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
성경본문 : | 고후4:7~10 |
---|---|
설교자 : | 조용기 목사 |
참고 : | 2008. 3. 9. 주일설교 |
<서론>
오늘 저는 '우리 몸에 나타나는 예수의 생명'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일정 치하나 6.25 사변의 고난을 통해 본 사람은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평화와 번영이 얼마나 고맙고 달고 감사한지 형언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풍요의 시대에 태어난 그리고 자란 세대는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평화와 번영을 당연지사로 생각하고 그 안에서 감사와 행복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옛날 고생하면서 산 것이 손해인 것 같으나 실제로 지나가 보면 그 배경이 있기 때문에 현재의 부요와 풍요를 감사하고 기쁘게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배가 고파본 사람이어야 밥의 귀중함을 압니다. 밥이 항상 많은 사람은 원래부터 밥이 있는 것은 당연지사라고 생각하지만 빈 밥그릇을 가지고 울어본 사람은 밥 한톨이 얼마나 귀한지 형언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나는 우리 애들하고 밥을 먹을 때 밥풀 하나라도 다 주어 먹으니까 "아버지 왜 그렇게 주접을 떱니까? 그 밥풀 뭐 하러 주워 먹습니까?" "야 이것 먹어서 배가 불러서 먹는 것이 아니라 일정 말년에 육이오 사변 때 밥 한 톨이 얼마나 귀한지 눈물을 흘리며 밥을 먹었단다. 그때를 생각하니까 이 밥 한 톨이 얼마나 귀한지를 안다. 너희들은 말로써 설명해서는 알 수가 없을 것이다." 제가 그런 말을 여러 번 한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 병이 들어봐야 건강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야~ 건강한 것이 얼마나 좋으냐. 환난을 당해봐야 평안의 귀중함을 깨닫게 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본론>
1. 우리 속에 있는 보배
우리는 우리 질그릇 속에 보배이신 예수님을 모시고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정말 예수님이 나와 같이 계시느냐? 못 보았는데, 예수님의 음성도 못 듣고 체험 못했는데 이 질그릇에 보배를 가졌다고 하는데 보배가 어디 있느냐?" 그렇게 말을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 속에 계신 예수님의 그 보배를 체험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고난을 당해봐야 아는 것입니다.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할 때 고통당할 때 그 고통에서 기도하면 주님의 능력으로 해방을 시켜 주면 "야~ 주님이 살아 계시구나. 주님이 나와 같이 계시구나"하는 것을 느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고통을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기도할 것이 없기 때문에 아무리 해도 살아계신 예수님이 함께 계신 것을 느끼지 못합니다. 저는 폐병으로 엄청난 고통을 당해봤기 때문에 치료하는 예수님을 깨달아 알고 그를 감사하고 찬미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내 건강했던 사람은 예수님이 병을 고치는지 안 고치는지 알 수가 없어요. 체험을 안 해봤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 38절에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믿음으로 살려니까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해봐야 내가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고 주님이 그 우겨 쌓은 담을 헐어버리고 우리를 해방시키는 능력을 나타내는 것을 체험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4장 4절에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고 능력 많으신 분이 나와 같이 계신 것을 알려면 적군이 와서 싸워봐야 아는 것입니다. 그래야 적군에게 지면 내속에 계신 예수님이 아무것도 아니지만 적군을 이기면 내 속에 계신 예수님이 과연 능력이 계시구나 하는 것을 우리가 깨달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미국의 대니 로페즈라는 여성은 47일 동안 혼수상태에 있었습니다. 의사들은 회생불능의 뇌사상태라고 말했었습니다. 당시 그녀는 임신 4개월이었습니다. 그 운명이 아기의 운명과 함께 결정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족들은 그녀에게 산소호흡기 등 생명 보조장치를 모두 떼도록 하고 임종을 기다렸습니다. 그 때 갑자기 그녀의 뱃속에서 아기들이 심하게 꿈틀거렸습니다. 이와 동시에 놀라운 일이 시작되었습니다. 뇌사상태였던 대니 로페즈의 뇌파가 갑자기 살아서 움직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완전히 뇌파가 죽었는데 애기가 뱃속에서 발차고 몸부림을 칠 때마다 뇌파가 살아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몇 개월 동안 이 여인은 뇌사 상태에서 생명을 유지했습니다. 그리고 의사들의 예측을 깨고 무의식상태에서 건강한 쌍둥이를 낳았습니다. 이후 여인은 조금씩 의식을 회복하더니 완전히 건강을 회복했던 것입니다. 그녀는 깨어난 후 자신이 체험담을 기적의 순간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의식이 가물가물해 질 때쯤 뱃속에서 괴로움으로 요동치는 아이들의 태동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그 고통은 고스란히 내게 전달되었고, 나는 절망으로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그 순간 내 마음에 '너의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해! 너의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해!'라는 소리가 울렸습니다."그녀는 이 소리가 들릴 때마다 마음속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나를 살려 주셔서 이 애기들을 구조하여 주시옵소서.' 뇌는 죽었는데 그 영이 속에서 기도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쉬지 않고 기도를 드렸다고 한 것입니다. 그녀가 뇌사상태에서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기도를 응답하셔서 아기를 순산하고 그 모친도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가 견딜 수 없는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 주님을 의지하고 해결되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 속에는 보배인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다는 것을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말하기를 "사람이 뇌사상태에 있어도 영혼은 살아있다는 것을 자기는 안다." 의학적으로 완전히 뇌가 죽었는데 뇌파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어린 아이가 뱃속에서 꿈틀거릴 때마다 자기 속에서 자기 영이 고통을 당하며 '하나님 나와 어린 아기를 살려 달라'고 부르짖어 기도했고 응답 받았다. 이런 고통을 안 겪어본 사람은 뇌사상태에서 하나님이 기도를 응답해 주신다는 것을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둠이 있어봐야 빛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죽음이 있어봐야 생명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싸임을 당해봐야 그곳에서 해방시키는 주님이 계신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답답한 일을 당해 죽을 지경일 때 주님께 의지하여 해결될 때 '야~ 주님은 정말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는 하나님이시구나' 하는 것을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시편 91편 14절로 15절에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내가 그를 장수하게 함으로 그를 만족하게 하며 나의 구원을 그에게 보이리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려움을 당해봐야 답답한 일을 당해 죽을 지경일 때 기도하고 하나님의 응답을 받으면 문제를 해결하시는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구나. 그래서 나중에 다른 사람이 염려, 근심, 불안, 초조, 절망에 둘러 싸여서 절망일 때 '걱정하지 말아라. 해결하는 하나님이 계신다. 체험했다. 하나님은 이 문제를 해결한다.'고 담대하게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한 여인은 화학물질에 중독이 되어 신체의 면역체가 파괴되었습니다. 그리고 5년 동안 진공 상태의 치료실에서 치료를 받았습니다. 그 과정이 너무 고통스러워 죽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이처럼 극심한 고통의 시기에 그녀는 한 가지 작은 목표를 세우고 씨름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매일 성경 한 구절을 읽고 일 분 간이라도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진공상태에서 치료를 받아야만 하는 그녀에게 이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살기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며 말씀을 부여잡는 것뿐이었습니다. 결국 5년간의 투병 생활에서 회복되어 병원을 나올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장애인을 돕는 자선단체에서 일하게 되었었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주님이 내게 고통을 맛보게 하시고 그 가운데에서라도 기도를 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부르짖어서 그 절망에서 낫게 해주셨기 때문에 살아계신 하나님 얼마나 장애로 고통당하는 상태라도 도와줄 수 있는 하나님이 살아계신 다는 것을 내가 깨닫고 장애인을 위해서 일생을 바치게 되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제가 체험해 봐야 아는 것입니다. 자기가 먹어봐야 맛이 어떤지 알지 먹어 보지 않고 맛이 어떤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능력으로 해방될 때 우리는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의 뜻을 더욱 분명하게 깨달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또 핍박당할 때, 버림을 받을 때, 상상을 초월한 주님의 위로를 받을 때 주님이 살아 계신다는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장 4절로 5절에 보면 바울이 말씀하기를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우리가 주님이 얼마나 우리를 위로하시고 우리 마음에 평화를 주신다는 것을 체험 하려면 큰 환난과 고난을 당해봐야 아는 것입니다. 환난과 고난을 안 당해 보면 환난과 고난을 극복할 수 있을 만한 위로와 평안을 주는 하나님을 깨달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머리로 상상을 해서는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바울선생은 우리가 아시아에서 죽도록 고통을 당해 봤는데 그 가운데서 주님이 큰 위로와 평안을 받았으므로 위로와 평안을 주는 하나님을 깨닫고 너희에게 위로와 평안을 줄 수 있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핍박을 당해봐야 아무리 사람들이 핍박해도 주님이 우리를 끌어안고 품에 위로해 주시는 위로가 엄청나게 크다는 것을 체험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위로가 있는 이상 아무런 핍박을 받아도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거꾸러뜨림을 당해 망했을 때 잿더미 위에서 소생하고 부활 했을 때 창조적인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는다. 아 원수가 와서 거꾸러뜨립니다. 집안을 거꾸러뜨리고 사업을 거꾸러뜨리고 생활을 거꾸러뜨려 버립니다. 완전히 망하고 잿더미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불사조같이 부활한 것입니다. 완전히 망했는데 돌아보니 전에 보다더 흥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면 망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절망에서 부활을 주시는 예수님이다. 이것을 체험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거꾸러뜨림을 당해봐야 부활을 주신 예수님을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왜 예수님이 죽으셨나요?" 죽으셔야 부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안 죽으면 부활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부활해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명하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안 죽었는데 어떻게 부활하는 것입니까? 다른 모든 종교지도자들은 훌륭한 말씀을 가르쳤지만 하나님의 아들로 증명을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만 가르친 것이 아니라 "날 죽여라. 사흘 만에 다시 살리겠다." 그래서 주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죽음이 있어야 부활을 증명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2. 예수의 죽음이 무엇인지?
예수의 죽음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10절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놀라운 말씀이지요.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닌다는 것은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무덤 내 무덤, 예수 부활 내 부활 예수와 하나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그냥 예수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내 몸에 짊어지고 다녀야 된다. 그것도 일시적이 아니라 아침, 점심, 저녁 순간마다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녀야 되요.
그래야 예수의 생명도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예수님은 우리의 죄, 불의, 병, 저주, 죽음을 짊어지고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의 죽음을 걸머지고 예수와 하나가 되었다는 것은 우리도 예수와 함께 죄에 대해서 죽고 마귀와 세상에 대해서 죽고 병에 대해서 죽고 저주에 대해서 죽고 그리고 사망과 음부에 대해서 죽었다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은 관계가 끊어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여러분 사랑하는 부모라도 친자식이라도 죽으면 모저에 가서 묻고 살아있는 세계와 끊어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부르짖어 봐도 대답이 없습니다. 아무리 사랑한다고 해도 응답이 없는 것입니다. 죽었습니다. 관계가 끊어졌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죄에 대해서 죽고, 세상과 마귀에 대해서 죽고, 병에 대해서 죽고, 저주에 대해서 죽고, 사망과 음부에 대해서 죽었는데 이 예수를 우리가 항상 몸에 걸머지면 예수 죽음 내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와 함께 내가 죽었다는 것입니다. 나도 죄에 대해서 죽었고, 나도 세상과 마귀에 대해서 죽었고, 나도 세상의 질병에 대해서 죽었고, 나도 저주에서 죽었고, 나도 사망과 음부에서 죽어서 관계가 끊어다. 마귀야 나와 상관없다. 죄야 나와 관계가 없다. 병아 나와 관계가 없다. 저주야 나와 관계가 없다. 사망과 음부야 나와 관계가 없다. 그 말인 것입니다.
로마서 5장 8절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예수님을 보내셔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신 것이므로 다시 말하면
우리같이 예수와 함께 죽음을 걸머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은 철학이 아닙니다. 신학과 도덕의 훈련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 죽음을 걸머져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의 수치를 걸머져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 죽음 내 죽음인 것입니다. 내가 예수와 함께 죽어서 장사지내 버리면 그 다음 하나님은 능력으로 부활시켜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도 항상 죄와 세상과 병과 저주와 가난과 죽음의 공격을 당합니다. 이 세상에 살 동안에 이를 피할 수가 없어요. 어디에 가도 죄가 있고 세상과 마귀가 있고 병이 있고 저주와 가난과 실패가 있고 사망과 절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 속에 살면서 그것을 이길 수 있는 일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미 이겨 놓았기 때문에 예수를 짊어지고 우리도 같이 그 이김에 동참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예수 이김 내 이김, 예수 승리 내 승리인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의 죽음을 걸머 지면은 면역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이겼기 때문에 이긴 예수님을 걸머지고 있으므로 예수를 통해서 죄에 대해서 이기고, 세상과 마귀에 대해서 이기고, 병에 대해서 이기고, 저주와 가난에 대해서 이기고, 사망과 음부에 대해서 이기는 것입니다. 예수 때문에 이기는 것입니다. 예수를 걸머져야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어느 겨울 초에 우리 교회 의사선생님에게서 독감주사를 두 번 맞았습니다. 독감주사를 맞았으므로 저의 몸에 면역이 있습니다. 독감주사를 안 맞은 사람은 감기에 들려서 콜록 콜록 콜록 해도 저는 담대하게 추운데도 걱정 없이 돌아 다녔었습니다. 면역이 되었으니까 바이러스가 들어와도 내 면역에 잡혀 먹어 버리는 것입니다. 면역을 걸머지고 다녀야 되는 것입니다. 면역을 걸머지고 다니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죄 많은 세상에 마귀와 세속이 꽉 들어찬 세상에 병이 드글 거리는 세상에 저주가 꽉 들어찬 세상에 사망과 음부가 입을 벌리고 있는 세상에서 내가 살려면 면역이 되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를 이길 수 있는 힘이 내 속에 있어야 되는데 내게는 없어요. 주사를 맞아야 되요. 그 주사가 뭐냐. 예수의 죽음을 걸머져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의 죽음을 항상 생각하고 예수의 죽음을 항상 바라보고 예수 죽음 내 죽음인 것을 믿고 예수가 나와 함께 죽었다고 입으로 시인하고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24시간 자나 깨나 예수 죽음 내 죽음을 생각하고 예수로 말미암아 나는 면역이 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떠한 죄가 와도 이기고, 세상과 마귀도 이기고, 병도 이기고, 저주도 이기고, 사망과 음부도 이기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구원 받았는데 왜 그런 것들을 하나님은 내버려 놓고 우리를 공격하게 하느냐"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공격해 봐야 내가 면역이 되어 있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그것을 이길 수 있는 것을 봐야 "야~ 내가 예수 믿고 효과를 발생 하는구나" 알 수 있지 그런 것이 없는 곳이면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을 피해서 시온 성을 만들어 보자. 미국 시카고에서 미국의 유명한 부흥사가 죄 없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자기 믿는 사람들을 다 시온성이라는 곳을 만들어서 모았었습니다. 그러나 시온성에 들어오자 얼마 있지 아니하여 시온성이 죄악성이 되고 만 것입니다. 우리 한국에도 모시가 천년 성을 만들어서 천년성에 들어가면 천국같지 산다고 했는데 천년성에 들어가니까 죄악성이 되고 만 것입니다. 사람이 사는 곳에는 어디든지 죄와 부패와 세상과 마귀와 질병과 저주와 고난과 죽음이 있는 것입니다. 피할 수가 없어요. 그러므로 우리를 왜 세상에 두었나이까? 원망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는 우리를 세상에서 데려가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기도할 때 주여 저들을 보호하여 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보호할 수 있는 길은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는 것입니다. 면역을 당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지 아니하고 교회에 왔다 갔다 해서는 면역이 되어있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 죽음 내 죽음으로 걸머지고 있으면 죄악에 들어가도 죄에 면역이 되어있고 세상과 마귀가 들끓어도 그것에 면역이 되어 있고 병이 들끓어도 면역이 되어 있고 저주와 가난도 극복할 수 있는 면역이 되어 있고 사망과 음부도 우리가 극복할 수 있는 면역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어느 곳에 사는가가 문제가 아니라 면역이 되어 있느냐 안 되어 있느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문제는 머릿속으로만 종교적으로 예수를 믿느냐. 그렇지 않으면 예수의 죽음을 몸에 걸머지고 다니냐. 예수의 죽음을 몸에 걸머지고 예수 죽음 내 죽음이 되어 있는 사람은 면역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시편 103편 3절로 5절에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 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이것이 예수님으로 면역된 사람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의, 예수님의 거룩하심, 예수님의 치료, 예수님의 축복, 예수님의 생명이 눈에 보이도록 우리 속에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체험하게 되면 세상에서 체험해야지 빨리 죽어서 천당 가서 죄도 마귀도 세상도 없는 곳에 가야 되겠다고 부르짖는 것은 어리석은 일인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이길 수 있는 면역을 허락하여 주신 것입니다.
아일랜드의 한 청년이 결혼식을 하루 앞두고 사랑하는 약혼녀가 수영하다가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그는 슬픔을 극복하지 못하고 절망의 늪에 빠졌습니다. 친구들과 주위 사람들의 권유에 따라 이 청년은 아픔의 장소를 피하기 위해서 캐나다로 이주를 했습니다. 캐나다에 가자마자 집에서 편지가 왔는데 어머니가 죽을병에 걸렸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기가 막혀서 죽고 싶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불행이 한꺼번에 자기를 향하여 몰려오는 것 같았습니다. 그 청년은 힘없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흐느껴 부르짖었습니다. "예수님! 어머니의 병을 고쳐주세요. 응답해주세요. 평생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겠습니다." 결단하고 기도를 했는데 그리스도의 평화가 그 마음속에 넘치게 위로가 꽉 들어찼습니다.
그래서 자기 애인이 죽은 슬픔을 이길 수가 있고 어머니가 병들어서 죽게 되었는데도 마음에 위로와 평화가 넘쳐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연필을 들어 기록한 찬송가가 찬송가 487장 '죄 짐 맡은 우리 구주 어찌 좋은 친군지' 고통이 변하여 찬송이 되고 아픔이 변하여 감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고향에 편지해서 어머니의 안부를 물었는데, 중병을 앓던 어머니가 거짓말처럼 완전히 치료 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 청년이 바로 조지프 스크리븐씨인 것입니다. 우리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도 마귀의 공격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타날 때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의 생명이 나타날 무대를 만드는 것밖에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의 의와 치료와 평강과 생명을 더욱 강하게 체험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어려움이 다가오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 한번 불러 볼까요?
시험 걱정 모든 괴롬
없는 사람 누군가
부질없이 낙심 말고
기도 드려 아뢰세 아멘
이런 진실하신 친구
찾아 볼 수 있을까
우리 약함 아시오니
어찌 아니 아뢸까
예수님이 우리의 진실한 친구인 것을 어떻게 압니까? 환난을 당해봐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세상 친구 다 날 버리고 떠나고 나는 외롭게 될 때 오직 안 떠나는 분이 예수님 밖에 없다는 것은 환난을 당해봐야 아는 것입니다. 좋을 때는 모든 사람이 다 친구하려고 곁에 있고 다 찾아오지만 어려움을 당해봐야 진정한 친구를 알 수 있는 것처럼 이 찬송가 작사도 자기가 환난을 당해봤을 때 비로소 엄청난 위로와 평안을 주시는 예수님을 체험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3. 예수의 죽음을 우리 몸에 짊어질 때
예수의 죽음을 우리 몸에 짊어질 때 하나님의 그리스도를 통한 위로가 다가오므로 오히려 우리에게 다가오는 환난을 감사하면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환난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기근이나 죽음이나 칼이랴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는 이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기느니라"(롬8:35~37)
이런 일을 당해봐야 예수님의 사랑의 높이와 깊이와 넓이를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남북한이 갈려져서 북한과 대결하고 있다고 늘 원망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먼 것을 보고 감사해야 될 것은 우리 민족이 북한하고 서로 대결되어서 밀고 당기므로 사랑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서로 대결되어 있지 아니하면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인내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이해하고 동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찌할 수 없이 사랑해야만 되고, 이해해야만 되고, 동정해야만 되고, 인내해야만 되고, 도와줘야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배웁니까? 이런 상황에 처해야 배우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중심적으로 이기적으로 인내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사람이 혼자 살면 좋을 것 같아도 혼자 살면 정말 고집 부렁이가 되고 곰팡이 피고, 남의 의견을 듣지 않고 고집스러운 총각, 노처녀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부부간에 살아봐야 서로 의견충돌도 하고, 서로 다투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고, 양보도 하고, 그래서 이해도하고 동정도 하고 인내도 하고 사랑을 하는 것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부부간에 살므로 인간이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는 좋은 인격적인 수양처소가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히려 하나님께 우리는 죄 있는 세상, 마귀와 세속적인 세상, 병이 있는 세상, 저주가 있는 세상, 사망과 음부가 입 벌리고 있는 세상에 살게 해준 것을 감사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있기 때문에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면역이 된 것을 깨달아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이길 수 있는 능력의 신앙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2장 10절에 바울이 말하기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내가 약해보니까 주님을 의지해서 얼마나 강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내속에 살아계신 주님의 능력이 내가 약한 데 처했을 때 비로소 나타나기 때문에 오히려 이런 것을 감사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다가오는 여러 가지 시험과 환난을 원망 불평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의 능력이 나타날 무대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제가 옛날에 종로에서 부흥회를 열었는데 그때는 육이오 사변이후 회복 된지 얼마 안 되어서 황무지였었습니다. 천막부흥회를 하고 많은 사람들이 와서 구원을 받고 병자가 쏟아지게 나았었습니다. 어느 훌륭한 목사님이 내게 와서 "조용기 목사님 안수 좀 해주십시오." 무슨 안수냐니까 "나도 폐병 들렸다가 낫게 안수해 주십시오." "무슨 말입니까?" "우리 아버지가 잘 살았어요. 나는 아무 돈 걱정 없이 건강하게 대학을 졸업하고 신학을 졸업하고 목사가 되었는데 교회도 아버지가 지어주셔서 걱정 없이 목회하니까 할 말이 없습니다. 주님이 살아 계신지 안살아 계신지 알 수가 없습니다. 오늘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니까 목사님은 폐병으로 피를 토하고 죽음에 이르렀다가 예수님을 만나서 살아났으니 예수님이 뚜렷하잖아요. 역사적인 예수님이 아니고 형상적인 예수님이 아니고 살아계신 예수님을 체험했기 때문에 담대하게 설교하는데 나는 그렇게 설교할 수 없어요. 그러므로 내게 안수해서 나도 폐병 걸려서 피를 토하고 안 죽을 만큼 고통 하다가 죽지는 말고 살아나도록 기도를 해 주십시오." 정말 올바른 말입니다. 저는 폐병이라는 고통스러운 무대를 하나님이 만들어 주셨기 때문에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체험해서 그 체험에 서서 담대하게 50년을 목회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고통은 오히려 감사해야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타날 환경을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함순(Hamsun, Knut)은 노르웨이의 작가로서 1920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어릴 적과 청년 시대는 결코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어린 시절 그는 채석공 등으로 일하며 고난의 생활을 했습니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시카고에서 전차 차장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러한 고난의 생활을 통해 많은 체험을 하게 되었고, 그것을 소설로 쓴 것이 「굶주림」입니다. 이 책은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고 읽혀졌던 것입니다. 그리고 함순이라는 이름이 온 미국에 알려지고 세계에 알려지게 된 것입니다. 그는 과거에 가난했던 과거의 고통을 바탕으로 쓴 「토지의 성장」이란 소설로 노벨 문학상을 탔습니다. 이 함순이 얼마나 고맙게 생각해야 될 것은 옛날에 돌이나 찍어내고 전차차장이나 하고 막노동을 했기 때문에 그 체험으로 소설을 적어서 세계적인 노벨 문학상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런 체험이 없었으면 평범한 생활을 했으면 그와 같이 영광스러운 상을 받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고난은 단지 고난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어려움과 고통이 있을지라도 그것을 감사할 때 하나님은 그것을 토대로 해서 큰 영광을 나타내 주시는 것입니다. 이기는 은혜를 주님은 우리 모든 생활에 넉넉히 주시므로 감사해야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2장 8절로 9절 우리 다같이 소리 내어 읽어 보십시다.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께서 바울선생에게 말씀한 것입니다. 너무 바울선생이 허약해서 세 번 주님께 기도했습니다. 이 허약을 물리쳐 달라고 그러니까 주님이 "이 사람아 네가 허약하기 때문에 내가 강하다는 것이 나타날 수가 있다. 네가 힘이 있으면 나는 나타날 곳이 없지 않느냐. 네가 허약할 때 내가 강하다." 그 말을 듣고 바울선생은 오히려 하나님 앞에 허약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능력이 머물러 있고 나타나기를 원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 중에 아직 어린 신자들은 조금만 고통이 다가와도 부르짖습니다. "이 고통을 면해 주십시오.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십시오." 부르짖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이 깊은 사람들은 그런 고난과 괴로움이 다가올 때 주님의 영광이 나타날 기회가 왔다는 것을 알고 오히려 감사해야 되는 것입니다. 많은 주의 종들이 교회성장을 원합니다. 큰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나는 그럴 때마다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내 체험을 통해서.. 큰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는 크게 죽어야 되는 것입니다. 큰 고통을 당해서 큰 은혜를 체험해야 하나님의 역사를 나타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바울선생이 말씀하기를 사망은 내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한다고 내가 사망을 체험한 만큼 예수의 생명을 체험해서 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고통 안당해본 사람이 고통에서 건지는 예수님을 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병 안 나은 사람이 치료한 예수를 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배고프지 않는 사람이 밥을 주는 예수님을 증거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망은 내속에서 역사해야 생명이 너희 안에서 역사한다고 말했습니다. 큰 교회를 하자면 큰 은혜를 받아야 되고 큰 은혜는 그냥 주는 것이 아닙니다. 산이 높아야 골이 깊습니다. 은혜는 물처럼 깊은 밑으로 내려오는 것입니다. 많이 고통을 당하고 가슴속이 파헤쳐져야 은혜의 물이 채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늘 말합니다. "큰 목회를 하려고 하는 것은 좋지만 얼마나 많은 고통으로 가슴이 파헤쳐지고 슬픔 울음을 울고 탄식을 해야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구나."
그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우리가 고통이 다가오면 감사할 것은 은혜를 담기 위해서 하나님이 불도저로 밀어 재끼고 크레인으로 바위를 옮겨주고 마음을 파헤쳐 주는 것입니다. 우물을 파야 물을 고일수가 있지요. 우물을 파지 않고 물을 고여지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물을 파서 물이 고여야 자기만 마시는 것이 아니라 온 동네사람이 다 와서 마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고난당하면 여러분 자체만 당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통해서 여러분이 은혜를 체험하고 많은 사람이 은혜의 물을 마실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나 혼자만 사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은 여러분을 고난을 체험하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바울 선생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주의 종이 된 것은 그가 가장 많이 고난을 받았기 때문에 은혜가 충만하게 넘친 우물이 되어서 온 세계가 마실 수 있게 만들어 준 것입니다. 우리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주님은 넉넉히 이기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35절에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7)
고난 속에서 이겨야 사람이 그리스도의 빛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어린 아이가 세상에 미숙아로 태어나면 인큐베이터 안에 넣습니다. 병균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인큐베이터 안에 넣어서 10개월이 차도록 기르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여러분을 인큐베이터 안에 넣어서 자라기를 원치 않습니다. 당당히 나와서 병균과 싸우고 역경과 싸워서 이기는 승리자가 되기를 원하지 보호의 인큐베이터 속에서 사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세상 죄와 싸워서 이기고 세상과 마귀를 대항해서 이기고 병을 이기고 저주를 이기고 사망을 이기고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하는 삶을 사는 승리자를 원하지 약해 빠져서 인큐베이터의 보호를 받고 햇빛도 못비추고 집밖으로 못나가는 이러한 약해빠진 신자가 되기를 원치 않는 것입니다. 싸워서 이기는 삶을 하나님께서 원하시기 때문에 고난 속에서 예수님을 걸머지고 나가서 싸워 이기게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왜, 아버지가 사랑하므로 여러분을 버리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여러분을 얼마나 사랑해서 예수의 죽음을 여러분에게 걸머지게 했었습니까? 그래서 여러분께서 어떠한 것이 오더라도 이길 수 있는 힘을 갖도록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나는 이 글을 읽고 굉장히 마음에 감동을 했습니다.
미국의 한 병원에서 일어난 일인데 열여섯 살 된 소녀가 신장 신우염으로 신장을 이식해야만 살게 되었습니다. 여러 신장을 조사해 본 결과에 아버지의 신장이 그 몸에 맞았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기쁘게 그 열여섯 살 먹은 딸에게 신장을 떼 주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몇 년이 지나자 그 소녀의 신장에 또 고장이 났습니다. 그래서 또 신장을 떼 내서 이식을 하지 않으면 살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신장을 찾을 수가 없어요. 아버지가 병원에 와서 "내 나머지 신장을 어린 아이에게 떼 주십시오." 그래서 의사협회에서는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안 됩니다. 신장하나를 떼 주었는데 마저 나머지 신장을 떼 준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니까 떼 줄 수 없습니다. 이는 윤리강령에 어긋납니다." 그 아버지가 윤리위원회에 나가서 말했습니다. "여러분 윤리와 도덕보다 앞선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윤리와 도덕으로 규정할 수 없습니다. 윤리와 도덕이 올바릅니다. 옳습니다. 신장을 두 개 가졌는데 하나를 떼 주고 하나마저 떼 주려고 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사랑은 죽음보다 강합니다. 나는 죽더라도 내 나머지 신장을 내 딸에게 떼 주기를 원하니 내 심정을 알아주십시오." 그 윤리 위원회가 숙연해졌습니다. 추후 결정하기를 아버지 마지막 신장을 떼 주고 아버지는 평생을 피를 걸러내는 투석기에 의지해서 살도록 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마지막 신장을 떼 주어서 그 소녀가 살아나고 그 소녀는 정식 교육을 마치고 행복하게 결혼해서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고 자녀 손을 놓고 아버지에게 병원을 늘 찾아왔습니다. 아버지는 남은 평생을 기계에 의지해서 피를 걸러내며 살다가 죽어도 조금도 후회함이 없이 세상을 떴다고 말한 것입니다. 세상의 아버지도 자기 마지막 남은 신장을 자기 친딸에게 떼 줍니다. 나는 이 글을 읽고 내 마음속에 굉장한 질문을 했습니다. '조용기 너는 그렇게 하겠느냐?' 좋은 아버지면 별도리 없이 그렇게 할 것입니다. 제가 육이오 사변 때 부산 매축지에 살았는데 석탄을 실은 기차가 많이 지나가면 피난민들이 석탄차 위에 올라가서 석탄을 끌어 내렸습니다. 그러면 군인들이 와서 총을 쏘고 석탄 훔치는 사람을 잡았습니다. 저도 석탄 훔치러 갔습니다. 그때는 석탄 없이는 못살아가니까 한 끼라도 먹을려고.. 그런데 피난 온 한 40대 아버지가 한 10살 된 아들을 데리고서 남아를 했어요. 오다가 폭탄을 맞아서 가족은 죽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아들이 올라가서 석탄을 막 끌어내면 아버지는 주워 담는데 기차가 위에서 헌병이 뛰어 오니까 전부다 뛰어 내리는데 그 아들이 뛰어 내리지 굵은 석탄 덩어리 하나가 화차 밑으로 들어갔습니다. 애가 그것을 끄집어내려고 화차 밑에 기어 들어가자 기차가 덜커덕하고 움직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아이! 저 어째! 저 어째!" 고함을 쳐도 아무도 그 아들을 끄집어내려고 하지 않았는데 비호같이 뛰어드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40대의 아버지가 철로 밑으로 화차 밑에 뛰어 들어가서 아들을 밀어내고 기차 바퀴가 그 허리를 지나갈 때 허리가 부러지는 소리가 뚝 뚝 뚝 나는 것을 내가 들었습니다. 그 아버지 눈에 눈물이 뚝뚝 흐르고 코에 콧물이 주루룩 흐르면서 죽어 가면서도 어린 아이를 보고 빨리 피하라고 손을 이렇게 움직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지금까지도 내 머릿속에 분명하게 보입니다. 그때 나는 생각했습니다. 중학교 학생 시절이니까 '저 바보 봐라. 장가가서 또 낳으면 될 것인데 왜 그 아들을 위해서 죽느냐. 장가가서 낳으면 될 것 아니야. 그 아들 때문에 왜 죽느냐.'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심정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제가 장가를 들고 자식을 낳고 난 다음에 늘 생각했습니다. '네가 그 입장에 있으면 어떻게 할 것이냐.' 윤리와 도덕, 생명의 존엄 뭐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살려 놓고 보자.' 사랑은 맹목적인 것입니다. 내라도 뛰어 들어갔을 것입니다. 살려놓고 후에는 어떻게 될지 계산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다 계산하면 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엄청난 일을 저질렀습니다.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 아들조차도 아버지를 향해서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통곡을 했습니다. 이런 일을 어떻게 상상할 수 있는 것입니까? 사랑 때문에 하나님이 묶임을 받아 강요를 받아서 우리를 사랑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큰 사랑으로 지금 여러분을 사랑하고 계신 것입니다. "환난이나 곤고나 적신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이런 것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서 떼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결론>
여러분!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여러분에게 면역을 해주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여러분께서 항상 걸머지고 사시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로마서 8장 38절로 39절에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누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가 있습니까? 몸서리치게 높고 깊은 넓은 하나님의 사랑을 어떤 마귀가 끊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주어지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은혜를 주셨으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을 몸에 걸머지고 예수의 생명을 나타내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같이 고개 숙여 기도드리겠습니다.
<기도>
살아계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음을 몸에 짊어지면 예수의 생명도 또한 우리의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가 우리 위해서 죄에 대해서 죽고 세상과 마귀에 대해서 죽고 질병에 대해서 죽고 저주와 가난에 대해서 죽고 절망과 음부와 지옥에 대해서 죽었습니다. 그리스도를 걸머지므로 함께 죽어 함께 면역이 된 것을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위해서 예수를 통해서 역사하므로 우리는 의에 대해서 살고 거룩함에 대해서 살고 치료에 대해서 살고 축복에 대해서 살고 부활 영생에 대해서 살았음을 감사합니다. 이 생명의 역사를 가슴에 품고 이 세상에 빛을 비취는 우리들이 되게 도와 주시옵시고 어떠한 일에도 불평과 원망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감사하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오늘 저는 '우리 몸에 나타나는 예수의 생명'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일정 치하나 6.25 사변의 고난을 통해 본 사람은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평화와 번영이 얼마나 고맙고 달고 감사한지 형언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풍요의 시대에 태어난 그리고 자란 세대는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평화와 번영을 당연지사로 생각하고 그 안에서 감사와 행복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옛날 고생하면서 산 것이 손해인 것 같으나 실제로 지나가 보면 그 배경이 있기 때문에 현재의 부요와 풍요를 감사하고 기쁘게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배가 고파본 사람이어야 밥의 귀중함을 압니다. 밥이 항상 많은 사람은 원래부터 밥이 있는 것은 당연지사라고 생각하지만 빈 밥그릇을 가지고 울어본 사람은 밥 한톨이 얼마나 귀한지 형언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나는 우리 애들하고 밥을 먹을 때 밥풀 하나라도 다 주어 먹으니까 "아버지 왜 그렇게 주접을 떱니까? 그 밥풀 뭐 하러 주워 먹습니까?" "야 이것 먹어서 배가 불러서 먹는 것이 아니라 일정 말년에 육이오 사변 때 밥 한 톨이 얼마나 귀한지 눈물을 흘리며 밥을 먹었단다. 그때를 생각하니까 이 밥 한 톨이 얼마나 귀한지를 안다. 너희들은 말로써 설명해서는 알 수가 없을 것이다." 제가 그런 말을 여러 번 한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 병이 들어봐야 건강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야~ 건강한 것이 얼마나 좋으냐. 환난을 당해봐야 평안의 귀중함을 깨닫게 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본론>
1. 우리 속에 있는 보배
우리는 우리 질그릇 속에 보배이신 예수님을 모시고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정말 예수님이 나와 같이 계시느냐? 못 보았는데, 예수님의 음성도 못 듣고 체험 못했는데 이 질그릇에 보배를 가졌다고 하는데 보배가 어디 있느냐?" 그렇게 말을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 속에 계신 예수님의 그 보배를 체험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고난을 당해봐야 아는 것입니다.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할 때 고통당할 때 그 고통에서 기도하면 주님의 능력으로 해방을 시켜 주면 "야~ 주님이 살아 계시구나. 주님이 나와 같이 계시구나"하는 것을 느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고통을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기도할 것이 없기 때문에 아무리 해도 살아계신 예수님이 함께 계신 것을 느끼지 못합니다. 저는 폐병으로 엄청난 고통을 당해봤기 때문에 치료하는 예수님을 깨달아 알고 그를 감사하고 찬미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내 건강했던 사람은 예수님이 병을 고치는지 안 고치는지 알 수가 없어요. 체험을 안 해봤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 38절에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믿음으로 살려니까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해봐야 내가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고 주님이 그 우겨 쌓은 담을 헐어버리고 우리를 해방시키는 능력을 나타내는 것을 체험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4장 4절에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고 능력 많으신 분이 나와 같이 계신 것을 알려면 적군이 와서 싸워봐야 아는 것입니다. 그래야 적군에게 지면 내속에 계신 예수님이 아무것도 아니지만 적군을 이기면 내 속에 계신 예수님이 과연 능력이 계시구나 하는 것을 우리가 깨달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미국의 대니 로페즈라는 여성은 47일 동안 혼수상태에 있었습니다. 의사들은 회생불능의 뇌사상태라고 말했었습니다. 당시 그녀는 임신 4개월이었습니다. 그 운명이 아기의 운명과 함께 결정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족들은 그녀에게 산소호흡기 등 생명 보조장치를 모두 떼도록 하고 임종을 기다렸습니다. 그 때 갑자기 그녀의 뱃속에서 아기들이 심하게 꿈틀거렸습니다. 이와 동시에 놀라운 일이 시작되었습니다. 뇌사상태였던 대니 로페즈의 뇌파가 갑자기 살아서 움직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완전히 뇌파가 죽었는데 애기가 뱃속에서 발차고 몸부림을 칠 때마다 뇌파가 살아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몇 개월 동안 이 여인은 뇌사 상태에서 생명을 유지했습니다. 그리고 의사들의 예측을 깨고 무의식상태에서 건강한 쌍둥이를 낳았습니다. 이후 여인은 조금씩 의식을 회복하더니 완전히 건강을 회복했던 것입니다. 그녀는 깨어난 후 자신이 체험담을 기적의 순간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의식이 가물가물해 질 때쯤 뱃속에서 괴로움으로 요동치는 아이들의 태동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그 고통은 고스란히 내게 전달되었고, 나는 절망으로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그 순간 내 마음에 '너의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해! 너의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해!'라는 소리가 울렸습니다."그녀는 이 소리가 들릴 때마다 마음속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나를 살려 주셔서 이 애기들을 구조하여 주시옵소서.' 뇌는 죽었는데 그 영이 속에서 기도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쉬지 않고 기도를 드렸다고 한 것입니다. 그녀가 뇌사상태에서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기도를 응답하셔서 아기를 순산하고 그 모친도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가 견딜 수 없는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 주님을 의지하고 해결되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 속에는 보배인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다는 것을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말하기를 "사람이 뇌사상태에 있어도 영혼은 살아있다는 것을 자기는 안다." 의학적으로 완전히 뇌가 죽었는데 뇌파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어린 아이가 뱃속에서 꿈틀거릴 때마다 자기 속에서 자기 영이 고통을 당하며 '하나님 나와 어린 아기를 살려 달라'고 부르짖어 기도했고 응답 받았다. 이런 고통을 안 겪어본 사람은 뇌사상태에서 하나님이 기도를 응답해 주신다는 것을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둠이 있어봐야 빛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죽음이 있어봐야 생명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싸임을 당해봐야 그곳에서 해방시키는 주님이 계신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답답한 일을 당해 죽을 지경일 때 주님께 의지하여 해결될 때 '야~ 주님은 정말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는 하나님이시구나' 하는 것을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시편 91편 14절로 15절에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내가 그를 장수하게 함으로 그를 만족하게 하며 나의 구원을 그에게 보이리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려움을 당해봐야 답답한 일을 당해 죽을 지경일 때 기도하고 하나님의 응답을 받으면 문제를 해결하시는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구나. 그래서 나중에 다른 사람이 염려, 근심, 불안, 초조, 절망에 둘러 싸여서 절망일 때 '걱정하지 말아라. 해결하는 하나님이 계신다. 체험했다. 하나님은 이 문제를 해결한다.'고 담대하게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한 여인은 화학물질에 중독이 되어 신체의 면역체가 파괴되었습니다. 그리고 5년 동안 진공 상태의 치료실에서 치료를 받았습니다. 그 과정이 너무 고통스러워 죽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이처럼 극심한 고통의 시기에 그녀는 한 가지 작은 목표를 세우고 씨름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매일 성경 한 구절을 읽고 일 분 간이라도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진공상태에서 치료를 받아야만 하는 그녀에게 이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살기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며 말씀을 부여잡는 것뿐이었습니다. 결국 5년간의 투병 생활에서 회복되어 병원을 나올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장애인을 돕는 자선단체에서 일하게 되었었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주님이 내게 고통을 맛보게 하시고 그 가운데에서라도 기도를 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부르짖어서 그 절망에서 낫게 해주셨기 때문에 살아계신 하나님 얼마나 장애로 고통당하는 상태라도 도와줄 수 있는 하나님이 살아계신 다는 것을 내가 깨닫고 장애인을 위해서 일생을 바치게 되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제가 체험해 봐야 아는 것입니다. 자기가 먹어봐야 맛이 어떤지 알지 먹어 보지 않고 맛이 어떤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능력으로 해방될 때 우리는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의 뜻을 더욱 분명하게 깨달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또 핍박당할 때, 버림을 받을 때, 상상을 초월한 주님의 위로를 받을 때 주님이 살아 계신다는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장 4절로 5절에 보면 바울이 말씀하기를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우리가 주님이 얼마나 우리를 위로하시고 우리 마음에 평화를 주신다는 것을 체험 하려면 큰 환난과 고난을 당해봐야 아는 것입니다. 환난과 고난을 안 당해 보면 환난과 고난을 극복할 수 있을 만한 위로와 평안을 주는 하나님을 깨달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머리로 상상을 해서는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바울선생은 우리가 아시아에서 죽도록 고통을 당해 봤는데 그 가운데서 주님이 큰 위로와 평안을 받았으므로 위로와 평안을 주는 하나님을 깨닫고 너희에게 위로와 평안을 줄 수 있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핍박을 당해봐야 아무리 사람들이 핍박해도 주님이 우리를 끌어안고 품에 위로해 주시는 위로가 엄청나게 크다는 것을 체험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위로가 있는 이상 아무런 핍박을 받아도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거꾸러뜨림을 당해 망했을 때 잿더미 위에서 소생하고 부활 했을 때 창조적인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는다. 아 원수가 와서 거꾸러뜨립니다. 집안을 거꾸러뜨리고 사업을 거꾸러뜨리고 생활을 거꾸러뜨려 버립니다. 완전히 망하고 잿더미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불사조같이 부활한 것입니다. 완전히 망했는데 돌아보니 전에 보다더 흥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면 망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절망에서 부활을 주시는 예수님이다. 이것을 체험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거꾸러뜨림을 당해봐야 부활을 주신 예수님을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왜 예수님이 죽으셨나요?" 죽으셔야 부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안 죽으면 부활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부활해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명하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안 죽었는데 어떻게 부활하는 것입니까? 다른 모든 종교지도자들은 훌륭한 말씀을 가르쳤지만 하나님의 아들로 증명을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만 가르친 것이 아니라 "날 죽여라. 사흘 만에 다시 살리겠다." 그래서 주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죽음이 있어야 부활을 증명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2. 예수의 죽음이 무엇인지?
예수의 죽음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10절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놀라운 말씀이지요.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닌다는 것은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무덤 내 무덤, 예수 부활 내 부활 예수와 하나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그냥 예수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내 몸에 짊어지고 다녀야 된다. 그것도 일시적이 아니라 아침, 점심, 저녁 순간마다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녀야 되요.
그래야 예수의 생명도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예수님은 우리의 죄, 불의, 병, 저주, 죽음을 짊어지고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의 죽음을 걸머지고 예수와 하나가 되었다는 것은 우리도 예수와 함께 죄에 대해서 죽고 마귀와 세상에 대해서 죽고 병에 대해서 죽고 저주에 대해서 죽고 그리고 사망과 음부에 대해서 죽었다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은 관계가 끊어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여러분 사랑하는 부모라도 친자식이라도 죽으면 모저에 가서 묻고 살아있는 세계와 끊어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부르짖어 봐도 대답이 없습니다. 아무리 사랑한다고 해도 응답이 없는 것입니다. 죽었습니다. 관계가 끊어졌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죄에 대해서 죽고, 세상과 마귀에 대해서 죽고, 병에 대해서 죽고, 저주에 대해서 죽고, 사망과 음부에 대해서 죽었는데 이 예수를 우리가 항상 몸에 걸머지면 예수 죽음 내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와 함께 내가 죽었다는 것입니다. 나도 죄에 대해서 죽었고, 나도 세상과 마귀에 대해서 죽었고, 나도 세상의 질병에 대해서 죽었고, 나도 저주에서 죽었고, 나도 사망과 음부에서 죽어서 관계가 끊어다. 마귀야 나와 상관없다. 죄야 나와 관계가 없다. 병아 나와 관계가 없다. 저주야 나와 관계가 없다. 사망과 음부야 나와 관계가 없다. 그 말인 것입니다.
로마서 5장 8절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예수님을 보내셔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신 것이므로 다시 말하면
우리같이 예수와 함께 죽음을 걸머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은 철학이 아닙니다. 신학과 도덕의 훈련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 죽음을 걸머져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의 수치를 걸머져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 죽음 내 죽음인 것입니다. 내가 예수와 함께 죽어서 장사지내 버리면 그 다음 하나님은 능력으로 부활시켜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도 항상 죄와 세상과 병과 저주와 가난과 죽음의 공격을 당합니다. 이 세상에 살 동안에 이를 피할 수가 없어요. 어디에 가도 죄가 있고 세상과 마귀가 있고 병이 있고 저주와 가난과 실패가 있고 사망과 절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 속에 살면서 그것을 이길 수 있는 일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미 이겨 놓았기 때문에 예수를 짊어지고 우리도 같이 그 이김에 동참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예수 이김 내 이김, 예수 승리 내 승리인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의 죽음을 걸머 지면은 면역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이겼기 때문에 이긴 예수님을 걸머지고 있으므로 예수를 통해서 죄에 대해서 이기고, 세상과 마귀에 대해서 이기고, 병에 대해서 이기고, 저주와 가난에 대해서 이기고, 사망과 음부에 대해서 이기는 것입니다. 예수 때문에 이기는 것입니다. 예수를 걸머져야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어느 겨울 초에 우리 교회 의사선생님에게서 독감주사를 두 번 맞았습니다. 독감주사를 맞았으므로 저의 몸에 면역이 있습니다. 독감주사를 안 맞은 사람은 감기에 들려서 콜록 콜록 콜록 해도 저는 담대하게 추운데도 걱정 없이 돌아 다녔었습니다. 면역이 되었으니까 바이러스가 들어와도 내 면역에 잡혀 먹어 버리는 것입니다. 면역을 걸머지고 다녀야 되는 것입니다. 면역을 걸머지고 다니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죄 많은 세상에 마귀와 세속이 꽉 들어찬 세상에 병이 드글 거리는 세상에 저주가 꽉 들어찬 세상에 사망과 음부가 입을 벌리고 있는 세상에서 내가 살려면 면역이 되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를 이길 수 있는 힘이 내 속에 있어야 되는데 내게는 없어요. 주사를 맞아야 되요. 그 주사가 뭐냐. 예수의 죽음을 걸머져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의 죽음을 항상 생각하고 예수의 죽음을 항상 바라보고 예수 죽음 내 죽음인 것을 믿고 예수가 나와 함께 죽었다고 입으로 시인하고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24시간 자나 깨나 예수 죽음 내 죽음을 생각하고 예수로 말미암아 나는 면역이 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떠한 죄가 와도 이기고, 세상과 마귀도 이기고, 병도 이기고, 저주도 이기고, 사망과 음부도 이기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구원 받았는데 왜 그런 것들을 하나님은 내버려 놓고 우리를 공격하게 하느냐"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공격해 봐야 내가 면역이 되어 있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그것을 이길 수 있는 것을 봐야 "야~ 내가 예수 믿고 효과를 발생 하는구나" 알 수 있지 그런 것이 없는 곳이면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을 피해서 시온 성을 만들어 보자. 미국 시카고에서 미국의 유명한 부흥사가 죄 없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자기 믿는 사람들을 다 시온성이라는 곳을 만들어서 모았었습니다. 그러나 시온성에 들어오자 얼마 있지 아니하여 시온성이 죄악성이 되고 만 것입니다. 우리 한국에도 모시가 천년 성을 만들어서 천년성에 들어가면 천국같지 산다고 했는데 천년성에 들어가니까 죄악성이 되고 만 것입니다. 사람이 사는 곳에는 어디든지 죄와 부패와 세상과 마귀와 질병과 저주와 고난과 죽음이 있는 것입니다. 피할 수가 없어요. 그러므로 우리를 왜 세상에 두었나이까? 원망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는 우리를 세상에서 데려가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기도할 때 주여 저들을 보호하여 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보호할 수 있는 길은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는 것입니다. 면역을 당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지 아니하고 교회에 왔다 갔다 해서는 면역이 되어있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 죽음 내 죽음으로 걸머지고 있으면 죄악에 들어가도 죄에 면역이 되어있고 세상과 마귀가 들끓어도 그것에 면역이 되어 있고 병이 들끓어도 면역이 되어 있고 저주와 가난도 극복할 수 있는 면역이 되어 있고 사망과 음부도 우리가 극복할 수 있는 면역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어느 곳에 사는가가 문제가 아니라 면역이 되어 있느냐 안 되어 있느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문제는 머릿속으로만 종교적으로 예수를 믿느냐. 그렇지 않으면 예수의 죽음을 몸에 걸머지고 다니냐. 예수의 죽음을 몸에 걸머지고 예수 죽음 내 죽음이 되어 있는 사람은 면역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시편 103편 3절로 5절에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 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이것이 예수님으로 면역된 사람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의, 예수님의 거룩하심, 예수님의 치료, 예수님의 축복, 예수님의 생명이 눈에 보이도록 우리 속에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체험하게 되면 세상에서 체험해야지 빨리 죽어서 천당 가서 죄도 마귀도 세상도 없는 곳에 가야 되겠다고 부르짖는 것은 어리석은 일인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이길 수 있는 면역을 허락하여 주신 것입니다.
아일랜드의 한 청년이 결혼식을 하루 앞두고 사랑하는 약혼녀가 수영하다가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그는 슬픔을 극복하지 못하고 절망의 늪에 빠졌습니다. 친구들과 주위 사람들의 권유에 따라 이 청년은 아픔의 장소를 피하기 위해서 캐나다로 이주를 했습니다. 캐나다에 가자마자 집에서 편지가 왔는데 어머니가 죽을병에 걸렸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기가 막혀서 죽고 싶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불행이 한꺼번에 자기를 향하여 몰려오는 것 같았습니다. 그 청년은 힘없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흐느껴 부르짖었습니다. "예수님! 어머니의 병을 고쳐주세요. 응답해주세요. 평생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겠습니다." 결단하고 기도를 했는데 그리스도의 평화가 그 마음속에 넘치게 위로가 꽉 들어찼습니다.
그래서 자기 애인이 죽은 슬픔을 이길 수가 있고 어머니가 병들어서 죽게 되었는데도 마음에 위로와 평화가 넘쳐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연필을 들어 기록한 찬송가가 찬송가 487장 '죄 짐 맡은 우리 구주 어찌 좋은 친군지' 고통이 변하여 찬송이 되고 아픔이 변하여 감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고향에 편지해서 어머니의 안부를 물었는데, 중병을 앓던 어머니가 거짓말처럼 완전히 치료 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 청년이 바로 조지프 스크리븐씨인 것입니다. 우리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도 마귀의 공격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타날 때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의 생명이 나타날 무대를 만드는 것밖에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의 의와 치료와 평강과 생명을 더욱 강하게 체험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어려움이 다가오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 한번 불러 볼까요?
시험 걱정 모든 괴롬
없는 사람 누군가
부질없이 낙심 말고
기도 드려 아뢰세 아멘
이런 진실하신 친구
찾아 볼 수 있을까
우리 약함 아시오니
어찌 아니 아뢸까
예수님이 우리의 진실한 친구인 것을 어떻게 압니까? 환난을 당해봐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세상 친구 다 날 버리고 떠나고 나는 외롭게 될 때 오직 안 떠나는 분이 예수님 밖에 없다는 것은 환난을 당해봐야 아는 것입니다. 좋을 때는 모든 사람이 다 친구하려고 곁에 있고 다 찾아오지만 어려움을 당해봐야 진정한 친구를 알 수 있는 것처럼 이 찬송가 작사도 자기가 환난을 당해봤을 때 비로소 엄청난 위로와 평안을 주시는 예수님을 체험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3. 예수의 죽음을 우리 몸에 짊어질 때
예수의 죽음을 우리 몸에 짊어질 때 하나님의 그리스도를 통한 위로가 다가오므로 오히려 우리에게 다가오는 환난을 감사하면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환난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기근이나 죽음이나 칼이랴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는 이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기느니라"(롬8:35~37)
이런 일을 당해봐야 예수님의 사랑의 높이와 깊이와 넓이를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남북한이 갈려져서 북한과 대결하고 있다고 늘 원망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먼 것을 보고 감사해야 될 것은 우리 민족이 북한하고 서로 대결되어서 밀고 당기므로 사랑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서로 대결되어 있지 아니하면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인내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이해하고 동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찌할 수 없이 사랑해야만 되고, 이해해야만 되고, 동정해야만 되고, 인내해야만 되고, 도와줘야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배웁니까? 이런 상황에 처해야 배우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중심적으로 이기적으로 인내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사람이 혼자 살면 좋을 것 같아도 혼자 살면 정말 고집 부렁이가 되고 곰팡이 피고, 남의 의견을 듣지 않고 고집스러운 총각, 노처녀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부부간에 살아봐야 서로 의견충돌도 하고, 서로 다투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고, 양보도 하고, 그래서 이해도하고 동정도 하고 인내도 하고 사랑을 하는 것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부부간에 살므로 인간이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는 좋은 인격적인 수양처소가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히려 하나님께 우리는 죄 있는 세상, 마귀와 세속적인 세상, 병이 있는 세상, 저주가 있는 세상, 사망과 음부가 입 벌리고 있는 세상에 살게 해준 것을 감사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있기 때문에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면역이 된 것을 깨달아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이길 수 있는 능력의 신앙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2장 10절에 바울이 말하기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내가 약해보니까 주님을 의지해서 얼마나 강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내속에 살아계신 주님의 능력이 내가 약한 데 처했을 때 비로소 나타나기 때문에 오히려 이런 것을 감사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다가오는 여러 가지 시험과 환난을 원망 불평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의 능력이 나타날 무대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제가 옛날에 종로에서 부흥회를 열었는데 그때는 육이오 사변이후 회복 된지 얼마 안 되어서 황무지였었습니다. 천막부흥회를 하고 많은 사람들이 와서 구원을 받고 병자가 쏟아지게 나았었습니다. 어느 훌륭한 목사님이 내게 와서 "조용기 목사님 안수 좀 해주십시오." 무슨 안수냐니까 "나도 폐병 들렸다가 낫게 안수해 주십시오." "무슨 말입니까?" "우리 아버지가 잘 살았어요. 나는 아무 돈 걱정 없이 건강하게 대학을 졸업하고 신학을 졸업하고 목사가 되었는데 교회도 아버지가 지어주셔서 걱정 없이 목회하니까 할 말이 없습니다. 주님이 살아 계신지 안살아 계신지 알 수가 없습니다. 오늘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니까 목사님은 폐병으로 피를 토하고 죽음에 이르렀다가 예수님을 만나서 살아났으니 예수님이 뚜렷하잖아요. 역사적인 예수님이 아니고 형상적인 예수님이 아니고 살아계신 예수님을 체험했기 때문에 담대하게 설교하는데 나는 그렇게 설교할 수 없어요. 그러므로 내게 안수해서 나도 폐병 걸려서 피를 토하고 안 죽을 만큼 고통 하다가 죽지는 말고 살아나도록 기도를 해 주십시오." 정말 올바른 말입니다. 저는 폐병이라는 고통스러운 무대를 하나님이 만들어 주셨기 때문에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체험해서 그 체험에 서서 담대하게 50년을 목회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고통은 오히려 감사해야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타날 환경을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함순(Hamsun, Knut)은 노르웨이의 작가로서 1920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어릴 적과 청년 시대는 결코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어린 시절 그는 채석공 등으로 일하며 고난의 생활을 했습니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시카고에서 전차 차장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러한 고난의 생활을 통해 많은 체험을 하게 되었고, 그것을 소설로 쓴 것이 「굶주림」입니다. 이 책은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고 읽혀졌던 것입니다. 그리고 함순이라는 이름이 온 미국에 알려지고 세계에 알려지게 된 것입니다. 그는 과거에 가난했던 과거의 고통을 바탕으로 쓴 「토지의 성장」이란 소설로 노벨 문학상을 탔습니다. 이 함순이 얼마나 고맙게 생각해야 될 것은 옛날에 돌이나 찍어내고 전차차장이나 하고 막노동을 했기 때문에 그 체험으로 소설을 적어서 세계적인 노벨 문학상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런 체험이 없었으면 평범한 생활을 했으면 그와 같이 영광스러운 상을 받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고난은 단지 고난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어려움과 고통이 있을지라도 그것을 감사할 때 하나님은 그것을 토대로 해서 큰 영광을 나타내 주시는 것입니다. 이기는 은혜를 주님은 우리 모든 생활에 넉넉히 주시므로 감사해야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2장 8절로 9절 우리 다같이 소리 내어 읽어 보십시다.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께서 바울선생에게 말씀한 것입니다. 너무 바울선생이 허약해서 세 번 주님께 기도했습니다. 이 허약을 물리쳐 달라고 그러니까 주님이 "이 사람아 네가 허약하기 때문에 내가 강하다는 것이 나타날 수가 있다. 네가 힘이 있으면 나는 나타날 곳이 없지 않느냐. 네가 허약할 때 내가 강하다." 그 말을 듣고 바울선생은 오히려 하나님 앞에 허약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능력이 머물러 있고 나타나기를 원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 중에 아직 어린 신자들은 조금만 고통이 다가와도 부르짖습니다. "이 고통을 면해 주십시오.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십시오." 부르짖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이 깊은 사람들은 그런 고난과 괴로움이 다가올 때 주님의 영광이 나타날 기회가 왔다는 것을 알고 오히려 감사해야 되는 것입니다. 많은 주의 종들이 교회성장을 원합니다. 큰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나는 그럴 때마다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내 체험을 통해서.. 큰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는 크게 죽어야 되는 것입니다. 큰 고통을 당해서 큰 은혜를 체험해야 하나님의 역사를 나타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바울선생이 말씀하기를 사망은 내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한다고 내가 사망을 체험한 만큼 예수의 생명을 체험해서 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고통 안당해본 사람이 고통에서 건지는 예수님을 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병 안 나은 사람이 치료한 예수를 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배고프지 않는 사람이 밥을 주는 예수님을 증거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망은 내속에서 역사해야 생명이 너희 안에서 역사한다고 말했습니다. 큰 교회를 하자면 큰 은혜를 받아야 되고 큰 은혜는 그냥 주는 것이 아닙니다. 산이 높아야 골이 깊습니다. 은혜는 물처럼 깊은 밑으로 내려오는 것입니다. 많이 고통을 당하고 가슴속이 파헤쳐져야 은혜의 물이 채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늘 말합니다. "큰 목회를 하려고 하는 것은 좋지만 얼마나 많은 고통으로 가슴이 파헤쳐지고 슬픔 울음을 울고 탄식을 해야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구나."
그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우리가 고통이 다가오면 감사할 것은 은혜를 담기 위해서 하나님이 불도저로 밀어 재끼고 크레인으로 바위를 옮겨주고 마음을 파헤쳐 주는 것입니다. 우물을 파야 물을 고일수가 있지요. 우물을 파지 않고 물을 고여지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물을 파서 물이 고여야 자기만 마시는 것이 아니라 온 동네사람이 다 와서 마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고난당하면 여러분 자체만 당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통해서 여러분이 은혜를 체험하고 많은 사람이 은혜의 물을 마실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나 혼자만 사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은 여러분을 고난을 체험하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바울 선생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주의 종이 된 것은 그가 가장 많이 고난을 받았기 때문에 은혜가 충만하게 넘친 우물이 되어서 온 세계가 마실 수 있게 만들어 준 것입니다. 우리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주님은 넉넉히 이기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35절에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7)
고난 속에서 이겨야 사람이 그리스도의 빛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어린 아이가 세상에 미숙아로 태어나면 인큐베이터 안에 넣습니다. 병균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인큐베이터 안에 넣어서 10개월이 차도록 기르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여러분을 인큐베이터 안에 넣어서 자라기를 원치 않습니다. 당당히 나와서 병균과 싸우고 역경과 싸워서 이기는 승리자가 되기를 원하지 보호의 인큐베이터 속에서 사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세상 죄와 싸워서 이기고 세상과 마귀를 대항해서 이기고 병을 이기고 저주를 이기고 사망을 이기고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하는 삶을 사는 승리자를 원하지 약해 빠져서 인큐베이터의 보호를 받고 햇빛도 못비추고 집밖으로 못나가는 이러한 약해빠진 신자가 되기를 원치 않는 것입니다. 싸워서 이기는 삶을 하나님께서 원하시기 때문에 고난 속에서 예수님을 걸머지고 나가서 싸워 이기게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왜, 아버지가 사랑하므로 여러분을 버리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여러분을 얼마나 사랑해서 예수의 죽음을 여러분에게 걸머지게 했었습니까? 그래서 여러분께서 어떠한 것이 오더라도 이길 수 있는 힘을 갖도록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나는 이 글을 읽고 굉장히 마음에 감동을 했습니다.
미국의 한 병원에서 일어난 일인데 열여섯 살 된 소녀가 신장 신우염으로 신장을 이식해야만 살게 되었습니다. 여러 신장을 조사해 본 결과에 아버지의 신장이 그 몸에 맞았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기쁘게 그 열여섯 살 먹은 딸에게 신장을 떼 주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몇 년이 지나자 그 소녀의 신장에 또 고장이 났습니다. 그래서 또 신장을 떼 내서 이식을 하지 않으면 살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신장을 찾을 수가 없어요. 아버지가 병원에 와서 "내 나머지 신장을 어린 아이에게 떼 주십시오." 그래서 의사협회에서는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안 됩니다. 신장하나를 떼 주었는데 마저 나머지 신장을 떼 준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니까 떼 줄 수 없습니다. 이는 윤리강령에 어긋납니다." 그 아버지가 윤리위원회에 나가서 말했습니다. "여러분 윤리와 도덕보다 앞선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윤리와 도덕으로 규정할 수 없습니다. 윤리와 도덕이 올바릅니다. 옳습니다. 신장을 두 개 가졌는데 하나를 떼 주고 하나마저 떼 주려고 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사랑은 죽음보다 강합니다. 나는 죽더라도 내 나머지 신장을 내 딸에게 떼 주기를 원하니 내 심정을 알아주십시오." 그 윤리 위원회가 숙연해졌습니다. 추후 결정하기를 아버지 마지막 신장을 떼 주고 아버지는 평생을 피를 걸러내는 투석기에 의지해서 살도록 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마지막 신장을 떼 주어서 그 소녀가 살아나고 그 소녀는 정식 교육을 마치고 행복하게 결혼해서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고 자녀 손을 놓고 아버지에게 병원을 늘 찾아왔습니다. 아버지는 남은 평생을 기계에 의지해서 피를 걸러내며 살다가 죽어도 조금도 후회함이 없이 세상을 떴다고 말한 것입니다. 세상의 아버지도 자기 마지막 남은 신장을 자기 친딸에게 떼 줍니다. 나는 이 글을 읽고 내 마음속에 굉장한 질문을 했습니다. '조용기 너는 그렇게 하겠느냐?' 좋은 아버지면 별도리 없이 그렇게 할 것입니다. 제가 육이오 사변 때 부산 매축지에 살았는데 석탄을 실은 기차가 많이 지나가면 피난민들이 석탄차 위에 올라가서 석탄을 끌어 내렸습니다. 그러면 군인들이 와서 총을 쏘고 석탄 훔치는 사람을 잡았습니다. 저도 석탄 훔치러 갔습니다. 그때는 석탄 없이는 못살아가니까 한 끼라도 먹을려고.. 그런데 피난 온 한 40대 아버지가 한 10살 된 아들을 데리고서 남아를 했어요. 오다가 폭탄을 맞아서 가족은 죽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아들이 올라가서 석탄을 막 끌어내면 아버지는 주워 담는데 기차가 위에서 헌병이 뛰어 오니까 전부다 뛰어 내리는데 그 아들이 뛰어 내리지 굵은 석탄 덩어리 하나가 화차 밑으로 들어갔습니다. 애가 그것을 끄집어내려고 화차 밑에 기어 들어가자 기차가 덜커덕하고 움직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아이! 저 어째! 저 어째!" 고함을 쳐도 아무도 그 아들을 끄집어내려고 하지 않았는데 비호같이 뛰어드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40대의 아버지가 철로 밑으로 화차 밑에 뛰어 들어가서 아들을 밀어내고 기차 바퀴가 그 허리를 지나갈 때 허리가 부러지는 소리가 뚝 뚝 뚝 나는 것을 내가 들었습니다. 그 아버지 눈에 눈물이 뚝뚝 흐르고 코에 콧물이 주루룩 흐르면서 죽어 가면서도 어린 아이를 보고 빨리 피하라고 손을 이렇게 움직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지금까지도 내 머릿속에 분명하게 보입니다. 그때 나는 생각했습니다. 중학교 학생 시절이니까 '저 바보 봐라. 장가가서 또 낳으면 될 것인데 왜 그 아들을 위해서 죽느냐. 장가가서 낳으면 될 것 아니야. 그 아들 때문에 왜 죽느냐.'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심정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제가 장가를 들고 자식을 낳고 난 다음에 늘 생각했습니다. '네가 그 입장에 있으면 어떻게 할 것이냐.' 윤리와 도덕, 생명의 존엄 뭐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살려 놓고 보자.' 사랑은 맹목적인 것입니다. 내라도 뛰어 들어갔을 것입니다. 살려놓고 후에는 어떻게 될지 계산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다 계산하면 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엄청난 일을 저질렀습니다.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 아들조차도 아버지를 향해서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통곡을 했습니다. 이런 일을 어떻게 상상할 수 있는 것입니까? 사랑 때문에 하나님이 묶임을 받아 강요를 받아서 우리를 사랑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큰 사랑으로 지금 여러분을 사랑하고 계신 것입니다. "환난이나 곤고나 적신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이런 것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서 떼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결론>
여러분!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여러분에게 면역을 해주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여러분께서 항상 걸머지고 사시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로마서 8장 38절로 39절에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누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가 있습니까? 몸서리치게 높고 깊은 넓은 하나님의 사랑을 어떤 마귀가 끊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주어지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은혜를 주셨으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을 몸에 걸머지고 예수의 생명을 나타내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같이 고개 숙여 기도드리겠습니다.
<기도>
살아계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음을 몸에 짊어지면 예수의 생명도 또한 우리의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가 우리 위해서 죄에 대해서 죽고 세상과 마귀에 대해서 죽고 질병에 대해서 죽고 저주와 가난에 대해서 죽고 절망과 음부와 지옥에 대해서 죽었습니다. 그리스도를 걸머지므로 함께 죽어 함께 면역이 된 것을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위해서 예수를 통해서 역사하므로 우리는 의에 대해서 살고 거룩함에 대해서 살고 치료에 대해서 살고 축복에 대해서 살고 부활 영생에 대해서 살았음을 감사합니다. 이 생명의 역사를 가슴에 품고 이 세상에 빛을 비취는 우리들이 되게 도와 주시옵시고 어떠한 일에도 불평과 원망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감사하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