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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수20: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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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필곤 목사 |
참고 : | 열린교회 http://www.yeolin.or.kr (용인) |
열린교회/김필곤 목사/2008.2.17
어느 시대,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인류의 공통된 꿈은 이상적인 사회에서 행복하게 사는 것일 것입니다. 시대마다 유토피아를 꿈꾸어 왔습니다. 플라톤은 이상국가를 꿈꾸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허균의 홍길동 전에서 율도국이라는 이상의 나라가 나옵니다. 사회 주의 공동체 주의도 일종의 이상나라를 꿈꾸는 과정 속에서 나왔습니다. 자유, 평등, 박애가 실현되면 이상적인 나라가 될 줄로 생각했습니다. 기술문명과 경제 발전이 이루어지면 이상적인 나라가 될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삶의 질이 점점 더 좋아 지고 있습니까? 함께 더불어 행복한 나라가 되어가고 있습니까? 늘 주기도문으로 기도하는 우리가 꿈꾸는 하나님 나라는 어떤 것입니까? 우리가 계속적으로 살펴보고 있는 젓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지식을 조금이라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하나님이 제정하신 한 제도를 통해 진정 가나안 땅의 복이 무엇인지를 알아 보려고 합니다. 이제 정복(1-12)과 기업 분배가 끝이 났습니다(13-19).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땅 분배의 최종 부분입니다(13-21). 가나안 땅을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 주시겠다는 약속이(창12:7) 690년 만에 성취되었습니다(창15:13). 모든 사람들이 함께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경제적 평등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의식주의 안정을 취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인간이 진정 젓과 꿀이 흐르는 행복을 누릴 수 있을까요? 이제 하나님께서는 한 가지 제도를 통해 진정 가나안의 복이 무엇인지를 알려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땅 분배가 끝나자 마자 여호수아에게 모세에게 주셨던 도피성 설정(민35:9-34; 신19:1-3) 명령을 다시 해 주고 있습니다. 이 도피성 제도는 가나안 땅에서 펼쳐질 여호와의 새로운 사회를 위한 계획의 중요한 청사진 중 하나입니다. 여호수아에서는 이것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상징성과 중요성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폭력이 난무하는 사악한 가나안 사회와는 달리 여호와의 새로운 사회에 대한 이상이 무엇인지를 도피성 제도를 통해 하나님은 알려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1. 왜 하나님께서 도피성을 만들라고 하고 있습니까?(1-3)
3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부지 중에 오살한 자를 피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부지중에'('비쉬가가')라는 말은 '과실로', '실수로', '알지 못한 채'라는 뜻입니다. 부지중 오살한 자는 원한이 없이 우연히 사람을 밀거나, 기회를 엿보지 않고 무엇을 잘못 던져 사람을 죽인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민 35:22-23). 참으로 행복한 사회가 되려면 공의, 정의가 시행되어야 합니다. 공의의 하나님이 사람을 죽이면 어떻게 하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은 피의 보수법을 만들었습니다. 同種報復法입니다. 탈리오 법칙입니다.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 갑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세기를 통해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 (창 9:6)”라고 말씀해 주었습니다. 출애굽기에서는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데운 것은 데움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 (출 21:23-25)”
그런데 가나안 땅을 다 주시고 이제 그곳에 참으로 젓과 꿀이 흐르는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 주신 제도는 이것보다 도피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외 규정을 통하여 공의의 하나님이시지만 사랑의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이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참으로 행복하게 살려면 해결해야 할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부지 중에 오살한 자의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도피성을 건립하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피의 보수자(고엘)는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친족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살해자를 죽일 의무가 있는 사람입니다. 이들이 복수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적의 없이 실수로 죽인 사람은 복수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의 죄를 용서받고 생명을 보존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말씀하시는 도피성(미클라트)이라는 제도입니다. 단순하게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사회 보장제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인이 죄를 용서받고 가나안 복지에서 살 수 있는 길을 보여주는 제도입니다. 이것은 무엇으로 가능합니까? 도피성을 만드시는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피난처가 되시는 것입니다. 피할 길을 주신 하나님, 덮으시는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무고한 생명이 희생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외적 결과만 보시지 않으시고 중심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근본적으로 죄를 용서하기 위해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공의와 사랑을 동시에 성취한 것입니다.
이 도피성은 그리스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신구약 모두가 예수그리스도와 그 구속에 집중되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구약에 여러가지 의식들, 특별히 제사의식들, 그것도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양이나 염소, 소와 같은 짐승을 잡아서 그 동물의 머리에 안수하고 사람의 죄를 증가시키고 그리고 사람의 죄를 짊어지고 짐승이 죽음으로 인해서 사람의 죄가 용서함을 받게 됩니다. 그 짐승은 바로 우리를 위해 십사가에서 죽으실 어린 양 되신 예수그리스도를 보여주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것은 더 정확히 알 수 있는 것은 6절입니다. 도피성에 피한 사람이 자기 집에 돌아 갈 수 있는 때는 대제사장이 죽은 후입니다. 대제사장이 죽으면 도피성에 피해 있던 자들에게 사면이 내려진다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이 죽어 사면령이 내려지면 보수자가 살인자를 만나도 보수의 원칙에 따라 피를 흘리게 할 수 없습니다.(민35:27,28) 대제사장의 죽음으로 대신 은총이 내려진 것입니다. 이 도피성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그림자요 상징인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대제사장 예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히9:11-15).
“저가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 (히 7:27)”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히 3:1)”
대제사장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히브리서 4:14에서 증거 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만인의 죄를 대신 속하기 위해 우리 인간들의 대제사장이 되신 분입니다.
우리 인간을 진정 행복하게 하지 못하는 것은 자유, 평등, 박애, 경제 문제가 아닙니다. 근본적인 것은 죄입니다. 그것들은 다 죄로 인해 파생된 문제입니다. 죄의 문제 해결없이는 아무리 좋은 땅, 아무리 자유로운 땅, 아무리 평등한 땅에 살도 진정 행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다 해결해 주었습니다. 우리가 사함 받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피하면 모두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 피하기만 하면 우리는 모두 다 용서함을 받을 수 있고 참으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낙원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도피성은 유일한 구원의 처소입니다.
(행4:12)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요14:6)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엡1:7에서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요일1:7에서는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 이이요"라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영생을 얻을 자는 심판에 이르지 않고 내 모든 죄가 동에서 서가 먼 것 같이 깨끗이 씻김을 받씁니다.
간음한 여인을 용서해 주었습니다. 십자가의 강도를 용서해 주었습니다.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고쳐 주실 때 단지 질병에 관심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그의 죄의 문제입니다.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마 9:2)”
그 사실을 안 베드로는 예수님을 전할 때 예수 믿고 복받으라고 하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행 2:38)”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의 문제가 해결되면 우리는 참 자유를 누릴 수 있고 어떤 상황에서도 참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히8;12 "내가 저희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저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했습니다.
히10:17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기억지 아니하리라"고했고,
사1:18 "너희 죄가 주홍같을 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라고 했습니다. 완전한 용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2. 어떻게 도피성을 운영하라고 했습니까?(4-6)
도피성은 그저 아무 절차 없이 운영된 것이 아닙니다. 도피성에 받아 주는 것은 몇 가지 절차가 있었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첫째 오살자는 도피성의 장로들에게 사고의 원인을 보고해야 합니다. 둘째 장로들은 사건을 심사 후 성에 살도록 합니다. 셋째 보수자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합니다. 넷째 보수자가 재판을 청구하면 회중 앞에서 재판을 받게 하였습니다. 도피성에 피신한 자는 두 번의 재판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한 번은 성에 들어갈 때(4절)이고, 또 한 번은 고의적인 것인가 아니면 실수인가를 분별하기 위해 회중이 모인 곳에서 재판을 받아야 했습니다(6). 다섯째 대제사장이 죽으면 오살자는 자유를 얻어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구속의 원리를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죽음으로 인해서 다른 한 사람의 범죄가 사하여지는 것입니다. 즉, 우리 예수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인해서 오늘 범죄했던 우리들이 다시 살아나게 되고 영생을 얻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도피성으로 피신해 온 자는 오직 대제사장의 죽음에 의해서만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다른 어떤 속전(續錢)으로도 그는 자유를 얻을 수 없었습니다(민 35: 26-28, 32). 이것은 대제사장의 죽음이 백성들의 피 흘린 죄에 대한 속죄물의 효력을 띠었음을 의미합니다. 장차 인류의 영원한 대제사장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한 모든 인류의 구원에 대한 모형이 되는 것입니다(민35:25). 여기서 강조하는 것이 있습니다. 오살자가 살 수 있는 진정한 길은 도피성 안에 있을 때라는 것입니다.
유월절 출애굽할 때 장자들이 다 죽었지만 붉은 피 안에 있는 이스라엘의 장자들이 죽지 않은 것처럼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영생함을 누리게 됩니다. 여리고성이 무너질 때 붉은 줄 안에 있는 자들은 구원을 받은 것처럼, 홍수로 모든 사람들이 죽어갈 때 방주 안에 있는 사람들은 구원을 받은 것처럼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참된 안식과 생명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참 생명이 있습니다. 만일 도피성으로 피신한 살인자가 대제사장이 죽기 전에 도피성 밖으로 나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민수기 35:26-27에 "그러나 그 살인자가 어느 때든지 그 피하였던 도피성 지경 밖에 나갔다 하자. 피를 보수하는 자가 도피성 밖에서 그 살인자를 만나 죽일지라도 위하여 피 흘린 죄가 없나니"
부지중에 살인하여 도피성으로 피신한 살인자는 도피성 안에 있을 때만 그의 생명을 보호받을 수 있었습니다. 삶의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인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참된 안식과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도피성을 떠난 살인자에게는 그를 죽이려는 복수자의 위험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도피성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 있는 인간에게는 무서운 죽음의 그림자가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5:5에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어서 요한복음 15:6에서는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풍성한 열매를 맺고 참된 평안을 누리는 삶이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가능한 것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예수 안에 있으면 피의 보복이라는 악순환을 방지할 수 있습니다. 참된 도피처가 됩니다. 회복이 될 수 있습니다. 실패자가 새롭게 됩니다.
도피성은 완전하게 보호하였습니다. 아무리 보수자가 찾아도 절대 오살자를 내놓지 않습니다. 필요한 것을 다 공급해 주었습니다.
도피성은 오살한 자를 받아들이고 난 다음에 오살한 자에게 필요한 것을 무료로 공급해줍니다. 그가 먹을 것, 입을 것, 특별히 거주지를 정해서 살게 합니다. 그렇습니다. 도피성 되신 예수님은 우리의 필요를 다 채워주십니다.
3. 어디에 도피성을 설치하라고 했습니까?(7-9)
도피성은 요단 동편과 서편에 각각 세 개씩 선정했습니다. 이미 모세에 의해 요단 동편에 세 개가 선정되었습니다(신4:43). 그리고 여호수아를 통해 요단 서편에 세 개를 더 선정하여 여섯 개를 만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요단강을 기점으로 하여 48개의 성읍 중 6곳을 택하였습니다. 요단강 동편에 3곳(베셀, 길르앗라못, 골란) 요단강 서편에 3곳(게데스, 세겜, 헤브론)이었습니다(7-8).
메튜 헨리(Matthew Henry)는 여섯 도피성들의 이름이 지니는 뜻을 그리스도와 연관시키고 있습니다. 게데스('거룩한 곳')는 성전 되신 그리스도를(요 2:19), 세겜('어깨')은 정사를 어깨에 멘 예수 그리스도를(사 9:6), 헤브론('교제')은 성도들을 하나님과 교제하게 하시는 그리스도를(고후 5:18, 19), 베셀('성채')은 성도들이 피할 성이 되시는 그리스도를(시 91:2), 라못('높은 곳')은 성도들을 높은 하늘에 앉게 해주시는 그리스도를(엡 2:6), 마지막으로 골란('기쁨')은 성도들에게 기쁨을 주시는 그리스도를(요 15:11) 상징한다고 해석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영해적으로 해석하지 않는다고 해도 이 도피성의 의미를 정확하게 할 수 있습니다. 도피성은 어떤 곳에 세웠습니까? 7절에서는 "구별하였고", 8절에서는 "택하였으니"라고 했습니다. 구별의 원리, 은혜의 원리를 말씀합니다. 이스라엘 전역 어디에서든지 32km 이내에 위치하여 있어서 부득이 도피성으로 피해 가야할 경우 하룻길 이내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에 위치해 있다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그 성을 향한 도로는 폭을 14m 이상이 되도록 넓게 잘 닦아 놓았으며 또 길을 잃지 않도록 미클라트(도피성)라는 안내판도 곳곳에 설치해 놓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9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사람만 피하는 곳이 아닙니다. 이방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인종과 신분 지위를 막논하고 누구에게 동일한 구원의 은총을 베풀어 주신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요14:6 행4:12) 교회는 예수님의 몸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도피성의 역할을 하여야 합니.
예수님은 열려 있는 구원의 문(요3:16-17)입니다. 도피성은 접근성이 좋고 높은 곳에 위치해 있으며 길을 잘 수리해놓고 방향표시를 정확하게 해놓았습니다. 도피성의 문은 항상 열려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가 참 도피성임을 알려주는 역할을 하는 곳입니다. 도피성은 레위에게 주어진 사역입니다. 우리 성도들에게 주어진 사역입니다. 도피성의 특징은 가는 길목마다 푯말이 있습니다. 항상 열려 있습니다. 누구나 받아들입니다 (9절)
수용과 박애의 원리가 통하는 곳입니다. 미클라트는 수용하다 받아들이다는 뜻입니다. 문제, 위험, 고난에 처한 사람 받아들이는 곳입니다. 레위지파에 의해 운영됩니다.
보호와 공급이 되는 곳입니다. 도피하는 자는 안전하게 보호받습니다. 충분한 방이 있어 넉넉한 공간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기본적인 삶이 보장된 곳입니다. 구체적인 필요를 공급하는 곳입니다.
접근의 용이성이 있는 곳입니다. 어디에서나 쉽게 접근할 수 있습니다. 누구나 접근할 수 있습니다.
보편성과 개방성이 있습니다. 유대인 뿐 아니라 이방인도 접근할 수 있습니다. 부자 동네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유와 해방이 있습니다.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은 한 완전한 자유가 보장됩니다. 대제사장으로 말미암아 완전한 해방이 있습니다.
사회적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깃든 곳입니다. 사회적 안전 장치이고 제도적인 사회보장제도입니다.
열린교회/김필곤 목사/2008.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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