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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방법

사도행전 박영선 목사............... 조회 수 2633 추천 수 0 2009.06.25 00:0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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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행12:12-17 
설교자 : 박영선 목사 
참고 : 사도행전 066 /1989.07.16 

“깨닫고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모여 기도하더라 베드로가 대문을 두드린대 로데라 하는 계집 아이가 영접하러 나왔다가 베드로의 음성인 줄 알고 기뻐하여 문을 미처 열지 못하고 달려 들어가 말하되 베드로가 대문 밖에 섰더라 하니 저희가 말하되 네가 미쳤다 하나 계집 아이는 힘써 말하되 참말이라 하니 저희가 말하되 그러면 그의 천사라 하더라 베드로가 문 드드리기를 그치지 아니하니 저희가 문을 열어 베드로를 보고 놀라는지라 베드로가 저희에게 손짓하여 종용하게 하고 주께서 자기를 이끌어 옥에서 나오게 하던 일을 말하고 또 야고보와 형제들에게 이 말을 전하라 하고 떠나 다른 곳으로 가니라”         사도행전 12:12-17

감옥에 갇혔던 베드로가 하나님의 기적적인 간섭으로 천사의 인도를 받아 감옥을 나옵니다. 베드로를 위하여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집에 사람들이 모여 기도하고 있는 곳에 베드로가 와서 자기가 구출받은 것을 알립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는 중요한 내용으로 베드로가 잠적해 버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우리에게 신기합니다. 왜냐하면 베드로가 옥에 갇혔을 때 얼마나 신앙이 담대했냐 하면 두 군사틈에 누워서 오른편에도 군사가 하나 있고 왼쪽에도 하나가 있어서 손과 발을 같이 묶고 있는 겁니다. 내일 죽을 겁니다. 그런 틈바구니와 절대 절명의 순간에도, 천사가 나타났을 때도 알아보지 못할 만큼 깊이 잠들었던 베드로입니다. 신앙적으로 얘기하면 보통 담대한 것이 아닙니다. 죽는다면 죽는다 하는 신앙으로도 담대하고 하나님이 어떻게 해 주실 것이다 하는 면으로 생각해도 어쨌든 대단한 신앙입니다.

여러분이 만일 이런 기적적인 하나님의 간섭 속에서 어떤 위기를 탈출했다면 숨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감옥에서도 꺼내셨다. 나를 죽을 자리에서도 꺼내셨다. 그러면 얼마나 담대해지겠습니까? 그런데 본문은 베드로가 저희에게 어떻게 주께서 자기를 옥에서 꺼내셨는가를 얘기하고 잠적해서 이 이후로는 베드로 얘기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아주 신기합니다. 우리에게 너무나 많이 오해되는 부분입니다. 신앙인들의 가장 큰 오해가 믿음이 무엇인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나는 주를 믿는다. 우리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과 온 천하만물을 지으시고 간섭하는 능력을 믿는다. 그래서 그 믿음이 그를 어떻게 만드느냐 하면 방자하게 만든다는 말입니다.

대표적인 실례를 민수기 14장에서 보십시다. 이스라엘이 애굽을 나와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 가데스 바네아라 하는 곳에서 열두 정탐꾼을 가나안 땅에 보내고 그들이 귀환하여 보고를 들은 때입니다. 그 열두 정탐꾼이 갔다 와서 하는 얘기가 과연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더이다. 그러나 그곳 족속은 어찌나 큰지 우리가 보기에 그들 앞에 우리가 메뚜기 같더이다. 땅은 좋은뎅 들어가서 탈취할 힘이 없습니다. 그리고 소리쳐 올었던 장소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일러 가라사대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을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른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 너희 이십세 이상으로 계수함을 받은 자 곧 나를 원망한 자의 전부가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로 거하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민 14:26-30). 그래서 우리가 잘 아는 광야 40년을 유랑하는 일이 빚어지는 것입니다.

“모세가 이 말로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고하매 백성이 크게 슬러하여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산꼭대기로 올라가며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여기 있나이다 우리가 여호와의 허락하신 곳으로 올라 가리니 우리가 범죄하였음이니이다 모세가 가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제 여호와의 명령을 범하느냐 이 일이 형통치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 중에 계시지 아니하니 올라가지 말라 너희ㅡ 대적 앞에서 패할까 하노라 아말렉인과 가나안인이 너희 앞에 있으니 너희가 그 칼에 망하리라 너희가 여호와를 배반하였으니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난 그들이 그래도 산꼭대기로 올라갔고 여호와의 언약궤와 모세는 진을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아말렉인과 산지에 거하는 가나안인이 내려와 쳐서 파하고 호르마까지 이르렀더라.”(민 14:39-45)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이 약속한 땅을 정탐하고 좋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들어가는 것은 거부했습니다. 신앙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울고 불고 하나님을 원망해서 하나님이 이 백성을 다 광야에서 죽이고 그 후손들로 들어가게 하겠다 그랬습니다.

  그러자 다시 일어나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하신 대로 들어가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모세가 그러지 말아라. 하나님이 너희의 원망하는 말을 듣고 이미 판결을 내리셨다. 이제와서 올라가지 말아라. 그런데 올라갔다가 적군에게 패해서 도주했다는 기록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 하는 내용이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를 놓친 대표적인 사건으로 우리에게 교훈을 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보십시다. 여러분 자녀가 공부를 못했습니다. 통지표를 받고 부모가 야, 너는 어떻게 이렇게 공ㅂ를 못하냐? 그래서 패줄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때 자녀가 딱 방문 닫아 걸고 공부한다고 합니다. 눈물을 딱딱 찍어내면서 야 밥 먹고 해라 밥 안 먹는다 이겁니다. 왜 안 먹니? 공부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회개했다 그럽니까? 그러지 않습니다. 반항하는 겁니다. 엄마가 공부하랬잖아요. 밥도 안 먹고 공부하겠다 이겁니다.

지금 민수기 14장 얘기가 바로 그 얘기입니다. 하나님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약속했습니다. 가보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젖과 꿀이 흐릅니다만 우리가 들어가서 얻을 힘이 없습니다. 우리는 못들어갑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누구 약만 올리시는 겁니까? 오! 너희는 내가 너희를 인도해서 거기 들어가서 그 백성을 쫓아낼 것이라고 못 믿었단 말이냐? 너희는 그 믿음 가지고 못 들어간다. 내가 너희를 구하기 위해서 애굽 왕 바로에게 행한 것과 홍해를 건넌 것과 광야 길을 오는 동안에 너희를 막았던 족속들을 무찌른 것을 벌써 잊었단 말이냐?

만나를 먹고 만석에서 나오는 물을 마시고도 모르느냐? 너희에게는 안되겠다. 너희는 그 벌로 40년 동안 이 광야에서 유랑하다 죽어야 한다. 그러니까 홀까닥 하는 겁니다. 좋아요 밥 안 먹고 공부하겠다 이겁니다. 이것이 순종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진심과 두려움으로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기분과 경홀함으로 하나님께 신경질을 부리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신자들이 뜻밖에도 걸리기 쉬운 신앙상의 큰 시험거리 중 하나입니다. 베드로는 바로 이 문제에서 벗어나는 겁니다. 우리는 사도행전 앞장에서 어찌하여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환난과 고통과 핍박의 인생을 걷게 하시는가? 하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의 악한 세력에 비교해서 힘이 약하신 것이냐? 아니면 이 세상을 살아나가는 신자들에 대해서 외면하고 계시는 것이냐? 둘다 아니라고 그랬습니다. 하나님은 온 천하만물의 소유권자일 뿐 아니라 역사를 직접 하나님께서 주관하고 프로그램을 짜고 진행하시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왜 신자에게 어려움이 있느냐? 그 환난이 신자에게 유익하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이 세상 사람을이 악하고 패역한 것을 고치려고 한다면 지금 심판을 행해야 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긍휼하심으로 지금 참고 계셔서 그런다 그랬습니다. 바로 그것을 베드로가 깨우치는 것입니다. 즉 베드로가 감옥에서 천사로 말미암아 기적적인 구출을 당하는 것은 곧 하나님이 이 세상의 기존 질서를 지금 파괴할 마음이 없다는 것으로 알아듣는 것입니다.

신자들이 보통 오해하는 것은 자기에게 어떤 기적이 임하면 이제는 그 기적이 그전에 있었던 체계와 질서를 대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고린도전서 13장으로 가서 조금 더 자세히 풀어 보기로 하십시다.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패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패하리라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패하리라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니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8-13)

고린도전서 13장 앞에는 물론 12장이 있고 13장 뒤에는 14장이 있습니다. 12장과 14장은 모두 은사장입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13장인 사랑장이 끼어있고 그것은 뜻밖에도 여러분이 다시 한 번 자세히 보시면 12장에서 14장에 이르는 흐름을 돌연하게 깨는 것으로 들어와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흐름을 깨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긴급 동의를 한 것 같습니다. 13장의 내용이 은사란 무엇이냐를 분명하게 밝혀주기 위해서입니다. 은사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하여 사랑장이 가운데 낍니다.

은사란 무엇이냐? 우리가 지금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준 비상조치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완전하도록 이 세상과 질서 체제를 아직은 바꾸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구데타를 일으킬 마음이 아직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직 이 세상의 악과 불의한 것을 몰아내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아직은 건설하지 않겠다는 뜻이요 죄악을 몰아내고 심판하는 것을 아직은 보류하고 있다는 뜻이 되는 겁니다. 이것이 사랑장의 위치입니다.

우리에게 은사가 왜 있느냐? 지금 우리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부족한 채로 살도록 이 불의하고 패역한 것이 신자들을 괴롭히며 방해하며 핍박하는 것을 견디도록 하기 위해서 거기에 져서는 안되니까 하나님이 비상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조처를 취한 것이 은사다 이것입니다. 지지 않도록, 은사가 주어진 것으로 이제부터는 그냥 알아듣는 말로 기도할 것이 아니라 꼭 방언으로만 해야 된다. 이제는 ㅂㅇ원가서 고칠 것이 아니라 기도해서 고쳐야 된다는 체제의 변화가 아닙니다. 이 체제를 놔두는 대신 이것으로 인하여 신자의 운명과 신자의유익이 방해받지 않게 하겠다는 비상한 조처는 있으되 이 기존 질서는 아직은 없애지 않겠다는 뜻으로 방언이 와 있고 병고침이 와 있다는 것입니다. 즉 은사가 와 있다는 것을 알리는 말입니다. 베드로 쪽에서 지금 보자면 왜 천사를 보내서 감옥에서 구출을 했느냐 하면 아직 이 세상 권세를 깨뜨리고 예수님이 재림 나팔소리와 함께 와서 모든 죄와 사망과 해하는 것과 거룩한 것을 반대하는 세력을 아직은 불못에 던지지 않겠다는 뜻이다로 알아듣는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해야 됩니까? 핍박하고 잡아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 앞에 도망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잘봇 해석하면, 그렇다 이제 하나님께서 내가 무슨 일을 당하든지 천사르르 보내 꺼낼 것이다. 그래서 헤롯 앞에 가서 잡아봐라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신자가 뜻밖에 크게 오해하기 위운 대목입니다. 신앙이란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누구시며, 즉 하나님이 얼마나 능력이 많으시며 우리를 사랑하시는가와 함께 그가 그 일을 어떻게 이루시는가까지도 알아야 되는 것이 신앙의 중요한 부분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하여 대표적으로 오해한 사람과 잘 이해한 사람 둘을 구약에서 찾아보아 비교하려고 합니다. 열왕기상 19장으로 가 보십시다. 엘리야를 봅니다. 19장에 등장하느느 사건 배경을 먼저 설명을 합니다. 때는 이스라엘이 남북 왕조로 갈라져 있을 때 북왕조인 이스라엘의 왕 아합은 대표적인 악한 왕입니다. 이 아합은 여러분이 잘 아신느 그 백경이라는 소설에 선장의 이름으로 등장한 그 사람이기도 합니다.

백경을 쓴 멜빌이라는 사람이 그 글을 쓸 때 인본주의, 휴머니즘의 선봉자로 이 아합이라는 이름을 갖다 씁니다. 상징적인 소설입니다. 거기는 영어로 되어 있어서 번역이 에이허브로 돼 있습니다. 보통 혼동을 하는 그 아합입니다. 그 모델이 됐던 이 사람이 성경상에 나오는 이스라엘 왕 중에 최고의 악 왕입니다.

그런데 이 악 왕은 부인을 잘못 만났습니다. 이 부인이 훨씬 악한 여자입니다. 그리고 이 아합의 잘못이 있다면 공처가였다는 것이 그의 전 실수의 이유입니다. 다른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오히려 마음이 착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부인 때문에 이렇게 되는데 이 사람이 여호와를 섬기지 않고 우상을 섬깁니다. 바알과 아세라를 섬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땅에 3년 6개월을 비를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근이 닥치고 민심이 흉흉해지며 아주 살기가 어렵게 됩니다. 이것을 이세벨과 아합은 엘리야 때문이라 하고 엘리야는 너희가 하나님을 외면했기 때문이라 그럽니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마지막으로 갈멜산에 대표자 회담을 합니다. 바알 선지자들과 아세라 선지지들을 부르고 엘리야는 하나님 편의 선지자로 나와서 왕과 백성들 앞에서 누가 참 신인가를 보자 하는 것을 제사 드리는 것으로 가려내자는 것입니다. 어느 신이 정말 그 제사를 열납하는가? 바알선지자들이 드린 제사는 하루 종일 빌고 빌어도 하늘에서부터 아무런 징조도 없고 제사를 받는 표가 없습니다. 후에 엘리야가 제사를 드리자 하늘에서부터 불이 내려와서 그 제사를 온통 태워서 받아 가십니다.

그래서 그 날에 백성들이 전부 하나님만이 신이다는 것을 확인하고 엘리야와 함께 거기 참석했던 바알 선지자와 아세라 선지자를 잡아다 기손 강에성 목베어 죽입니다. 그리고 아합 앞에 이제 비가 옵니다라고 엘리야가 말을 합니다. 참으로 ㅇ비가 옵니다. 그 비 오는 가운데서 갈멜산에서 이스라엘의 수도가 있던 사마리아까지 엘리야가 성령의 힘을 입어서 비 속을 달리는 아합의 마차 앞을 뛰어서 사마리아까지 들어갑니다. 그때 엘리야는 이제 들어가면 하나님께서 바알 선지자, 아세라 선지자 다 죽였고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증거하셨으니 이제 싹쓸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들어간 것입니다. 그것이 19:1입니다.

“아합이 엘리야의 무릇 행한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인 것을 이세벨에게 고하니 이세벨이 사자를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이맘 때에는 정녕 네 생명으로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 같게 하리라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저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그 생명을 위하여 도망하여.”(왕상 19:1-2)

엘리야가 얼마나 놀랬느냐 하면 이제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나타내셨으니 이제 그 앞에 거칠 것이 없다고 생각을 했는데 가보니 이세벨이 아직도 살기가 등등하고 아직 세력을 잡고 있습니다. 그의 권세가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너를 죽이고야 말겠다 그럽니다.

그래서 엘리야가 광야 길로 도망을 가서 로뎀나무 밑에 누워서 하나님 이제 나를 죽여 주십시오라고 하나님께 원망합니다. 현대식으로 표현하면 못해 먹겠습니다라고 원망을 합니다. 그래서 거기서부터 하나님을 만나러 시내산까지 갑니다. 호렙산이라고도 하고 시내산이라 하는 호렙산까지 가서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앞에 나타나십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가서 여호와의 앞에서 산에 섰으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의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우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소리가 있어 저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왕상 19:11-13)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만나 주시는데 만나 주시는 방법이 하나의 답입니다. 엘리야에게 묻는 것은 이것입니다. 너는 내가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는 바위였으면 좋겠는냐? 거기에는 여호와가 계시지 않습니다. 너는 내가 모든 것을 삼키는 지진이었으면 좋겠느냐? 거기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너는 내가 모든 것을 태우는 불이었으면 좋겠느냐? 거기 계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세미한 음성속에 계십니다.

이것은 너는 내가 지금 악하고 불의한 자들을 심판했으면 좋겠지? 나는 지금 심판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불의한 자들과 패역한 자들을 회개시키고 설득하시고 긍휼과 자비를 베푸시려고 하는 하나님이십니다. 어쨌든 아직은 심판 때가 아닙니다. 그러나 신자들은 종종 지금 심판해 달라 이것입니다. 그러므로 강한 바람이든지 지진이든지 불이었음 좋겠다 이것입니다.

이것이 엘리야의 실수입니다. 베드로가 이것을 깨들은 것입니다. 우리가 꼭 알아야 되는 것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시는 능력과 권세와 신비한 간섭은 신자를 보호하시며 신자를 완성하시며 신자를 유익케 하시며 불쌍한 영혼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일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능력과 신비한 힘을 이 세상에 간섭시키십니다만 그것을 지금 불의한 자를 심판하기 위해서는 아직 안 쓰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대표적으로 신약에는 마태복음 13장에 있는 천국 비유에서 잘 나타나 있습니다.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천국 비유가 전부 그렇습니다만 대표적인 것으롱 31절에 있는 겨자씨 비유를 보십시다.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마 13:31-32)

겨자씨는 씨 중에 제일 작습니다. 본래의 실체는 새가 와서 깃들일 만큼 큰 나무인데 씨는 너무나 작다는 것입니다. 천국은 지금 그 영광된 모습이, 즉 겨자나무에 비해서 겨자씨가 상상할 수 없이 그 모습이 감춰져 있듯이 천국은 그렇게 감춰져 들어와 있습니다. 지금은 겨자씨지만 나중에 나무로서 완성될 것이다를 지금 비유하는 것이 아니라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은 것입니다.

이 나무를 씨로는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것입니다. 너무나 작은 이 씨를 밪에 심었습니다. 그래서 천국이 이 땅에 와 있으되 지금 그 영광과 권세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천국의 메시지와 천국의 실체들이 우스워 보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 생명과 이 씨와 이 시작한 하나님의 일이 사람들 쪽에서 볼 때는 영광과 권세가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감히 우리를 깔볼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친히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셔야 됩니다. 너희가 세상에서 핍박을 받으며 환난을 당하나 그러나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세상에서 환난 당하고 핍박 당하는 것을 면하도록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이 도입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 끝날까지 주께서 우리와 함께 있습니다. 우리의 생명을 해하거나 우리가 가는 이 영광된 자리에 갈 것을 막을 자가 없습니다. 이것을 도무지 혼동하지 말아주셔야 되는 겁니다.

이 일이 다윗에게 있어서는 멋지게 승리합니다. 다윗은 그 골리앗을 물리치고 이스라엘의 영웅이 되자 그 당시의 왕이었던 사울 왕의 질투를 삽니다.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다. 다윗이 도망가고 도망가다가 더 이상 숨을 자리가 없어서 적국인 블레셋으로 도망을 가고 맙니다. 불레셋은 도망갈 수 없는 곳입니다. 왜냐하면 블레셋과 이스라엘은 아주 철천지 원수 국가이고 게다가 다윗은 블레셋 사람쪽에서 보자면 가장 미운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을 점령하고 완전히 멸망시킬 수 없었던 그 좋은 기회에 다윗이 등장해서 블레셋 역사 이래 최고의 장수인 골리앗을 물리친 사람입니다. 미워도 보통 밉지 않습니다.

다윗이 할 수 없어서 거기까지 숨어 들어갑니다. 그런데 한쪽에서는 적국에 중요한 장수가 귀화를 했으니 받아주자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처음에는 용납됩니다만 한편에서는 저 사람은 믿을 수 없는 사람이요 우리의원수니 죽여서 후환을 없애자 하는 사람들의 입김이 대세를 이루자 블레셋 사람들이 결국 죽이기로 결정합니다. 죽이러 온다는 소문을 듣고 다윗이 도망갈 방법이 없어서 어떻게 하는지 아십니까? 물론 기도했겠죠. 기도하고 매달리고 신앙으로 죽이려면 죽여봐라 그러는 것이 아니라, 칼로 찌르면 하나님이 칼을 부러지게 할 것이다가 아니라 그가 할 수 있는 최후의 방법, 있는 힘을 다 기울여서 지혜를 짜내어 만든 방법으로 탈출을 합니다. 어떻게 합니까? 미친 척 합니다. 옷에 배설물을 묻히고 침을 질질 흘려서 이 사람들로 하여금 저렇게 된 사람의 더러운 피를 내 칼에 묻히지 말자. 이렇게 해서 살아나게 됩니다.

그가 거기서 살아남은 후 지은 시가 시편 34편인데 그 밑에 다윗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 체하다가 쫓겨나서ㅓ 지은 시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호와를 광대하시다 하고 나와 함께 여호롸를 높이세. 자기 힘으로 도망왔지 언제 하나님이 도와줬습니까? 있는 힘을 다해서 아니 하나님이 있다면 어찌하여 하나님을 의지하여 골리앗을 물리친 자를 이렇게 고통스럽게 쫓겨다니게 하다가 마침내 할 수 없이 적국에까지 도착했는데 도망간 거기서도 죽을 위기에 처해서 할 수 없이 있는 꾀를 다 동원해서 미친 척하고 도망왔는데도 너희는 나와 함께 여호와는 광대하시다 하고 나와 함께 여호와를 높이세. 그리고 중간에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이것이 신자가 깨우쳐야 하는 그 신앙의 가장 중요한 내용입니다. 우리는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뭐든지 내 고집, 내 성질대로 하려고 하나님을 들몪습니다. 그것을 신앙이라고 하지 않ㅅ브니다. 괄시를 받아야 되고 마땅히 있는 힘을 다해서 자기에게 처한 일을 처치할 줄 알아야 됩니다. 이런 생각을 해보십시오. 우리 교회는 고딕식으로 지어져 있지 않습니까? 뽀족하게 끝이 되어 있는데 제일 높은 데 있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그것은 정답이 아닙니다. 십자가보다 높은 것으로 피뢰침이 있습니다.

어떤 학생이 저한테 물었습니다. 목사님, 벼락은 하나님이 내리시죠? 그렇단다.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죠? 그렇단다. 그런데 왜 하나님이 교회에 벼락을 때려요? 왜 교회가 신앙이 없어서 피뢰침을 달아요?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는 아버지시지만 온 피조물계에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자연만물을 다스리는 법칙이 있습니다. 우리가 보통 얘기하는 자연법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신자와 불신자를 막론하고 베푸시는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그 중 하나가 벼락은 높은 곳에 떨어뜨리겠다. 이것이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그래서 ㅓ그것을 맨 처음 누가 지켜야 되느냐 하면 과학자가 아니라 신자가 지켜야 됩니다. 하나님은 벼락을 맨 꼭대기에 떨구십니다. 불신자들이 피뢰침을 다는 것은 하나님은 모르고 하나님이 일하는 법칙만 아는 것이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알기 때문에 피뢰침을 달아야 됩니다. 그것은 신앙이 몹시 좋은 것입니다.

  그것을 안 달고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사람이니까 피뢰침 위에 앉아 있어도 괜찮다. 이것은 교만한 것입니다.

이것을 혼동하지 마십시오. 마태복음 4장에 예수님께서 이 문제를 결론짓는 하나의 예를 보여주십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마귀에게 3가지 시험을 받습니다. 그 두 번째 시험입니다.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하신대.”(마 4:5-7)

이것이 바로 우리가 알아야 되는 결론입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시려는 일은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시는 영혼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구속 사역을 하셔야 됩니다. 마귀가 뭘로 시험을 하는지 아십니까? 네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모든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이 땅에 왔느냐?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증명해 보고 네가 하는 일이 하나님에 의해서 성취될 것을 증거해 봐라. 하나님이 받나 안 받나 네가 여기서 한 번 뛰어내려 봐라. 주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나는 너한테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호하실 것인가를 증명하기 위하여 와 있지 않고 나는 하나님이 사랑하는 영혼들을 구원하려고 이제 십자가를 지러 왔다.

주님은 지금 마귀에게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증명하고 그 싸움을 하러 와 있지 않습니다. 여기 말여들지 마십시오. 어떻게 하나님이 내 편인가? 어떻게 하나님이 나를 모든 사람보다 더 사랑하는가를 증명하고 그것을 떠벌리는 것이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하여 모든 불쌍한 영혼들에게 생명과 진리를 나눠주기를 기뻐하시는 은혜의 하나님이요 복음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시려고 우리를 불러세운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의 종으롱 부른 복 받고 그리고 책임있는 인생이 되게 하신 분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이 이제 내 삶과 내 존재와 내 인생을 통하여 이 하늘나라의 비밀과 진리와 생명 됨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을 선포하시기로 하셨다는 것뿐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잡아가게 하면 거기에 그 말을 들을 대상이 있다는 뜻으로만 압니다. 그가 나를 때리면 매 맞는 것으로 그 내용의 어떤 중요한 부분이 메시지화될 것이라고 믿는 겁니다.

그러나 죽도록 내버려 두시지는 않을 겁니다. 죽게 한다면 그것도 주를 위하여 필요한 것임을 믿습니다. 사나 죽으로 우리가 다 주의 것이고 살아서 주께 유익하다면 죽은 것도 주께 유익한 일이 있으며 나에게도 유익한 것임을 믿습니다. 나를 증명하기 위하여 있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주께서 오늘 나의 인생과 나의 존재를 통하여 펼치시는 복음의 승리와 확장을 믿습니다.

우리의 존재의 가치와 하나님께서 기적을 펼치시는 것이 어느 때 무엇을 위해서인가를 분명히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은 필요하시다면 지금이라도 열두 영도 더 되는, 오늘날식으로 하면 십이군단에 해당되는 천사를 나를 위해 보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그러십니다.

베드로가 검을 꺼내 치자, 하나님이 지금 나를 위하여 열두 영도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실 수 있음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나 지금 잡혀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엑 잡혀가는 것이다 이것입니다.

우리에게 기적이 없는 이유가 그 기적이 나에게 지금 필요 없기 때문입니다. 더 큰 기적은 나를 통하여 죽은 영혼들에게 생명과 은혜와 긍휼이 펼쳐지는 것입니다. 그것보다 더 큰 기적과 더 큰 사명은 없습니다. 우리는 자기를 증명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함부로 부리는 교만한 죄에 빠지지 않아야 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덜 사랑하시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이 왜 내게 환난과 고통을 면하게 하시지 않는가라는 어리석은 투정을 부려서는 안됩니다.

더 깊은 신앙의 경지에 들어가십시오. 베드로같이 도망가십시오. 여러분의 상식을 동원하시고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에 대하여 더 많이 지혜로워지시고 깊이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이 실패치 않을 것을 믿으시고 여러분의 범상한 인생이 중요한 것을 만들어 내시는 것을 인정하십시오. 기적이 도입되지 않는 것은 지금의 여러분의 형편과 삶의 모습이 그대로 하나님의 일에 흡족하기 때문인 것을 믿으십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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