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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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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습3:11-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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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38798 |
2006.12.17
스바냐의 신탁
우리는 구약성서를 읽을 때마다 그것이 까마득한 옛날이야기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최소한 3천 년 전 근동의 역사를 생각해보십시오. 그 당시 그들은 동양이 있다는 걸 상상조차 못했겠지요.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따라서 구약성서가 우리의 현실과 너무나 거리가 먼 이야기처럼 보이는 건 당연합니다. 더구나 소설처럼 서사가 있는 성서가 아니라 에세이나 시처럼 서술문 형식의 성서는 우리에게 별로 친근하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스바냐입니다.
여러분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실 겁니다. 도대체 스바냐가 누구냐, 그의 이야기가 도대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하고 말입니다. 일리가 있는 주장입니다. 스바냐는 기원전 630년경에 유대에서 활동한 예언자입니다. 북이스라엘은 이미 기원전 721년에 앗시리아 제국에 의해서 멸망당했고 남유대는 앗시리아에 조공을 바치는 것으로 겨우 파멸을 면했지만 나라꼴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남유대는 기원전 587년 신흥제국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하기 얼마 전인 기원전 621년에 대대적인 종교개혁을 단행했는데, 그 당시의 왕은 요시아였습니다. 스바냐는 바로 이 요시아 재위 초기에 활동했으며, 이런 (신명기)개혁의 물꼬를 튼 예언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바냐는 아모스, 미가, 특히 이사야와 비슷한 주제를 선포했습니다. 그것은 야훼의 날입니다. 아모스( 5:18 이하)와 이사야(2:12 이하)도 이 날을 선포했습니다. 스바냐의 독특성은 ‘남은 자’와 사회 정의와 겸손에 대한 강조였습니다. 예를 들어 3:12,13절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기를 못 펴는 가난한 사람만을 네 안에 남기리니 이렇게 살아남은 이스라엘은 야훼의 이름만 믿고 안심하리라. 그들은 남을 억울하게 속일 줄도 모르고 거짓말을 할 줄도 모르며 간사한 혀로 사기 칠 줄도 모른다. 그러나 배불리 먹고 편히 쉬리니, 아무도 들볶지 못하리라.” 가난한 사람과 겸손한 사람들은 야훼의 날에 편히 쉬게 된다는 스바냐의 신탁은 다른 예언자들의 전통과 맥을 같이 합니다.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잘난 사람이 더 잘나게 되는 날이 아니라 가난하고 겸손한 자들이 사람 대접받는 날을 바로 야훼의 날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예언자의 설교를 실감 있게 듣지 못합니다. 이런 설교는 ‘공자 왈’일 뿐이지 현실적이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히려 부자와 잘난 사람에게 관심이 많습니다. 우리가 도사들처럼 이 세상의 복잡한 삶을 완전히 초월할 수는 없겠지만 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으면서도 그 말씀을 비현실적으로 받아들이거나, 또는 그 말씀과 반대로 살아간다면 불행한 일입니다. 다시 한 번 더 마음을 집중해서 스바냐가 전하는 야훼의 날을 생각하십시오. 야훼의 날에 일어나는 사건은 고대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 그대로 살아있습니다.
해방의 날
오늘 본문에서 스바냐는 “그날이 오면”이라는 표현을 네 번이나 사용했습니다. 11절, 16절, 19절, 20절이 그것입니다. 19절과 20절은 “그 때가 되면”이라고 번역되었지만 내용적으로 “그날이 오면”과 똑같습니다. 그날은 곧 야훼의 날입니다. 스바냐에 따르면 이 야훼의 날은 심판의 날이면서 동시에 구원의 날입니다. 스바냐의 앞부분에서는 주로 심판이, 뒷부분에서는 구원이 선포됩니다. 야훼 하나님의 심판은 곧 구원이라는 뜻입니다. 이 날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에 관해서 스바냐는 많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가장 구체적인 내용은 19절에 담겨 있는데,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1. “억누르던 자를 없앤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유대는 지금 매우 심각한 국가적 위기 상황을 맞았습니다. 므나세(기원전 696-642) 치하에서 만연되었던 이방 문화가 유대의 종교와 일상의 삶을 모두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스바냐가 활동하던 시기는 유대의 마지막 위대한 왕 요시아가 아직 어릴 때였기 때문에 고관대작들이 섭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외부적으로, 앗시리아는 힘을 잃어가고 있는 반면에 바벨론은 막강한 세력으로 부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대는 이빨 빠진 호랑이 앗시리아에 기대고 있었습니다. 스바냐는 이런 상태로 계속하다가는 결국 바벨론에 의해서 나라가 먹힐 것이라고 생각했겠지요. 우리가 알다시피 유대의 수도 예루살렘은 결국 바벨론에 의해서 함락되고, 유대의 지도자급 인사들은 모두 포로로 잡혀 갔습니다. 억누르던 자를 다 없앤다는 스바냐의 설교는 유대인들이 바벨론 포로부터 해방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단순히 바벨론으로부터의 해방만을 뜻하는 건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고관대작으로부터 해방된다는 뜻도 포함합니다. 예언자들은 바로 그런 관점으로 세상을 보고 있었습니다. 야훼 하나님은 억압적인 힘을 행사하는 사람들을 다 없애는 분이라는 겁니다.
2. “절름발이를 고쳐준다.” 유대의 바벨론 포로는 분명이 그들이 절름발이 신세가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국민은 있는데 외교권을 상실하고 땅도 없는 상태는 분명히 국가적으로 절름발이입니다. 야훼의 날에 야훼 하나님은 그들을 절름발이 신세에서 해방시키십니다. 그렇습니다. 야훼 하나님은 장애를 가진 사람과 국가를 치유하시는 분이십니다. 정신적인 장애와 육체적인 장애로부터의 해방이 야훼의 날에 야훼에 의해서 일어납니다.
3. “길 잃은 자들을 찾는다.” 제가 여기서 긴 설명을 드리지 않아도 여러분은 유대가 길을 잃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겁니다. 바벨론 포로는 곧 길을 잃은 것입니다. 얼마 전에 미국 교포 중의 한 사람이 가족과 함께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실종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차를 운전하면서 길을 잘못 들었다고 하는데, 우리가 보기에는 이해가 가지 않기는 하지만 미국의 넓은 땅을 감안한다면 이해 못할 것도 없겠지요. 결국 일주일간 도움을 받지 못한 그 사람은 가족만 차에 남겨두고 혼자서 혹한에 도움의 손길을 찾으러 나섰다가 참변을 당했다고 합니다. 얼마나 막막했으면 그가 그런 상황에서 길을 찾아 나섰을까요. 길 잃은 자의 절박한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행스럽게 그이 미국인 부인과 자식들은 구호 헬기에 발견되어서 살아났다고 합니다. 야훼의 날에 이렇듯 길 잃은 자, 삶의 의미를 잃은 자들을 야훼께서 찾아내십니다.
오늘 우리는 19절에서 야훼의 날에 일어나게 될 세 가지 사건을 간추렸습니다. 야훼 하나님은 억누르던 자들을 다 없애시고, 절름발이를 고치시고, 길 잃은 자를 찾아내신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 빠진 이들을 생각해보십시오. 억눌림을 당한 사람, 다리에 장애를 가진 사람, 길을 잃은 사람 말입니다. 야훼의 날에 이들은 이런 상황으로부터 해방을 받습니다. 그것은 곧 구원입니다. 해방과 구원은 동일한 사건이며, 동일한 의미입니다. 구원자이신 야훼 하나님은 사람을 해방하십니다.
해방이 필요한 사람들
여기까지의 설교내용을 여러분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을 겁니다. 그러나 여기에 머물지 말고 한걸음 더 들어가서 야훼 하나님의 구원과 해방이 필요한 사람들이 누구인가를 생각하십시오. 그들은 바로 억눌림을 받은 사람, 절름발이, 길 잃은 사람입니다. 야훼의 날에는 바로 이런 사람들이 주인공이 됩니다. 다시 19b절을 읽어봅시다. “그때가 되면, 온 세상에서 내 백성은 칭송을 자자하게 받으며 이름을 떨치리라.” 야훼의 날에 해방을 경험하게 되는 바로 그들이 주인공이라고 한다면 반대로 주인공이 되지 못하는 사람들은 누구인지는 너무나 분명합니다. 억누르던 사람, 장애가 없는 사람, 삶의 안전망 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이 그들입니다.
아마 야훼의 날에 대한 스바냐의 설교에 대해서 불평할 사람들이 없지 않을 겁니다. 눌린 사람들이 무조건 잘된다는 것은 공정한 게임이 아니라고 생각하니까요. “포도원 주인”이라는 예수님의 비유에서도 이런 불평을 들을 수 있습니다. 아침부터 하루 종일 땡볕에서 노동한 사람과 뒤늦게 와서 한 시간 일한 사람에게 포도원 주인이 똑같이 일당인 한 데나리온씩을 주었을 때 하루 종일 일한 사람들이 투덜거렸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그들의 불평을 일축했습니다. 이 비유가 가르치고 있는 것은 게으르게 살아도 좋다는 게 아닙니다. 한 시간만 노동한 사람은 일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자기를 품꾼으로 써주는 사람이 없어도 일하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적게 일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하루 세끼를 먹을 돈이 필요합니다. 포도원 주인은 노동의 질과 양보다는 노동자의 사람다운 삶을 중요하게 평가했습니다. 주인의 이런 처사가 어떤 사람에게는 불평의 대상이 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은총의 대상이 됩니다.
우리는 어느 쪽의 사람일까요? 모든 사람이 사람답게 살도록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과 그의 행위가 우리에게 은총입니까, 아니면 불평입니까? 자기의 업적이 많은 사람들은 불평할 것이며, 그것이 없는 사람들은 감사할 것입니다. 이런 삶의 태도가 이미 하나님의 심판이며, 구원이며, 해방입니다. 자기의 업적에 사로잡혀서 공평한 질서를 거부하고 불평하는 것이 이미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거꾸로 자기의 업적을 초라하게 생각하고 하나님의 공의로운 통치를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기다리는 삶의 태도는 이미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영남대학교 법학과 박흥규 교수가 <한겨례 21> 12월19일 자 “노 땡큐!” 꼭지에 “법학의 위기”라는 글을 썼습니다. 인문학의 위기를 말하는 인문학 교수들이 그 문제를 비인문학적인, 즉 물질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는 것이 바로 인문학의 위기라고 진단하면서, 하나의 예로 정규직과 비정규직 교수의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정규직 스스로 월급을 동결 또는 삭감해서라도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만약 정규직 교수와 비정규직 교수 사이의 월급을 비슷한 수준으로 한다면 누가 불평하고, 누가 감사할까요? 더 근본적으로 대학졸업생과 고등학교졸업생들이 받는 연봉의 차이를 없앤다면 누가 불평하고 누가 감사할까요? 잘 알지 못하는 정치경제, 사회문제를 말씀드리는 게 아니라 스바냐의 설교를 알기 쉽게 예를 들고 있는 중입니다.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해방이 필요한 사람들이 바로 야훼의 날에 주인공이라는 말씀입니다.
해방의 미래를 향해서!
이런 점에서 예언자들의 선포는 매우 위험스럽습니다. 왜냐하면 기존의 체제를 완전히 거꾸로 만드는 거니까요. 어쩌면 성서의 예언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이나, 또는 그것에 기초한 러시아의 볼쉐비키 혁명과 비슷할지 모릅니다. 무산자 계급인 프롤레타리아가 세상을 지배하게 된다는 논리와 오늘 스바냐가 말하는 야훼의 날에 일어날 사건은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그런데 러시아 혁명은 역사적으로 실패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회주의의 관료성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고 말합니다. 혁명이 일어나면 그 혁명의 주체들이 다시 혁명되어야 할 대상으로 바뀝니다. 그게 바로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해방과 구원의 날에 대한 스바냐의 예언도 영원히 불가능한 걸까요? 그걸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저는 성서가 말하는 걸 대신 전합니다. 성서는 하나님이 그런 세상을 일으키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때가 바로 야훼의 날입니다. 오늘 우리가 대림절 셋째 주일을 맞았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곧 야훼의 날에 일어나야 할 사건이 완성되는 때입니다.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사람을 억누르던 자들을 모두 없애고, 절름발이를 고쳐주고, 길 잃은 자들을 찾아내십니다. 그런 희망이 없이 우리는 이런 험난한 세월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의 마지막 질문은 이렇습니다. 구원과 해방이 온전히 야훼 하나님의 몫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그저 가만히 앉아서 “그날이 오기만을” 기다리면 되는 건가요?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추운 겨울이 지나고 따뜻한 봄이 오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구원과 해방의 날을 기다릴 뿐입니다. 그러나 핵전쟁을 일으키거나 에너지의 과다사용으로 인해서 봄이 오지 않을 수 있듯이,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책임은 개인과 사회의 삶을 파괴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방법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저도 잘 모릅니다. 다만 스바냐가 희망하고 있듯이, 우리는 사람을 더 이상 억누르지 않는 체제를 만들어야하고, 사람들의 정신과 육체에 장애를 입지 않게 하며, 삶의 길을 잃지 않게 해야 하겠지요. 그리고 “그날이 오면” 우리 앞에 환하게 드러나게 될 궁극적인 생명의 완성을 기다려야겠지요. 이런 삶의 참여와 희망과 기다림이 대림절 셋째 주일을 맞는 여러분에게 풍요로워지기를 바랍니다. 아멘.
스바냐의 신탁
우리는 구약성서를 읽을 때마다 그것이 까마득한 옛날이야기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최소한 3천 년 전 근동의 역사를 생각해보십시오. 그 당시 그들은 동양이 있다는 걸 상상조차 못했겠지요.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따라서 구약성서가 우리의 현실과 너무나 거리가 먼 이야기처럼 보이는 건 당연합니다. 더구나 소설처럼 서사가 있는 성서가 아니라 에세이나 시처럼 서술문 형식의 성서는 우리에게 별로 친근하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스바냐입니다.
여러분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실 겁니다. 도대체 스바냐가 누구냐, 그의 이야기가 도대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하고 말입니다. 일리가 있는 주장입니다. 스바냐는 기원전 630년경에 유대에서 활동한 예언자입니다. 북이스라엘은 이미 기원전 721년에 앗시리아 제국에 의해서 멸망당했고 남유대는 앗시리아에 조공을 바치는 것으로 겨우 파멸을 면했지만 나라꼴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남유대는 기원전 587년 신흥제국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하기 얼마 전인 기원전 621년에 대대적인 종교개혁을 단행했는데, 그 당시의 왕은 요시아였습니다. 스바냐는 바로 이 요시아 재위 초기에 활동했으며, 이런 (신명기)개혁의 물꼬를 튼 예언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바냐는 아모스, 미가, 특히 이사야와 비슷한 주제를 선포했습니다. 그것은 야훼의 날입니다. 아모스( 5:18 이하)와 이사야(2:12 이하)도 이 날을 선포했습니다. 스바냐의 독특성은 ‘남은 자’와 사회 정의와 겸손에 대한 강조였습니다. 예를 들어 3:12,13절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기를 못 펴는 가난한 사람만을 네 안에 남기리니 이렇게 살아남은 이스라엘은 야훼의 이름만 믿고 안심하리라. 그들은 남을 억울하게 속일 줄도 모르고 거짓말을 할 줄도 모르며 간사한 혀로 사기 칠 줄도 모른다. 그러나 배불리 먹고 편히 쉬리니, 아무도 들볶지 못하리라.” 가난한 사람과 겸손한 사람들은 야훼의 날에 편히 쉬게 된다는 스바냐의 신탁은 다른 예언자들의 전통과 맥을 같이 합니다.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잘난 사람이 더 잘나게 되는 날이 아니라 가난하고 겸손한 자들이 사람 대접받는 날을 바로 야훼의 날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예언자의 설교를 실감 있게 듣지 못합니다. 이런 설교는 ‘공자 왈’일 뿐이지 현실적이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히려 부자와 잘난 사람에게 관심이 많습니다. 우리가 도사들처럼 이 세상의 복잡한 삶을 완전히 초월할 수는 없겠지만 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으면서도 그 말씀을 비현실적으로 받아들이거나, 또는 그 말씀과 반대로 살아간다면 불행한 일입니다. 다시 한 번 더 마음을 집중해서 스바냐가 전하는 야훼의 날을 생각하십시오. 야훼의 날에 일어나는 사건은 고대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 그대로 살아있습니다.
해방의 날
오늘 본문에서 스바냐는 “그날이 오면”이라는 표현을 네 번이나 사용했습니다. 11절, 16절, 19절, 20절이 그것입니다. 19절과 20절은 “그 때가 되면”이라고 번역되었지만 내용적으로 “그날이 오면”과 똑같습니다. 그날은 곧 야훼의 날입니다. 스바냐에 따르면 이 야훼의 날은 심판의 날이면서 동시에 구원의 날입니다. 스바냐의 앞부분에서는 주로 심판이, 뒷부분에서는 구원이 선포됩니다. 야훼 하나님의 심판은 곧 구원이라는 뜻입니다. 이 날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에 관해서 스바냐는 많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가장 구체적인 내용은 19절에 담겨 있는데,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1. “억누르던 자를 없앤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유대는 지금 매우 심각한 국가적 위기 상황을 맞았습니다. 므나세(기원전 696-642) 치하에서 만연되었던 이방 문화가 유대의 종교와 일상의 삶을 모두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스바냐가 활동하던 시기는 유대의 마지막 위대한 왕 요시아가 아직 어릴 때였기 때문에 고관대작들이 섭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외부적으로, 앗시리아는 힘을 잃어가고 있는 반면에 바벨론은 막강한 세력으로 부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대는 이빨 빠진 호랑이 앗시리아에 기대고 있었습니다. 스바냐는 이런 상태로 계속하다가는 결국 바벨론에 의해서 나라가 먹힐 것이라고 생각했겠지요. 우리가 알다시피 유대의 수도 예루살렘은 결국 바벨론에 의해서 함락되고, 유대의 지도자급 인사들은 모두 포로로 잡혀 갔습니다. 억누르던 자를 다 없앤다는 스바냐의 설교는 유대인들이 바벨론 포로부터 해방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단순히 바벨론으로부터의 해방만을 뜻하는 건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고관대작으로부터 해방된다는 뜻도 포함합니다. 예언자들은 바로 그런 관점으로 세상을 보고 있었습니다. 야훼 하나님은 억압적인 힘을 행사하는 사람들을 다 없애는 분이라는 겁니다.
2. “절름발이를 고쳐준다.” 유대의 바벨론 포로는 분명이 그들이 절름발이 신세가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국민은 있는데 외교권을 상실하고 땅도 없는 상태는 분명히 국가적으로 절름발이입니다. 야훼의 날에 야훼 하나님은 그들을 절름발이 신세에서 해방시키십니다. 그렇습니다. 야훼 하나님은 장애를 가진 사람과 국가를 치유하시는 분이십니다. 정신적인 장애와 육체적인 장애로부터의 해방이 야훼의 날에 야훼에 의해서 일어납니다.
3. “길 잃은 자들을 찾는다.” 제가 여기서 긴 설명을 드리지 않아도 여러분은 유대가 길을 잃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겁니다. 바벨론 포로는 곧 길을 잃은 것입니다. 얼마 전에 미국 교포 중의 한 사람이 가족과 함께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실종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차를 운전하면서 길을 잘못 들었다고 하는데, 우리가 보기에는 이해가 가지 않기는 하지만 미국의 넓은 땅을 감안한다면 이해 못할 것도 없겠지요. 결국 일주일간 도움을 받지 못한 그 사람은 가족만 차에 남겨두고 혼자서 혹한에 도움의 손길을 찾으러 나섰다가 참변을 당했다고 합니다. 얼마나 막막했으면 그가 그런 상황에서 길을 찾아 나섰을까요. 길 잃은 자의 절박한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행스럽게 그이 미국인 부인과 자식들은 구호 헬기에 발견되어서 살아났다고 합니다. 야훼의 날에 이렇듯 길 잃은 자, 삶의 의미를 잃은 자들을 야훼께서 찾아내십니다.
오늘 우리는 19절에서 야훼의 날에 일어나게 될 세 가지 사건을 간추렸습니다. 야훼 하나님은 억누르던 자들을 다 없애시고, 절름발이를 고치시고, 길 잃은 자를 찾아내신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 빠진 이들을 생각해보십시오. 억눌림을 당한 사람, 다리에 장애를 가진 사람, 길을 잃은 사람 말입니다. 야훼의 날에 이들은 이런 상황으로부터 해방을 받습니다. 그것은 곧 구원입니다. 해방과 구원은 동일한 사건이며, 동일한 의미입니다. 구원자이신 야훼 하나님은 사람을 해방하십니다.
해방이 필요한 사람들
여기까지의 설교내용을 여러분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을 겁니다. 그러나 여기에 머물지 말고 한걸음 더 들어가서 야훼 하나님의 구원과 해방이 필요한 사람들이 누구인가를 생각하십시오. 그들은 바로 억눌림을 받은 사람, 절름발이, 길 잃은 사람입니다. 야훼의 날에는 바로 이런 사람들이 주인공이 됩니다. 다시 19b절을 읽어봅시다. “그때가 되면, 온 세상에서 내 백성은 칭송을 자자하게 받으며 이름을 떨치리라.” 야훼의 날에 해방을 경험하게 되는 바로 그들이 주인공이라고 한다면 반대로 주인공이 되지 못하는 사람들은 누구인지는 너무나 분명합니다. 억누르던 사람, 장애가 없는 사람, 삶의 안전망 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이 그들입니다.
아마 야훼의 날에 대한 스바냐의 설교에 대해서 불평할 사람들이 없지 않을 겁니다. 눌린 사람들이 무조건 잘된다는 것은 공정한 게임이 아니라고 생각하니까요. “포도원 주인”이라는 예수님의 비유에서도 이런 불평을 들을 수 있습니다. 아침부터 하루 종일 땡볕에서 노동한 사람과 뒤늦게 와서 한 시간 일한 사람에게 포도원 주인이 똑같이 일당인 한 데나리온씩을 주었을 때 하루 종일 일한 사람들이 투덜거렸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그들의 불평을 일축했습니다. 이 비유가 가르치고 있는 것은 게으르게 살아도 좋다는 게 아닙니다. 한 시간만 노동한 사람은 일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자기를 품꾼으로 써주는 사람이 없어도 일하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적게 일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하루 세끼를 먹을 돈이 필요합니다. 포도원 주인은 노동의 질과 양보다는 노동자의 사람다운 삶을 중요하게 평가했습니다. 주인의 이런 처사가 어떤 사람에게는 불평의 대상이 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은총의 대상이 됩니다.
우리는 어느 쪽의 사람일까요? 모든 사람이 사람답게 살도록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과 그의 행위가 우리에게 은총입니까, 아니면 불평입니까? 자기의 업적이 많은 사람들은 불평할 것이며, 그것이 없는 사람들은 감사할 것입니다. 이런 삶의 태도가 이미 하나님의 심판이며, 구원이며, 해방입니다. 자기의 업적에 사로잡혀서 공평한 질서를 거부하고 불평하는 것이 이미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거꾸로 자기의 업적을 초라하게 생각하고 하나님의 공의로운 통치를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기다리는 삶의 태도는 이미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영남대학교 법학과 박흥규 교수가 <한겨례 21> 12월19일 자 “노 땡큐!” 꼭지에 “법학의 위기”라는 글을 썼습니다. 인문학의 위기를 말하는 인문학 교수들이 그 문제를 비인문학적인, 즉 물질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는 것이 바로 인문학의 위기라고 진단하면서, 하나의 예로 정규직과 비정규직 교수의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정규직 스스로 월급을 동결 또는 삭감해서라도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만약 정규직 교수와 비정규직 교수 사이의 월급을 비슷한 수준으로 한다면 누가 불평하고, 누가 감사할까요? 더 근본적으로 대학졸업생과 고등학교졸업생들이 받는 연봉의 차이를 없앤다면 누가 불평하고 누가 감사할까요? 잘 알지 못하는 정치경제, 사회문제를 말씀드리는 게 아니라 스바냐의 설교를 알기 쉽게 예를 들고 있는 중입니다.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해방이 필요한 사람들이 바로 야훼의 날에 주인공이라는 말씀입니다.
해방의 미래를 향해서!
이런 점에서 예언자들의 선포는 매우 위험스럽습니다. 왜냐하면 기존의 체제를 완전히 거꾸로 만드는 거니까요. 어쩌면 성서의 예언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이나, 또는 그것에 기초한 러시아의 볼쉐비키 혁명과 비슷할지 모릅니다. 무산자 계급인 프롤레타리아가 세상을 지배하게 된다는 논리와 오늘 스바냐가 말하는 야훼의 날에 일어날 사건은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그런데 러시아 혁명은 역사적으로 실패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회주의의 관료성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고 말합니다. 혁명이 일어나면 그 혁명의 주체들이 다시 혁명되어야 할 대상으로 바뀝니다. 그게 바로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해방과 구원의 날에 대한 스바냐의 예언도 영원히 불가능한 걸까요? 그걸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저는 성서가 말하는 걸 대신 전합니다. 성서는 하나님이 그런 세상을 일으키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때가 바로 야훼의 날입니다. 오늘 우리가 대림절 셋째 주일을 맞았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곧 야훼의 날에 일어나야 할 사건이 완성되는 때입니다.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사람을 억누르던 자들을 모두 없애고, 절름발이를 고쳐주고, 길 잃은 자들을 찾아내십니다. 그런 희망이 없이 우리는 이런 험난한 세월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의 마지막 질문은 이렇습니다. 구원과 해방이 온전히 야훼 하나님의 몫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그저 가만히 앉아서 “그날이 오기만을” 기다리면 되는 건가요?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추운 겨울이 지나고 따뜻한 봄이 오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구원과 해방의 날을 기다릴 뿐입니다. 그러나 핵전쟁을 일으키거나 에너지의 과다사용으로 인해서 봄이 오지 않을 수 있듯이,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책임은 개인과 사회의 삶을 파괴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방법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저도 잘 모릅니다. 다만 스바냐가 희망하고 있듯이, 우리는 사람을 더 이상 억누르지 않는 체제를 만들어야하고, 사람들의 정신과 육체에 장애를 입지 않게 하며, 삶의 길을 잃지 않게 해야 하겠지요. 그리고 “그날이 오면” 우리 앞에 환하게 드러나게 될 궁극적인 생명의 완성을 기다려야겠지요. 이런 삶의 참여와 희망과 기다림이 대림절 셋째 주일을 맞는 여러분에게 풍요로워지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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