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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4: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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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한규 목사 |
참고 : | 이한규 http://www.john316.or.kr |
요한복음(28) 제한이 없는 광폭 사랑 (요 4:1-9)
<예수님을 깊이 만나십시오 >
이 세상에 인간의 마음을 완전히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명예를 얻으면 만족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인간이 명예를 얻고 더욱 고독해질 때도 많습니다. 재물을 얻으면 만족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예로부터 “천석꾼은 천 가지 근심이 있고 만석꾼은 만 가지 근심이 있다.”고 했습니다. 인기를 얻으면 만족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세계적인 인기를 얻고 마음만 먹으면 육적인 욕망을 다 채울 수 있었던 마릴린 몬로도 자살했고 요새도 유명 연예인들이 심심찮게 자살하는 것은 인기가 영혼의 목마름을 해소할 수 없다는 반증입니다.
사람은 예수님을 만날 때 비로소 안식을 찾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수가성 여인의 모습이 그 사실을 잘 말해줍니다. 예수님이 수가성 우물가에 않았을 때가 제 육시쯤 되었는데 그때 그녀가 물을 길러 왔습니다(6절). 제 육시란 오늘날의 시간으로 정오입니다. 왜 그녀는 정오의 뜨거운 태양을 감수하며 아무도 찾지 않을 때 고독하게 우물가에 왔습니까?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그녀는 사람들의 조롱하는 혀가 정오의 태양보다 더 뜨거움을 알았기에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우물가를 찾은 것입니다.
세상은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을 더 경험하며 사는 곳입니다. 그래서 세상에 대해 권태를 느끼고 스스로의 목숨을 끊기도 하고 술과 마약으로 자신을 세상에서 격리시키기도 합니다. 가정을 행복한 곳으로 생각하지 못해서 음지를 양지로 알고 찾아가는 허무한 인생이 생기는 이유도 그런 고독감 때문입니다. 그처럼 현대 사회는 두려움과 불안으로 병들어 죽어가면서 사마리아 여인처럼 짙은 고독감을 느낍니다.
그런 고독한 여인에게 예수님이 말을 걸어오셨습니다(7절). 그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고독을 크게 느끼는 현대인들에게는 예수님의 음성이 더욱 필요합니다. 그 음성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 음성은 성경을 통해 들려질 수도 있고 강단으로부터 들려질 수도 있습니다. 그 음성이 때때로 이해되지 않아도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현대인이 고독감을 탈출할 수 있는 최적의 길은 예수님을 깊이 만나고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 제한이 없는 광폭 사랑 >
수가성 여인은 ‘지역감정으로 마음의 상처를 당한 여인’이었습니다(7-9절).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은 원래 같은 동족이었지만 한때 사마리아지역이 이방인들에게 점령되어 이방인의 피가 섞였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과 상종치 않았습니다. 그런 지역감정의 피해의식 때문에 그녀는 말을 걸어오는 유대인인 예수님의 접근을 이상히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지역감정이란 벽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의 잃어버린 영혼도 사랑했고 사마리아의 잃어버린 영혼도 사랑했습니다.
왜 지역감정이 생겼습니까? 나누기를 좋아하는 인간의 습성 때문입니다. 손에 돈이 들어오면 사람들은 사람을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로 나누고 학력이 높으면 사람들은 사람을 ‘학력이 높은 자’와 ‘학력이 낮은 자’로 나눕니다. 그러나 사람을 거절하는 기독교는 성립될 수 없습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애정이 어느 날 하나님으로 하여금 인간 예수님이 되게 했습니다.
이기심과 비교할 때 애향심은 아름다운 미덕입니다. 고향도 사랑하고 고향의 복리증진을 위해 일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박애심과 비교해 볼 때 애향심은 큰 결점이 되기도 합니다. 애향심은 확대된 이기심일 수 있습니다. 애향심이 남을 배타하는 지역감정으로 흐르면 그것은 큰 불의가 됩니다. 애향심의 이름으로 수많은 범죄가 저질러지고, 가짜 애향심에서 시기, 질투, 증오, 악의, 보복심 등이 생기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후손들에게 가장 남기지 말아야 할 가장 부끄러운 유산 중의 하나가 ‘지역감정’입니다.
‘나 중심의 사고체계’는 차이를 차별로 떨어뜨리지만 ‘우리 중심의 사고체계’는 차이를 개성으로 끌어올립니다. 이제 ‘나’ 중심의 좁은 사고체계를 벗어나 ‘우리’ 중심의 넓은 사고체계를 세우십시오. 사마리아 여인을 향한 예수님의 관심을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의 동정심과 관심은 제한이 없는 광범위한 것이었습니다. 그처럼 제한이 없는 광폭사랑으로 지역감정의 벽을 허무는 선봉장이 되십시오.
ⓒ 글 : 이한규http://www.john316.or.kr
이 세상에 인간의 마음을 완전히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명예를 얻으면 만족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인간이 명예를 얻고 더욱 고독해질 때도 많습니다. 재물을 얻으면 만족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예로부터 “천석꾼은 천 가지 근심이 있고 만석꾼은 만 가지 근심이 있다.”고 했습니다. 인기를 얻으면 만족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세계적인 인기를 얻고 마음만 먹으면 육적인 욕망을 다 채울 수 있었던 마릴린 몬로도 자살했고 요새도 유명 연예인들이 심심찮게 자살하는 것은 인기가 영혼의 목마름을 해소할 수 없다는 반증입니다.
사람은 예수님을 만날 때 비로소 안식을 찾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수가성 여인의 모습이 그 사실을 잘 말해줍니다. 예수님이 수가성 우물가에 않았을 때가 제 육시쯤 되었는데 그때 그녀가 물을 길러 왔습니다(6절). 제 육시란 오늘날의 시간으로 정오입니다. 왜 그녀는 정오의 뜨거운 태양을 감수하며 아무도 찾지 않을 때 고독하게 우물가에 왔습니까?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그녀는 사람들의 조롱하는 혀가 정오의 태양보다 더 뜨거움을 알았기에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우물가를 찾은 것입니다.
세상은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을 더 경험하며 사는 곳입니다. 그래서 세상에 대해 권태를 느끼고 스스로의 목숨을 끊기도 하고 술과 마약으로 자신을 세상에서 격리시키기도 합니다. 가정을 행복한 곳으로 생각하지 못해서 음지를 양지로 알고 찾아가는 허무한 인생이 생기는 이유도 그런 고독감 때문입니다. 그처럼 현대 사회는 두려움과 불안으로 병들어 죽어가면서 사마리아 여인처럼 짙은 고독감을 느낍니다.
그런 고독한 여인에게 예수님이 말을 걸어오셨습니다(7절). 그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고독을 크게 느끼는 현대인들에게는 예수님의 음성이 더욱 필요합니다. 그 음성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 음성은 성경을 통해 들려질 수도 있고 강단으로부터 들려질 수도 있습니다. 그 음성이 때때로 이해되지 않아도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현대인이 고독감을 탈출할 수 있는 최적의 길은 예수님을 깊이 만나고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 제한이 없는 광폭 사랑 >
수가성 여인은 ‘지역감정으로 마음의 상처를 당한 여인’이었습니다(7-9절).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은 원래 같은 동족이었지만 한때 사마리아지역이 이방인들에게 점령되어 이방인의 피가 섞였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과 상종치 않았습니다. 그런 지역감정의 피해의식 때문에 그녀는 말을 걸어오는 유대인인 예수님의 접근을 이상히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지역감정이란 벽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의 잃어버린 영혼도 사랑했고 사마리아의 잃어버린 영혼도 사랑했습니다.
왜 지역감정이 생겼습니까? 나누기를 좋아하는 인간의 습성 때문입니다. 손에 돈이 들어오면 사람들은 사람을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로 나누고 학력이 높으면 사람들은 사람을 ‘학력이 높은 자’와 ‘학력이 낮은 자’로 나눕니다. 그러나 사람을 거절하는 기독교는 성립될 수 없습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애정이 어느 날 하나님으로 하여금 인간 예수님이 되게 했습니다.
이기심과 비교할 때 애향심은 아름다운 미덕입니다. 고향도 사랑하고 고향의 복리증진을 위해 일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박애심과 비교해 볼 때 애향심은 큰 결점이 되기도 합니다. 애향심은 확대된 이기심일 수 있습니다. 애향심이 남을 배타하는 지역감정으로 흐르면 그것은 큰 불의가 됩니다. 애향심의 이름으로 수많은 범죄가 저질러지고, 가짜 애향심에서 시기, 질투, 증오, 악의, 보복심 등이 생기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후손들에게 가장 남기지 말아야 할 가장 부끄러운 유산 중의 하나가 ‘지역감정’입니다.
‘나 중심의 사고체계’는 차이를 차별로 떨어뜨리지만 ‘우리 중심의 사고체계’는 차이를 개성으로 끌어올립니다. 이제 ‘나’ 중심의 좁은 사고체계를 벗어나 ‘우리’ 중심의 넓은 사고체계를 세우십시오. 사마리아 여인을 향한 예수님의 관심을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의 동정심과 관심은 제한이 없는 광범위한 것이었습니다. 그처럼 제한이 없는 광폭사랑으로 지역감정의 벽을 허무는 선봉장이 되십시오.
ⓒ 글 : 이한규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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