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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만 의뢰하라

고린도후 윤여성 형제............... 조회 수 2619 추천 수 0 2010.06.06 09:4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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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고후1:3~9 
설교자 : 윤여성 형제 
참고 : 새길교회 2010.4.25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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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하나님만 의뢰하라”

[ 고린도후서 1 : 3 ~ 9 ]

 

윤여성 형제

 

오늘 본문 9절의 말씀 중 “우리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죽은 사람을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라는 말씀이, 저에게는 믿음생활을 하면서 잘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었습니다. 

 

 ‘나의 능력은 인정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뢰하라니 … …’.  이것이 진정한 믿음의 길로 들어가는 마지막 걸림돌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사랑의 길,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위로, 우리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과 평안 등등은 너무나 좋아서 받아들이기 쉽고 당연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세상살이를 하는 동안 내가 노력해서 갖게 된 능력을 인정하지 말라니,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제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상고하는 것이 정말 재미있어서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있을 때, 저에게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여름방학이 막 시작되었을 때, 심한 감기몸살을 앓게 되었습니다. 한여름 감기는 개도 걸리지 않는다고 하던데, 제가 58년 개띠인데, 심하게 앓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저에겐 어떤 결정적인 일이 일어날 때, 그 전조가 꼭 있었습니다. 전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처음으로 재미있게 읽고 배우게 될 때도, 여름방학이 시작되면서 발을 다쳐 8주간 꼼짝 못하게 해 놓고서 공부를 시키셨습니다. 여하간 이번에도 감기몸살 정도가 아니라, 간헐적으로 체온이 올라가 고열이 되니 가끔 헛소리를 할 정도로 심했습니다. 또 온통 두들겨 맞은 것처럼 근육통도 심했고, 누워있어도 편안하지 않고 괴로웠습니다. 병원에 갔지만, 원인도 모르겠고 병명도 알 수 없었습니다. 다만 열을 내리게 하는 해열제와 일반적인 처방만 받아가지고 왔습니다. 한 번 열이 올라 정신이 없게 되면 괴로워서 정말 죽고 싶었습니다. 사람들이 죽고 싶다는 말을 장난으로 하는 줄 알았는데, 제가 겪으니 정말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롭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급기야 저는 집사람을 붙들고 기도해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낫게 해달라고 기도해주기를 간절히 간청했습니다. 제가 기도해야 되는데, 다급하니까 집사람에게 기도해달라고 사정하게 되었습니다. 이 이후로는 다른 사람이 기도해달라고 하면, 가능한 꼭 하려고 합니다. 그 절박함을 체험했기 때문이지요.

 

 일주일 정도 죽을 듯이 아프다가 씻은 듯이 나아, 언제 죽을 사람처럼 아팠던 사람인가 할 정도로 멀쩡했습니다. 참으로 희한했습니다. 이 체험이 저에게는 하나님의 존재를 명확히 알게 하였고, 그 이후 나의 능력 !, 이런 소리는 다시는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 좋아하던 술도 자연스럽게 끊게 되었던 사건이었습니다. 아프던 시간동안 하나님과 많은 이야기를 했고 약속한 몇 가지가 있었거든요.

 

저만 이런 체험을 하였을까요. 오늘 본문의 저자인 바울도 고린도후서 12장 7절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말할 수 없는 환상과 계시를 받고도, 자신의 육체적 가시가 없어지지 않아 기도를 합니다. 그 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은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육체적 가시를 그대로 두었다는 이야기지요. 바울은 고백합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하신 말씀에 기뻐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 고백합니다. 바울이 이야기하듯 하나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체험을 통하여 하나님만 의뢰하였다고 고백하는 역사가 있었기에, 오늘도 하나님의 자녀로 살겠다고, 하나님을 나의 주인으로 섬기며 살겠다고 순종하고 결단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조성기라는 소설가를 아십니까? 제가 좋아하는 소설가입니다. 이 분의 세상경력이 참 재미있어요. 제가 보기엔 재미있지만, 사실 본인에게는 현실적인 삶이기에 재미있다는 표현이 그 분에게는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여하간 이 분은 경기고등학교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했습니다. 바울처럼 세상에서 최고의 학교를 다닌 거지요. 그러나 대학 때 기독교 신앙에 심취해 평신도 선교사를 꿈꾸며 졸업 후 선교단체에 들어가 활동하다가 큰 실망을 하고 방황하다가, 장로회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기에 이릅니다. 이 과정에서 하나님과의 방황은 그의 소설의 소재가 되어 사용되어왔습니다. 저는 특히 그의 소설 중 ‘야훼의 밤’을 참 좋아합니다. 그는 그의 소설 속에서 자신의 번민을 이야기하고 있고, 어떤 부분에서는 자신의 현실 삶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특히 소설시라는 특이한 표현양식을 빌려 쓴 ‘내 영혼의 백야’는 그의 실제 삶을 쓴 것입니다. 그가 서문에서 이것을 쓴 이유는 몸과 정신이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기이한 체험에 온통 사로잡혀 있었기에 썼다고 고백합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그는 정말 현실에서 아팠습니다. 그의 부인이 간호사임에도 큰 도움이 되지 않고, 점점 죽어갑니다. 많은 세상적인 방법을 동원했겠지만, 점점 죽어가는 그 자신을 그는 그저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원망도 해 보았겠지요.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 뜻대로 살아보려고 했던’ 자신을 한없이 저주하는 밤도 보냈겠지요. 스스로 임종예배를 드려야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스스로를 포기하는 단계까지 갑니다. 그러던 그가 충청도에, 하나님께 기도하는 아주머니들이 있다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신유의 능력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 반신반의하면서 어렵게 찾아갑니다. 그런데 안수를 받고 살아나는 것을 느낍니다. 그의 말입니다. “그것은 내가 살아나는 감각이었습니다. 너무도 생생한 그 감각 속에서 나는 흐느껴 울기 시작했습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출구는 바로 눈물의 통로 끝에 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살아났습니다. 자신도 하나님을 믿으려고 그렇게 수십 년을 싸워왔지만 이성적으로만 믿어왔기에, 자기 자신에게 일어나는 이 초자연적인 현상을 믿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가 죽음에서 생명의 기운을 느낀 후, 다시 기도를 받기위해 서산으로 내려가면서 ‘내 영혼의 백야’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길을 건너

   모든 것이 낮아져 있는 겸허한 골목으로 들어섰습니다.

   내 속의 높은 것들도

   이제는 시골 집들의 지붕처럼 낮아져 있었습니다.”


 인간의 교만을 벗어던지고 겸손의 길로 들어서는 자신의 모습을 겸허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그 큰 능력을 주시면서도 육체의 가시를 남긴 이유가 자고하지 않게, 교만하지 않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었음을 바울이 깨닫듯이, 소설가 조성기도 이제야 그 비밀을 깨달았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 자신이 하나님께 무너지면서 하나님만 의뢰하는 자로 거듭나게 된 것입니다. 이 책 끝에 시인 정호승씨와의 대화에서 그는 질문에 답합니다.

 

- 죽음의 경험을 통해 오늘의 삶에 얻은 것이 있다면요?

  ‘흔히 이야기하듯 사소한 일상에 대한 새로운 눈뜸입니다. 아내와의 사소한 대화에서도 이제는 소중함을 느낍니다.’

- 그렇다면 우리의 삶은 무엇일까요?

  ‘삶은 여전히 수수께끼입니다. 어떤 의미가 있는지 여전히 신비로움 그대로 남아 있죠. 삶에는 이해할 수 없는 불가지론적인 부분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번 경험을 통해 한 가지 절실하게 깨달은 것은 원론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관계성의 회복, 즉 사랑의 관계를 확장 심화하는 데에 인생의 의미를 둬야 하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 예전에 느꼈던 절대자의 존재와 죽음을 경험하고 난 뒤에 느끼는 절대자의 존재에 대해 달라진 점이 있다면요?

  ‘예전에 인식한 절대자는 주로 윤리적 기준, 행위의 기준을 제시하는 절대자였습니다. 본성을 제지하고 규제하는 절대자, 윤리적 판단으로 억압하는 절대자였습니다. 정욕적 욕망이나 시기, 질투 등의 마음을 극복하고자 하는 갈등과 긴장 속에서 내가 힘써서 도달해야 할 대상으로서의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내 존재 자체를 품어주는 존재로서의 절대자를 경험했습니다. 가령 사형수가 온갖 세상의 나쁜 짓은 다 했지만, 사형수의 어머니는 [아이구 내 새끼야!]하고 품어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는 절대자의 따뜻한 사랑의 포옹을 느꼈습니다. 물론 이전에도 그런 사랑을 느낀 적이 있지만 그 때는 시식에 불과한 정도였습니다.’

 

소설가 조성기씨는 이 일을 통하여 하나님과 다시 새롭고 더욱 단단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고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는 것 같습니다. 지금은 숭실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교회도 개척하여 산울교회에서 목회자처럼 살아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목회자처럼’ 이란 뜻은 우리 새길교회처럼 담임목사가 없이 평신도교회에서 그저 설교를 담당하는 전도사로서, 교회를 운영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간 그의 소설에서 문득 문득 묻어나는 신에 대한 궁금증, 신의 존재여부, 신과의 관계 등등의 문제들이 수 없는 세월동안 그를 괴롭혔고, 이것은 믿는다고 하는 모든 사람들이 갖게 되는 고민이기도 하지요. 그 문제가 이제 그에게는 해결되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의 소설 속의 고백을 들으며 한없이 흐르는 눈물을 삼키던 순간들을 기억합니다. 아마도 저도 같은 심정이 되었기에 그런 감정이 생겼겠지요. 소설가 조성기씨가 어떤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나를 사로잡고 있는 질문은 언제나 ‘네가 지금 어디 있느냐? 네가 지금 있어야 할 곳에 있느냐?’라는 성경 창세기 3장 9절의 질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럼, 우리는 어디에 있나요? 우리도 생각해야할, 우리 자신에게 던져야할 질문이 아닐까요?

 

조성기씨가 신유의 체험을 쓴 글을 읽으면서 “아! 하나님의 역사구나” 하고 느낄 수 있었습니다. 사실 기도하는 아주머니들 중에 신유의 능력을 가진 분은 오직 한 분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주머니들이 모여서 기도함으로, 한 분에 의해 신유의 기적이 일어나는지의 관심을 분산시킵니다. 그래서 신유의 능력을 행하는 분이나 신유의 능력을 받는 분이나 서로 보호받게 되는 것입니다. 교만에 빠질 위험을 사전에 방지하는 것이지요. 또 하나님이 아닌 인간이 영광을 받는 어리석음을 사전에 방지하는 것이지요. 이것이 믿는 자들의 방식입니다. 신유의 능력도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지, 인간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는 것을 명확히 알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신유의 능력이 있답시고 치료하며 돈 받는 사람은 다 가짜인 것입니다. 직접 자신이 돈을 요구하지 않았고 치료받은 사람이 고마워서 준 것이라 하더라도, 받았다면 그는 가짜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챌 일이라는 것을 명확히 알기에, 절대로 그런 일은 하지를 않지요. 이를 몰랐다면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 아닙니다.

 

제가 이런 쪽에 관심이 있어서 그런지 이런 종류의 이야기들을 꽤 알고 있습니다. 제가 춘천에 살고 있을 때 만났던 의사에게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자주는 아니지만 아주 가끔 만나게 되었던 의사인데, 전에는 술 먹고 있던 저의 모습을 보다가 술을 끊은 모습을 보면서 이상하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한 모양이었습니다. 그가 술에 약간 취한 다음, 저에게 털어놓은 이야기입니다.

 

- 그의 집안에 맏이인 형이 있었는데, 공부도 잘하고 해서 집안의 자랑이자 소망이었답니다. 그가 미국으로 유학을 가고 박사학위를 받을 때까지 부모님들도 열심히 도와주었고, 이제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한국에 오면 집안의 대들보 노릇을 하리란 희망으로 부풀어 있었다고 합니다. 드디어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자기 형에게서 나온 말이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이제 미전도민족을 위한 성경 번역 일을 하는 평신도 선교사로 일생을 살겠다.”고 말하여 모든 사람을 실망시키고 말았습니다. 자기 형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도 저에게 자기 형은 배신자라고 비난하면서 큰 실망을 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저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그런데 자기 형이 하는 말이, “번역 일을 한다고 특별히 월급을 받는 것도 아니어서 참으로 살기가 쉽지 않지만, 꼭 집안에 돈이 떨어질 즈음 필요한 만큼의 돈이 생긴다.”고 이야기한다는 거지요. 이 의사가 자신도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형이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닐 텐데, 믿기지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의 형의 이야기를 계속 들려줍니다. “이른 아침 집 문을 열면 돈이 든 봉투가 필요할 때는 어김없이 놓여있거나 필요한 먹을거리가 있어서 계속 먹고 살 수가 있었다.”고 말한다는 거지요. 이 의사는 이 이야기를 하면서 저에게 “하나님이 계신가요? 속이 굉장히 상하지만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부인하기가 어려워 안 믿을 수도, 믿을 수도 없는 상태라.”고 저에게 털어 놓았습니다. 벌써 15년도 더 지난 이야기이니, 지금쯤 그 의사도 하나님을 믿고 있겠지요.

 

 이런 유사한 이야기가 기독교 역사에는 많습니다. 그 한 예가 최초의 기독교 수도사로 알려진 폴의 이야기입니다. 폴과 같이 언급되는 안토니가 AD 343년에 수십 년 이상 수행한 것으로 알려진 폴을 아라비아사막의 동굴로 찾아갑니다. 두 사람이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데, 까마귀가 빵 하나를 물어다 놓았습니다. 그러자 폴이 말합니다. “지난 60년 동안 하루도 빼놓지 않고 까마귀가 빵 반쪽을 가져다 놓았죠. 그런데 오늘은 당신이 오셨다고 주님께서 두 사람 분량의 양식을 보내셨군요.” 콥틱 기독교 성화의 가장 유명한 테마가 된 ‘온전한 빵 한 개를 물고 오는 까마귀’ 그림의 내용입니다. 콥틱 기독교는 이슬람국가가 된 이집트에서도 현재 인구의 10%를 차지하며 아직도 후예들이 굳건한 믿음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예수피난교회와 모세교회가 여전히 이집트에는 남아 있어서 관광객의 눈길을 끌고 있습니다.

 

요즘도 우리는 종종 목사들에게, 믿는 자들에게 일어나는 이 까마귀의 사건을 듣게 됩니다. 대학 후배인데, 뒤늦게 신학대학원을 가서 목사가 되어 몇 년 전 분당 가까운 용인 쪽에 개척교회를 세운 분이 있습니다. 요즘 한국에서 그것도 대도시에서 개척교회를 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약아서 오지를 않는데, 그래도 용감하게 교회를 하고 있으니 오직 하나님만 의지한다고 하는 그 친구의 실제 고백입니다.

 

“세 들던 아파트에서, 별안간 아파트를 판다고 나가달라고 해서 곧 나오게 생겼어요. 아이들은 셋씩 되는데, 전세 값은 천정부지로 뛰어올라가 전세 얻기를 포기하다시피하고 상가에 있는 작은 교회에서 모든 식구가 먹고 잘 각오를 하고 있었지요. 주일날 처음 보는 아주머니가 교회에 와서 같이 예배를 드리고 점심을 함께 먹게 되었지요.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말씀에 은혜를 받았다고 하면서, 뭐 좀 도울 일이 없냐고, 요즘 가장 힘든 일이 무엇이냐고 해서 자신도 모르게 사는 집 이야기를 하게 되었어요. 그랬더니 그 아주머니가 자기는 지금 큰 평수의 아파트에 혼자 살고 있다고 하면서 방이 많으니 들어와 살라고 하면서, 1년은 살 수 있다고 하여 들어가 살게 되었어요. 그 아주머니는 자신이 다니는 교회의 버스를 놓치는 바람에 다시 집으로 가다가 ATM에서 돈을 찾을 요량으로 집 방향과 다른 상가로 오게 되었고 돈을 찾다가, 그래도 ‘자신이 권사인데 주일예배를 보아야지 하는 생각으로 상가의 교회로 오게 되었고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하면서, 하나님은 참 재미있는 분입니다.’ 라고 고백하더라.”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까마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1년 후에는 어떻게 할 생각이냐고 질문을 하자, 그 목사는 1년 후에도 하나님이 지금처럼 알아서 하실 텐데 제가 왜 걱정을 하겠냐고 답하면서 “정히 안 되면 교회에서 살면 되지요. 이제는 걱정하지 않아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들뜬 얼굴로 이야기하는 그가, 마치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 후 1년 후의 일은 더 기가 막힌데, 나중에 기회가 되면 다시 말씀드리지요.

 

하나님은 하나님을 따르는 우리에게도 필요하다면, 이런 일을 오늘도 하시겠지요. 가끔 이것을 체험하고도 잊어버린 목회자들이 스스로 까마귀가 되어 하나님과 무관하게 고급승용차도 사고 별장도 사고해서 문제가 되지만, 이런 사람들을 하나님이 그냥 두시겠습니까? 나중에 다 해결하시겠지요. 우리가 직접 해결할 일이 아니지요. 그냥 두면 하나님이 하십니다.

 

전 이런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후배 교수의 형이 이스라엘에 선교사로 있을 때 이야기입니다. 문제가 생겨서 살던 집에서 쫓겨나 사막과 같은 곳으로 가족과 함께 내던져진 적이 있었다는 거죠. 그때는 핸드폰도 없던 시절이라, 아는 곳에 연락도 못하고 저녁시간이 지나 어둠이 깔려 막막하던 순간이었데요.  그저 가족을 모아놓고 하나님께 기도할 수밖에 없어서 간절한 심정으로 기도를 했다는군요.  눈을 떴는데, 저 멀리서 불빛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곧 차가 와서, 몇 사람이 내렸데요. 그러곤 ‘목사님 여기 계셨군요. 오늘 행사가 있어서 음식을 많이 해서 목사님 드리려고 연락을 했더니, 떠나셨다고 해서 이렇게 찾아다녔어요.’ 그러면서 음식을 내놓아, 배가 고프던 차에 허겁지겁 먹으면서 하나님께 감사하며 눈물을 흘렸다는 체험담입니다.

 

제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적기 때문에, 저에게 이런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시는 것 같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또 많은데, 더 하면 지루하시겠지요.  아마도 이런 종류의 이야기를 자꾸 듣게 하시는 이유는 잘은 모르겠지만, 하나님만 의뢰하는 삶을 살라고 하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오늘 본문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을 따르면서 많은 고난을 받았지만, 그 환난 중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위로하시며 그래서 고난을 견디게 하신다고 이야기합니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가 힘에 지나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져 우리 스스로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지만, 이것은 바로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을 의뢰하는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시기 위한 기회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믿음이 되면,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라는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겠지요.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시고 우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분에게, 우리의 능력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물론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최선을 다하여 살아야겠지요. 이것을 잘못 이해하면, 하나님의 능력으로 산다는 뜻이 나는 열심히 살지 않고 가만히 있고, 하나님이 알아서 해결한다는 그런 뜻은 아니지요.

 

믿는 자라면, 이제 나의 능력이란 결국 하나님이 내 안에서 역사하여 나온 능력이라고 다시 정의해야겠지요. 바울이 빌립보서 4장 13절에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한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겠지요. 즉, 은혜위에 은혜를 더 하여주시는 기쁨을 누리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그러더라구요.  진리란 사는 것이지, 말이나 이야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하더라구요.  하나님의 진리가 우리의 삶속에 있다면, 즉 이 세상에서의 삶이 나의 능력으로 먹고 사는 것이 아님을 깨달으면, 어떻게 될까요. 신명기 8장 17, 18절에 “당신들이 마음 속으로 ‘이 재물은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모은 것이라’고 생각할 것 같아서 걱정이 됩니다. 그러나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신 그 언약을 이루시려고 오늘 이렇게 재산을 모으도록 당신들에게 힘을 주셨음을, 당신들은 기억해야 합니다.”라고 설명해주십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우리가 먹고 산다는 생각이 들면, 우리의 삶을 나누는 일이 아주 쉬어지지 않을까요?  나눌수록 하나님이 채워주시는 것을 체험할 테니까요.  바울은 이 체험을 빌립보서 4장 19절에서 이야기합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는 말씀으로, 삶을 함께 나누는 자에게 부어주시는 축복의 비밀을 말씀하십니다.

이 놀라운 비밀을 체험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진정으로 기도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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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85 관심과 무관심     2001-06-17 974
3584 마태복음 두 빚진 자의 비유(용서) 마18:21-35  한태완 목사  2003-07-10 2191
3583 사도행전 힘있는 교회 행12:1-19  김삼환 목사  2003-12-23 3812
3582 다니엘 하나님 앞에 무릎꿇자 단6:10  강재식 목사  2002-02-01 5071
3581 요한복음 영적으로 자유롭습니까? 요8:29-32  강종수 목사  2010-06-06 2197
» 고린도후 하나님만 의뢰하라 고후1:3~9  윤여성 형제  2010-06-06 2619
3579 고린도전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사오며 고전15:35~58  길희성 형제  2010-06-06 2233
3578 이사야 너의 고통 앞에서 사52:13~53:12  신지니 전도사  2010-06-06 2278
3577 이사야 천지인 그리고 성령 사32:15~18  권진관 형제  2010-06-06 2325
3576 사사기 기억되는 역사, 기억되는 삶 삿11:37~40  최만자 자매  2010-06-06 2332
3575 빌립보서 아바타와 아이티, 그리고 구원신화 빌2:5~12  신동현 간사  2010-06-06 2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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