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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5:1-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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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38858 |
2007.02.04.
본문의 편집사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평소에 우리가 알고 있던 예수님에 관한 여러 이야기가 비교적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이야기는 세 가지입니다. 첫째, 1-3절입니다. 이 구절은 마가복음 4:1,2절 말씀과 병행합니다. 예수님이 배 위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둘째, 4-10a절입니다. 이 구절은 요한복음 21:1-14절의 병행구입니다. 어부였던 시몬 베드로가 밤새도록 고기를 잡지 못했는데, 깊은 곳에 그물을 던지라는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따랐더니 많은 고기가 잡혔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가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의 공생애 초기에 나오지만, 요한복음에는 부활 이후에 나옵니다. 이렇게 다른 이유는 누가와 요한이 서로 다른 전승을 알고 있었거나 아니면 요한이 누가의 전승을 자신의 신학적 입장에 따라서 다르게 편집했기 때문입니다.
셋째, 10b,11절입니다. 이 구절은 마가복음 1:16-20과 마태복음 4:18-22절, 그리고 요한복음 1:35-42절의 병행구입니다. 이 대목은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이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을 받는 장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공관복음은 그들이 고기를 잡다가 예수님의 부름을 받았다고 보도하는데 반해서 요한복음은 이들이 원래는 세례 요한의 제자였다가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다고 보도합니다.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가 복음서에 따라서 약간씩 다르게 보도된다는 사실에 대해서 여러분은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차이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매우 정직했으며, 더구나 훨씬 본질적인 신앙의 세계 안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만약 기독교 공동체를 누가 의도적으로 조직하려고 했다면 이렇게 서로 다른 요소들을 내버려두지 않았을 겁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하나의 복음서로 통일시켰겠지요.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사실은 다음과 같습니다. 복음서와 서신 등, 신약성서가 형성되던 초기 기독교는 그 어떤 목적의식 없이 단순하게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일어난 사건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들은 일찍이 경험해보지 못한 엄청난 사건을 예수님에게서 경험했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구원 경험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예수의 일치에 대한 경험이며, 하나님이 바로 예수님을 통해서 자신들에게 임재 하셨다는 경험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 그의 치유, 그들의 눈에 기적으로 보이는 사건에서 그것을 경험했습니다. 초기 공동체는 그것을 말로 나누고, 글로 나누면서 조금씩 자리를 잡아갔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경험들은 모두 기억에 의존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기억은 세월이 지나면서 조금씩 희미해질 뿐만 아니라 전승되는 과정에서 조금씩 차이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초기 기독교는 그런 차이를 강제적으로 없애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경험이 그런 차이에 의해서 전혀 손상당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지나치게 다른 것들은, 예컨대 외경이나 위경 같은 문서들은 제외시킬 수밖에 없었지요. 지금 우리가 신약성서로 받아들인 문서들은 서로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가장 중요한 신앙을 담고 있기 때문에 경전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초기 기독교는 자신들의 분명한 정체성을 지키면서도 동시에 다양성을 인정했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이런 다양성 중의 하나입니다. 이 본문이 다른 복음서의 구성과 다르다는 사실이 한 눈에 들어오지만 그것이 바로 누가의 고유한 영적 시각이라는 점에서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 받아들여졌습니다. 여기서 누가의 고유한 영적 시각은 무엇일가요?
찢어지는 그물
시몬과 안드레가 예수님의 부름을 받는 장면에 대한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설명을 우선 보십시오. 그 내용은 거의 똑같습니다. 마태복음이 마가복음의 전승을 아무런 가감 없이 그대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그물을 던지고 있던 어부 시몬과 안드레아를 보시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를 따라 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그들은 곧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갔다고 합니다. 그 뒤를 이어 야고보와 요한도 “아버지 세베대오와 삯꾼들을 배에 남겨둔 채 예수를 따라 나섰다.”고 합니다.(막 1:16-20) 이런 이야기를 읽는 사람들은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고기를 잡고 있는 사람들에게 다짜고짜로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이나 그 말을 듣고 하던 일과 가족을 모두 버려두고 따라나선 제자들이나 어딘가 이상하게 보입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마태나 마가에 비해서 문장력이 뛰어난 사람입니다.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누가가 사용한 헬라어는 고급 헬라어라고 합니다. 학문이 깊었다는 말이겠지요. 누가복음에는 그 당시의 역사적 정보도 제법 담고 있습니다. 역사적 안목도 뛰어났다는 말이겠지요. 그는 지식인이었습니다. 그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름에 순종했다는 사실을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처럼 단순한 사실로만 전하지 않고 설득력 있게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가 많이 잡힌 사건을 바로 이 순간에 자리를 매겼습니다.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호숫가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시던 예수님은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오자 근처에 놓여 있던 배에 오르셨습니다. 그 배는 곧 시몬 베드로의 배였습니다. 시몬은 밤새도록 그물질을 했지만 소득이 없었습니다. 이제 그물을 간추려서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는 중입니다. 예수님이 자기 배에 올라와서 사람들에게 설교하는 것을 들었겠지요. 시몬은 이 설교를 듣고 이미 영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을 겁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따랐을 리가 없습니다. 시몬의 말입니다. “선생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그러나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니 그물을 치겠습니다.”(5절) 그러자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가 잡혔습니다. 동료들이 와서 도와야 할 정도였습니다. 시몬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시몬은 예수님의 말씀에서 전혀 새로운 체험을 했으며, 더 나아가 많은 고기가 잡히는 사건에서 종교적인 체험을 했습니다. 그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고 합니다. 그래서 넙죽 엎드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죄인이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 지금 시몬은 무엇을 경험한 것인가요? 그의 영혼이 무엇으로 채워졌습니까? 일상적으로 고기를 잡으며 살아가던 시몬은 이제 인간의 가장 깊은 영혼이 흔들리는 경험을 했습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그게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제가 보기에 게네사렛 호수가 배 위에서 일어난 이 사건은 불붙는 가시떨기의 호렙산에서 일어난 사건과 비슷합니다. 호렙산의 모세와 게네사렛의 시몬은 동일한 경험을 했습니다. 모세는 신을 벗었으며, 시몬은 엎드렸습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임재라는 사건 앞에서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모세는 호렙산에서 출애굽의 사명을 받았다면, 시몬은 게네사렛에서 사람 낚는 어부의 사명을 받았습니다.
호렙산에서의 표면적인 특징은 불이 붙었지만 타지 않는 가시떨기입니다. 사람들은 그런 신기한 사건에 호기심이 많습니다. 그러나 호렙산 사건에서 가시떨기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연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엘모의 불’ 현상입니다. 이미 모세는 엘모의 불을 보기 이전에 점차적으로 야훼 하나님에게 가까이 가고 있었습니다. 그가 미디안의 양치기로 살면서 거룩한 산이라고 일컬어지는 호렙산에 관심을 보였다는 것 자체가 바로 그 사실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가시떨기는 하나님 경험에 이르는 상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시몬의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가 많이 잡혔다는 사실은 특별히 기적적인 사건은 아닙니다. 그런 것에만 호기심을 보이는 건 바른 신앙의 자세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면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부자가 된다거나 그렇게 교회를 부흥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성서의 가르침과 전혀 다른 것을 말하는 겁니다. 그물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시몬은 이미 예수님의 설교를 통해서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성서는 그걸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지만 행간에서 우리는 그걸 읽을 수 있습니다. 누가가 세 가지 서로 다른 사건을 이렇게 한 곳으로 묶은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가 많이 잡힌 것은 불붙은 가시떨기처럼 시몬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거룩한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된 상징적 사건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 사건은 중요합니다.
버리고 따름
시몬과 몇몇 동료들은 “두려워하지 말라. 너는 이제부터 사람들을 낚을 것이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더 이상 다른 것으로 인생을 소비할 수 없습니다. 더 이상 일상에 머물러 있을 수 없습니다. 그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는 말은 아주 당연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사람들은 모두 이들과 똑같이 일상의 삶을 포기해야만 할까요? 극단적인 소종파나 수도원 영성을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일반적인 교회생활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이런 결단은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모든 삶을 완전히 접는 것만이 예수님을 따르는 유일한 길도 아닙니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목사가 되거나 해외 선교사가 될 수도 있겠지만,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간다면 사회 자체가 붕괴될 것입니다. 사람을 낚을 것이라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는 이 말씀이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단정적으로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여러분 각자의 삶이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다만 하나의 방향만은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구조를 다시 한 번 더 잘 생각해보십시오. 시몬을 비롯한 여러 명의 어부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했을 때 중요한 것은 이들이 두려워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하나님의 거룩함을 경험했다는 사실이다. 그것 없이 버리고 따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 경험이 일차적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많은 신자들은 그 하나님 경험은 내버려 둔 채 성서가 말하는 대로 무언가를 버리려고만 하고, 무조건 따라가려고만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라는 체험이 없이 자기 기분에 따라서, 또는 친구 따라 강남 가듯이, 분위기에 휩쓸려, 체면 때문에, 종교적인 교양을 얻기 위해서 예수님을 따르는 일들이 없지 않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아주 쉽게 시험에 걸립니다. 조금만 어려움이 닥쳐도 흔들리겠지요. 다른 사람에게 섭섭한 말을 들어도 그것 때문에 신앙 자체가 흔들리기도 합니다.
결국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버릴 것인가, 어떻게 따를 것인가 하는 것보다는 하나님 경험입니다. 모세도 그렇고, 시몬 베드로도 그랬습니다. 그들은 고유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의 시몬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리고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가 잡힌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어떤 하나님 경험이 있습니까? 그게 없으면 우리는 결코 예수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아니 따라서도 안 됩니다.
여기까지의 설교를 듣고 여러분은 마음이 조금 혼란할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구체적으로 경험하지 못한 나는 도저히 예수님을 따를 수 없는 사람이구나, 하고 생각할지도 모르겠군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시적 영감을 못 받은 사람이 시인 노릇을 하려면 얼마나 피곤하겠습니까? 하나님 경험 없이 신자 노릇을 하려는 사람도 똑같이 피곤합니다. 그 경험을 구체적으로 알려달라고 말씀하지는 마십시오. 그건 아무도 가르쳐줄 수 없습니다. 아무도 대신 죽어줄 수 없듯이 하나님 경험은 혼자 감당해야 할 몫입니다. 제가 조금은 도와 드릴 수 있습니다. 시몬이 자기 배에서 예수님의 설교를 들었듯이 하나님 말씀인 성서를 조금 깊이 있게 공부하십시오. 그리고 이 세상이 바로 기적적인 사건이라는 것을 깊이 들어다보십시오. 이 세상은 곧 고기가 가득 찬 그물과 같습니다. 말씀과 세계에 자신의 영혼이 접촉하는 과정을 통해서 어느 순간에 여러분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것입니다. 그런 경험이 있으신 분들은 무엇을 버려야 할지, 무엇을 따라야 할지 압니다. 2천 년 전 게네사렛 호수 배위에서 일어났던 시몬의 하나님 경험이 여러분에게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본문의 편집사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평소에 우리가 알고 있던 예수님에 관한 여러 이야기가 비교적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이야기는 세 가지입니다. 첫째, 1-3절입니다. 이 구절은 마가복음 4:1,2절 말씀과 병행합니다. 예수님이 배 위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둘째, 4-10a절입니다. 이 구절은 요한복음 21:1-14절의 병행구입니다. 어부였던 시몬 베드로가 밤새도록 고기를 잡지 못했는데, 깊은 곳에 그물을 던지라는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따랐더니 많은 고기가 잡혔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가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의 공생애 초기에 나오지만, 요한복음에는 부활 이후에 나옵니다. 이렇게 다른 이유는 누가와 요한이 서로 다른 전승을 알고 있었거나 아니면 요한이 누가의 전승을 자신의 신학적 입장에 따라서 다르게 편집했기 때문입니다.
셋째, 10b,11절입니다. 이 구절은 마가복음 1:16-20과 마태복음 4:18-22절, 그리고 요한복음 1:35-42절의 병행구입니다. 이 대목은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이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을 받는 장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공관복음은 그들이 고기를 잡다가 예수님의 부름을 받았다고 보도하는데 반해서 요한복음은 이들이 원래는 세례 요한의 제자였다가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다고 보도합니다.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가 복음서에 따라서 약간씩 다르게 보도된다는 사실에 대해서 여러분은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차이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매우 정직했으며, 더구나 훨씬 본질적인 신앙의 세계 안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만약 기독교 공동체를 누가 의도적으로 조직하려고 했다면 이렇게 서로 다른 요소들을 내버려두지 않았을 겁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하나의 복음서로 통일시켰겠지요.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사실은 다음과 같습니다. 복음서와 서신 등, 신약성서가 형성되던 초기 기독교는 그 어떤 목적의식 없이 단순하게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일어난 사건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들은 일찍이 경험해보지 못한 엄청난 사건을 예수님에게서 경험했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구원 경험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예수의 일치에 대한 경험이며, 하나님이 바로 예수님을 통해서 자신들에게 임재 하셨다는 경험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 그의 치유, 그들의 눈에 기적으로 보이는 사건에서 그것을 경험했습니다. 초기 공동체는 그것을 말로 나누고, 글로 나누면서 조금씩 자리를 잡아갔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경험들은 모두 기억에 의존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기억은 세월이 지나면서 조금씩 희미해질 뿐만 아니라 전승되는 과정에서 조금씩 차이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초기 기독교는 그런 차이를 강제적으로 없애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경험이 그런 차이에 의해서 전혀 손상당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지나치게 다른 것들은, 예컨대 외경이나 위경 같은 문서들은 제외시킬 수밖에 없었지요. 지금 우리가 신약성서로 받아들인 문서들은 서로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가장 중요한 신앙을 담고 있기 때문에 경전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초기 기독교는 자신들의 분명한 정체성을 지키면서도 동시에 다양성을 인정했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이런 다양성 중의 하나입니다. 이 본문이 다른 복음서의 구성과 다르다는 사실이 한 눈에 들어오지만 그것이 바로 누가의 고유한 영적 시각이라는 점에서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 받아들여졌습니다. 여기서 누가의 고유한 영적 시각은 무엇일가요?
찢어지는 그물
시몬과 안드레가 예수님의 부름을 받는 장면에 대한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설명을 우선 보십시오. 그 내용은 거의 똑같습니다. 마태복음이 마가복음의 전승을 아무런 가감 없이 그대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그물을 던지고 있던 어부 시몬과 안드레아를 보시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를 따라 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그들은 곧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갔다고 합니다. 그 뒤를 이어 야고보와 요한도 “아버지 세베대오와 삯꾼들을 배에 남겨둔 채 예수를 따라 나섰다.”고 합니다.(막 1:16-20) 이런 이야기를 읽는 사람들은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고기를 잡고 있는 사람들에게 다짜고짜로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이나 그 말을 듣고 하던 일과 가족을 모두 버려두고 따라나선 제자들이나 어딘가 이상하게 보입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마태나 마가에 비해서 문장력이 뛰어난 사람입니다.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누가가 사용한 헬라어는 고급 헬라어라고 합니다. 학문이 깊었다는 말이겠지요. 누가복음에는 그 당시의 역사적 정보도 제법 담고 있습니다. 역사적 안목도 뛰어났다는 말이겠지요. 그는 지식인이었습니다. 그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름에 순종했다는 사실을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처럼 단순한 사실로만 전하지 않고 설득력 있게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가 많이 잡힌 사건을 바로 이 순간에 자리를 매겼습니다.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호숫가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시던 예수님은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오자 근처에 놓여 있던 배에 오르셨습니다. 그 배는 곧 시몬 베드로의 배였습니다. 시몬은 밤새도록 그물질을 했지만 소득이 없었습니다. 이제 그물을 간추려서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는 중입니다. 예수님이 자기 배에 올라와서 사람들에게 설교하는 것을 들었겠지요. 시몬은 이 설교를 듣고 이미 영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을 겁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따랐을 리가 없습니다. 시몬의 말입니다. “선생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그러나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니 그물을 치겠습니다.”(5절) 그러자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가 잡혔습니다. 동료들이 와서 도와야 할 정도였습니다. 시몬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시몬은 예수님의 말씀에서 전혀 새로운 체험을 했으며, 더 나아가 많은 고기가 잡히는 사건에서 종교적인 체험을 했습니다. 그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고 합니다. 그래서 넙죽 엎드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죄인이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 지금 시몬은 무엇을 경험한 것인가요? 그의 영혼이 무엇으로 채워졌습니까? 일상적으로 고기를 잡으며 살아가던 시몬은 이제 인간의 가장 깊은 영혼이 흔들리는 경험을 했습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그게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제가 보기에 게네사렛 호수가 배 위에서 일어난 이 사건은 불붙는 가시떨기의 호렙산에서 일어난 사건과 비슷합니다. 호렙산의 모세와 게네사렛의 시몬은 동일한 경험을 했습니다. 모세는 신을 벗었으며, 시몬은 엎드렸습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임재라는 사건 앞에서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모세는 호렙산에서 출애굽의 사명을 받았다면, 시몬은 게네사렛에서 사람 낚는 어부의 사명을 받았습니다.
호렙산에서의 표면적인 특징은 불이 붙었지만 타지 않는 가시떨기입니다. 사람들은 그런 신기한 사건에 호기심이 많습니다. 그러나 호렙산 사건에서 가시떨기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연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엘모의 불’ 현상입니다. 이미 모세는 엘모의 불을 보기 이전에 점차적으로 야훼 하나님에게 가까이 가고 있었습니다. 그가 미디안의 양치기로 살면서 거룩한 산이라고 일컬어지는 호렙산에 관심을 보였다는 것 자체가 바로 그 사실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가시떨기는 하나님 경험에 이르는 상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시몬의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가 많이 잡혔다는 사실은 특별히 기적적인 사건은 아닙니다. 그런 것에만 호기심을 보이는 건 바른 신앙의 자세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면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부자가 된다거나 그렇게 교회를 부흥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성서의 가르침과 전혀 다른 것을 말하는 겁니다. 그물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시몬은 이미 예수님의 설교를 통해서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성서는 그걸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지만 행간에서 우리는 그걸 읽을 수 있습니다. 누가가 세 가지 서로 다른 사건을 이렇게 한 곳으로 묶은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가 많이 잡힌 것은 불붙은 가시떨기처럼 시몬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거룩한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된 상징적 사건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 사건은 중요합니다.
버리고 따름
시몬과 몇몇 동료들은 “두려워하지 말라. 너는 이제부터 사람들을 낚을 것이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더 이상 다른 것으로 인생을 소비할 수 없습니다. 더 이상 일상에 머물러 있을 수 없습니다. 그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는 말은 아주 당연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사람들은 모두 이들과 똑같이 일상의 삶을 포기해야만 할까요? 극단적인 소종파나 수도원 영성을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일반적인 교회생활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이런 결단은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모든 삶을 완전히 접는 것만이 예수님을 따르는 유일한 길도 아닙니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목사가 되거나 해외 선교사가 될 수도 있겠지만,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간다면 사회 자체가 붕괴될 것입니다. 사람을 낚을 것이라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는 이 말씀이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단정적으로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여러분 각자의 삶이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다만 하나의 방향만은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구조를 다시 한 번 더 잘 생각해보십시오. 시몬을 비롯한 여러 명의 어부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했을 때 중요한 것은 이들이 두려워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하나님의 거룩함을 경험했다는 사실이다. 그것 없이 버리고 따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 경험이 일차적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많은 신자들은 그 하나님 경험은 내버려 둔 채 성서가 말하는 대로 무언가를 버리려고만 하고, 무조건 따라가려고만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라는 체험이 없이 자기 기분에 따라서, 또는 친구 따라 강남 가듯이, 분위기에 휩쓸려, 체면 때문에, 종교적인 교양을 얻기 위해서 예수님을 따르는 일들이 없지 않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아주 쉽게 시험에 걸립니다. 조금만 어려움이 닥쳐도 흔들리겠지요. 다른 사람에게 섭섭한 말을 들어도 그것 때문에 신앙 자체가 흔들리기도 합니다.
결국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버릴 것인가, 어떻게 따를 것인가 하는 것보다는 하나님 경험입니다. 모세도 그렇고, 시몬 베드로도 그랬습니다. 그들은 고유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의 시몬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리고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가 잡힌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어떤 하나님 경험이 있습니까? 그게 없으면 우리는 결코 예수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아니 따라서도 안 됩니다.
여기까지의 설교를 듣고 여러분은 마음이 조금 혼란할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구체적으로 경험하지 못한 나는 도저히 예수님을 따를 수 없는 사람이구나, 하고 생각할지도 모르겠군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시적 영감을 못 받은 사람이 시인 노릇을 하려면 얼마나 피곤하겠습니까? 하나님 경험 없이 신자 노릇을 하려는 사람도 똑같이 피곤합니다. 그 경험을 구체적으로 알려달라고 말씀하지는 마십시오. 그건 아무도 가르쳐줄 수 없습니다. 아무도 대신 죽어줄 수 없듯이 하나님 경험은 혼자 감당해야 할 몫입니다. 제가 조금은 도와 드릴 수 있습니다. 시몬이 자기 배에서 예수님의 설교를 들었듯이 하나님 말씀인 성서를 조금 깊이 있게 공부하십시오. 그리고 이 세상이 바로 기적적인 사건이라는 것을 깊이 들어다보십시오. 이 세상은 곧 고기가 가득 찬 그물과 같습니다. 말씀과 세계에 자신의 영혼이 접촉하는 과정을 통해서 어느 순간에 여러분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것입니다. 그런 경험이 있으신 분들은 무엇을 버려야 할지, 무엇을 따라야 할지 압니다. 2천 년 전 게네사렛 호수 배위에서 일어났던 시몬의 하나님 경험이 여러분에게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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