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 성경본문 : | 행8:14-17 |
|---|---|
| 설교자 : | 박영선 목사 |
| 참고 : | 사도행전 050 / 민족주의를 넘어서 / 행 8:14-17 / 1989.03.19 |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 그들이 내려가서 저희를 위하여 성령받기를 기도하니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러라 이에 두 사도가 저희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사도행전8:14-17
오늘 우리가 생각해보려는 말씀은 신약성경 중에서 가장 논쟁이 심하게 벌어지고 있는 부분입니다. 그 논쟁의 중요한 내용은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는 것과 성령이 임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냐 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있어서 잘못하면 이런 견해까지도 나오게 됩니다.
신자는 두 가지 신분이 있다. 평범한 신자가 있고 특별한 신자가 있다.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얻어 천국 가는 신자가 있지만 그 중에 성령세례를 받을 만큼 특수한, 말하자면 특수한 계급, 특수층이라고 일컬을 수 있는 좀더 고급한 신자가 있다 하는 데까지로 갑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 성경을 상당히 많이 상고해봐야 됩니다. 먼저 이 질문에 대해 답하기 위하여 처음 생각할 것은 성경이 예수 믿는 자들에게 약속한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결론부터 얘기를 해서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성령이 임하십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보는 바와같이 여기는 그 성령 임한 것이 내적으로 본인도 모르고 주변에서도 모르는 식으로 임한 것이 아니라 본인과 주변에서 알 수 있도록 눗活岵막?눈에 보이도록 임하셨다는 것이 큰 문제가 됩니다. 성령께서 임하시는 것이 우리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고 하나님의 백성인 것을 확인하는 이외의 것, 말하자면 좀더 객관적인 증거를 하여 성령이 내 안에 계척募?것이 자각증상이 있을 만큼 있는 일은 좀더 다른 부분이고 우리 보통 신자들이 누리지 못하는 것이다 하는 부분에 대해서 답을 해야만 됩니다.
성경은 우선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모든 신자는 다 신분상으로 동일하다고 합니다. 특수층과 일반층이라는 계급이 없습니다. 물론 신자 중에 더 성숙한 신자와 덜 성숙한 신자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같은 학년에서 공부 잘하는 학생과 공부 못하는 학생이 있는 식이지 계급이 다른 신자는 없습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성령님이 오시는 것이 본인도 모르게 예수 믿는 모든 사람의 심중에 와 계시는 것과 보이게 오는 것이 분명히 다른 것이라고 얘기를 하고 있는가? 다른 것이라고 얘기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성령님이 우리에게 오시는 일 중 하나는 내주하시는 일이 있고 하나는 이렇게 인치시고 충만케 하시는 성령의 사역이 있습니다. 성령께서 나타나심,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는 것을 나타내시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다르냐? 그리고 신자는 어디까지 요구해야 하느냐에 대해서는 상당히 긴 답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성경에는 성령님께서 오셔서 우리를 인치시고 우리를 충만케 하시고 자기 자신에게나 다른 사람에게 드러나도록 행사하신 역사가 보편적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현대 교회는 이 일이 분명히 적어지고 있고 그 구하는 일에서나 경험하는 일에서 굉장히 쇠퇴하고 있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예를 들면 데살로니가전서 1장을 가보시겠습니다.
"우리가 너희 무리를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함은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살전1:2-6)
여기는 분명히 지식적인 것, 이런 쪽으로만 데살로니가 교회 교인들이 예수를 믿게 된 것이 아니라 그 이외에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 성령으로 말미암는 큰 기쁨, 이런 것들이 언급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갈라디아서 3장에 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갈3:1-5)
이제 성령을 받았다는 것이 분명히 자각된 경험으로 기록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특별히 고린도전서 같은 데는 고린도 교회에 성령의 나타남, 성령의 강림하신 개인적인 경험들뿐만 아니라 은사 문제 같은 것이 이미 보편화된 경험인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그 일을 사용하는 데 있어서 일어나는 부작용들을 지적하고 있고 성령의 외적인 증거로서 나타나는 성령 세례, 성령 충만한 일들이 이미 보편적으로 경험된 것을 그 논조로 깔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날도 우리가 신앙생활에 있어서 성령님이 좀더 우리에게 확실한 증거와 힘과 격려하는 일과 간섭하는 일로서 더 많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성경의 약속인 줄 알고 기도해야 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제가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은 이 구절을 가지고 이러한 질문을 할 때에 필요한 최소한의 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사도행전 8:14-17까지의 내용은 이 논쟁으로 벌어질 본문이 아니라고 생각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8:14-17까지 있는 이 일, 즉 빌립 집사에 의하여 사마리아 거민들이 회개하고 주를 믿고 신자가 된 이래 나중에 예루살렘으로부터 사도 중에 두 사람인 베드로와 요한이 와서 안수하여 성령을 받는 일이 별개의 것이냐 하는 논쟁을 불러 일으키는 본문으로서는 부적합하다는 것입니다. 이 본문은 그것을 목적으로 하여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 우선 기억할 것은 사도행전의 주된 주제와 의도가 무엇이냐 하는 것을 상기해 보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사도행전1:8에도 있는 바와 같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예루살렘과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신 말씀이 어떻게 실제로 이루어져 가고 있는가를 보이는 것이 가장 큰 주제입니다.
사도행전 전체가 갖는 목표가 그것이고 그래서 우리가 지금 특별히 예루살렘과 유대를 벗어난 첫 지방, 사마리아에 어떻게 주의 복음이 증거되고 거기서 주께서 어떻게 심령이 병든 자들, 사망의 그늘에 누운 불쌍한 영혼들을 회개케 하고 주의 백성을 삼으시는가 하는 것을 보는 것이 성경이 의도한 것과 부합된 시각인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나타나는 성령 강림, 즉 뽀舅美?두 사도가 와서 안수하여 성령이 임하시는 것도 순서적으로 왜 빌립이 아서 전도하여 구원 얻는 일이 있고 예수 믿는 일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시간을 두고 또 다른 사건으로 사도들이 와서 안수하여 성령을 받는가? 이렇게 볼 문제가 아니고 가장 중요한 핵심은 하나님의 백성 되는 조건과 근거가 이스라엘 민족이어야 된다는 민족주의의 카테고리를 벗어나서 주께서 얼마든지 부르는 사람들, 성령님으로 말미암는 사람들로 하나님의 백성이 구성된다는 것을 밝히기 위하여 여기 성령 강림이 기록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8 식으로 얘기를 하자면 사도들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도록 부탁을 받고 있습니다. 왜 주께서 너희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 그러십니까? 구원의 대상이 예루살렘으로 정해져 있기 때문은 아닌 것입니다.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기 위해서입니다.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 성령입니다. 왜 그것이 필요했습니까?
사도행전 1:8에 있는 것같이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분명히 능력입니다. 여기서는 그 능력을 받기 위하여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기로 되어 있지만 능력을 받은 이후는 어떻게 하기로 되어 있습니까? 땅끝까지 가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사도들은 유대주의를 못 버리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예루살렘에서 핍박이 일어나자 다 도망가는데 사도들만은 떠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직도 유대 땅을 벗어난다는 개념이 없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으리라. 그 권능을 받기 위해서 예루살렘에서 기다려야 했었지 그것을 받은 다음에는 땅끝까지 가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생각이 아직 없습니다. 유대주의를 못 벗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실 이 두 사도가 사마리아 땅에 왜 왔느냐 하면 빌립에 의해서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됐다는 사실을 조사하러 온 겁求? 그것이 적극적이고 축하를 하러 온 것이 아니라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 하는 의미에서 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와 보니 사실이고 그래서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추측하자면 긴가민가 해서 안수를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을 조금 너무한 표현이지만 그런 분위기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도행전 10장에 가야 알 수 있는데 베드로가 고넬료라는 집에 초청을 받고 갑니다.
그때 주님께서 보여주신 환상을 그가 거부합니다. 사실은 주님의 강권에 의해서 가고 그가 가서 그 도를 전할 때에도 그가 마음에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서 별로 적극적인 생각을 갖지 않습니다. 말을 하는 동안에 성령이 내리시는 것을 보고 그가 거기서 깨닫습니다.
나중에 그 일로 하는 데 있어서 베드로가 주께서 우리보고 땅끝까지 가라고 그러지 않았더냐라는 것으로 답을 삼지 않습니다. 성령이 임하셨는데 내가 뭐 어떻게 하란 말이냐 그런 소극적이고 아주 부정적인 답변을 해 놓습니다. 말하자면 그래서 사도행전 8장에 나타난 이 사건은 이것을 대비하기 위해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제부터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근거와 조건은 유대인이어야 된다는 민족주의의 개념을 벗어나서 성령님으로 말미암는다 하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이 사건은 기록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시 사도행전 1:8의 말씀으로 돌아가서 보자면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라는, 그 권능을 받는다는 것도 하나의 능력으로만의 얘기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땅끝까지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되는 사도들에게 힘을 주는 문제라면 사도행전에 그토록 많이 기록된 핍박과 순교는 앞뒤가 안 맞는 것이 되지 않습니까?
그것이 능력에 관한 문제라면 사도들이 한마디라도 외치기만 하면 성령이 함께 하시므로 그것이 100% 결실하고 그들이 가는 길에 아무도 대적할 자가 없는 것으로 나타내야 되는데 사도행전은 우리가 보는 바와같이 사도들이 당한 핍박이 이만저만이 아니고 또 사도 바울에 이르러서는 가는 데마다 훼방을 당하고 방해를 받고 도망가고 매맞고 돌로 맞고 하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렇게 보자면 여기서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는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방법론으로서의 권능은 아닌 것입니다. 물론 그것이 전하는 사람의 확신과 힘으로써 방법론적인 능력으로도 일조했겠습니다만 사도행전이 좀더 확실하게 알려주고 싶은 것은 이제부터 네가 나가서 전하는 이 일은 유대인이어야 된다라는 그런 조건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령 하나님께서 구원해 내는 일이다 하는 쪽에서의 능력입니다.
이제부터 네가 나가서 전하는 이 일들에 대해서 네 말의 지혜나 네 학식이나 네 열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제 성령님께서 친히 심령들을 항복시키시고 주의 백성으로 불러내는 일을 한다. 그 일의 시작을 기다려라. 성령이 임하시는 다음에야 이 일이 행해져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사도들과 거기 모여있던 사람들이 성령으로 권능의 충만함을 입어야 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이제부터 성령이 오셔서 성령께서 각 사람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불러내시는 일을 시작하셔야 이 일을 출발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못합니다. 성령이 임하십니다. 이제부터 어디든지 갑니다. 성령께서 유대주의라는 문턱을 넘어서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부르시는, 땅끝까지 부르시는 그리고 그 일을 앞장서서 하시는 성령님의 역사와 성령님의 일하심을 따라 이제 사도들이 가는 것입니다. 그런 개념에서 사도행전 8장의 사건이 기록되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이런 얘기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럼 이 사도들은 뭐냐? 빌립이 가서 전한 것은 무엇이며 나중에 사도들이 가서야 성령이 내리시는, 왜 이런 식으로 기록됐느냐는 것입니다. 처음에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것으로 인하여 많은 논쟁과 많은 문제가 생겼다 그랬습니다. 거기에 대한 아주 적절한 답이 성경에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3:5 말씀부터 봅시다.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 심는 이와 물 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고전3:5-9)
이것이 얼마나 적절한 답입니까? 빌립이 한 것이 뭐고 사도들이 한 것이 뭡니까? 심고 물 준 것에 불과합니다. 결국 하나님이 뭘 하려고 그러셨습니까?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자녀들은 성령으로 말미암으며 성령으로 인치시며 성령이 주관하신다 하는 것이 골자입니다. 빌립이 한 일, 베드로가 한 일, 이렇게 나누어서 빌립 집사의 구원 수준과 베드로가 안수하여 성령받게 한 수준으로 나누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심는 자나 물 주는 이가 다 일반입니다. 자라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결국 다 하나님꼐서 하시려는 일에 어느 한 부분들을 맡은 것입니다. 둘이 별개의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은 그가 부르시는 자녀들에게 이제 성령을 보내신다는 것입니다.
옛날에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을 부를 때는 이스라엘 백성으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구약식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부르는 방법이었다면 이제 신약적 시각에서는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성령님을 보내서 부르시며 회개케 하시며, 정결케 하시며, 성령님으로 충만케 하시는 것으로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핵심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성령님이 우리의 운명과 신분과 우리의 우리 된 모든 것을 증명으로써 존재하심을 여러 곳에서 얘기를 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로마서 8장을 보십시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8:9-11)
신자의 존재론을 얘기할 때 이렇게 얘기합니다. 우리가 왜 구원을 얻고 우리 구원이 취소되지 않느냐?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시니까. 성령 하나님이 패배할 수 없고 성령 하나님이 비천한 자리에 갈 수 없듯이 성령 하나님이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와 하나가 되십니다. 성령 하나님이 영광된 자리에 갈 수밖에 없다면 그와 하나 된 우리도 같이 갈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동대문에 가면 제 손가락이 어디에 갑니까? 동대문에 갑니다. 손가락으로 남대문을 가리키고 있다 하더라도 내 손가락이니까 나와 하나라는 것입니다. 구약적인 구원관이 이스라엘 백성이 된다는 것으로 그들의 부름받는 조건과 근거와 표가 있었다면 이제 신약시대에 와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그 표며 증거며 우리의 신분에 보증이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에 가시면 바로 그런 표현이 나옵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에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고후5:1-5)
우리에게 영광된 지위, 영광된 결국을 약속했는데 그것이 이루어 지고야 말 것을 성령으로 확인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을 하다 이런 흔들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번에 세례를 받는데도 많은 분들이 그 고백을 하셨습니다. 예수를 믿으십니까? 그러면 그냥 웃습니다. 왜 확실하게 대답을 못 하십니까? 믿고 싶은데 안 믿는다고 할 수도 없고 믿는다고 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오셨습니까? 그러니까 믿는 쪽으로 이제 기울어지기 시작을 해서 세례를 받기로 했고 그동안은 안 믿는 것은 아닌데 믿는 쪽이라고 표현할 만큼 안되어 있었기 때문에 보류되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를 받으시면서도 한가닥 불안한 마음을 가지시는 것입니다. 세례받은 이후의 내 마음의 저울이 저쪽으로 다시 돌아가면 어떻게 하는가? 거기에 대한 답입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우리 모든 신자들에게 그런 의문이 있습니다. 내가 신앙생활을 하다가 어떻게 될지 어찌 알아요. 그럼 어떻게 되는가? 거기에 대한 답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시고 우리에게 주마 약속했던 모든 것들은 나의 신실함이나 재능이나 열심에 근거해서 이루어지지 않고 우리 안에 보내신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에서나 지금 고린도후서 5장에서 보는 바나 똑같은 내용입니다. 내가 아무리 개판을 쳐도 내 안에 성령님이 계시니까 일은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구나. 그것도 맞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우리를 언제 불렀죠? 언제 우리를 구원했다 그럽니까? 로마서 5:7에 의하면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입니다. 아버지께서 우리를 위하여 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십니다. 우리가 죄인이고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을 모를 때 우리를 하나님께서 백성 삼으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삼았기 때문에 우리를 거듭나도록 하십니다. 주께서 우리 인생에 간섭하셔서 우리를 회개케 하며 주를 믿게 하고야 맙니다.
그 다음에 성령을 보내셔서 내가 너를 내 자녀 만들기 위해서 내 아들 예수를 보내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한 것같이 너를 내 자녀로 불러 냈으므로 이제 너를 영광된 자리에 이르게 할 것인데 그렇게 할 내 결심에 확고부동한 증거로 성령을 네 마음에 보내노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의 자녀 삼으셔서 그 자녀 삼으신 것을 그 분이 우리의 죄를 씻기 위하여 예수를 이 땅에 보내어 십자가에 달아 매도록까지 우리에게 필요한 일을 행하시고야 맙니다. 그리고 그렇게 구원받게 한 우리를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거룩하고 흠 없고 영광의 상태에 이르도록 하기 위해서 성령을 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판을 쳐도 간다가 아니라 성령, 그러니까 완전히 가정교사까지 보내는 것입니다.
이제는 네 마음대로 해봐라 이것입니다. 네가 내 말 안 들으면 매맞을 일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때리고 때려서 안되면 부러뜨리고 잘라가지고 그래도 안되면 찢고 짓밟아서라도 오게 하고야 말겠다는 사실이 성령을 보내신 가장 큰 이유입니다. 로마서 8장으로 가보십시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8:24-26)
우리는 우리 혼자 생각하는 것만으로 우리의 운명이 결정되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성령께서 오셔서 내 생각이 주의 뜻과 맞지 않을 때는 성령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고 우리를 그리로 인도하시고야 맙니다. 그래도 내가 부득부득 나쁜 길로 가고 원치 않는 길로 가면 어떻게 하십니까? 그럼 네 고집대로 한 번 해 봐라 하시지만 손을 놓치는 않습니다. 따라 오십니다. 넘어져서 코 깨고 울고불고 할 때까지입니다.
옛날에 제갈공명이 그랬습니다. 남만정벌을 하러 갔다가 맹획을 마음으로 항복할 때까지 7번 잡았다 7번 놓아줍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공갈 협박과 독재적으로 인도하시지 않는 것으로 인하여 성령님이 우리에게 없다든가 성령님이 우리를 방치하신다든가 우리의 운명이 내 실력과 내 재주에 놀아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를 항복시키기 위하여 우리의 실패와 실수들을 잠시 놓아두는 때가 있을지언정 우리의 운명이 우리의 이 변덕 심하고 연약하고 미련한 우리의 생각에 달려있지 않다는 것이 성령이 얘기하는 신자의 존재론인 것입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사도행전 8:14-17까지의 사건이 기록되는 것입니다.
빌립에 의하여 구원얻은 사람들에게 사도들이 와서 안수하여 성령이 임하십니다. 사도들이 그렇게 하도록 한 것은 얼마나 멋집니까? 더 이상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이름으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부르시되 성령 하나님이 친히 오셔서 그 마음을 변화시키시고 그의 운명을 장악하시며 와서 거처를 함께 하사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시고 우리 앞길을 그 분이 앞장서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도하고야 말 것이라는 표로 성령님이 강림하시는 것都求?
이스라엘 백성이어야만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었던 조건으로부터 민족주의가 아니며 무슨 인종과 학식으로 구별되지 않고 성령 하나님의 부르심과 은혜와 긍휼과 자비로 말미암아 부름을 받으며 그 안에서 그의 운명이 확정되고 고정된다는 이 일을 역사적으로 알리기 위하여 이 사건에서 성령님께서 이렇게 보이게 임하시고 분명하게 기록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마리아에서 예수 믿었던 사람들이 성령을 받은 것같이 그렇게 외적으로 혹 드러나는 경험을 갖고 있지 않을지라도 우리는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신 자들이고 그래서 우리 운명은 실패될 수 없는 자들이며 하나님 앞에 온전하게 영광 중에 드러나도록 지금 인도함을 받고 있는 자들인 줄 알고 감사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더 큰 성령님의 간섭을 기도하는 여러분이 되시고 여러분 안에 계신 성령님이 여러분을 위하여 기도하시는 데 귀기울일 줄 아시는 신앙의 깊이를 가지시기를 바라고 우리가 우리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실패될 수 없는 신자라는 것을 인하여 담대함과 감사함을 놓치지 않는 신자가 되기를 권합니다. *
|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