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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박영선 목사............... 조회 수 1737 추천 수 0 2009.06.20 13: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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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행4:1-4 
설교자 : 박영선 목사 
참고 : 사도행전 027 /1988.09.04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백성을 가르침과 예수를 들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 전함을 싫어하여 저희를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문고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사도행전4:1-4

사도행전 4장으로 오시면 사두개인들과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중심으로 한 사도들을 봍잡아갔다는 기록을 만납니다.

이것은 사실은 충격적인 기록입니다. 여러분은 사도행전을 읽을 때마다 어떤 느낌을 가지시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대부분 신앙생활을 오래 하신 분들을 만나면 성경 중에서 가장 힘있고 감격스럽고 놀라눈 성경을 꼽으라고 할 때 사도행전을 꼽기도 합니다.

사도행전은 분명히 시작부터 예수님의 약속과 명령을 따라 하늘로부터 하나님이 약속하신 권능으로 입힘을 받고 모든 권세를 지니신 예수 그리스도의 함께 하심과 보호하심으로 땅끝까지 이르는 일을 시작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안에 우리가 잘아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 하루 삼천 명씩이나 회개하는 베드로의 설교, 갇힌 사도들이 천사의 직접적인 인도를 받아 그 감옥을 빠져 나오는 일들, 그리고 여기 성전 미문에 앉아있던 앉은뱅이의 일어남, 이런일들을 봅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런 일들만으로 신앙과 신자의 인생이 연속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도행전을 전혀 잘못 보고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일을 마치고 나자 모든 세상 사람들이 놀라고 무릎 꿇고 우리가 어떻게 하는가라고 했다고만 기록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즉 주를 믿기로 작정된 자들, 하나님 앞에 은혜를 입은 자들은 물론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라는 한탄과 부르짖음과 회개와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초대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동시에 사도행전의 모든 기록들은 그런일들이 결과적으로 환난을 부르고 핍밥을 부르고 죽음을 불러들였다는 얘기도 같이 하고 있습니다. 이 일을 치르고 나자 그들을 찾아온 것은 상장, 감사패, 무슨 올림픽의 금메달이 아닙니다. 그들을 찾아온 것은 감옥에 갇히는 비극만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죽음 앞에 놓이고 공갈과 협박 앞에 놓이게 됩니다. 사도행전 자체가, 말하자면 우리가 기대하고 있는 식으로의 기록을 의도하고 있지 않습니다.

사도행전은 분명히 권능과 놀라운 기적과 능력으로 출발하고 있지만 그 능력과 모든 일어난 일들이 조직화되고 세력화되고 폭발성을 가지는 것으로 되어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은 하나 들 씩 잡혀 죽고 예루살렘 교회는 와해되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뽑혔던 일곱 집사들도 몇가지 일을 한 이외는 죽어가고 없어지고 주님 앞에 친히 부름을 받았던 모든 사람들이 몇가지 일을 한 이후에 그 일들로 말미암아 역사의 현장과 무대의 전면에서 퇴장합니다. 그 뒤를 잇는 것은 분발한 신자들의 거대한 기독교 세력이나 우리가 종종 보는 것같이 여의도 광장에 모이는 수많은 기독교인의 인파나 그런 식으로의 놀라운 부흥이나 거대한 집합이 아니고 점점 사그러지고 없어지고 희미해져서 결국은 그 일이 사도 바울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열두 사도, 예루살렘 교회, 일곱 집사 이런 것에서부터 시작해서 바울이라는 한 사람으로 사도행전의 기록이 축소되고 소멸되어 가는 것을 만납니다. 사도 바울은 사실 따지자면 우리가 그의 업적을 알고나니까 그가 대단한 사람이지 사도행전 기록 당시의 역사적인 현실에서 보면 그는 서자입니다. 주님께서 친히 부른 열두 사도 중의 하나도 아니고 일곱 집사 중에 낀 자도 물론 아닙니다. 스스로 말하기를 만삭되어 나지 못한 자 같고 죄인 중에서 괴수라고 한 그대로 그는 사실 예수님께서 시키신 일, 맡기신 복음의 사역에서는 전혀 이방인이었고 반대자였고 그 일의 뒤를 이을 만한 아무런 조건도 없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의 절반 이상의 기록을 떠맡게 됩니다.

그리고 그가 다니면서 한 일도 물론 그의 변론과 그가 증거한 일들이 우리가 믿고 감격하는 내용들로 점철되어 있어서 큰 일을 한 것 같지만 언제나 그 일들은 잡혀가서 매맞으며 돌에 맞으며 쫓겨다니면서 했다는 것을 명심해야 됩니다. 그래도 끝은 그렇게 해서 잘 됐다가 아니라 마지막에는 그가 감옥에서 죽어서 소설이 끝나지 않고 중단된 것같이 사도행전은 끝이나고 맙니다.

왜 이런 말씀을 드려야 하느냐 하면 성경이 하고 싶은 말은 신자가 이 세상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동안에 그가 가진 신앙과 그가 가진 결심들로 말미암아 세상에서 어떤 대접을 받을 것이냐에 대하여 분명하게 우리에게 이렇게 알려 주고 싶은 것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뜻밖에도 내가 신앙생활을 했으니 내가 주를 의지하고 모든 것을 희생했으니 이 세상에서 만족할 만한 보상을 받아야 된다고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마다 이런 질문을 스스로 해 보셔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것과 안하는 것 중에 어느쪽이 더 형통합니까? 여러분의 인생길에서 신앙생활을 안했기 때문에 당하는 고난과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에 오는 고난 중 어느 쪽이 더 크고 많습니까? 물론 우리가 신앙생활 중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하지 않아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신령한 것으로 영적인 데로 우리를 인도하기 위하여 치시는 고난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는 것 때문에 세상과 맞닥뜨리는 싸움, 그 환난, 그 위협 앞에 있는 처참함이 훨씬 많습니다.

성경은 어느 곳에서도 신앙생활을 하면 형통해진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신앙생활을 했기 때문에 병이 낫는다든가 돈이 잘 벌린다든가 유명해진다든가 좋은 대학을 들어간다는 약속을 한 적이 없습니다. 이런 말들은 요즘 일어난 계시록후서을 쓴 사람들에 의해서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막연하게 그런 기대를 갖고 있습니다. 사실은 여기 본문은 놀라운 일을 행하고 은과 금은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라고 해 놓고 사두개인들에게 잡혀서 감옥에 갔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기록인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그러면 신앙인이 무엇인가? 세상을 어떻게 걸어야 하고 성경이 어떻게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고 약속하고 있는가에 대하여 분명한 눈을 가져야 됩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사두개인 같은 자들을 용납하시는가입니다. 말하자면 역사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역사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고 이 세상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이루시려고 하느냐 하는 방법론에 대해서는 우리가 너무 무지한 것 같습니다.

이 세상은 곧 없어질 것입니다. 이제 영원한 나라에로 불림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뜻을 갖고 계시고 진행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어쨌든 공중 권세 잡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이 다스리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방해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여튼 그런한 방법으로 신자들을 불러내시고 완성하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시는 방법을 택하고 있다는 것만은 잊지 않아야 됩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은 주를 믿고 사는 자들이 표면에 나서 이 세상과 물질계를 주장하고 있지 아니하고 이 세상을 추구하고 목적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이 이 세상과 물질계에서는 왕 노릇하고 권세를 잡고 있다고 성경은 분명히 얘기하고 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어떤 사람들이냐 하면 성경에서는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을 한꺼번에 말하는 데가 많습니다만 요한복음 11:47,48에 가면 여기에 나왔던 대제사장들, 성전 많은 자들, 사두개인들, 바리새인들, 이런 부류의 사람들에 대한 폭로가 나옵니다.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가로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만일 저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저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하니.”

이것이 무슨 일 이후에 난 사건이냐 하면 예수님께서 죽은 지 나흘이나 됐던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 다음입니다. 예수임께서 큰일을 이루십니다. 그리고 많은 백성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합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보이는 물질계가 전부가 아니고 영원한 나라가 있다고 가르치십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리라’입니다. 너희의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 성전을 맡은 자들은 이 세상이 전부인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저렇게 행함으로써 국론이 분열되고 주를 의지해서 지금 있는 정치체제를 무너뜨리게 되면 로마와 잘 타협을 해서 잘 먹고 살고 있는 정치체제를 무너뜨리게 되면 로마와 잘 타협을 해서 잘 먹고 살고 있는 자기네들의 평화와 행복이 깨어지게 될까봐 걱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앞세워 이 민족이 반란을 일으켜 로마가 쳐들어와 저들의 반란을 진압할 뿐만 아니라 지금의 사회체제를 다 무너 뜨리고 빼앗아 가서 자기네들 땅과 백성을 빼앗겨, 즉 자기네 부와 지금의 현실적인 삶을 깰까봐 가장 걱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이 사두개인들입니다.

우리식으로 얘기를 하자면 매국노일 수도 있고 사기꾼일 수도 있고 그외 여러 가지 이름을 갖다 댈 수있습니다. 오직 하나의 목표는 애국도 아니고 종교도 아니고 윤리도 아니고 그때의 세상 형편에 가장 유익한 편에 서서 자기네 배를 불리고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살기에 바쁜 사람들입니다.

사두개인들은 물질주의자들이기 때문에 그렇고 바리새인들은 그들이 가진 종교적인 열심으로 그들의 지위를 확보하고 있는 자들이고 대제사장들은 그때의 종교적인 체제로써 이 세상에서의 삶이 평안하기를 바라는 부류들이라고 애기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싫어합니다. 그 가르침 때문에 지금의 사회체제가 붕괴되어 자기네들이 가졌던 지금의 유익들, 누리고 있는 것들이 붕괴될 까봐 가장 걱정을 합니다. 내세에 하나님 앞에서 어떤 심판을 받을 것인가를 걱정하기보다는 살아있는 동안에 내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잘 먹고 잘 살고 자존심을 채우고 살 것이냐 밖에는 괸심이 없습니다. 그들은 그것이 흔들리는 것이 제일 싫습니다. 그 일에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이 예수였고 그리고 지금은 예수의 제자들입니다. 충돌합니다.

마태복음 16장으로 가면 그 충돌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니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시다.”(마 16:1-4)

지금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 정면충돌해야 하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틀린 것이다. 진리가 아니다라는 것을 공개석상에서 확인을 시켜야 지금 자기네가 갖고 있는 그 체제가 붕괴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꾸 공격을 하러 옵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주님의 가르침이 틀리다는 것을 어떻게든 올무를 걸고 실족시켜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하늘로부터 왔다는 표적을 보이시오. 여기서 하늘로부터 왔다는 것은 영계, 물질계가 아닌 영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오입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거기에 대하여 답변하시지 않습니다. 너희는 무식하고 무지해서 그것을 알아 볼 수 없다라고 밖에 대답하지 않습니다.

이 문제를 좀 더 이해하기 위해서 마태복음 22장을 보십시다.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그 날에 예수께 와서 물어 가로되 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들어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장가들었다가 죽어 후사가 없으므로 그의 아내를 그 동생에게 끼쳐 두고 그 둘째와 셋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그런즉 저희가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고로 오해하였도다 부활 때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죽은 자의 부활을 의논할 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무리가 듣고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더라.”(마 22:23-33)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믿지 않습니다. 즉, 영계를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영계가 분명히 없다는 것을 확인시키기 위하여 그 모순, 부당함을 이 질문으로 꼬집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서는 가계를 이어가는 것이 중요한 책임이어서 맏아들이 자식을 꼭 가져야 됩니다. 맏아들이 자식을 갖지 못하고 죽으면 동생이 형수와 함께 살아서 애를 낳아 형의 자식으로 족보를 이어갈 책임이 있습니다. 그 둘째가 죽으면 셋째라도 그 일을 해야 되는데 그 셋째도 죽어 일곱이 다 그 일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중에 부활해서 만나게 되었을 때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어야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활이라든지 내세라는 것은 있을 수 없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비슷한 질문이 아주 많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다면서요? 그렇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자기가 들 수 없을 만큼 무거운 물건을 만들면 뭐라고 할 것입니까? 전능하시다면 왜 못 들까? 그럴것입니다. 들면? 들 수 없을 만큼 무거운 물건을 못 만들었다고 그럴 것입니다. 그것을 전능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자유라는 것이 뭡니까. 남을 한 대 때려놓고 너 왜 때리냐 할 때 내 자유다 하면 그 것을 자유라고 합니까. 미쳤다고 그럽니다. 자유라는 말은 그렇게 쓰지 않습니다. 나는 내 마음에 있는 진심을 속이고 싶지 않다. 나는 사실은 지금 나가서 놀고 싶은데 마누라 때문에 억지로 여기 와서 앉아있다 하면서 이것은 이중인격적이고, 이율배반적인 마음을 안고 앉아있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아니니 그러므로 나는 예배당 밖으로 나가겠다. 이것은 어리다고 합니다. 사람이 하고 싶은 것을 아무때나 다 합니까?

이 세상에서 제일 편한 것이 뭐냐 하면 앉은 자리에서 먹고 그 자리에서 싸는 것이 제일 편합니다. 뭘 화장실까지 갑니까? 그렇게 하는 것을 정직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마땅히 회사 가서 일해야 되는데 아침에 일어나기 싫어서 난 사실은 가고 싶지 않다. 그런데 내가 가야 한다는 것은 치사한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속지 않아야 됩니다. 하나님에 관한 설명 중에 전능하시다와 함께 전지하시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런ㅓ데 이렇게 묻습니다. 하나님이 선악과를 만드셨다면서? 예, 그것을 먹으면 안된다며? 예. 그럼 아담과 하와가 먹을 것도 아셨겠네. 아마 아셨겠죠. 그러면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죄를 졌네. 이런 것을 전지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자녀들이 공부하라고 하면 공부를 잘합니까? 잘 안합니다. 원래 정상적인 아이들은 공부를 하라고 하면 잘 안하게 되어 있습니다. 공부를 왜 잘하게 되느냐 하면 부무의 정성과 인내 때문에 하게 됩니다. 부모가 얼마나 정성 되고 인내하고 얼마나 끈질기냐의 싸움으로 자식이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때리기도 하고 달래기도 하고 꾸중을 하기도 하고 창피를 주기도 하며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합니다. 울게도 합니다. 이번만은 내가 너를 믿겠다. 그러고 나서 잠깐 일이 있어 나갔다 올 테니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라. 이번만은 네가 잘할 것을 믿는다 하고 나가면서 부보가 이번만은 잘한다는 것을 압니까? 그래도 안합니다. 그러면 안할 줄 알면서 놓고 나간 것은 부모의 잘못입니까? 그걸보고 부모의 잘못이라고 그럽니까? 안할 것을 뻔히 알면서 나는 이번에 네가 잘할 줄로 믿는다 했으면 안 믿는 것을 믿는다고 했으니까 사기입니까? 그런 것을 가지고 정직이니 아니니 그러지 않습니다. 그것은 한 인간을 만들어가는 과정이고 어리석은 자녀를 키우는 과정에서 있을 수 밖에 없는 하나의 과정입니다.

그러면 그것 외에 다른 과정은 없느냐는 것입니다. 말하면 알아듣는 자녀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그 다음 부터 부모의 책임이 아니라 자녀 자신의 책임입니다. 하나님은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하는데 태초가 언제입니까? 제일 처음입니다.

그러면 테초 전에는 하나님도 없었겠네요. 하나님은 그 전에도 계셨습니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자기가 모르면 없어야 됩니까? 그것이 답입니다. “부활할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죽은 자의 부활을 의논할 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자의 하나님이시라 하시니.”(마22:30-32)

우리나라 말은 뛰어납니다만 논리성을 설명하는 데는 좀 부족합니다. 신약에 기록된 언어는 성과 수와 격, 시제 등이 분명하게 구분되어 논리성에서는 아주 뛰어난 언어입니다. 여기 지금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니님이라 하는 말은 현재 시제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지금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함께 있고 지금 이삭과 함께 있고 야곱과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무슨 애기냐 하면 영계에 관해서 하늘나라에 관해서 애기를 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것이 무슨 소리냐는 것입니다. 부활하면 어떻게 됩니까? 한 여자를 아내로 형제 일곱이 데리고 살았는데 부활하면 누구한테 가야 합니까? 있을 수가 없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대답은 하나입니다. 지금아브라함이 하나님과 함께 있는데 네가 없다고 하면 아브라함은 어떻게 하느냐. 이삭과 야곱이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이 현실인데 그것을 있을 수 없다고 하면 어떻게 하느냐 입니다. 있는 것을 없다고 하니 어떻게 하느냐입니다. 있는 것을 없앱니까? 전부, 이 싸움입니다. 우리는 논리성이나 지식에 의해서 항복받았거나 여기 까지 걸어온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하나님을 본 자요 하나님을 알게 된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계신데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논리적으로 아무리 따져도 하나님은 안꼐십니다. 있을 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정직한 사람이 상을 받지 못하고 악당들이 더 잘 먹고 잘 살고 하니 하나님이 계시다면 세상이 이꼴로 가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주를 향한 열심을 품으며 신앙적인 진지함을 갖고 있는데 그대로 행해지지가 않습니다. 하나님이 있다면 어떻게 이런 법이 있을 수 있습니까? 말이 맞는데 하나님이 저기 계시잖아요. 그런데도 하나님은 안계시잖아요, 맞지요 없지요? 그 말을 누구한테 하는 것입니까. 우리의 기도를 가만히 보십시오. ‘하나님 이럴 수가 있습니까? 저는 하나님을 못 믿겠습니다. 이런 하나님을 저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하나님 안계신 겁니까?’ 우리가 하나님에게 나와서 기도를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믿으면서도 어디로 흐르고 있느냐 하면 논리성으로 너무 흐르고 과학적인 방식으로 너무 흘러서 하나님 앞에 나와서 하나님, 없지요? 그럽니다. 조심하십시오.

우리 신앙의 근거를 놓치지 마십시오. 그래 놓고서 이제 우리가 가진 논리성으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시지 않은 것을 놓고 하나님께 우기고 있습니다. 왜 주를 믿고 성의를 다했는데 이렇게 됐습니까 합니다. 하나님이 언제 그랬습니까. 예수 잘 믿으면 대학 붙여 준다고 언제 그랬습니까. 예수 잘 믿으면 건강해 진다고 언제 약속했습니까. 그런 약속은 없습니다.

마태복음 5장에 가면 신자 된 가장 중요한 표를 형통과 승리로 약속하지 않고 이런 것으로 약속하고 있습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5 : 11, 12)

산자가 된 가장 중요한 표는 세상이 우리를 싫어하고 핍박한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을 제대로 살기 위해서 제일 필요한 방법이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해보십시오. 세상이 우리보고 어떻게 살라고 합니까? 양보하지 말라, 지지말라, 약해지지 말라, 정직하지 말라 아닙니까. 기회가 았을 때 밟아라, 온뉴월에 개구리 밟듯이 밟아라 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못 산다, 못 이긴다. 정직 같은 것은 워싱턴 전기 읽을 때나 봐라, 내 사전에 정직은 없다, 양보는 없다. 미덕, 윤리는 집어치우고 일단 우겨라. 이것이 세상이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뭡니까?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원수가  주리거든 먹여라. 악을 악으로 갚지 말아라. 한 알의 썩는 밀알이 되라입니다.

무슨 수로 세상에서 대접 받고 산다는 말입니까. 어디가 공통되는 부분이 있습니까. 우리가 이렇게 살므로써 무엇이 증명이 됩니까. 우리는 하늘에 보물을 쌓는 자다, 우리는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 앞에 있는 자다, 그렇게 함으로써 세상이 우리 앞에서 흔들리는 것입니다. 세상을 부여잡고 예수를 못 보게 하며 진리를 못보게 하여 그들을 지옥에 보내려는 공중 권세 잡은 자 들이 빛으로 살며 의로 살며 진리로 사는 자들로 인하여 저들의 기초가 흔들리는 것을 좋아할 리가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며? 하나님이 천하만물의 주인이시라며? 복 주신다며? 그런데 왜 그렇게 사냐? 자존심을 흔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있으면 보여 봐라. 하니님이 있다면 왜 네 기도에 응담하지 않느냐. 십자가상에서도 일어났던 일 아닙니까.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저가 엘리야를 부른다. 하나님을 부른다. 하나님이 내려와서 구해주나 안 구해주나 보자 합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꺼내 주셨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십자가의 방법을 통해서 우리를 꺼내셨습니다. 우리에게 당연한 요구를 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잘 먹고 잘살기 위해서 신앙생활합니까? 그렇다면 사두개인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가 주를 찾아 온 것이 ‘주여 나는 어찌하여 배고프며 이렇게 고통스러우며 이렇게 괄시를 받고 살아야 됩니까? 라고 찾아 나오는 것이라면 비록 여기 교회에 나와 앉아 있는다 할지라도 분명히 사두개인이고 바리새인이고 이 시대에 있었던 기회주의자들과 똑같이 세상을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믿는 어리석은 사람에 불과합니다. 저는 오늘날 한국교회의 가장 큰 문제가 죄를 짓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죄는 지을 수 있습니다. 이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교회들이, 신자들이 영원을 향하여 걸어가고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진리와 생명의 길에서 떠나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이런 사람들을 세 사람 정도 갖고 있습니까? 그 사람을 생각하면 영원과 진리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행적을 갖는 사람, 예수를 믿는다면 저래야 돼. 그 사람을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오늘 지켜보고 계시다는 것을 느끼게 돼. 이런 사람을 세 사람 댈 수 있습니까. 쉽지 않습니다.

엘리야가 하나님 앞에 다 도망가고 나만 남았나이다 했을 때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자 칠천 명을 내가 숨겨 놓았다 한 것같이 지금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러실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 는 그것이 교계에 신앙인들 사이에 선두주자요 대표되는 모습으로 나타나 있지 않기 때문에 안타깝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결국 부적 얻으러 가는 곳이 되고 말지 않았습니까? 정치를 하는 곳이 되지 않았습니까? 신을 알고 신을 섬기고 그에게 복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인생에서의 잘 살고 잘먹는 것 때문에 필요한 하나의 방법이 되고 말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그것이 바리새인입니다. 그것이 사두개인입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안 사셔야 됩니다. 지난 주에 이어 한 가지 더 요구하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여러분을 쳐다보는 모든 사람들 앞에 여러분은 신앙인으로서 서십시오. 여러분을 쳐다보면 모든 사람들이 저 사람은 분명 이 세상을 사는 방법으로만 살지 않는 사람이다라는 귀한 느낌을 받게 하셔야 됩니다. 그리고 그 일로 말미암아 여러분이 고통을 당하실 것을 각오하셔야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여러분의 기쁨이 되셔야 됩니다. 자랑이 되셔야 됩니다. 그것 이외의 것, 세상에서의 평가로 여러분이 만족하고 있다면 그것만큼 무서운 것은 없습니다.

그 잠자던 자리에서 깨어야 됩니다. 주께서 오늘 우리를 통해서 하시려는 일들을 할 수 있는 자가 돼어야 합니다. 그것으로 인하여 세상과 대적관계에서 계셔야 됩니다. 성경이 얘기하는 것같이 공중권세 잡은 자와 싸우기 위하여 마주 서야 됩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시고 신자로서 사는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의 멸망이 의인 열명이 없었기 때문인 것을 기억하십시오.

지금 이 민족 이 나라 이 사회에 필요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의인 열명이 필요합니다. 그 열명을 채우는 숫자에 자기 자신이 꼭끼기 위하여 중요하고도 놓칠 수 없는 우리의 삶, 우리의 신앙 우리의 운명을 주님 앞에 호소하시고 매어달리시고 바른 괘도로 돌아 오십시오. 맹렬하게 주께 구하시고 간절함으로 그 답을 얻어내시고 열심히 남은 생애를 그 일을 위하여 전력투구하십시오. 성경이 요구하는 것같이 첫째된 계명을 지키십시오. 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명령 앞에 순종하시기를 권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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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5 사도행전 성경적 종말관 행11:27-30  박영선 목사  2009-06-24 20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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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8 사도행전 마술사 시몬 행8:9-24  박영선 목사  2009-06-22 3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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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5 마태복음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마27:38-42  강종수 목사  2009-06-21 2146
1684 사도행전 스데반과 성전 행7:44-50  박영선 목사  2009-06-20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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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1 사도행전 스데반의 설교 행7:51-53  박영선 목사  2009-06-20 3036
1680 사도행전 스데반의 생애 행6:8-15  박영선 목사  2009-06-20 2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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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8 사도행전 사도들- 공회 앞의 증거 행5:27-42  박영선 목사  2009-06-20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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