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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10:22-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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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376696 |
우리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세상의 주, 앞으로 세상을 심판하러 오실 심판자로 믿습니다. 이런 용어들 중에서 예수님의 정체에 가장 가까운 것이 무엇일까요? 더 가깝고 먼 것은 따로 없습니다. 모두 예수님의 정체를 가리키는 중요한 용어들입니다. 이 용어의 중심은 예수님이 바로 생명의 근원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과 동일한 권능을 가지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한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일한 창조의 권능으로 사람과 세상 전체에 생명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리스도는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이 구원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짐을 받는 것입니다. 세상의 주라는 말도 똑같이 생명의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심판자는 생명과 생명 아닌 것을 구분하는 자입니다. 우리가 이런 용어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생명의 주인, 즉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한 종교의 창시자로, 또는 성자로만 인정합니다. 그들은 왜 그럴까요? 그들에게 우리와 같은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분들도 있겠지요. 우리의 입장에서 가장 편한 대답이지만 그렇게 대답하는 것으로 여기에 연관된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믿는다고 생각하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남아 있는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실제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가, 하는 질문 말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명목으로만 그리스도인이지 실제로는 아닐 가능성도 큽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른 채 그저 들은풍월로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것인지 모릅니다. 믿는 척하는 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경건생활도 가능합니다. 어떤 동기만 주어진다면 자기 몸을 불사를 정도의 열정으로 교회생활을 할 수도 있습니다. 사이비 이단에 빠진 사람들이 가정과 직장을 내팽개치는 데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질문해보십시오. 나는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에 대해서, 즉 그의 정체에 대해서 관심이 있는가? 예수와 나는 어떤 관계인가? 이런 관심이 내 영혼을 사로잡고 있는가?
예수는 그리스도인가?
요 10:24절에 따르면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 안 솔로몬 행각에 계실 때 유대인들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하게 하려 하나이까 그리스도이면 밝히 말씀하소서.”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과연 그리스도, 즉 그들이 기다리고 있던 메시아인지 아닌지에 대한 궁금증이 컸습니다. 유대인들은 특별한 민족입니다. 메시아를, 즉 구원자를 대망했습니다. 그 말은 곧 그들이 세상의 질서에 만족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처한 삶의 자리가 얼마나 혹독했는지를 보면 그들의 메시아 대망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주변의 강대한 제국에 의해서 꾸준히 수탈당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람의 힘으로 제국의 악한 질서를 해체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메시아를 고대했습니다.
당장 내일이라도 메시아가 오리라는 기다림과 믿음으로 살고 있던 그들에게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들렸습니다. 그가 메시아일지 모른다는 소문입니다. 제자들도 그런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찾아왔겠지요. 그러나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확실한 증거는 없었습니다. 메시아처럼 보이기도 하고, 아닌 것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랍비나 바리새인들과는 전혀 다른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에게서 놀라운 일들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이런 것들은 메시아의 특징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세계의 주인이 된다는 메시지를 선포하지 않았습니다. 승리보다는 오히려 실패의 길을 가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것들은 메시아의 특징이 아닙니다. 더 결정적인 것은 예수님이 자기를 가리켜 직접 메시아라고 말씀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유대인들은 따져 물었습니다. 우리를 피곤하게 하지 말고 속 시원하게 당신 정체를 밝히라고 말입니다.
이 질문 앞에서 예수님의 기분은 어땠을까요? 여러 가지로 추정해볼 수 있습니다. 메시아인 자기를 알아보지 못하고 자꾸 질문하는 걸 안타깝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메시아를 간절히 기다리는 유대 민중들이 불쌍하게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이 문제는 근본적으로 예수님의 자기 인식에 달려 있습니다. 자신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면 아무 것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게 확실하지 않으면 끊어서 대답하기가 어렵습니다. 유대인들의 질문은 바로 예수님 당신의 질문이기도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인가, 아닌가?’ 이 대목에서 혼란스럽게 생각하는 분들이 있겠지요. 예수님은 태어날 때부터, 더 나아가 태초부터 그리스도였기 때문에 자신의 메시아 성에 대한 질문이 없었다고 생각할 테니 말입니다. 그런 생각은 예수님에 대한 오해에서 나온 겁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 가능하면 그 운명을 면하게 해달라고 하나님에게 기도했고, 십자가 위에서는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라고 외쳤습니다. 자신의 정체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명명백백하게 인식하고 있었다면 이렇게 행동하지 않으셨겠지요. 예수님은 그 마지막 순간까지 자기가 완전히 실패한 자라는 불안감을 떨쳐낼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그리스도로 인식하지 못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자신이 그리스도인가 아닌가를 확인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의 관심일 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오직 한 가지였습니다. 임박한 하나님 나라입니다. 25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리스도는 자기 입으로 그리스도라고 떠벌리지 않습니다. 그의 일이 바로 그것의 증거입니다. 예수님의 일은 바로 ‘내 아버지’, 즉 하나님의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가르치고 일을 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나라는 똑같은 뜻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일은 바로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에 대한 증거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예수님 자신이 행하신 일들을 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일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마 11:2절 이하(눅 7:18절 이하)에는 세례 요한이 제자들을 예수님에게 보내서 예수님이 그리스도인가를 확인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은 요한의 제자들에게 이에 대한 가타부타 말씀은 없고 대신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라고 말했습니다.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마 11:5) 이런 구절을 호기심 천국 수준으로 읽지 마십시오. 기도하고 안수를 받았더니 병이 깨끗하게 치료되었다는 사실 자체에 떨어지지 말아야 합니다. 바로 위에서 인용한 구절에서 거론된 이들은 당시에 가장 비참한 운명에 빠졌던 사람들입니다. 인간다운 삶을 완전히 부정당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통해서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구원 사건들이 일어났다는 뜻입니다. 그 구원 사건들이 바로 하나님의 통치이며,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결국 치병과 축귀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에 대한 명백한 증거라는 말이 아니냐, 하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지금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도 치병과 축귀 같은 일에 앞장서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비참한 운명이 새로워지는 현상과 하나님 나라 사이에는 긴밀한 연관성이 있지만 결정적인 차이도 있습니다. 그건 아주 명확합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들의 비참한 운명이 아무리 새로워진다고 해도 그것을 완전히 벗을 수는 없습니다. 병이 치료되어도 다시 병이 듭니다. 늙으면서 우리는 모두 장애인들이 되고 맙니다. 그런 장애의 속도를 늦추는 것 자체를 하나님의 구원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절대적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생명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에서 일어난 치병과 축귀 등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박했다는 사실에 대한 징표들입니다. 비유적으로 설명하면, 그것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달입니다. 예수님입니다. 임박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그 권능에 휩싸여 살았던 예수님이 바로 그리스도라는 사실입니다.
‘내 양’
그런데 예수님에게 일어난 일들을 똑같이 경험하면서도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정체를 알고, 어떤 사람은 모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까요? 예수님과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도 이렇게 나뉘고, 지금도 역시 그렇습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메시아 비밀’입니다. 예수님이 메시아, 즉 그리스도라는 사실은 확연한 게 아니라 비밀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하신 일도 사실은 비밀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본 사람들이 모두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은 게 아닙니다. 믿을 수도 없습니다. 그런 일들은 당시에 나름으로 카리스마를 행사하고 있던 영웅들에게서 흔히 나타나던 현상들이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많은 예언자들이 자칭 그리스도로 행세했습니다. 군중을 끌고 광야로 나가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런 이들 중의 하나로 생각했습니다. 그런 이가 감히 하나님을 아버지라 하고, 오늘 본문 30절이 가리키듯이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하셨으니, 사람들이 예수님을 가만 둘 수가 없었습니다. 신성모독의 죄를 범한 자는 죽어야만 했습니다. 이처럼 메시아 비밀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시험에 들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메시아 비밀이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알고 믿게 되었을까요?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우리가 더 지적이거나 인격적이거나 경건하기 때문은 아닙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그것을 독특한 메타포로 설명합니다. ‘내 양’이 그 대답입니다. 믿지 않는 이유는 ‘내 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믿는 이유는 ‘내 양’이기 때문입니다. 27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목자와 양의 관계는 오늘 설교 본문 앞 구절인 요 10:1-21절까지 자세하게 나옵니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습니다. 양은 목자가 자기를 지킨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압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렇게 전합니다.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 10:15)
여기에 약간의 오해가 생길 수 있습니다. ‘내 양’이 아닌 양은 아무리 노력해도 예수님을 알 수 없으니, 그 책임은 그들에게 있는 게 아니라고 말입니다. 이는 마치 칼뱅이 말한 이중 예정론과 비슷합니다. 이미 구원받을 사람과 멸망당할 사람이 이중적으로 예정되었다면 사람에게는 아무런 책임이 없는 거 아니냐고 말입니다. 그런 방식으로 성경을 읽으면 오해하는 겁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내 양’이라는 메타포는 멸망당할 양과 구원받을 양을 이중적으로 구분하려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믿음이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모를 수도 있었는데 알게 된 이 사실을 그 이외의 그 어떤 것으로도 해명할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함께 모여 예배드리게 된 것도 하나님의 은총 말고는 해명할 길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그럴만한 능력이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힘이 우리를 끌고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합니다. 이 은총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얼마나 신비롭습니까?
‘내 양’이라는 메타포는 한 걸음 더나가서 다음의 사실을 가리킵니다. 모든 양은 ‘내 양’입니다. 처음부터 그것이 결정되어 있는 게 아닙니다. 위에서 인용한 27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 양’의 특징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목자를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이 바로 ‘내 양’입니다. 여기서 제외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알아듣고, 믿고 따르기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의 은총에서 제외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은총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임박한 하나님 나라에서 제외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세리와 죄인들도 여기서 제외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 나라에 자신의 운명을 맡기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 사람은 바로 본문이 말하는 ‘내 양’입니다. 오늘 본문 요 10:28절이 가리키듯이 예수님이 영생을 주겠다고 약속한 ‘내 양’입니다.
당신의 정체가 무엇인지 밝히라는 유대인의 질문이 바로 영생과 연관됩니다. 즉 당신이 사람에게 영생을 줄 수 있는 존재냐 하는 질문입니다. 요한복음 공동체를 비롯해서 초기 기독교인들은 바로 그 사실을 명백하게 인식하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에게 영생이 있기에 그리스도가 분명하다고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영생의 출처라는 말은 그가 생명의 창조자인 하나님과 하나라는 뜻입니다.(30절) 예수님이 하나님과 하나라는 사실은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선포에서 증명됩니다. 이 두 가지 사실은 서로 순환되면서, 동시에 긴장관계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 안에서 행하셨기에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원래 하나님과 하나이기에 온전히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런 권능을 행사할 수 있었습니다. 바로 이 두 가지 사실이 예수님의 정체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하나는 예수님이 임박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이 하나님과 하나라는 사실입니다. 이 두 사실이 예수님의 인격에서 하나가 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사건은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지금 우리는 부활절 넷째 주일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2천 년 전 나사렛 목수의 아들이었던 예수님에게서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졌습니다.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입니다. 인류 역사에서 이런 일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우주의 역사에서 유일회적인 사건이기에 이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예수님에게 일어난 부활을 대체할 수도 없고, 비교할 수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행하실 수 있는 창조 사건이었습니다. 창조가 완성될 종말에 그 부활의 실체가 완전히 드러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의 ‘주’, 생명의 주, 영생의 주이십니다. 이 사실을 믿는다면 이 세상의 그 어떤 힘도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와 갈라놓을 수 없습니다. (부활절 넷째주일, 4월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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