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눅14:7-11 |
---|---|
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39275 |
2007.09.09.
바리새인 집에서
오늘 본문인 예수님의 비유는 너무나 간단하고 분명해서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바리새인의 집에 모인 사람들이 서로 윗자리를 차지하려는 것을 보고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혼인 잔치에 초대받아 가게 되는 경우에 윗자리에 앉지 말라고 말입니다. 자기가 잘난 것처럼 윗자리에 앉았다가 주인이 와서 그 자리를 비켜달라고 하면 그 수모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초대를 받으면 아예 끝자리에 앉는 게 좋습니다. 주인이 와서 끝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을 윗자리로 올려준다면 그것이야말로 명예로운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은 이 말씀을 어떻게 읽으셨나요? 사람이 겸손해야 한다는 말씀으로 읽으셨는지요. 공연히 잘난 척하다가는 큰코다치는 수가 있으니까 조심하라는 말씀으로 읽으셨는지요. 옳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겸손이라는 특징이 있습니다. 우리 모든 기독교인들이 겸손하게 자세를 낮출 줄 안다면 한국사회에서 기독교의 위상이 완전히 달라지겠지요.
그런데요. 실제 삶에서 우리가 낮은 끝자리에 앉는다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서로 윗자리를 떡하니 차지하려고 했던 것처럼 우리도 늘 그런 식으로 살아갑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보다 조금 못하게 평가받으면 견디지 못합니다. 정치권에서는 노골적으로 남을 깎아내리고 자기를 치켜세웁니다. 직장에서도 자신보다 못한 사람이 자신보다 조금이라고 윗자리에 올라가면 사람들이 속상해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현실에서는 아무도 낮은 자리에 앉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기독교인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교회에서도 실제로 자기를 낮추는 사람들은 별로 없습니다. 조금이라도 높은 자리로 올라가려는 일들이 벌어집니다. 그런 심리가 아마 집사, 서리집사, 권사, 장로 등등, 여러 단계의 교직제도로 나타나는 게 아닐는지요.
“나야말로 겸손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자기는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모임에서나 낮은 자리에 앉는다고 말입니다. 그렇게 살아간다면 칭찬받을 만한 일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살아가려고 노력해야겠지요. 그렇지만 그 사람이 실제로 겸손한 게 아니라 겉모양으로만 겸손한 척할 수 있습니다. 말은 “제가 부족합니다.” 하지만 속으로는 “나는 썩 괜찮을 사람입니다.” 하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가 보기에 속과 겉이 아무런 차이가 없이 겸손한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우리는 나름으로 상식과 교양으로 그런 겸손한 무늬를 만들어갈 뿐입니다. 물론 저도 똑같습니다. 다른 사람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겸손한 사람만 있을 뿐입니다. 그것은 상대적인 것이지 절대적인 것은 아닙니다. 그런 상대적인 겸손은 어느 순간에 폭발해서 오히려 교만으로 나타날 때도 많습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을 잘 보십시오. 눅 14:1절에 따르면 예수님이 안식일에 바리새인 중에서 지도자급에 속하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셨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거기 모인 사람들 중에 수종병이 든 사람이 있었습니다.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 건 율법을 어기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일을 자주 행하셨기 때문에 이번에도 또 안식일 법을 어기는지 감시하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서 안식일이라 하더라도 자기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졌으면 당장 건져내야 하지 않느냐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분위기가 썰렁했다는 뜻입니다. 바리새인과 예수님 사이에 무언가 신앙의 본질에서 충돌이 시작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을 중심으로 한 유대인들은 어떤 모임에서나 서열에 따라서 자리의 순서가 정해집니다. 종교적인 권위나 연배에 따라서 달라졌겠지요. 그런 순서는 단순히 자리에만 해당된다기보다는 사회 전체 질서를 가리킵니다. 문명이 발달할수록 사람의 서열이 강조되는 것 같습니다. 이등병에서 장군에 이르기까지 피라미드식으로 위계를 갖춘 군대처럼 사회가 늘 이런 위계질서로 움직입니다. 좋은 대학에 가려는 것도 역시 이런 위계사회에서 좋은 입지를 확보하기 위한 시도입니다. 이런 데서 자유로운 사람은 별로 없을 겁니다. 예술가들이나 시인, 또는 종교인들이 사회조직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사람들이기는 하지만 그들도 또 나름으로 그런 위계 조직에 얽매어 있습니다. 현재는 낮은 자리이지만 조금 참고 노력하면 윗자리로 올라갈 수 있다는 꿈과 야망을 안고 살아가는 게 바로 오늘 우리의 삶입니다. 개인에 따라서 그 강도에 차이가 있긴 하지만 큰 틀에서는 다를 게 없습니다.
왜 사람은 낮은 자리에 앉기 힘든 걸까요? 왜 윗자리로 올라가려고만 할까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대 문명이 병든 탓인가요, 아니면 우리 인간의 본질이 그렇기 때문인가요? 양쪽 이유가 다 있겠지요. 문명은 접어두고, 인간 본질이라는 차원만 본다 하더라도 이건 분명합니다. 창세기 4장에 하나님이 동생 아벨의 제사만 받으시고 자신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다는 이유로 화가 난 카인이 동생을 돌로 찍어 죽인 사건이 나옵니다. 이게 성서가 말하는 인간의 본질입니다. 카인은 화가 났다고 합니다. 그 화로 인해서 살인죄 중에서도 가장 무거운 근친살인을 저질렀습니다. 자기의 자리에 동생이 앉은 것 때문에 그런 일을 저지르는 존재가 바로 인간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런 인간의 본성이 특히 경쟁 중심의 현대문명으로 인해서 더 노골화된 세상에서 살아갑니다. 그게 우리의 사실적인 모습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예 우리에게 전혀 다른 삶을 요구하십니다. 윗자리에 앉을 생각을 하지 말고 끝자리에 앉도록 하라고 말입니다. 이처럼 신앙적인 요구는 우리의 현실과 대립합니다. 그래서 신자들은 이런 예수님의 요구를 모른 척하든지 아니면 위선적인 겸손으로 빠져듭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 끝자리에 앉으라고 했지만 그건 그렇게 사는 게 좋다는 뜻이지 실제로 그렇게 하라는 말씀은 아니라고 자기를 합리화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억지로 낮은 자리에 앉아보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속마음으로는 전혀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은 우리 기독교인들을 곤란한 입장에 빠Em리는 말씀일까요?
겸손을 떨어라?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자기를 낮추고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치려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모범적인 삶이나 세상살이의 요령을 가르치신 분이 아닙니다. 그런 것을 가르치신 분은 공자입니다. 공자님은 좋은 뜻으로 사람들에게 처세술을 가르쳤습니다. 바르게 살아가야 할 기준들을 제공했습니다. 유대 랍비들의 전통에도 그런 가르침이 많습니다. 구약의 잠언은 모두 삶의 지혜들입니다. 그래서 신학계에서는 오늘 본문 말씀도 이런 잠언의 영향을 받은 게 아닌가 하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입니다. 예수님이 삶의 지혜와 도덕, 윤리에 대해서 전혀 무관심한 것은 아니지만 지금 그것을 말씀하는 게 아닙니다. 사람을 조금씩 다듬고 길들여서 괜찮은 사람, 교양이 넘치고 겸손한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 이런 말씀을 하는 게 아닙니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조금 더 냉정하게 생각하면, 이 세상에서 낮은 자리에 앉아서 겸손하게 살아간다고 해서 윗자리로 올라가는 건 아닙니다. 기독교인들 중에서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이 사회의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서 전략적으로 낮은 자리에 앉습니다. 그런 방식으로 사회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경우가 없지는 않겠지만 그런 일들이 기계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요즘처럼 경쟁력만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시대에서 낮은 자리에 앉는 사람은 오히려 무시당하기 좋습니다. 이런 점에서도 오늘의 본문이 단순히 겸손에 대한 도덕적인 가르침이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여기서 말씀하시는 핵심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관심은 하나님입니다. 곧 하나님의 나라이며,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본문 말씀을 다시 보십시오. 오늘 비유 이야기에는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과 주인이 나옵니다. 상황이 두 가지로 나뉩니다. 하나는 초대받은 사람이 윗자리에 앉았다가 아랫자리로 밀려나는 경우와 끝자리에 앉았다가 윗자리로 올라가는 경우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인의 행동에 주목해야 합니다. 주인은 윗자리의 사람을 아래로 끌어내리고 끝자리의 사람을 윗자리로 올렸습니다. 이 주인의 행동이 곧 하나님의 행동에 대한 비유입니다. 포도원 주인의 비유라든지 왕의 잔치 비유에서 보듯이 예수님의 이런 비유에서 중심은 주인입니다. 그 모든 상황은 주인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포도원 주인의 비유에서는 한 시간 일한 사람이나 열 시간 일한 사람이 모두 한 데나리온 씩 받았습니다. 그게 바로 포도원 주인의 뜻이었습니다. 왕의 잔치 비유에서는 원래 초청받았던 사람들이 핑계를 대고 초청을 거부하자 길거리에 지나가던 사람들을 잔치에 강제적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주인은 자리를 마음대로 옮기는 분으로 등장합니다. 이 비유의 결론인 11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 이 말씀이 가리키는 것은 윗자리와 낮은 자리를 판단하는 분은 주인, 즉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겸손과 교만, 낮은 자리와 높은 자리를 판단하시는 분은 오직 한분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누가 실제로 겸손한 사람이고 교만한 사람인지 판단할 수 없습니다. 앞에서 말한 대로 겉으로 드러난 것으로 약간 구별할 수는 있겠지요. 말할 때마다 허풍이 심하다거나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않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입니다. 거꾸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알고 실제로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입니다. 일반적으로 돈과 권력이 큰 사람은 교만하고, 그게 없는 사람은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이라는 게 늘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아무 것도 자랑할 게 없는 사람인데도 아주 교만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거꾸로 남에게 자랑할 게 많은 사람인데도 겸손한 사람이 있긴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모두 겉모습에 불과합니다. 누가 그 깊은 속을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하나님만이 판단하신다고 말합니다. 옳습니다. 하나님만이 낮은 자리에 앉은 겸손한 사람과 윗자리에 앉은 교만한 사람을 구별하고 판단하실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자리
이 말은 구체적으로 무슨 의미일까요? 그것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전권을 가리킵니다. 그분에게만 진리가 놓여 있다는 뜻입니다. 오늘 주제와 연결해서 설명한다면 그 말은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낮은 자리와 윗자리의 기준이라는 게 무의미하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이 세상살이에서 사장은 윗자리이고 수위는 끝자리입니다. 연봉을 10억 받는 CEO는 윗자리이고 2천만 원 받는 중소기업 노동자는 끝자리입니다. 요즘 우리나라가 천천히 대선 열기가 고조되고 있는데, 대통령은 윗자리이고 2천 평 논농사를 짓는 농부는 끝자리입니다. 이런 걸 열거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겠지요. 이게 우리의 일반적인 가치판단입니다. 이런 고정관념을 우리가 넘어서지 못하면 결국 하나님만이 우리를 판단하신다는 말씀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이런 고정관념에 완전히 반대되는 사건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이 세상에서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가장 낮은 끝자리입니다. 오죽 했으면 예수님조차도 그 길을 피하고 싶어 하셨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리인 십자가에서 우리와 온 인류와 우주 전체의 구원이 일어났다는 이 사실이 바로 우리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여러분은 그 십자가를 감상적인 차원이 아니라 실질적인 차원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은 실제로 예수님의 운명이 파괴되는 사건이었습니다. 우리의 세상 경험에 따르면 십자가에서는 구원이 시작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그대로 파멸로 끝나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바로 우리의 구원입니다.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님은 삼일 만에 죽은 이들로부터 부활하셨습니다. 이 땅의 그 어떤 생명으로도 그 비슷한 것을 찾아낼 수 없는 궁극적인 생명인 부활이 바로 그 십자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십자가가 가장 낮은 끝자리라고 한다면 부활은 가장 높은 윗자리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오직 이 사건을 토대로 합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귀가 아프도록 들어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실지 모르겠군요. 그런 이야기는 너무 관념적인 교리이기 때문에 이렇게 각박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의 현실에서 별로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우리가 구원받는다는 사실만 믿고 있으면 기독교인으로 최선이 아니냐 하고 생각할 겁니다. 예, 그렇습니다. 우리가 피상적으로 알고 있다 하더라도 그분의 은총으로 우리는 부활의 생명에 참여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오늘 우리의 구체적인 삶에 현실성으로 와 닿지 못하면 우리에게 삶의 능력은 없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조금 더 깊이, 실질적으로 바라보십시오. 그것은 이 세상의 고정관념에 고착된 우리의 생각을 확 뚫어낼 것입니다. 우리에게 참된 자유와 평화를 제공할 것입니다.
그 참된 자유와 평화의 능력은 다른 데서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만 주어집니다. 그는 가장 낮은 자리에서 처형당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그것은 우리는 말할 것도 없고 예수님 당신도 피하고 싶었던 그런 운명이었습니다. 여러분, 혹시 그런 일을 당할까 해서 두렵습니까? 도대체 우리에게 가장 낮은 끝자리가 무엇일까요? 우리의 체면과 명예, 자존심, 또는 재산이나 건강을 잃는 것인가요? 그런 것들은 모두 소중합니다. 가능하면 여러분이 그런 걸 잃지 않고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그런 걸 잃는 순간이 온다고 하더라도 크게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인간이니까 어쩔 수 없이 두렵다고 하더라도 힘을 내십시오. 이미 예수님이 그런 길을 모든 걸 잃은 낮은 끝자리가 오히려 영광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고유한 판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여러분, 바로 그 하나님 판단에 여러분의 운명과 미래를 맡기십시오. 그분이 우리를 참된 의미에서의 윗자리로 올려주실 것입니다. 그 자리는 부활생명입니다. 아멘.
바리새인 집에서
오늘 본문인 예수님의 비유는 너무나 간단하고 분명해서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바리새인의 집에 모인 사람들이 서로 윗자리를 차지하려는 것을 보고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혼인 잔치에 초대받아 가게 되는 경우에 윗자리에 앉지 말라고 말입니다. 자기가 잘난 것처럼 윗자리에 앉았다가 주인이 와서 그 자리를 비켜달라고 하면 그 수모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초대를 받으면 아예 끝자리에 앉는 게 좋습니다. 주인이 와서 끝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을 윗자리로 올려준다면 그것이야말로 명예로운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은 이 말씀을 어떻게 읽으셨나요? 사람이 겸손해야 한다는 말씀으로 읽으셨는지요. 공연히 잘난 척하다가는 큰코다치는 수가 있으니까 조심하라는 말씀으로 읽으셨는지요. 옳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겸손이라는 특징이 있습니다. 우리 모든 기독교인들이 겸손하게 자세를 낮출 줄 안다면 한국사회에서 기독교의 위상이 완전히 달라지겠지요.
그런데요. 실제 삶에서 우리가 낮은 끝자리에 앉는다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서로 윗자리를 떡하니 차지하려고 했던 것처럼 우리도 늘 그런 식으로 살아갑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보다 조금 못하게 평가받으면 견디지 못합니다. 정치권에서는 노골적으로 남을 깎아내리고 자기를 치켜세웁니다. 직장에서도 자신보다 못한 사람이 자신보다 조금이라고 윗자리에 올라가면 사람들이 속상해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현실에서는 아무도 낮은 자리에 앉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기독교인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교회에서도 실제로 자기를 낮추는 사람들은 별로 없습니다. 조금이라도 높은 자리로 올라가려는 일들이 벌어집니다. 그런 심리가 아마 집사, 서리집사, 권사, 장로 등등, 여러 단계의 교직제도로 나타나는 게 아닐는지요.
“나야말로 겸손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자기는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모임에서나 낮은 자리에 앉는다고 말입니다. 그렇게 살아간다면 칭찬받을 만한 일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살아가려고 노력해야겠지요. 그렇지만 그 사람이 실제로 겸손한 게 아니라 겉모양으로만 겸손한 척할 수 있습니다. 말은 “제가 부족합니다.” 하지만 속으로는 “나는 썩 괜찮을 사람입니다.” 하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가 보기에 속과 겉이 아무런 차이가 없이 겸손한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우리는 나름으로 상식과 교양으로 그런 겸손한 무늬를 만들어갈 뿐입니다. 물론 저도 똑같습니다. 다른 사람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겸손한 사람만 있을 뿐입니다. 그것은 상대적인 것이지 절대적인 것은 아닙니다. 그런 상대적인 겸손은 어느 순간에 폭발해서 오히려 교만으로 나타날 때도 많습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을 잘 보십시오. 눅 14:1절에 따르면 예수님이 안식일에 바리새인 중에서 지도자급에 속하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셨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거기 모인 사람들 중에 수종병이 든 사람이 있었습니다.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 건 율법을 어기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일을 자주 행하셨기 때문에 이번에도 또 안식일 법을 어기는지 감시하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서 안식일이라 하더라도 자기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졌으면 당장 건져내야 하지 않느냐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분위기가 썰렁했다는 뜻입니다. 바리새인과 예수님 사이에 무언가 신앙의 본질에서 충돌이 시작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을 중심으로 한 유대인들은 어떤 모임에서나 서열에 따라서 자리의 순서가 정해집니다. 종교적인 권위나 연배에 따라서 달라졌겠지요. 그런 순서는 단순히 자리에만 해당된다기보다는 사회 전체 질서를 가리킵니다. 문명이 발달할수록 사람의 서열이 강조되는 것 같습니다. 이등병에서 장군에 이르기까지 피라미드식으로 위계를 갖춘 군대처럼 사회가 늘 이런 위계질서로 움직입니다. 좋은 대학에 가려는 것도 역시 이런 위계사회에서 좋은 입지를 확보하기 위한 시도입니다. 이런 데서 자유로운 사람은 별로 없을 겁니다. 예술가들이나 시인, 또는 종교인들이 사회조직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사람들이기는 하지만 그들도 또 나름으로 그런 위계 조직에 얽매어 있습니다. 현재는 낮은 자리이지만 조금 참고 노력하면 윗자리로 올라갈 수 있다는 꿈과 야망을 안고 살아가는 게 바로 오늘 우리의 삶입니다. 개인에 따라서 그 강도에 차이가 있긴 하지만 큰 틀에서는 다를 게 없습니다.
왜 사람은 낮은 자리에 앉기 힘든 걸까요? 왜 윗자리로 올라가려고만 할까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대 문명이 병든 탓인가요, 아니면 우리 인간의 본질이 그렇기 때문인가요? 양쪽 이유가 다 있겠지요. 문명은 접어두고, 인간 본질이라는 차원만 본다 하더라도 이건 분명합니다. 창세기 4장에 하나님이 동생 아벨의 제사만 받으시고 자신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다는 이유로 화가 난 카인이 동생을 돌로 찍어 죽인 사건이 나옵니다. 이게 성서가 말하는 인간의 본질입니다. 카인은 화가 났다고 합니다. 그 화로 인해서 살인죄 중에서도 가장 무거운 근친살인을 저질렀습니다. 자기의 자리에 동생이 앉은 것 때문에 그런 일을 저지르는 존재가 바로 인간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런 인간의 본성이 특히 경쟁 중심의 현대문명으로 인해서 더 노골화된 세상에서 살아갑니다. 그게 우리의 사실적인 모습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예 우리에게 전혀 다른 삶을 요구하십니다. 윗자리에 앉을 생각을 하지 말고 끝자리에 앉도록 하라고 말입니다. 이처럼 신앙적인 요구는 우리의 현실과 대립합니다. 그래서 신자들은 이런 예수님의 요구를 모른 척하든지 아니면 위선적인 겸손으로 빠져듭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 끝자리에 앉으라고 했지만 그건 그렇게 사는 게 좋다는 뜻이지 실제로 그렇게 하라는 말씀은 아니라고 자기를 합리화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억지로 낮은 자리에 앉아보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속마음으로는 전혀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은 우리 기독교인들을 곤란한 입장에 빠Em리는 말씀일까요?
겸손을 떨어라?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자기를 낮추고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치려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모범적인 삶이나 세상살이의 요령을 가르치신 분이 아닙니다. 그런 것을 가르치신 분은 공자입니다. 공자님은 좋은 뜻으로 사람들에게 처세술을 가르쳤습니다. 바르게 살아가야 할 기준들을 제공했습니다. 유대 랍비들의 전통에도 그런 가르침이 많습니다. 구약의 잠언은 모두 삶의 지혜들입니다. 그래서 신학계에서는 오늘 본문 말씀도 이런 잠언의 영향을 받은 게 아닌가 하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입니다. 예수님이 삶의 지혜와 도덕, 윤리에 대해서 전혀 무관심한 것은 아니지만 지금 그것을 말씀하는 게 아닙니다. 사람을 조금씩 다듬고 길들여서 괜찮은 사람, 교양이 넘치고 겸손한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 이런 말씀을 하는 게 아닙니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조금 더 냉정하게 생각하면, 이 세상에서 낮은 자리에 앉아서 겸손하게 살아간다고 해서 윗자리로 올라가는 건 아닙니다. 기독교인들 중에서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이 사회의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서 전략적으로 낮은 자리에 앉습니다. 그런 방식으로 사회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경우가 없지는 않겠지만 그런 일들이 기계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요즘처럼 경쟁력만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시대에서 낮은 자리에 앉는 사람은 오히려 무시당하기 좋습니다. 이런 점에서도 오늘의 본문이 단순히 겸손에 대한 도덕적인 가르침이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여기서 말씀하시는 핵심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관심은 하나님입니다. 곧 하나님의 나라이며,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본문 말씀을 다시 보십시오. 오늘 비유 이야기에는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과 주인이 나옵니다. 상황이 두 가지로 나뉩니다. 하나는 초대받은 사람이 윗자리에 앉았다가 아랫자리로 밀려나는 경우와 끝자리에 앉았다가 윗자리로 올라가는 경우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인의 행동에 주목해야 합니다. 주인은 윗자리의 사람을 아래로 끌어내리고 끝자리의 사람을 윗자리로 올렸습니다. 이 주인의 행동이 곧 하나님의 행동에 대한 비유입니다. 포도원 주인의 비유라든지 왕의 잔치 비유에서 보듯이 예수님의 이런 비유에서 중심은 주인입니다. 그 모든 상황은 주인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포도원 주인의 비유에서는 한 시간 일한 사람이나 열 시간 일한 사람이 모두 한 데나리온 씩 받았습니다. 그게 바로 포도원 주인의 뜻이었습니다. 왕의 잔치 비유에서는 원래 초청받았던 사람들이 핑계를 대고 초청을 거부하자 길거리에 지나가던 사람들을 잔치에 강제적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주인은 자리를 마음대로 옮기는 분으로 등장합니다. 이 비유의 결론인 11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 이 말씀이 가리키는 것은 윗자리와 낮은 자리를 판단하는 분은 주인, 즉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겸손과 교만, 낮은 자리와 높은 자리를 판단하시는 분은 오직 한분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누가 실제로 겸손한 사람이고 교만한 사람인지 판단할 수 없습니다. 앞에서 말한 대로 겉으로 드러난 것으로 약간 구별할 수는 있겠지요. 말할 때마다 허풍이 심하다거나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않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입니다. 거꾸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알고 실제로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입니다. 일반적으로 돈과 권력이 큰 사람은 교만하고, 그게 없는 사람은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이라는 게 늘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아무 것도 자랑할 게 없는 사람인데도 아주 교만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거꾸로 남에게 자랑할 게 많은 사람인데도 겸손한 사람이 있긴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모두 겉모습에 불과합니다. 누가 그 깊은 속을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하나님만이 판단하신다고 말합니다. 옳습니다. 하나님만이 낮은 자리에 앉은 겸손한 사람과 윗자리에 앉은 교만한 사람을 구별하고 판단하실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자리
이 말은 구체적으로 무슨 의미일까요? 그것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전권을 가리킵니다. 그분에게만 진리가 놓여 있다는 뜻입니다. 오늘 주제와 연결해서 설명한다면 그 말은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낮은 자리와 윗자리의 기준이라는 게 무의미하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이 세상살이에서 사장은 윗자리이고 수위는 끝자리입니다. 연봉을 10억 받는 CEO는 윗자리이고 2천만 원 받는 중소기업 노동자는 끝자리입니다. 요즘 우리나라가 천천히 대선 열기가 고조되고 있는데, 대통령은 윗자리이고 2천 평 논농사를 짓는 농부는 끝자리입니다. 이런 걸 열거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겠지요. 이게 우리의 일반적인 가치판단입니다. 이런 고정관념을 우리가 넘어서지 못하면 결국 하나님만이 우리를 판단하신다는 말씀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이런 고정관념에 완전히 반대되는 사건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이 세상에서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가장 낮은 끝자리입니다. 오죽 했으면 예수님조차도 그 길을 피하고 싶어 하셨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리인 십자가에서 우리와 온 인류와 우주 전체의 구원이 일어났다는 이 사실이 바로 우리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여러분은 그 십자가를 감상적인 차원이 아니라 실질적인 차원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은 실제로 예수님의 운명이 파괴되는 사건이었습니다. 우리의 세상 경험에 따르면 십자가에서는 구원이 시작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그대로 파멸로 끝나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바로 우리의 구원입니다.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님은 삼일 만에 죽은 이들로부터 부활하셨습니다. 이 땅의 그 어떤 생명으로도 그 비슷한 것을 찾아낼 수 없는 궁극적인 생명인 부활이 바로 그 십자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십자가가 가장 낮은 끝자리라고 한다면 부활은 가장 높은 윗자리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오직 이 사건을 토대로 합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귀가 아프도록 들어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실지 모르겠군요. 그런 이야기는 너무 관념적인 교리이기 때문에 이렇게 각박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의 현실에서 별로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우리가 구원받는다는 사실만 믿고 있으면 기독교인으로 최선이 아니냐 하고 생각할 겁니다. 예, 그렇습니다. 우리가 피상적으로 알고 있다 하더라도 그분의 은총으로 우리는 부활의 생명에 참여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오늘 우리의 구체적인 삶에 현실성으로 와 닿지 못하면 우리에게 삶의 능력은 없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조금 더 깊이, 실질적으로 바라보십시오. 그것은 이 세상의 고정관념에 고착된 우리의 생각을 확 뚫어낼 것입니다. 우리에게 참된 자유와 평화를 제공할 것입니다.
그 참된 자유와 평화의 능력은 다른 데서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만 주어집니다. 그는 가장 낮은 자리에서 처형당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그것은 우리는 말할 것도 없고 예수님 당신도 피하고 싶었던 그런 운명이었습니다. 여러분, 혹시 그런 일을 당할까 해서 두렵습니까? 도대체 우리에게 가장 낮은 끝자리가 무엇일까요? 우리의 체면과 명예, 자존심, 또는 재산이나 건강을 잃는 것인가요? 그런 것들은 모두 소중합니다. 가능하면 여러분이 그런 걸 잃지 않고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그런 걸 잃는 순간이 온다고 하더라도 크게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인간이니까 어쩔 수 없이 두렵다고 하더라도 힘을 내십시오. 이미 예수님이 그런 길을 모든 걸 잃은 낮은 끝자리가 오히려 영광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고유한 판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여러분, 바로 그 하나님 판단에 여러분의 운명과 미래를 맡기십시오. 그분이 우리를 참된 의미에서의 윗자리로 올려주실 것입니다. 그 자리는 부활생명입니다. 아멘.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