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눅10:29-37 |
---|---|
설교자 : | 김필곤 목사 |
참고 : | 열린교회 http://www.yeolin.or.k |
2002년 9월 22일
한 젊은이가 밤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누군가가 그에게 다가와서 담배 하나를 달라고 했습니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이라 없다고 하니까 건방지다며 시비가 붙었습니다. 조금 있자 어디선가 같은 또래의 불량배들이 서넛이 몰려와서 그 젊은이를 뭇매질을 하였습니다. 으슥한 골목도 아니었고 자정 전이라 드문드문 사람들도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먼발치에서 구경만 할 뿐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길바닥에 쓰러진 젊은이는 한참 후에 피가 낭자한 몸으로 가까운 파출소로 달려갔습니다. 경찰은 그를 보고 자기네 관할이 아니니 다른 곳으로 가라고 하였습니다. 하는 수 없이 가르쳐준 파출소에 갔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경찰서로 가라고 했습니다. 담당 경찰관은 계속 피를 흘리고 있는 그를 의자에 앉힌 체 새벽 4시가 되도록 꾸물거렸습니다.
그는 아침이 되어서야 자기가 잘 아는 병원이 있다고 소개해 주었습니다. 기진맥진한 피해자는 그제야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았습니다. 가자 마자 의사는 왜 좀더 빨리 오지 않았느냐고 나무랐습니다. 응급치료를 마치고 투시사진도 찍었습니다. 진료비는 30만원이 넘었습니다. 그런데 기이하게 의사는 진단서를 써주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필요하면 따로 15만원을 내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진단서도 못 얻고 병원을 나와야 했습니다. 회사 동료들에게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하자 "그런 세상이 어디 있느냐" 한 동료가 흥분했습니다. 그러자 한 동료가 "그보다 더 한 일도 흔한 판에 뭘 그 깐 일에 흥분하느냐"고 핀잔을 주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서로에게 무관심하고 모든 것은 돈으로 계산하는 부정적인 이웃들의 단면들입니다. 학자들은 이웃 간의 무관심을 이야기 할 때 키티 제노비스 사건을 이야기합니다. 키티 제노비스 현상을 이야기합니다. 미국 뉴욕 퀸즈 어느 아파트 앞에서 16세 소녀 Kitty Genovese(키티 제노비스)가 한 괴한에 의하여 30분 동안 폭행을 당했습니다. 이 때 38명이 창문을 통해 그 광경을 보고 있었는데 아무도 이를 말리거나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고, 그 소녀는 마침내 죽고 말았습니다. 나중에 경찰 조사에서 이들 모두는 한결같이 "다른 사람이 도와줄 것으로 생각했다"는 말을 하였다고 합니다. 우리 사회를 4무 병에 걸려 있다고 진단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무관심, 무반응, 무의식, 무책임"의 병입니다. 서로 관심을 갖는 것이 피곤하다고 생각합니다.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이 편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아무리 큰 일이 일어나도 반응이 없습니다. 그저 깊이 생각하는 것이 싫습니다. 의미를 추구하는 것이 따분하고 고리타분합니다. 서로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책임을 지기 싫으니 아이도 낳지 말고 결혼도 하지말고 살자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가족 간에도 무관심, 무반응, 무의식, 무책임의 현상은 일어나고 있고 같이 교회에 다니는 교인들 감에도 무관심, 무반응, 무의식, 무책임의 현상은 일어나고 있습니다. 교육이 산업화 기업화되면서 그 본질을 잃어 버렸듯이 교회도 산업화 기업화되면서 교회의 본질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한 교회에 다니면서 어떻게 하면 좋은 이웃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1. 마음의 동일화가 이루어져야 합니다(33).
사회학자 에드워드 홀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에 따라 인간관계를 네가지 영역으로 분류했습니다. 언어소통을 하지 않더라도 두 사람 사이의 간격이 둘의 사회적 관계를 분명하게 설명해 준다는 것입니다. 우선 45cm 이내는 "밀접한 영역"이라고 말했습니다. 일상적 사회생활에서는 거의 볼 수 없으며 부모와 자식간이나 연인 사이처럼 언제나 스스럼없이 신체접촉이 가능한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고 말합니다. 45cm-120cm는 "개인적 영역"으로 분류했습니다. 친구나 가깝게 아는 사람들이 전형적으로 유지하는 거리입니다. 이밖에 120-360cm는 "사회적 영역"으로 인터뷰 등 공식적인 상호작용을 할 때 필요한 간격이며 360cm를 넘어서면 "대중적 영역"에 속한다고 하였습니다. 무대 위의 공연자와 관객이나 떨어져 앉아 있는 서로 알지 못하는 관객들의 관계가 이 영역에 속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웃이란 단순한 물리적 거리로 따질 수 없는 것이 오늘의 시대입니다.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어도 앞집과 윗집 아랫집 이름도 모르고 이사갈 때까지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도 서로 인사도 하지 않고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웃은 마음의 거리입니다. 마음이 동일화되는 사람입니다. 같은 처지 같은 경험 같은 마음을 가지면 쉽게 동화될 수 있고 어려울 때 쉽게 도울 수 있습니다. 이번 강릉에 수제를 당했을 때 많은 도움을 준 사람들을 보십시오. 자신들이 어려움을 당해 본 사람들이 많이 가서 도와 주었습니다. 자신들도 물난리를 당해 봐서 물난리 당한 사람의 심정을 알거든요. 누구나 동일하게 강도 만난 사람을 봅니다. 오감각으로 현실을 보고 듣고 합니다. 그러나 똑같이 보아도 마음의 느낌의 정도는 다른 것입니다. 어려움을 당해본 사람은 그 느낌의 정도가 다른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좋은 이웃이 되는 동일화되는 대표적인 마음이 바로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긍휼 즉 민망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똑같은 사건을 보았습니다. 어쩌면 물리적 거리로는 강도 만난 사람과 가까운 사람들입니다. 제사장은 당시 최고 지도자이며 마땅히 자비를 베푸는 것이 직업인 사람입니다. 제사장은 몰라도 강도당한 사람은 제사장을 알았을 것입니다. 레위인도 성전에서 경비를 담당하고 제사를 담당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어쩌면 이 사람은 한 번쯤은 만난 사람일 것입니다. 자기의 동족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 버렸습니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시체를 만지지 말라는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 그렇게 할 수 있었을 것이고 제사 준비로 급한 일이 있을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지체못할 개인 사정이 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론은 무관심입니다. 관심을 가지면 괜히 귀찮은 것입니다. 자신을 합리화하는 것입니다. 이미 마음에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 속에 있는 측은 지심이 발동하지 않은 것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그를 보자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겼습니다.(33) 사마리아인들은 그만큼 설음을 당해 본 사람들입니다. 유대인들이 혼혈족이라고 상종을 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냉대 받으며 천대 받은 사람들입니다. 어려운 사람들이 어려운 처지를 잘 아는 것입니다. 바로 좋은 이웃이 되는 첫 걸음은 서로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한 교회에 다니며 서로 좋은 이웃으로 살아갑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생각해 보면 다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강도만난 사람들과 같습니다. 회사에 가면 회사에서, 가정에 가면 가정에서, 학교에 가면 학교에서, 사회에 나가면 사회에서 우리는 얼마나 찌끼고 상하고 고달프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서로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대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대하는 마음입니다. 이것이 우리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는 마음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어 십자가에 달리게 한 것도 바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그 많은 병자를 낳게 해 주시는 것도 병자된 자를 불쌍히 여겨 주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을 대하는 마음, 병자를 대하는 마음, 소외된 자를 대하는 마음을 보십시오.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성경 몇 군대를 찾아 보겠습니다.
많은 병자들이 예수님께 왔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어떤 마음을 가졌습니까? 귀찮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인을 고쳐 주시니라 (마 14:14)"
굶주린 백성을 보고 예수님은 어떤 마음을 가졌습니까?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가라사대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 (마 15:32)"
예수님은 죄지은 사람들에 대하여 어떤 마음을 가지라고 합니까?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마 18:33)"
아들을 잃은 여인을 보고 예수님은 어떤 생각을 가지십니까?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눅 7:13)"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 (마 9:36)"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저희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저희가 예수를 좇으니라 (마 20:34)"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께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막 1:41)"
성경은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엡 4:32)"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체휼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벧전 3:8)"
우리는 서로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긍휼이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2.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실제적인 행동화로 이루어져야 합니다(34,35).
좋은 이웃으로 살아가는 첫단계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라고 두 번째 단계는 그 마음이 실제적인 행동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어려운 처지를 당한 사람을 볼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음에 불쌍한 생각이 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에 불쌍한 생각이 들었다고 그것이 행동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는 만큼 행동하려면 마음의 감동이 강해야 하고 마음의 감동을 행동으로 옮길 만한 의지력 즉 용기있는 결단과 분명한 가치관, 여건이 구비되어야 합니다. 제사장이나 레위인들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행동으로 옮겨지지는 않았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단지 종교적 상품에 불과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봉사의 직분을 통해 적당히 군림할 줄은 알았는데 그 직분은 통해 섬김의 도를 실천하는 데는 인색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달랐습니다. 행동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가까이 갔습니다. 희생이 따랐습니다. 언제 강도가 나타날지 모릅니다. 생명의 위협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까이 갑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있는 것으로 도움을 줍니다. 여행용 기름과 포도주가 있습니다. 응급 조치를 취합니다. 포도주로 소독을 합니다. 기름으로 약을 바릅니다. 자기 짐승을 태워 주고 자신은 걸어갑니다. 주막까지 가서 바로 떠나는 것이 아니라 이튿날까지 그를 돌보아 줍니다. 좋은 이웃이 되려면 우리는 때때로 걷는 수고를 감당해야 합니다. 자신에게 있는 기름과 포도주를 사용해야 합니다. 시간을 할애하여 어려운 이웃과 함께 있어야 합니다. 물질을 소모해야 합니다. 시간을 투자해야 합니다. 노동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자비를 베푼 것입니다(37). 자비는 마음에서 끝나는 덕목이 아니라 행동을 베풀 때 가치가 있는 덕목입니다. 바로 우리 예수님이 그렇게 했습니다. 끝없이 불우한 이웃들, 가난한 자, 굶주린자, 병든자를 위해 자신의 몸과 시간과 정열을 희생하였습니다. 마지막에서는 십자가에서 못 박히기까지 모든 것을 다 주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내 이웃이 누구냐고 물어본 율법학자는 바로 이것이 부족한 사람입니다. 오늘 성경의 내용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가를 관찰해 보십시오. 25절을 보십시오. 율법사가 예수님께 물어 봅니다.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그 당시야 당연한 것이지만 오늘 날로 생각하면 대단한 질문입니다. 오늘날은 별로 영생에 대하여 내세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현실 삶 속에서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즐겁게 살까? 어떻게 하면 멋지게 살까?를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참으로 가상한 질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의 질문은 그 동기가 진정 내세에 대한 관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내세에 대한 질문은 지극히 현실적인데 있었습니다. 자신의 현실적 목적을 성취하는데 있었습니다. 25절을 보십시오. 그가 질문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진정 구원의 길을 몰라서 물어 본 것입니까? 당시 유대인들은 대부분 구약에서 말씀하는 구원의 길을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시험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을 시험하여 자신들의 종교적 기득권을 거슬리고 인기를 누리고 있는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서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도 내세적 관심도 지극히 현실적인 것을 위해 사용될 때가 있지 않습니까? 29절을 보십시오. 자신을 옳게 보이려고 그랬습니다. 자신은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한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자기 동족에게 자기의 이익에 맞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동향 사람들에게, 일가 친척이나 동창 아는 사람들에게 많은 자비를 베푼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속마음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대답하는 것보다 다시 그에게 질문을 합니다. "네가 잘 알고 있는 율법에서 뭐라고 말씀하시더냐?" 그는 27절에서 대답을 합니다. 구약 신6:5; 레19:18를 들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말합니다. 이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보십시오. 28절 "네 대답이 옳다. 그러면 이것을 말로만 하지 말고 행해 보라. 그러면 산다는 것입니다. 영생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대 강령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지키면 영생을 얻는다는 것이 구약의 진리입니다. 이것은 율법사가 잘 아는 내용입니다. 성경을 찾아 보십시오. "너희는 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 나는 여호와니라 (레 18:5)" "내 율례를 좇으며 내 규례를 지켜 진실히 행할진대 그는 의인이니 정녕 살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겔 18:9)" 그가 잘 알고 있는 내용을 예수님이 말씀하신 의도는 무엇일까요? 그것이 영생을 얻는 방법이라고 가르치고자 하는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무능력을 깨우쳐 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는 차라리 이렇게 말했어야 합니다. "저는 노력해 보았지만 도저히 그 사랑을 실천할 수 없는 죄인입니다. 제가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을까요?" 그런 질문을 했다면 바로 예수님은 "나를 믿으라 그러면 너가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었을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 5:24)"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요 6:40)"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요 6:47)"라는 말씀을 명쾌하게 해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완벽한 것처럼 말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비유를 들어 말하며 그의 위선과 무능력을 깨우쳐 주고 실제적인 행동을 촉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받는 다는 말씀을 하시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아는 만큼 행동을 할 것을 강조한다는 사실은 예수님께서 비유를 다 말씀하시고도 물어 보시는 질문에서도 알수 있습니다. 36절을 보십시오.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냐?" 그가 대답합니다. "자비를 베푼 자입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가서 너도 이와같이 하라" 말로만 하지 말고 행동으로 실천하라고 말씀합니다. 정말로 가기 싫은 곳에 가고 주기 싫은 사람에게 주고 시간을 투자하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시간을 투자하라는 것입니다. 좋은 이웃이 되려면 바로 자기를 냉대하고 천대하는 사람, 인간 대접하지 않는 사람일지라도 그에게 포주주와 기름을 발라 주어야 합니다. 그를 위해 두달란트를 사용해야 합니다. 그를 위해 이틀을 머물러야 하고 그를 위해 자신의 나귀를 내어주어야 하는 수고를 감당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도 지셨습니다.
3. 책임감을 가지고 지속적인 배려가 이루어져야 합니다(35).
일회성 돌봄은 어쩌면 그리 어렵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속적인 도움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정상적으로 회복될 때까지 배려해 준다는 것은 쉬운 것은 아닙니다. 치매에 걸린 부모님을 돌본다는 것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일주일, 한 달은 가능할 수 있습니다. 아니 일년도 가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돌아가실 때까지 병 수발을 한다는 것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사람 외에는 십자가 없이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35절을 보십시오. 이튿날 데나리온 둘을 주인에게 줍니다. 그를 계속적으로 돌볼 수 없는 급한 사정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한 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 하루의 품삯입니다. 당시 로마의 하루의 숙박비 1/32데나리온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두 데나리온은 두달치 숙박비입니다. 그만큼 그가 중환자였다는 이야기이고 사마리아 사람은 그가 회복될 때까지를 배려한 것입니다. 그것도 모자라면 더 주겠다고 약속을 합니다. 확실히 회복될때까지 자신이 책임을 지겠다는 말입니다. 따지고 보면 자신의 일도 아닙니다. 그러나 자신의 일로 생각하고 책임감을 갔습니다. 끝까지 책임의식을 가지고 정상적으로 회복될 때까지 배려를 해줍니다.
어떤 사람들은 인간 관계를 피상적인 인간관계, 지식과 사실들을 나누는 인간관계, 의견과 생각을 나누는 인간관계, 감정을 나누는 인간관계로 분류하기도 합니다. "피상적인 인간 관계"는 날씨, 스포츠, 일반적인 사건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정도의 인간관계를 말하고 "지식과 사실들을 나누는 인간 관계"는 어느 모임에서 그저 알고 있는 사실이나 지식 정도를 나누는 인간관계를 말합니다. "의견과 생각을 나누는 인간 관계"는 자신의 개인적인 생각이나 의견들을 보다 더 기꺼이 이야기하여 서로의 차이점과 공통점이 드러날 정도의 인간관계이고 "감정을 나누는 인간 관계"는 자신이 느끼고 있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할 정도로 좀더 가까워진 인간관계를 말합니다. 이러한 분류가 모든 인간관계를 설명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관계의 종류에 따라 사람을 대하는 방법도 다르게 나타납니다. 우선 밀접한 영역의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관용적입니다. 무조건 적입니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말처럼 늘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고 좋은 쪽으로 해석하고 대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거리가 멀어지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상업적 인간관계로 점점 변해갑니다. 그 관계를 통하여 이해타산을 따지게 됩니다. 노골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지만 속셈은 늘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먼 거리의 피상적인 인간 관계일 때는 서로에게 별 상처를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감정을 나눌 정도로 밀접한 인간관계를 유지하면서 상업적으로 인간을 대하게 되면 그것으로 서로 상처를 받게 되고 나중에는 원수가 되어 버리는 경우를 우리는 주위에서 종종 보게 됩니다. 가까운 사람들끼리 서로 위해 주는 척 하지만 이면에는 자신이 투자한 것보다 더 많은 이익을 취하기 위하여 권모술수를 쓰거나 누군가에게 선물을 해 주고 구제 기관에 조그마한 자선을 하고 그 사실을 통하여 자신의 명예를 내고 이익을 취하고 자신의 자선을 자랑하려고 하거나, 친구의 사업을 돕는다는 명목으로 가까이 하다가 그 사람의 비리를 캐내어 친구를 매장시키고 결국 그것을 이용하여 자신의 이득을 취한다면 그 인간관계는 오래가지 못할 것입니다.
진정 좋은 이웃은 끝까지 책임지고 배려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아브라함 아내를 누이라고 속입니다. 아들을 주겠다고 하지만 믿지 않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어떻게 합니까? 버려버립니까? 아닙니다. 끌까지 그를 붙들고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만듭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창 15:1)"
야곱 형을 속이고 도망을 갑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창 28:15)"라고 말씀합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롬 8:35)"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한 형제 자매입니다. 끝까지 책임을 지도 배려하는 사이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좋은 이웃입니다. 우리는 사회에 대하여 그런 책임감을 가지고 사회를 변화시켜야 합니다. 구조적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틀을 만들어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쓰임받아야 합니다.
좋은 이웃이 되고 싶습니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실제적인 행동화로 이루어지도록 하나님께 간구하십시오. 책임감을 가지고 지속적인 배려가 이루어지도록 여건을 달라고 하나님께 부르짖으십시오. 우리의 힘으로는 부족하지만 우리 하나님이 힘주시면 넉넉히 좋은 이웃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루는데 쓰임받는 주인공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좋은 이웃/눅10:29-37/2002년 9월 22일 열린교회 김필곤 목사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