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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고난이 필요한가?

고린도후 조용기 목사............... 조회 수 2688 추천 수 0 2010.01.27 13:4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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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고후4:16-18 
설교자 : 조용기 목사 
참고 : 2009. 1. 25. 주일4부 설교 (원로목사님) 
<서론>
“왜 고난이 필요한가?” 이 제목으로 오늘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우리 한국에 옛말에‘입에 쓴 약이 몸에는 좋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약 같은 것 먹어 보면 좋은 약일수록 입에 씁니다. 그러나 입에는 써도 몸에는 병을 치료하고 건강을 가져오는 귀한 약재인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과정에서 당하는 고난은 정말 싫어요. 정말 고난 받기를 좋아하는 사람 누가 있겠습니까? 몸서리칩니다. 고난 안 받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 속사람이 새로워지고 성장하는 데는 꼭 필요한 약이 쓴 고난인 것입니다. 안 자라려면 몰라도 우리가 자라려면 고난이라는 약을 먹어야 성장하는 것입니다. 바울 선생은 고난의 유익에 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16절로 18절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본론>
1. 회개하고 하나님을 찾게 한다
첫째로, 고난은 왜 우리에게 필요하냐면 하나님을 찾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등 따습고 배부르고 평안할 때는 하나님 필요 없어요. 하나님 찾지 않아요. 내 힘으로 내 노력으로 내가 잘산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지만, 고난을 당하게 되면 내가 얼마나 보잘 것 없고 내 힘이 무력하고 나의 힘으로는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저편 언덕으로 가자” 말씀하시고 배를 타고 출발했는데 날씨가 좋고 훈풍이 불고 바다가 잔잔하니까 제자들이 자기들끼리 이야기하는데 심취하여 예수님을 등한히 했습니다. 예수님은 아무하고도 말할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냥 배 한 머리에 가셔서 손으로 베게하고 주무시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점점 날씨가 사나워지고 바람이 불고 파도가 거세어져서 제자들이 배를 바로잡을 수가 없고 그대로 갔다가는 배가 파선하게 되므로 그때야 그들은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좋을 때는 자기들끼리 이야기하고 희희낙락한다고 예수님을 찾지 않다가 배가 풍랑에 부딪히니까 비로소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예수님 어디 계시냐? 예수님 어디 계시냐?” 보니까 예수님은 배 한 머리에 팔을 베게하고 주무시고 계십니다. 다 몰려가서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게 되었나이다.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예수님을 깨워 흔드니까 그때 예수님이 깨어나서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바람이 잠잠하고 바다가 고요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평안할 때는 예수님이 곁에 계셔도 대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도움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풍랑을 만나서 자기 힘으로 인생을 도저히 항해해 갈수 없을 때는 예수님이 어디 계신가. 새벽기도를 나오고 철야기도를 하고 기도원에 가서 금식을 하면서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되었나이다. 우리의 죽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 두나이까?” 간절히 부르짖고 찾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찾으면 주님이 잠을 깨사 우리를 돌보시는 것입니다. 바울과 함께 로마로 가던 알렉산드리아호의 선원과 승객들이 유라굴라롤 만나자 모두 하나님께 돌아온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죄수가 되어서 손이 묶이고 차위에 발이 채여서 승객들과 함께 알렉산드리아호를 타고 로마로 갑니다. 그런데 그들이 가는 도중에 큰 풍랑을 만났습니다. 해와 달과 별이 보이지 않고 파도가 얼마나 거센지 살 희망도 잊어버렸었습니다. 배에 있는 짐을 다 풀어 버리고 배에 기구까지 물에 던져 버리고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배를 내버려 놓은 것입니다. 이것이 하루, 이틀이 아닙니다. 한주일이 지나도 풍랑이 끝나지 아니하고 두주일이 지나도 풍랑이 끝날 것 같지 않습니다. 열 나흘째 될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바울선생에게 계시하여 주셨습니다.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행 27:24~25) 그 풍랑 가운데 아무것도 의지할 수가 없습니다. 이제는 죄수 바울이 그 배의 선장보다 낫게 존경을 받습니다. 군인들도 선원들도 승객들도 하나님과 교통하는 바울의 입만 바라봅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전도하고 예수님이 여러분을 구원하신다고 말해주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그들 가운데서 “여러분이여 이제 평안하고 안심하라. 배에는 아무 사고가 없고 여기에 탄 276명을 다 내게 주셨다고 하셨으니 여러분 중에 한 사람도 죽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안심을 시킨 것입니다. 그 배에 탄 군인들과 승객들이 풍랑이 일어나지 않을 때는 바울을 완전히 죄수로 여기고 눈여겨보지도 않았습니다만 풍랑을 만나니까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바울에게 목숨을 걸고 기댄 것입니다. 그리고 그 풍랑에 바울의 전도를 받아서 276명이 고스란히 예수님을 믿게 된 것입니다. 몸은 풍랑으로 고통을 당하고 화물은 다 잊어 버렸지만은 영원한 영원이 풍랑을 통해서 하나님을 찾게 된 것입니다. 풍랑을 안 만났더라면 그 배에 탄 276명이 예수를 믿을 리가 만무한 것입니다. 그러나 풍랑이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적인 경제위기를 당하니 교회 출석수가 미국과 한국에 모두 크게 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미국과 한국 뿐 아니라 전 세계가 경제적인 부흥을 갖고 콧노래를 부르면서 하나님은 잊어버리고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 세상 자랑을 쫓아 이리 모이고 저리 모이고 떠돌아 다녔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몸 찢고 피를 흘려 우리를 구원해 주셨건만 세상의 물질과 쾌락에 취한 사람들이 주님의 부르심을 듣지 아니하고 귀를 막고 세상을 향해서 나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세계적인 경제 위기를 보낸 것입니다. 이것이 경제적인 풍랑인 것입니다. 미국에서부터 출발해서 온 세계에 풍랑이 대작한 것입니다. 중소기업이 무너지고 대기업도 감원을 하고 조그마한 점포를 하는 사람들은 문을 닫고 직장을 잃고 월급을 받지 못하고 어려움이 태산과 같이 쌓여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을 잊어 버렸으니까 당연히 당할 절망인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주무시게 하고 나자 풍랑이 온 것처럼 오늘날 이 세계는 경제적인 부흥을 구가하며 주님을 잊어 버렸기 때문에 큰 풍랑이 다가온 것입니다. 이제 이 세상의 풍랑에서 살아날 길은 주님을 깨우는 도리밖에 없는 것입니다.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게 되었나이다. 우리를 살려 주소서. 주님을 깨우쳐야 되는 것입니다.
호세아 5장 15절로 6장 1절에 보면 “그들이 그 죄를 뉘우치고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리라 그들이 고난 받을 때에 나를 간절히 구하리라 오라 우리가 야훼께로 돌아가자 야훼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기 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가 죄를 뉘우치고 주님을 구하기까지 하나님은 보좌에 앉아서 얼굴을 가려 버리고 말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난 받을 때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구할 것이니 그때에 주님께서 돌보아 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찢었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여 주실 것입니다. 우리를 주님께서 찢으시는 것은 회개하기 위한 것이요, 치시는 것은 주님께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당하는 이 환난과 고난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게 만드는 기회라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에도 교회마다 꽉꽉 들어찬대요. 앉을 자리가 없대요. 옛날에 하나님을 멀리하던 사람들이 경제적인 풍랑을 만나서 큰 고난을 당하매 사람 힘으로 해결하지 못하니까 천지와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도 교인수가 줄어들더니 요사이는 교인수가 각 교회마다 바짝 늘고, 새벽기도수가 많아지고 철야기도 수가 많아진다고 그럽니다. 기도원 마다 입추의 여지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등한히 하고 세상을 따라 살던 사람들이 이제는 주께로 돌아오자 우리를 찢으셨으나 싸 매여 주실 것이요, 찢었으나 도로 치료해 주실 것이니 하나님께로 돌아가자고 두 손 들고 나오게 된 것입니다.
저는 돌이켜 보면 17살 때 폐병이 안 들렸으면 하나님과는 영영 거리가 멀었을 것입니다. 우리 집안은 예수 믿는 집안이 아니었습니다. 조상 대대로 불교를 믿고 불교에 심취한 집안인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6.25 때 폐병에 걸려 피를 토하고 죽어가면서도 치료받을 약도 없고 병원에 입원한 처지도 못되고 냉방에 드러누워서 죽게 되니까 의지할 곳이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 교회 나가 본적도 없고 설교를 들어본 적도 없지만 하나님은 알고 있으니까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 계시면 나를 살려 주십시오. 그러면 내 평생 주님께 일생을 바쳐서 하나님을 섬기겠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찾은 것이 전도자가 우리 집에 와서 예수를 전도하여서 예수를 믿게 되고 구원을 받고 그리고 하나님이 나를 고쳐 주시고 주의 종이 되어서 50년을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은 그 당시에 쓰디쓴 고난이지만 제가 일생을 뒤돌아 볼 때, 내 일생에 제일 큰 축복이 폐병 걸린 축복인 것입니다. 내가 폐병 걸린 덕분에 아버지, 어머님도 예수 믿고 구원받고 형제들이 다 예수 믿고 구원받게 되고 일가친척들이 예수 믿고 구원받게 되었으니 한 알의 씨앗이 땅에 떨어져 많은 열매를 맺는 것처럼 한 사람이 예수 믿으니까 온 집안이 예수 믿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이 그 당시에는 굉장히 괴롭고 쓸쓸해 보이나 시간이 지나고 하나님을 찾게 되면 고난은 거대한 영광으로 변화되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 34편 17절로 19절에 “의인이 부르짖으매 야훼께서 들으시고 그들의 모든 환난에서 건지셨도다 야훼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중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야훼께서 그의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한 두 고난에서만 건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고난에서 건진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여러분에게 크고 작은 고난이 다가오면 여러분 예수 믿는 의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결국에 여러분을 건지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고난을 통해서 여러분이 하나님을 등한히 했던 것을 회개하고 깨닫고 깨어져서 하나님 앞에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보좌에서 손을 내밀어 여러분 붙들어 주시고 고난이 변하여 영광이 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환난 날에 내가 저와 같이 하여 저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환난에서 그냥 건져주는 것이 아니라 건지고 난 다음에 환난만큼 영광스러움을 허락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2. 회개와 변화를 가져 온다
둘째로, 고난은 회개와 변화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속사람에 무관심하던 사람이 고난을 받으면 속사람이 살아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겉사람 즉, 육신의 삶만 찾아오던 사람이 고난당하면 육신이 아무 힘이 없지 않습니까? 육신의 힘으로 인간의 삶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무력함을 깨닫게 되면 그 다음에는 속사람이 일어나서 하나님을 찾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속사람 즉, 영원의 사람을 간절히 찾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16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겉사람이 낡아져야 속이 새로워지거든요. 겉사람이 건강하고 부귀와 영화와 공명을 다 누릴때는 속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관심도 없습니다. 속이 살든지 죽든지 겉사람만 잘 먹고 잘 입고 잘살면 된다고 쾌락에 빠져서 사는 것입니다. 육신의 정욕을 따라 살고, 안목의 정욕을 따라서 살고, 이 세상 자랑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난이 다가오면 육신이 쇠하여 지는 것입니다. 병들면 건강이 쇠하여 지는 것처럼 가난하게 되면 먹을 것이 없어 육신이 쇠하여 지는 것처럼, 고난을 당하며 가정생활이 쇠하여 지는 것처럼, 눈에 보고 귀로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지는 내 현실 환경이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육신이 의탁할 곳이 없이 쇠약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속사람이 꿈틀거리고 살아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이런 이율배반이지만 육신이 강하면 속사람이 약하고 속사람이 강해지면 육신이 약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바울 선생에게 육신의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어서 그 육신의 삶을 괴롭힌 것입니다. 바울이 세 번이나 그 육신의 가시를 옮겨달라고 하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기를 “바울아! 네가 약할 때 내가 강하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오히려 자기 약한 것을 자랑하노니 하나님의 능력이 자기와 함께 하려 함이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가 약해질 때에 속사람이 강해집니다. 약해질 때 우리가 성경을 읽게 되고 약해질 때 주님께 기도하게 되고 약해질 때 열심히 교회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강할 때는 교회 나오지 않고 친구들하고 놀러 가고 술집에나 가고 혹은 쇼핑을 가고 영화관에 가고 노래방에 가고 그러다가 고난당하면 술집도 쇼핑도 노래방도 다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육체가 고난당해서 가시에 찔리고 약해지면 하나님을 찾아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내 어디 가리까하는 간절한 회개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과 정욕을 좇아가던 사람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뜻을 찾는 데는 고난밖에 더 좋은 일이 없습니다. 고난이 없을 때는 하나님의 뜻을 찾지 않고 자기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내 뜻대로 해주시옵소서. 내가 가고 싶은 대로 따라 오시고 오고 싶은 대로 따라 오소서. 그러다가 고난이 다가오면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주의 뜻대로 하여 주시옵소서. 살든지 죽든지 흥하든지 망하든지 성하든지 쇠하든지 주님을 앙망하오니 주여, 주님 뜻대로 이끌어 달라”는 기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4장 2절에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정욕을 따라 살면 반드시 지옥에 떨어지고 멸망할 것이기 때문에 정욕을 따라 살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기 위해서는 정욕을 죽이는 고난을 보내는 것입니다. 고난이 와서 고통을 줄 때 육신의 정욕이 죽고 속사람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17절의 말씀처럼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환난은 경하게 받는데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에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려 한다. 겨자씨만한 고난이 산(山)만한 영광을 갖다 준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 세상에 해당하는 겨자씨만한 고난은 고난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가져오는 영광은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에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어지는 것이니 얼마나 놀랍습니까? 여러분 보이는 세계만 쫓던 삶이 보이지 않는 영원한 세계를 찾게 되는 것은 바로 고난의 역사로써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고난은 우리를 영광을 이루게 하는 씨앗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불평하고 원망하고 탄식합니다. 고난을 피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고난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찾게 만들어서 큰 영광을 누리게 하는 것입니다. 나중에 천국에 올라가면 얼마나 큰 영광이 다가오겠습니까?
한 선교사 부부가 아프리카에서 평생을 선교사 생활을 하다가 낡은 가방 하나 들고서 남편과 아내가 대서양을 배를 타고 건너오는데 뉴욕항구에 사람들이 줄을 서있고 성악대와 악대들이 와서 팡파레를 부르고 야단입니다. “야~ 우리 아프리카에서 오래 있다가 오니까 환영하는구나!”하고서 내려 보니 아무도 자기들에게는 관심이 없습니다. 누구에게 그렇게 하느냐. 단발 비행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간 비행사가 그들과 같이 배를 타고 왔는데 그 비행사의 내려옴을 환영하기 위해서 뉴욕시민들이 다 동원되고 팡파레를 울리고 환영을 하고 아무도 그들을 환영하는 사람이 없고 맞이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부부는 낡은 호텔에 들어가서 가방을 놓고 둘이 땅에 엎드려서 눈물을 펑펑 쏟았습니다. “주님, 나는 평생을 아프리카에서 보냈는데 아무도 마중도 안 나오는데 린드버그라는 한 청년이 단발비행기를 타고 처음으로 대서양을 건너 유럽에 도착하니까 이렇게 시민들이 동원을 하고 팡파레를 울리고 박수를 치는데 너무나 억울합니다. 너무나 억울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말하기를 “이 사람아! 린드버그는 고향에 돌아왔지만 너는 아직 고향에 안 돌아왔지 않느냐? 아프리카라는 객지에 있다가 미국이라는 객지에 돌아왔지 고향에 안돌아왔지 않느냐? 네가 고향에 돌아올 때는 온 천군천사가 동원되고 하늘의 팡파레가 울릴 것이니 걱정하지 말아라” 그렇게 말씀하시더랍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행인(行人)과 나그네와 같이 객지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나는 환영을 받지 못하고 축복을 받지 못하는 사람일지라도 주를 위하여 고난당한 것은 겨자씨만한 고난을 당하면 지극히 경한 고난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해서 하늘나라의 영광을 찬양과 존귀를 받게 하는 것입니다.

3. 신앙 인격을 성숙케 한다
셋째로, 고난은 신앙 인격을 성숙하게 하는 것입니다.
고난은 잠시지만 결과는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 인격 속에 이루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진주조개를 보시지요. 진주가 아름답지 않습니까? 그 영롱한 빛이 참 귀하고 우유빛깔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러나 진주는 조개 속에 있을 때 조개에게는 크나큰 고난이었습니다. 진주조개 혀 밑에 모래알이 들어가서 살을 갉아 먹습니다. 진주조개가 움직일 때마다 그 모래가 살을 파먹으니까 너무나 아프잖아요? 고통스러우니까 그 모래알을 감싸기 위해서 진주조개가 호르몬을 뿜어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모래알을 둘러쌓고 둘러싸니까 둥글둥글해서 혀가 잘리지 않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래알 때문에 아름다운 진주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모래알이 없으면 진주조개는 없습니다. 오늘날 인공으로 진주 만드는 것도 진주조개를 인공으로 키워서 핀셋으로 모래알 같은 고통스러운 것을 혀에다 넣어 주어서 조개가 진주를 만들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생애 속에 영광의 진주를 만드는 것은 고난이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어떻게 만드느냐? 고난이 오면 기도하게 되거든 기도가 바로 여러분 진주조개를 만드는 재료가 되는 것입니다. 회개하게 만들어 주고, 하나님을 찾게 만들어 주고 말씀을 읽게 되고 하나님을 찬양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누구를 불구하고 평안할 때 기도하지 않습니다. 저도 그래요. 평안하면 기도하지 않아요. 고통스러우면 고통스러울수록 더 주님을 간절히 찾고 더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말씀을 읽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양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영혼의 진주를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7절로 18절에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현재 고난은 비교가 안 됩니다. 경하게 받는 고난이 영광의 지극히 큰 중한 것을 이루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경제적으로 고난당하고 어려움을 당할 때 낙심하지 말 것은 지금 당하는 이 잠시간의 고난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게 하고 회개하게 하고 주님 품에 안기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하게 만드는 영광의 중한 것을 이루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 마음에 오히려 감사하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고난을 당하기 전에는 사람이 깊이가 없고 경박한 삶을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호들갑을 떨고 조금 좋으면 할렐루야~ 조금만 어려우면 어~ 내 죽는다.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 그렇게 호들갑을 떨고 조금 좋으면 뛰고, 조금 나쁘면 울고불고 하는 아주 경박한 인격을 가진 사람도 고난을 당하게 되면 호들갑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깊이 생각하고 오래참고 자기 영혼 속을 살펴보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이 우리로 하여금 신중한 크리스챤이 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인내력이 있는 것이 크리스챤 중에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오래 참는 것, 좋을 때도 너무 좋아하지 말고 나쁠 때도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 말고 항상 마음속에 잔잔한 기쁨과 소망과 사랑을 가지고 있어야 되는 것인데 그것은 고난을 통해서 인내가 생겨지는 것입니다. 운동가들이 이렇게 자꾸 운동에 압박을 주고 고난을 주는 것입니다. 아령을 들고 무거운 역기를 드는 것은 근육을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 근육에 고난을 주면 근육이 점점 강해지는 것입니다. 노인들이 운동을 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서면 다리가 덜덜 떨리고 물건을 잡아도 손이 덜덜 떨리는 것은 운동을 안 하기 때문에 근육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운동이란 다리에도 긴장을 주고 고난을 주고 팔에도 긴장을 주고 고난을 주기 때문에 그것을 이겨내기 위해서 근육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난은 우리의 인격적인 근육인 인내심을 갖다 주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 3절로 4절에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우리의 신앙생활에 인내가 있어야 온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내가 없으면 온전하게 안 되는 것입니다. 좀 잘살게 되면 십일조도 낼 필요 없다. 교회도 나갈 필요 없다. 좀 못살게 되면 아휴 살아야지. 그래서 십일조도 내고 교회도 나가고 이렇게 변화무쌍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끊임없이 좋을 때나 궂을 때나, 날이 좋을 때나 맑을 때나, 궂을 때나 비올 때나 변함이 없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변함없는 사람을 기뻐하시고 즐거워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당하는 여러 가지 시련을 온전히 기쁘게 여길 것은 시련이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온전한 상을 받을 수 있는 인내를 만들어 내기 때문인 것입니다. 환난은 인내를 만들고 인내는 연단을 만들고 연단은 소망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으로 살던 삶이 고난당할 때 이웃 사람을 위하여 헌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고난당하므로 고난당하는 사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 속담에 과부가 과부 사정 안다고 과부가 안 되보면 과부의 외로움과 고통스러움을 모르는 것입니다. 자기가 병들어봐야 병든 사람들의 고통과 괴로움과 슬픔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제게 말해요. “왜 꾸준히 병자 위해서 기도 하느냐?” 제가 말합니다. “나는 폐병에 걸려서 고통을 당하고 그 이후에도 육신이 연약하므로 수없이 고통당하고 괴로움을 당했기 때문에 병자의 사정을 안다. 병이 들면 얼마나 고통스럽고 괴롭고 슬픈지 말로 다할 수 없다.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어야 될것이 아니냐.” 마귀는 종종 와서 나보고 말합니다. “야 이 사람아, 네 믿음도 시원찮은 놈이 누구를 위해서 기도한다고 야단이냐? 너 기도해봤자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네 기도는 안 들어준다.” 그럴 때마다 내가 본 장면이 기억이 나는데 장애인의 집에 가니까 전신장애가 된 사람이 엎드려서 수족을 못 쓰고 고개만 까닥까닥하는데 또 반신장애가 된 장애인이 손을 덜덜 떨면서 밥을 떠먹이는 것입니다. 나는 그 장면을 보고 감동을 느꼈습니다. 자기도 장애인이 되어서 하체 마비가 되어서 팔을 잘 못쓰면서 전신 마비가 된 사람을 밥을 떠먹이는 것을 보고 “어, 장애인도 장애인을 도울 수 있구나.” 그것을 보고 난 다음 마귀가 와서 “어휴 너 같은 서투른 믿음으로 누구를 위해서 기도 하냐?”고 하면 “야! 장애인도 장애인을 돕더라. 내가 믿음이 장애인이라도 나보다 못한 장애인이 나에게 도움을 받으러 오면 내가 도와줄 것은 마땅한 일이 아니냐!” 여러분도 그렇게 말하십시오. 마귀가 와서 “너 같은 믿음으로 뭘 하느냐? 네가 무슨 구역장이냐? 네가 무슨 지역장이냐? 네가 무슨 전도를 하느냐? 아이구 웃긴다. 웃겨. 너나 잘 믿어라.” 그러면 마귀에게 “장애인도 장애인을 돕더라. 내가 믿음이 장애인이라도 나보다 못한 장애인을 도울 권리가 있고 의무가 있다.” 자기가 장애인이 되어봐야 다른 사람의 장애가 얼마나 슬프고 고달픈 것을 알고 도우려고 하는 것처럼 고난을 받아봐야 고난당하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함께 고난을 걸머져 주려고 동정을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 35절로 36절에 주님께서 나중에 구원받은 사람들을 향해서 말하기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의인들이 말했습니다. “주님! 언제 주린 주님을 먹게 했으며 목마를 때 마시게 했으며 언제 주님이 나그네 되었을 때 내가 영접했고 헐벗었을 때 옷을 입히고 병들었을 때 돌보아 주었나이까?” “네 이웃에 있는 지극히 적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 이웃에 고통당하는 사람하고 고통을 나누고 함께 도와주는 것이 예수님을 도와주는 것과 같다고 주님이 상급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고난당하면 이웃의 고난에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주려봐야 배고픈 사람의 사정을 알고 배고픈 사람을 도와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목마를 때야 남에게 물 한 그릇이라도 나누려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 집 없이 방황하는 사람들의 슬픈 사연을 알고 도와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헐벗었을 때 옷이 없어 벌벌 떠는 사람을 이해하게 되고 그들에게 옷을 나누어 입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병들어봐야 남의 병든 사람을 알고 병상에 찾아가서 위로하고 격려하고 힘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중심으로 살던 삶이 이웃과 고난당하는 사람을 위하여 헌신하게 되는 것은 우리도 고난 당해봐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난이 있어야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두움이 있어야 빛이 얼마나 좋은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풍랑이 있어야 조용한 바다가 얼마나 좋은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폭풍우가 있어야 조용한 날이 얼마나 좋은 것을 알 수 있는 것처럼 고난이 있어야 하나님이 창창한 축복을 주시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29장 12절로 13절에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고난을 당해서 기도하고 부르짖어야 되는 것입니다. 평안할 때는 하나님을 체험하지 못하지요. 왜, 부르짖을 것이 없으니까. 병이 달아봐야 병 고치는 하나님을 체험하고 배가 고파봐야 먹을 것을 주시는 하나님을 체험하고 슬퍼봐야 기쁨을 주는 하나님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언제나 역설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귀가 와서 우리를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일을 해봐야 주님이 오시면 생명을 주되 풍성히 주는 것을 깨달아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험과 환난을 통해야 되는 것입니다. 주의 종이 되기 위해서는 많은 시련과 환난을 하나님이 통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여러 면에서 체험하고 난 다음에 체험에 입각한 확실한 신념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여러 가지 시험과 환난이 다가오는 것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체험하게 만들려고 그리 하는 것입니다. 머릿속의 하나님이 아니라 온몸과 삶으로 하나님을 체험한 여러분이 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5장 10절에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고난을 당해봐야 우리를 온전하게 하시고 굳건하게 하시고 강하게 하시고 견고하게 하시는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4. 새로운 축복을 받기 위한 준비 과정이다
넷째로, 고난은 새로운 축복을 받기 위한 준비과정인 것입니다.
그릇이 있어야 무엇을 담을 수 있습니다. 고난이 우리를 큰 그릇으로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고난 받기 전에는 그릇이 조그만합니다. 그러나 이 그릇을 깨뜨려서 늘려야 큰 복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축복받기 전에 고난이 와야 우리 그릇을 크게 만들어 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욥기 23장 10절에 “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단련을 하시고 난 다음에 내가 순금과 같이 되어 나온다. 지금은 돌멩이 같지만 단련을 받으면 순금이 되어 나오겠다고 욥은 말한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2장 21절에 “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귀히 쓰는 그릇이 되기 위해서는 고난을 통해서 그릇의 먼지와 티끌을 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이 여러분과 나를 키워서 큰 믿음의 그릇이 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환난이나 곤고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기근이나 칼이랴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넉넉히 이길 수 있는 신앙의 그릇이 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고난이 없으면 자기 고집대로 살고 대통 좁은 생각을 하고 말을 하지만 고난을 통해서 자란 사람 변화된 사람은 마음이 넓고 넉넉하고 이웃을 용납하고 용인할 수 있는 마음의 도량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은 축복을 받을 때 축복의 귀한 것을 알고 올바르게 쓰도록 하는 것입니다. 고생을 많이 하고 돈을 번 사람은 돈 벌줄 알아도 쓸 줄은 몰라요. 아까워서.. 고생을 하고 돈을 번 사람이 절약할 줄 아는데 부모에게 큰 상속을 받아서 어릴 때부터 조금도 고생 안하고 돈을 번 사람은 돈의 귀한 것을 모릅니다. 돈을 허랑방탕하게 쓰고 나중에 빈 손들게 될 일이 많은 것입니다. 고난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은총과 축복을 고맙게 생각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신명기 8장 15절로 16절 우리가 다 같이 읽어 보십시다.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단단한 반석에서 물을 내셨으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고난의 끝은 하나님의 축복인 것입니다. 시험과 환난과 고난을 당하게 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낮추시고 시험하사 마침내 복을 주려고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화를 주려고 여러분에게 고난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의 그릇을 키우고 겸손하게 만들고 하나님의 축복의 귀한 것을 깨달아 알도록 만들어 놓고 난 다음 마침내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당할 때 하늘을 바라보고 복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을 기대해야 되는 것입니다. 고난 받기 전에는 하나님을 두려워 안하다가 고난을 받으면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린 아기들을 너무 오냐오냐 하면은 할아버지도 수염도 뽑아간다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엄할 때는 엄하게 해야 질서가 서지요. 너무 좋기만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 교육하는 것도 무엇이든지 자녀 원하는 대로 하면 자녀를 망나니로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할 때는 뜨겁게 사랑하지만 잘못했을 때는 엄하게 종아리도 때리고 꾸짖어야 되는 것입니다. 부모를 사랑하고 공경할 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두려워할 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시편 119편 67절 다 같이 읽어 보십시다.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보십시오.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 마음대로 살았어요. 그릇 행하였어요. 방종했어요. 그러나 고난당하고 난 다음에는 “어이구~ 두렵다. 또 얻어맞을라.” 정신을 차리고 주의 법을 지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당하는 것이 유익입니다.
시편 119편 71절도 또 다 같이 읽어 보십시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고난이 우리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고난이 와서 우리는 하나님의 법을 배우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존경하게 되고 하나님을 감사하게 되고 하나님의 은총을 귀하게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고난은 우리에게 훌륭한 교육을 주기 위해서 우리에게 오는 것입니다.

<결론>
고난 받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어요. 제가 이 설교를 하지만 솔직히 고난 안 받으면 좋겠습니다. 아무도 고난 받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좋은 아버지신 것입니다. 영원한 영광을 주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인 것입니다. 하늘나라에서 더 큰 영광을 얻기 위해서는 우리를 변화시켜야 되는 것입니다. 고난을 사용하지 않고는 변화가 안 되는 것입니다. 천국에 올라간다고 다 좋은데 올라가는 것은 아닙니다. 천국에도 여러분 주님께 가까이 있고 멀리 있는 등급이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 더 가까이 가서 더 큰 영광을 누리기를 하나님은 원하시기 때문에 고난을 통해서 우리를 교육시키고 단련시키고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으로 만드시기 위해서 반드시 물과 불을 통하게 하십니다. 명품의 그릇은 수천도의 가마에서 구워야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고난과 환난의 불가마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질그릇도 좋은 질그릇은 큰 불가마에 구워야 되는 것처럼 고난의 가마에 굽지 않고 우리가 하나님이 쓰는 아름다운 그릇이 될 수가 없습니다.
마르틴 루터 종교 개혁가는 “고난은 축복을 갖다 주는 지름길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축복을 갖다주는 지름길이다. 일본의 유명한 크리스챤인 하천풍언(賀川豊彦, 가가와 도요히꼬)은 “하나님 앞에 진실 되게 살려고 하는 이는 고통을 보석으로 삼는다.”진실로 살려고 하는 사람은 고통이 나쁜 쓰레기로 생각하지 않고 보석으로 삼는다고 말한 것입니다. 시세로라는 고대 로마의 정치가는 “고난이 크면 클수록 그 영광도 크다.”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당하면 하나님은 고난과 동등 이상의 축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미국의 신학자 비쳐는 “고난은 하나님의 심부름이다. 어려움이 우리에게 찾아 왔을 때,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물로서 하나님의 신임의 증거라고 간주해야 된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고 신임하기 때문에 어려움을 주어서 나를 더 빛나게 만들어 주시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고난이 다가올 때 우리는 중도에서 믿음을 포기하고 낙심하고 뒤로 물러가고 원망하고 탄식하고 깨어져서는 안됩니다. 끝까지 주님을 바라보고 영광의 귀한 것이 다가올 것을 기대하고 믿음으로 견뎌야 되는 것입니다. 하루도 견디고 이틀도 견디고 사흘도 견뎌야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닮아야 되는 것입니다. 85세에 아들 달라고 기도하는데 하나님이 아들을 주겠다고 하셨는데 아들을 주신 것이 아니라 무려 15년 동안 고난만 다가왔던 것입니다. 85세에 주겠다던 아들을 90세에도 안주고 95세에도 안주고 100살이 되어서 이제 희망이 없을 때 그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사라를 통해서 아들을 주었으니 이삭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시간이 오래 걸리면 더 큰 복을 주시기 위해서 준비하는 것입니다. 조그만 고난이 재깍 응답이 오면 그것은 선물도 적은 선물일 것입니다. 큼직한 선물을 주려면 고난이 오래 끌고 지긋지긋하고 몸서리가 난다 할 정도로 하나님이 우리를 연단하셔서 아주 질기고 건강하고 튼튼한 신앙의 인격을 만들어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 세계 뿐 아니라 한국에 오늘날 경제적인 큰 유라굴로의 풍랑이 다가와서 개인 가계나 생활이 굉장히 어렵습니다. 이 어려움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찾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돌이켜 하나님을 찾고 우리 죄를 회개하고 주님을 마음속에 받아들이며 우리 인격이 변화되어 내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이 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우리들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 기간을 우리가 인내와 믿음으로 견뎌내면 다음에는 이 환난과 고난 이상 큰 축복이 우리 개인, 가정, 생활, 자녀, 사회, 국가에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은 혼자 왔다가 혼자 지나가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고난은 축복을 등에 걸머지고 와서 먼저 들어오나 나중에 축복을 불어 넣고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 받는 사람은 오히려 고난을 기쁘게 여기고 환영하시기 바랍니다. 원망, 불평, 탄식하지 말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기도드리겠습니다.

<기도>
전능하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고난을 보낸 것은 우리를 변화시켜 하나님의 백성으로 훌륭한 인격자가 되기 위해서 돌보신다는 것을 알고 깨달았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여, 고난이 좋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고난이 자기를 죽이러 온 것이 아니라 자기를 변화시켜서 하나님의 중한 것을 이루려고 왔다는 것을 알고 고난을 쫓아내지 말고 받아 들여서 변화시키기 도와주시옵소서. 하나님의 기적이 고난을 찾는 모든 성도들에게 나타날 것을 믿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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