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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본문 : | 시22: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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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 조용기 목사 |
| 참고 : | 2006년 4월 23일 주일3부 설교 |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치 아니하오나 응답지 아니하시나이다”
<서론>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어찌하여 이런 일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천상천하에 유일무이하신 절대 주권자가 되십니다. 그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든지 당신이 원하는 대로 기뻐하시는 대로 행하십니다. 하나님의 행하심에 대하여 그 누구도 왜 그렇게 행하시느냐고 질문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온 우주는 하나님의 것이고 인류도 하나님이 지으셨고 하나님은 전지전능, 무소부재하시므로 무엇이든지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행하시기 때문입니다.
<본론>
1. 인간이 하나님께 던지는 질문들
그러나 인간들이 하나님께 던지는 질문들이 많습니다만 이 질문들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해하도록 대답해 주시지 않습니다. 많은 문제에 관해서 우리가 이해를 하려고 하는데 하나님은 우리의 질문에 대답하지 아니하시므로 이해가 잘되지 않는 문제가 많습니다.
왜 에덴동산에 선악과를 만들어 놓으셨나요? 왜 마귀가 시험하도록 하셨나요? 이 같은 질문은 예수 믿는 사람이면 다 한 번씩 하는 질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구차스럽게 하나님을 위해서 변명하려고 애를 씁니다. ‘아! 선악과를 만들고 마귀가 시험하게 한 것은 사람을 꼭두각시로 만들지 않고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으로 만드셨기 때문에 자율적으로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느냐를 시험해 보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 그렇게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변명을 하고 설명을 하려고 애를 씁니다만 그러나 별로 시원치가 않으며, 우리의 해답은 크게 이해하는 데 도와주지 못합니다. 또 사람들은 왜 하나님은 유독이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유대민족을 선민으로 삼으셨습니까? 유대민족을 가나안 땅에 심기 위해서 가나안에 일곱 민족을 다 전멸시켰습니까? 남녀, 노유, 유아까지라도 다 멸절시킨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왜 그랬습니까? 우리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에 대해서 하나님을 이해시키려고 대답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구차스럽게 설명을 하려고 하지요. 가나안에 있는 칠족은 우상을 섬기고 완전히 타락하고 부패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더 이상 생존할 수 있는 가치를 상실하고 말았다. 이스라엘을 세워서 정결한 신앙과 행동을 하는 민족을 통해서 구주 예수가 태어나기 위해서는 먼저 청소부터 해야 되었다. 이런 구차스러운 설명을 합니다만 그것이 이해를 돕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독이 아브라함을 사랑하시고 유대민족을 사랑하시고 선민으로 삼으신데 대해서 우리는 고개를 기우뚱하고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창세기 12: 2~ 3에 보면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엄청난 복을 약속해 주신 것입니다.
신명기 7: 7~ 8에 “야훼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야훼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또는 너희의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우리들은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왜 하나님은 구태여 오직 유대민족만 사랑하고 건져내셔서 가나안 땅에 독야청청하게 만드시고 다른 민족은 박멸하셨는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여러분 이해할 수 없는 고통에 몸부림쳤을 때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하고 질문했지만 하나님 대접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못 박혀 6시간 동안 매달려 있었습니다.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양손과 양발에 대못이 박히시고 피를 흘리시고 땀을 흘리시고 탈수가 되고 빈혈이 되고 온몸에 호흡이 곤란하고 극단의 괴로움 속에서 주님은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통곡을 했지만 하나님은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시편 22: 1에 보면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탄식한 것입니다.
또한 왜 2차 대전 때 히틀러가 6백만 유대인들을 참혹하게 학살하도록 침묵하셨나요? 그 질문 많이 합니다. 오늘 유대인들에게 제가 예수를 전도하면 그들은 단호하게 머리를 흔들면서 말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우리 유대인 600만 명이 히틀러에게 살해당할 때 하나님은 침묵하셨다. 하나님은 고개를 돌려 버리셨다. 하나님이 안계시든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지 않던지 둘 중에 하나인데 어떻게 하나님을 믿으란 말입니까? 설명을 해주십시오.” 설명을 할 수도 없고 이해시킬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하여 변호사가 되려고 노력하지만 시원한 대답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설명하는 것은 마태복음 27:24~25 말씀을 통해서 설명을 하려고 애를 씁니다. “빌라도가 아무 효험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가로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백성이 다 대답하여 가로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 찌어다 하거늘”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빌라도에게 넘겨주고 십자가에 못 박게 할 때 빌라도가 “나는 책임이 없으니 너희들 책임지라”고 하니까 우리와 우리 자손들이 책임지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들이 책임지겠다는 말에 대한 응답으로써 그 자손 600만 명, 제2차 세계대전 동안에 학살을 당하게 했다고 우리는 설명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래도 그 설명이 신통치가 않고 시원하지가 않습니다.
1944년 7월 20일 히틀러 암살사건에 연루되어 게슈타포에게 사형을 당한 괴들러(Goedler) 박사의 수기를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잠을 이룰 수가 없다. 개인의 운명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하나님은 과연 계실까? 나는 그것을 믿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수십만의 사람들이 공포와 절망 속에서 미쳐가는 것을 그대로 놓아두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수백만의 사람들이 공포의 풀무불 속에 떨어져 허우적거릴 때 손끝 하나 꼼짝하지 않고 죽게 버려두셨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고난 앞에서 절망하고 낙심합니다. 우리 크리스챤 역시 이러한 질문 앞에서 하나님을 위해 변호사가 되려고 노력하지만 시원한 대답을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너무나 많지요. 우리 개인생활에도 왜 이 고통이 내게 다가옵니까? 왜 이 슬픔이 다가옵니까? 왜 나는 이렇게 괴로움을 당하고 살아야 됩니까? 왜 나는 병들었습니까? 왜 내가 망해야 되는 것입니까? 왜 내가 배신을 당해야 되는 것입니까? 왜 내가 낭패를 당해야 됩니까? 수많은 ‘왜’라는 질문을 하지만 하나님은 침묵하십니다. 우리는 이해를 할 수가 없습니다. 이해를 못하기 때문에 답답하지요. 왜 하나님은 침묵하실까요?
2.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과 섭리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무한하시고 영원하신 계획과 섭리를 우리는 머리로써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예를 말하면 유치원 아동이 선생님께 찾아가서 고등수학을 묻습니다. 겨우 1, 2, 3, 4, 5, 6, 7, 8, 9, 10을 깨달은 어린 아이가 선생님에게 “고등수학에서 미분과 적분을 가르켜 주십시오.” 미분과 적분이라는 고등수학은 어린아이가 도저히 이해할래야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럴 때 이해를 시킬 수 있는 도리가 없기 때문에 선생님은 어린아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허허, 그냥 따라 오너라.” 그 말밖에 할 것이 없습니다. 이해가 안 됩니다. 우리가 아인슈타인 박사에게 가서 “아인슈타인 박사님 상대성원리를 설명해 주십시오. ‘E=mc2’이라고 했는데 질량에다가 광속도를 배가한 것이 에너지라고 했는데 이것이 뭡니까? 이것 좀 알려 주십시오.” 도저히 아인슈타인 박사가 우리같이 문외한에게 상대성원리를 설명할 수 없게 없습니다. 아인슈타인 박사가 가만히 우리를 쳐다보고 싱긋이 웃고 고개만 끄덕끄덕하고 말 것입니다. 왜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것을 이해할만한 지혜와 총명이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냥 우리에게 믿으라고 할 따름이지 이해를 시킬 수는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유한한 인간의 식견으로 전지하신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침묵할 수밖에 없습니다. 설명할래야 설명할 수 없고 깨닫게 할래야 깨닫게 할 수가 없을 때는 하나님은 그냥 일하시고 침묵하실 수밖에 없으신 것입니다. 창조주의 섭리와 운행을 피조물인 인간이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한 시인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나룻배가 바다를 담을 수 없듯이 인간의 조그만 가슴에 하나님의 넓은 세계를 다 담을 수 없다.” 그렇잖아요. 나룻배가 바닷물을 다 그 속에 어떻게 담습니까? 못 담지요. 인간이 어떻게 우주를 다 이해하고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깨달을 수가 있겠습니까? 할 수 없잖아요. 인간은 유한한 시간과 공간의 산물입니다. 이러한 인간이 무한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이 세상 만물을 이해해야 우리는 믿겠다고 한다면 믿을 것 별로 없습니다. 금 이가고 조금 깨어진 오래된 물 항아리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 항아리의 주인은 다른 항아리와 함께 그 깨어진 항아리를 가지고 물을 긷는데 사용했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주인이 깨진 항아리를 버리지 않고 사용하므로 깨어진 항아리는 항상 주인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었어요. 내가 온전치 못해서 주인님께 폐만 끼치는구나. 나로 인해 그토록 힘들게 구한물이 새어 버리는데 아직도 나를 사용해 주시다니. 그래서 하루는 깨진 항아리가 용기를 내어서 주인에게 물었습니다. “주인님! 왜 저를 버리고 온전한 새 항아리를 구하지 않으시나요? 저는 별 쓸모가 없을 텐데요.” 그 말에 주인은 싱긋이 웃고 대답을 안했습니다. 항아리는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새 항아리를 사면 좋겠는데 “나같이 금가고 깨어져서 물이 줄줄 새는 나를 왜 사용하시는가?” 한참 만에 주인이 하는 말이 “너 우리 걸어온 뒷길을 돌아보아라. 돌아오니까 많은 꽃들이 길에 피어 있습니다. 아주 하늘하늘한 바람에 나부끼며 아름다운 꽃이 이쁘게 피어 있습니다. 네가 깨닫고자 하느냐? 네가 깨어진 물 항아리가 되어서 물을 줄줄 흘렸기 때문에 저 꽃들이 다 살고 아름답게 피어있단다. 물을 한 방울도 안 흘렸으면 저 꽃들은 다 말라 죽었을 것이다. 이쯤 되어서 알았겠느냐?” 그렇게 설명을 했습니다. 여러분 항아리를 고개를 끄덕끄덕하고 이해를 했지만 우리의 삶은 그렇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인간은 유한한 시간과 공간의 산물이므로 무한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를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그냥 웃고 침묵할 따름입니다. “하나님 왜요?” 웃으시고 침묵하십니다. “왜 이런 일이 생깁니까? 어찌하여 이런 일이 생겼습니까?” 웃으실 따름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이 무한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이사야 55: 8에 “야훼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라고 말했습니다.
무지한 사람들을 이해시킬 수 없을 때는 그냥 웃고 침묵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설명하나요? 설명이 안 돼지요.
3. 감당할 수 없는 의문에 대한 우리의 태도
우리는 감당할 수 없는 의문에 대한 어떠한 태도를 가지고 살아야 되겠습니까?
이 세상에 살면서 너무나 많은 감당할 수 없는 질문이 다가올 때 어떻게 하고 살아야 되겠습니까? 여러분 아브라함을 생각해 보십시오. 아브라함은 아들을 달라고 하나님께 25년 동안 기도를 해서 100세에 아들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이아들 이삭이 이제 10대 소년이 되어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일을 돌보아 주고 친구가 되고 같이 먹고 자고 깨고 하는 너무나 사랑스러운 아들 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루 갑자기 하나님이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네 사랑하는 외독자 이삭을 모리아 산에 데리고 와서 죽여서 각을 떠서 장작불에 얹어 재물로 내게 드려라” 그 말씀에 아브라함은 “하나님! 이해가 안 됩니다. 어떻게 25년 동안 기도해서 내게 허락하신 외독자를 모리아 산에 가서 잡아서 각을 떠서 장작불에 태워서 재물로 드리라고 합니까? 이해가 안 됩니다.” 하나님이 대답하셨습니까?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이해시키려고 했습니까? 하나님은 명령하셨을 따름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직 아브라함이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은 하나님이 명령하셨으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믿을 따름인 것입니다. 믿고 순종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무엇을 믿고 순종합니까? ‘하나님은 절대 사랑이고 선하신 하나님이기 때문에 죽여 놓아도 살려 주실 것이다. 이해할 수 없으니까 하나님은 절대 사랑이고 절대 선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불의한 일을 행하지 아니하시고 내게 손해나는 일은 행하지 아니할 것이다. 나는 이해할 수 없다. 눈에는 아무증거 없고 귀에는 아무소리 들리지 않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고 내 앞길 칠 흙같이 어두워도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믿는다. 내가 할 일은 믿고 순종하는 길밖에 없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그 아들을 데리고 사흘 길을 걸어서 모리아 산에 올라가서 그 아들을 묶어서 장작위에 올려놓고 목을 칼로 따기 위해서 머리를 발로 눌렀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네 독자 이삭에게 칼 대지 말라. 내가 네 아들도 아끼지 않고 내게 내 놓았은즉 이제 네가 나를 사랑하는 줄 아노라.” 왜 하나님이 그렇게 하라고 하는가. 이해는 믿고 순종한 다음에야 다가온 것입니다. 처음에는 설명 안했어요. 믿고 순종하니까 나중에 하나님이 왜 그렇게 했는지 이해를 시켜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모든 것을 이해하려고 할 때는 가슴이 답답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 사랑이고 절대 선이시기 때문에 종국에 가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유익되게 해주시는 것을 믿을 따름인 것입니다. 믿고 순종하고 사는 것이 신앙입니다.
제가 옛날에 불광동에서 목회할 때였습니다. 다 떨어진 가마니, 물이 철철 새는 천막을 치고 열심히 전도해서 겨우 수십 명의 교인이 모였습니다. 그 교인 가운데 가장 충실하게 나와서 교회를 돌보고 연보고 잘 내는 권사님 한분이 계셨습니다. 과부입니다. 그에게는 아들, 딸 둘이 있었는데 아들은 외아들입니다. 한 여름 더울 때 그 아들이 연못에서 미역 감다가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하늘이 아뜩합니다. 그 과부 권사님이 와서 내 옷깃을 잡고서 “목사님, 왜 이러십니까? 왜 내게 이런 일이 생깁니까? 내가 교회도 열심히 나오고 십일조도 드리고 새벽기도도 하고 하나님을 섬겼는데 왜 내 아들이 물에 빠져 죽었습니까? 왜 이렇습니까? 해석해 주십시오. 설명해 주십시오.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왜 이렇습니까?” 저도 너무나 답답하고 저도 이해가 안 되었어요. 저도 “하나님, 교회를 망치려고 작정하셨습니까? 이제 교회가 겨우 천막교회가 서서 수십 명이 모이고 그리고 기둥같이 의지하고 이 과부 권사의 외아들이 물에 빠져 죽었으니 이 교회 그만둬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해할 수 없습니다. 내가 차라리 물에 뛰어 들어가서 죽고 싶습니다.” 그것이 48년 전의 일입니다. 지금도 이해가 안 됩니다. 이해가 안 됩니다. 그러나 지금은 내가 하나 아는 것은 하나님께서 절대 사랑이시고 절대 선이기 때문에 그때 그 당시에 그렇게 한 것은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최선의 길이었다는 것만 믿음으로 알 따름인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믿을 따름인 것입니다. 지금은 도저히 이해가 안 되지만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이 그 당시 그 애에게는 그 일이 최선의 길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렇게 했다고 믿고 순종할 따름인 것입니다.
요셉은 그 고난의 과정마다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왜 형들이 자기를 잡아서 발가벗겨 우물물에 던져 넣도록 하나님 내버려 두셨는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 다음에 왜 그들이 건져서 미디안의 대상에게 팔아 넘겨서 종으로 팔리게 했는가. 왜 그가 보디발의 집에서 종으로 10년이 넘도록 잔뼈가 다 굵도록 고통을 당하고 괴로움을 당하고 살아야 했는가. 이해가 안 됩니다. 겨우 가정 총무가 되어 살만하니까 그 아내의 참소를 받아서 억울하고 답답하게 누명을 덮어 씌고 감옥에 들어가서 2년 동안 감옥에서 썩어야 되는 것입니까? 이해가 안 됩니다. 왜요? 왜 이렇게 됩니까? 무엇 때문이에요? 왜 하나님이 이렇습니까? 하나님 왜 침묵하십니까? 대답하세요. 대답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그는 국무총리가 되어서 돌아보니 걸음마다 자국마다 그 모든 것이 국무총리가 되는 발걸음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깨달음은 후에 다가오는 것입니다. 믿고 순종하고 따라온 이후에 하나님은 최종적으로 깨닫게 해주십니다. 깨닫고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이란 깨닫고 난 다음 믿고 순종하는 것 아닙니다. 우리는 믿고 순종하고 난 다음 이후에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성수 주일하라고 합니까? 주님께서 꼭 주일날 우리가 교회 오라고 할 필요 없잖아요. 집에서 인터넷 가지고 예배드리면 되잖아요. 왜 교회에 나오라고 그럽니까? 하나님이 뭐라고 말합니까? ‘이해할 필요 없다. 믿고 순종하라.’ “하나님 우리가 먹기도 바쁘고 생활이 어려운데 왜 십일조 내라고 합니까? 왜 십일조를 하나님이 잡수셔야만 됩니까? 왜요?” 하나님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이해를 시켜주지 않습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믿고 순종하라는 것이지 너에게 이해시키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이해하기 위해서 신앙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고 순종하기 위해서 신앙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하나, 둘, 셋 모두다 우리에게 이해시키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전지전능, 무소부재하신 섭리 가운데 우리에게 제일 좋은 길을 아셨기 때문에 그 길을 정하시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그 명령한 길이 우리에게는 험하고 고통스럽고 괴로운 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손해가 나고 답답하고 안타까운 길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믿고 알기 때문에 믿고 순종해 나갈 따름인 것입니다. 먼 훗날에야 하나님께서 깜짝 놀라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저는 폐병으로 아파 드러누워 있을 때 누님이 저의 수종을 들었는데 방안에 드러누워 있으면 누님은 그때 시집가기 위해서 벽에 옆에 붙이는 그 무늬를 수놓았습니다. 누님이 수틀에서 수를 놓는데 저는 뒤에서 이렇게 드러누워서 보니까 엉망입니다. 노랑실, 파랑실, 빨강실이 완전히 엉켜 가지고 엉망진창입니다. 그러면 내가 “누님, 수를 뭐 그렇게 놓아? 뒤에서 보니 엉망진창이야. 노랑실, 빨강실, 파랑실이 얽히고, 설키고 아무것도 아니야.” 그럴 때마다 “기다려봐. 지금은 그렇게 보여도 나중을 기다려봐.” 누님이 수를 다 놓고 난 다음에 수틀에서 그 천을 턱 끄집어내서 싹 돌리면 그곳에 꽃이 피고 물이 흐르고 나비가 날고 새가 아름답게 지저귀고 있는 것을 보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가 중간 중간에 아무리 깨달아 알려고 해도 알 수 없습니다. 완성시켜 놓으면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다 이루었다 하실 때 비로소 하나님이 왜 그렇게 하셨는지를 이해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을 이해하려고 자꾸 어찌하여 이렇습니까? 왜 이렇습니까? 하지 말고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믿고 순종하고 믿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600만 유대인이 학살된 이유를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왜 2차 대전 때 600만 명이나 학살되었습니까? 6명도 아닙니다. 60명이면 안 묻겠습니다. 600명이라도 안 묻겠습니다. 6천명이라도 아무 말 안하겠습니다. 6만 명이라도 아무 말 안하겠습니다. 60만 명이라면 고개를 조금 갸우뚱 하겠습니다. 그러나 600만 명이나 죽도록 하나님이 침묵하셨습니다. 히틀러 한 사람의 야욕을 채우기 위해서 600만 명이 가스실에서 처참하게 죽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요? 왜요? 지금까지도 하나님은 침묵하신다.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원하신 섭리 가운데 하나님 보시기에는 그때 그렇게 하는 것이 그들에게 최선의 길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고 우리는 믿고 순종하고 나갈 따름인 것입니다.
시편 123: 2에 “종의 눈이 그 상전의 손을, 여종의 눈이 그 주모의 손을 바람 같이 우리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며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기를 기다리나이다”라는 말씀대로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볼 따름인 것입니다.
한 선교사 지망자가 몹시 추운 겨울 새벽에 면접시험을 치루기 위해 선교국에 찾아갔습니다. 선교국에서는 새벽 3시에 오라고 했습니다.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그래서 새벽 3시에 선교국에 나가니까 아무도 안나왔어요. 그래서 3시에 벌벌 떨고 그 선교국 사무실에 앉아 있었습니다. 무려 5시간을 기다렸는데 아침 8시가 되니까 직원 한 사람이 어슬렁어슬렁 나오더니 미안하다고 말도 안하고 “자, 면접시험을 시작해봅시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시험이라는 것이 뭐냐면 시험지를 내놓고 “학교라는 단어를 한번 적어 보십시오.” 속으로 ‘나를 병신으로 아느냐? 학교라는 단어를 적어 보라니.’ 그는 학교라는 단어를 적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2 곱하기 2는 뭡니까?” ‘이런 유치원생인줄 아느냐?’ 그러나 “2 곱하기 2는 4입니다.” 그러니까 그 직원이 연필을 탁 놓더니만 “합격되었습니다.” 기가 막힙니다. “당신 내일 선교위원회의 출석하십시오. 선교위원회에서 정식으로 당신을 임명하겠습니다.” 그는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세상에 시험, 시험 쳐도 이런 시험이 어디 있느냐?’ 그 이튿날 선교위원회에 참석하니까 그 총무가 하는 말이 “이분이 합격된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로 극기시험에 합격했습니다. 추운 날 새벽 3시에 오라고 했는데 아무 불평이 없이 새벽 3시에 와서 5시간을 앉아 있었으니 극기 훈련에 합격했습니다. 극기시험에 합격했어요. 둘째로 그는 시간을 엄수했습니다. 꼭 3시에 와서 5시간을 기다렸습니다. 그것은 신뢰와 약속의 시험에 합격을 했습니다. 셋째, 5시간을 기다리는 것을 보니까 견디는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인내의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그다음 넷째, 어린 아이 시험문제로 시험을 보는데도 기분 나쁜 표정을 한 번 짓지 않아 겸손하게 학교를 적으라고 하니 학교를 적고 2 곱하기 2는 4라고 적는 것 보니 겸손한 시험에 합격을 했습니다. 우리 선교사로써 필요한 네 가지 자격이 모두다 이분에게 겸비하고 있으므로 우리 선교사로써 자격이 인정됩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그 선교사 지망생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가 한 모든 일이 시험 대상이었습니다. 그는 질문을 받는 것만 시험인줄 알았는데 새벽에 3시에 오는 것도, 시험 치는 것이고, 추운데 벌벌 떨고 앉아 있는 것도 시험 보는 것이고, 그에게 어린아이 질문을 한 것도 시험 본 것이고 모든 것이 시험을 친 것을 그때야 깨닫게 된 것입니다. 깨달음은 후에 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에게 이해 못할 시험으로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에 합당한 자격을 갖추었는지 여부를 판단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왜 이삭을 바쳐야 하는지 모르면서 그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순종과 믿음으로 그는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감당할 수 없는 의문이 삶 속에 다가온다 할지라도 절대 선이신 하나님을 믿으면 그 이유는 나중에 알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그런 질문을 많이 했습니다. 제가 17살에 한참 청운의 꿈을 품고 나갈 때 폐병으로 쓰러졌습니다. 나는 우리 클래스에서 제가 언제나 수장을 했습니다. 시험을 쳐도 늘 1등을 하고 달리기를 해도 1등을 하고 운동을 해도 늘 1등을 했는데 나는 내 마음속에 굉장한 미래의 꿈이 있었습니다. 위대한 과학자가 되겠다는 꿈이 있었는데 17살에 폐병에 걸려서 쓰러져서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때 내가 많은 질문을 했습니다. ‘왜, 다른 애들은 다 저렇게 건강한데 왜 내가 폐병 걸렸습니까? 다른 애들은 자기 청운의 꿈을 품고 나가는데 왜 나는 폐병으로 쓰러졌습니까?’ 제가 폐병 요양을 하면서 머리를 이만큼 기르고 초췌한 모습으로 하루는 길거리에 나갔는데 내 동기 동창들이 해군사관학교에 가서 사관생도가 되어 멋있는 사관복을 입고 외투를 입고 겨울에 모자 쓰고 애인들하고 길거리에 걸어가는 것을 보고 ‘하나님 나는 이게 뭡니까? 나는 왜 버리십니까? 나는 인생에 패배자가 되었습니까?’ 수없이 물어도 대답을 해주지 않았습니다.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불러도 대답없는 이름이여 아무리, 아무리 하나님께 질문을 해도 대답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서 이제 48년이 지났습니다. 지금 돌아보니 이제야 대답이 됩니다. 왜, 주의 종이 되게 하려고 그렇게 하셨다. 그때는 대답이 없었어요. 갈 길이 캄캄했어요. 오직 내 앞에 열린 길을 따라서 믿고 순종만 하고 울면서 걸어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돌아보니 내 친구들은 다 인생 은퇴를 하고 지금 할 일이 없는데 나는 지금도 할 일이 있고 주님 사업을 위해서 천하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여러분이 “왜 이렇습니까? 어찌하여 이렇습니까?” 할 때 대답하지 않습니다. ‘믿고 순종만 하라. 끝장이 좋아질 것이다. 내가 끝을 좋게 만들어 줄 것이다. 믿고 따라만 오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영원히 섭리 속에서 하나님은 절대 선이시고 그의 행하시는 모든 일은 선하시고 인자하신 것입니다.
시편 23: 6을 다 같이 소리 내어 읽어 보십시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른다고 한 것입니다. 내가 캄캄한 밤을 지날지라도 하나님은 선하시고 인자하심으로 나를 이끌어 주시고 밝은 대낮을 걸어갈지라도 선하시고 인자하심이 나를 따라서 결과에 악을 변하여 선으로 만드시는 역사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것을 이해하려고 하지만 순종하고 믿고 나가야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12에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우리는 지금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문제를 거울을 보듯이 희미하게 알고 부분적으로 알고 완전히 알지 못합니다. 완전한 대답을 얻을수 없습니다. 하늘나라에 올라가면 그때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펼쳐 보여 주시면서 그때는 내가 이해할 만한 지성이 없었기 때문에 설명 못했지만 이제 설명해 주마. 우리의 모든 퀘스천을 설명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때까지 로마서 8:28을 믿어야 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동남풍아 불어라. 서북풍아 불어라. 내 앞길 칠흑같이 어두워도 믿고 순종해 나가면 결과에 가서는 선하게 될 것이다. 요셉이 말하는 것처럼 형들은 나에게 악을 도모했으나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변화시켰다고 하신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절대 선을 믿으며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믿고 무조건 따라 가는 것입니다. 이해하지 말고 믿고 따라가야 되는 것입니다.
교회 한 안수집사가 교회 출석하는 것이 싫어졌습니다. 목사님 설교가 별로 안 좋아서 한 몇 년 다니니까 목사님 설교를 다 알겠어요. 왜냐하면 작년에 써먹은 것 올해 써먹고 올해 써먹은 것도 명년에 써먹으니까 아브라함이라고 하면 끝까지 다 알아요. 그래서 그 부인도 하는 말이 “나는 목사님 설교 다 알고 있으니까 당신만 교회 나가세요. 나는 이제 점심 도시락 싸서 산에 올라가서 자연과 더불어 예배를 드리겠다.”
교회 나오고 자기는 도시락 싸서 산에 올라가서 저 들을 내다보고 “야호! 야 이것이 진짜 예배다. 자연의 하늘 밑에 바람을 쏘이며 아름다운 경치를 보고 찬송가를 부르고 얼마나 좋으냐.” 찬송가 한 장 부르고 배불리 밥 먹고 팔을 베개로 하고 누워 있다가 그만 잠이 들었는데 깨보니까 밤중이었습니다. 몸이 오싹하고 추운데 산에 올라 왔는데 내려갈 길을 알 수가 없어요. “아이고 하나님, 우리 집사람하고 교회 가서 예배 드렸더라면 오늘 편안하게 지금 잠자리에 들어갔을 텐데 내가 산에 올라와서 혼자 예배드린다고 고집 부리다가 이 밤중에 산위에 어떻게 내려갈지 모릅니다. 주님 당신의 안수집사 좀 도와주시옵소서.” 그리고 주여, 주여 하고서 내려오다가 그만 벼랑에서 굴렀습니다. 천길만길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무엇에 탁 걸려서 나무를 탁 잡아서 대롱대롱 달렸습니다. 하늘은 보니 별들만 있고 밑은 보니까 캄캄하여 아무것도 안보입니다. “사람 살려라!” 메아리 소리만 들리고 아무도 없어요. 팔이 아파 죽을 지경입니다. “하나님! 당신의 안수집사 죽습니다. 날 좀 살려 주옵소서.” 그러니까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오냐! 내 안수집사야. 내가 너 살려주마.’ “아이고 빨리 살려 주옵소서.” ‘오냐. 손을 놓아라.’ “예?” ‘살려 줄 터이니 손을 놓아라.’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가 “여보세요! 하나님 이외에 다른 분 없어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나무에 대롱대롱 달려있는데 손을 놓으면 떨어져서 박살이 날것인데 이해가 안 되니까 하나님 이외에 다른 사람 없냐고 고함을 쳤습니다. 정 아무대답도 없고 팔이 아프니까 그만 이제는 스르르 손을 놓고 탁 떨어지는데 보니까 지상 1미터 위에 있었습니다. 떨어져 보니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왜 손을 놓으라는 것인지… 손을 놓았으면 그동안에 달려서 고생은 안했지. 하나님 말에 믿고 순종했으면 고생 안했지요. 여러분 이해를 하려고 하면 우리의 적은 일에도 고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해하지 말고 믿고 순종하면 하나님이 책임져 주시는 것입니다. 믿고 순종하지 않고 이해하려면 하나님이 책임을 저 주시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 중에 화니 크로스비 여사가 작곡한 찬송이 많습니다. 그녀는 출생 6개월 만에 의사의 실수로 소경이 되었으나 한 번도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운명을 탓하지 않고 늘 하나님께 감사 찬송을 드렸습니다. 그녀는 간증 중에 “내 육신의 눈은 감겨졌으나 영의 눈을 뜨게 하셔서 하나님의 선한 뜻을 이루셨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녀가 지은 찬송 중에 찬송가 434장 ‘나의 잘 길 다가도록’은 전 세계 기독교인들이 애창하는 찬송인 것입니다. 우리 함께 불러 보십시다.
“나의 갈 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 내 주 안에 있는 긍휼 어찌 의심하리요 /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 위로 받겠네 /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하리라 /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하리라
나의 갈 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 어려운 일 당한 때도 족한 은혜 주시네 / 나는 심히 고단하고 영혼 매우 갈하나 / 나의 앞에 반석에서 샘물나게 하시네 / 나의 앞에 반석에서 샘물 나게 하시네
나의 갈 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 그의 사랑 어찌 큰지 말로 할 수 없도다 / 성령 감화 받은 영혼 하늘나라 갈 때에 / 영영 부를 나의 찬송 예수 인도하셨네 / 영영 부를 나의 찬송 예수 인도하셨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상황과 고난을 만날지라도 절대선이시고 사랑이신 예수님만 따라가면 되는 겁니다. 왜 이런 일이 생겼습니까? 어떻게 이런 일이 있습니까? 어디로 가십니까? 그런 질문에 대해서 하나님은 일일이 대답하지 않습니다. 대답해봤자 우리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인도하시는 데로 믿고 따라만 가면 끝장을 책임져 주시는 것입니다.
<결론>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관하여 우리가 이해 못할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 개인의 삶속에서 일어나는 일에도 어찌하여 이런 일이 일어나냐고 탄식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 아는 바는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그의 승리는 종국적으로 선하시고 인자하시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 들릴지라도 아침에는 웃음이 올 것을 믿는 것입니다.
1930년대 미국에 대공황이 몰려온 적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클래런스 대로우(Clarence Darrow)라는 유명한 무신론자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법률가 출신인데 무신론자요, 무정부주의자였습니다. 미국이 경제 공항에 빠지자 그는 자기의 무신론을 설파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여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여러분, 이 사태를 보십시오.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미국을 이 모양으로 내버려 놓겠습니까? 우리는 다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것만 보아도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미국 정부를 신랄하게 비판하여 데모와 무장폭동을 일으키도록 부추겼습니다. 하루는 그가 흑인들을 모아놓고 무신론 강연을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다 잃어버렸습니다. 꿈도 잃어 버렸고, 재산도 잃어버리고, 노래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런 정황에 처해서 우리가 교회 와서 무슨 찬송을 부르고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안계십니다.” 그러자 흑인 할머니가 저 뒤에서 손을 번쩍 들면서 “선생님, 나는 노래부를 수 있어요.” 그래서 “이 정황에 무슨 노래를 부릅니까?” 그러자 할머니는 “예수님이 날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몸 찢고, 피를 흘려주셨으므로 하나님이 얼마나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을 믿고 노래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양 사방에서 “그래요. 맞아요. 맞아요. 우리 노래할 수 있어요. 예수님 때문에 노래할 수 있어요.” 마구 찬송을 부르기 시작하니까 그만 이 무신론자가 머쓱해지고 무신론 강연은 낭패가 되고 만 것입니다. 우리는 노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눈에는 아무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고 내 앞길 칠흑같이 어두워도 왜 내게 이러한 어려운 시험과 환난이 다가오는지 이해할 수 없어도 노래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믿을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지 아니하시면 그 외아들을 보내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몸 찢고, 피 흘리게 할 리가 있겠습니까? 십자가를 바라보세요.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어 오셔서 자기 죄 아닌 우리 죄 때문에 자기의 질병 아닌 우리의 질병 짊어지고 우리의 저주를 짊어지고 우리의 죽음을 짊어지고 십자가에 매달려 몸 찢고, 피 흘려 축 늘어져 있는 것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했습니다. 얼마나 사랑했습니까? 저렇게 십자가에 외아들을 못 박기까지 사랑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은 증명된 사랑이요, 온 세상이 아무리 캄캄하고 어두워도 아무리 내 앞이 어둡고 폭풍우가 다가와도 하나님이 날 사랑한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인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였고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절대로 손해나게 만들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습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가 자식 손해되게 하지 않습니다. 아들을 사랑하는 남편이 아내 손해되게 하지 않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이웃을 손해되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절대로 사랑하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절대로 손해되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알려고 하지 말고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믿고 순종하고 따라갈 따름인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알고서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믿고 순종하며 꿈꾸고 감사 찬양을 부르며 살고 나아가야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환경 속에서 어둡고 캄캄하고 절망적인 곳에서도 하나님의 사랑과 절대선을 믿고 그는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나를 이끈다는 것을 믿고 순종하고 종국에 좋아질 것을 꿈을 꾸고 우리는 소리 높여, 감사 찬송하며 인생을 살아가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이 험한 세상사는 동안에 우리가 상상 초월한 일들을 당하고 고난을 당할 때가 많습니다.
왜 이런 일을 당합니까? 왜 내가 이런 고통을 당해야 됩니까? 어찌하여 이런 일이 다가옵니까? 아무리 질문해도 하나님은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세상 고난을 하나님이 설명한들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내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오직 하나 아는 것은 우리를 품에 품고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요, 절대 선한 하나님이요, 우리에게 좋은 일 해 주시지 나쁜 일 안 해준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절대적으로 믿고 순종하며 감사하고 찬송하며 나가게 도와주시옵소서. 눈물을 흘리면서라도 감사하고 찬송하며 나가게 도와주시옵시고 고통 하면서도 꿈을 버리지 말고 감사하고 찬송하며 나가게 도와주시옵소서. 하나님은 절대 선하시고 절대 사랑이시고 그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야훼의 집에 영원히 거할 것이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드리옵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 아멘
<서론>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어찌하여 이런 일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천상천하에 유일무이하신 절대 주권자가 되십니다. 그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든지 당신이 원하는 대로 기뻐하시는 대로 행하십니다. 하나님의 행하심에 대하여 그 누구도 왜 그렇게 행하시느냐고 질문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온 우주는 하나님의 것이고 인류도 하나님이 지으셨고 하나님은 전지전능, 무소부재하시므로 무엇이든지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행하시기 때문입니다.
<본론>
1. 인간이 하나님께 던지는 질문들
그러나 인간들이 하나님께 던지는 질문들이 많습니다만 이 질문들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해하도록 대답해 주시지 않습니다. 많은 문제에 관해서 우리가 이해를 하려고 하는데 하나님은 우리의 질문에 대답하지 아니하시므로 이해가 잘되지 않는 문제가 많습니다.
왜 에덴동산에 선악과를 만들어 놓으셨나요? 왜 마귀가 시험하도록 하셨나요? 이 같은 질문은 예수 믿는 사람이면 다 한 번씩 하는 질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구차스럽게 하나님을 위해서 변명하려고 애를 씁니다. ‘아! 선악과를 만들고 마귀가 시험하게 한 것은 사람을 꼭두각시로 만들지 않고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으로 만드셨기 때문에 자율적으로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느냐를 시험해 보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 그렇게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변명을 하고 설명을 하려고 애를 씁니다만 그러나 별로 시원치가 않으며, 우리의 해답은 크게 이해하는 데 도와주지 못합니다. 또 사람들은 왜 하나님은 유독이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유대민족을 선민으로 삼으셨습니까? 유대민족을 가나안 땅에 심기 위해서 가나안에 일곱 민족을 다 전멸시켰습니까? 남녀, 노유, 유아까지라도 다 멸절시킨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왜 그랬습니까? 우리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에 대해서 하나님을 이해시키려고 대답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구차스럽게 설명을 하려고 하지요. 가나안에 있는 칠족은 우상을 섬기고 완전히 타락하고 부패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더 이상 생존할 수 있는 가치를 상실하고 말았다. 이스라엘을 세워서 정결한 신앙과 행동을 하는 민족을 통해서 구주 예수가 태어나기 위해서는 먼저 청소부터 해야 되었다. 이런 구차스러운 설명을 합니다만 그것이 이해를 돕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독이 아브라함을 사랑하시고 유대민족을 사랑하시고 선민으로 삼으신데 대해서 우리는 고개를 기우뚱하고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창세기 12: 2~ 3에 보면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엄청난 복을 약속해 주신 것입니다.
신명기 7: 7~ 8에 “야훼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야훼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또는 너희의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우리들은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왜 하나님은 구태여 오직 유대민족만 사랑하고 건져내셔서 가나안 땅에 독야청청하게 만드시고 다른 민족은 박멸하셨는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여러분 이해할 수 없는 고통에 몸부림쳤을 때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하고 질문했지만 하나님 대접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못 박혀 6시간 동안 매달려 있었습니다.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양손과 양발에 대못이 박히시고 피를 흘리시고 땀을 흘리시고 탈수가 되고 빈혈이 되고 온몸에 호흡이 곤란하고 극단의 괴로움 속에서 주님은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통곡을 했지만 하나님은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시편 22: 1에 보면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탄식한 것입니다.
또한 왜 2차 대전 때 히틀러가 6백만 유대인들을 참혹하게 학살하도록 침묵하셨나요? 그 질문 많이 합니다. 오늘 유대인들에게 제가 예수를 전도하면 그들은 단호하게 머리를 흔들면서 말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우리 유대인 600만 명이 히틀러에게 살해당할 때 하나님은 침묵하셨다. 하나님은 고개를 돌려 버리셨다. 하나님이 안계시든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지 않던지 둘 중에 하나인데 어떻게 하나님을 믿으란 말입니까? 설명을 해주십시오.” 설명을 할 수도 없고 이해시킬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하여 변호사가 되려고 노력하지만 시원한 대답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설명하는 것은 마태복음 27:24~25 말씀을 통해서 설명을 하려고 애를 씁니다. “빌라도가 아무 효험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가로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백성이 다 대답하여 가로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 찌어다 하거늘”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빌라도에게 넘겨주고 십자가에 못 박게 할 때 빌라도가 “나는 책임이 없으니 너희들 책임지라”고 하니까 우리와 우리 자손들이 책임지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들이 책임지겠다는 말에 대한 응답으로써 그 자손 600만 명, 제2차 세계대전 동안에 학살을 당하게 했다고 우리는 설명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래도 그 설명이 신통치가 않고 시원하지가 않습니다.
1944년 7월 20일 히틀러 암살사건에 연루되어 게슈타포에게 사형을 당한 괴들러(Goedler) 박사의 수기를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잠을 이룰 수가 없다. 개인의 운명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하나님은 과연 계실까? 나는 그것을 믿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수십만의 사람들이 공포와 절망 속에서 미쳐가는 것을 그대로 놓아두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수백만의 사람들이 공포의 풀무불 속에 떨어져 허우적거릴 때 손끝 하나 꼼짝하지 않고 죽게 버려두셨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고난 앞에서 절망하고 낙심합니다. 우리 크리스챤 역시 이러한 질문 앞에서 하나님을 위해 변호사가 되려고 노력하지만 시원한 대답을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너무나 많지요. 우리 개인생활에도 왜 이 고통이 내게 다가옵니까? 왜 이 슬픔이 다가옵니까? 왜 나는 이렇게 괴로움을 당하고 살아야 됩니까? 왜 나는 병들었습니까? 왜 내가 망해야 되는 것입니까? 왜 내가 배신을 당해야 되는 것입니까? 왜 내가 낭패를 당해야 됩니까? 수많은 ‘왜’라는 질문을 하지만 하나님은 침묵하십니다. 우리는 이해를 할 수가 없습니다. 이해를 못하기 때문에 답답하지요. 왜 하나님은 침묵하실까요?
2.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과 섭리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무한하시고 영원하신 계획과 섭리를 우리는 머리로써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예를 말하면 유치원 아동이 선생님께 찾아가서 고등수학을 묻습니다. 겨우 1, 2, 3, 4, 5, 6, 7, 8, 9, 10을 깨달은 어린 아이가 선생님에게 “고등수학에서 미분과 적분을 가르켜 주십시오.” 미분과 적분이라는 고등수학은 어린아이가 도저히 이해할래야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럴 때 이해를 시킬 수 있는 도리가 없기 때문에 선생님은 어린아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허허, 그냥 따라 오너라.” 그 말밖에 할 것이 없습니다. 이해가 안 됩니다. 우리가 아인슈타인 박사에게 가서 “아인슈타인 박사님 상대성원리를 설명해 주십시오. ‘E=mc2’이라고 했는데 질량에다가 광속도를 배가한 것이 에너지라고 했는데 이것이 뭡니까? 이것 좀 알려 주십시오.” 도저히 아인슈타인 박사가 우리같이 문외한에게 상대성원리를 설명할 수 없게 없습니다. 아인슈타인 박사가 가만히 우리를 쳐다보고 싱긋이 웃고 고개만 끄덕끄덕하고 말 것입니다. 왜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것을 이해할만한 지혜와 총명이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냥 우리에게 믿으라고 할 따름이지 이해를 시킬 수는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유한한 인간의 식견으로 전지하신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침묵할 수밖에 없습니다. 설명할래야 설명할 수 없고 깨닫게 할래야 깨닫게 할 수가 없을 때는 하나님은 그냥 일하시고 침묵하실 수밖에 없으신 것입니다. 창조주의 섭리와 운행을 피조물인 인간이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한 시인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나룻배가 바다를 담을 수 없듯이 인간의 조그만 가슴에 하나님의 넓은 세계를 다 담을 수 없다.” 그렇잖아요. 나룻배가 바닷물을 다 그 속에 어떻게 담습니까? 못 담지요. 인간이 어떻게 우주를 다 이해하고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깨달을 수가 있겠습니까? 할 수 없잖아요. 인간은 유한한 시간과 공간의 산물입니다. 이러한 인간이 무한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이 세상 만물을 이해해야 우리는 믿겠다고 한다면 믿을 것 별로 없습니다. 금 이가고 조금 깨어진 오래된 물 항아리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 항아리의 주인은 다른 항아리와 함께 그 깨어진 항아리를 가지고 물을 긷는데 사용했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주인이 깨진 항아리를 버리지 않고 사용하므로 깨어진 항아리는 항상 주인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었어요. 내가 온전치 못해서 주인님께 폐만 끼치는구나. 나로 인해 그토록 힘들게 구한물이 새어 버리는데 아직도 나를 사용해 주시다니. 그래서 하루는 깨진 항아리가 용기를 내어서 주인에게 물었습니다. “주인님! 왜 저를 버리고 온전한 새 항아리를 구하지 않으시나요? 저는 별 쓸모가 없을 텐데요.” 그 말에 주인은 싱긋이 웃고 대답을 안했습니다. 항아리는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새 항아리를 사면 좋겠는데 “나같이 금가고 깨어져서 물이 줄줄 새는 나를 왜 사용하시는가?” 한참 만에 주인이 하는 말이 “너 우리 걸어온 뒷길을 돌아보아라. 돌아오니까 많은 꽃들이 길에 피어 있습니다. 아주 하늘하늘한 바람에 나부끼며 아름다운 꽃이 이쁘게 피어 있습니다. 네가 깨닫고자 하느냐? 네가 깨어진 물 항아리가 되어서 물을 줄줄 흘렸기 때문에 저 꽃들이 다 살고 아름답게 피어있단다. 물을 한 방울도 안 흘렸으면 저 꽃들은 다 말라 죽었을 것이다. 이쯤 되어서 알았겠느냐?” 그렇게 설명을 했습니다. 여러분 항아리를 고개를 끄덕끄덕하고 이해를 했지만 우리의 삶은 그렇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인간은 유한한 시간과 공간의 산물이므로 무한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를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그냥 웃고 침묵할 따름입니다. “하나님 왜요?” 웃으시고 침묵하십니다. “왜 이런 일이 생깁니까? 어찌하여 이런 일이 생겼습니까?” 웃으실 따름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이 무한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이사야 55: 8에 “야훼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라고 말했습니다.
무지한 사람들을 이해시킬 수 없을 때는 그냥 웃고 침묵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설명하나요? 설명이 안 돼지요.
3. 감당할 수 없는 의문에 대한 우리의 태도
우리는 감당할 수 없는 의문에 대한 어떠한 태도를 가지고 살아야 되겠습니까?
이 세상에 살면서 너무나 많은 감당할 수 없는 질문이 다가올 때 어떻게 하고 살아야 되겠습니까? 여러분 아브라함을 생각해 보십시오. 아브라함은 아들을 달라고 하나님께 25년 동안 기도를 해서 100세에 아들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이아들 이삭이 이제 10대 소년이 되어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일을 돌보아 주고 친구가 되고 같이 먹고 자고 깨고 하는 너무나 사랑스러운 아들 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루 갑자기 하나님이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네 사랑하는 외독자 이삭을 모리아 산에 데리고 와서 죽여서 각을 떠서 장작불에 얹어 재물로 내게 드려라” 그 말씀에 아브라함은 “하나님! 이해가 안 됩니다. 어떻게 25년 동안 기도해서 내게 허락하신 외독자를 모리아 산에 가서 잡아서 각을 떠서 장작불에 태워서 재물로 드리라고 합니까? 이해가 안 됩니다.” 하나님이 대답하셨습니까?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이해시키려고 했습니까? 하나님은 명령하셨을 따름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직 아브라함이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은 하나님이 명령하셨으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믿을 따름인 것입니다. 믿고 순종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무엇을 믿고 순종합니까? ‘하나님은 절대 사랑이고 선하신 하나님이기 때문에 죽여 놓아도 살려 주실 것이다. 이해할 수 없으니까 하나님은 절대 사랑이고 절대 선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불의한 일을 행하지 아니하시고 내게 손해나는 일은 행하지 아니할 것이다. 나는 이해할 수 없다. 눈에는 아무증거 없고 귀에는 아무소리 들리지 않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고 내 앞길 칠 흙같이 어두워도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믿는다. 내가 할 일은 믿고 순종하는 길밖에 없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그 아들을 데리고 사흘 길을 걸어서 모리아 산에 올라가서 그 아들을 묶어서 장작위에 올려놓고 목을 칼로 따기 위해서 머리를 발로 눌렀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네 독자 이삭에게 칼 대지 말라. 내가 네 아들도 아끼지 않고 내게 내 놓았은즉 이제 네가 나를 사랑하는 줄 아노라.” 왜 하나님이 그렇게 하라고 하는가. 이해는 믿고 순종한 다음에야 다가온 것입니다. 처음에는 설명 안했어요. 믿고 순종하니까 나중에 하나님이 왜 그렇게 했는지 이해를 시켜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모든 것을 이해하려고 할 때는 가슴이 답답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 사랑이고 절대 선이시기 때문에 종국에 가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유익되게 해주시는 것을 믿을 따름인 것입니다. 믿고 순종하고 사는 것이 신앙입니다.
제가 옛날에 불광동에서 목회할 때였습니다. 다 떨어진 가마니, 물이 철철 새는 천막을 치고 열심히 전도해서 겨우 수십 명의 교인이 모였습니다. 그 교인 가운데 가장 충실하게 나와서 교회를 돌보고 연보고 잘 내는 권사님 한분이 계셨습니다. 과부입니다. 그에게는 아들, 딸 둘이 있었는데 아들은 외아들입니다. 한 여름 더울 때 그 아들이 연못에서 미역 감다가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하늘이 아뜩합니다. 그 과부 권사님이 와서 내 옷깃을 잡고서 “목사님, 왜 이러십니까? 왜 내게 이런 일이 생깁니까? 내가 교회도 열심히 나오고 십일조도 드리고 새벽기도도 하고 하나님을 섬겼는데 왜 내 아들이 물에 빠져 죽었습니까? 왜 이렇습니까? 해석해 주십시오. 설명해 주십시오.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왜 이렇습니까?” 저도 너무나 답답하고 저도 이해가 안 되었어요. 저도 “하나님, 교회를 망치려고 작정하셨습니까? 이제 교회가 겨우 천막교회가 서서 수십 명이 모이고 그리고 기둥같이 의지하고 이 과부 권사의 외아들이 물에 빠져 죽었으니 이 교회 그만둬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해할 수 없습니다. 내가 차라리 물에 뛰어 들어가서 죽고 싶습니다.” 그것이 48년 전의 일입니다. 지금도 이해가 안 됩니다. 이해가 안 됩니다. 그러나 지금은 내가 하나 아는 것은 하나님께서 절대 사랑이시고 절대 선이기 때문에 그때 그 당시에 그렇게 한 것은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최선의 길이었다는 것만 믿음으로 알 따름인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믿을 따름인 것입니다. 지금은 도저히 이해가 안 되지만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이 그 당시 그 애에게는 그 일이 최선의 길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렇게 했다고 믿고 순종할 따름인 것입니다.
요셉은 그 고난의 과정마다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왜 형들이 자기를 잡아서 발가벗겨 우물물에 던져 넣도록 하나님 내버려 두셨는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 다음에 왜 그들이 건져서 미디안의 대상에게 팔아 넘겨서 종으로 팔리게 했는가. 왜 그가 보디발의 집에서 종으로 10년이 넘도록 잔뼈가 다 굵도록 고통을 당하고 괴로움을 당하고 살아야 했는가. 이해가 안 됩니다. 겨우 가정 총무가 되어 살만하니까 그 아내의 참소를 받아서 억울하고 답답하게 누명을 덮어 씌고 감옥에 들어가서 2년 동안 감옥에서 썩어야 되는 것입니까? 이해가 안 됩니다. 왜요? 왜 이렇게 됩니까? 무엇 때문이에요? 왜 하나님이 이렇습니까? 하나님 왜 침묵하십니까? 대답하세요. 대답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그는 국무총리가 되어서 돌아보니 걸음마다 자국마다 그 모든 것이 국무총리가 되는 발걸음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깨달음은 후에 다가오는 것입니다. 믿고 순종하고 따라온 이후에 하나님은 최종적으로 깨닫게 해주십니다. 깨닫고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이란 깨닫고 난 다음 믿고 순종하는 것 아닙니다. 우리는 믿고 순종하고 난 다음 이후에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성수 주일하라고 합니까? 주님께서 꼭 주일날 우리가 교회 오라고 할 필요 없잖아요. 집에서 인터넷 가지고 예배드리면 되잖아요. 왜 교회에 나오라고 그럽니까? 하나님이 뭐라고 말합니까? ‘이해할 필요 없다. 믿고 순종하라.’ “하나님 우리가 먹기도 바쁘고 생활이 어려운데 왜 십일조 내라고 합니까? 왜 십일조를 하나님이 잡수셔야만 됩니까? 왜요?” 하나님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이해를 시켜주지 않습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믿고 순종하라는 것이지 너에게 이해시키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이해하기 위해서 신앙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고 순종하기 위해서 신앙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하나, 둘, 셋 모두다 우리에게 이해시키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전지전능, 무소부재하신 섭리 가운데 우리에게 제일 좋은 길을 아셨기 때문에 그 길을 정하시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그 명령한 길이 우리에게는 험하고 고통스럽고 괴로운 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손해가 나고 답답하고 안타까운 길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믿고 알기 때문에 믿고 순종해 나갈 따름인 것입니다. 먼 훗날에야 하나님께서 깜짝 놀라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저는 폐병으로 아파 드러누워 있을 때 누님이 저의 수종을 들었는데 방안에 드러누워 있으면 누님은 그때 시집가기 위해서 벽에 옆에 붙이는 그 무늬를 수놓았습니다. 누님이 수틀에서 수를 놓는데 저는 뒤에서 이렇게 드러누워서 보니까 엉망입니다. 노랑실, 파랑실, 빨강실이 완전히 엉켜 가지고 엉망진창입니다. 그러면 내가 “누님, 수를 뭐 그렇게 놓아? 뒤에서 보니 엉망진창이야. 노랑실, 빨강실, 파랑실이 얽히고, 설키고 아무것도 아니야.” 그럴 때마다 “기다려봐. 지금은 그렇게 보여도 나중을 기다려봐.” 누님이 수를 다 놓고 난 다음에 수틀에서 그 천을 턱 끄집어내서 싹 돌리면 그곳에 꽃이 피고 물이 흐르고 나비가 날고 새가 아름답게 지저귀고 있는 것을 보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가 중간 중간에 아무리 깨달아 알려고 해도 알 수 없습니다. 완성시켜 놓으면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다 이루었다 하실 때 비로소 하나님이 왜 그렇게 하셨는지를 이해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을 이해하려고 자꾸 어찌하여 이렇습니까? 왜 이렇습니까? 하지 말고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믿고 순종하고 믿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600만 유대인이 학살된 이유를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왜 2차 대전 때 600만 명이나 학살되었습니까? 6명도 아닙니다. 60명이면 안 묻겠습니다. 600명이라도 안 묻겠습니다. 6천명이라도 아무 말 안하겠습니다. 6만 명이라도 아무 말 안하겠습니다. 60만 명이라면 고개를 조금 갸우뚱 하겠습니다. 그러나 600만 명이나 죽도록 하나님이 침묵하셨습니다. 히틀러 한 사람의 야욕을 채우기 위해서 600만 명이 가스실에서 처참하게 죽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요? 왜요? 지금까지도 하나님은 침묵하신다.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원하신 섭리 가운데 하나님 보시기에는 그때 그렇게 하는 것이 그들에게 최선의 길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고 우리는 믿고 순종하고 나갈 따름인 것입니다.
시편 123: 2에 “종의 눈이 그 상전의 손을, 여종의 눈이 그 주모의 손을 바람 같이 우리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며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기를 기다리나이다”라는 말씀대로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볼 따름인 것입니다.
한 선교사 지망자가 몹시 추운 겨울 새벽에 면접시험을 치루기 위해 선교국에 찾아갔습니다. 선교국에서는 새벽 3시에 오라고 했습니다.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그래서 새벽 3시에 선교국에 나가니까 아무도 안나왔어요. 그래서 3시에 벌벌 떨고 그 선교국 사무실에 앉아 있었습니다. 무려 5시간을 기다렸는데 아침 8시가 되니까 직원 한 사람이 어슬렁어슬렁 나오더니 미안하다고 말도 안하고 “자, 면접시험을 시작해봅시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시험이라는 것이 뭐냐면 시험지를 내놓고 “학교라는 단어를 한번 적어 보십시오.” 속으로 ‘나를 병신으로 아느냐? 학교라는 단어를 적어 보라니.’ 그는 학교라는 단어를 적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2 곱하기 2는 뭡니까?” ‘이런 유치원생인줄 아느냐?’ 그러나 “2 곱하기 2는 4입니다.” 그러니까 그 직원이 연필을 탁 놓더니만 “합격되었습니다.” 기가 막힙니다. “당신 내일 선교위원회의 출석하십시오. 선교위원회에서 정식으로 당신을 임명하겠습니다.” 그는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세상에 시험, 시험 쳐도 이런 시험이 어디 있느냐?’ 그 이튿날 선교위원회에 참석하니까 그 총무가 하는 말이 “이분이 합격된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로 극기시험에 합격했습니다. 추운 날 새벽 3시에 오라고 했는데 아무 불평이 없이 새벽 3시에 와서 5시간을 앉아 있었으니 극기 훈련에 합격했습니다. 극기시험에 합격했어요. 둘째로 그는 시간을 엄수했습니다. 꼭 3시에 와서 5시간을 기다렸습니다. 그것은 신뢰와 약속의 시험에 합격을 했습니다. 셋째, 5시간을 기다리는 것을 보니까 견디는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인내의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그다음 넷째, 어린 아이 시험문제로 시험을 보는데도 기분 나쁜 표정을 한 번 짓지 않아 겸손하게 학교를 적으라고 하니 학교를 적고 2 곱하기 2는 4라고 적는 것 보니 겸손한 시험에 합격을 했습니다. 우리 선교사로써 필요한 네 가지 자격이 모두다 이분에게 겸비하고 있으므로 우리 선교사로써 자격이 인정됩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그 선교사 지망생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가 한 모든 일이 시험 대상이었습니다. 그는 질문을 받는 것만 시험인줄 알았는데 새벽에 3시에 오는 것도, 시험 치는 것이고, 추운데 벌벌 떨고 앉아 있는 것도 시험 보는 것이고, 그에게 어린아이 질문을 한 것도 시험 본 것이고 모든 것이 시험을 친 것을 그때야 깨닫게 된 것입니다. 깨달음은 후에 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에게 이해 못할 시험으로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에 합당한 자격을 갖추었는지 여부를 판단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왜 이삭을 바쳐야 하는지 모르면서 그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순종과 믿음으로 그는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감당할 수 없는 의문이 삶 속에 다가온다 할지라도 절대 선이신 하나님을 믿으면 그 이유는 나중에 알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그런 질문을 많이 했습니다. 제가 17살에 한참 청운의 꿈을 품고 나갈 때 폐병으로 쓰러졌습니다. 나는 우리 클래스에서 제가 언제나 수장을 했습니다. 시험을 쳐도 늘 1등을 하고 달리기를 해도 1등을 하고 운동을 해도 늘 1등을 했는데 나는 내 마음속에 굉장한 미래의 꿈이 있었습니다. 위대한 과학자가 되겠다는 꿈이 있었는데 17살에 폐병에 걸려서 쓰러져서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때 내가 많은 질문을 했습니다. ‘왜, 다른 애들은 다 저렇게 건강한데 왜 내가 폐병 걸렸습니까? 다른 애들은 자기 청운의 꿈을 품고 나가는데 왜 나는 폐병으로 쓰러졌습니까?’ 제가 폐병 요양을 하면서 머리를 이만큼 기르고 초췌한 모습으로 하루는 길거리에 나갔는데 내 동기 동창들이 해군사관학교에 가서 사관생도가 되어 멋있는 사관복을 입고 외투를 입고 겨울에 모자 쓰고 애인들하고 길거리에 걸어가는 것을 보고 ‘하나님 나는 이게 뭡니까? 나는 왜 버리십니까? 나는 인생에 패배자가 되었습니까?’ 수없이 물어도 대답을 해주지 않았습니다.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불러도 대답없는 이름이여 아무리, 아무리 하나님께 질문을 해도 대답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서 이제 48년이 지났습니다. 지금 돌아보니 이제야 대답이 됩니다. 왜, 주의 종이 되게 하려고 그렇게 하셨다. 그때는 대답이 없었어요. 갈 길이 캄캄했어요. 오직 내 앞에 열린 길을 따라서 믿고 순종만 하고 울면서 걸어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돌아보니 내 친구들은 다 인생 은퇴를 하고 지금 할 일이 없는데 나는 지금도 할 일이 있고 주님 사업을 위해서 천하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여러분이 “왜 이렇습니까? 어찌하여 이렇습니까?” 할 때 대답하지 않습니다. ‘믿고 순종만 하라. 끝장이 좋아질 것이다. 내가 끝을 좋게 만들어 줄 것이다. 믿고 따라만 오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영원히 섭리 속에서 하나님은 절대 선이시고 그의 행하시는 모든 일은 선하시고 인자하신 것입니다.
시편 23: 6을 다 같이 소리 내어 읽어 보십시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른다고 한 것입니다. 내가 캄캄한 밤을 지날지라도 하나님은 선하시고 인자하심으로 나를 이끌어 주시고 밝은 대낮을 걸어갈지라도 선하시고 인자하심이 나를 따라서 결과에 악을 변하여 선으로 만드시는 역사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것을 이해하려고 하지만 순종하고 믿고 나가야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12에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우리는 지금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문제를 거울을 보듯이 희미하게 알고 부분적으로 알고 완전히 알지 못합니다. 완전한 대답을 얻을수 없습니다. 하늘나라에 올라가면 그때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펼쳐 보여 주시면서 그때는 내가 이해할 만한 지성이 없었기 때문에 설명 못했지만 이제 설명해 주마. 우리의 모든 퀘스천을 설명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때까지 로마서 8:28을 믿어야 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동남풍아 불어라. 서북풍아 불어라. 내 앞길 칠흑같이 어두워도 믿고 순종해 나가면 결과에 가서는 선하게 될 것이다. 요셉이 말하는 것처럼 형들은 나에게 악을 도모했으나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변화시켰다고 하신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절대 선을 믿으며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믿고 무조건 따라 가는 것입니다. 이해하지 말고 믿고 따라가야 되는 것입니다.
교회 한 안수집사가 교회 출석하는 것이 싫어졌습니다. 목사님 설교가 별로 안 좋아서 한 몇 년 다니니까 목사님 설교를 다 알겠어요. 왜냐하면 작년에 써먹은 것 올해 써먹고 올해 써먹은 것도 명년에 써먹으니까 아브라함이라고 하면 끝까지 다 알아요. 그래서 그 부인도 하는 말이 “나는 목사님 설교 다 알고 있으니까 당신만 교회 나가세요. 나는 이제 점심 도시락 싸서 산에 올라가서 자연과 더불어 예배를 드리겠다.”
교회 나오고 자기는 도시락 싸서 산에 올라가서 저 들을 내다보고 “야호! 야 이것이 진짜 예배다. 자연의 하늘 밑에 바람을 쏘이며 아름다운 경치를 보고 찬송가를 부르고 얼마나 좋으냐.” 찬송가 한 장 부르고 배불리 밥 먹고 팔을 베개로 하고 누워 있다가 그만 잠이 들었는데 깨보니까 밤중이었습니다. 몸이 오싹하고 추운데 산에 올라 왔는데 내려갈 길을 알 수가 없어요. “아이고 하나님, 우리 집사람하고 교회 가서 예배 드렸더라면 오늘 편안하게 지금 잠자리에 들어갔을 텐데 내가 산에 올라와서 혼자 예배드린다고 고집 부리다가 이 밤중에 산위에 어떻게 내려갈지 모릅니다. 주님 당신의 안수집사 좀 도와주시옵소서.” 그리고 주여, 주여 하고서 내려오다가 그만 벼랑에서 굴렀습니다. 천길만길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무엇에 탁 걸려서 나무를 탁 잡아서 대롱대롱 달렸습니다. 하늘은 보니 별들만 있고 밑은 보니까 캄캄하여 아무것도 안보입니다. “사람 살려라!” 메아리 소리만 들리고 아무도 없어요. 팔이 아파 죽을 지경입니다. “하나님! 당신의 안수집사 죽습니다. 날 좀 살려 주옵소서.” 그러니까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오냐! 내 안수집사야. 내가 너 살려주마.’ “아이고 빨리 살려 주옵소서.” ‘오냐. 손을 놓아라.’ “예?” ‘살려 줄 터이니 손을 놓아라.’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가 “여보세요! 하나님 이외에 다른 분 없어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나무에 대롱대롱 달려있는데 손을 놓으면 떨어져서 박살이 날것인데 이해가 안 되니까 하나님 이외에 다른 사람 없냐고 고함을 쳤습니다. 정 아무대답도 없고 팔이 아프니까 그만 이제는 스르르 손을 놓고 탁 떨어지는데 보니까 지상 1미터 위에 있었습니다. 떨어져 보니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왜 손을 놓으라는 것인지… 손을 놓았으면 그동안에 달려서 고생은 안했지. 하나님 말에 믿고 순종했으면 고생 안했지요. 여러분 이해를 하려고 하면 우리의 적은 일에도 고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해하지 말고 믿고 순종하면 하나님이 책임져 주시는 것입니다. 믿고 순종하지 않고 이해하려면 하나님이 책임을 저 주시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 중에 화니 크로스비 여사가 작곡한 찬송이 많습니다. 그녀는 출생 6개월 만에 의사의 실수로 소경이 되었으나 한 번도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운명을 탓하지 않고 늘 하나님께 감사 찬송을 드렸습니다. 그녀는 간증 중에 “내 육신의 눈은 감겨졌으나 영의 눈을 뜨게 하셔서 하나님의 선한 뜻을 이루셨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녀가 지은 찬송 중에 찬송가 434장 ‘나의 잘 길 다가도록’은 전 세계 기독교인들이 애창하는 찬송인 것입니다. 우리 함께 불러 보십시다.
“나의 갈 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 내 주 안에 있는 긍휼 어찌 의심하리요 /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 위로 받겠네 /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하리라 /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하리라
나의 갈 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 어려운 일 당한 때도 족한 은혜 주시네 / 나는 심히 고단하고 영혼 매우 갈하나 / 나의 앞에 반석에서 샘물나게 하시네 / 나의 앞에 반석에서 샘물 나게 하시네
나의 갈 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 그의 사랑 어찌 큰지 말로 할 수 없도다 / 성령 감화 받은 영혼 하늘나라 갈 때에 / 영영 부를 나의 찬송 예수 인도하셨네 / 영영 부를 나의 찬송 예수 인도하셨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상황과 고난을 만날지라도 절대선이시고 사랑이신 예수님만 따라가면 되는 겁니다. 왜 이런 일이 생겼습니까? 어떻게 이런 일이 있습니까? 어디로 가십니까? 그런 질문에 대해서 하나님은 일일이 대답하지 않습니다. 대답해봤자 우리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인도하시는 데로 믿고 따라만 가면 끝장을 책임져 주시는 것입니다.
<결론>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관하여 우리가 이해 못할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 개인의 삶속에서 일어나는 일에도 어찌하여 이런 일이 일어나냐고 탄식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 아는 바는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그의 승리는 종국적으로 선하시고 인자하시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 들릴지라도 아침에는 웃음이 올 것을 믿는 것입니다.
1930년대 미국에 대공황이 몰려온 적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클래런스 대로우(Clarence Darrow)라는 유명한 무신론자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법률가 출신인데 무신론자요, 무정부주의자였습니다. 미국이 경제 공항에 빠지자 그는 자기의 무신론을 설파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여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여러분, 이 사태를 보십시오.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미국을 이 모양으로 내버려 놓겠습니까? 우리는 다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것만 보아도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미국 정부를 신랄하게 비판하여 데모와 무장폭동을 일으키도록 부추겼습니다. 하루는 그가 흑인들을 모아놓고 무신론 강연을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다 잃어버렸습니다. 꿈도 잃어 버렸고, 재산도 잃어버리고, 노래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런 정황에 처해서 우리가 교회 와서 무슨 찬송을 부르고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안계십니다.” 그러자 흑인 할머니가 저 뒤에서 손을 번쩍 들면서 “선생님, 나는 노래부를 수 있어요.” 그래서 “이 정황에 무슨 노래를 부릅니까?” 그러자 할머니는 “예수님이 날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몸 찢고, 피를 흘려주셨으므로 하나님이 얼마나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을 믿고 노래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양 사방에서 “그래요. 맞아요. 맞아요. 우리 노래할 수 있어요. 예수님 때문에 노래할 수 있어요.” 마구 찬송을 부르기 시작하니까 그만 이 무신론자가 머쓱해지고 무신론 강연은 낭패가 되고 만 것입니다. 우리는 노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눈에는 아무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고 내 앞길 칠흑같이 어두워도 왜 내게 이러한 어려운 시험과 환난이 다가오는지 이해할 수 없어도 노래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믿을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지 아니하시면 그 외아들을 보내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몸 찢고, 피 흘리게 할 리가 있겠습니까? 십자가를 바라보세요.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어 오셔서 자기 죄 아닌 우리 죄 때문에 자기의 질병 아닌 우리의 질병 짊어지고 우리의 저주를 짊어지고 우리의 죽음을 짊어지고 십자가에 매달려 몸 찢고, 피 흘려 축 늘어져 있는 것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했습니다. 얼마나 사랑했습니까? 저렇게 십자가에 외아들을 못 박기까지 사랑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은 증명된 사랑이요, 온 세상이 아무리 캄캄하고 어두워도 아무리 내 앞이 어둡고 폭풍우가 다가와도 하나님이 날 사랑한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인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였고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절대로 손해나게 만들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습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가 자식 손해되게 하지 않습니다. 아들을 사랑하는 남편이 아내 손해되게 하지 않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이웃을 손해되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절대로 사랑하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절대로 손해되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알려고 하지 말고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믿고 순종하고 따라갈 따름인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알고서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믿고 순종하며 꿈꾸고 감사 찬양을 부르며 살고 나아가야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환경 속에서 어둡고 캄캄하고 절망적인 곳에서도 하나님의 사랑과 절대선을 믿고 그는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나를 이끈다는 것을 믿고 순종하고 종국에 좋아질 것을 꿈을 꾸고 우리는 소리 높여, 감사 찬송하며 인생을 살아가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이 험한 세상사는 동안에 우리가 상상 초월한 일들을 당하고 고난을 당할 때가 많습니다.
왜 이런 일을 당합니까? 왜 내가 이런 고통을 당해야 됩니까? 어찌하여 이런 일이 다가옵니까? 아무리 질문해도 하나님은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세상 고난을 하나님이 설명한들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내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오직 하나 아는 것은 우리를 품에 품고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요, 절대 선한 하나님이요, 우리에게 좋은 일 해 주시지 나쁜 일 안 해준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절대적으로 믿고 순종하며 감사하고 찬송하며 나가게 도와주시옵소서. 눈물을 흘리면서라도 감사하고 찬송하며 나가게 도와주시옵시고 고통 하면서도 꿈을 버리지 말고 감사하고 찬송하며 나가게 도와주시옵소서. 하나님은 절대 선하시고 절대 사랑이시고 그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야훼의 집에 영원히 거할 것이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드리옵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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