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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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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한규 목사 |
참고 : | 이한규 http://www.john316.or.kr |
< 축복을 예비하는 마음 >
어느 날, 한 무신론자가 호수에서 보트를 타고 낚시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거대한 네스 호 괴물이 나타나 꼬리로 보트를 쳤다. 보트가 격렬하게 흔들리자 그가 외쳤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그때 하늘에서 어떤 소리가 들렸다. “도와달라고! 네가 나를 믿었었니?” 그가 다시 소리쳤다. “하나님! 이제는 믿어요. 제발 도와주세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저는 네스 호 괴물이 있는 것도 믿지 못했어요.”
사람의 마음이 참 간사하다. 변할 때는 너무 쉽게 변한다. 청년들을 보면 연애 때는 좋다고 하다가 얼마 후에는 헤어졌다고 죽겠다고 한다. 그런 모습을 보면 어른들은 빙그레 웃는다. 이미 겪은 일이고 나중에 보면 별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그런 일을 당하면서 조금씩 커간다.
왜 시험이 오는가? 근본 원인은 ‘환경’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다. 아담이 처음에는 하와를 보고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찬탄했다. 그러나 범죄 후에는 ‘하나님이 제게 주신 저 여자 때문에’라고 했다. 그처럼 원망의 최종 종착지는 보통 ‘하나님’이 되기에 원망을 주의하라. 원망할 일이 있어도 마음을 잘 다스리면 분위기가 살아난다. 그러면 사람도 기뻐하고 하나님도 기뻐한다. 그래서 마음을 다스리는 것은 성을 다스리는 것보다 낫다.
사람들은 일이 잘못되면 대략 이런 핑계를 댄다. 첫째, 남 탓을 한다. 그러나 남 탓은 아무리 맞는 말을 해도 자신이 팔불출임을 나타낸다. 둘째, 환경 탓을 한다. 그러나 나쁜 환경에서도 성공한 사람이 많다. 셋째, 실수라고 한다. 그러나 실수도 욕구불만이 많을 때 잦다. 넷째, 사람은 완전할 수 없다고 한다. 그 말은 맞지만 그래도 핑계는 부끄러운 것이다. 다섯째, 마귀 탓을 한다. 마귀 탓은 가장 무책임한 태도이다.
일이 잘못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첫째, 잘못을 인정부터 하라.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면 진정한 회개를 못한다. 둘째, 남을 탓하지 말라. 남의 책임을 지지는 못할망정 내 책임까지 남에게 전가하면 안 된다. 셋째, 잘못을 승화시키라. 쉽게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말고 잘못을 극복할 능력과 기회가 있음을 믿으라. 넷째, 진심으로 회개하라. 잘못이 생겼을 때 “요즘 예배와 기도를 게을리 했더니...”라고 자신을 성찰하라. 내일의 축복은 ‘회피’하지 않고 ‘회개’할 때 주어진다.
사람들은 환경이 좋으면 행복할 줄 알지만 좋은 환경에서는 오히려 타락의 가능성이 커진다. 최초에 인간이 어디에서 타락했는가? 최고의 환경인 지상낙원에서 타락했다. 그처럼 좋은 환경이 다 좋지는 않다. 좋은 환경보다 좋은 마음이 중요하다. 모든 문제는 마음에서 온다. 죄와 불행은 최대 원인도 ‘환경’이 아니라 ‘마음’이다.
예레미야 17장 9-11절에 이런 말씀이 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 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필경은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 마음이 깨끗해야 축복과 지혜가 주어진다는 말씀이다.
어느 날, 링컨의 정적이 링컨을 두 얼굴을 가졌다고 욕했다. 그러자 링컨이 말했다. “두 얼굴을 가졌다면 내가 이 얼굴을 하고 있겠소?” 링컨은 얼굴은 안 생겼어도 마음은 청결했다. 그래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정치가가 되었다.
외면을 보지 말라. 외면만 보고 어떻게 믿는가? 지금 사방에는 속이려는 사람 천지이다. 요새 학력 위조 논란이 많다. 겉으로 영어를 조금만 해도 무조건 우러러본다. 그처럼 외적인 것만 보다가 한방에 인생을 망친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반면에 외모와 학력은 조금 부족해도 인생을 진짜 멋지게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처럼 마음을 볼 줄 알고 마음을 다스릴 줄 알아야 복된 삶이 가능하다.
< 마음이 청결하게 되는 길 >
본문에는 산상팔복의 6번째 복인 ‘마음이 청결한 자의 복’이 나온다. 청결함이 무엇인가? 자신에 대해서는 ‘마음이 둘로 나뉘지 않는 것’이고, 남에 대해서는 ‘마음이 둘로 향하지 않는 것’이다. 그처럼 청결한 마음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1. 진실하라
청결함이란 아무도 보지 않을 때 가진 마음과 행동이다. 그처럼 남이 볼 때와 보지 않을 때의 삶이 다른 이중적인 삶의 덧에 빠지지 않고 진실하게 살려면 무엇이 있어야 하는가? 실제적인 원리로 몇 가지 생각해보자.
1) 예배하는 삶
주일에 예배할 때 손들고 찬양하다가 월요일부터 그 손으로 손가락질하고 그 찬양하던 입술로 잘못된 말을 하면 하나님이 어떻게 그 예배를 받겠는가? 하나님은 실제 삶으로 연결되는 진실한 예배를 받으신다. 진실한 예배의 핵심은 ‘감사’에 있다. 최선을 다했다면 길이 막혀도 감사하고 일이 망쳐도 감사하라. 하나님은 그 감사의 눈물이 어우러진 예배를 통해 최상의 길을 예비하실 것이다.
2) 절제하는 삶
살다 보면 은밀하게 죄를 즐기려는 여러 유혹들이 찾아온다. 그 유혹을 이겨내라. 이겨내지 못하면 즉시 회개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구하라. 고린도전서 13장을 보면 사랑을 정의할 때 제일 먼저 “사랑은 오래참고.”라고 했다. 사랑은 참고 기다리는 것이다. 전진해야 할 때 전진하고 기다려야 할 때는 기다리는 것이 아름답다.
3) 용서하는 삶
하나님을 사랑한다면서 누군가를 증오하면 그것도 위선이다. 미움을 극복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도 그 테스트에서 합격하도록 하라. 왜 전쟁이 일어나는가? 대개 몇 사람 정치가의 마음속의 증오가 증폭되어 일어난다. 미움은 모든 것을 파괴한다. 미움은 ‘관절염과 디스크와 위장병’의 3대 질병을 낳고 다른 수많은 건강을 해친다. 미움을 극복하고 용서를 다짐해야 그때부터 축복도 시작된다.
4) 녹아지는 삶
가끔 보면 어떤 사람은 깨끗하게 살겠다고 세상과 분리해서 수도원이나 기도원을 찾는다. 그러나 어둔 세상에서 선한 빛을 비추지 않고 세상에서 선하게 녹아질 줄 모르는 상태에서 단지 깨끗하게 살려는 목적으로 세상과 격리된 곳을 찾으면 그것은 위선으로 변질될 수 있다.
이제 진실하려고 애쓰되, 무엇보다 자기에게 진실하라. 거짓말을 자주 하면 나중에는 자기도 그 거짓말을 믿게 되는 이중 인격적인 삶까지 생긴다. 항상 하나님 앞에서 이런 기도를 많이 드리라. “하나님! 진실하지 못한 저를 용서하소서!” 그처럼 진실을 간절히 추구하는 모습을 보이면 하나님이 그 마음을 보시고 그에게 마음이 청결한 자의 복을 내려주실 것이다.
2. 순수하라
육신은 받을 때 만족을 느끼지만 영혼은 줄 때 만족을 느낀다. 그래서 헌신이 없는 만족은 없다. 그리고 헌신할 때는 순수하고 사심이 없이 헌신해야 진정한 기쁨과 평안을 얻는다. 결국 행복하게 살려면 무엇보다 욕심을 극복하라. 하나님의 영광과 많은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주겠다는 거룩한 욕심은 가지되 세상적인 욕심은 버리라. 욕심이 없으면 성공하지 못할 것 같지만 나중에 보면 욕심이 없이 순수하게 헌신하는 사람들이 더욱 성공한다.
어린이의 가장 큰 장점은 순수함인데 요새는 아이들의 순수함이 많이 사라졌다. 그래서 약삭빠른 아이를 보면 미래의 불행이 느껴져서 안타깝다. 하나님도 약삭빠른 사람을 보면서 그렇게 안타깝게 생각하실 것이다. 사람은 어른이 되면서 대개 거짓말과 눈치가 늘어난다. 신앙도 시간이 지나면서 타성에 젖어 순수함을 잃고 거짓과 가식이 많아질 가능성이 많다. 그래서 순수함을 잃지 않도록 ‘사심 없는 헌신'을 계속 실천해야 하나님의 축복도 계속된다.
피카소는 그림솜씨보다 어린아이 같은 순수한 마음 때문에 대가가 되었다고 한다. 피카소는 아이들과 자주 놀면서 순수한 마음을 잃지 않았다. 그래서 기발한 발상이 많았다. 어느 날, 생선을 먹고 가시가 남았다. 그때 장난기가 생겨 가시에 물감을 칠해서 도화지에 탁 찍었다. 그 그림이 지금은 아파트 한 채보다 비싸다. 피카소의 그림을 보면 하늘이 파랗지 않고 양쪽 눈도 대칭이 없이 괴상하게 그려져 있다. 순수한 마음에서 나온 그런 초현실적인 그림이 그를 대가로 만들었다.
순수한 마음을 가질 때 사람들은 “어떻게 사나?”하고 걱정하지만 나중에는 그런 사람들이 오히려 복을 받는다. 요새 왜 삶이 힘들어지는가? 가장 큰 이유는 돈을 밝히고 계산하고 비교하는 순수하지 못한 마음 때문이다. 결국 살면서 가장 걱정해야 할 문제는 순수성을 잃는 문제이다. 주님은 어린아이처럼 순수해야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고 했다. 하나님은 계산을 초월해 헌신할 때 계산을 초월해 축복한다.
왜 예수님이 바리새인을 싫어했는가? 사두개인은 “나는 돈과 권력을 좋아한다!”고 대놓고 돈과 권력을 추구했지만 바리새인은 경건한 척 하면서 돈과 권력에 욕심을 부렸기 때문이다. 그처럼 욕심은 눈을 어둡게 만들어 결국 패착을 두게 한다. 바둑에서 왜 훈수할 때 훨씬 수가 잘 보이는가? 직접 바둑을 두면 승부욕 때문에 눈을 멀어서 ‘잡을 것’만 보고 ‘잡힐 것’은 보지 못하지만 훈수할 때는 승부욕이 없으니까 눈이 밝아져 수가 더 잘 보이게 된다.
잘못된 욕심을 버리라. 욕심을 가지면 더 빨리 부자가 되고 출세할 것 같지만 돈과 권력을 바로 쓰는 지혜가 없기에 자충수를 두어 오히려 그 돈과 권력 때문에 인생을 망친다. 또한 그 모습을 보고 자란 자녀는 나중에 걸식한다. 반면에 욕심을 버리면 돈도 못 벌고 출세도 못할 것 같지만 돈과 권력을 바로 쓰는 지혜가 있기에 처음에는 늦는 것 같으나 점점 축복의 가속도가 붙어 나중에는 누구보다 복된 존재가 된다. 또한 그 모습을 보고 자란 자녀는 나중에 거룩한 큰 손이 된다.
욕심은 영혼을 흐리게 만드는 내면의 아말렉이다. 물질의 힘이 커질수록 정신의 힘은 약해진다. 돈에 너무 연연하지 말고 써야 할 때는 과감히 쓰라. 솔숲을 흐르는 청풍을 느끼려면 선풍기를 꺼야 하고, 풍성한 명월을 느끼려면 등불을 꺼야 한다. 돈으로 사는 것만이 귀한 것은 아니다. 돈 없이도 누릴 수 있는 행복의 조건들은 많다.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을 잃지 말라. 계산적으로 살면 잘살 것 같지만 더 못살고 순수하게 살면 못살 것 같지만 더 잘산다.
3. 초심을 잃지 말라
일전에 ‘진품명품’이란 TV 프로그램이 있었다. 누가 소장품을 가져오면 전문가들이 그 물건의 감정가를 매긴다. 그러면 그 감정가에 따라 소장인의 표정이 달라진다. 또한 그 프로를 보는 사람들은 온통 “그것이 얼마짜리인가?”에 관심을 둔다. 그러나 물건의 가치는 돈 가치로만 평가되지 않는다.
얼마 전 어머님이 옛날에 기록한 수첩을 보았다. 상징조작이 심한 현대 사회이기에 나는 상징에 큰 의미를 두지 않고 살기로 작정했다. 그러나 어머님의 수첩을 보면서 어머님의 체취를 느꼈다. 그 수첩은 남에게는 천원의 가치도 되지 않지만 내게는 돈으로 매겨질 수 없는 가치를 지녔다. 그처럼 물건의 가치가 꼭 돈 가치로만 평가되지는 않는다. 좋은 기억을 주는 물건은 영혼을 시류에 떠내려가지 않도록 든든히 붙잡아 닻과 같다. 살다 보면 돈 외에 행복의 조건들은 많다.
가끔 옛 친구를 만나면 설렘도 있지만 두려움도 있다. 옛 친구가 옛날의 체취는 없고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해 있으면 그 만남은 부담스럽다. 차라리 만나지 않고 옛날의 좋은 기억을 그대로 가졌으면 좋았을 것을 하면서 만남이 후회될 때도 있다. 사람은 과거의 좋은 기억을 오래 간직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정작 오래 간직해야 할 것은 과거에 선한 결단을 했을 때 가졌던 ‘초심’이다. 그 초심을 잃지 말라.
역대하 26장에는 웃시야 왕이 초심을 잃고 망한 얘기가 나온다. 웃시야 왕은 비극적으로 죽은 아버지 아마샤를 이어 16세에 왕이 되었다. 그 후 52년 동안 유다 왕국의 최대 번영기를 이끌었다. 그는 산업을 육성하고, 무역로를 확보해 큰 국부를 창출했고, 땅을 개간해 경지를 만들고, 샘을 많이 파서 목축업을 키웠고, 군대를 정비하고 무기를 개발해 막강한 군사력으로 영토를 확장하고 이웃 나라의 조공을 받았다.
어떻게 그가 그렇게 성공했습니까? 성경은 그가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는 스가랴 선지자에게 하나님의 뜻을 물으며 하나님의 뜻대로 정치를 했다. 그처럼 말씀에 열린 겸손한 귀를 가지고 정치하다가 나라가 강성해지면서 교만에 빠졌다. 그리고 말씀에 귀를 닫으면서 선지자의 말보다는 아첨하는 무리의 달콤한 아첨에 더 기울어졌다.
결국 웃시야는 초심을 잃고 교만에 빠져 제사장에게만 허락된 제단에서 향을 피우려고 했다. 그때 제사장 아사랴가 제사장 80명을 데리고 가서 말했다. “여호와께 분향하는 일이 왕의 할 바가 아니요 오직 분향하기 위하여 구별함을 받은 아론의 자손 제사장의 할 바니 성소에서 나가소서(대하 26:17-18).”
웃시야는 자기에게 감히 “No(노!)”라고 말한 것을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불같이 화를 냈다. 그때 웃시야의 이마에 문둥병의 징후가 나타났다. “성소에서 나가라!”는 제사장의 말을 사람의 말로 듣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웃시야는 성전에 다시 갈 수 없었고, 별궁에서 칩거하며 죽는 날까지 문둥병자로 살았다. 초심을 잃으면 그 결말은 비극으로 끝난다.
사람은 잘 나가면 꼭 전락하는 길로 빠진다. 그러므로 성공신화를 경계하라. 힘이 있는 곳으로 몰리지 말고 내 힘이 절실히 필요한 곳을 찾으라. 다수에 휩쓸리지 말고 창조적 소수가 되기를 두려워하지 말고, 힘이 생길수록 자기 마음을 지키라. 그래야 리더의 축복을 얻고 예수 믿고 인물 되는 축복을 얻는다. 초심을 잃으면 언젠가 하나님의 정지 신호를 받는다. 그 신호 앞에서 자기를 돌아보며 초심을 회복하라. 욕심을 버리고 초심을 회복하면 눈에 욕심의 비늘이 벗겨지면서 세상도 바로 보이고 하나님도 바로 보인다.
4. 성령으로 충만하라
가끔 보면 자신의 청결한 삶을 자랑하는 분들을 만난다. “목사님! 저는 남은 돈을 떼먹은 적이 한번도 없이 비교적 깨끗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죄가 돈 떼먹는 죄밖에 없는가? 기독교의 청결함은 도덕적인 의미의 깨끗함이 아니라 영적인 의미의 깨끗함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피로만 진정으로 깨끗해진다. 결국 “마음이 청결하라!”는 말은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잊지 말라는 뜻이다.
이제 도덕이나 윤리 차원에서만 깨끗하게 되려고 하지 말라. 사람의 죄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다. 겉으로 드러난 죄만이 죄가 아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주님의 사랑을 온전히 깨닫지 못하는 것도 큰 죄이고,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지 못하는 것도 큰 죄이다. 그런 수많은 죄들을 해결하려면 하나님이 청결한 마음을 주셔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을 목마르게 추구해야 한다.
청결함이란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것이다. 영적인 의미에서는 하나님 한분만 바라보는 것이 바로 청결이다. 결국 청결함이란 죄를 안 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것이다. 죄를 짓지 않는 것으로 청결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여지없이 위선의 길로 간다. 결국 청결함이란 늘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해서 “예수라면 어떻게 할까?”를 생각하며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주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다.
< 하나님이 보이는 축복 >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의 약점을 은밀히 즐긴다. 성도들도 별로 차이가 없다. 그 위선의 가면을 주의하라. 세상의 모든 가면들은 보는 구멍이 있지만 위선의 가면은 보는 구멍이 없어 사람을 영적인 소경으로 만든다. 그 위선의 가면을 쓴 영적인 소경은 결코 참된 축복을 얻지 못한다. 위선의 가면을 벗고 청결한 마음을 가져야 비로소 자신의 참 모습을 깨닫고 하나님이 보이는 놀라운 축복을 얻는다.
주님은 마음이 청결하면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 했다. 사실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것은 복 중의 복이다. 모든 문제는 하나님이 보이면 다 해결된다. 하나님이 보이면 소망도 보인다. 또한 하나님이 보이면 불의한 일을 하지 못한다. 불의한 일은 하나님을 보지 못하기에 저지르는 것이다. 신호위반을 잘하는 사람도 경찰이 있으면 신호를 지키듯이 하나님이 보이면 죄를 짓지 못한다. 결국 청결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보는 것은 복 중의 복이다.
하나님이 보이면 지혜도 보인다. 지혜는 축복된 삶에 가장 필요한 것이다. 지혜가 없으면 물질도 복이 아닌 화가 되고 쓸모 있는 것도 쓸모없게 된다. 컴퓨터에 수많은 훌륭한 기능이 있어도 컴퓨터를 모르면 가치 있는 컴퓨터가 쓸모없게 된다. 그처럼 지혜가 없으면 훌륭한 인생도 못쓸 인생이 되고 자신이 가진 엄청난 가능성도 사장시키게 된다. 결국 자신을 아는 것이 인생 최대의 지혜이다.
어떻게 자신을 아는가? 컴퓨터를 잘 사용하려면 컴퓨터를 만든 사람이 준 설명서를 따라야 한다. 그처럼 자신의 삶에 대한 이해와 지혜는 자신을 만든 하나님으로부터 생긴다. 결국 하나님이 보이면 자신도 보이고 하나님을 알면 자신도 안다. 그래서 캘빈은 기독교 강요 1장 1절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혜’와 ‘자신을 아는 지혜’가 같다고 했다. 하나님을 볼 수 있으면 자신과 사물을 보는 지혜가 극대화된다. 그런 엄청난 축복이 언제 주어지는가? 마음이 청결할 때 주어진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다(잠 9:10). 하나님이 보이면 모든 것이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마음의 청결함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마음이 청결하면 마음도 시원해진다. ‘청결’이란 헬라어 단어에서 ‘카타르시스(catharsis)’란 단어도 나왔다. 그처럼 마음이 청결하면 자신의 마음도 시원해지고 하나님의 마음도 시원해진다.
이제 더욱 하나님께 가까이 가라. 하나님께 가까이 가면 청결해지고, 반대로 청결해지면 하나님과 가까워진다. 이제 청결함의 소원을 포기하지 말라. 청결함의 문제는 평생의 문제이다. 사람은 단번에 영원히 완벽하게 청결해질 수 없다. 그러므로 자신의 불결함과 부족함으로 절망하지 말고 계속 청결을 추구하라. 그러면 하나님이 성결이란 최상의 축복을 내려주실 것이다. 그런 축복의 주인공이 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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