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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본문 : | 요9:1-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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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 이정원 목사 |
| 참고 : | 참사랑교회 http://charmjoun.net |
참사랑교회 2007·06·02
지난 주 연초에 서울 모 교회에 부임한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교회가 새로워지며 부흥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장 기뻐해야 할 장로님들과 권사님들이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담임목사는 그들의 반대와 압력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왜 가장 기뻐하며 적극적으로 협조해주리라고 기대했던 장로님들이 그렇게 나왔을까요?
오늘 본문에 이와 비슷한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날 때부터 소경되었던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 일입니까? 이 사람은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자기가 보게 된 것을 기뻐하며 축하해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정반대의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 사람을 소환하여 심문했습니다. 그들은 기뻐하며 축하해주기는커녕 그 일이 잘못되기나 한 것처럼 그 사람을 핍박했습니다. 그리고 단지 그 사람이 예수님을 믿었다는 사실 때문에 이 사람을 출교시켰습니다. 당시 출교는 사회에서 매장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예상치 못했던 핍박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대로, 예수님께서는 날 때부터 소경이었던 이 사람에게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눈에 발라주신 후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이 사람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실로암 못에 가서 눈을 씻고 고침을 받았습니다. 얼마나 감격스럽고 기뻤겠습니까?
날 때부터 소경이었던 사람이 이렇게 고침을 받아 볼 수 있게 되었을 때, 주변의 사람들은 이 사람을 두고 논쟁을 벌였습니다. “이웃 사람들과 및 전에 저가 걸인인 것을 보았던 사람들이 가로되 이는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 혹은 그 사람이라 하며 혹은 아니라 그와 비슷하다 하거늘”(8-9절) 이 사람은 자기가 바로 그 사람이며, 어떻게 해서 보게 되었는지를 분명하게 설명했습니다. “대답하되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11절)
이 사람은 너무 기뻐서 예수님께서 자신을 고쳐주신 것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열심히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기쁨과 감격은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이 일로 인하여 그를 핍박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날 때부터 소경이었던 이 사람을 고쳐주신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을 소환하여 심문했습니다. “저희가 전에 소경되었던 사람을 데리고 바리새인들에게 갔더라 바리새인들이 그 어떻게 된 것을 물으니 가로되 그 사람이 진흙을 내 눈에 바르매 내가 씻고 보나이다 하니”(13,15절)
당사자가 이렇게 분명히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은 아직도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 사람의 부모를 소환하여 대질심문을 벌였습니다. “유대인들이 저가 소경으로 있다가 보게 된 것을 믿지 아니하고 그 부모를 불러 묻되 이는 너희 말에 소경으로 났다 하는 너희 아들이냐 그러면 지금은 어떻게 되어 보느냐”(18-19절)
고침을 받은 사람은 기쁨과 감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갑자기 압력과 핍박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왜 이 사람이 고침 받은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을까요? 왜 그 사람을 불러다가 심문했을까요? 왜 분명한 사실을 확인하고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이 사람을 핍박했을까요? 왜 분명한 사실을 덮어버리거나 왜곡시키려고 혈안이 되었을까요?
안식일을 범한 사람
유대인들은 당사자와 그의 부모를 소환하여 심문한 결과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적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을 통하여 그분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것을 깨닫고,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믿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했더라면 더 이상 문제될 것이 아무것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적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신 것을 문제 삼았습니다. “예수께서 진흙을 이겨 눈을 뜨게 하신 날은 안식일이라”(14절)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기로 유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율법 중에서도 안식일 계명을 특히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안식일을 잘 지키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며, 안식일을 어기면 저주를 받는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율법준수는 본질을 버리고 외식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을 엄격히 잘 지키기 위해 울타리 율법을 만들었습니다. 안식일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진흙을 이겨 소경의 눈에 발라 고쳐주셨습니다. 유대인들이 보기에 그것은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바리새인들은 큰 딜렘마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을 어기는 것은 큰 죄이며, 안식일에 일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결코 복과 은혜를 주시지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그런 일을 하셨는데도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이 일을 놓고 논쟁을 벌였습니다. “바리새인 중에 혹은 말하되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서 온 자가 아니라 하며 혹은 말하되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겠느냐 하여 피차 논쟁이 되었더니”(16절)
어떻게 이런 일이?
날 때부터 소경이었던 이 사람이 눈을 떠서 보게 되었을 때 가장 기뻐하며 축하해주어야 할 사람들은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당시 백성의 지도자요 목회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날 때부터 소경이 되어 평생 구걸하며 살았던 이 불쌍한 사람이 보게 된 사실을 전혀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기뻐하기는커녕 핍박하며 심지어는 출교시키고 말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일 때문에 자기들의 기득권과 위치가 흔들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당시 백성의 지도자로서 존경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율법과 신앙에 있어서 권위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그들의 죄와 잘못된 점들을 드러내시며 책망하셨습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놀라운 이적들을 행하셨습니다. 많은 백성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그분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은 예수님 때문에 자기들의 위치와 기득권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미워하고 핍박했던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일만 해도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날 때부터 소경이었던 이 사람을 불쌍히 여기셔서 고쳐주셨습니다. 이런 일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이적을 행하신 것은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모든 죄인들이 그분을 믿고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은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악의적으로 비난하고 욕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렇게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이적을 보고 예수님을 더 따르게 되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것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트집을 잡고 늘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진흙을 이겨 소경의 눈에 바르신 것은 안식일을 범한 것이라고 비난했습니다. 안식일을 어긴 사람은 죄인이지 결코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일 수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적이 너무 분명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께로 쏠리고 있었습니다. 고침을 받은 그 사람이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분명하고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에게는 고침을 받은 이 사람이 골칫거리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 사람을 다시 소환하여 자기는 본래 소경이 아니었다고 하던가, 아니면 지금도 다 낫지 못해서 제대로 보지 못한다고 하던가, 자기 입으로 예수님을 안식일을 어긴 죄인이라고 말하게 하려고 압력을 가했습니다. “이에 저희가 소경되었던 사람을 두 번째 불러 이르되 너는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라 우리는 저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24절)
한 가지 아는 것
그러나 바리새인들의 압력과 핍박에도 이 사람은 당당하고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25절) 이 사람의 대답은 자기 부모들의 대답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이 사람의 부모는 바리새인들을 두려워하여 대답을 회피했습니다. “그 부모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가 우리 아들인 것과 소경으로 난 것을 아나이다 그러나 지금 어떻게 되어 보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저에게 물어보시오 저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20-21절) 그의 부모는 바리새인들에게 출교 당하게 될 것을 두려워하여 이렇게 얼버무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예수님께서 자기를 고쳐주신 것을 분명하게 증거했습니다.
어떻게 이 사람이 바리새인들의 압력과 핍박을 두려워하지 않고 이렇게 담대하게 대답할 수 있었을까요? 이 사람은 주님의 말씀을 처음 들었을 때 충격을 받았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3절) 다른 사람들에게서는 한 번도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사람이 본인이나 부모의 죄 때문에 저주를 받아 나면서부터 소경이 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사람은 지금까지 그런 말을 수도 없이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죄 때문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들었을 때 이 사람은 충격을 받고 감격했습니다. “나처럼 비참하고 저주 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일에 쓰임을 받을 수 있다니!” 그래서 이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에 무조건 순종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자기 눈에 바르실 때 이 사람은 조금도 화를 내거나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가서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을 때도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이렇게 볼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유대인들은 자기가 고침을 받아 보게 된 것을 좋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기의 눈을 고쳐주신 예수님을 죄인이라고 비난했습니다. “이에 저희가 소경되었던 사람을 불러 두 번째 이르되 너는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라 우리는 저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24절) 바리새인들은 이 사람에게 예수라는 그 사람이 너를 고쳐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고쳐주셨다고 말하라고 압력을 가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라는 그 사람은 죄인이라고 말하라고 강요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그를 고쳐주신 사실을 부인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바리새인들의 요구를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그리고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은 보는 그것이니이다”(25절)
이 사람은 다시 과거로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구걸하면서 비참하게 살던 과거의 삶은 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누가 뭐래도 그는 이제 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그에게 임한 것입니다. 그는 과거에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 그를 무한히 사랑하시며 너무나도 귀하게 여기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제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를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자기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와 기적을 증거하며 살아가는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절대로 이 축복을 포기할 수 없고 놓칠 수 없었습니다.
놓칠 수 없는 한 가지
이 사람은 바리새인들의 핍박과 위협에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처음 들었던 주님의 말씀이 그를 사로잡았습니다.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그에게는 이 말씀이 너무나도 귀했습니다. 그는 그분의 말씀에 순종한 결과 눈을 떴고 말씀의 능력을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누가 뭐래도 자신을 고치신 분은 예수님이라고 담대하게 증거했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자기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 것만은 안다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그것만은 절대로 놓칠 수 없었습니다.
지난 27일 칸 영화제에서 영화 “밀양”에 출연했던 전도연씨가 여우주연상을 받았습니다. “밀양”은 이청준의 소설 <벌레 이야기>를 영화로 만든 작품입니다. 이 영화는 신앙과 고통과 구원의 문제를 다루었다는 점에서 우리의 관심을 끕니다. 이 영화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대목을 살펴봅시다. 신애라는 주인공은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고, 아들을 데리고 남편의 고향인 밀양으로 내려가 피아노 학원을 열고 살아갑니다. 그러던 중 아들이 유괴를 당하고 결국 죽게 됩니다. 절망하던 신애는 교회에 나가 평안을 얻었고 전도에 열심을 냅니다. 그러다가 교회에서 아들을 죽인 유괴범을 용서하러 가겠다고 말합니다.
신애는 꽃다발을 들고 교도소에 가서 유괴범에게 주님의 말씀과 사랑을 전하러 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정작 유괴범은 이미 주님에게 모든 것을 용서받았다고 말하며 평안한 모습을 보입니다. 그 말을 들은 신애는 허탈해 하며 주저앉습니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교회에 나가지 않게 됩니다. 교회에 나가 얻었던 구원과 평안이 다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대목은 바로 여기입니다.
그렇다면 신애가 아들이 죽은 후 교회에 나가서 얻은 구원과 평안은 과연 껍데기에 불과한 것이었을까요?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과 평안은 허구에 불과하단 말입니까? 물론 이 영화가 기독교를 부정적으로 비난하기 위해서 그런 상황을 설정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 영화는 현실적으로 우리에게 이렇게 심각한 문제와 도전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언젠가, 과거에 하나님을 잘 믿었는데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데려가신 후로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을 만나본 적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고통과 슬픔은 우리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클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가 받은 구원과 하나님의 은혜를 무효로 만들 수 있을까요?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문제와 관련해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고침 받은 소경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이 사람은 무슨 일이 있어도 자기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를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위협과 핍박도 그를 굴복시킬 수 없었습니다. 그는 출교를 당하면서도 자신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총을 강하게 증거했습니다. 그것은 목숨과도 바꿀 수 없을 정도로 소중하고 귀한 것이었습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를 체험한 성도들은 죽음 앞에서도, 온 세상이 그를 대적해온다 해도 절대로 물러서지 않습니다.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할지라도 내가 오히려 안연하리로다”(시27:3) 이 사람들이 얻은 평안과 확신은 그 어떤 위협이나 절망스런 일들도 흔들 수 없습니다.
당신은 오늘 당신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은혜의 말씀을 굳게 붙잡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이제 무슨 일이 있어도 흔들리지 마십시오. 이 고침 받은 소경처럼 어떤 위협과 어려움을 당한다 해도 당신의 믿음을 절대로 포기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구원해주신 그 은혜는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고, 무효화시킬 수 없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8:3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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