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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27:57∼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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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우제돈 목사 |
참고 : | 상원교회 |
누구든지 시신을 만지는 일과 초상집에 가는 일은 과히 반갑지 않은 일입니다. 해서 궂은 일이라고 합니다. 같은 음식이라도 잔치집 음식은 맛있는데 초상집 음식은 그다지 맛있게 드실 수 없습니다. 웬만하면 먹고 왔다고 하고 요즘 밥맛이 없어서라고 사양을 합니다. 궂은 집, 궂은 일에 식탁을 대하자니 마음에 얼른 내키지 않아서입니다. 그런데 제자도 아닌 어떤 사람이, 자기가 들어가 쉬려고 준비한 새 무덤을 주님에게 제공했습니다. 주를 모신 이 사람은 아리마대 사람으로, 산헤드린 공회원인 ‘아리마대 요셉’입니다.
유대 풍속에 보면 십자가 처형은 시신을 해지기 전에 얼른 치워 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로마 풍속에는 얼른 치우지 않고 처형된 죄수의 시신을 그냥 둡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쳐다보고 ‘아이구, 무서워라. 죄를 지으면 저렇게 되는구나’하는 교훈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 까마귀가 와서 눈을 파먹고 살이 썩어 구더기가 득실거려도 그냥 놔두는 것입니다.
어렸을 적 우리 고향에는 밤에 빨갱이들이 잘 내려왔습니다. 양민을 학살하고 양곡을 약탈해 가고 방화를 했습니다. 한번은 빨갱이들을 잡았습니다. 구정 전인데, 12명쯤 되었습니다. 12명 모두의 목을 잘라 그 머리만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경찰서 앞 광장의 빨간 벽돌 위에 전부 올려놓았습니다. 너무너무 무서워서 꿈에도 나타나고 밥맛도 없고 구역질이 났습니다. 그 후로는 공산당과 내통한다든지, 빨갱이 부역을 한다든지, 그들의 하수인 노릇을 한다든지 하면 저렇게 무서운 형벌을 받는구나 하고 사지를 떨게 되었습니다.
로마 시대에도 일반인에게 본을 보이기 위해 죄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채로 그냥 두었던 것입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에 처형되어 며칠 아니 몇 달이라도 그대로 십자가 나무형틀에 못 박힌 채 썩고 있을 지경이었습니다.
이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공회 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공회의 결의와 행사가 같지 아니하다고 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를 우리나라 국회라고 생각해 봅시다. 산헤드린 공회에 안건이 상정되었을 때 다른 사람들은 모두 다 허락하고 처형하기로 의견을 모았지만, 이 아리마데 요셉은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허락이오’하지 않고 ‘아니오’라고 했습니다. 그는 신앙의 지조와 절개가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4공과 5공 시절에 고위층에서 통과시키라고 하면 분위기를 봐서 통과시켜 주어야 하는데 혼자만 ‘아니오’하면 그 사람은 배척을 받았습니다. ‘아니오’했으니 어찌 그 자리에 남아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법복을 벗어버리고 야인으로 초야에 묻혀 생활하다가 주민들이 그를 존경하여 추대하니 국회에 다시 등정을 하게 되는 일을 종종 보았습니다. 전에 유신 헌법이 통과되었을 때도 그런 건수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공회에 부표를 던져 놓고서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된 후에 빌라도에게 찾아가 ‘그 시신을 주시오’하고 당돌하게 요구했습니다. 신앙의 용기가 아니면 감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당당하게 가서 시신을 요구해 자기의 새로 판 무덤에 모셨습니다. 더욱이 빌라도는 순순히 ‘주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보면 이 아리마대 요셉이 그 당시 얼마나 덕망을 쌓고 인덕을 끼치며 살았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신앙 생활은 덕이 있어야 됩니다. 어떤 이들을 보면 예수는 참 잘 믿는 것 같습니다. 전도도 잘 하고 기도, 찬송, 헌금도 잘 하고 성수주일도 잘 하고 교회 일도 잘 하긴 하는데, 덕이 좀 부족합니다. 우리 모두가 다 그렇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이 아리마대 요셉에게서 덕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정치는 남을 밟고 묵살시키고 모함해서 그 위에 올라서야만 되는 것이 생리입니다. 그런 속에서도 아리마대 요셉은 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예수를 지식으로 믿지 말고 덕으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덕이 있는 사람은 가정 생활이 온화하고 형제간에 우애하며 친구간에 사이가 좋습니다.
이 아리마대 요셉에 대하여 성경은 ‘그도 예수의 제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제자를 12명으로 알고 있습니다. 가롯 유다가 죽고 난 후 맛디아가 선택받아 12제자 중의 한 사람으로 되었습니다.
그런데 12명 이외에 이 아리마대 사람 요셉도 그의 제자라 하며 신분을 올렸습니다.
‘그도 예수의 제자라’할 때는, 예수의 제자라고 하는 지위를 상당히 격상해 존경받는 위치에 두고 이르는 말입니다. 가령 ‘그도 예수의 제자냐?’고 말할 때에는 예수의 제자다운 품격이 없는 사람을 이를 때"아니, 그 사람도 예수의 제자야?"하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그러나 ‘그도 예수의 제자라’, 이렇게 표현하는 말에는 그의 성품이나 하는 일, 그리고 그의 대인 관계가 예수의 제자다움을 표현하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구약의 사울 왕은 다윗을 죽이기 위해 점장이를 찾아가서 묘안을 얻으려 했습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이 입신을 하여 옷을 홀랑 벗고 예언을 하고 춤도 추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사울도 선지자 가운데 있느냐?"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선지자적 품격이 떨어진다는 말입니다. 자기가 왕이면 왕이지 선지자인 것처럼 예언을 하느냐 하는 뜻으로 한 말로서, 선지자 자격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도 예수의 제자라’하는 이 말을 우리에게 적용시켜 봅시다.
‘그 사람도 예수님의 집사야’,‘우리 교회에 적을 둔 예수님 장로야’,‘아, 그분이 우리 교회 권찰이야’,‘그분이 성가 대원이래’,‘그분이 예수님의 교사래’,‘그분이 예수님의 직분을 받은 목사래’,‘상원 교회 권사래’,‘그래! 어쩐지 좀 다르더라.’
이런 분위기와 이런 대우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지,
‘그래 가지고 집사야?’‘아니, 그 사람이 목사라고?’‘그런 사람이 장로라니, 기가 막혀서.’
어느 한 사람이라도 이렇게 어투가 미심쩍게 나간다면 예수님의 입장을 곤란하게 만듭니다.
용산 역 지나서 서부이촌동 한강변에 가 보면 ‘새남터’라고 하는 천주교 신자들의 순교사지가 있습니다. 김대건 신부가 거기서 참수 당했습니다. 그때 이 나라의 분위기는 대단했습니다. 천주교도들을 공개적으로 참수하면 이 일로 인해 천주교인들이 들고일어나 나라가 혼란에 빠질지도 모른다고 해서, 참수터에 대한 경비 또한 대단했었습니다. 그러니 쉬쉬하면서 죽이고 경비를 삼엄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포졸 가운데 한 사람이 김대건 신부의 잘려진 머리는 그대로 두고 몸뚱이를 가마니에 둘둘 말아서 행상처럼 가장하고 야반도주를 해 경기도 용인까지 내려갔습니다. 제가 김대건 신부의 묘지를 가 보았더니 산세가 험악하고 분지처럼 금방 드러나 보이지 않는 곳이었는데, 거기다 파묻었습니다.
예로부터‘생거진천 사후용인’이라 했는데, 이 말은‘살기로는 진천이 좋고 묻히기는 용인이 좋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포졸의 고향이 바로 그 동네였습니다. 김대건 신부의 목 없는 몸뚱아리를 가지고 갔으니 포졸 노릇도 못하게 되었으므로, 거기서 신부의 무덤을 지키다가 자기도 그 무덤 옆에 묻혔습니다. 그러나 그 후, 그 포졸의 자손들은 큰 축복을 받았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보통 좋은 일에는 서로 공을 나타내려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그러나 어려운 일에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선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자기 일도 아닌 경우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극악무도한 이들에 의해 십자가에 처형이 되었고,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져 버렸습니다. 그런 판국에 아리마대 요셉이 지난 번 의회 때도 부표를 던지더니 또 당당하게 "그 시신을 주십시오" 했습니다. 그랬더니 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어 주라"고 합니다.
그러면 아리마대 요셉이 그렇게 결심하고 그것을 실행에 옮길 때, 오로지 혼자 했을까요? 아마 아닐 겁니다. 첫째, 제일 가까운 그 부인이 동의를 했을 것입니다. 만약 부인이 안 된다고 했으면 그것은 가능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신앙에서도 부부 일심동체였던 것입니다.
사전에 충분히 이야기하고 피눈물을 흘리며 기도했으니, 집안 식구들은 물론 어쩌면 일부 주민들까지 동의를 했을 것입니다. 집안 식구들은 물론 일부 주민들까지 동의를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과 함께 예수님의 시신을 정성스레 모여서 깨끗한 세마포로 정성껏 싸고, 자기가 쓰려고 마련했던 새 바위 속 무덤에 안장을 했습니다. 잠언에 보면 "잔칫집보다 지혜로운 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간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궂은 일을 도와주는 것은 참 좋은 일입니다.
여러분,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의 마지막 모습을 잘 처리하는 것을 보고 우리도 좀 교훈을 받읍시다. 성경에는 요셉이란 사람이 둘 있는데,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은 예수님이 처음 태어났을 때 양육하고 보호해 준 사람이요, 또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돌아가셨을 때 시신을 잘 수습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 보면 이 요셉은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이 믿음이 요셉으로 하여금 위대한 일을 하게 한 것 같습니다. 이 아리마대 요셉은 조금 전에 말한 바와 같이 그 후 ‘그도 예수의 제자라’하고 인정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웃에 어려운 일이 있을 때는 발벗고 나서서 도와줍시다.
당장 대가를 바라지 맙시다. 그러나 10년 후, 20년 후, 수십 년 후에 저도 모르는 사이에 결실의 열매가 주렁주렁 맺히게 됩니다.
빌립보서 1장에 보면, 바울이 빌립을 가리켜 ‘저는 내 심복이라’했습니다. 이 심복이라고 일컬음을 받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사도행전 13장 22절에 보면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하는 말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쏙 드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세상의 많은 지위와 그럴 듯한 어떤 직함을 써서 갖고 다니는 것도 좋지만, 제일 좋은 직함은 바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저는 내 심복이라’, ‘그도 예수의 제자라’하는 이 칭호입니다. 이와 같이 주님의 인정을 받는 우리 상원 교회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오늘 종려주일을 즈음해서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199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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