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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본문 : | 요10: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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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 이정원 목사 |
| 참고 : | 참사랑교회 http://charmjoun.net |
참사랑교회 2007·06·16
은퇴하게 되면 시골에 살면서 양을 꼭 길러보고 싶습니다. 어렸을 적에도 젖양을 길러 본 적이 있고, 시골에서 목회할 때는 염소를 길러 본 적이 있습니다. 염소나 양이 막 낳은 새끼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세상에서 그 보다 더 귀엽고 사랑스런 짐승은 없을 것입니다. 강아지나 고양이 새끼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입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인물인 다윗은 소년 시절에 양을 치던 목동이었습니다. 양을 치면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목자가 되신다는 참으로 은혜로운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다윗은 여호와께서 자기의 목자시기 때문에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시23:1-2) 사람들이 임종할 때 가장 듣고 싶어 하는 말씀이 바로 시편 23편이라고 합니다. 이 시는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라는 말로 끝납니다. 얼마나 귀하고 은혜로운 말씀입니까?
시편 100편은 우리 성도가 하나님의 양이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시100:3) 양은 성경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동물이며, 성경에는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를 양으로 비유한 곳이 많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나님 백성인 우리의 목자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양의 우리
팔레스틴에서는 목자들이 양떼를 이끌고 다니면서 돌보았습니다. 그러다가 저녁이 되면 양들을 몰고 우리로 돌아옵니다. 양의 우리는 대개 돌담으로 둘려 있고 문이 하나 있었습니다. 부자들은 개인적인 우리를 가지고 있었지만, 대개는 공동으로 양의 우리를 사용했습니다. 저녁이 되면 목자들은 우리의 문으로 양들을 다 들여보냅니다. 그러면 문지기가 밤새도록 양들을 지킵니다.
그런데 밤에 양들이 우리에서 쉬고 있을 때 간혹 도둑이 양을 훔치러 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문은 문지기가 지키고 있기 때문에 도둑은 담을 넘어서 들어갑니다.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담을 넘어 들어가는 자는 모두 도둑입니다. 도둑은 양을 쫓아다닙니다. 양들은 자기 목자가 아니기 때문에 무서워하며 이리저리 피합니다.
다음 날 아침이 되면 목자들은 한 사람씩 나와서 문지기의 확인을 받고 자기 양을 부릅니다. 목자는 일일이 양의 이름을 불러냅니다. 그러나 양이 수백 마리나 된다면 한 마리씩 일일이 확인하기는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목자가 양들을 부르면 자기 양들이 전부 그 목자 앞으로 달려옵니다. 자기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는 것입니다. 얼마나 신기합니까? 여러 목자의 양들이 함께 밤을 보냈지만, 양들은 오직 자기 목자의 음성만 듣고 이렇게 달려오는 것입니다. 다른 목자를 따라가는 양은 없습니다. 이렇게 양들이 다 모이면 목자는 앞장서서 초원을 향해 갑니다. 그러면 양들은 우르르 자기 목자를 따라갑니다. 얼마나 멋있고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이 비유가 뜻하는 것
예수님께서는 당시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믿지 않은 것을 두고 이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의 선생들이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가르치던 것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마7:28-29) 예수님께서는 구원의 길을 분명하게 가르쳐주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놀라운 이적들을 행하셨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아무리 바른 진리를 선포하시며 권세 있는 교훈을 가르치셔도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바리새인들을 따라갔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목자가 아니라 절도요 강도였습니다. 그들은 문으로 들어오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 들어온 자들이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백성의 목자로 세우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당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만이 참 목자이셨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참 목자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왜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을까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비유는 그 이유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이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은 이유는 그들이 주님의 양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따르고 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하나님께 보내심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거짓 선생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버젓이 목자 행세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하여 하나님께 보내심을 받지도 않았으면서 이렇게 목자 행세를 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경고를 하셨던 것입니다.
이 비유는 바리새인들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경고이기도 했습니다. 양이 목자의 음성을 듣지 않고 다른 데로 가서 죽게 되면 그것은 누구의 책임입니까? 목자의 음성을 듣지 않은 양의 책임인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주님께서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셔도 믿지 않았습니다.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아무리 불러도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멸망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책임은 스스로 져야 했습니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는다.
양은 스스로는 살아갈 수 없는 짐승입니다. 양은 시력이 나쁘고 잘 속으며 방향 감각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먹이나 물도 잘 찾지 못하며, 앞에 낭떠러지가 있어도 그냥 앞으로 가다가 떨어져 죽는다고 합니다. 게다가 방어능력이 없어서 맹수들에게서 스스로를 지켜낼 수도 없습니다.
이러한 양이 잘 살아가려면 한 가지만 제대로 하면 됩니다. 그것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목자는 이러한 양을 꼴이 풍성한 초원으로 인도하는가 하면, 물가로 데려가서 물을 마시고 쉬게 해줍니다. 맹수가 와서 양을 해치려고 하면 맹수와 싸워 양을 지켜줍니다. 그러므로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라가기만 하면 염려 없이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양은 주인의 음성을 놀라울 정도로 정확이 알아듣습니다. 마치 집에서 기르는 개들이 주인의 음성을 잘 알아듣는 것과 같습니다. 개는 주인의 음성만이 아니라 발자국 소리까지도 정확하게 분별해냅니다. 주인이 집에 돌아오면 개가 얼마나 반갑게 맞아줍니까? 아마도 이런 맛에 아파트에서까지도 개를 기르는 것 같습니다. 간혹 애견을 데리고 나와서 산책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강아지들이 괜히 지나가는 사람을 따라갈 때가 있습니다. 그때 주인이 부르면 얼른 주인에게로 달려갑니다. 양도 이처럼 주인의 음성을 정확하게 알아듣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양들은 목자가 아닌 다른 사람을 따라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아무리 불러도 예수님께로 오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권세 있는 말씀을 듣고, 그렇게 많은 이적을 보고도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목자가 아닌 바리새인들을 따라갔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의 양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목자이신 주님께 나오라
이 비유는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크고 어려운 것을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단지 우리가 주님의 양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양은 스스로 주인을 위해 큰일을 하거나, 주인이 어려운 일을 당하면 와서 지켜주는 존재가 아닙니다. 오히려 양은 목자의 도움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양이 사는 길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라가는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양은 자기가 목자의 양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목자를 따르기만 하면 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가 주님의 양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주님께로 오기를 원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를 도와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주님의 도우심을 받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목자이신 주님께로 와야 합니다. 주님께 와서 돌보심을 받고 보호하심을 받는 사람은 아무것도 염려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게 됩니다. 다윗은 수많은 환난과 고통 가운데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뉘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23:1-2, 4)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내가 오히려 안연하리로다”(시27:3)
우리의 목자이신 주님은 우리의 모든 필요를 자세히 아시며 얼마든지 채워주시는 분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셨고, 우리가 당하는 모든 연약함과 슬픔과 고통도 다 겪어보셨습니다. 그러므로 얼마든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얼마든지 채워주십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4:15-16)
당신이 주님의 양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음성을 듣고 속히 목자이신 주님께로 나아가 주님의 보호와 도우심을 받으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속히 돌이켜 주님을 따르라
어렸을 적에 젖양을 끌고 다니던 일이 기억납니다. 학교가 끝나면 양을 매 둔 곳에 가서 같이 있다가 저녁이 되면 양을 끌고 집으로 가곤 했습니다. 양은 순하고 말을 잘 듣는 것 같지만, 때로는 고집을 부리고 제멋대로 굴 때도 있습니다. 한 번은 하루 종일 들에서 풀을 뜯어 먹은 양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녀석이 자꾸만 남의 채소밭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어찌나 힘이 샌지 당해낼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그 녀석은 기어이 남의 채소밭으로 들어가 정성들여 가꾸어 놓은 귀한 채소들을 유린하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화가 나던지 막대기를 가지고 가서 사정없이 막 때려주었습니다.
우리 중에는 주님의 양이면서 다른 곳을 기웃거리면서 주님을 따라가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님의 양이라면 마땅히 주님의 음성을 듣고 따라가야 하는데, 자신의 고집대로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목자이신 주님의 음성을 듣고도 순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고집을 부리고 제 길로 가는 양은 살 수 없게 됩니다. 지금은 그것이 쉽고 재미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곧 망하는 길입니다. 그러다가 맹수에게 잡아먹힐 수도 있고,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가 이러한 양들처럼 각기 제 길로 나갔다고 말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6)
우리의 목자이신 주님께서는 이렇게 각기 제 길로 나가서 죽게 된 우리를 구원하시 위해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담당하시고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각기 제 길로 나간 우리를 위해서 죽으실 것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14-15절) 우리의 목자이신 주님께서는 제 멋대로 가서 죽게 된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또 다시 고집을 부리고 제 멋대로 살아서야 되겠습니까?
오늘 주님의 말씀을 외면하고 자기 맘대로 사는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의 목자이신 주님께로 돌아오십시오. 양은 당연히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라가야 합니다. 이제 주님의 말씀을 지켜 순종하는 성도가 되십시오. 그 길이 사는 길이요, 생명을 얻는 길입니다. 주님을 따라가면 좋은 꼴을 얻고 풍성한 삶을 살게 됩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10하)
자발적으로 주님을 따르라
오늘 본문에 보면 목자가 양을 인도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 오되”(4절) 이것은 소나 염소를 몰고 가는 모습과는 정반대입니다. 소나 양은 뒤에서 몰고 갑니다. 그런데 목자는 양들을 뒤에서 몰고 가지 않고 앞장서서 걸어갑니다. 그러면 양들이 목자를 따라갑니다.
우리의 목자이신 주님께서는 우리를 억압하시거나 억지로 끌고 가지 않으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고난을 당하시고 자신의 몸을 버려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본을 보이시며 앞장서서 가시면서 우리가 자발적으로 주님을 따라오게 하셨습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2:21)
주님께서 우리에게 본을 보이셨고, 우리를 위해 죽으셨으므로 우리는 자발적으로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아직도 억지로 교회에 나오는 성도가 있습니까? 이제는 자발적으로 기꺼이 나오십시오. 아직도 억지로 말씀을 묵상하는 성도가 있습니까? 이제는 기쁘게 하십시오. 아직도 억지로 기도하는 성도가 있습니까? 이제는 기도하는 시간이 당신에게 가장 기쁜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직도 억지로 헌금하는 성도가 있습니까? 이제는 주님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기꺼이 드리는 성도가 되십시오. 이제부터는 마지못해 신앙 생활하는 성도가 한 사람도 없기를 바랍니다.
목회하면서 보람과 좌절을 같이 느끼곤 합니다. 성도들이 믿음이 자라서 자발적으로 열심을 낼 때 얼마나 기쁘고 고마운지 알 수 없습니다. 지난 주일에 몇몇 성도들에게 저녁예배에 나오라고 했더니, 그 말을 들은 성도들이 모두 저녁예배에 참석했습니다. 얼마나 반갑고 기뻤는지 모릅니다. 지난 체육대회 때는 성도들이 다 알아서 모든 것을 준비하고 열심히 참여했습니다. 주님께서 정말 기뻐하셨으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말씀을 전하고 개인적으로 권면해도 듣지 않는 성도가 있습니다. 예수 믿은 지 수십 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에서 중직을 맡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알아서 기꺼이 하지 못하는 성도들도 있습니다. 한 때는 그런 모습을 보고 무력감과 좌절감에 빠졌던 적도 있었습니다. 이제는 억지로 하는 성도가 없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셨고, 우리에게 본을 보이시며 앞서 가시는 우리의 목자이신 주님을 바라보며 자발적으로 따라가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우리의 목자시며 우리는 주님의 양입니다. 이보다 더 복된 일은 없습니다. 우리의 목자이신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모든 것을 다 예비해놓으시고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나의 모든 죄를 대속하셨습니다. 당신의 피로 값을 치르고 나를 구원하셨습니다. 나를 위해 하나님 나라를 예비해주셨습니다. 주님은 세상 끝 날까지 나를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주님만 따라가면 길을 잃지 않게 될 것입니다. 주님만 따라가면 좋은 꼴과 생수를 얻게 될 것입니다. 주님만 따라가면 풍성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내 주장과 고집을 버리고, 세상적이고 정욕적인 삶을 떠나, 자발적으로 우리 목자이신 주님을 따라가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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