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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기억 하나

누가복음 김필곤 목사............... 조회 수 2094 추천 수 0 2009.12.28 02: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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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눅15:11-24 
설교자 : 김필곤 목사 
참고 : 열린교회 http://www.yeolin.or.kr 
지난 5월 첫주 최 집사님께서 나눔의 시간에 읽은 글 중에서 저의 머리 속에 지금까지 남아 있는 그림이 있습니다. 최 집사님은 극장에 들어가 영화를 보고 권집사님은 아들을 업고 극장 근처에서 맴도는 그림입니다. 제가 화가라면 흡족한 마음으로 영화를 보고 나오는 아내와 그리고 아이를 업고 극장 앞에서 그 아내를 행복하게 맞이하는 환하게 웃은 남편의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 선물하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이 그림은 안방에 걸어 놓고 살면 얼마나 풍요로운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말입니다. 아마 최집사님은 일평생 살면서 그 생각만 하면 그 어떤 고난도 참고 넘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어느날 속상할 때도 홀로 방안에 앉아 그 때의 생각만 하면 모든 마음의 아픔이 따뜻한 봄볕에 눈 녹듯 사라질 것입니다. 평생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기억(추억) 한가지만 있어도 우리 인생은 조금은 생기있도 여유롭게 살 수 있습니다.
가정 사역을 하시는 정태기 교수께서 제주도에서 84쌍의 부부를 모시고 가정세미나를 하였다고 합니다. 프로그램 중에 "여보 미안해"라는 순서가 있었다고 합니다. 과거의 기억을 생각하며 남편이 아내에게 장미꽃 한 송이를 내 밀면서 여보 미안해라고 말하고 사연을 이야기하는 순서였답니다.(속썩여서, 잘 해주 못해서, 생일 챙기 못해서 등등) 84명의 남편이 사연을 말하며 미안하다고 고백하며 순서가 거의 끝이 났는데 한 명의 남편이 통곡을 하면서 "미안하다는 말 가지고는 안돼"라며 한쪽에서 무릎을 끓고 아내 앞에서 일어날 줄 모르고 반복하더라는 것입니다. "미안하다는 말 가지고는 안돼" "미안하다는 말 가지고는 안돼" 그분은 24년 결혼 생활하는데 20년 바람을 피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집회에 참석하여 주님 만나는 뜨거운 경험을 한 후 아내 앞에서 회개한 것입니다. 무릎을 끓고 통곡하는 남편 앞에서 아내는 "이말 한마디 들으려고 내가 살았어"라고 같이 부둥켜안고 통곡하더라는 것입니다. 3년 후에 남편은 세상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남편이 떠난 후 7년이 되었는데 정교수님께서 그 권사님에게 요즈음 어떻시냐고 인사를 하면 "너무너무 행복하다"고 말한다고 합니다. "내 남편이 30분 무릎을 꿇고 울던 기억만 생각하면 20년 동안 맺힌 한이 다 풀이고 행복하게 산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을 사는데 아름다운 기억하 나만 있으면 우리는 힘있고 풍요롭게, 여유있게 인생을 살 수가 있습니다. 생명력있는 기억, 내가 잘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약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송두리째 받아 주는 사람을 만나 기억을 가진 사람은 어떤 어려움 앞에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한 가지 기억은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삶을 포기하지 않고 일어날 수 있게 합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그런 사람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두 가지 기억이 나옵니다. 첫 번째 기억은 어쩌만 하고 싶지 않은 기억일 수가 있습니다. 실패의 기억입니다. 두 번째 기억은 회복의 기억입니다.

1.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절망적인 상황에 대한 기억
오늘 성경에 나오는 타락한 한 젊은이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그가 어느 정도 자랐을 때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아버지 돌아가시면 저에게 주실 유산을 미리 상속해 주십시오" 아버지는 두말하지 않고 그에게 유산을 주었습니다. 아마 둘째 아들이니까 당시 풍속에 따르면 아버지 재산의 1/3을 상속받았을 것입니다. 그는 모든 재산을 돈으로 바꾸어 이민을 갔습니다. 그는 자유를 찾아 떠났습니다. 그는 아버지 품을 떠나면 참 자유가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 돈이면 행복이 보장될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 품을 떠나면 많은 사람과 어울리며 참으로 행복하게 살 줄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돈으로 참행복을 사지 못했습니다. 아버지 품을 떠난 결과는 무엇입니까? 자유가 아닙니다. 노예가 되었습니다. 16절을 보십시오.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로 배를 채우는 노예보다 더 비참한 존재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쾌락도 한 때였습니다. 부도 한 때였습니다. 유희도 한 때였습니다. 인생이란 그리 길지 않습니다. 낭비하게에는 짧은 순간입니다.
이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는 하나님입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하나님를 떠나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 행복합니까? 하나님을 떠난 인류의 모습을 보십시오. 하나님을 떠난 나라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풍요롭고 행복합니까? 참 자유함을 누리고 있습니까? 인간다운 삶이 있습니까? 세상에서 잘 사는 나라들은 어떤 나라들입니까?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 나라들입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릴 때 모든 것을 잃습니다.
요즈음은 교회에 불신자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교회는 다니는데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지 않습니다. 내가 복음을 믿습니다. 나대로 신앙인입니다. 하나님은 내 뜻을 성취하는 수단에 불과합니다.
인생의 부귀 영화와 온갖 쾌락을 다 누려본 솔로몬의 마지막 결론적인 고백이 무엇입니까?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전 12:13)"
인생을 행복하고 참으로 풍요롭고 의미있게 사는 길이 하나님 경외의 길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내가 정녕히 아노니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 앞에서 경외하는 자가 잘 될 것이요 (전 8:12)"
"산파는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집을 왕성케 하신지라 (출 1:21)"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할 때 그 경외라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공경이란 무엇입니까? 삼가고 존경함이라고 사전에서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교회 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졌습니다. 마음대로 해도 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신약의 하나님만 생각합니다. 은혜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만 생각합니다. 공의의 하나님, 구약의 하나님을 생각하기 싫어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두려우신 분입니다. 노아 때를 보십시오. 패역한 백성들, 하나님을 떠난 백성을 노아의 가족만 남겨 놓고 다 쓸어 버렸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보십시오. 타락한 백성들을 유황불로 다 태워버렸습니다. 하나님을 배역한 고라의 무리들을 보십시오. 염병으로 죽어갔습니다. 오늘 아침 마태복음 27장을 묵상하면서 저는 또다시 경외해야 할 하나님을 깨달았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놓아 주려했습니다. 그 때 유대인 군중들이 말합니다. 25절에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질어다"라고 외칩니다. 결국 그들의 후손은 ad 70년에 110만이 죽었습니다. 2차 대전때 히틀러에 의해 600만이 죽었습니다. 하나님을 너무 업신 여기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고 오늘날 교회 다니는 사람마져 우습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무렇게나 해도 되는 줄 알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예배당 강대 상만 올라가려해도 기도하고 올라갔습니다. 하나님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즈음에는 교회에서도 큰소리하고 싸우고 남 흉보고 혈기 부립니다. 내집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했습니다. 적어도 교회에 와서만큼은 하나님이 여기 계시구나라는 신전의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것 마저 없다면 어떻게 가정에서 사회에서 하나님 앞에서 살 수 있겠습니까? 시골 어떤 교회에서는 제직회를 하다 서로 의견충돌이 생기니까 장로와 집사가 싸우다 성경을 던져 뇌진탕으로 죽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제가 제자 훈련시킨 사람 중에 제자 훈련을 받으면서까지 바람피우는 집사를 보았습니다. 결혼한 40대입니다. 아이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 피아노 반주자 노처녀와 바람을 피우고 다닙니다. 제가 아내의 발을 닦아주고 그 감상을 써오라고 숙제를 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매의 발을 씻어주고 숙제를 써왔습니다. 교회에까지 와서 그것을 읽습니다. 차라리 숙제를 안해오지.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가증스럽겠습니까? 제가 오랜 전에 대학부 수련회가 있어 어느 교회에 가서 4일 동안 설교한 교회가 있습니다. 그 교회 목사님이 과부 집사님과 바람이 났습니다. 아무도 몰래 바람을 피웠습니다. 그런데 그 여집사님이 양심의 가책 때문에 교인들에게 그 사실을 알렸습니다. 목사님은 부인하였습니다. 결국 교회가 나누어졌습니다. 그 후 어떻게 되신 줄 아십니까? 그 목사님 첫째 아들은 사업을 하였는데 어느날 망해버렸습니다. 둘 째 아들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그 여집사님 아들 하나가 있는데 고려대학 법대에 다녔습니다. 2학년 때 뇌종량으로 죽었습니다.
저는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고 믿습니다. 보이지 않고 침묵하는 것같지만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죽어보면 그것을 우리는 명백하게 알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행복할 것같고 하나님을 떠나면 참자유를 누릴 것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인생의 흉년이 그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도스도예프스키는 '우리가 하나님을 떠날 때, 우리는 하나님만 떠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잃는다'고 말했습니다.

2. 절망적 상황에서 돌아오는 아들을 반기는 하나님에 대한 기억
절망적 상황은 끝이 아닙니다. 새로운 삶을 위한 출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기 위한 통로이며 수단입니다. 금세기에 평신도로서 전세계 가장 크다란 영향력을 끼친 분이 있다면 영국의 옥스포드와 캠브리지에서 가르치면서 주옥같이 많은 소설, 책들을 썼든 씨에스 루이스 라는 교수일 것입니다. 씨에스 루이스교수가 한번은 옥스포드에서 설교를 하고 나왔을 때 어떤 젊이가 그를 붙들고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선생님! 신이 살아계시다면,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이세상에 형언할 수 없는, 설명할 수 없는 고통이 왜 이다지도 많습니까?" 그때 루이스교수는 '젊은이형제여 이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러지 않아도 오만한데, 교만한데 고통마저 없었다면 사람들은 얼마나 교만했겠는가? 그러지 않아도 교만한 인간, 그리고 오만한 인간. 고통마저 없었다면 사람들은 얼마나 교만했겠는가! 고통은 사람들을 깨우쳐주는 하나님의 확성기지, 하나님의 메가폰이지'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고통과 역경 속에서 인간은 하나님께 무릎을 끓습니다.
아들은 극한적 상황 속에서 아버지를 생각합니다. 17절을 보겠습니다.
아버지는 어떤 분이십니까? 아들이 생각하고 있는 아들이 기억하고 있는 아버지, 우리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1) 자신의 의견을 충분히 들어주신 분이었습니다(12).
아버지가 아들이 앞으로 어떻게 될 줄 몰랐겠습니까? 그래도 허용해 줍니다. 뼈저린 고통을 통해 훈련을 시키는 아버지입니다.
(2) 아버지는 풍족하신 아버지입니다(17). 궁색한 아버지가 아닙니다. 인생의 풍요를 누릴 수 있는 아버지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이 세상의 주인이십니다. 저는 늘 이 신앙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우리 아버지가 이 세상의 주인이라는 사실입니다.
(3) 아버지는 언제나 기다리시는 아버지입니다(20).
(4) 아버지는 언제나 용서해 주시는 아버지입니다.(22-24)
자식이 아버지께 돌아갑니다. 거지 행세를 하고 갑니다. 모든 재산을 다 날렸습니다. 우리의 아들이 이렇게 하고 오면 받아주겠습니까? 아파트 앞에 서있습니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사람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상거가 먼데도 보고 측은히 여깁니다.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춥니다. 한번도 추궁하지 않습니다. 종들에게 이르러 좋은 옷을 가져다 주고 가락지를 끼워줍니다.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하며 즐거워 합니다. 왜요 한가지 이유입니다. 죽은 아들 살아났기 때문입니다(24). 이것이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어떤 아들입니까?
돈을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더 중히 여긴 아들입니다. 인륜과 도덕과 같은 삶의 중요한 원칙들을 우습게 여기고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돈을 중히 여긴 아들입니다. 그렇다고 돈의 진정한 가치는 안 아들도 아닙니다. 돈을 땀흘려 번 적이 없고 아버지의 것을 허랑방탕하게 육체의 쾌락만을 추구하다 탕진한 아들입니다. 받기만 한 아들입니다. 아버지를 떠난 아들입니다. 거지가 된 아들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에게 한 마디의 책망도 하지 않습니다. 형은 어떻습니까? 28절을 보십시오. 노합니다. 부당성을 말합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형의 말이 맞는 말입니다. 바리새인들입니다. 자꾸 자신이 그 위치에 가보지 않고 수준 높여 노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자신도 매지 못하는 것을 남에게 자꾸 매우게 하려고 하는 것이 바리새인입니다. 교회 안에도 가정 안에도 이런 사람들은 있습니다. 큰 아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아버지의 마음 알 수가 없습니다. 그도 아버지가 되어 보아야 조금 알게 됩니다. 자식이 아무리 날고 뛰며 효도를 한다고 해도 아버지 마음 모르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눈으로 다른 사람 이해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성도님이 아무리 교회를 사랑한다 하여도 목회자의 마음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모임에 늘 잔치가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새로운 언약의 표시로 가락지를 끼워 줍니다. 다시 시작하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발을 신겨줍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이제부터 이 신발 신고 새 출발하자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잔치를 배풀면서 말입니다. 이게 우리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께 돌아 오기만 하면 됩니다. 탕자처럼 마음을 바꾸는 것입니다. 아버지에게 가면 살길이 있다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결단력을 가지고 아버지께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하나님은 나무라지 않고 감싸줍니다. 우리 하나님 말씀하십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사 55:1)"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계 22:17)"
우리 예수님 말씀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8)"
내가 너 때문에 십자가를지지 않았느냐 오라는 것입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눅 5:32)"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 20:28)"

3. 아름 다운 추억 하나로
이 아들의 삶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이 아름다운 용서의 추억, 이 한가지 기억으로만으로 인생은 풍요롭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예수님을 부인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십니까? 저주하고 도망간 그를 예수님을 찾아 가셨서 먹을 것을 주시고 베드로야 내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질문합니다. 그리고 세 번에 걸쳐 이 질문을 하고 내양을 먹이라 내양을 치라고 사명을 주십니다. 책망하지 않습니다. 용서하십니다. 그의 삶은 이 기억이 일평생 지배했을 것입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그는 살인에 동참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그를 책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사명을 줍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그는 이 사실을 두 번이나 간증합니다. 두 번만 했겠습니까? 일평에 이 기억 하나로 그는 풍성한 삶을 살았습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살인자입니다. 도망갔습니다. 40년이 흘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사명을 줍니다. 그 한 가지 기억은 모세의 일생을 이끌었을 것입니다. 골리앗을 이긴 다윗의 기억, 바세바를 범했을 때 용서의 기억은 평생 그의 삶의 지표가 되었을 것입니다.
요한 웨슬레에게 신문기자가 물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그렇게 큰 일을 하게되었습니까? 나는 로마서을 읽다 주님을 만났습니다.
슈바이처에게 어떤 사람이 물었답니다. 어떻게 당신은 그렇게 위대한 일을 할 수 있습니까? 나에게는 두가지 기억이 있습니다. 그것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13살 때 동네 아이와 싸움을 하였답니다. 친구를 땅바닥에 내 팽게치고 위에 앉아 짖누르는데 친구가 하는 말이 "나도 너처럼 일주에 한 번만 고기를 먹으면 너를 누룰 수 있을 텐데"라는 말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 때부터 그는 3년 동안 고기를 먹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부자였습니다. 모두가 고기를 먹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사건으로 가난한 자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가 자라서 공원을 지나가다 백작 부인의 동산 앞에서 흑인이 발을 닦아 주는 것을 보았다고 합니다. 그 모습을 보고 그는 눈물을 흘리며 "주님 나를 저사람을 위해 살라고요" 그는 그 후 아프리카에 갔다고 합니다.
우리는 아름다운 기억 하나가 우리 인생을 바꾸어 버리는 것을 봅니다. 불행한 기억이 많은 사람들은 불행하게 삽니다. 행복한 기억을 가진 사람은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아름다운 기억보다는 더러운 기억으로 불행하게 사는 사람들을 봅니다.
부부도 좋은 기억은 다 잃어 버리고 나쁜 기억만 할려고 합니다. 부모와 자식도 마찬가지입니다. 형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것은 다 잃어 버리는데 결혼하여 신혼 여행 안간 것은 평생 기억하며 그것을 한으로 가지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식 공부 못하는 것만 가기고 스트레스 받지 마십시오. 자식 만큼 어릴 때 우리에게 기쁨을 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태어나서 아장거리며 걷던 생각, 기어다닐 때, 첫 걸음 걸을 때, 재롱 부릴 때 얼마나 아름다운 기억들이 있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용서함받았습니다. 이제는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죄의 종이 아닙니다. 인생을 의미없이 방황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죽음의 포로가 아닙니다. 죽음의 공포 질병의 공포의 노예가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참 자유함을 받은 사람입니다. 구원의 감격 이 추억하나로도 우리는 얼마든지 인생을 풍요롭게 살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랬습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 4:11-13)"
아름 다운 기억 하나만 가져도 인생은 여유롭게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기억 하나/누가복음 15:11-24/김필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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