서 가난하고 힘없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시선을 의식하기는커녕 그들에게는 비인간적 처사를 당연시하는 우리자신을 보고 있는지,
월드컵 기간동안의 그 뜨거운 축제의 열기를 경험한 우리 공동체는 그렇게 뜨거운 축제를 신명나게 풀어 낼 줄 아는 동시에 우리 속에 또한 함께 있는 모든 아픔과 고통의 자리들도 인식하고 함께 할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붉은 악마들과 7백만의 응원인구와 그들과 함께 한 4천만 대-한민국 공동체가 축제가 끝난 그 허전한 자리에 고통을 함께 하기 위해 새로이 프로그램을 만들어 낼 수 있을 때 우리는 진정한 짝짝 짝짝짝 박수를 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민중과 함께 하여 악성피부병에 까지 걸린 미리암의 삶을 다시 되새겨 봅시다. 그리고 그와 함께 축제도 벌이고 고통도 함께한 공동체도 늘 기억해 봅시다. 그리고 예수의 생애는 먹고 마시는 잔치와 함께 모욕당하고 십자가를 지기까지 하는 고통이 어우러진 삶이었음을 새로이 떠올려 봅시다. 그래서 축제와 고통을 함께 할 수 있는 공동체 대-한민국을 함께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한국사람들은 신명만 나면 못해내는 것이 없는 사람들이라는 소리를 이번 월드컵 기간 동안 많이 들었습니다. 꿈도 못 꾸던 4강에까지 오른 것이 기적 같다고 생각들을 합니다. 무엇보다 7백만이 자발적으로 동원된 붉은악마의 응원은 경이롭기까지 하여 외국기자들도 놀라움을 표한다고 합니다. 민족적인 거대한 신명의 용솟음을 본 것 같습니다. 이번에 주동이 된 젊은이들이 대체로 15-25세 연령 등으로 이들을 월드컵 세대라 하여 W세대라고 명명하기도 합니다. 이 W세대가 이번에 온 민족이 하나로 통합되는 신명을 맘판으로 품어내는 축제를 벌이는 주역을 한 것입니다. 월드컵 경기에서 한국의 승리는 그 동안 우리사회 현실이 너무나 암울하여 아무런 희망도 갖기 어려웠는데, 이 절망감으로부터 벗어나 한국인으로서의 자부심을 갖게 해 주었고, 열광적 응원은 축구 승리를 이끌어낸 동력이었으며 동시에 이제 우리도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과 긍지를 응원행위를 통하여 모두 표현해 낸 듯 합니다. 갑자기 '한국인인 것이 자랑스럽다'고 고백하는 젊은이들이 여기 저기 많이 나타났습니다. 언제나 유럽 열강의 우월성에 주눅들었는데 이제 기를 펴게 되었다고 하고 이를 확대하여 아시아의 승리라고까지 표현하면서 아시아지역의 자랑, 기폄으로 사람들이 말합니다. 실제로 제 친구는 태국의 친구로부터 편지를 받았는데 '한국이 자랑스럽다, 아시아의 승리를 보여주어서 고맙다'라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아시아의 대표 대한민국', '아시아의 자존심 대한민국'이라고 합니다. 아무튼 우리는 이번에 대단한 축제를 벌였습니다.
이런 신명이 살아난 것은 아마도 젊은이들이 그동안 사이버세계에만 몰두하여 고립된 생활형태에 갇혔다가 이번에 사람과 함께 만나고 부딪히고 춤추고 끌어안고 소리지르고 하는 접촉문화의 세계를 경험하면서 경이로운 힘이 발산 될 수 있었던 것이며 이를 통해 자신감과 희망을 갖게되었다고 보기도 합니다. 인간은 관계의 확립과 확인을 통해서야 자기 존재의 의미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인가 봅니다. 또 한편으로는 이 열광적 축제가 우리사회 목마름의 표현이라고도 봅니다. 희망 없는 정치나, 경제, 그리고 사회에서 앞날이 암담하기만 한 때에 어떤 돌파구가 생겨났고 온 신명이 거기에 집중된 때문에 가능했다고 봅니다. 아무튼 신명난 축제판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이제 꿈같은 축제의 한 달은 끝이 나고 있고 우리는 일상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벌써부터 월드컵 끝나면 무슨 재미로 살 까를 걱정하는 소리가 높고, 공허감, 허탈감, 공황장애가 호소되고 있습니다. 잠 안 오고, 죽고싶다는 등 우울 증세들도 보이고 있습니다. 광기 서렸던 축제 그 이후에 대한 제안들이 많기도 합니다. 특히 정치차원에서는 민족주의를 더 부추겨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의도들을 노골적으로 내비칩니다. 정부는 이 에너지를 앞으로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지 활용방안을 각 부처에 내게 했더니 100가지 이상의 방안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경제에서는 국가 이미지가 제고되어 국가브랜드를 무형의 자산을 늘이는데 큰 효과를 기대하고 있는데 이 또한 정치에 이용되지 않고 생산적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는 등의 소리가 높습니다. 정말 이 굉장한 축제의 열기, 에너지가 발산된 이후의 삶에 대해 지금 우리는 함께 깊은 생각을 해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저는 오늘 성서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성서 안에 나오는 최대의 축제는 바로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의 노예생활에서 탈출한 직후에 벌여진 신명난 잔치라고 하겠습니다. 물론 우리의 오늘 축제는 문화적 축제라 할 수 있고, 히브리 민족의 축제는 정치적 해방축제이기에 차이는 있겠으나 축제의 모습은 유사한 것입니다. 오늘 읽은 출애굽기 15장 19-21절은 바로 그 때 이스라엘 민족이 함께 노래하고 춤춘 모습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 축제의 노래는 '미리암의 노래'라고 하는데 그 앞에 1절에서 18절까지에 길게 확장된 노래가 있고 그것은 모세의 노래라고 합니다. 미리암의 노래가 더 고대자료이며 원형에 가깝다고 봅니다. 미리암이 원래 불렀던 노래를 후에 더 세밀한 내용으로 확장시켜 모세가 부른 것으로 하여서 출애굽의 해방감을 만끽한 그 축제를 모세 중심으로 만들었다고 학자들은 봅니다. 이는 모세를 중심세력으로 집중시키려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이 축제는 그야말로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환희, 감격의 표현입니다. 오랜 노예생활의 고달픔, 첩첩이 쌓인 모든 애환들, 그리고 애굽에게 당한 모욕과 모멸 이런 것들을 일거에 해소시켜주는 위대한 사건, 곧 자신들을 그렇게 억압하던 애굽의 철병 군대가 홍해바다에 고스란히 수장되고 그들의 손아귀로부터 완전한 해방과 자유를 얻게된 그 감격을 무엇으로 다 표현 할 수 있었겠습니까? 히브리 민족은 자신들을 채찍질하던 그 바로의 군병들, 온갖 멸시와 천대를 자행하던 거만한 애굽 군사들이 바다 가운데서 물에 덮여 잠기는 것을 보고 그 얼마나 통쾌함을 가졌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바로 이 환희를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월드컵 4강에 오른 것으로도 이렇게 그 동안 잠재되어 있던 열등감, 약한 국가로서의 서러움, 아시아인으로서의 모멸감, 이런 것을 풀 수 있다고 흥분하고 환희를 노래하는데, 히브리민족의 해방감, 원수들이 멸망하는 것을 보면서 가지는 통쾌함이 얼마나 큰 것이었겠습니까? 바다를 건넌 저들은 미리암의 인도에 따라 소고를 치며 춤추고 노래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짝짝 짝짝짝' 했는지 모릅니다. 저들은 해방의 축제를 만끽했습니다. 참으로 즐기고 향유하였습니다.
그러나 축제는 끝나고 저들은 이제 광야의 먼 여행을 시작해야 했습니다. 축제 그 이후 그들에게 찾아 온 것은 계속되는 기쁨의 연속이 아니라 오히려 더 슬프고 괴로운 광야생활의 고달픔이었습니다. 가장 크고 절박하게 찾아온 고통은 인간이 정말 참기 어려운 생존의 위협들이었습니다. 곧 이어지는 22절부터는 사흘동안 물이 없어 고통 당하는 현실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리고 겨우 만난 물조차 쓴 물이라 먹을 수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겨우 겨우 물을 찾고 난 그들에게 또 찾아 온 것은 굶주림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막기후 조건과 환경의 위협으로 인한 질병들이었습니다. 축제의 기쁨은 사라지고 목마름과 배고픔에 지친 백성들은 자신들을 억압하던 애굽의 생활을 도리어 동경하게 되기까지 되었습니다. 애굽의 고기가마가 그리웠고 차라리 노예로 그대로 있었더라면 굶어 죽지는 않았을 텐데 하는 분노가 커졌습니다. 그들은 지도자 모세를 원망하였고 모세조차도 지치고 참기 어려워져 바위를 홧김에 두 번씩이나 쳐서 결국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비극을 당하게까지 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저들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바위를 쳐 물이 솟아나게 하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공급하여 저들의 굶주림을 해결해 주십니다.
그런데 또 하나 이 공동체가 겪은 고통은 내부의 분열, 갈등으로 인한 고통이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 민수기 12장은 1절에서부터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판하는 것과 결국 하나님이 모세 편을 드셨고 미리암은 악성 피부병이 걸려서 진 밖으로 추방을 당하게 되는 것과, 그러나 백성들은 미리암의 병이 나을 때까지 그를 기다리고 있다가 그가 병이 나아 자신들에게 돌아오게 되자 함께 여행을 다시 시작하였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실 이 본문은 교회에서 목사님들이 매우 좋아하시고 많이 인용하는 본문입니다. 이 본문은 대부분 모세에 대한 비난의 태도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게되었다고 정리하고 교회에서 하나님이 택하신 하나님의 종을 비난하는 것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며 하나님만이 그를 벌할 수 있다는 주장들을 가능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많은 목사들(사제들)이 자신들에게 비판적 태도를 가지는 상황이 생기면 이 본문을 가지고 평신도를 위협하는데 사용한 예들이 많습니다. 더욱이 아론과 미리암이 같이 대어들었는데 아론은 병이 안 걸리고 미리암이 악성 피부병에 걸린 것을 보라고 하면서, 여자들은 더 크게 벌받는다 라고도 합니다. 참으로 황당한 해석입니다.
얼마 전 최창모 교수께서도 미리암 이야기를 매우 감동적으로 그리고 텍스트에 충실하게 해주셔서 미리암 이해에 많은 도움을 주신 것을 기억합니다. 저는 오늘 이 이야기를 이스라엘 공동체가 광야기간 동안 겪은 지도력간의 갈등과 분열, 그리고 결국은 한 지도력을 중심으로 하는 공동체의 통합과 그에 따라오는 다른 지도력의 배격이라는 배경에서 우리가 이 이야기를 볼 필요가 있다는 말씀을 드리려 합니다. 그리고 이런 관점에서 보면 그 동안 풀리지 않던 내용들이 이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좀 자세히 보고자 합니다. 우선 아론, 미리암, 모세는 출애굽을 이끈 각 각 훌륭한 세 지도자입니다. 미가서 6장 4절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나왔다. 나는 너희의 몸값을 치르고서, 너희를 종살이하던 집에서 데리고 나왔다.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을 보내서 너희를 거기에서 데리고 나왔다"(미가 6장4절). 그리고 출애굽기 15장 20절에는 미리암을 분명히 아론의 누이요, 예언자인 미리암이라고 하여 미리암의 지도력을 예언자로 칭하고 있습니다. 예언자는 판관같은 기능과 전쟁도 지휘하는 공동체의 지도력입니다. 미리암은 모세의 누이 라서가 아니라 그 자신이 예언자로 불릴 만큼 훌륭한 지도력을 가진 여성이고, 집단을 이끄는데 손색없는 지도력입니다. 아론과 모세와 미리암을 혈연관계로 성서는 엮고 있는데 학자들은 이것이 상당히 어색한 연결로 보인다고 합니다. 출애굽기 15장 20절에는 아론과 미리암이 남매임을 말하고 있고, 4장 14절과 6장 20절에서는 모세와 아론이 형제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미리암과 모세의 남매관계는 아무 곳에도 언급이 없습니다. 성서가 혈연으로 엮어 놓은 자료들은 상당히 후대의 것들이라고 봅니다. 고대자료에서는 이들의 혈연관계가 언급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가족으로 구성된 것은 상당히 후대의 견해를 보인다고 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 민족이 애굽을 탈출할 때 실제로는 단일 집단으로 한 것이 아니고 몇몇 집단들이 있었고 그중 아론, 미리암, 모세 세 지도력이 가장 유능한 리더들이었으며, 이들은 각각 자신들이 이끌든 그룹의 리더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이 광야생활동안 함께 지나면서 상당한 대립과 갈등, 그리고 주도권 싸움을 하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결국 모세 집단이 주도권을 잡게되고 모든 기록들은 모세 중심으로 기록 편집되었을 것으로 봅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이 모세를 편들고 있는 것은 그 이유가 매우 불확실합니다. 민수기 27장에는 땅을 분배하는 과정에서 아버지가 죽고 딸만 다섯 명이 남게 된 슬롭핫의 딸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모세가 이들에게 아버지가 없기 때문에 땅을 분배해 주지 않았습니다. 이 딸들이 모세 앞에 나아와 그 부당함을 지적하고 도전합니다. 그때 하나님은 이 딸들의 편을 들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딸들에게 땅을 분배해 주게 됩니다. 지도력들 간의 대립내용이 아닌 곳에서 하나님은 모세만을 편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억울한 딸들을 편드는 정의의 하나님, 인자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12장 오늘의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일방적인 모세편에 서는 것은 납득이 어려운 것입니다. 즉 이 본문은 모세를 내세우고 모세만이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인정하는 지도력임을 강력하게 확인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아론이 병에 걸리지 않은 것은 이스라엘인들에게 사제가 문둥병이 걸리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런 해명 없이 그를 지도력에 도전한 대열에서 제외시키고 있습니다. 결국 미리암만 징벌을 받았고 그리고 미리암의 병은 자기에게 도전했음에도 넓은 관용을 베풀어 간곡한 중보기도를 하는 모세의 기도에 의하여 낫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모세는 대단히 훌륭한 인격의 소유자로 다시 그려지고 있지요.
그런데 미리암이 악성 피부병에 걸린 것에 대한 매우 다른 시각의 해석이 있습니다. 광야의 생활은 여러 가지 질병을 또한 동반할 수밖에 없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피부질환으로 고통을 많이 당했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백성들과 함께 하고 그들의 곁에서 같이 생활을 하며 그들의 질병을 돌보던 미리암은 결국 자신도 피부질환에 걸렸을 것으로 봅니다. 옛날 나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자신이 나환자가 되었던 한 성자의 고귀한 삶을 연상시켜주는 이 해석은 비록 성서본문의 기록을 넘어선 이야기이긴 하지만 매우 설득력 있는 해석입니다.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들의 삶의 자리에 늘 함께 하였던 미리암, 그는 결국 그 민중들의 고통 안에 들어왔고 그들과 아픔을 같이 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미리암을 백성들은 지극히 사랑하고 따랐습니다. 홍해를 건너 축제를 한판 벌릴 때도 모든 공동체는 미리암의 지도를 따라 함께 즐거움을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미리암이 병들어 그들 옆에 있을 수 없고 진 밖으로 격리되는 고통의 시간에도 그들은 그를 버리지 않고 기다리며 그의 병이 낫기를 기도하였습니다. 이 민중들, 공동체 구성원들은 축제의 열광과 고통의 절망을 모두 함께 할 줄 아는 균형 잡힌 의식을 가진 공동체 였으며 그것은 미리암이라는 한 여성지도자의 삶 자체를 통하여 길러진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미리암이 피부병에 걸린 것은 레위기의 기록에서도 나오고 있어 아마도 확실한 사실로 보입니다. 당시 집단들을 이끈 지도자들 가운데 하필 미리암만이 피부병에 걸렸을까, 그 분명한 사실을 알기 어렵지만 병이 전염될 가능성이 많은 환경에 그가 있었다고 볼 수 있고 그렇다면 미리암이 백성들 가운데 많이 같이 있었다는 추측은 무리가 아닐 것입니다. 모세와 그 백성들 간의 관계가 원망과 분노로 진행되는 것에 비해 미리암과 그 백성들 간의 모습은 따르고 함께 하는 관계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민중의 고통 속에 있는 미리암, 미리암의 고통을 알고 그의 회복을 기다리며 함께 하는 공동체, 한 여성지도력이 이끈 아름다운 관계의 공동체를 우리는 마음껏 상상하고 발견해 낼 수 있습니다. 인간은 존재자체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관계의 존재입니다. 혼자서는 아무런 존재의미도 갖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 관계는 일방적으로 기쁨을 누리는 것이 아니고 또 일방적으로 고통을 부담스럽게 안겨주는 것이 아닌 기쁨과 고통을 함께 나누는 관계입니다. 우리의 존재의미는 바로 이러한 기쁨과 고통을 함께 함의 관계에서만 존재의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미리암과 그 공동체는 그러한 함께 함의 관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다시 우리 현실로 돌아와 봅니다. 광기의 축제는 끝나고 이제 우리를 기다리는 현실은 무엇일까요. 벌써 북한과 서해안의 교접상태가 다시 남북관계 진전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정치현실은 아무리 둘러보아도 암담하기만 합니다. 경제는 또 어떻게 흐를지 종잡기 어렵습니다. 이런 사회적 상황에서는 우리 개개인의 삶에도 그리 신통한 것들이 생기기도 어렵습니다. 우리 W세대가 모처럼 가져 보았던 한국인으로서의 긍지와 무엇인가 할 수 있을 것 같던 자신감이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배고픔과 목마름과 질병과 그리고 정치적 분열의 갈등 속에서 미리암의 고통을 알고 그와 함께 한 그 공동체, 곧 축제도 고통도 함께 할 줄 아는 공동체의 모습을 잘 바라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오 대-한민국을 외치며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면서 아시아의 자존심, 아시아의 대표라는 소리를 축제동안 하지만, 그러나 우리가 베트남에 저지른 죄과를 인식 할 줄 아는지?, 또 아시아 여러 나라에 우리 기업들이 저지르는 착취와 폭행을 아는지, 우리나라 사람들이 아시아지역들에 가서 취하는 갖가지 부끄러운 추태들을 아는지.... 우리의 어두운 모습, 드러나지 않은 모습을 인식하고 있으며 그로 인해 고통 당하는 사람들의 아픔을 알고 있는지? 월드컵이라는 세계의 축제를 위해 가난한 나라의 아주 어린 아이들이 그 축구공과 유니폼과 그 용품들을 만들어 내느라 잠도 잘 못 자고 임금도 착취를 당하는 고통을 아는지, 그 아이들은 10대 보다 더 어리고 학교 교육도 못 받고 기본적인 성장과 생활에 필요한 환경조차 못 갖춘 채 살면서 오히려 혹독한 노동에 시달리고 정신과 육체가 모두 학대받고 있는데 그것을 알고나 있는지. 우리가 축구 승리에 열광하고 있는 동안 미군 장감차에 의해 두 여중생이 살해당한 사실을 알고나 있는지, 그 부모와 친구들과 친지들이 가슴을 치며 슬퍼하는데 미군은 잘못조차 시인하지 않는 뻔뻔함을 보여 더 억울하게 하고 있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 한국을 찾는 월드컵 관광객을 위한 친절시민이 될 것을 떠들썩하게 홍보하지만 그와 비슷한 숫자의 한국 안에 있는 외국인 노동자를 위한 친절교육은 있기나 한지. 돈벌이 되고 돈 많고 세력 있는 관광객의 시선은 의식하면서 가난하고 힘없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시선을 의식하기는커녕 그들에게는 비인간적 처사를 당연시하는 우리자신을 보고 있는지,
월드컵 기간동안의 그 뜨거운 축제의 열기를 경험한 우리 공동체는 그렇게 뜨거운 축제를 신명나게 풀어 낼 줄 아는 동시에 우리 속에 또한 함께 있는 모든 아픔과 고통의 자리들도 인식하고 함께 할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붉은 악마들과 7백만의 응원인구와 그들과 함께 한 4천만 대-한민국 공동체가 축제가 끝난 그 허전한 자리에 고통을 함께 하기 위해 새로이 프로그램을 만들어 낼 수 있을 때 우리는 진정한 짝짝 짝짝짝 박수를 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민중과 함께 하여 악성피부병에 까지 걸린 미리암의 삶을 다시 되새겨 봅시다. 그리고 그와 함께 축제도 벌이고 고통도 함께한 공동체도 늘 기억해 봅시다. 그리고 예수의 생애는 먹고 마시는 잔치와 함께 모욕당하고 십자가를 지기까지 하는 고통이 어우러진 삶이었음을 새로이 떠올려 봅시다. 그래서 축제와 고통을 함께 할 수 있는 공동체 대-한민국을 함께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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