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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사52:13~53: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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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신지니 전도사 |
참고 : | 새길교회 2010.3.21 주일설교 |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너의 고통 앞에서”
[이사야 52 : 13 ~ 53 : 12]
신지니 전도사
지난 1월 12일, 그 수를 다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아이티에서 매몰되어 목숨을 잃었습니다. 전 세계가 충격에 빠졌고 많은 사람들이 참담함을 감추지 못했죠. 저 또한 오래도록 마음이 아팠습니다. 허연 돌가루를 온 몸에 두른 채 엄마를 찾아 우는 아이, 앙상한 철근을 드러내고 주저앉은 건물들, 흙먼지만이 날리는 텅 빈 거리에 쓸쓸히 누운 시신. 잊고 지내다가도 매체를 통해 그네들의 모습을 확인할 때면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그러던 중 ‘아이티는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우상숭배를 해왔기 때문에 하나님의 징벌을 받았다’는 미국의 한 목사님의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저를 한동안 고민에 빠뜨렸습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크고 작은 고통을 경험하는데요. 고통은 실로 사람을 압도하는 강력한 힘을 지닌 것 같습니다. 고통 앞에서 인간은 절실하고 처절하게 신음하지 않을 수 없죠. 그런데 이건 어디까지나 ‘나’의 문제일 때로 국한되는 것 같습니다. 타인의 고통 앞에서는 태도가 조금 달라지는데요. 우리는 자주 습관적으로 고통의 원인을 고통당하는 사람에게서 찾는 것 같습니다. 자신의 것일 때는 그렇게 오랫동안 씨름하게 만들었던 고통의 문제가 남에게 닥쳤을 때는 매우 간단해지는 것이죠. 우리는 아주 쉽게 ‘그 사람에게 뭔가 문제가 있겠지.’, ‘그 때의 잘못 때문에 천벌 받는 거야.’, ‘반복적으로 자꾸 실패하는 것 보니 저사람 삶에 잘못된 패턴이 있군.’하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러한 생각이 아이티에 적용되었습니다. 아이티는 끊이지 않는 경제적 어려움과 정치적 혼란을 겪어오다 천재지변까지 당했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징벌일지도 모를 만큼 참혹한 현실이죠. 그 나라가 무엇인가를 잘못하고도 오랫동안 깨닫지 못해서 하나님의 징벌을 받은 것이 아니라면 이렇게까지 고통이 겹칠 수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처럼 타인의 고통 앞에서 고통당하는 이의 허물을 들춰내는 일은 성폭력과 관련해서 특히나 빈번히 일어납니다. 사건이 일어나면 피해자의 평소행실과 귀가시간, 당일의 화장과 옷차림 등이 도마 위에 오릅니다. 이 또한 고통의 원인을 그 사람에게서 찾으려는 태도이죠. 이러한 태도가 옳은가. 그리고 그 전에 타인의 고통이 그 사람의 죄 때문인가라는 질문에 답변하는 것이 근본적으로 가능한가. 이에 대한 성서적 관점은 무엇인가. 그리고 나아가 타인의 고통 앞에 선 우리에게 성서는 무엇을 요구하는가. 이것이 저의 질문이었습니다.
오늘의 본문(사 52:13-53:13)이 타인의 고통을 마주하는 우리의 자세에 대해 어느 정도 답변해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사야 53장은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본문입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묘사하고 있다고 해석되면서 본문은 지금까지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을 받아 왔습니다. 저 역시도 본문을 읽으면서 예수님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데요. 오늘은 본문이 제시하지 않은 것은 잠시 내려놓고 이사야 53장이 말해주고 있는 대로 한 평범한 사람의 고난에 집중해보려 합니다. 본문을 통해 우리는 혹독한 고통을 겪고 있는 한 사람과 마주하게 됩니다. 고통이 오늘의 관심인 만큼, 하나님이 자신의 종이라 부르고 있는 이 사람의 고통에 대해 본문이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지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53장 2절은 종의 외모에 대해 묘사합니다. 종은 고운 모양도 훌륭한 풍채도 없는, 도무지 아름다운 면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외모에 대한 묘사가 아닙니다. 외모에 대한 묘사는 한 사람이 어떠한 삶을 살았는가하는 문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름다움에 관한 구약성서의 두 가지 관점을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먼저, 구약성서에서 아름다운 신체는 축복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성서에 다윗이나 요셉은 용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운 사람으로, 혹은 준수한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는데요. 이것은 그들이 꽃미남이나 몸짱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들이 축복받은 사람임을 의미하는 것이죠. 둘째로 구약성서에서 아름다움은 일차적이고 관계적으로 인식되는 것입니다. 즉, 누군가가 아름답다는 것은 그 사람이 남의 이목을 끌고, 나아가 사랑받거나 혹은 존경받는 사람이라는 뜻인 것이죠. 그렇게 볼 때, 우리가 2절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단순히 그 사람이 못 생겼다거나 빈약했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2절이 의미하는 것은 이 사람이 축복이라고는 단 하나도 받지 못했으며 사람들에게 주목받지 못 했고 나아가 외면당했다는 것입니다. 그 정도는 굉장히 심각했던 것 같습니다. 52장 14절에 따르면 종의 모습이 매우 끔찍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14절은 “많은 이들이 그를 보고 섬뜩하게 여길 만큼 그 얼굴이 사람 같지 않았고, 그 형체도 더 이상 사람이라 할 수 없었다.”라고 직역할 수 있는데요.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 사람이 축복, 즉 명예나 부와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었고 아마도 극심한 수난으로 사람들에게 외면당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2절이 종의 소외와 고립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면 3절은 이를 직접적으로 제시합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버림받고 고통을 겪었으며 언제나 병을 앓았습니다.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돌렸고, 그런 상황을 지켜보던 무리도 덩달아 그를 무시했습니다. 저는 종이 당한 고통이 주로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것임을 짚고 넘어가려 합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고통과 역경을 경험하지만 그에 수반되는 멸시와 소외는 고통당하는 이들이 공통적으로 겪게 되는 문제인 듯합니다. 어쩌면 문제 자체보다 사람들의 반응이 문제를 가진 사람을 더 고통스럽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고통당하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도움의 손길이 아니라 무시와 따돌림, 수군거림, 비웃음, 그리고 정죄인 것이죠. 이는 고대인들의 세계에서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고난당하는 종을 손가락질 하는 무리에게서 우리들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도 이 때문일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버림받고 갖은 고통을 다 겪는 종의 모습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어릴 적 즐겨보던 영화들이 생각납니다. 그 속에서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고통을 겪고 그로인해 비웃음을 당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에는 모든 역경을 이겨내고 사람들의 인정을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말 그대로 죽을 만큼 맞아도 죽지 않고 심지어 총을 맞아도 살아나면서 말이죠. 그래서 오늘의 본문도 이러한 반전을 기대하며 읽어봅니다. 그러나 본문은 영화들과는 조금 다른 결말을 보여주는데요. 종은 계속 고통을 겪습니다. 오히려 고통은 심해져만 가고, 그렇게 극심한 수난을 당하다 그는 결국 죽고, 묻히게 됩니다. 그것도 매우 치욕스러운 죽음을 당하죠. 악인들, 범죄자들이 묻힌 곳에 매장지가 선택되어 그들과 함께 묻히게 된 것입니다. 죽음이 고난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때, 정말이지 종은 고난의 끝을 경험했습니다. 후반부에 종에게 장수와 자손의 축복이 내려지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축복의 맥락에서 언제나 일반적으로 그리고 전형적으로 등장하는 주제입니다. 이것을 있는 그대로 해석하기는 조금 힘들 것 같습니다. 종은 이미 죽었기 때문이죠. 어쨌든 종에게 있어 현실은 고통으로 점철된 삶과 치욕스러운 죽음입니다. 결코 부인할 수 없는 것은 종이 생의 마지막 순간에 이르기까지 아무런 반전도 없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누군가 의문을 제기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본문이 종을 형통하게 하겠다는 야훼의 약속의 말씀과 함께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결코 그치지 않는 고난과 천대를 당하다 결국 죽어버린, 그것도 죽는 순간까지 모욕을 당한 종의 삶을 형통하다고 할 수 있는가.’ 더군다나 새번역 성서는 여기에 ‘매사에’라는 말을 넣어서 번역했기 때문에 ‘사후에 명예가 회복되었다고 하더라도 종이 매사에 형통했다고는 더더욱 말할 수 없지 않은가.’라는 등의 여러 가지 회의적인 질문들이 떠오를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52장 13절에서 하나님은 분명 야쓰킬(יל������������������), 즉 ‘그가 형통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형통하다’라고 번역된 싸칼(שׂכל) 동사는 행위와 결과를 동시에 포괄하는 동사입니다. 행위에 중점을 둔다면 하나님이 허락한 지혜와 능력이 충만하여 ‘그가 현명하게 행동할 것이다’라고 번역할 수 있을 것이고, 결과에 무게를 실어 해석한다면 ‘그가 성공할 것이다’, 혹은 ‘목표를 이룰 것이다’라고 풀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이 동사가 지혜로운 행위와 과정을 통해 목표를 이룬다는 의미이지, 결코 세상이 추구하는 부나 명예, 안락한 삶을 누린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야훼의 약속의 말씀이 우리의 기대와 다른 것은 사실입니다. 우리가 형통하리라는 야훼의 약속을 일이 잘 풀려서 부를 쌓고, 인정받으면서, 또한 세상 사람들에게 능력도 좀 과시하면서 사는 것이라고 이해했다면 말입니다. 그러나 본문에 따르면 야훼는 분명 자신의 종에게 능력과 지혜를 주셔서 형통하게, 즉 현명하게 행동하고 성공하도록 하셨고, 종은 그 능력과 지혜에 힘입어서 형통하게 살았습니다. 그의 삶은 성공적이었던 것입니다. 본문은 고통이 형통한 삶을 방해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어쩌면 고통은 야훼가 말하는 형통함과 하등의 관련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고통이 형통함에 방해가 된다고 말하고 있지도 않지만 그것이 형통함에 필수적이라고 전제하고 있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다만, 본문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고통으로 점철된 삶도 하나님 보시기에 형통한 삶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빌립보서 4장 11-13절은 이사야 53장과 고통에 대한 이러한 성서적 견해를 공유합니다. “나에게 능력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참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성서구절인데요. 주로 수험생들의 책상에 쓰여 있고 그 밖에도 회사, 가게, 가정집 등 여러 곳에 걸려 있습니다. 그런데 이 구절을 사랑하는 만큼 그 의미를 잘 이해하고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이 구절의 앞부분을 읽어보면 바울의 자신감은 성공보다는 실패, 부요함보다는 궁핍함에 맞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비천하게 살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굶주리거나, 풍족하거나, 궁핍하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배웠습니다.” 고통의 현실이 바울의 형통함을 방해하지 못합니다. 바울은 고통을 통해 오히려 하나님과의 동행을 증명합니다. 그 고통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이고 적극적으로 겪어냄을 통해서 말입니다. 이사야 53장의 야훼의 종 또한 당대의 누구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고통을 단 하나도 피하지 않고 겪어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신의 종이 그럴 수 있도록, 즉 형통할 수 있도록 능력과 지혜를 주셨습니다.
숭고한 고통 앞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함부로 말할 수 없습니다. 특히나 타인의 고통 앞에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고난당하는 사람을 질시하고 질타하는 것은 고통에 대한 왜곡된 시선을 가졌을 때에만 가능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종에게서 얼굴을 돌렸지만 야훼 하나님은 그를 향해 얼굴을 드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가 하나님의 버림을 받았다고 하며 멀리했지만 하나님은 그를 마음에 들어 하셨습니다. 타인의 고통을 통해서 결코 그 사람의 죄와 허물을 찾아낼 수 없습니다. 정작 그 사람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형통한 삶을 누리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의 잘못과 그 사람이 당하는 고통 사이에 관련이 있을지 없을지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그것을 판단할 능력도 자격도 우리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타인의 고통 앞에서 그들의 허물을 발견하는 대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데요. 본문의 핵심부라 할 수 있는 53장 4-6절은 우리가 타인의 고통 앞에서 어떠한 생각을 갖고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할지 보여줍니다. 이 부분은 특이하게도 야훼 하나님도 아니고, 고통당하는 종도 아닌, 야훼의 종을 멸시하고 멀리했던 사람들의 고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무리는 고통 받는 사람을 하나님께 매 맞는 사람, 즉 천벌 받은 사람으로 생각했었다고 정직하게 고백합니다. 이러한 생각은 고통으로 얼룩진 삶을 사는 이가 그 자신의 죄와 잘못 때문에 응당 당할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인식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죠. 때문에 그 사람을 멸시하는 것도, 외면하는 것도 가능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죄인들이나 취하는 교만하고 오만한 입장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정통적이고 경건한 사람들의 입장이었죠. 고대세계에서 수난은 신의 징벌과 진노를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수난자가 고통당하는 원인이 바뀐 것입니다. 본문의 화자인 ‘우리’는 종이 고통당하는 이유가 ‘너의 죄 때문이 아니라 나, 우리의 죄 때문’이라고 고백합니다. 전적으로 새로운 관점을 갖게 된 것입니다. 원래 그가 찔린 것은 그의 허물 때문이었고, 그가 상처를 받은 것은 그의 악함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새롭게 보고 나니,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상처를 받은 것은 ‘우리’의 악함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그의 고통 속에서 그의 잘못만을 보았지만 이제 그의 고통 속에서 나의 허물, 나의 악함만을 보게 된 것입니다. 어떠한 형식이었는지는 몰라도 압도적인 하나님의 임재 앞에 이 무리들은 눈이 멀게 된 것 같습니다. 타인의 고통 앞에서, 더 이상 그 사람의 허물을 볼 수가 없게 되어 버린 것입니다. 대신 그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타인의 고통 속에서 자신의 허물과 과실이 보이는 일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의 대속적인 고난과 죽음만을 떠올리며 이러한 고백을 아무런 자극 없이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본문의 중요한 메시지를 놓치게 될 것입니다. 대리사상은 이스라엘과 그 주변세계에, 그리고 그 이전세계에 다양한 형태로 존재했습니다. 여기에서 전적으로 새로운 것은, 그리고 우리가 주목하고 기억해야만 하는 것은 고백의 대상이 된 사람이 왕이나 신도 아니고 멋지고 강한 인물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고 오히려 사람들의 혐오를 받는 가난하고 일그러진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주변에 늘 존재하는 사람, 우리가 불결하고 무능력하다고 판단하고 무시하고 눈살을 찌푸리는 그런 사람 말입니다. 바로 이런 사람의 고통을 보고 ‘당신 탓이 아니라 우리 탓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원인을 찾는다는 미명 아래 고통 받는 사람에게 이중고, 삼중고를 지우던 습관에서 철저히 돌이켜서 그 사람의 짐을 내가 져야한다는 생각으로 이동했습니다.
이들의 고백은 값싼 동정심의 발로가 아닙니다. 이것은 타인의 고통 앞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은 오직 나의 허물뿐이라는 고백입니다. 혹 그 사람의 고통이 그 자신의 탓이라고 해도 그것을 내가 판단할 수는 없다는 성숙한 고백이죠. 타인의 허물과 죄를 찾아낼 자격도 능력도 진정 우리에게는 없다는 것을 이들은 알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깨달음은 그 고통을 내가 감당하고 내가 아파해야만 한다는 생각으로 이어집니다. 반복하지만 이것은 그 사람에 대한 동정심이나 그 짐을 덜어 선한 일을 해야 한다는 인식으로부터 나온 고백이 아닙니다. 타인의 고통이 ‘나의 죄’ 때문이라고 이토록 급진적인 고백을 했을 때, 그 짐을 함께 지는 것을 넘어 내가 지려는 마음가짐은 당위성을 획득합니다. 그 고통은 우리 때문이고, 그 고통은 우리가 져야만 할 짐입니다.
이러한 고백은 우리에게 치유와 평화를 가져다줍니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써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매를 맞음으로써 우리의 병이 나았다.” 한 사람의 고통 앞에서 그것이 자기 자신 때문이라고 고백했을 때, 그 곳에는 평화와 회복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타인의 고통 앞에서 침묵했을 때, 하나님과 그, 그리고 나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그리고 나에게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죠. 그러나 그 고통이 나 때문이라고 고백했을 때, 나에게는 구원의 빛이 드리워집니다. 본문 속에서 가장 핵심적인 고백이 야훼 하나님도 아니고 고통 받는 종도 아닌 ‘우리’의 입을 통해 나왔다는 점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본문 속에 목소리를 높이던 ‘우리’가 바로 우리이고, ‘우리’의 고백은 지금, 우리가 해야 할 고백입니다. 주위를 둘러보면, 오늘날 고통의 짐을 지고 가는 수많은 고난의 종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고통 앞에서 지금 우리가 이사야 53장 ‘우리’의 고백을 한다면, 그 순간 우리는 자유와, 회복과, 평화와, 구원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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